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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

LNCK 2024. 9. 14. 20:22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임재, 교제, 친밀

 

https://blog.naver.com/karamos/80049688010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           요16:31~33

 

결혼한지 얼마 안 된 어느 젊은 부부의 집에 심방을 간 일이 있습니다.

부인과 백일이 막 지난 아기가 집에 있었습니다.

남편은 병원의 인턴과정 중에 있어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병원에서 보낸다고 했습니다.

 

부인이 하는 말이, ‘남편이 집에 없다시피 하기 때문에 허전하고 두렵기도 하지만

갓난아기가 있어서 의지가 된다고 했습니다.

갓난아이가 없으면 지내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이 퍽 재미있게, 또 의미 있게 들렸습니다.

갓난아기는 의지가 되는 것이 아니라 부담이 됩니다. 아기 키우기가 얼마나 힘이 듭니까?

그런데 혼자 있고 허전할 때는 그 갓난아기가 부담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의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들려오는 예수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요16:32

예수님과 함께 계신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와도 함께 계십니다.

 

갓난아기도 함께 있으면 의지가 되는 법인데,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십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허전하다는 마음, 외롭다는 마음, 불안한 마음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혼자 있다는 생각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요14장, 15장, 16장은 예수님의 마지막 설교입니다.

오늘 본문인 16장 뒷부분은 이 설교의 결론 부분입니다.

 

마지막 설교의 결론으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였습니다.  요16:32

 

마지막 설교를 할 때 예수님의 처지와 심정을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배신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마지막 설교를 하시기 전 제자들과 대화를 나눌 때,

베드로가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큰 소리를 쳤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라고 예고를 하셨습니다.  13:18

 

제자들이 자기를 버리고 각각 흩어질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요16:31절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하는 것은 반어법(反語法)입니다.

"너희는 사실은 믿지 못하고 있다. 더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홀로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견디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수험생들과 수험생들의 부모님들이 여러분 계실 텐데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부담이 더 클까?

마지막 설교를 하실 때 예수님이 고통이 더욱 컸을까?' 한 번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수험생들 말고도 여러 가지 사유로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계실 텐데

한 번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고통을 겪는 사람들은, 자기가 겪는 고통이 가장 큰 것으로 여기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거의 본능에 가까운 사람들의 심성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객관적인 안목으로 보면 아무래도 예수님의 고통이 더욱 컸을 것입니다.

세상이 그 어떤 고통도 십자가의 고통을 따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소연도 하고 싶으셨을 것이고 제자들을 야단치고도 싶으셨을 것입니다.

"너희들이 곧 뿔뿔이 도망 칠 것이다. 괘씸하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믿는다고 하느냐?"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하는 믿음으로 그 모든 것을 이깁니다.

 

초조감과 불안 가운데 있는 수험생들과 부모님들, 그리고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있는 분들,

이 믿음으로,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믿음으로, 그것을 이기시기 바랍니다.

 

▲본문 앞부분의 요16:2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해산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해산은 고통이 따르는 일입니다. 그러나 기쁨이 따르는 고통입니다.

출산한 다음에는 그 고통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진통에 대해 말할 때는 '참 보람있는 고통이었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또 임신하지요.

 

산부인과 의사 가운데 자기 병원을 찾아오는 임산부들에게 될 수 있으면

무통분만(無痛分娩)을 권하지 않는다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진통을 겪고 아기를 낳아야 그 아기가 더욱 사랑스럽고 귀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고통은 '창조적 고통'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뜻 안에서 이런 고통을 겪게 하시고, 내가 고통 중에 있을 때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믿는 기독교인들이 겪는 고통은, 창조적인 고통입니다.

 

전생의 업보 때문에, 팔자 때문에, 우연히 고통을 겪는다고 생각하면 무의미한 고통이 됩니다.

고통을 위한 고통, 소모적인 고통이 됩니다. 그러면 그 고통이 더욱 무거워집니다.

 

수험생들이 '그저 남들이 대학가니까 나도 가야지.' 하는 마음으로 수험준비를 하느라고

고생하고 있다면 그것은 소모적인 고통이 됩니다.

 

'하나님께 더 많이 봉사하기 위해 이 과정을 겪는다'라고 하면

그것은 창조적인 고통이 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이웃과 사회에 더 많이 봉사하기 위해 이 과정을 겪는다'

라고 생각하면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는 것을 더욱 강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감리교회에는 교역자 진급제도가 있습니다.

신학대학원을 나와 목회를 시작한 다음에도, 또 목사 안수를 받은 다음에도

일정한 기간은 준회원 교역자로서 매년 논문을 쓰고 시험을 치고 심사를 받아야

정회원 교역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감리교 교역자들은 아주 높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올해부터는 제도가 일부 바뀌어서 논문을 쓰는데 지도목사 제도가 시행되고 있습니다.

지도목사가 정해져서 그 목사의 지도를 받으며 논문을 쓰게 되어 있습니다.

 

저에게도 시험의 중요한 부분에도 참여하고 전도사 두 분, 목사 세 분,

이렇게 다섯 분이 논문 쓰는 것을 지도해야 하는 책임이 주어졌습니다.

지도하는 것이 자기가 직접 논문을 쓰는 것보다 더 힘이 든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제가 지도하고 있는 교역자들에

"논문은 이렇게 써야합니다. 목차는 이렇게 정하고, 각주는 이렇게 쓰고

참고문헌목록은 이렇게 만들고…" 이런 것도 지도합니다만

제일 강조하는 것은 "진급하기 위해 쓰는 논문이지만

자기 자신의 발전과 감리교의 발전에 무엇인가 기여한다는 마음으로 논문을 쓰십시오.

그러면 저절로 좋은 논문이 됩니다."라는 것입니다.

 

수험생들에게 마찬가지의 권면을 드립니다.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수험준비를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고 이웃에게 봉사하고 사회와

국가에 기여하기 위해 대학에 간다는 목표를 세우시기 바랍니다.

준비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더욱 가까이에 계심을 느끼게 딜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도 마찬가지의 권면을 드립니다.

돈 벌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어떤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웃에게 봉사하고

사회와 국가에 이바지하기 위해 이 일을 한다고 목표를 세우시기 바랍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일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더욱 가까이 해 주실 것입니다.

 

살아가는데 태어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산다, 죽지 못해 산다고 하면

그것보다 비참한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과 함께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잊는다면,

그래서 나 혼자 있다고 생각하고 낙심하고 힘들어하면 여러분, 그것은 병입니다.

"나 홀로 병"이라고 이름을 부칠 수 있습니다.

 

나 홀로 병에 걸리면 큰 일을 하지 못합니다.

육신의 병 가운데는 근육이 점점 굳어져서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되는 무서운 질병이 있습니다.

심리적인 병 가운데는 무기력증이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온 몸에 힘이 빠지는 탈진을 체험하는 수가 있습니다.

영적인 나 홀로 병은 이런 것들보다 더 무섭습니다.

영적인 나 홀로 병에 걸리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모세가 "나 혼자다" 했으면 바로와 싸워 이길 수가 있었겠습니까?

광야행진을 제대로 이끌 수 있었겠습니까?

 

장정만 60만 명, 여자들과 노약자들까지 합하면 200만이 넘는 큰 무리를

어떻게 통솔할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가 나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에

바로와도 싸워 이길 수도 있었고, 광야행진을 승리로 이끌 수가 있었습니다.

 

여호수아가 "나 혼자다"했으면 가나안 정복을 완수 할 수 있었겠습니까?

 

요셉이 나 홀로 병 환자였다면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할 때 물리칠 수가 있었을까요?

웨슬리 선생이 나 홀로 병 환자였다면 감리교를 창설하는 큰 일을 할 수 있었을까요?

 

웨슬리 선생이 평생토록 제일 좋아한 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소천

 

선지자 엘리야가 한 때 나 홀로 병에 걸린 일이 있었습니다.

아합이 엘리야를 죽이려고 할 때 엘이야는 몹시 낙심을 하고 지쳐 주저 앉습니다.

하나님의 권면으로 호렙산으로 가서 하나님과 대화를 나눕니다.

 

그 때 엘리야는 "오직 나만 남았거늘"이라고 말합니다(왕상19:14).

그런데 엘리야의 나 홀로 병은 중증(重症)이 아니라 경증(輕症)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사실은 믿고 하나님께 호소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나 홀로 병을 고쳐줍니다. "칠천 명이나 남아 있어!"

그리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말은 내가 끝까지 너와 함께 하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지금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내가 혼자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병이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이것은 죄입니다. 불신앙의 죄입니다.

여러분, 이런 죄를 짓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면

세 가지 축복이 우리에게 주어진다고 33절은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평안의 축복입니다.

둘째는 담대해지는 축복입니다.

셋째는 세상을 이기는 축복입니다.

 

신라 때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는 피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만파는 '모든 파도'라는 뜻이고 '식'은 휴식이라고 할 때의 식, 또는 가라앉는다는 뜻입니다.

'적'은 피리라는 뜻입니다.

 

만파식적은 '모든 파도를 가라앉히는 피리' 이렇게 풀이되는데요

신라 신문왕(神文王)이 동해가 감포(甘浦)에 나갔다가 해신으로부터

만파식적 이 피리를 받았는데 이 피리를 불면 모든 물결이 잔잔해졌다고 합니다.

 

요즘도 이런 피리가 있어서 세상의 모든 물결, 의료파동의 물결,

정치계의 모든 물결, 경제계의 모든 물결을 가라앉힐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하는 이 믿음은

마음의 만파식적 역할을 해 줍니다. 마음의 모든 파도를 잔잔하게 가라 앉혀줍니다.

 

▲얼마 전에 찬송가 470장 "내 평생에 가는 길" 이 찬송의 작사 배경에 대해서

말씀 드린 일이 있는데 그 내용을 기억하십니까?

 

스펫포드 집사의 아내와 네 딸이 배를 타고 여행하다가

배가 파선 당해 아내만 구조 받고 네 딸은 모두 바다에 빠져 죽었습니다.

스펫포드 집사가 급히 아내를 만나기 위해 배를 타고 가는데

어느 날 밤 네 딸이 빠져죽은 지점을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갑판에 서서 그 바다를 내려다보는 스펫포드 집사의 마음이 얼마나 비통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하께 계신다는 사실 때문에 그는 마음의 평안을 얻고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라고

거듭 거듭 평안을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마음이 평안해야 모든 것이 평안하고 잘 됩니다.

한문에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는 잘 알려진 말이 있습니다.

가정이 편안해야 모든 일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평안해야 가정도 평안해질 수 있습니다.

 

▲이번에 '발칸반도의 여우'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던 유고 연방의   *2000년 설교

밀로세비치 대통령이 물러나고 코슈투니차라는 분이 새로운 통치가 되었습니다.

 

코슈투니차는 법대 교수 출신인데 청렴하고 온건한 민족주의자라고 합니다.

어느 신문에 코슈투니차를 두고 '발칸반도의 다윗'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을 보았습니다.

골리앗과 같은 독재정권에 맞서서 싸워 끝내 이겼기 때문에, 이런 별명을 붙은 것 같습니다.

 

다윗은 어떻게 해서 골리앗을 이길 수 있었습니까?

아니 어떻게 골리앗과 싸우겠다는 담대한 마음을 먹을 수 있었겠습니까?

 

사무엘상 17장을 보면 골리앗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모욕하는 말을 할 때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심히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도망했다고 했습니다.

 

아직 군대에 가지도 아니한 어린 다윗, 싸움의 경험도 없는 다윗,

앞장 서서 도망쳐야 하는데, 반대로 골리앗 앞에 담대하게 나갈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다윗이 사울에게 한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삼상 17: 37)

 

'과거에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지켜 주셨는데

현재 블레셋 사람으로부터도 지켜 주실 것입니다' 하는 믿음이 다윗에게 있었습니다.

 

'나는 골리앗보다 형편없이 약하지만,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골리앗보다 강하다.

나는 그 하나님을 믿고 나가겠다. 그 하나님이 나를 대신하여 싸워주실 것이다’

하는 마음이 다윗에게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것을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어떤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 우리도 마찬가지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나는 이 문제를 이길 힘이 없지만 나와 함께 계시는 아버지는 이 문제를 이기고도 남는다.

그 하나님이 나를 대신해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다',

그리고 다윗처럼 도전해서 극복해야 합니다.

 

다윗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간다"며 골리앗에게 달려가서

그에게 돌을 던져 그를 죽였습니다.

우리도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담대하게 세상을 향해 나가야 합니다.

 

'나'라는 말을 많이 쓰는 사람, 관심이 나에게 집중되어 있는 사람일수록 위험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나님, 그 하나님과 나를 생각하면서

십자가를 앞두고도 평안할 수 있었고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독일의 심리학자 쿵켈이 쓴 「내가 사랑하는 나」(My Dear Ego)라는 책에는

그림이 하나 나오는데 개집을 중심으로 자라넝쿨황소 뿔이 있는 그림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사람은 별이나 자라나 넝쿨이나 황소 뿔 같은 존재라는 뜻입니다.

별은 인기, 자라는 유리할 때는 목을 내밀고 불리하면 목을 집어넣는 기회주의자,

넝쿨은 세상의 세력을 타고 올라가는 사람,

황소 뿔은 폭력으로 다스리려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언제나 개집으로 추락입니다.

 

쿵켈은 이것을 면하는 방법이 나 대신에 '우리'를 생각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라는 말은 개인의 문제를 치료해 주고 사회의 문제를 치료해 주는 효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의 이익 대신에 우리의 이익을 생각하면

이 사회의 문제들 가운데 많은 부분이 저절로 해결될 것입니다.

 

나와 가족이 합한 우리, 아름답습니다.

나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합한 우리, 교히 공동체, 하나님이 도우십니다.

 

사도행전에는 '우리'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16장 13절,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전도하는 기록은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 이렇게 "우리"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우리'라고 되어 있는 부분을 성서학에서는

"우리 구절"(We Section)라고 부릅니다.

 

나와 우리 민족이 합한 우리, 애국자가 되게 합니다.

제일 바람직한 '우리'는 나와 하나님이 합한 우리입니다.

 

다시 사도행전의 이야기입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하자

이방인들에게도 할례를 받게 해야 하느냐 그대로 두어도 괜찮으냐 하는 문제로 회의가 열렸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역사에서 최초의 공회의(公會議)입니다.

 

여기서 이방인들에게 그런 부담을 지우지 말고 우상의 더러운 제물과 음행과 피를

멀리하게 하자고 은혜롭게 결정하고 이것을 편지로 알리는데

편지 중간에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것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행 15: 28),

 

"성령과 우리"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우리 행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나', 이렇게 말하지 말고 '하나님과 나, 그래서 우리' 이렇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나 혼자 이 일을 한다, 나 혼자 이 문제와 싸우고 있다' 하시지 말고,

'하나님과 나, 우리가 이 일을 하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한다' 이렇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해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평안을 누리실 수 있었고

담대할 수 있었고 십자가를 이길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계신 아버지 하나님이 오늘 나와 함께 계십니다.

특별히 수험생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이 사실을 믿고 평안을 누리고 담대하고 세상을 이기시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특별히 수능고사를 38일 앞둔 수험생 여러분이 되기를

임마누엘이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