◈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20:17~38 설교녹취, 정리
본문은 '밀레도의 작별'이라고 알려진 사건입니다.
이제 3차선교여행 막바지에,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가는 길에서,
사도바울은 에베소 근처를 지나면서, 그가 3년이나 밤낮 수고했던 에베소의 장로들을,
밀레도로 불러내어,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설교입니다. *에베소 남쪽 40킬로
▲사도행전에는 사도바울이 남긴 세 편의 설교가 있는데요.
1) 행13장에 기록된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에서 선포된 설교로
이것은 '유대인에게 선포한 설교'입니다. *1차여행 중
2) 행17장에 아덴에서 선포된 설교입니다.
이 설교는 '이방인들을 향하여 선포한 설교'입니다. *2차여행 중
3) 또 한 편의 설교는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밀레도의 작별 설교는,
'교회의 제자(성도)들을 향하여 선포된 설교'입니다. * 3차여행 중
◑20:17~19절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베소가 대표 도시)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바울이 가장 먼저 그가 언급하는 것은, 3년을 지냈던 에베소의 사역을 회상하면서
그가 어떻게 에베소에서 주님을 섬겼는가에 대해서 먼저 말해주고 있는데요.
1) '모든 겸손'으로 섬김 :19
겸손하게 섬겼다는 게 뭐예요?
자신의 주권을 내려놓고, 주님의 종으로서 섬겼다는 거예요.
우리는 다 자기 생각이 있고, 자기 경험치가 있고, 자기 판단이 있어요.
그런데 그가 '겸손하게 섬겼다'는 것은, 자기를 완전히 부복시켜서
주의 뜻에 온전히 순복하면서, 그래서 자아를 내려놓고 주의 종이 되어서 섬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기 마음대로 한 것이 없습니다.
자신이 계획을 세웠더라도, 하나님이 수정하시면, 거기에 따라갔고요.
뭘 못할 것 같아도, 하나님이 하라 하시면, 그대로 순종해서 했던 것이죠.
그는 겸손하게,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인으로서, 그리고 자기는 종으로서 섬겼어요.
그런데 여기서 '겸손'이라는 것은, 그리스도만을 섬겼다는 것이 아니고,
동시에 주님이 섬기게 하셨던 사람들까지도 섬겼다는 거예요.
자신의 주권을 내려놓고, 사람들의 종이 되어서, 사람들에게 맞추어서 섬겼다는 것입니다.
고전9:19~11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모든 사람에게 맞춰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섬김의 자세이죠.
예수님께서 우리를 억압하십니까?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나서,
우리에게 '만일 나를 안 따라오면 너희들 죽어!' 이렇게 억압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시죠.
대신에 '너희가 나를 따라오려거든...' 이렇게 인격적으로 말씀하세요.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우리에게 성령이 주어지고, 우리는 그 안에서 자유를 얻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스스로 하나님께 종이 되었어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주님께만 종이 되었다'고 말하지 않고,
'나는 모든 사람에게도 종이 되었다!' 고전9:19~
그 이유는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이렇게 얘기하고 있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유대인을 가리키고
'율법 없는 자'는 이방인을 가리키죠. 고전9:21
그래서 유대인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내가 유대인을 얻고자 함이었다.
또 율법 없는 자(이방인)에게는, 이방인과 같이 된 것은, 그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아휴 너 그렇게 약하냐?' 하며 얕보지 않고, 자기도 약한 자가 되었다.. 이 말이에요.
그렇게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하면 복음에 참여하고자 하미라 라고 말해요.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 가서, 그렇게 겸손하게 그들을 섬겼다는 거예요.
위 고린도전서는, 에베소에서 바울이 쓴 서신인데,
고린도교회에서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에베소에서도 똑같이 했을 거예요.
'내가 얼마나 겸손하게 너희 앞에서 섬겼는가, 그래서 주님을 섬겼는가'
즉 '내가 모든 겸손으로 섬겼다' 라고 말하고 있어요. 행20:19
2) 또 '(모든) 눈물로' 섬겼대요. :19
여기서 눈물은, 슬퍼하면서 아파하면서 섬겼다는 말이 아니고,
간절한 기도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주를 섬기고 사람들을 섬길 때, 사실 기도 없이는 안 됩니다.
그런데 그냥 단순히 '내가 기도하면서 사역했다' 이렇게 표현하지 않고,
'내가 (모든) 눈물로 섬겼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눈물로 간절하게 기도했다는 뜻이에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을 때,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기도하셨을 때에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눈물로 기도하셨던 것처럼
사도바울도 주님을 섬길 때 눈물로 기도하면서 섬겼다는 것입니다.
사역은, 무릎으로 가는 길이지, 걸어서 가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3) '(모든) 참음으로 섬겼다' :19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3년을 회상하며
모든 겸손과 그리고 눈물로 기도하면서 섬겼고,
또한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겼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어요.
사도바울은 편안하게 주를 섬긴 게 아닙니다.
자기 몸이 많이 쇠약하고, 상황이 지금 자기 편이 아니에요.
일부 에베소 사람들도 자기 편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들이 간계로 자기를 대적해도,
그는 어떻게 했다는 거예요? 그 고난과 시험가운데서도 계속 꿋꿋이 주를 섬겼다는 거예요.
'간계'란, 다른 말로 음모입니다.
사람들이 바울을 해치기 위해서,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모의했다는 거예요.
이게 남의 얘기라서 그렇지, 나 자신이 당하는 일이면.. 대단히 심각한 거죠.
그걸 바울은 다 참고 견뎠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에베소는, 아데미 신을 섬기던 우상의 도시였기 때문에,
은장색들이 들고 일어나서, 폭동을 일으킨 적이 있지요. 19:23~30
시험이 없는 편안할 때만 주를 섬긴 게 아니고,
시험과 고난이 닥쳐와도, 그 가운데서 참으면서 주를 섬겼다.. 이렇게 회고하고 있습니다.
◑20:20~21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위 구절에서 바울이 회개와 믿음을 증언했는데,
회개와 믿음은, 복음의 핵심이죠.
여러분, 설교자들이 설교할 때마다 늘 걸리는 게 있습니다.
'이 설교하려면, A성도님이 걸리고, 저 설교하려면 B성도님이 걸리고 (상처받을 것 같고)
그래서 또 다른 주제로 설교하려면 C성도님이 시험들 것 같고',
때로는 설교자 자신이 스스로 마음에 걸리적거려서 설교하기가 힘든 내용도 있습니다.
그리고 또 사회적으로도, 거센 저항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복음이 사회나 국가에 뭔가 대항하는 듯한 내용으로 선포될 때는... 언론이나 정권이,
또는 사회단체가 그 설교자를 대적할 수도 있죠.
에베소 시의 은장색들이 단체로 들고 일어나 소요를 일으킨 것은,
바울이 전한 복음이, 은장색(은으로 우상을 만들어 파는 장인)들에게는 극혐이었던 것이죠,
그러나 바울은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담대하게 가르치는 것',
이것은 설교자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한 번 후퇴하기 시작하면, 그 후로 계속 후퇴하게 됩니다. 설교자가 두려움에 빠지는 거죠.
그래서 지금은 소천하신 어느 목사님은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20
이 말씀을 늘 암송하며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성도들에게, 양떼들에게 유익한 것이면... 자신에게 어떤 불이익이 오더라도
반드시 가르치겠다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하셨습니다.
◑20:22~24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마치려 함에는'
사도바울은, 업적을 남기는 것이 사역의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사도바울의 목적은, 끝까지 가는 거였어요.
끝까지 섬기는 것! '마치려 함에는' :24
그래서 자기에게 주어진 일, 그리고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
그리고 자기에게 주어진 길을 끝까지 완주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자기가 마쳐야 될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죠.
그것은 로마로 가는 일이었고, 19:21
더 넘어 서바나(당시 땅끝)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롬15:23. 28
딤후4:6~8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딤후4:7
그는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다'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본문 24절에는 '마치려 함에는' ... 바울은 늘 '마침'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거죠.
예수님도 '다 이루었다' 하고 돌아가셨잖아요.
이렇게 끝까지 섬기고, 일을 다 마치려면 어떻게 해야 돼죠?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20:24
자기 생명이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 생명조차도 소중히 여기지 않을 만큼 주를 사랑했다는 거예요.
우리가 그를 사랑하면, 뭐든지 내어놓거든요.
자기 생명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을 만큼... 바울은 주님을 사랑했던 분이었어요.
그래서 바울은 지금 '나는 생명을 버릴 각오로,
나는 그 사랑으로 주님을, 성도들을 섬겼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사도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을 향하여 선포한 그의 메시지를 통해서
우리가 주를 어떻게 섬겨야 되는지 교훈을 받게 됩니다.
내가 달려갈 일을 다 마치도록, 그렇게 완주해서 섬겨야 되는데,
그 과정에는 '자기 생명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정도의' 열정이 있어야 된다는 거죠.
물론 성령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그 길로 인도되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바울처럼, 자기 생명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주님을 섬기고
나중에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마쳤으니..' 고백하게 되는 거죠. '그것은 주님의 은혜였다'고요!
☞싸우고 마치고 지켰으니 rfcdrfcd.tistory.com/15973274
▲본문에서 누가는, 의도적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사도바울의 모습을,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나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는 예수님의 모습과 매치시키고 있어요.
1) 에베소에서 그가 3년을 사역한 것은,
예수님의 공생애 3년반과 비슷하죠.
사도 바울이 에베소 성에 들어가자마자 12명쯤 되는 사람들을 만났잖아요. 19:7
그들은 요한의 세례까지밖에 알지 못했던 사람들이었죠.
아마 여기 본문에 나오는 에베소 장로로 세워진 사람들은,
그때 회심했던 사람들이 많이 섞여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3년이나 에베소의 제자들과 함께하면서,
밤낮 그들을 가르치면서 함께했던 그의 모습은,
3년 동안이나 제자들과 함께했던 예수님의 모습을 고스란히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죠.
2) 그가 1차, 2차, 3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데,
예수님도 공생애를 마치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어요.
예수님은 거기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지만,
바울은 거기서 사형은 면하고, 대신에 체포당해서 (가이사랴로 호송되어) 2년을 지내다가
나중에 네로 황제에 의해서 순교당하죠.
3) 그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드로아에서 죽은 유두고를 다시 살렸는데,
예수님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베다니에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졌죠.
이 사건은, 목전에 죽음을 앞두신 예수님과 사도바울에게, 큰 용기를 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가복음(1권)을 통해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3년 동안 어떻게 섬겨주신지를 보지만
사도행전(2권)을 통해서 사도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을 3년 동안 어떻게 섬겼는지를 보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섬김을 다시 한 번 더 명확하게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을 어떻게 섬겼다는 본문의 메시지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어떻게 섬겨주셨는지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바울의 섬김을 볼 수 있지만,
역으로, 바울을 통해서 예수님의 섬김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를 어떻게 섬겨주셨습니까?
다시 19절을 보면, 모든 겸손으로 우리를 섬겨주셨고,
모든 눈물로 섬겨주셨고, 모든 대적자들의 간계에도 참음으로 우리를 섬겨주셨어요.
바울이 율법 없는 자에게는 율법 없는 자(이방인)같이 되었고,
율법 있는 자에게는 율법 있는 자(유대인)같이 된 것처럼
예수님도, 우리를 섬겨주시기 위해서, 아예 사람의 모습을 입으시고 이 땅에 내려오셨잖아요.
약한 우리를 공감하시기 위하여 우리처럼 되셨어요.
그래서 빌2:6~8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여러분 우리가 선교를 나가서 보면, 경제적인 수준, 교육 수준이 낮은 쪽으로 가게 되잖아요.
거기 가서 사역하려면 얼마나 불편합니까?
이렇게 편한 한국에 있다가, 그런 선교지로 가면 얼마나 불편해요?
그리고 그들이 먹는 음식을 같이 먹으려고 하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늘을 버리시고 그분이 낮은 이 땅으로 내려오셨고요.
하나님이 종의 형체를 가지셔서 우리와 같이 되셨고, 우리와 함께 사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겸손으로 우리를 섬겨주셨던 분이시고요,
그래서 바울도 모든 겸손으로 에베소 성도들을 섬겼던 거예요. :19
오늘 나에게는, 이런 낮아짐, 겸손함이 있나요?
또 사역자가 '참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바울도 '모든 간계를 끝까지 참았고' :19
예수님도 '십자가까지 참으셨습니다.'
그리고 24절을 보면, 이건 사도 바울의 감동적인 고백이기도 하지만
앞서 주님의 감동적인 고백이기도 합니다.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24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자기 생명을 버리겠다는 각오입니다.
즉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자세인 거죠.
예수님처럼 사역하고,
바울처럼 모든 겸손과, 모든 눈물과, 모든 것을 참고 견디며 사역하려면 :19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각오가 있어야 하는 거죠.
'나는 사명을 다 마치기 전에는 죽지 않는다(하나님이 나를 부르시지 않는다)'
그렇게 '죽음'에 대해 자유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8:32
'죽음'에 대해 자유로워진 사람은, 삶의 모든 면에 있어서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20:28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여러분은... (스스로) 삼가라'
장로들은, 양떼를 치거나 돌보기 전에, 자기 스스로를 살피라는 뜻입니다.
원어 문장에 '삼가라'가 명령법으로 제일 먼저 나옵니다. '삼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죠.
'자기를 위하여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자기 영혼의 상태에 대해 소홀한 사람은, 양떼의 영적 상태에 대해서 결코 도움을 줄 수 없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하셨으니라'
감독(장로와 동일 직임)들에게 엄숙한 책임이 지워졌으니 교회를 치는(목양하는) 일입니다.
오늘날 목회, 목양이란 말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양떼를 돌보듯이 세심히 돌봄을 뜻하죠.
'친다'의 '포이마이노'의 일차적 의미는, 먹이는 것입니다. 양을 살지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요21장에서 베드로에게 '내 양을 치라 feed'고 당부하셨죠. 요21:16
이 말은, 초대교회가 아직 정경은 완성되지 않았지만, 구약성경과 아울러
어떤 형태로든지의 문서(복음서)가 있어서.. 그것으로 양떼들을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미국의 이민목회는 뭐 이사도 도와주고, 직업도 알선해 주고 한다지만
목회, 목양의 근본적 의미는 '양떼를 치는' 것인데, 그 의미는 '먹이고 살찌우는' 일입니다.
이것은 목회에 있어서 '말씀사역의 우선성'을 강조합니다.
말씀을 연구해서 가르치는 것을 만약 등한시 하는 목자가 있다면,
자신의 본분을 망각한 것입니다. ☞ 그 은혜의 말씀 rfcdrfcd.tistory.com/15981810
그리고 나중에 로마에서 에베소 교회에 편지한 내용을 보면,
엡4:11~12절에 보면,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에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장로들을 복수로 세운 것은, 그 장로들 가운데 여러 5가지 직임이 있었던 것입니다.
즉 에베소 교회는, 장로들의 공동 목회, 동역이었다는 것이죠.
각각 은사가 다른 장로들이 서로 은사를 합쳐서, 교회를 섬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에 이런 실험적인 목회가, 새로 시작하는 개척교회를 중심으로 새롭게 등장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