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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2장 회개로 시작되는 교회

LNCK 2025. 2. 8. 06:41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 죄, 복된 회개

*동영상은 맨 아래에 있습니다

 

회개로 시작되는 교회          행2:37~42          2022.01.09.           사도행전12강

▲지난 시간 복습
오늘은 "회개로 시작되는 교회"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증거하겠습니다. 
지난 시간 베드로의 설교를 살펴보았는데요.   *행2:14~36

그때 베드로의 설교의 결론이 혹시 기억나십니까?  
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여기 보면 순서가 중요합니다. 예수를 '그리스도와 주'라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라고 선포합니다.  '주'가 '그리스도'보다 앞섭니다.

그리스도는, '메시아, 구원자 Savior' 라는 의미죠. 
주는, '주님, 주인 Lord' 이라는 뜻입니다. 
예수가 주님이고, 구원자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전한 첫번째 복음 설교의 핵심이 무엇이죠? 
'너희들이 못 박았던 예수님이 놀랍게도 너희들의 주님, 주인 Lord 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세상의 주인인 동시에, 너희들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가 전한 첫 번째 복음설교의 핵심입니다. 

2: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그리고 이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의 반응이 나오는데요. 그 반응이 37절입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렸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찔렸다'라는 말은, 헬라우로 카타니소마이 인데요. 이 단어의 뜻이 굉장히 강합니다. 
잔혹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냥 단순히 '바늘로 찔렸다. 그냥 가슴이 좀 찔렸다', 
'말씀을 듣고 좀 찔끔했다' ... 그런 가벼운 단어가 아닙니다. 

이 단어는, '꼬챙이로 관통할 정도로 찔렀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pierced
이 정도로 그들의 마음이 잔혹하게 찔림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마치 죽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굉장한 죄책감이 든 것이죠. 
'우리가 죽인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이시구나 
그런데 우리가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구나'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를 죽인 게 나이구나 
그러니 이제 우리는 지옥에 갈 일밖에 남지 않았구나' 

'지옥에서도 가장 뜨거운 자리에 가도 마땅한 자이겠구나' 
그러니까 설교를 듣고 엄청난 죄책감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베드로에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37
그때 베드로는, 어찌할 줄 모르는 그들에게 복된 소식을 전합니다. 

◑2: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베드로가 찔려서 아파하는 이들에게 처방한 치료책이 무엇이죠? 두 가지인데요. 
첫째는 회개하라 

둘째는 세례를 받으라 그리하면 죄사함을 받으리라 
첫째는 회개, 둘째는 세례입니다. 

이 단어를 우리가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바르게 구원을 이해하고, 구원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먼저 여기서 이 문장을 제대로 번역해야 합니다. 
이 38절을 그대로 읽으면 
'너희가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면 죄사함을 받는다' 로 읽힙니다. 

순서 상으로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야지... 죄 용서를 받는다'고 보입니다. 
그러니까 '회개 = 죄 용서'로 들립니다. 회개 자체가 죄 용서로 들립니다. 

'회개해야지 죄 용서를 받는구나, 회개가 죄 용서의 원인이구나. 
죄를 용서받는 원인이 회개구나' 이렇게 읽힐 수 있습니다. 

우리도 회개를 이렇게만 이해하지 않습니까?

물론 맞는 말이지만, 좀 더 자세하게 생각해 보십시다.  

헬라어를 그대로 직역하면 '죄 사함' 이라는 단어 앞에 전치사가 하나 붙어 있습니다. 
에이스 eis 라는 전치사가 하나 붙어 있는데요. 

에이스 eis 는 into, unto, towards 라는 뜻이죠. 
그래서 직역하면 '회개하고 세례 받으면, 죄사함 받는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죄사함이 이미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으로 이미 있게 되었죠.

 

그러면 여러분 순서상 죄사함이 먼저 있었어요? 아니면 회개가 먼저 있었어요? 
죄사함이 먼저 있었죠. 

그러니까 죄사함이 먼저 있었고, 그 죄사함(십자가)의 근거에서

회개할 때, 죄용서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 용서의 근거 위에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 이전에 죄의 사함이 먼저 있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회개하기 이전에 죄의 용서가 이미 있었다는 것인데 
이 죄의 용서는, 죄의 사함은 누가 이루신 것입니까? 
우리의 회개라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누가 우리의 죄값을 다 치러주신 거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다 사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지시고 지옥의 형벌을 대신 다 당하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 우리가 받아야 할 모든 형벌을 대신 치러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만한 모든 의로움을 확보해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공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를 속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이지 
우리의 회개라는 행위 자체가 아닙니다. 

회개했기 때문에 죄를 용서받는 게 아닙니다. (회개가 필요없다는 뜻은 아님, 회개해야죠.

그러나 '회개가 나의 공로가 되어선 안 된다'는 의미)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실제로 무효로 만드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받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회개'는 뭐예요? 회개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메타노에오 라는 단어입니다.  *메타노이아의 동사

그 뜻은, '생각의 변화' 입니다. 생각의 변화는 결국 행동의 변화까지 이어지죠.

 

그러니까 회개는 뭐예요.? 
죄사함의 근거 위에서 돌이키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리스도의 속죄가 이뤄낸 공로를 근거로 하나님께 실제로 돌이키는 것 
그게 회개입니다. 

그러니까 회개는요. 죄의 대가를 치르는 게 아닙니다. 
내가 회개해서 죄의 대가를 그만큼 내가 치르는 게 아니고요. 
또 이미 죄의 대가는 죄가 사해지는 것은 예수님이 다 십자가에서 치르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갈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그러면 회개는 뭐예요? 그 죄의 용서의 근거에서 
내가 실제로 이제는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죄를 향해 걸었던 내 마음과 내 걸음을, 하나님께 실제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이게 회개에 대한 정확한 이해입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대한 바른 이해는 이겁니다. 
다시 정리하면, 우리의 죄를 속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지해서 
하나님께로 실제로 돌이키는 것... 그것이 회개입니다.

*그냥 자책이 아닙니다. 반드시 십자가에 근거,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회개는 '단순히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입술로 고백하는 게 아닙니다. 
입술로 고백하고 끝내는 게 아니고요. 

또 회개는 그렇다고 단순히 죄를 씻어내는 하나의 의식도 아닙니다. 
회개는 한마디로요. 돌이키는 겁니다. 우리의 마음과 삶을 돌이키는 겁니다. 
방향을 완전히 전환하는 겁니다. 

누구에게래요. 하나님께로 유턴을 하는 거죠.

 

회개는 메타 change + 노이아 notion, 즉 '생각의 변화, 생각의 돌이킴'인데,

생각의 돌이킴은, 행동의 변화를 반드시 수반하게 되어 있죠.

전에 죄라고 여기지 않던 것을, 죄로 여기게 되고(생각의 변화)

그 결과 이제는 그 죄를 끊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행동의 변화)  

 

죄의 길을 걸었던 사람이 뒤를 돌아서 유턴을 해서 
하나님께 마음과 삶을 돌이켜 가는 겁니다. 

그래서 회개는 입술로 하는 게 아닙니다. 실제로 죄의 자리에서 돌이키는 겁니다. 
죄의 자리에서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참된 회개입니다.          ▣ 죄, 복된 회개

전에는 하나님을 떠나 내가 주인 되어 살았습니다. 여러분 그게 죄 아닙니까? 
그러나 이제는 죄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돌이키는 겁니다.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다스림 안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한마디로 주인이 바뀌는 것입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삶으로 돌이키는 것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짜 회개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입술로는 회개를 했습니다. 
그러나 전혀 그 사람의 주인이 바뀌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자신이 주인 되어 살아갑니다. 
누가 봐도 저 사람의 주인이 그리스도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건 회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입술로는 회개를 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가던 길에서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죄의 길을 걸어갑니다. 
죄를 버리지 않습니다. 죄를 애통해야 하지 않습니다. 
죄를 버리고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다스림 안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진짜 회개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회개는요. 단순히 잘못했습니다. 인정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의미 자체가 실제로 돌이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돌이키지 않으면 회개가 아닙니다. 

▲두번째 이어서 여러분 "세례"라는 말도 보십시오. :38b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말도 우리가 바르게 이해를 해야 하는데요. 
여기서 이 세례는 이 당시의 상황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찔려하는 이들에게 두 가지 답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회개하라는 것이고요. 

두 번째는 세례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당시 이들에게 세례를 받으라는 말은 굉장히 충격적인 제안입니다. 
충격적이다 못해, 너무 충격적인 선언입니다. 

왜냐하면 이 당시 세례는 유대인들은 받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할레를 받았죠. 
누구만 받았죠? 원래 이방 종교를 믿었다가 
유대인으로 개종한 사람들에게만 세례를 줬습니다

예를 들어 이방인들 중에 그리스 로마 신화를 믿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제우스 신을 믿은 거죠. 그런데 그 사람이 유대인에게 전도를 받습니다. 
전도를 받은 이방인이 마음이 움직여져서 유대교로 개정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베풀었던 것이 세례입니다. 

그러니까 이 당시 세례라는 건요. 이방 종교였다가, 잡신을 삼겼다가 
유대교가 믿는 하나님을 믿는 그 유대교로 개정하려는 사람이 받았던 의식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세례는요. 이 당시 유대인들이 받는 게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하려는 이방인들에게 
그들의 생각으로는 잡신을 삼겼던 이방인들에게 베풀었던 게 세례입니다. 
더 이상 너희들이 섬기는 잡신을 버리고 
이제는 하나님을 섬긴다는 의미로 세례를 베풀었던 거죠.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유대인들도, 이방신에 빠져있다가 돌이킨다는 의미인 거죠)  

그런데 지금 베드로가 이미 유대인인 그들에게 뭐라고 말하는 거예요.? 
세례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굴욕적이었을 것입니다. 
마치 이건 목사인 저에게 지금 와서 세례를 다시 받으라는 것과 같습니다. 
무슨 얘기죠? 유대인인 너희들의 신앙은 가짜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이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너무나도 잘 믿는다고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선민의식으로 똘똘 뭉친 자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택한 받은 민족이다. 그러니 당연히 구원은 천국은 따놓은 당상이다... 

라고 믿었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그들의 신앙의 실력이 어땠죠? 놀랍게도 가짜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잘 믿기는커녕 하나님이 보내신 약속된 메시아를 죽였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말하지만 정작 하나님을 누구도 믿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수많은 절기를 지키고 예배를 드렸지만 하나님을 믿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메시아이신 그분을 대적하고 심지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이들에게 '세례를 다시 받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지금까지 하나님의 백성이라 착각했던 모든 것을 내어버리고 
이제는 하나님께 진짜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의 지금까지의 하나님을 떠났던 모든 죄악된 삶을 깡그리 부인하고 
돌이키지 않으면 이 도에 들어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회개와 비슷한 의미죠.

그런데 누구의 이름으로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요. 
예수 그리스도께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떠났던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묶박어 죽였던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 안에 굴복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세례를 받으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회개와 세례가 이해가 되십니까 회개와 세례는
단순히 이들에게 의식의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오늘날 교인이 되는 하나의 프로세스, 과정이 아니었습니다. 

회개와 세례는, 전부 다 실제로 돌이킨다는 의미였습니다. 누구에게로요? 
예수 그리스도께로요.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 그리스도께 
마음과 삶을 실제로 돌이킨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분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신다는 고백이 회개와 세례입니다

여러분 지금 이 베드로의 설교와 이 설교를 들은 그들의 반응이 연결이 되십니까? 
베드로가 전한 첫 번째 복음의 핵심이 무엇이었죠.?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첫번째 설교 rfcdrfcd.tistory.com/15982157
예수님이 주님, 너희들의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했던 회개와 세례의 핵심이 무엇이죠.?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라는 주인이라는 고백입니다. 
이제는 그분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다스림 안에 살아가겠다는 고백입니다. 
그게 베드로가 전한 첫 번째 성경에 나오는 복음의 핵심이고요. 
그게 이 첫 번째 복음을 믿었던 그들의 신앙의 고백의 내용이었습니다. 

하나같이 예수가 내 삶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은, 죄를 버리고 예수님께 마음과 삶을 돌이켰습니다. 
그게 회개이고 세례였습니다. 말로, 입술로만 고백이 아니었죠.

▲그리고 이 돌이킴의 결과가 무엇이죠? 40절에 보면 그들은 구원을 받았고요. 
첫 교회가 탄생합니다. 그 첫 교회의 모습이 42절부터 47절까지의 모습인데요. 
그러니까 성경에 나오는 신약의 첫 교회가 어떻게 탄생했죠.? 
회개와 세례를 거쳐서 교회가 되었습니다. 

죄를 향해 걸었던 마음과 삶을 주님께 돌이키는 회개와 세례를 거쳐 
교회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주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겠다는 돌이킴을 거쳐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면요. 첫 번째 이들은 단지 등록교인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는 등록을 하면 등록교인이라 부릅니다. 성도라고 부르죠. 
그러나 오늘 본문의 사람들은 단지 등록한 교인이 아니었습니다. 회개한 교인들이었습니다!

둘째 그들은요. 단지 출석한 교인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매주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하면 성도를 출석교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출석교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보다 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내 삶의 주인이 실제로 바뀌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셋째 그들은 단지 세례받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검색해 보니까요. 
군선교연합회에 따르면 지난 20년간 군대에서 세례를 받은 장병이 300만 명이 넘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들이 모두가 참 교회가 되었습니까? 정말 그들이 다 구원을 받은 자였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세례라는 의식을 거쳤다고 다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저도 군대에서 세례를 받았었는데요. 초코파이 하나 더 먹으려고 길게 줄을 서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때 믿음이라고는 1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들은요. 단지 세례를 겉치레로 받은 게 아닙니다. 
등 떠밀려 받은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중심의 변화(회개)가 있었습니다. 

정리하면 교회를 등록했다고 해서 참교회가 되는 게 아닙니다. 
교회를 정기적으로 출석한다고 해서 참성도가 되는 게 아닙니다.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참된 성도가 될 수 있습니까? 

무엇을 통해 진정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까? 바로 회개를 통해서입니다. 
그런데 이 회개가 어떠한 의미이죠? 단순히 의식이 아니라 
실제로 마음과 삶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로요? 예수님에게로요. 

죄를 향해 걸었던 내 마음과 삶을 실제로 주님께 돌이키는 것입니다. 
죄를 버리고 주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내 삶의 주인을 
이제는 내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요. 나를 온전히 다스려 달라는 의미입니다. 
나는 그분의 다스림을 받기를 원한다는 고백입니다. 

반대로 나는 그분의 종으로 살기를 원한다는 고백입니다. 
내 삶의 주도권을 그분께 몽땅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나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살아가고 
내 삶을 드린다는 고백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내 삶의 주인이 되셨으니까요. 

이 회개와 세례를 통해 처음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이 세워진 교회의 모습을 보십시오 
여러분 41절부터 이어지는 교회의 모습을 보십시오 
이 땅의 어느 공동체에서도 볼 수 없는 유니크한 모습이 나타납니다. 

44절에 보면요. 모든 물건을 서로 나누고요. 재산과 소유를 팔아 서로의 필요를 따라 나눕니다. 
또 46절에 보면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고요. 떡을 때며 교제합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통해 백성에게 친성을 받습니다. 

마치 지상에 천국이 이뤄진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이 세상의 나라와는 다른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 가운데 임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는, 죄 때문에 이런 공동체가 세워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공동체가 가능했던 이유가 무엇이죠? 
그들 모두가 죄로부터 돌이키는 회개로 교회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회개야말로 지옥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리게 하는 방법입니다. 
그들 모든은요. 회개를 통해 하나님이 주인 되시는 새로운 질서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모습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가 드러난 것입니다. 

이처럼 신약의 교회는요. 회개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회개를 통과하지 않으면 이런 교회가 이뤄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가 세워진 모습입니다. 

처음부터 교회는요. 회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였습니다. 반대로 얘기하면 회개를 거치지 않는다면 
누구도 교회의 진정한 회원이 될 수가 없습니다. *주제

물론 교회를 다닐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진정한 회원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가슴 아픈 얘기지만 구원 받지 못합니다. 

심지어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회개를 거치지 아니하면요. 
목사도 장로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회개를 거치지 않았다.면 
여러분의 모든 신앙의 경력과 예배 횟수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어떤 회개요. 여러분의 이전에 죄악된 삶을 깡그리 부인하고 
마음과 삶을 주님께 돌이키는 회개입니다. 
나를 위해 살았던 사람이 이제는 주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는 삶으로 
실제로 돌이키는 회개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는 회개란 없습니다
회개는 돌이키는 거니까요. 근본적인 삶의 중심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를 주인으로 모시지 않은 성도는.. 진정 회개한 게 아닌 거죠.

 

▲여기에 대해 실제적인 예를 두 개만 들어볼게요. 
먼저 R C 스프라울 목사님의 얘기인데요. 
이 분이 쓴 사도행전 강의집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베드로의 오늘 설교를 강해하면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고서는 구주로 믿는 게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꽤 오래 전에 자신이 한 젊은이와 얘기했던 기억을 소개해 주더라고요. 

그 젊은이는요. 스스로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마약을 하고 불법 거래까지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내가 아닌 여자친구와 함께 살고 있기까지 했습니다. 
그의 쾌락주의적인 삶의 방식은요. 경건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젊은이는 스프라울 목사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는 예수님을 제 구원자로 모시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주님으로 모시고 헌신하는 것을 좀 미루고 있는 것 뿐입니다. 

이 젊은이에 대해 스프라울 목사님의 진단은 단호합니다. 
'이 젊은이는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말하지만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는 한 번도 참된 회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걷고 있는 죄의 자리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죄와 싸우지 않고요. 자신의 죄를 보며 애통해야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주님을 구주로는 고백하되 자신의 주인으로 모시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예수님께 돌이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믿음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또 하나 예를 들어볼게요. 팀켈러 목사님의 얘기입니다.
팀켈러 목사님이 대학 시절, 알고 지낸 한 청년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청년은 성적으로 문란하기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이 청년의 성적인 문제는 단순히 성욕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통해 자신을 남자로 느꼈고요. 그리고 친구들의 감탄을 샀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여성을 지배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 청년의 근원적인 우상은요.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를 섬기는 우상인 거죠. 그런데 이 청년이 3학년 때 캠퍼스 선교단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청년은요. 구원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곧 예수님을 향한 불같은 열정에 휩싸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새로운 헌신을 감격적이고 담대하게 간증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팀켈러 목사님의 말에 따르면 그에게 무언가 이상한 점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함께 어울리기 즐거운 상대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토론이라도 하게 되면요. 교회 안에서 토론을 하면요. 
왜 자신이 옳고 상대가 틀린지를 반드시 증명하려 했습니다. 

 

소고름 모임에서도 상대가 자신의 의견이 통찰력이 있다고 인정해 주기를 바랬고요. 
그는 언제나 교회에서 중요한 자리에 있기를 원했습니다. 
외면적인 모습만 볼 때, 이 청년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는 자신의 성적인 문란함을 회개했습니다. 
많은 성경 공부 모임에 참석했고요. 담대히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그러나 팀켈러 목사님은 그 청년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 사람의 참된 갈망의 외적 발현이 섹스에서 종교로 바뀌어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 
그가 정말로 원했던 것, 즉 그의 근원적인 우상은 여전히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었다. 
다만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수단이 성적 관계가 아니라 
기독교라는 종교로 바뀐 것뿐이다.'

 

그러면서 틴 켈러 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향한 회심이 아니다. 이전의 우상을 숭배하는 새로운 수단이 
그리스도였을 뿐이다.' 여러분 이해가 되시나요? 

여전히 그에게 우상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그의 근원적인 우상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그것을 이루는 수단이 기독교로 바뀌었을 뿐인 거죠. 

하나님을 통해 그것을 이루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의 삶에는 전혀 주인이 바뀌지 않았습니다. 우상이 하나님으로 바뀌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서도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성공이라는 우상을 섬깁니다. 
그러나 단지 그에게 하나님은 성공이라는 우상을 숭비하는 
새로운 수단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섬깁니다. 그러나 단지 그에게 하나님은요. 
자기를 위한 새로운 수단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향한 회심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더 이상 나라는 우상을 붙잡고 숭비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더 이상 중심이 되는 삶을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가 내 삶의 중심으로 바뀝니다. 내가 살아야 할 이유와 목적과 
동기가 내 삶의 주인이 송두리째에 바뀝니다. 
나의 성공과 원함을 따라 그리스도를 찾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내 모든 삶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내가 살아가는 것이고요. 
숭배해야 할 주인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의 양식과 기준과 추구하는 가치가 실제로 바뀝니다. 
여러분, 그게 돌이킨다는 뜻의 회개입니다. 

그리고 이 회개 없이는 누구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진정한 회원이 될 수가 없습니다. 

물론 교회는 다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가 그저 하나님으로 바뀐 것에 불과하고요. 
세상을 의지하는 사람이 다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걸로 자신의 성취를 위한 수단이 
바뀐 것으로만 불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듭난 성도는 아닙니다. 그리고 구원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의 회개에 진정성을 따지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절대로 영적으로 겁박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참된 구원의 길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회개를 거치지 않고서는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오늘날 회심이 교회 안에서 잘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을 하십니까? 저는 여러분이 주일날 교회에 오셔서 예배드리는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나머지 6일간의 삶을 저는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참된 회심을 하셨는지 저는 모릅니다. 
그래서 그만큼 우리 스스로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회심이 일어나고 있냐는 것입니다. 
회심을 통해 참된 그리스도인을 낳고 있냐는 것입니다. 
회개를 통해 우리의 신앙과 우리의 믿음과 교회가 진정으로 자라나고 있냐는 것입니다. 

슬프게도 우리는 이런 질문을 많이 묻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니 거의 묻지 않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도 
크게 염려하지 않는 분위기가 만연한 시대입니다. 

그게 오늘날 조국교회의 영적인 모습입니다. 
너무나도 세속화된 오늘날 회개에 대한 회심에 대한 설교를 
너무나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리고 회심을 위한 기도회조차도 오늘날 교회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어떤 기도회를 많이 하죠? 수능 기도회를 많이 하죠. 
오늘날 교회는 중생과 회개의 회심이라는 이 중요한 문제를 크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회개를 거치지 않고서는, 누구도 주님께 돌아갈 방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구원받을 방법은 없습니다. 

C S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회개하지 않고 주님께 돌아가게 해주소서라고 
구하는 것은 주님께 돌아가지 않으면서도 돌아가게 해주소서 라는 말과 같다. 
이런 일은 당연히 일어날 수 없다. 우리는 반드시 회개를 거쳐야 한다.'  
회개를 거치지 않고서는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저 기독교라는 새로운 종교생활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래서 마크 대버는
'회심 없는 교회의 성장은 교회의 자살 행위'라고까지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우리에게 먼저 있어야 할 은혜는 회개의 은혜입니다. 
다른 은혜가 아닙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이 먼저 되어야 그리스도인으로서 살 수 있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이 먼저 되어야 성경에 약속한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모든 복을 누리는 것 아닙니까?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고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은요. 오직 회개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회개가 어떻게 해야 우리 안에 나타날 수 있습니까? 

첫 번째 오늘 본문을 다시 보십시오 먼저 오늘 이들은요. 
베드로의 설교를 두고 마음이 찔려 회개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특별히 설교를 통해, 우리를 회개케 하십니다. 

그런데 두 번째 가장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이 회개는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들은요.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이 찔렸습니다.
 그리고 회개를 통해 주님께 돌이켰습니다. 

그런데 이와는 대조되는 장면이요. 사도행전 뒷부분에 놀랍게도 하나가 나옵니다. 
사도행전 7장 54절 인데요.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이 장면은요. 스데반 집사가 설교를 한 이후의 반응입니다. 스데반 집사가요. 
오늘 베드로의 설교처럼 유대인에게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러자 이들이 마음이 찔렸다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의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과 동일한 반응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뒷부분의 반응이 좀 이상하죠? 이를 갈아요. 
그런데 이어지는 이들의 반응은 더 놀랍습니다. 그 밑에 57절인데요. 
함께 읽어볼까요?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길을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스테반의 설교에 길을 닫습니다. 왜 그렇죠.? 더 이상 듣기 싫다는 거죠. 
자신의 죄를 책망하는 심지어 그 밑에 59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테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마음이 찔린 그들이 어떻게 하죠? 회개하기는 커녕 스데반을 돌로 쳐 죽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마음이 찔려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실제로 자신의 삶을 돌이켰습니다. 죄를 버리고요. 
그리고 그 수가 3천 명이었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우상을 버렸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마음이 찔리긴 했습니다. 
그러나 찔린 이들이 어떻게 하죠? 스데반을 돌로쳐 죽입니다. 
메시지가 싫으니까 메신저를 공격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차이가 무엇입니까? 베드로는 사도인데 
스데반은 집사여서 설교의 능력이 조금이라도 부족했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 이유가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나오는데요. 

다시 사도행전 2장에 돌아와서 우리 39절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이 구원의 약속이 
누구에게 주어진다고요.? 여기 중요한 표현이 하나 나오는데요. 

하나님이 부르시는 자들이란 표현입니다. 
이걸 교리적인 용어로 내적 부르심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제발 교리반 좀 들어주십시오. 이들에게는 내적인 부르심이 있었습니다. 

똑같이 외적으로 나와 이렇게 앉아있지만 이들에게는 
하나님이 그 심령 속에서 부르시는 내적 부르심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들이 회개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은혜가 
그들의 육체의 귀가 아니라 영혼의 귓가에 그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이들에는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스스로 돌이킨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시어 
그들을 돌이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내적으로 부르지 않으시면요. 
누구도 이 자리에 있으면서도 외적으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누구도 돌이켜 회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요. 
누구도 죄를 버리고, 죄를 증오하고 회개하고 돌이킬 수 없습니다. 

여러분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요. 
회개하라는 설교를 들으면 우리는 스데반을 죽였던 자들과 똑같은 반응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부르심에 은혜가 없는 모든 자연인의 반응입니다. 

죄를 지적하는 설교가 듣기 싫고요. 귀를 막게 되고요. 
심지어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요. 심지어 설교자를 대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요. 우리도 이런 반응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인간은 자기 의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를 건드리는 걸 참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도 하나님이 부르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의 자리로, 구원의 자리로 부르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자들은요. 당신은 죄인입니다. 말을 너무나도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에게는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죄인을 위한 구주라는 사실이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믿을 때 죄로부터 구원받는다는 사실이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은요. 우리가 가지는 모든 자기의를 모든 우상을 
다 부수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죄인'이라는 말을 들으면요. 
너무나 기뻐합니다. 그에게는 달려갈 치료책이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에 복된 소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죄인입니다.라는 말을 너무나 즐거워합니다. 
여러분 실제로 제가 그랬습니다. 예수를 믿고 나서 입에서 떠나지 않았던 찬양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예배 시간에 부른 찬송과 279장입니다. 
'주여 주여 내가 비오니 죄인오라 하실 때 날 부르소서'  

 

이 찬양이 제 입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길을 가다가도 이 찬양이 입술에서 고백되었습니다.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때로는 길가에서 남몰래 눈물을 흠치며 이 찬양 조용히 읊조리며 걸었던 적이 있습니다. 

 

주님이 나를 죄인이라고 불러주지 않으시면 안 될 것 같이

죄인을 부르실 때 

제일 먼저 달려갈 수 있을 만큼 죄인이라는 사실이 너무 기뻤습니다. 
주님은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 같은 죄인을 살리기 위해 모든 일을 다 하신 구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죄인입니다' 라는 이 말씀이, 가슴이 아프지만 너무나 좋습니다. 
지금도 좋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그러니 회개하라는 이 말도 너무나 달콤한 사랑의 부르심으로 들립니다. 

오늘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에게 죄인이라는 설교는요. 그리고 회개하라는 설교는요. 
그들에게는 어떤 위로보다, 어떤 말씀보다, 큰 복음이었을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소리보다 더 기쁜 소식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지옥의 문 앞에서 그들은 천국의 문이 열린 것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근원에는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죄부터 우상으로부터 돌이키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회개의 자리로 데려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돌이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낳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교회가 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주인으로 모시고 있다며 
여러분은 참되게 회개한 자입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가는 은혜의 흔적들이 있다면, 참으로 회개한 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을 내가 생각하는 예수님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계시다면 
비록 온전히 그분을 사랑하지 못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그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참으로 회개한 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죄를 지적당했을 때 여러분의 우상이 고발되었을 때 
그것들을 버리려는 거룩한 싸움이 있다면,

죄에 넘어질지언정 여러분은 참되게 회개한 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십시오. 여러분으로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사 파멸의 길에서 돌이키게 하셨습니다.

죄의 길을 가던 여러분을 붙잡고 돌이켜서, 하나님께 오도록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과 삶의 방향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노력으로 회개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열심과 선행으로도 회개할 수 없습니다.

오직 마음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돌이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나아가 겸손히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기도하십시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오늘도 하나님은 구원해 주십니다.

 

저 또한 함께 여러분들이 이 회심의 은혜를 누리도록 계속 기도하며 도울 것입니다.

말씀으로 여러분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할 것입니다. 회개의 복음을 선포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회개의 복음을 듣고 마음이 찔려 귀를 닫는 게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주님께 돌이키는 은혜가 있기를 기도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함께 여러분 이 은혜를 위해 기도합시다.

회개하지 않으면 누구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