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사랑은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행20:17~38 2024.10.20.
전략 주1)
◑밀레도
오늘 우리는 본문 행20장을 통해 <바울의 고별 설교>를 읽었습니다.
행20:31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기억하라'
바울 사도는 왜 자신을 기억하라고 했을까요?
'저를 잊지 마세요. 잊어버리면 섭섭해요' 그런 말이었을까요? 아니죠.
'(내가 가르친) 말씀을 기억하라'는 말이죠.
나중에 35절에 '기억하라'는 말이 한 번 더 나오는데, 마찬가지죠.
'말씀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한 말이에요.
그런데 에베소로 가지 않고,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들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오게 했습니다. 밀레도는 에베소에서 남쪽으로 40킬로 떨어진 곳이죠.
▲여러분 <서양 철학사>를 공부해 보면, 맨 첫 페이지에 소크라테스 이전의
'Pre-소크라테스 철학자들, 밀레토스 학파' 이런 챕터가 있습니다.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 이분들이 밀레토스(밀레도) 출신들이에요.
세계 건축의 가장 처음도 밀레도 근처에서 나왔습니다. 기둥 양식 같은 거요.
그래서 밀레도는, 서양 문명이 흘러나온 지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도시입니다.
저도 성지순례가서, 에베소에서 밀레도로
몇 번이나 차를 타고 왔다 갔다 해본 적이 있습니다. 한 시간 정도 걸립니다.
40킬로니까, 걸어서 가면 여기 포항에서 영천까지 정도 거리가 됩니다.
왜 바울이 에베소로 직접 가면 되지, 이렇게 번잡하게 했을까요?
바울이 에베소로 가는 것은, 대단히 위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는 이렇게 긴장된 분위기가 흐릅니다.
◑교회가 어려울 때 등장하는 '장로'
본문에 '에베소의 장로' 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여기서 '장로'는, 성경에 나오는 모든 장로를 포함해서
오늘날의 장로와는 조금 다릅니다. 아직 직제가 분화 되기 전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7절에 '장로' 들을 청했다 그랬고,
28절에 '감독자'라는 말이 나오고,
28절에 '보살핀다' 셰퍼드(목양) 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장로=감독=목사 이 3개가 겹쳐서 함께 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본문에서만 아니라, 바울 서신 내내 그렇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장로' 라는 말은, 오늘날의 개념으로는 목회자 입니다.
여기서 주석가들이 당황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사도행전 성경을 쭉 읽어왔는데
'에베소 교회에서 장로 뽑고, 안수하고 세웠다' 라는 말이 전혀 없습니다.
'에베소 교회에 장로가 있었나?'
요즘 젊은 사람들 말로 '갑툭튀'라고 그래요. '갑자기 툭 튀어나오다'
그 전에, 에베소 교회에 '장로'라는 말이 안 나왔는데,
본문 행20장 '밀레도의 작별' 대목에서, '장로'가 갑툭튀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주석가들은 당황스럽게 본다는 거죠.
바울은 에베소의 두란서 서원에서 2년 동안 매일 몇 시간씩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강력한 제자훈련, 혹은 신학교 교육을 시킨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말씀의 지도자(장로)들이 세워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분들이 전혀 눈에 보이지 않다가,
'교회에 위기가 닥쳐올 것이다' 라는 상황에서, 전면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게 초대교회 였습니다.
빛나는 자리, 이름 내는 자리, 영광 내는 자리에는 지도자들이 안 보여요.
그랬는데 어려울 때가 되니까, 남달리 헌신해야 될 때가 되니까,
그제서야 보이는 거예요. 등장하는 거예요. '아, 저분들이 장로님이었구나'
*1990년대 초에, 이란에서 홉세피안 목사가, 이슬람 원리주의 정권에 의해
피살된 사건이 전세계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습니다.
그때 이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여러 사람들이 홉세피안을 대신해서, 교회 대표 자리를 (쉽게 말하면 총회장) 자원했습니다.
자기도 홉세피안 목사처럼, 의문의 피살을 당할지도 모르는데,
교회 지도자들이 자원하고 나선 것입니다. 내가 교회의 대표가 되겠다고요!
이 밀레도 바닷가에 온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은
고난 받을 각오, 순교를 각오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다가,
이제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는 위기의 때가 닥치자 (바울이 에베소로 못 들어가잖아요)
자기들이 '장로'로서 정체성을 비로소 드러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공격은 바울을 향해 있었습니다.
바울 혼자 맨 앞에 서서, 자기 등에 온갖 화살을 자기 몸으로 다 맞는 형국이었어요.
지금 바울은 에베소로 들어가지도 못하는데,
에베소에서는 장로들이 활동하고 있었거든요. 그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그게 아니라는 거죠.
'여러분이 에베소교회를 담당해야 된다' 라는 말을 지금 하는 것입니다.
◑겸손과 눈물과 오래 참는 사역
바울은 자신의 에베소 3년 사역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20:19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여러분 바울의 에베소 사역은, 겉으로 보면 대단히 화려한 사역이었습니다.
엄청난 치유가 일어났고요. 귀신들이 제압되었고요.
마술책을 막 가져와서 불사르고, 도시가 그냥 완전히 뒤집어졌습니다.
그 중심에 바울이 있었잖아요.
에베소로부터 온 아시아 지역에 복음이 전파되고,
그렇게 성공적이고 화려하기까지 한 사역을 했는데
막상 그 시간 동안에 바울 본인은 '참 힘들었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지난 시간에 설교했는데, 고린도전후서를 보면,
바울이 '사형 선고를 받은 것 같았다,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다' 이렇게 말할 정도로
무척 힘들었습니다. ☞https://rfcdrfcd.tistory.com/15981983 (강추)
에베소에서 사도바울이 일기를 썼다면, 겸손과 눈물과 참고 견딘 이야기,
그리고 그 위에 종종 자신의 눈물이 떨어져 있었을 것 같아요.
우리는 몰랐습니다. 사도바울께서는 늘 웃고, 늘 여유 있고, 늘 당당했는데
뭐 '모든 겸손과 눈물, 참고 견디셨다고요? 그러셨나요?' :19
장로들은 이제서야 비로소 알게 된 거예요.
바울의 직접 고백을 통해서!
이제 에베소를 떠날 때,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여러분 돌아가신 하용조 목사님, 멋있게 사역하셨잖아요.
근데 목사님을 가까이서 뵀던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이 분이 습관이 하나 있었답니다.
목양실에서 나갈 때마다, 화장실 갔다가 나갈 때마다,
늘 거울을 보고, 입을 벌리고 활짝 웃는 연습을 하셨대요.
웃을을 줄 몰라서 그랬을까요?
뭐 성도들 한테 웃는 얼굴 보이는 게 중요하니까... 평소에 웃는 연습을 하셨나보다...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쉽게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어쩌면 웃지 못할 상황이 많지 않았을까?
도저히 웃을 수 없는 마음 상태가 목회하시면서 많지 않았을까?'
그래서 늘 자기 표정을 체크하시면서, 웃는 얼굴로 돌아오셔야 했던 것입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그렇습니다. 물론 뭐 교회가 갈등이 있고
그래서 어려운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성도들의 삶이 힘들거든요. 그걸 가까이 지켜보면서 목회자는 마음이 힘든 거죠.
우리 교회도 한 분 한 분의 기도 제목들을 보면
삶의 무게에 허덕이는 분들 참 많습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그냥 스마일 하기가 참 힘든 상황이죠.
◑겸손과 담대함을 함께 갖춘 바울
여러분, 바울의 목회도, 겸손과 눈물과 오래참음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그 겸손이 전부가 아니에요.
바울은 겸손할 뿐만 아니라, 담대하게 증언했습니다.
20:20~21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바울은 '거리낌이 없이 담대하게 증언' 했습니다.
저는 살아오면서, 겸손하지 않은 사람이 오랜 시간 동안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인정받은 경우는.. 한 번도 못 봤습니다.
그런데 겸손 만으로 안 돼요. 바울을 보면,
겸손과 담대함을 함께 갖춘 사람입니다.
성도들에게 유익한 것이라면, 그는 거리낌 없이 담대하게 가르쳤습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귀히 쓰시는 줄 믿습니다.
한국이 요즘 한강 작가 때문에 난리인데요.
저도 인터뷰라든지 쭉 보니까, 이 분이 굉장히 신중하고 겸손한 사람이에요.
근데 보면요, 겸손 하기만 한 사람은 아니에요.
굉장히 단단한, 또한 당당한 내면세계가 있어요.
여러분 진짜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세상에 유익이 되는 사람은
겸손과 담대함을 함께 갖춘 사람입니다.
우리와 우리 자녀들이 이런 사람 되기를 축복합니다.
◑'성령에 매여' 보다는 '심령에 매여'
20:22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성령의 매여'
이 말의 원문은 '영에 매여' 입니다.
성 Holy 라는 말이 안 나와요. I go bound in the spirit
그래서 이게 '성령' 일수도 있지만, '나의 영' 그냥 '나의 마음'일 수도 있습니다.
옛날 개역성경에는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라고 했죠.
이건 '내 마음'이라는 거죠. 제 생각에는 이 번역이 맞습니다.
'성령에 매인' 것이 아니고, '내 마음에 매인' 거예요.
여러분, 성령은 우리를 묶으시는, 결박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를 풀어 주시는 분이세요.
성령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는 분입니다.
성령께서 바울에게 '결박과 환란이 기다린다' 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잖아요.
무슨 말입니까? 억지로 순교의 길을 가라는 게 아니고, '안 가도 된다'는 말이에요.
꼭 가고 싶으면 가도 되지만, 안 가도 된다.. 라는 말을, 성령님이 하신 겁니다.
바울은 자기 결정으로 가는 거예요. '심령에 매여' .
부모들 중에 그런 사람들 있잖아요.
'야, 너 왜 공부 안 해? 맨날 TV에 앞에 앉아 있고...' 그런 부모가 있죠.
또 '야, 공부 좀 쉬엄 쉬엄 해. 그만 해도 돼!' 라는 그런 부모도 있죠.
목회자들도 그런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성도들이 작정하고, 가정에서 헌금을 가지고 오는데,
교회를 위해서 감사함으로 받기도 하지만,
'꼭 이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 가정의 형편을 알기에, 돌려 보내든지
'일부만 받겠습니다'.. 할 때가 있습니다.
일단 돌려보냈다가, 기도하고 다시 가지고 오면 그때 받을 때도 있습니다.
지금 성령님과 바울의 관계를 예로 들어 말한 것입니다.
바울은 '내 마음에 매임(결박)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결박'은 유대인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단어입니다.
이삭이 모리아 산에서 결박당했을 때, 바로 그 장면을 연상케 하는 단어죠.
여러분, 이삭이 결박당할 때 억지로 했을까요?
아니면 자발적으로 순순히 했을까요?
아마도 백 세가 훨씬 넘은 노인 아브라함이
젊은 이삭을 힘으로 제압하기는 쉽지 않았을 거예요.
그래서 이 결박당함 이라는 것은, 유대인들의 민족적 정체성을 나타냅니다.
키에르케고르가 그 말의 연구를 많이 했습니다.
정체성의 핵심에 있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결박 당한 민족이다.'
그 안에서 엄청난 고난을 해석하고 이겨나가는 거예요.
여러분 사랑은, 본질적으로 결박당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스스로 묶는 것입니다.
결혼이 뭐예요? 이 세상에 수많은 이성들이 있지만
'지금부터는 나는 당신만 사랑 하겠습니다. 당신만 바라 보겠습니다'
하고 스스로 묶어 버리는 거예요. 스스로 묶이는 것입니다.
스코틀랜드의 결혼 풍습에 이런 게 있어요.
결혼식 중에 신랑 신부의 손을 함께 묶습니다.
이거를 가족들이 묶어주기도 하고요. 친지, 동생, 친구들이 묶어주기도 하고요.
그래서 결혼이 무엇인가? 묶이는 것이다.
힘이 없어서 묶이는 게 아니죠. 자발적으로 묶이는 겁니다.
부모의 사랑도, 그야말로 묶이는 거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바쁜 사람이라도, 자식 일이라면 달려 가잖아요. 그게 사랑에 묶여있는 거예요.
자녀가 아프면 나도 아프고,
자녀가 죄 지으면 나도 죄인이 되어서 고개를 못 드는 거예요.
꼼짝 못합니다. 묶여 있는 거예요. 풀 수가 없어요. 결박당하는 거예요.
그게 사랑이에요. 하나님의 사랑도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본질은 '자유'예요. 전적으로 자유로우신 분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잖아요.
그게 스스로 묶이신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Without God, we cannot
Without us, God will not
'하나님 없이,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없이, 하나님은 하려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니어도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니어도 교회를 세우실 거예요.
나 아니어도, 자신의 사익을 이끌어 가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 없어도, 멀리 가실 수 있어요. 멋지게 가실 수 있어요. 빨리 가실 수 있어요.
우리가 미적대고 못 따라가니까... 그게 문제죠.
근데 하나님은, 우리 없이 가기를 원하지 않으시는 거예요.
하나님은 혼자서 천국에 계실 수 있지만, 우리 없이 있고 싶어하지 않으셔서
이 땅에 오신 줄 믿습니다.
God will not without us.
이게 스스로 묶인 사랑입니다.
이 주님의 사랑을 알기 때문에, 바울은 자기의 심령에(마음에) 스스로 묶인 것입니다.
◑두렵지만, 옳은 길이니까 간다!
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굉장히 감동적인 대목인데, 근데 생각보다
이 대목에서 바울이 감정의 언어를 쓰고 있지 않습니다.
'내 마음이 두렵지 않다' 든지... 뭐 그렇지 않습니다.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라는 말은
냉철한 이성적 판단의 언어입니다.
바울이 지금 나는 두렵지 않다.. 라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두렵지만, 이 길이 가치 있는 길임을 안다'는 말을 하고 있어요.
여러분! 내가 옳다고 믿는 길을 갈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바울에게 두려움이 없었을까요?
여러분 두려움, 불안이라는 거는, 본래 왔다 갔다 해요.
'믿습니다' 해놓고도 다시 불안해서 떠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큰 병에 걸려서 투병해 보신 분들 아시죠?
목사님들이 오전에 심방 가서 같이 예배드리면, 너무 평화로워 보여요.
'아멘!' 하고 믿습니다. 큰 병을 잘 이겨 나가는 것 같아 보여요.
그런데 오후에 전화해 보면, 완전히 다릅니다.
굉장히 힘들어 하시고 흔들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불과 몇 시간 사이에!
인간의 마음은 그렇게 잘 왔다 갔다 합니다. 여러분도 경험해 보셨을 거예요.
바울은 예외 이었을까요?
그래서 바울은 '나는 전혀 두렵지 않다'가 아니라,
'나는 두려워도 옳은 일은 여전히 옳은 일입니다.
나는 낙심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나는 시시때때로 불안해 하지만, 나에게 그 불안을 맡길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우리 삶에서 그렇게 하나님을 선택할 때, 그 길을 감당할 힘도 용기도 주시는 줄 믿습니다.
◑목회자의 결연한 각오
20:26~27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갑자기 '피'라는 단어가 등장했습니다.
이게 너무 생생한 단어라서, 사실은 굉장히 부담되는 맥락입니다.
내용과 맥락은 이런 말입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 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히13:17
여러분 세상의 대부분의 충고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죠.
주식 투자 펀드 매니저가 '이렇게 하시라' 권고하지만, 책임집니까? 아니잖아요.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처럼'
목회자가 그렇고, 사랑방 목자가 그래야 됩니다.
어떤 순간에도 '내 책임 없다' 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겁니다.
지금 바울이 '많은 사람들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다'
피는 곧 생명을 가리키는 히브리적 표현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겔 33:1 이하의 말씀을 자신에게 인용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움을 받은 자가 경비를 소홀히 하여
백성에게 화가 임하면, 그 피가 파수꾼에게로 돌아가도록 되어 있었죠(겔 33:1-7).
그러나 파수꾼의 간절한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여전히 악행을 거듭하면, 그들은 자기 죄악 중에서 죽고
파수꾼의 생명은 보존되었죠(겔 33:8, 9).
따라서 바울의 이 선언은, 20절의 진술을 더욱 뒷받침해 주는 엄숙한 고백으로서
복음을 맡은 자로서, 바울은 자기의 책임을 철저히 수행했음을 의미한다.
에베소에서 바울은 '내가 맹수와 더불어 싸우는 듯 했다' 그랬잖아요. 고전15:32
아마 죽을 위기가, 몇 번이나 바울을 지나갔을 거예요.
그냥 칼이 옆을 스쳐지나가는 경우도, 굉장히 많았을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또 앞으로 순교 길을 가는 걸 알기 때문에
이 '피'라고 하는 말을 들을 때 정신이 번져 뜨는 겁니다.
성도들은 바울이 흘릴 피를 걱정하고 있는데,
바울은, 겔33장의 파수꾼의 '피값'을 걱정하는 거예요.
후략
............................................
주1) 전략된 부분
우리 교회 본당의 모습이 많이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지금 조명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고요. 거의 다 돼갑니다.
본당 공사하고 디자인 할 때, 모든 교인들을 위한 배려를 했지만
특히 3부예배, 또 4부예배 청년들을 위한 공간으로, 좀 더 포커스를 맞추었습니다.
앞으로 이 예배실을 1부, 2부 예배드리는 우리 어른들은 약 30년 정도 쓴다면,
3부, 4부 예배드리는 청년들은, 훨씬 더 오래 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미래를 준비한다' 그랬는데,
웬만한 부분들은 젊은이들의 감각에 맞추면, 미래를 준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동시에 이 교회를 섬겨오신 어른들의 삶도 참 귀중하고 소중합니다.
1부, 2부 예배 때는, 제가 크리스탈 큰 강대상으로 올라가서 설교합니다.
지난 20년을 그 자리에 있었던 강대상입니다....
'기억의 윤리'라는 말이 있죠.
'사람 도리 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게 뭐죠?
한국분들은, 내가 가야 할 곳에 가고, 얼굴 비쳐야 할 곳에 비치고 인사하는 것을
사람의 마땅한 도리 라고 생각합니다.
가야 할 자리에 다 가면 좋겠지만, 못 갈 때도 있습니다.
뭘 보낼 수도 있지만, 그것도 쉽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소한의 도리는.. 기억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잘 기억하는 것은, 최대한의 배려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억을, 인간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감사한 일, 내가 빚진 일,
내가 선생님의 배려와 응원과 지지 기도가 없었으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습니다.. 하는 기억이 중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잘못한 일, 죄송한 일, 실패한 일도 우리는 기억해야 됩니다.
사회적 재난이 있을 때에, 그것을 기억하는 것은 인간의 도리입니다.
아픔 당한 이들, 우리 사회가 아프게 한 이들,
우리 어른들이 지켜 주지 못한 아이들, 젊은이들에 대해서
미안한 마음을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 '기억의 윤리', 어른의 도리일 것입니다.
교회 공사가 한창일 때에, 새벽기도를 <생명의 삶>으로 느헤미야 큐티 했습니다.
거기 보면, 예루살렘 성을 쌓기 위해서 힘썼던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 하나 나옵니다.
그 이름들을 일일이 읽으려고 그러니까 좀 힘들어요.
제가 그걸 계속 읽으면서 '야, 이 말씀이구나'
'오늘 우리 교회도, 이 교회를 섬기기 위해서 헌신하셨던
한 분, 한 분의 이름을 하나님은 기억하고 계시겠구나...' 할렐루야!
그 믿음으로 읽으니까, 새롭게 성경 활자가 다가 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교회 모양은 조금씩 바뀌겠지만,
여러분이 이 예배당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신 분들을,
앞으로 교회는 힘을 다하여 기억하겠습니다.
'기억의 윤리', '인간의 도리'란, 길을 걷는 정신이란 말이죠.
이 말은 사도행전 과도 굉장히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기독교'라는 말이 생기기도 전에,
'교회'라는 말이 일반화 되기도 전에,
'그 길을 전한다',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를 있게 해 준 분들을 기억합니다.
이번 수요일 날 "종교개혁 기념 찬양제" 합니다.
왜 이 날에 하는 가요? 추수감사주일에 할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기념찬양제를, 특별히 그 날에 하는 것은
'종교 개혁을 우리가 특별히 기억하자'는 공동체의 고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