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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

LNCK 2024. 9. 13.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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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78) /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 - YouTube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         행21:17~26      2024.08.20.   

※누가 설명해 주지 않으면, 성경만 갖고 읽어서는, 이해되지 않는 본문입니다.

 

드디어 바울은 긴 선교여행 끝에 마침내 목적지인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도착을 했다는 건, 바울의 3차선교여행이 끝났다는 얘기입니다. 

원래 바울은 수리아에 있는 안디옥 교회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수리아 안디옥 교회는, 바울 선교의 베이스 캠프였습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3번에 걸쳐 선교를 했죠. 
그때마다 바울은 늘 수리아 안디옥 교회에서 선교를 떠났습니다. 
파송교회가 수리아 안디옥 교회이었던 거죠. 

그리고 다시 수리아 안디옥 교회로 돌아갔습니다. *1차, 2차
그런데 3차 여행에서는 수리아 안디옥교회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떠나기는 수리아 안디옥교회에서 떠났는데,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왜 수리아 안디옥이 아니라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을까요? 
예루살렘교회에 전해줄 구제헌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제헌금을 전해주기 위해,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이 예루살렘에서 바울은 잡히게 되어, 결국 로마로 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사도행전에 이후 남은 이야기의 장소는
예루살렘, 가이사랴, 로마입니다. 

그래서 행21~26장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나머지 행27~28장은, 바울이 로마로 가는 여정과, 로마에 도착해서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그 중에서 본문 행21:17절에서~ 23장까지는,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머문 12일 동안의 이야기입니다. 
12일 동안의 이야기를, 누가는, 21~23장까지 할애합니다...  
그만큼 누가는, 예루살렘에 있었던 바울의 사역을 비중 있게 다룹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에서 바울에게 일어난 그 일들이 대체 무엇인가요? 
그 예루살렘에서의 첫 번째 에피소드가,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오해를 받다

바울의 일행은, 드로아를 떠나서, 두로와 가이사랴를 거쳐서 예루살렘에 도착합니다. :17
도착한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뜨거운 영접을 받았습니다. 

21:17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기꺼이'는.. 즐겁게, 기쁘게 라는 뜻입니다. 
억지로 맞이한 게 아니라, 기다리는 마음으로 기쁘게 바울을 영접했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21:18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그리고 이튿날 바울이 만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야고보였습니다. 
야고보는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이었죠.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죠. 야고보서의 저자.

이 야고보 장로가 베드로가 떠난 후에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야고보 장로가 바울을 맞이해 주었습니다. 
야고보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들도 바울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들에게 선교 보고를 했습니다. 
그동안에 있었던 선교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21:19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

'낱낱이 말하니'
이 말은 '차례대로 말했다'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reported in detail : NIV
he began to relate one by one the things : NASB

바울은 3차전도여행 여정을, 수리아 안디옥에서 출발해서 갈라디아 지방을 지나고,
에베소를 갔다가, 마게도니아에 갔다가, 아가야에 갔다가 
다시 빌립보, 드로아를 거쳐서, 이렇게 배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이 노정을 순서대로 하나씩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게 '낱낱이 말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같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21:20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유대인의 하나님께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셔서 
바울을 통해, 구원의 은혜를 그들 이방인들에게 베푸신 사실을 감사했습니다. 
여기까지는 분위기가 참 좋았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의 안팎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습니다. 
바울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돌았기 때문입니다. 
그 소문이 20절부터 나오는데요. 

'유대인 중에 믿는 자가 수만 명이 있다'고 말합니다. 
무려 '수만 명'입니다.

이 당시 예루살렘 인구를, 적게는 5만 명 ~ 많게는 8만 명으로 추정합니다. 
그 가운데 수만 명이 예수를 믿었다는 건, 굉장히 놀라운 부분입니다. 

여러분, 유대인들이 어떤 사람들이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자들입니다. 
그 유대인들이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을 했습니다. 
그것도 몇백 명, 몇천 명이 아니라, 수만 명이 개종을 했습니다. 
여러분 이건 굉장히 놀라운 일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제가 주석을 보니까, 
이 '수만 명'을 수학적인 숫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만큼 많다는 뜻이지, 실제로 수만 명은 아니었을 것이다' .. 라고 말합니다. 

확실한 것은, 소수였던 기독교인들이 그만큼 많아졌다는 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그 특징이 무엇이죠? 모두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다 율법의 열성을 가진 자라'는 말은,
그 수만 명이 율법을 철저히 지켰다는 뜻입니다. 율법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율법에 보면 의식법들이 나옵니다. 예를 들면 음식법들이 있죠. 
그 정결법을 철저히 지켰을 겁니다. 

 

율법에 보면 먹어야 할 음식과, 먹지 못할 음식이 구분되어 있습니다. 
부정한 음식과 정한 음식이 구분되어 있습니다. 
함부로 음식이라고 다 먹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또한 율법에 나오는 모든 의식법들을 하나도 어김없이 다 지켰다는 뜻입니다. 
제사와 절기와 안식일을 철저히 지켰다는 뜻이죠.

여러분 지금 이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은 자들입니다. 유대교가 아니에요. 
이 '수만 명'은 분명히 회심한 성도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겠다는 유대주의자들과는 
확실히 다른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다 율법의 의식법을 열심히 지켰습니다. 
유대인이다 보니까, 율법으로부터 아직까지는 온전한 자유함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 시기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넘어가는 과도기이니까
아직 신앙이 어렸던 자들은, 구원과 별개로, 율법도 열심히 지킨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바울은 평판이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바울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그들 가운데 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바울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은 대체 무엇인가요? 

▲21:21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
 
여기 보면 바울에 대해 떠돌았던 세 가지 소문이 나옵니다. 

-바울이 외국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모세를 배반하게 했다는 겁니다.
즉 바울이 모세의 율법을 버리게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모세의 율법의 파괴자'라는 소문입니다. 

-바울이 할레를 행하지 말라고 가르쳤다는 소문입니다. 

-바울은 유대인의 관습도 지키지 말라고 했다는 소문입니다. 
누구에게요? 외국에 사는 유대인들에게요. 

이 세 가지가, 그 당시 떠돌던 바울에 대한 소문이었습니다. 
바울이 외국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데, 
외국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건 바울에 대한 오해입니다. 가짜 뉴스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물론 바울이, 이방인들에게는 이렇게 가르친 적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나 고린도서를 보면, 외국에 사는 이방인들, 즉 외국인들에게는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들은 유대인이 아니니까요. 
또한 이것은 행15장 예루살렘 공의회의 공식 결정이었습니다.

여러분, 할례는 이스라엘의 어쩌면 정체성과 같지 않습니까.  
유대인들의 하나의 민족적 의식으로 자리 잡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이방인은 굳이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할례가 구원의 조건은 아니니까요. 

그래서 바울은, 외국에 사는 외국인들에게 '굳이 할례를 받지 말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는 그렇게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바울이 외국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모세의 율법을 버리라고 가르친 적이 있습니까? 
또 할례를 금지시킨 적이 있습니까? No
그리고 유대인의 관습을 지키지 말라고, 유대인들에게 가르친 적이 있습니까? No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가르친 건 이겁니다. 
이 세 가지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모세의 율법, 할례, 유대인의 의식 준수,
이 세 가지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고 가르쳤을 뿐입니다. 

당시 유대교인들, 유대인들은
이 세 가지가 구원의 조건이라고 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구원 받는다. 
-그 가운데 핵심은 할례를 받아야 된다. 
-그리고 유대인의 관습, 의식법(절기)도 다 지켜야 한다. 

왜냐면 유대인들은 행위를 통해 구원을 받는다고 믿었으니까요. 

그러나 바울은, 그것들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만 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모세의 율법을 버리라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모세의 율법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고 가르쳤지, 
모세의 율법을 버리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바울은 그 어떠한 경우라도, 율법 폐기론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율법은 거룩하고, 선하며, 의로운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니까요.                        

바울은, 다만 율법을 사용하는 그들 유대주의자들의 태도가 문제임을 지적했을 뿐입니다. 
유대주의자들은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는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구원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그들의 태도를 반대했지, 
율법 자체를 버리라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역시 모세의 율법을 지켰습니다. 
예를 들면, 바울은 2차선교여행 말기에 나실인 서약을 했습니다. 

행18장에 보면,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세우고 나서, 고린도 교회를 떠납니다. 
그때 바울이 고린도를 떠나기 전에 머리를 깎았습니다. 
머리를 깎았다는 건, 나실인 서원이 끝났다는 의미였죠.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18:18

바울은 고린도 사역을 마치면서 나실인 서원을 했고, 
그 정한 날짜가 마치니까, 머리를 깎았다는 것입니다. 
그 기간 동안에는 머리를 못 깎고, 끝나면 끝났다는 표시로, 머리를 깎았거든요.

바울은 그냥 하나님 앞에서 마음으로만 서원해도 되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마음으로 서원하잖아요. 
'하나님 제가 고린도에 있는 동안에는, 더 저를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마음으로 서원해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유대인의 한 사람으로서 구약의 율법을 따랐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나실인 서원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도 모세의 율법을 지켰던 거죠. 

(혹자는 이 시기에, 바울이 오순절 때를 맞춰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을 두고서, 
'바울이 오순절을 지켰다'라고 보기도 합니다. 그게 구원을 받는 조건은 아니지만,
오늘날 교회가 맥추절을 지키듯이, 그 영적인 의미를 기억하며 지켰을 수 있습니다.)

△할례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할례를 금한 적이 없습니다. 
그 증거가 행16장에 보면, 바울이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게 했습니다.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받게 한 건 아니었습니다. 
디모데의 엄마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디모데가 할례를 받지 않으면 
장차 유대인들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할례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필요하다면 구원과 별개로, 유대인들에게는 할례를 받겠습니다. 
할례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고 했지, '할례는 절대 금지!' 그런 식으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유대인의 관습도 존중했습니다. 
그 증거가 오늘 본문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데요. 

▲21:25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
 
이 내용은 행15장에 예루살렘 공의회 결의 사항이었습니다. 
이때 구원론 때문에 교회가 한바탕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습니다. 
바리세파 교인들 때문이었죠. 

'이방인이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구원론의 문제를 가지고 예루살렘 교회에서 사도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그때 예루살렘 공의회 결과가 무엇이었죠?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구원의 수단은, 오직 믿음이라는 결론이었습니다.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만,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결론이었습니다. 

이 결론을 가지고, 바울은 외국에 나가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곳 외국의 이방교회들에게, 이 결과를 편지로 써서 보냈고요. 
'이방인들도 오직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그때 예루살렘 공의회 결의 사항, 권고사항이 있었는데,
이방인 신자들에게 네 가지를 부탁했습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 피채 먹는 것, 짐승을 목매어 죽이는 것, 음행하는 것, 
이 네 가지는 유대인들이 끔찍하게 싫어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 성도와, 이방인 성도의 하나됨을 위해서 
이방인 성도에게 네 가지를 부탁했던 것입니다. 
그 네 가지가 25절에 나오는 '유대인의 관습'을 함축, 농축한 것이었습니다. 

이건 구원의 수단이 아니라, 
이방인 교회와 유대인 교회가 하나 되기 위한 최소한의 관습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 공의회와 바울은, 유대인의 관습을 존중해 주었던 거죠. 
구원과는 별개로! 

바울은 모세의 율법과 또 할례와 유대인의 관습을 존중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에 대한 이 소문은, 전혀 근거가 없는 명백한 가짜 뉴스였습니다. 
그런데도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인 성도들은, 바울을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오순절 절기를 지키러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바울을 싫어하고 배척하는 기류가, 교회 안에 형성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때 마침 예루살렘에 들어온 겁니다. 

그러니 예루살렘 교회의 담임 목사였던 야고보 장로와 
다른 장로들의 입장에서는, 이게 고민이 되는 거죠. 

분명 유대인 성도들이 바울을 가만두지 않을 텐데... 이를 갈고 있을 텐데... 
이게 고민이 되는 겁니다. 

만약 이대로 오해를 놔둔다면,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할 수가 없습니다. 
유대인 성도들이 바울을 인정하지 않으니까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아예 듣지를 않으려고 할 겁니다. 
그러면 유대인 성도들이, 복음으로부터 멀어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예루살렘 교회 입장에서, 이 오해를 풀어주고 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와 예루살렘 교회 장로들이 방안을 하나 마련합니다. 
이 오해를 불식시킬 방안을 바울에게 제안합니다. 
그 제안이 23절부터 24절에 나오는데요. 

◑유대인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된 바울

▲21:23~24 '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유대인 성도들이 볼 때 '바울 당신도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구나' 라고 할 수 있을 법한 
행동을 하나 하자는 겁니다. 그 행동이 무엇이죠? 

예루살렘 교회에 서원한 네 사람이 있는데, 
그들이 서원을 지키는데 필요한 비용을 바울에게 다 내라는 겁니다. 

여러분 여기서 서원은 '나실인 서원'을 말합니다. 
나실인 서원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기간을 정하여 헌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나실인 서원 기간은, 당시에 보통 30일이었습니다. 
물론 평생 서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구약에 보면 평생 나실인으로 서원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삼손이었죠. 그런데 당시 대부분은 그 서원이 30일 정도였습니다. 

이 30일 동안에는 세 가지를 멀리해야 했습니다.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않아야 했고요. 
-시체를 멀리해야 했고요. 
-머리를 깎지 않아야 했습니다. 
그만큼 자기를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린다는 성결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기간이 끝나면 해야 할 의식이 있습니다. 머리를 깎고요. 
성전에서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머리를 깎고 성전에서 제사를 드려야, 나실인 서원이 끝납니다. 

그런데 그 제사 비용을 바울더러 다 내라는 겁니다. 
여러분 이 제사 비용이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제사를 드릴 때는, 규정에 따라 각종 희생 재물을 드려야 했습니다. 

한 사람당 수양 2마리, 암양 1마리, 또 곡식과 붓는(전제) 제물을 드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네 사람의 제사 비용을 다 내라는 겁니다. 

이 비용들을 계산하면, 약 100명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의 양이라고 말합니다. 
1백인 분의 식사비를 내라고 바울에게 말한 거죠. 
쉽게 말하면 1백 인의 고깃집 식사비를 내라는 겁니다. 

여러분, 바울이 돈이 어디 있습니까? 선교사이지 않습니까? 
지금까지도 고생해서 자비랑 선교를 했는데요. 

그러면 바울에 대한 유대인 성도들의 오해가 풀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저렇게 비싼 돈과 시간을 써가면서, 나실인 서원을 돕는 것을 보니까 
바울은 율법을 어기는 사람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구나'
하고 오해가 풀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더러 그 제사 비용을 다 부담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습니다. 

24절에 보면, 바울에게 '바울도 함께 결례를 행하라'고 말합니다. 
이 결례는, 나실인 서원과 다릅니다. 이걸 구분해서 본문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결례는, 바울이 해야 할 (정)결례입니다. 
이 결례가 뭐냐면, 유대인들이 이방 땅을 밟고 오면, 치러야 할 정결 예식입니다. 

기본적으로 유대인들은 이방 땅을 부정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외국에 다녀온 유대인들은, 더러워진 몸을 깨끗하게 하는 정결 예식을 
성전에 가서 치렀습니다. 그 정결 기간이 7일이었습니다. 

그래서 27절에 보면 '그 이레가 거의 차매'
그 이레는 바울이 정결 예식을 하는 7일을 말합니다. 
7일 동안 바울은 성전에서 정결 예식(결례)을 치러야 했습니다. 

'그때 너 혼자 가지 말고, 나실인 서원을 한 네 사람을 함께 성전에 데리고 가라'는 겁니다. 
그 네 명도, 나실인 서원이 끝났음을 선포하려면 
그들도 성전에서 제사를 드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제사 비용을 바울에게 다 내라는 겁니다. 

그러면 바울에 대한, 유대인들의 오해가 풀릴 수 있다는 제안이었습니다. 

21:26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 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하니라'

그런데 여러분 바울의 입장에서는, 이 제안이 굉장히 억울할 수가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에 관한 소문은 다 거짓 뉴스입니다. 하나도 맞는 게 없습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펴봤듯이, 바울은 그렇게 가르치고 다닌 적이 없습니다. 
바울은 잘못한 게 없습니다. 
더군다나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들이, 지금 모두 바울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바울이 이방지역에서 복음을 전한 일이 하나님의 은혜였다. 하나님의 사역이었다'
하고 장로들은 바울의 사역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같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20

그러니까 바울에게는 책잡을 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은, 지금 억울합니다. 

게다가 지금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를 도와주러 왔습니다. 
원래대로라면 바울은, 수리아 안디옥 교회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를 파송한 수리아 안디옥이 아니라, 
곧장 예루살렘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서죠. 
기근에 허덕이는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서, 
마게도냐의 편지도 보내고, 아가야 교회들에도 편지를 보내서 
그 헌금까지 거두어서 지금 왔습니다. (*방문 전에 미리 편지를 보내 준비시킴)

그런 바울을, 고마워하기는 커녕,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 오해를 풀기 위해, 심지어 바울에게 제사 비용을 내라고 말합니다. 
그것도 4명의 비용을 다 내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입장에서는 불쾌할 수 있습니다. 
'왜 내가 그래야 하나? 내가 하지도 않은 일 때문에 생긴 오해를 
왜 내가 내 돈을 들여가며 풀어야 하는가?' 바울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에게는, 굉장히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습니다. 
자기는 이방인의 사도니까요. 

그러나 바울은 이들의 제안을 수락했습니다. 
그 수락한 장면이 본문 26절인데요. 

21:26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 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하니라'

위 개역개정 성경은, 무슨 말인지 이해가 어렵습니다.
다른 성경으로 보면, 저는 이해가 잘 되더군요.

'그래서 바울은 그 다음날 그 네 사람을 데리고 가서, 함께 정결 예식을 한 뒤에,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정결 기한이 차는 날짜와 
각 사람을 위해서 예물을 바칠 날짜를 신고하였다.' 새번역

한마디로 바울은 야고보와 장로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1백인 분의 고깃집 식사비를, 선교사가 (제사 비용을) 다 냈다는 얘기입니다. 

 

사실 바울은, 이 제안을 얼마든지 거절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잘못한 게 하나도 없으니까요. 바울이 틀리게 행하지 않았으니까요. 
바울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 있습니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제안을 수락합니다. 
그러면 바울이 이렇게까지 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때 바울의 마음이요. 고전9:20절에 나옵니다. 

고전9:20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바울은, 유대인 성도들의 마음을 얻기 위하여,
그들과 같이.. 똑같이 했다는 겁니다. 

자기는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지만, 율법으로부터 온전히 자유함을 얻었지만,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되었다는 겁니다. 왜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바울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그 제안을 수락했다는 것입니다. 
안 그러면 유대인들이 자기가 전하는 복음을, 도무지 받아들이지 않으니까요. 
귀를 닫으니까요. 바울은 그들을 얻고자, 그 제안을 수락했다는 겁니다. 

여러분 바울은 누구보다 복음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왜곡하는 일에는, 언제나 단호하게 배격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거스르는 일이라면, 단칼에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복음을 훼손하지 않고, 복음의 근간을 흔드는 게 아니라면, 
바울은 자기를 기꺼이 내려놓을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목적은 바로 한 사람이라도 더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여러분, 오늘 바울을 오해한 유대의 성도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복음의 본질보다는, 복음 밖의 사소한 것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사실 유대인의 관습을 지키는 것, 여러분 그것은 그들의 전통입니다. 
사실 사소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그것들로 그들은, 바울을 배척하고 있습니다. 

△C S 루이스가 쓴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책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그 책에 삼촌 마귀가 조카 마귀에게, 교회를 무너뜨리는 전략을 하나 알려줍니다. 

'교회로 하여금 복음의 본질보다는, 그 외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게 만드는 전략'입니다. 
정작 지켜야 할 복음이 아니라, 그 외에 사소한 것들, 
복음 밖의 사소한 것들로 서로 싸우게 만드는 전략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이런 얘기 있잖아요. 
우스갯소리로 '교회 안에 가장 무서운 마귀는 섭섭 마귀이다.' 

대부분 교회가 싸우는 이유는, 복음 때문이 아닙니다. 
그게 복음인지 아닌지를 가지고 싸우는 게 아닙니다. 사소한 것으로 싸워서 넘어집니다. 
대부분은 자존심을 가지고 싸우거나, 자기 성질을 못 이겨서 싸우거나,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아서 화가 나서 싸우거나, 
또 복음 밖에 있는 교회의 전통을 가지고 싸웁니다. 

사실 다 사소한 것들이죠. 마귀는
복음 바깥에 있는 비본질적인 문제를, 중요하게 여기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가지고 싸우게 만듭니다. 

어쩌면 오늘 바울을 오해한 유대 성도들의 모습이 이와 비슷합니다. 
이들은 복음의 본질보다는, 복음밖의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고 그것 가지고 싸웠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바울을 보십시오 바울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복음이었습니다. 

 

바울은 복음과 진리에 대해서는 단호했습니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타협을 하거나, 한 치도 양보한 적이 없습니다. 
'내가 죽더라도 지킨다'는 것이 바울의 각오였습니다. 

그러나 복음 밖에 있는 사소한 것들에는, 얼마든지 자기를 내어줄 수 있었습니다. 
양보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싸우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만일 영혼을 얻는 일이라면, 
그리고 교회의 하나됨을 지키는 일이라면, 
바울은 기꺼이 자기를 내어줄 수 있었습니다. 

사실 억울한 건 바울인데요. 바울에게는 자존심이 상할 일인데요. 
바울이 잘못한 게 하나도 없는데요. 
그럼에도 바울이 자기를 내어줄 수 있었던 이유는, 주님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고 계시는가를, 바울은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누구보다. 이 땅에서 억울하셨던 분은 우리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죄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할 이유가 하나도 없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자기를 기꺼이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그 주님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에, 바울은 유대인들을 위해 자기를 내어주고 
주님처럼, 그들의 영혼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적용

이것이 오늘 우리가 배워야 할 신앙의 자세입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복음과 진리를 왜곡시키는 일에는 절대로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리와 관계없는 어떠한 일이라면, 
우리는 언제든지 자기를 내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하나됨을 위해서, 그리고 누군가의 영혼을 얻을 수 있다면, 
우리도 삶의 자리에서 자기를 내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이 그러시더라고요. '교회는 어떠한 곳인가? 
교회란 내가 중요하지 않음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이 말은, 제가 청년 때에 섬겼던 교회에 담임목사님이 하셨던 말씀이었습니다. 
교회는 어떠한 곳이라고요? '내가 중요하지 않음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세상은 전부 다, 자기 이름, 자기 명예, 자기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자기를 내어주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교회는요.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를 아는 자들이기 때문에 
세상과 다르게 작동되는 곳입니다. 

사실 이게요. 우리가 가장 안 되는 부분입니다. 저 또한 정말 어려운 부분입니다. 
그러나 이게 신앙인의 실력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 보면, 재미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에 헌금을 전달하러 왔습니다. 그렇죠. 
그러나 헌금을 전달해 준 이야기가 없습니다. 
도리어 바울이 억울한 소문에 휩싸여서,  
억울하지만 자기를 내어주었다는 기록만 있습니다. 왜일까요?  

이게 예루살렘 교회를 진정으로 세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헌금이 아니라 비록 바울이 억울하지만 수모를 받으면서 
자기를 내어주고 영혼을 얻고자 한 일이, 결국 교회를 세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뜨겁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또 헌금을 하나님 앞에 자원하여 드릴 수 있습니다. 
예배의 자리에 나와서 뜨겁게 찬양할 수도 있습니다. 
선교지의 영혼을 생각하며 긍휼한 마음으로 뜨거운 눈물을 흘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부인이 없을 수 있습니다. 자기 죽음이 없을 수 있습니다. 
내 옆에 사람들에게 자기를 내어주지 못합니다. 
쉽게 말해 주님의 사랑으로 져주지를 못합니다. 
그를 이겨야 직성이 풀리는 게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사실 이게 우리가 안 되는 부분입니다. 주님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고 말하지만, 
주님이 사랑하라고 붙여준 내 옆의 사람을 위해 져주지를 못합니다. 
자기를 내어주지 못하고요. 
자기의 자존심을 꺾을 줄 모릅니다. 

참 이게 우리가 안 되는 부분입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 조심해야 할 게, 
이 말씀을 듣고 이 목사, 그 집사, 저 권사를 떠올리면 안 됩니다. 
여러분 각자에게 적용해야 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게 우리에게 요구되는 신앙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위하는 마음으로 자기를 내어주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교회를 세우시고 영혼을 얻게 하십니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은 일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바라기는 우리의 신앙이, 이 일에 자라기를 바랍니다. 
영혼을 얻고자 하는 일이라면,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라면, 
기꺼이 주님을 위하는 마음으로 자기를 내어줄 수 있는 우리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런 우리의 모습을 통해서, 교회에 하나님의 이름이 아름답게 지켜지고, 
우리에게 맡겨진 영혼들이 주님께 돌아오는 귀한 은혜가 
우리의 가정과 삶 가운데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