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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센 바람이 씨앗을 멀리 보낸다

LNCK 2024. 12. 12.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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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센 바람이 씨앗을 멀리 보낸다 - YouTube

거센 바람이 씨앗을 멀리 보낸다            행25:1~12             2024.12.08.

※행25장을 설교하면서, 최근 일어난 계엄사태를 빗대어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도입 / 선교여행 보고    주1)

◑공평과 정의가 세워지는 나라 건설이 쉽지 않습니다

화요일 아침에 저는 캐나다에 있었습니다. 뉴스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2024.12.03.
한국 시간으로는 화요일 밤이었죠.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했습니다. 

지금은 2024년인데, 한국이 민주주의 나라인데, 
그래서 현지의 캐나다 인들은, TV 뉴스에 나오는 모습,

즉 헬기가 국회 운동장에 내리고, 군인들이 창문을 깨고 국회로 난입하는 장면들을 보면서 

 

'아 저거 노스 코리아지.. 당연히 북한 이야기지... 
남한에서 저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다' .. 라고 생각을 하더라고요. 
그만큼 의외의 사건이었습니다. 

제가 수요일 낮에, 그 사건이 있은지 하루 반 후에,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탔는데 
기내 좌석이 많이 비어있었습니다. 
뉴스에 의하면, 한국으로 들어오려던 방문객들, 관광객들 뿐만 아니라 
사업차 방문을 꼭 해야 되는 사람들도, 비행기 편을 많이 취소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국의 아주 중요한 외교 일정도 거의 올스탑 되어 있습니다. 기도해야 될 때입니다. 
우리가 오늘 누리고 있는 이 안정, 평화라고 하는 게, 얼마나 깨어지기 쉬운 것인지... 
다시 한번 우리가 절감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성도는 깨어있어야 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깨어있어서 나라를 위해서 기도해야 되고, 
책임 있는 시민으로서 깨어있어서, 기독교인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됩니다. 

아울러 이러한 혼란 가운데에 기도할 때에, 우리가 경각심은 가지지만, 
그래도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소망을 가지고 기도해야 됩니다. 

'모든 일을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이라 했으니, 
이 아픔과 혼란을 통해서도,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한 단계 더 진전할 수 있도록, 
우리가 소망을 갖고 기도해야 됩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한국을 보니까, 민주주의를 세워간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 
한국은 그래도 잘 해 나가겠지만, 더 걱정은 우리나라 미국이다. 
미국의 민주주의도 참 고민이 많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공평과 정의의 나라를 세워가는 것이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미쉬파트, 체다카  주2)

◑공평과 정의가 무시되는 은혜 (은혜의 잘못된 사용)

오늘 본문 말씀도 그런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행25:11

 

이 한마디는, 지금까지 우리가 보아왔던 법정 드라마처럼 진행되었던 바울의 이야기, 
법리를 따져가면서 치열하게 공방이 전개되는 이 재판 시리즈의 클라이맥스입니다. 

이 말 한마디로, 지금까지 팽팽했던 이 재판의 긴장이 확 풀립니다. 
이제는 이 가이사랴 총독의 재판정에서, 어떤 중요한 결정이 나도 소용없습니다. 
독자들의 시선은 전부 다 이제부터 로마로 급하게 옮겨가죠. 

왜 바울이 가이사에게, 즉 황제에게 상소하려고 했나요? 
지금 이 가이사랴의 총독의 법정에서, '공평과 정의'가 시행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행25:2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할새
베스도의 호의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기기를 청하니 
이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고자 함이더라'

'베스도의 호의로' 
'호의'는 '카리스'라는 단어예요. 
이게 '은혜'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베스도가 바울에게 호의(은혜)를 베풀어달라...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그런데 이게 진짜 '호의'를 구한 게 아니었습니다. 

 

겉표면에는 '호의'인데, 그 이면에는 '살해 계획'이 숨어있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베스도의 호의'를 이용해서, 길에 매복했다가 바울을 죽이려 계획 했습니다.

'호의'를 이용해서 사람을 죽이려 하다니...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지금 베스도와, 유대지도자들이 서로 결탁하고 있는 겁니다.

서로가 서로를 잘 봐주는 관계인 거죠. 각자의 유익을 위해서! 

누군가의 호의, 그 자기들끼리 좋은 관계가, 
누군가에게는 불의가 되고, 눈물이 되고, 가정 파괴가 되고, 죽음이 되는 거예요.
(*과거 1212사태나, 최근 계엄사태... 모두가 친한 사람들끼리 서로 작당해서 일으킨 불행이죠)

 

더 충격적인 것은 여기서 쓰이는 호의 favor 라는 이 단어가 
헬라어로 카리스 grace 즉 은혜라고 부르는.. 
우리가 성경에서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그 단어(은혜)라는 점입니다. 

이 '카리스'라는 단어가 24장에도 나왔습니다. 
'벨리스가이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  행24:27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카리스, 호의)을 얻고자 하여'
천부장도 보고했습니다. '바울은 죄가 없습니다. 놓아주는 게 맞습니다.'

그런데도 벨릭스는 바울을 풀어주지 않습니다. 왜요? 
벨릭스 총독은 유대인들의 '카리스, 호의'를 얻고자 했습니다. 
정치적인 판단으로 그랬던 거죠. 바울을 구류해 두는 것이, 총독의 통치에 도움된다는 거죠.

바울을 석방함으로써, 괜히 유대교 지도자들의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없다는 거죠.

여러분, 이렇게 세상의 정의는, 실현될 듯, 될 듯 하다가 자꾸 미끄러져 가잖아요. 
그만큼 이 세상에 억울한 재판들이 많습니다. 

▲아는 사람이라서 봐 주는 '호의적인' 판결 
2010년의 일입니다. 한 버스 기사가 버스를 운행하면서
현금 4,400원 받고서, 그 중에 400원 가지고 커피를 사 먹었대요. 
두 번 그렇게 삥땅 해서 800원, 
버스 회사는, 그것 때문에 그 기사를 해고시켜 버렸습니다. 

기사는 중앙노동위원회에 제소했습니다.

위원회는 '해고 무효' 판단을 했습니다. 

그런데 버스 회사가 불복했습니다.
회사는 변호사를 사서, 이 사건을 법정으로 가져갔는데 
담당 판사는 '버스기사 해고가 정당하다'라고 판결했습니다. 

이 버스기사는 변호사를 사서 항소할 돈도 없고요. 
또 한 회사에서 해고되니까, 제대로 된 직장도 못 가지고... 굉장히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이 판사가, 3년 후에, 
그보다 훨씬 더 심한 사건에서는, 두 케이스를 모두 '무죄'로 판결해 주었습니다.

1) 어떤 검사가, 85만원어치 접대를 받아서 면직 당한 케이스의 재판에서
'그 처분이 부당하다, 처분이 지나치게 가혹하다'고 징계를 취소해 버렸습니다.

2) 그 전에는 국가정보원 직원이 피감기관으로부터 성접대를 받았는데 
역시 파면됐습니다. 다른 비위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자 국가정보원 직원이 낸 소송에서, 또 그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그의 파면은 가혹한 징계라고요. 

(*고작 8백원 떼 먹은 버스기사는 파면이 정당하다고 판결하고,
그보다 훨씬 더 큰 비위가 있는 두 사건은, 파면이 부당하다고 각각 판결했지요)

여러분 이렇게 정말 일관성 없는 재판을 한 분이 
최근 대법관 후보까지 올라갔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 큰 문제가 되었던 것을 기억하시죠?

알고 보니, 버스 회사 측 변호사가 
이 판사의 고등학교 후배이고, 사법연수원 동기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봐 주기' 판결을 내린 것입니다.   

이런 것을 '카르텔'이라고 그러죠. *부당한 공동 협업체
자기들끼리 좋은 마음으로는 서로 통하는 거죠. 서로 아는 사람이라고, 봐 주는 것입니다.
(*이번 계엄사태도 늘 그렇듯이, 아는 사람들끼리, 서로 친한 사람들끼리

공의와 공평을 무시하고 행한 것입니다. 반면교사 삼아 우리 각자가 조심하자는 취지입니다)  

▲9절에도 보면,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카리스, 은혜)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

여러분 말이 안 되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길에서 매복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미 바울을 심문을 다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부당한 요구를 하는데도, 그들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서, 
즉 카리스(호의, 은혜)를 얻기 위해서...

베스도는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갈래?' 라고 물어보는 거예요.


전임총독 벨릭스나, 신임총독 베스도나.. 비슷하게, 유대인의 호의를 얻고자 했습니다.

유대 기득권층과 잘 지내려 했고요, 그래서 그들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정의, 공평의 원리는 실종되고 말았죠.    주2) 정의, 공평

은혜(카리스)는 원래 좋은 것인데, 지금 총독과 유대인 지도층들이
마치 카르텔처럼 서로 서로 은혜를 베풀어주는 가운데, 
바울이 그 가운데서 불이익을 당하고 있는 거죠.

이 말을 듣고, 바울이 결심을 하는 거예요. 
'만일 이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는 것이 다 사실아 아니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내줄 수 없나이다.'   25:11

'내줄 수' (카리조마이)
여기도 똑같이 '카리스'의 동사형 '카리조마이' 가 쓰였습니다. 
'호의를 베풀다. 선물로 내어주다' 라는 단어예요.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호의로 내줄 수 없다'는 뜻이죠.

(*지금 설교의 맥락은, 최근 일어난 계엄령 사태가
이렇게 아는 사람들끼리 서로 서로 잘 봐 주는... 마치 카르텔과 같은 형태로
일어났다는 사실을, 본문 성경에 빗대어 설교하는 중입니다.

그런 가운데 '공의와 공평'이 실종되는.. 부당한 일들이 일어난다는 거죠.
본문에서는 바울이 그 희생자였습니다.)

여러분 놀랍지 않습니까? 한 사람의 목숨을 그냥 '호의'로 내어주는 거예요. 
로마 총독과 유대인 기득권 층이, 서로 결탁해서, 서로 잘 봐주는 거죠.

 

사실 그 때나 지금이나, 이런 일들은 늘 일어나고 있고, 

이게 사실은 당시 로마사회에서 유행하던 페이트로니지 (후견인, 빽) 문화였습니다.   주3)

▲이 짧은 본문에 '호의 - 카리스' 단어가 네 번이나 나옵니다. *24:27, 25:3, 25:9, 25:11

여러분 지난 시간에는 '돈으로 작동하는 세계'를 살펴 보았습니다. 
거기에 비해서 영원한 아마추어, 사랑으로 사는 사람 바울 이야기를 살펴 보았습니다. 

그와 비슷하게, 오늘은, 호의로 작당하는 세계, 자기들끼리 서로 베풀어주는 호의 입니다. 
여러분 '호의, 은혜'는 얼마나 아름다운 단어입니까? 
그런데 여러분, 아름다운 단어일수록, 변질될 때 악취가 더 심하게 납니다. 

 

'사랑' .. 얼마나 좋은 말이에요?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악용하고, 오용해서.. 더 악한 일을 행합니까? 

'카리스'라 쓰고 '카르텔'이라 읽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기들끼리 한정된 '은혜'입니다. 
자기들끼리만 '호의'가 서로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추악한 카르텔입니다. 

여러분, 24장에 나온 벨리스는, 최악의 정치인이었습니다. 
그 악한 총독에 비해서, 본문 25장의 베스도 총독은 그나마 상식적인 사람이었어요. 
나름대로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요. 
그러나 그 역시도 이 큰 카르텔의 일부입니다. 그게 당시 문화였기 때문입니다.

'카르텔'이란 말은 현대의 용어지만, 
옛날 로마 시대 때는 아주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페이트로니지 Patronage, 즉 '후원 제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3)

요19:12절에 보면 예수님 재판 때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본문의 바울하고 비슷하죠. 

빌라도 총독이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다는 것을요. 

그러자 '유대인들이 소리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다.' :12
여기서 '충신'이라는 단어가  '필로스, 친구'라는 말이에요. 

이 '친구'라는 말은, 당시 '페이트로니지-후원 제도'의 핵심적인 단어였습니다. 
서로 호의를 주고받는 사이, 카리스로 다 통하는 사이라는 거예요.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이라는 괜찮은 자리를 얻은 것은, 
어떤 공적인 절차라기보다는, 
로마 황제 가이사가, 빌라도에게 개인적으로 베푼 호의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그 의리를 지켜야 된다' ... 라는 말을, 지금 유대인들이 하고 있는 거예요. 
(황제의 호의로 당신이 총독이 되었으면, 황제의 친구로서, 그에게 충성해야 된다..고 한 거죠)

그래서 공직자로서 자세, 정의를 실현할 책임, 공평과 정의... 이런 논리가 아니라, 
가이사에 대한 개인적인 의리를 말했던 거죠. 

여러분, 그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 
'가이사가 나를 총독으로 삼아줬으니, 그 관계를 잘 유지하기 위해서, 
죄 없는 사람 예수를 죽여서라도 그렇게 해야 된다' 라고 하는 게 
당시 로마의 이데올로기였고, 

유대인들은 빌라도를 정치적으로 압박, 협박하기 위해서 
그 이데올로기를 십분 활용하고 있는 거예요. 

로마 제국은, 옛날 바벨론이나 앗수르 제국처럼 무식하지 않았습니다. 
무조건 철권 통치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핵심적인 통치의 기술은, 피지배 지역의 높은 사람들, 상층부 귀족들,
왕족들, 기득권자들... 이런 사람들하고 연결하는 거예요. 
서로 이익을 주고받는 겁니다. 그게 '카리스' 였어요. *은혜, 호의, 25:9, 11 

(*교회에서 목사-장로의 관계가 이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공의, 공평이 실종돼죠)

그래서 당시에 로마 총독 벨릭스의 아내가, 유대의 공주 드루실라입니다. 
그런 식으로 서로 엮여 있는 거예요. 

다음 27장을 보면, 헤롯 아그립바 왕과 총독 베스도가 아주 밀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게 나옵니다. 
좋죠. 서로 잘 지내는 거! 

그런데 바로 그 카르텔 때문에, 그 페이트르니지 때문에  *서로 잘 봐주는 것 때문에
그 밑에서 백성들은 신음하고, 눈물 흘리고, 부당한 재판을 겪어야 하는 것입니다. 

'카리스'라 쓰고, 카르텔이라 읽는다...는 거죠. 

역사가 타키투스의 책에 나오는 인용입니다. 
'그들은 거대한 사막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평화라 불렀다.'
 
'팍스 로마나' 라고 선전하는 그 프로파겐다(선전)의 핵심적인 진면목을 보면,  
그 속에 이런 부정과 불의 patronage 가 있었던 것입니다. 

은혜와 평화... 우리가 자주 말합니다. 성경에서 자주 만납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말입니다. 
그러나 아프게도, 당시 로마 사회에서, 이렇게 타락해 있는 단어들 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에게 진정한 은혜, 참 평화를 주시기 위함인 줄 믿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예수를 부당하게 다루었고요. 잘못 재판했고요.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 십자가의 길을, 부당한 재판을 받으면서, 바울도 따라가고 있는 거예요. 

◑바람이 불면, 씨앗은 더 멀리 퍼진다

 

최근에 나온 책 중에서 <정원에서 길을 물었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아주 좋은 책입니다. 
뉴욕에서 정원사로 일하는 한국인, 아주 신실한 그리스도인 인데 
이분이 '정원 이야기, 숲 이야기'를 쭉 쓰면서,
성경 이야기, 교회 이야기를 잘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한번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여기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여러분, 씨앗이 전파될 때에, 바람에 날려서 전파되는 경우가 있잖아요. 
바람이 막 불면, 씨앗이 자기 모체에서 떨어지기 전에 과정을 보셨습니까? 

우리 느낌은 그래요. 막 바람은 부는데 안 떨어지려고 하죠. 
씨앗이 안 떨어지려고 막 애를 쓰는 것 같아요. 

그런데 바람이 세게 불면, 할 수 없이 떨어지거든요. 
바람이 살살 불면, 씨앗이 가까이 가겠고, 
바람이 아주 세게 불면, 씨앗이 멀리 가겠죠. 

그래서 '거센 바람 때문에 더 멀리 갑니다' 라고 했는데, 
저자가 책에서 '이게 교회의 역사 아닌가!' 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말씀하셨잖아요. '너희들이 땅 끝까지 가서 내 증인이 될 것이다'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오글오글 모여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안 떨어지려고 그랬어요. 
어떻게 갑니까? 박해 때문에, 거센 바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짐 싸서 도망가다 보니까 
전도하게 된 거예요. 

바울의 삶도 그렇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결박되었고요. 
목숨을 걸어야 되는 순간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중략

(27분경부터 다시 녹취)
▲여러분 재판 이야기가 본문의 주된 내용이죠.

이 세상에 많은 재판장들이 있지만 
그나마 나은 재판장들이 있겠지만, 불의한 재판관들도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날까지 계속되는 역사의 아픔이고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의로우신 재판장은 어디 있습니까? 

딤후4:7~8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의로우신 재판장 그리스도' 
유일하게 완전히 의로우신 재판장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의 삶을 인정하시고 판결하실 줄 믿습니다. 
바울의 삶은 철저히 거기에 맞춰졌던 거예요. 

물론 가이사에게 상소하면서, 자기 재판도 결과가 잘 되면 좋겠죠. 
그러나 여러분 그것이 인생의 목적도 아니고, 기준도 아니고, 의지하는 바도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베마 가이사'가 아니고요. '베마 그리스도!'  *베마 : 법정

 

바울은 그리스도의 법정을 늘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가이사의 법정에서도, 총독 앞에서도, 유대인들의 협박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서, 
자기가 가는 길에 대해서 얼마든지 자유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죄수의 몸으로 매여서 로마로 가지만 
그의 걸음은 세계 역사를 결정짓는 걸음이 되었습니다.

로마 황제가 어디로 행차하고 어디로 가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걸음이 된 줄 믿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의미를, 
세상 어떤 사람들이 판단하도록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 

그것이 내 가치를 형성하도록, 내가 그걸 의지하고 살도록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 
우리 삶의 의미를 부여하시는... 우리 삶 전체를 최종적으로 그 의미를 판단해 주실 
예수 그리스도 그 앞에 서는 날까지, 
믿음의 여정을 굳건히 걸어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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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최근 선교여행 보고
저는 지난 두 주간 캄보디아, 미국, 캐나다 세 나라를 잘 다녀왔습니다. 
캄보디아에 가서는, 우리 사역자들, 우리 교회에서 그곳에 10여 개 교회를 개척했는데 
많은 성도님들이 기도하시고 했던 그 귀한 사역들, 
선교한지 20년이 넘었는데, 처음으로 현지 교회들을 다 모아서 수련회를 했습니다. 

현지인 사역자들의 가족들이 다 왔어요. 
그 아이들도 가르치고, 아이들과 놀아주기도 하고요. 
영상을 보셨겠지만, 아이들을 동물원에 데려갔는데 
'평생 동물원에 처음 왔다' 하는 아이들이, 얼마나 천진난만하고 귀여운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그 현지인 사역자들은 아주 인텐시브하게 (빡세게) 성경을 함께 공부했습니다. 
'이게 너무 힘들지 않을까?' 했는데, 
얼마나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말씀을 잘 받아먹는지요... 
그리고 열정적으로 찬양하는지요... 

함께 섬기러 갔던 저희들이 훨씬 더 큰 은혜를 받고, 위로받았던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바로 미국으로 갔거든요. 
열대지방에서 반팔 입고 있다가, 엄청 추운 시카고로 날아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캄보디아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입니다. 
그런데 가장 또 센 나라(미국)로 갔습니다. 

가서 '2030 집회', 그러니까 전국에서 한인 유학생들이 모이는 집회였습니다. 
우리 교회에 있다가 유학 간 자녀들도, 두 명이나 함께 왔어요. 
몇 시간씩 차를 몰고 왔어요. 

여러분 말씀 들으러 몇 시간 차를 몰고 오는 게 쉽지 않잖아요. 
얼마나 그 안에 간절함이 있는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도 옛날에 한국 땅에서도 부흥회, 집회한다' 그러면 
산 넘고 물 건너 찾아갔었던 적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게 아득한 옛 이야기 같은데... 

미국에 가면요, 외국에 가면요, 유럽에 가면요, 아직도 그런 간절함이 남아 있습니다. 
유학생들의 삶을 축복하고요. 
특히 우리 교회도,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자녀들, 유학생들, 이런 젊은이들이 많은데 
그들이 외로운 삶을 통해서, 하나님이 다시 더 아름답게 빚어가시는 

은혜의 길을 걷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했습니다. 
한국에 사는 우리들도 질세라, 여기서도 간절하게 말씀을 사모함으로 모였으면 좋겠고요. 


주2)  정의와 공평  rfcdrfcd.tistory.com/15982068

 

주3) 로마의 후견인 제도 Patronage
로마 세계는 후견인-피후견인 체제에 의존했다. 
이것은 주고받기로 이뤄진 경제적, 사회적 제도였고, 사회 상층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황제는 아끼는 자들을 요직에 앉혀 이득을 보게 하고, 그 대가로 정치적 지지를 확보했다. 
황제의 호의로 이익을 얻은 자들은 똑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지지 기반을 구축했다. 

지방 총독들은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판결을 내릴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이들이 로마 시민권을 얻고 관직에 오르고 높은 명예를 얻도록 힘을 쓸 수 있었다. 

그러면 이 명예로운 시민, 곧 로마의 친구들이 피후견인과 후견인을 두었다. 
후견인들은 자신과 공적 기여를 통해 사회적 위치를 입증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