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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3장 그러나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신 하나님

LNCK 2025. 2. 8.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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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15) / 그러나 죽은 자 가운데 그를 살리신 하나님 - YouTube

 

그러나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신 하나님       행3:11~19      2022.01.30.

◑본문의 정황

지난 시간 우리는 사도행전의 첫 번째 기적을 살펴봤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난 기적이었죠. 그는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던 자입니다. 
그것도 40년 동안이나 한 번도 스스로 자기 발로 일어나 걸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성전 미문 앞에 구걸하는 일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앉은뱅이가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서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일어난 것만 아니라 걷기도 하고요. 뛰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성전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 기적을 본 사람들은요. 자신의 눈을 의심했을 것입니다. 
불가능한 일이 눈앞에서 일어났기 때문이죠. 

누구도 그가 일어나 걸은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것도 40년 동안 누구 하나 본 적이 없습니다. 

그가 일어나 어디를 두 발로 걸어가는 것을요. 누구도 본 적이 없습니다. 
걸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제대로 서 있는 모습조차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는 40년 동안 성전 미문 앞에 늘 앉은뱅이로 살았습니다. 
그런 그가 베드로를 통해 단번에 일어난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기적입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앉은뱅이 주변으로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웅성거리기 시작을 했는데요. 

행3:11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불리우는 행각에 모이거늘'

이때 고침받은 앉은뱅이가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았습니다. :11 
여기서 '붙잡았다'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이렇게 붙잡았다 라는 뜻이 아니라,
'붙잡고 따라갔다'는 뜻입니다. 
성전 마당 바깥으로 나가려는 베드로와 요한을 따라 나갔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주변에 모였던 사람들도 함께 덩달아 베드로와 요한을 따라 나갑니다. 
그런데 11절, 그냥 따라 나간 정도가 아닙니다. 백성들이 '달려 나갔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베드로와 요한을 놓치지 않으려고 서둘러 뛰어 쫓아갔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싶었던 것이겠죠.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적을 행했으니까요. 
그래서 사람들이, 솔로몬의 행각이라는 곳에서 베드로와 요한 앞으로 모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합니다. 

여러분 이 장면을 머릿속에 그림으로 그려보십시오. 
이 상황이 얼마나 놀라운 상황입니까? 

제가 이런 기적을 일으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도 심히 놀라지 않겠습니까? 
아마 수많은 사람들이, 저를 보려고 찾아올 것입니다. 
'불의 종, 능력의 종, 침체된 한국교회의 소망!' 
그러면서 저에게 기도라도 받으려고 달려왔을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제 사진을 찍어서 '인별그램'에도 올리고요. '얼굴책'에도 올리고요. 
'너튜브'로 생중계하는 분들도 계셨을 것입니다. 

▲특별히 이 당시는, 예수님이 죽은 지 몇 달 되지 않은 시점입니다. 
아마 두 달에서 세 달밖에 되지 않은 시점입니다. 

아시다시피 사람들은, 처음에 예수님을 메시아 라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왜냐하면 처음에 예수님의 모습은,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와 같은 모습이었기 때문이었죠. 

죽은 자를 살려내시고요. 병든 자를 고치시고요. 
보리떡 두 개와 물고기 다섯 마리로 5천명을 먹이는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들이 기다리던 슈퍼히어로 메시아가 등장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하나님의 저주의 상징 아닙니까. 
그런데 그 저주의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달리신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예수님은 더 이상 메시아가 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끔찍한 죄인 중의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라 생각했던 예수가, 메시아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 한켠에는, 메시아에 대한 허탈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또 동시에, 그만큼 메시아에 대한 갈망은 더 커졌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적을 일으킨 것입니다. 
순간 성전에 있던 사람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하나님이 보내신 그 메시아가 아닌가?' 
베드로를 강력한 메시아 후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메시아만 갈망하고 있었으니까요. 
이미 예수님은 죽었으니까, 
이제 베드로를 유력한 메시아 후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보기 위해 
성전 바깥으로 따라 나간 정도가 아니라, 뛰어 달려갔던 것입니다. 

이들이 달려 나간 장소가 어디죠? 솔로몬 행각이라고 말합니다. :11
여러분 이 솔로몬 행각은 성전의 '이방인의 뜰'에 위치한 곳입니다. 
('행각'은 지붕은 있으나 벽은 없는 구조물. 요즘 말로 '회랑')

솔로몬 행각


이곳은 당시 집회 장소였는데요. 사람들이 모여서 모임도 하고 토론도 하던 
그런 장소로 주로 사용되었던 곳입니다. 비교적 넓은 곳이었으니까요.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도 이곳에서 가르치신 적이 있으십니다. 
그때 선한목자 비유를 하셨는데요. 

이 솔로몬 행각 앞에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하나같이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합니다. 

◑베드로의 두 번째 설교

그러자 자신을 주목하는 그들을 향해 베드로가 어떻게 하죠? 
자신을 주목하는 그 주목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방향을 틀어버리고 있습니다. 

3: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여러분 베드로와 요한이 한 번쯤이라도 목에 힘 줄만 하지 않습니까? 
자기에게 비춰지는 그 스포트라이트를 조금이라도 좀 즐기고 받을만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베드로는 조금도 사람들이 자신들을 주목하지 못하게 막습니다. 
오히려 베드로는 자신들에게 쏠린 모든 관심을 단숨에 거절하고 
예수님께로 그 관심을 옮겨버리고 있습니다. 

자신을 향한 모든 시선을 조금도 지체 없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베드로의 두 번째 설교가 시작됩니다. 

앞서 베드로는 사도행전 2장에서 첫 번째 설교를 했었습니다. 
오순절에 강림한 성령 사건을 해석하는 첫 번째 설교를 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두번째 설교를 시작합니다. 

이 두 번째 설교가요. 3:13~26절까지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설교가 사실 첫 번째 설교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여러분, 첫 번째 설교 기억나시나요? rfcdrfcd.tistory.com/15982157
'너희들이 죽인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돌이켜 회개하라' 이것이 베드로가 전했던 첫 번째 설교의 핵심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두 번째 베드로의 설교도 사실 그 내용입니다.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두 번째 설교도 보시면,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이 주제를 베드로가 세 토막으로 나눠서 설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세 대지로 나눠서 설교를 하는 거죠. 

첫 번째 단란이, 3:13~16절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전하면서, 그러니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전합니다. 

두 번째 단락이, 3:17~20절
그러니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세 번째 단락(토막)이 3:22~31절. '회개하라 그러면 너희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러니 돌이켜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정리하며, 두 번째 설교의 핵심도요. 
'너희들이 죽인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니 돌이켜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 했던 설교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거의 비슷하죠. 

그래서 이 두번째 설교는, 자세히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대신에 두번째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만 살피겠습니다. 
그 부분이 13~19절까지 인데요. 이 부분만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3:1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그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여러분, 여기 보시면 주목해야 할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설명하는 중요한 단어가 하나 있는데요. 
예수님을 뭐라고 소개하죠? '그의 종 예수를' 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를 '하나님의 종'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런데 설교가 시작되는 여기서만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설교가 끝나는 26절에서도 예수님을 '종'이라고 표현합니다. 

3:26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예수님에 대한 수많은 호칭이 있잖아요. 
그런데 베드로가 굳이 또 예수님을 뭐라고 소개하죠? '하나님의 종'으로 소개합니다. 
베드로는 지금 일부러 계속해서 '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종'이라는 표현은, 베드로의 의도적인 표현입니다. 어떤 의도일까요? 

구약이 약속한 메시아를 떠올리게 하는 의도입니다. 
여러분 구약에 보면, 전부 다 '오실 메시아'를 예언합니다. 그게 구약의 내용이잖아요. 

그런데 오실 메시아를 뭐라고 표현하죠? '종'이라는 단어로 소개합니다. 
그 대표적인 구약 구절이 이사야서 말씀인데요. 
사52:13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이사야 선지자가 오실 메시아를, '내 종' 하나님의 종으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이사야서 53장에서는 이 하나님의 종을 '고난받는 종'으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구약의 이 '하나님의 종'을 지금 예수님께 그대로 적용합니다. 
뿐만 아니라 여기 '존귀하게 되리라'는 표현도
베드로가 그대로 예수님께 사용합니다. 

본문 13절로 한번 다시 돌아와 보십시오, 
3:13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다'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영화롭게 하셨다'가 이사야서에 나온 '존귀하게 되리라'와 같은 단어입니다. 
*독사조

여기에 '영화롭게 하셨다'는 말은, 1차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지금 베드로가 '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의도가 무엇이죠? 
그들로 하여금 이사야서 52장부터 나오는 메시아를 떠올리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들이 알던 이사야서 52장, 53장에 약속된 오실 메시아를 떠올리게 하는 데 
베드로의 의도가 있습니다

아마 이 당시 베드로의 설교를 듣는 유대인들은
이 베드로의 의도를 눈치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구약에 빠삭한 유대인들이었으니까요. 

이들은 베드로의 설교 중에 '종'이라는 표현을 듣는 순간 
이사야서 52장, 53장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고 대망했던 구약에 약속된 오실 메시아, 하나님의 종, 
고난받는 종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베드로가 '종'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충격적 펀치를 날린 것입니다. 
'너희들이 죽인 예수라는 사람이, 바로 그토록 너희들이 기다렸던 
구약에 약속한 그 메시아이시다' 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하나님의 종'이라는 메시아가, 
너희들이 기다렸던 '고난받는 종'이라는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 오신, 그토록 그들이 갈망했던 메시아를, 이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3:13절 중반부터 베드로가 팩트체크를 날립니다.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그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3:14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3: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이 부분을, 한 문장씩 끊어서 읽어볼게요. 
-예수님이 구약에 약속한 하나님의 종, 그 메시아였다. 
-그러나 너희가 예수님을 넘겨주었다. 
-그리고 빌라도가 놓아주기로 했는데 너희가 거부하였다. 
-그리고 예수님 대신에 살인자 바라바를 놓아주었다. 
-그리고 너희가 기어코 생명의 주님을 죽였다. 

베드로는 지금 설교를 듣는 자들의 죄를 책망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예수님께 이 정도로 사악하게 대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세 구절을 보면 (:13~15) 사실 별 감흥 없이 지나갈 수 있습니다. 
그냥 그러네 하고 쑥 지나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요. 이 세 개의 절이 점층법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점층법은 아시죠? 뒤로 갈수록 강조되는 표현법입니다. 

그러면 이 세 개의 문장들을 점층법을 넣어서 제가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너희는 예수님을 넘겨주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너희는 빌라도가 죄없다고 판결한 그분을 놓아주기도 거부하였다. 

-넘겨준 것만 해도 잘못인데, 빌라도가 죄없다고 놓아주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은 그것마저도 거부하였다. 
-그것도 부족해서 심지어 너희는 거룩하고 의로우신 그분을 대신해 
살인자 바라바를 놓아주기를 원했을 만큼, 너희는 그분을 그토록 싫어하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심지어 너희는 기어코 생명의 주님을 죽였다. 

여러분 여기서 '생명의 주'라는 말은, 예수님은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생명을 주신 분이었죠. 
예수님이 하신 사역은, 생명을 뿌리신 사역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사역은요. 그 당시 모든 유대인들이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분은 안진병의를 일으키셨고요. 또 귀신이 들어간 사람들을 보시면 
귀신을 쫓아내어주셔서 새로운 생명을 살게 하셨고요. 
또 오병이어로 배고픈 사람들에게 육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심지어 그분은요. 죽은 나사로를 살려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심으로 영적으로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아무도 이 생명을 주신 예수님의 사역을 부인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생명을 주신 그분을 심지어 너희가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점칭법을 넣어서 베드로의 설교를 들어보십시오. 

비록 짧은 세 절이지만 여러분 베드로의 설교에서 어떤 뉘앙스가 느껴지죠? 
이들은 너무나도 사악한 죄를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죄를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아무런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예수님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들에게 생명을 주셨던 분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예수님을 죽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누군가가 누군가를 이렇게까지 미워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빌라도에 의해서 무죄가 완전히 증명된 사람을, 
그것도 죄 없으신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을, 
그것도 자신들에게 생명을 주셨던 분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도 살인자를 대신 놓아줄 정도로요. 

생각해 보면 이 정도로 여러분 예수님을 미워해야 할 이유가 한 가지라도 있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끔찍하게도 죄 없는 예수님을 이상하리라 만큼 미워했다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요? 죄 없으신 그분을 죽이기까지 미워했다는 것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이 부분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죄는 그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을 죽이고 싫어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하지 말라고 하신 일을 행할 때마다 
당신은 할 수 있는 한에서 사실은 하나님을 보좌에서 밀어내고 
하나님께 속한 권위를 밀어내는 것이다. 
할 수 있는 한 하나님을 죽이려고 의도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짓는 모든 죄의 취지이다.' 

즉 죄는 하나님을 미워하고 죽이는 일이다... 

여러분 이 설명은,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말입니다. 
사실 믿지 않는 자들이, 그냥 이유 없이 하나님을 미워하고 죽이는 거 아닙니까? 

오늘도 그렇죠. 이때 당시 이 설교를 들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적용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입니다. 

심지어 거듭난 성도에게도, 다 이런 죄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을 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죄를 지으며 살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 죄를 지을 때마다 우리는, 사실 하나님을 보좌에서 밀어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할 수 있는 한 하나님을 죽이려는 의도라는 것이죠. 
그것이 우리가 짓는 죄의 취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짓는 죄는 사실상 하나님을 미워하고 죽이는 일입니다. 

오늘 베드로의 설교를 듣는 유대인들을 보십시오. 
이들은 예수를 죽일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한 가지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그들은 그냥 예수님을 미워하고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그것을 바로 죄라고 말합니다. 
'너희들의 죄가 예수를 죽였다.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점층법을 통해서 이들이 죄를 지금 옥죄어 들어가고 있는 거죠. 

그러니 베드로의 설교를 듣는 이 청중들은, 아마 심한 죄책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계속 갈수록 자기들의 죄를 쏘아 붙이고 있으니까요. 융단폭격을 가하는 것 아닙니까. 
코너에 몰려서 꼼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베드로는 이들의 죄를 책망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들의 죄를 정죄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들에게 남은 일이라곤, 이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밖에 없다. 
이제 너희는 지옥에 갈 일밖에 남은 것이 없는, 소망 없는 사악한 죄인이다... 하고 
이들의 죄를 정죄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어지는 15절을 한번 보십시오. 

◑3: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너희가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라는 반전 접속사로 베드로의 설교가 이어집니다. 무슨 얘기죠? 

'그러나 너희들에게 구원의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죠? 
'너희들이 죽인 예수를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죽인 예수가, 부활의 주, 생명의 주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오늘도 너희들에게 생명을 주시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회개하고 돌이키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그 샘플로 바로 앉은뱅이가 일어난 기적이, 첫 번째 표적으로 등장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16절이 이어서 바로 등장하는 것인데요. 

◑3: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여기 보면, 베드로가 앉은뱅이의 기적을 다시 꺼냅니다. 
앉은뱅이가 고침받은 이유를 설명하는데요. 
예수의 이름을 믿음으로 고침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냥 고침을 받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뭐라고 상세히 표현하죠?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고 말합니다.  :16b 

여러분 여기서 '완전히'는 우리가 주목해야 할 표현인데요. 
'완전히'라는 단어는, 신약 성경에 여기서 딱 한 번만 나오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구약에는 굉장히 자주 나오는 단어입니다. 
구약 시대 때 성전에서 제물을 드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제물이 흠이 없을 때 쓰였던 단어가 '완전히' 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완전히 낫게 되었다'는 말은, 흠없이 낫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즉 이 앉은뱅이는 성전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흠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기적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앉은뱅이가 일어난 기적의 초점은, 단순히 병고침받은 데 있지 않았습니다. 
초점이 어디에 있었죠? '성전에 들어가는 데' 그 초점이 있었습니다. 

구약에서 앉은뱅이는 성전에 들어갈 수 없는 부정한 자였기 때문이죠. 
흠 있는 자였기 때문이죠. 

그랬던 그가 예수의 이름을 믿음으로, 이제는 성전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3:8

예수의 이름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흠 없는 자로 새롭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19절에서 이렇게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3:19

'그러므로 예수를 죽인 사악한 너희들이여, 그리스도께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구든지 그분께 죄사함을 얻음으로, 흠 없는 자로 새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이름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너희들이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심으로, 
그분은 지금도 하늘에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 앉은뱅이를 살리신 기적을 통하여 
너희들에게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앉은뱅이를 살리신 기적을 보이심으로써 
여전히 그분은 자신의 백성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증명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정한 앉은뱅이와 같은 너희들이여, 예수님께 나오라'는 것입니다. 
아니 '앉은뱅이보다 더 사악한 자들이여, 예수님께 나오라'는 것입니다. 

왜냐면 너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데 동참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미워하고 싫어해서, 그분을 죽이기까지 했던 
가장 끔찍한 죄를 범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 주었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들의 죄악을 대신 담당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너희들은, 빌라도가 죄없다고 판단한 그분을 
놓아주기를 거절했을 만큼 그분을 미워했을지라도, 
그러나 그분은 너희들을 용납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너희들은 거룩하고 의로운 분이신 예수를 거부했을지라도 
그러나, 예수는 너희들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써 
너희들을 거룩하고 의롭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너희들이 예수를 대신하여 살인한 자를 선택했을지라도 
그러나 예수는 바로 너희 같은 사악한 죄인들을 위하여 
여전히 너희들을 택하여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가 너희들에게 생명을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너희들은 그분을 죽였지만, 
그러나 죽음에서 살아나신 예수는 
여전히 너희에게 생명을 주시는 생명의 주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죽였던 사악한 자들이여! 
그러나 누구든지 예수께 돌이켜 나오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 앞에 누구든지 나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으로부터 주어지는 새로운 삶, 생명의 삶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19

▲여러분 우리는 지난 시간 앉은뱅이가 일어나 성전으로 들어간 사건을 살펴봤습니다. 
이 기적은, 부정한 자가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그림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로부터 거절된 자가,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안으로 초대되는 그림이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누구든지 이제는 하나님께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의 두 번째 설교도, 사실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베드로의 설교는, 그 대상이 더 넓어지고 깊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넘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죽이는 데 동참했던 가장 끔찍한 죄를 저지른 자들도 
얼마든지 주님께 돌이켜 나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실제로 죽였던 가장 사악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이 앉은뱅이와 같이 그분께 돌이켜 회개하면 
누구든지 하나님은 버리지 않으시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완악하고 더러운 죄인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씻지 못할 죄는 이 땅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돌이켜 회개하면 그분과의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19
그 생명을 마음껏 누리라는 것입니다. 
주님께 돌이키는 회개를 통해 우리에게 허락된 이 생명을 날마다 누리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이상 예수님은, 여러분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죄의 자리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그 죄를 정죄받는 것으로, 
죄책함에 머무는 자리에 있기를, 주님은 원하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그 죄로 인하여 
누구 하나도 하나님께 대한 기쁨을 잃어버리며 사는 것을 
하나님은 오늘도 결코 원하지 않으십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러나'의 은혜를 주십니다. :15
우리가 죽인 예수를 '그러나' 하나님이 살리심으로  :15 
우리의 생명의 주가 되게 하셨듯이 

우리가 어떠한 죄인일지라도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죄를 가지고 나온 우리에게 
'그러나' 새로운 삶, 생명의 삶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사악한 죄를 한 주간 동안 지었다 할지라도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거절되는 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거절되지 않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단순히 우리를 받아주시되, 예전과는 다르게 
죄를 지었으니, 그저 멀리서만... 아무 친밀함 없이 받아주시는 게 아닙니다. 

마치 죄를 지은 적이 한 번도 없는 것처럼 
흠없이, '완전히' 우리를 새롭게 받아주십니다.  :16b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위 때문에 우리를 받으시는 게 아니라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살아나신 구주의 의로우심 안에서 
우리를 받아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 사랑하는 여러분, 
이 사랑스러운 주님께 나와와 회개하고 돌이키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하나님과의 교제가 오랫동안 끊긴 분들 계십니까? 
예배를 드려도 그냥 아무런 은혜 없이 돌아가시는 분들 계십니까? 
기도를 해도, 기도가 잘 안 되는 분들 계십니까? 

여러분, 그런 분들일수록 주님께 회개하며 돌이키셔야 합니다. 
왜냐면 그런 분들일수록 오늘도 하나님이 멀게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를 부르시는 이 예수님의 사랑 앞에 나오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의지하고 살았던 사랑하며 살았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께 돌이켜 회개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없이 살았던 우리의 모든 삶의 양태를 회개하고 
주님께 돌이켜 회개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새롭게 시작되는 한 주도 예수님이 주시는 새로운 삶, 
생명의 삶을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