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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의 뜻을 배우라

LNCK 2024. 10. 9.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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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의 뜻을 배우라       마9:9~13          2007.07.29.

 

마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본문은 예수님이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를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신학대학에서 앞으로 목회자가 될 사람들을 위해서

제가 한 40년 동안을 계속 신학 강의를 해 왔습니다.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제게 늘 묻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신학공부를 처음 시작할 때 읽은 책 중에

제일 인상에 남고, 또 많은 감동을 준 가장 중요한 책이 무엇인지,

제가 제일 귀하게 읽었던 책을 좀 소개해 달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을 지난 40년 동안 계속 받은 것 같습니다.

 

그 질문에 대답할 때마다 제가 하는 말입니다.

첫째는 영국의 유명한 신학자 윌리엄 바클레이의 「The mind of Jesus」,

이 책을 내가 탐독했는데, 아마도 한 20번 읽지 않았나 싶습니다.

책이 다 해질 정도로 읽었으니까. 그래서 책을 새것으로 다시 바꿨습니다.

그 정도로 그 책을 즐겁게 탐독을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두 번째가 니그렌(Anders Nygren)의 「아가페와 에로스」,

그 외에 필립스의 「Let God, Be God」

칼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 이런 책을 읽었다고 얘길 합니다.

그러면 학생들이 참으로 대단히 좋은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신학생들이 후에 목사님들이 돼 가지고

그 분들이 내게 편지도 하고 전화도 합니다.

그 중에 「The mind of Jesus」라는 책을 통해서 받은 감화가 참 크고

목사님이 그걸 일러준 데 대해서 자신은 너무 감사하고 있다는 말과 고마운 인사를 듣습니다.

 

<The Mind of Jesus>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그 성경을 겉으로만 읽지 말고, 속으로 예수님을 만나며,

예수님의 마음이 무엇이었는가, 행동과 사건과 말씀 중에

예수님의 그 깊은 마음속에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도는 뭐였던가?

그걸 우리가 생각할 필요가 있어요.

그런 접근 방법이 너무너무 귀한 것이라고 늘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행하심 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것은 비유의 말씀입니다.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은 히브리식 표현입니다. 비유로 사건을 말씀합니다.

만들어 낸 이야기가 아니고 있는 이야기, 잘 아는 이야기, 모두가 아는 이야기,

그런 사건을 말합니다.

 

사건을 이야기로 말하면서 중요한 것은 픽션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넌픽셕을 픽션화한 것이 예수님의 교훈 방법이었다고 신학적으로 정리합니다.

 

넌픽션을 픽션화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사건은 어디까지나 확실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의 속에다가 의미를 넣어서 픽션화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사건을 만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이것을 통해서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가?

The mind of Jesus, 예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는 중에 아주 대표적인 비유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입니다. 이것은 그대로 비유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예루살렘에 왔던 사람이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다 털리고 아주 길거리에 쓰러져서 죽게 됐는데

이 비참한 모습을 성전에 올라가던 제사장이 보고 비켜서 지나갔고,

레위 사람도 지나갑니다. 사람들이 무시하고 멸시하는 사마리아 사람이

저 사람을 잘 돌보아 주었다 하는 얘기입니다.

 

여러분, 한번 뒤집어 생각해 보세요. 이것이 만일에 만들어낸 이야기라면

예수님은 이 사건 하나 때문에 (맞아서) 돌아가셔도 할 말이 없습니다.

 

생각을 해 보세요. 오늘이라도 여러분 이 길거리에 불한당 맞은 사람이 누워 있다 합시다.

목사님이 지나갔고, 장로가 지나갔고, 다 지나갔는데, 웬 조폭이 와서 돌봐 주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건 교회에 대한 모독이죠.

어떻게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고 살아남을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이 문제는 사실이기 때문에 어찌할 수가 없는 거예요. 다 아는 사실이거든요.

여기서 예수님의 픽션화의 의미를 잘 알 수가 있습니다.

 

모두가 알고 있는 뚜렷한 사건 하나를 딱 들어서 자, 제사장이 지나갔고,

레위 사람이 지나갔고, 사마리아 사람이 돌보았다 하는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여기서 제사장, 레위사람은 성전에서 봉사하는 전문 종교인입니다.

전문적인 종교인이에요. 당시에 제사장이 많고 일이 힘들어서 24반열로 했습니다.

24반으로 나누어서 하기 때문에, 1년에 2번밖에는 차례가 안 돌아 갑니다.

 

낙향해서 기다리다가 당번이 되면, 그 때 가서 1년에 2번 봉사합니다.

이렇게 소중한 시간이입니다. 6개월 동안이나 기다리고 있던 차례가 돌아와서

제사장직을 감당하기 위해서 성전으로 올라가는데

아, 여기에 강도 맞은 사람이 길바닥에 누워 있단 말입니다.

 

이걸 만일에 돌보느라고 시간을 보내다가는, 그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만졌다는 이유 때문에, 그는 제사장 직무를 할 수가 없습니다.

일주일 동안은 성전에 못 들어갑니다. 부정한 사람이 되니까요.

 

자, 이제 보세요. 레위 사람들도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입니다. 다 마찬가지입니다.

성전에서 자기가 맡은 바를 충실히 감당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성전으로 올라가는데

어떤 것에도 방해받을 수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자기 일에 충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죄가 됩니까? 여기서 예수님은 지금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제사장, 레위 사람, 다 잘못했다는 거예요. 무얼 잘못 했다는 것입니까?

자신이 할 일에 충실했습니다. 살인을 했습니까? 간음을 했습니까? 도적질을 했습니까?

거긴 걸릴 것이 없어요. 십계명에 걸릴 것은 없어요. 자기는 자기의 할 일을 다 했을 뿐이요.

 

그런데 이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긍휼을 잃어버린 이 두 사람은

잘못한 것이며, 죄라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윌리엄 바클레이는 이걸 말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는 죄의 개념은 율법이 정하는 것, 피상적으로 정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 이 제사장이 지금 간음한 것도 아니고 살인한 것도 아니에요. 그러나 긍휼이 없었어요.

그런고로 살인죄가 되는 거예요. 왜? 죽을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갔으니까.

죽도록 내버려뒀으니까. 방임했기 때문에. 이건 살인죄가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의도입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할 문제입니다.

 

▲성경에 보면, 또 탕자 비유가 있습니다.

동생이 집을 나갔다가 탕진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재산을 다 없애고 거지가 돼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좋아서 잔치를 하고 '죽었다 살았고, 잃었다 얻었노라'고 기뻐하는데

이 형이라는 작자가 기분이 나빠요. 아, 그 형 당당합니다.

'아버지, 내게는 염소 새끼를 한 마리 주어서 내 친구들과 먹고 마시고 놀 게 한 일도 없거늘

아 저 놈이 말이에요, 아버지 재산을 창기와 더불어 다 먹어버린 저 나쁜 놈이 돌아왔는데

왜 이렇게 크게 낭비하며 잔치를 하는 겁니까?' 하고 대들어요.

 

여러분, 형이 무얼 잘못 했습니까? 여러분은 어느 편입니까?

형은 당당해요. 지금 옳은 말 하는 거예요.

그런데, 옳다고 옳은 게 아니에요. 형에게는 긍휼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동생을 환대하지 않고, 또 아버지의 마음에 못을 박았어요.

아버지의 마음을 슬프게 했어요. 그런고로 죄가 되는 거예요.

 

▲여러분, 여기서 우리 죄의 개념을 잘 이해해야 됩니다.

베토벤에게는 크리스토프라는 동생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동생은 투기에 성공해서 큰 부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베토벤이 너무 어렵고 힘들어서 형이지만 동생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요청을 했습니다.

그 때에 동생은 이렇게 편지를 회답했다고 합니다.

'오로지 형의 책임일 뿐입니다. 가난도 형님의 몫입니다.'

 

형은 동생에게 회답을 했습니다. '너의 도움도 필요 없고, 너의 설교도 필요 없다. 끝.'

여러분, 어떻습니까? 정말 따지겠습니까? 옳고 그른 것이 먼저입니까?

이걸 넘어서는 일이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돼요.

 

똑똑한 사람의 문제가 여기에 있는 거예요. 저도 죽고 남도 죽이는 게 바로 여기에 있는 거예요.

잘났다 하고 똑똑하다고 깨끗하다고 하는데,

아니에요. 긍휼이 없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이 긍휼이라는 말은 '엘레오스'입니다.

'엘레오스' 이 말은 자비와 긍휼을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인용한 성경 구절은 호세아 6:6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나는 인애(헤세드)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이것이 오늘 본문에 인용된 말씀입니다.

 

그것은 히브리말로는 '헤세드'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일반적으로 히브리말에서 ‘긍휼 mercy’로 많이 쓰는 것은 '라함'입니다.

 

'라함'이라고 하는 그 긍휼이라고 하는 어원이 너무 재미있습니다.

그건 '렉헴'인데, 여인들의 자궁을 말합니다.

 

여러분, 좀더 생생하게 생리학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자궁, 이것이 긍휼입니다.

그 속에서 생명이 태어납니다. 거기서 생명이 자라고, 얻어먹고, 물속에 떠 있습니다.

 

여러분, 그런 말하잖아요.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가 제일 행복했다.' 이거예요.

하기야 뭐 아무것도 몰랐지만 행복했단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나오면서부터 세상은 고생이에요.

 

어머니의 뱃속에 들어 있어요. 자궁, 그것이 긍휼입니다.

이것이 긍휼의 어원적 의미올시다. 이건 사랑이지만 특수한 사랑입니다.

 

또는 이 긍휼은 새가 먹이를 물어와서 토해서 새끼에게 먹이는 그 모습을 '렉헴'이라고합니다.

자, 이제 보세요. 이 사랑은 창조적입니다. 주도적입니다.

아니 교육적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긴 인애함이 그 속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맥락으로 돌아가 봅시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세리 마태를 부릅니다.

당시에 세리라는 건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합니다.

이건 로마 사람을 위해서 세를 강제로 징수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반민족주의자요,

또한 반도덕주의자요, 반 율법주의자로 완전히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해서

심지어는 거지도 손을 내밀었다가 세리에게 받은 돈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거지가 그 돈을 갖다가 도로 던졌답니다.

 

'죽어도 나는 세리의 돈은 안 받아 먹는다.' 그 정도로 세리는 사람 취급을 못 받아요.

그런데 어쩌면 예수님께서 세관에 앉아 있는 현장에 앉아 있는 사람을 부릅니까?

난 여기서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를 때, 선발하지 않고

'선택'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뭐 자격시험 본 거 아니에요.

 

사람이 인물이 어떤가, 뭐 과거가 어떤가, 뭐 요샛말로 검증을 해가지고

이 난리를 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마구잡이로 불렀다고 생각돼요.

아, 생각해 보세요. 세관 현지에 앉은 이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내가 과거를 회개합니다.' 라고 말한다면, 그리고 그때 그를 불렀다면 또 얘기가 좀 달라요.

 

하지만 현장에 세관에 앉아서 세금 받고 있는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이거 대단한 일 아닙니까?

모든 사람에게 멸시받는 이 사람을 이렇게 불러서 제자를 삼았고

바로 그 제자가 마태복음을 쓴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불러서 사람을 만든 거예요. Making Disciple.

이게 중요한 거예요. 우리는 사람을 너무 가려요. 아니요. 사람을 만들어야 돼요.

 

▲여러분, 남편이 시원치 않습니까? 남편을 (사람) 만드세요.

아내가 시원치 않습니까? 사람을 만드세요.

강퍅한 자를 온유한 자로 만들어 가는 거예요. 게으른 자를 부지런한 사람으로,

속된 사람을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이고 그것이 예수님의 제자 훈련 방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긍휼 mercy, 라함이죠.

 

그런고로 교육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깨닫게 하는 것도 아니고, 알게 하는 것도 아니고,

감격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긍휼을 배우라" 마9:13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시면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옵소서. 저들이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한마디가 바로 긍휼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시면서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리고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이 긍휼의 극치입니다.

 

또한 이것은 주도적입니다. 책임을 내가 집니다. 책임을 저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책임을 묻지도 않습니다. 주도적 사랑은 책임을 내가 지고 또한 미래 지향적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모르지만 이후에는 알리라."

선한 일을 하시며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지금은 모르지만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여러분, 부모님들이 자식을 사랑하는 게 뭡니까?

 

지금은 모르지만 언제는 알 것이다. 그런 마음에서 사랑하는 것이지요.

지금 당장 옳고 그르고를 따지자는 것 아니잖아요. 따져 봐야 됩니까?

잘못한다고 때린다면 매일 때리다 말지, 이게 되겠습니까?

먼 훗날을 바라보며 지금은 네가 이해하지 못하나 언젠가는 내 뜻을 알 것이다.

그런 확실한 믿음이 있어요.

 

또한 행동적이고 고통을 당할 일이 있다면 내가 대신 당하는 겁니다. 이것이 긍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이 긍휼하시는 큰 사랑에 응답하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유명한 얘기가 있습니다. 영국의 인도주의자로서 헨리 8세에게 그렇게 신임을 받아서

1529년에 대법관으로 임명이 됐던 사람입니다. 그는 하원 의장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헨리 8세의 부정한 행위, 그 왕이 이혼하려고 할 때 이혼은 안 된다고

강력히 주장한 나머지 그는 파직되었고 마지막에는 57세에 단두대에서 처형을 당하게 됩니다.

 

토마스 모어(Thomas More) 라고 하는 분입니다.

그가 사형재판 받을 때, 그가 재판장에게 한 말은 유명한 말입니다.

 

"재판장이여, 내가 당신을 지금 친구라고 부르는 것을 용서하시오.

친구여, 나와 당신은 바울과 스데반처럼 만나기를 바랍니다.

 

분명 바울이 스데반을 죽였습니다만 하늘나라에서는 바울과 스데반이 만나서

얼마나 친한 사이로 고맙게 생각하며 그렇게 주님 앞에서 영광을 누리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오늘 당신이 나를 사형에 처하지만은

언젠가는 당신이 예수를 바로 믿고 하늘나라에 가서

우리 서로 바울과 스데반처럼 만나기를 바랍니다."

 

이 말을 듣고 재판장이 감동을 해서 "나는 당신을 사형에 처하는데

당신은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그가 한 말은 너무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먼저 긍휼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에게 먼저 긍휼을 베풀었기 때문에 나는 누구도 비판하지 않습니다.

누구도 심판하지 않습니다. 그 긍휼을 다소라도 내가 실천하려고 하는 것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하셨던 일곱 마디 말씀 중에 맨 먼저 하신 말씀은 참으로 위대한 말씀입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한 사람이 생각납니다. 그는 벤허입니다.

 

▲영화 벤허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그 한마디를 놓치면 벤허를 제대로 못 본 것입니다.

몇 번을 보아서라도 이 한마디를 꼭 들어야만 합니다.

왜 그 많은 고난을 당하면서도 저항하지 않았나?

왜 칼을 쓰는 자 앞에 칼로 대항하지 않는가?

왜 폭력을 쓰는 자 앞에서 폭력을 쓰지 않는가?

왜 저주하지도 않고 미워하지도 않는가?

 

그렇게 많은 억울한 고난을 당하면서도 한평생을 무저항주의로 오직 사랑으로 살며

그런 고난을 이겨 가야하는 그 이유가 뭐냐고 묻는 말에 벤허는 대답합니다.

 

"내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바로 그 자리에 있었노라.

예수님께서 저들의 죄를 사하여주옵소서 하시는 말씀이 내 귀에 들려올 때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고 폭탄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 손에서 검이 떠나가는 것을 느꼈노라."

 

여러분, 이 말씀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게 긍휼입니다.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좀 외람되고 죄송한 말씀입니다마는 반대로 한번 추리해볼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면서 만일에 이렇게 말씀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놈들 두고 보자. 심판 날에 두고 보자." 만약 그렇게 말했다면 어떻습니까?

 

여러분, 이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하나님이여,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그런데 사하여 달라고 하는 그 근거가 어디 있느냐?

저들이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게 긍휼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구원은 오직 그의 긍휼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의 긍휼과 그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 바로 믿음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쉽게 사랑한다, 사랑한다 하는 말을 합니다. 전 늘 생각합니다.

사랑이 중생해야 합니다. 사랑의 개념이 바뀌어야 합니다.

쓸데없이 사랑한다는 말 하지 마세요. 그건 거짓말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라고 하면서 사람을 괴롭힙니다. 그만 하세요.

사랑이 중생해야 됩니다. 사랑이 거듭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크신 긍휼 안에서 그 큰 긍휼 속에서 내 사랑이 중생하게 될 때,

이 세상에 사랑 못할 사람 없어요. 이 세상에 누구를 비판할 용기도 없어요.

아무 할 말이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 하십니다. 긍휼을 배우라.

오늘도 한 걸음 더 배워야 하겠습니다. 기도하십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주의 전으로 저희를 불러 주시고

긍휼하심을 다시한번 확인하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는 사랑한다고 하면서 비판하고 있으며, 때로는 긍휼을 베풀지 못하고

우리는 나의 사랑에 집착해서 사랑의 명목으로 많은 사람을 괴롭히는 저희들입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주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기에

오늘 우리가 있는 것처럼 우리의 긍휼에 대한 확실한 사랑이 있어서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그 긍휼을 베풀며 그 긍휼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생명과 용기와 큰 창조적 역사가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