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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받는 기도

LNCK 2025. 2. 13.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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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받는 기도 | 요나 2:5-10 |  수특새 | 25.1.8 - YouTube

 

응답받는 기도           요2:5~10             2025.01.08. 

◑주제 / '기도'를 통해, 점점 회복하는 요나

요나서의 중심부에는 기도가 있습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했다' 이걸 단면적으로만 보면, 많은 걸 놓칩니다. 

요나의 기도는 대 전환점 turning point 입니다. 기도를 기점으로 반전이 일어납니다. 
기도는 요나의 스토리의 방향을 바꿔 놓습니다.  

언제나 여러분 그렇습니다. 기도가 삶의 방향을 바꿔 놓는 것입니다.
기도는 삶의 핵심입니다. 기도를 단순히 종교 행위로만 보면 안 됩니다. 

기도는 프로그램이 아니죠. 또 어떤 활동이나 무슨 프로젝트가 아닙니다. 
경건 생활에 도구가 아닙니다. 기도는 신자의 존재 자체입니다. 

이 기도의 비밀을 아는 사람만 알죠. 기도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기도의 시간이 따로 없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면 할수록 기도가 더 하고 싶습니다. 

그게 이제 '기도의 비밀'을 아는 사람들이죠. 신앙에서 기도를 떼내어 보십시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기도를 떼 버리면, 신앙생활이 맹숭 맹숭해집니다. 

우리 신앙과 삶의 가장 큰 손실은, 기도에 대한 오해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기도를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놓지 않으면,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집니다. 
삶이 공회전을 하는 것입니다. 회복은 기도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요나의 기도는 요나서의 터닝포인트입니다. 

여러분, 기도가 왜 위대한 것입니까?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들으신다!' 이건 엄청난 얘기입니다. 
'내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신다.' 사람이 듣는게 아닙니다.
'하늘의 하나님이 들으신다.' 내 기도는 엄청난 것입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합니다.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기도를 배웁니다.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죠. 

하나님은, 기도의 자리로 요나를 몰아가십니다. 
오직 기도에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 그게 물고기의 배 속이었습니다. 

여러분 실제로 기도하는게 쉽지 않습니다. 기도할 시간과 공간을 확보하는게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기도의 시간과 공간은, 늘 다른 것에 떠밀려 다닙니다. 

여러분 바쁜 도시의 삶은 더욱더 그렇습니다. 도시의 삶은 기도를 배우기 어려운 환경입니다. 
현대인들에게 멋진 카페는 매력적이고 인기가 높습니다. 
그러나 기도실 방석은 곰팡이가 피어 있습니다.       
각종 행사들의 밀려, 기도는 비인기 종목입니다. 

 

기도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무엇을 통하여 알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굳이 요나를 물고기 뱃속으로 집어넣으신 이유입니다. 

요나의 기도는 부르짖음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기도의) 후반부로 가면서, 응답과 감사와 헌신으로 끝냈습니다. 

기도는 기도 속에서 자랍니다. 요나의 기도는 그냥 늘어놓는 넋두리가 아닙니다. 
아주 틀을 잘 갖춘 정교한 기도입니다. 

이것을 보면, 요나는 본래 기도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기도를 잊어버렸습니다.

이제 본문에서, 다시 그의 기도가 살아나고 있습니다. 
삶의 주변부에 있던 기도가, 삶의 중심부로 옮겨지는 것이죠. 

여러분, 이렇게 최악의 상황에서, 최고의 기도가 터져 나옵니다
아이러니죠. 

요나는 상황의 지배를 받지 않고, 이제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왜요? 기도는 상황을 바꾸어 놓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는 홀로의 작업이 아닙니다. 요나는 지금 하나님과 대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깊은 기도는, 하나님 안에서 진행이 됩니다. 
우리의 몸부림만으로는, 기도가 깊어질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기도는 많은 일을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이, 기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여러분, 우리는 기도가 없으면, 하나님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들만 따라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기도에 집중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버지가 말씀하신 그 길을 따라가기 위해서! 

주님의 길로 가는 길은 은밀합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가는 길과 다릅니다. 
세상은 모두가 정상을 향해 갑니다. 높은 곳으로만 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그 길을 결코 걸어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길을 인도하십니다. 
기도는 우리의 삶에 많은 시행착오를 줄여줍니다. 
우리는 평생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서요!

요나는 물고기 배 속에서 비로소 기도를 회복합니다. 

기도가 회복되면,  삶은 회복됩니다. 
회복의 시작은 기도를 통해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기도하면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죠. 
기도하면 삶의 질서가 잡힙니다. 

우리는 요나를 통하여 기도를 배웁니다. 요나의 기도는 응답되었습니다. 
응답받는 기도가 무엇인가요? 그것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기도를 통하여 응답을 받아야 합니다. 
그 응답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경험한 신앙이 축적될 때, 우리의 신앙이 더 풍성해지고 깊어지겠죠.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기도하는 가운데 얼마나 응답을 체험해 보았는가요? 
이게 우리 신앙의 레퍼런스가 되는 것입니다. *참고자료

▲자 요나의 기도는, 시편을 연상하게 합니다. 시편에는 기도의 모델들이 나옵니다. 
여러분 기도가 잘 안 될 때는 시편을 읽으십시오. 그 시편이 기도들입니다. 
너무 멋진 기도문이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시편을 쭉 읽으시면 돼요. 
그 시편의 구절들을 멈추고 묵상하면서, 그 내용 그대로 기도하시면 됩니다. 

시편의 그 시인들이 쓴 그 시를 읽으면, 그 시인들의 감정이 나에게로 와요. 전달이 돼요. 
그래서 나하고 같이 이렇게 감정이입이 되면서, 그게 나의 기도가 됩니다. 

오늘 요나가 물고기 배 속에서 그냥 기도한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기도 안에는 시편들이 들어 있어요. 
시편 6편, 30편, 31편, 69편, 116편 등입니다. ('시편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여러분, 시편은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상에서 지치고 방향을 잃어버렸을 때, 시편을 읽어 보십시오. 

우리는 시편을 통해서 기도를 배웁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시편은 기도 학교다'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곁길로 빠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곁들로 빠질 때가 있어요. 
우리의 감정에 치우친 기도를 할 때도 있어요. 
근데 시편 기도는 전혀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여러분 기도는, 기도 학교에서 제대로 배워야 합니다. 
기도 학교는 세상에서는 알아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유명한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 해도, 기도 학교는 나와야 합니다. 
요나의 물고기 배 속의 삼일삼야는 '기도 명문학교'입니다. 
그 요나의 기도를 보면, 요나는 구약의 시편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 여러분,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응답하실 하나님에 대한 기대감이 없다면, 기도할 힘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기도의 동기는 하나님의 응답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의 침묵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응답에 대한 확신이 강할수록, 기도는 날개를 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듣지 않는다면, 무슨 기도할 맛이 나겠습니까, 의욕이 생기겠습니까? 
여러분 성경은 '기도의 책'입니다. 

그리고 이 기도는, 하나님의 편에서 시작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기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매달린다고 되는게 아니에요. 

기도의 출발점이 하나님이라는 거죠. 누가 기도하라고 하셨습니까? 
여러분 마태복음 7장 7절이 가장 기도에 대한 원색적인 구절이죠. 
'(하나님을)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하나님을)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하나님의)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주님이 기도하라고 하셨어요. 기도의 동기부여를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기도를 시작하게 하신 분도 주님이시고, 그 기도를 끌고 가시는 분도 주님이시고, 
그 기도를 응답하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물고기 배 속에서 기도하는 요나는, 하나님의 응답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욘2:2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2:5~6절 
'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감쌌나이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물이 나의 영혼까지 둘렀다. 깊음이 내 머리를 감쌌다.'  
자 오늘 본문의 이 표현들을 보면, 굉장히 시적인 묘사들인데 구체적이죠.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다.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막았다.' 
가장 절망적인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거죠.

도무지 빠져나갈 수 없는 완벽한 절망적인 상태...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어요.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도다.' 
나는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으면 죽은 거예요. 
근데 그가 살아있다는게 기적이죠. 

여러분, 이 기적을 누가 일으키셨다는 겁니까? 
그가 물고기 뱃속에 있다는 자체, 그리고 그 속에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베푸신 기적인 것입니다. 

기도하는 순간부터 그는, 이제 물고기 배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는 하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응답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2:7절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놀라운 고백 아닙니까? 이토록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그가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어요. 
그리고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요나는 자신의 기도가 응답되었음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어떤 기도도 하나님은 들으십니다. 그리고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확신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그것이 우리의 기도의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자 이 요나의 기도는, 고통의 문제를 직접 다루고 있습니다. 
요나는 고통의 문제를 우회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고통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자신이 당한 고통의 직면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애써 고개를 돌려 버립니다. 

여러분, 고통 속에 있을 때 받는 유혹이 있습니다. 
빨리 고통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고통을 주는 현실에서 벗어나는 일에 몰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고통에 정직하게 직면해야 합니다. 
근데 그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을 직면하면, 내 아픈 부분이 드러나야 합니다. 
그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이 왔는지'를 아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고통을 직면하지 않으면, 그 고통은 반복될 수 있습니다. 
이유를 모르면, 고통은 가중될 수 있습니다. 

'왜 풍랑이 일어났는지? 왜 내가 물고기 배 속까지 들어와 있어야 하는지?' 
요나는 기도 가운데 발견합니다.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이,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를 알고 있는 겁니다. 
요나는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을, 하나님이 왜 자신에게 허락하셨는지도 깨닫고 있어요. 

이게 매우 중요합니다. 나에게 일어난 일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왜일까?' 스스로 물으셔야 돼요. 

그건 어려운 일이에요. 고통스러울 수 있어요. 
그리고 내 치부가 드러나는 것이고, 내 연약함과 실패가 드러나는 일이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그러나 물어야 합니다. 내 삶에 일어난 모든 문제에 대해서 또 하나님께 질문하고, 
'그것이 우연이 아니요., 모든 것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정직함인 것입니다. 
자신의 속내를 숨기고 기도하면 안 됩니다. 
그런 기도는 하나님에게 상달 될 수가 없습니다. 

미사여구, 중언부언은 금물입니다.
하나님을 설득시키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고통의 원인을 합리화 하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무엇보다도 무서운 것은, 사람이 고통에 적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랫동안 고통을 당하고 있다 보면, 그 고통에 적응해요

인간이 고통에 적응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 줄 아세요? 
그 고통을 직면하지 않습니다. 
'왜 고통이 찾아왔는지? 내가 어디에서 잘못되었는지?' 망각해 버립니다. 

여러분, 기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기억입니다. 자신의 죄를 기억해야 합니다. 
자신의 허물을 기억해 내야 합니다. 
그리고 정직하게 그것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기도의 중요한 것은 진실함입니다. 
진실함이 빠진 기도는 하나님이 들어주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정직한 자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말 자체보다,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 보십니다. 
하나님은 워드 플레이(말 장난)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기도에서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인정입니다.
죄를 지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겁니까? 하나님을 따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죄를 지을 때는, 그곳에 하나님이 없습니다. 

그래서 죄를 지을 때, 우리 모두는 내가 신이 되는 것입니다. 
근데 우리는 하나님을 속일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었다고 자백해야 합니다. 

어떤 죄이든지, 그 죄는 하나님 앞에서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속이지 않고는,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다윗도 그의 참회시에서, 시편 51편을 보면, 
'내 죄가 하나님 앞에 있다'고 말합니다. 

시편 시인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매우 솔직합니다. 
자신의 감정, 자신의 생각,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있는 그대로 쏟아 놓습니다. 

요나의 기도는 놀랄 정도로 솔직합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합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있는 그대로 나아가면 되는 거죠. 

말은 좀 어눌해도.. 논리가 좀 안 맞는 것 같아도.. 문맥이 안 맞는 거 같아도... 
정직한 기도! 그게 기도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십니다. 

▲여러분 이게 쉬운게 아닙니다. 정직한 기도를 드리는게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내면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끊임없는 밀당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것들을 속입니다. 자기의 감정을 억누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있는 사실들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일에 
우리가 너무도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그 정직하고 솔직한 기도를 드리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 정직한 기도만이 하나님 앞에 상달되는 것입니다. 

요나의 고통은 계속되지 않습니다. 요나는 삼일삼야를 물고기 뱃속에서 지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3일은 금방 지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요나의 입장에서는 그 고통은 결코 짧은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편안한 의자에 앉아 있으면... 1시간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좀 딱딱한 의자에 앉아 있으면 10분도 좀 힘들죠. 
근데 울퉁불퉁한 돌멩이 위에 앉아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1분도 힘들어요. 

여러분 상황이 참 중요하죠. 요나의 물고기 배 속은 어떨까요? 
고통의 크기에 따라, 시간은 다르게 느껴집니다. 

고통의 순간에는 시간이 가지 않습니다. 고통이 심할 때는, 시간이 멈춘 것 같습니다. 
여러분 요나가 표현했듯이, 물고기 배 속은 '스올'이라고 했습니다. 
그야말로 지옥 같은 곳입니다.  

요나의 그 경험을,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알 수가 있겠습니까? 체험해 보지 않았는데요.
그 뱃속... 여러분 완전 암흑입니다. 100% 흑암입니다. 오직 손과 발로 더듬어야 되는 곳입니다.
그리고 물고기의 소화액이, 요나를 계속 녹이려고 했을 것입니다.
또 마치 험한 풍랑 속에 배를 타는 것같이,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혼미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지옥이 어떤 곳입니까? 단 1초도 견디기 어려운 곳입니다. 
그런 삶이 지속된다면.. 그런 고통이 끝이 나지 않고 이어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과연 견딜낼 사람이 있을까요? 

일정한 시간은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계를 넘어가면 무너집니다. 미치는 거죠. 
여러분이 고통이 길어지면, 마귀가 또 공격을 합니다. 모든 걸 끝내라고 속삭입니다. 

'끝이야, 끝이야...' 그래서 마귀는, 우리가 고통과 맞서 싸울 용기를 빼앗아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네가 갈 길을 가라'고 유혹합니다.  

항상 그렇습니다. 마귀는 우리가 일어서는 일에 도움을 주지 않습니다. 
망하는 길을 재촉합니다. 그리고 그 고통이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속삭입니다. 

그러나 고통의 끝은 반드시 옵니다. 
시30:5절에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그랬어요.

하나님의 노염은 잠깐입니다. 하나님의 노염이 계속되면 살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살짝 노여워 하십니다. 

요나의 삼일삼야는, 하나님의 노여움이 잠깐이었다는 거죠.
만약 계속 뱃속에 갇혀 있었다면 어떻게 될까요? (거기서 죽었을 것입니다)

이 숨 막히는 일상의 위기가 끝도 없이 펼쳐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래서 어떤 하루는 천년과 같습니다. 

욥기서를 통해 보여주는 건 뭡니까? 
'고난의 순간,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를 도시는 분은 오직 한 분뿐이시다.' 

하나님은 계속 노를 바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노는 잠깐입니다. 
하나님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우리의 체질을 하십니다. 
우리가 질그릇 같음을 아십니다. 

우리 각자가 가지고 있는 그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그 수위를, 하나님은 다 알고 계세요. 
그게 각자 다 다르거든요. 그렇지만 하나님이 다 알고 계세요. 

히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니까 여러분, 어떤 어려움이나 시험을 당하면
'이건 아무도 모르지.. 나밖에 모르지' 그렇게 생각이 들죠. 

그래요, 남편도, 아내도, 자식도, 부모도 몰라요. 
고통은 자기 혼자만 겪는 거예요. 

근데 알고 계신 분이 계십니다. 나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분이 한 분 계세요.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죄는 없으세요.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4:16

여러분, 하나님은 무지막지하게 밀어붙이지 않습니다. 
고전10:13절을 보면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여러분, 고통은 지나갑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영원한 고통은 없습니다. 

왜 고통에 대한 인내가 강조됩니까? 
만약 고통이 끝나지 않는 고통이라면, 인내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끝은 반드시옵니다. 
우리가 확신하는 것은, 하나님이 끝을 내신다는 거예요. 

▲우리가 늘 묵상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시편 103:9절에 '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여러분, 내 힘으로 물고기 뱃속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자해가 됩니다. 
내가 살아나려고 몸부림을 칠수록, 더 고통스러워집니다. 

물고기 뱃속에 넣으신 분이 꺼내어 주십니다. 
물고기는, 하나님 명령 없이는 입을 열지 않습니다. 요나를 토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인생의 어두운 밤을 보내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언제 끝이 날까? 과연 끝이 나는 순간이 올까?' 
그 시간은 하나님이 쥐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끝!'이라고 하실 때가 옵니다. 
하나님의 정확한 때, 그때는 하나님만이 알고 계신 거죠.

우리가 가지는 소망은 무엇입니까? '고난의 끝은 옵니다. 
반드시 기쁨으로 가득한 아침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 끝을 하나님이 쥐고 계시고,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2:8절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배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우상숭배자죠.
하나님의 자리에 다른 것을 올려놓는 순간,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는 순간 
온갖 우상들이 다가옵니다. 

왜 지금 우상 얘기가 나오죠? 니느웨가 아니라 다시스로 가는 길이 
바로 우상화의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예배하는 행위, 
요나는 무엇인가에 홀린 듯 다시스 행 배를 탔습니다. 

여러분 이 유혹은, 우리에게도 살아가는 날들 동안 내내 우리를 따라다니며 
우상의 문제에서 자유로운 순간이 한 번도 없습니다. 

언제나 변질은, 예배의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우리도 모르게 금송아지를 만듭니다. 
우리 자신의 만족에 몰두하는 순간, 우상숭배에 걸려듭니다. 

우리가 가장 손쉽게 빠지는 죄는, 하나님의 자리에 나를 올려 놓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가운데도 시험이 찾아옵니다. 자기도취. 

바리새인들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하다가, 길을 잃어버리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드러내는 일에 매우 익숙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져갑니다. 
자기 욕망이 부풀어 오를 대로 부풀어 오른 요나를, 
하나님이 물고기 뱃속에 집어넣으십니다. 

물고기 뱃속이 어떤 곳입니까? 아무리 자기를 부풀리려고 해도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물고기보다 더 축소시켜 버리셨어요. 
물고기 뱃속에서 무슨 재능과 재주를 부릴 수 있습니까. 
교만에 빠질 구석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할 수 있는 한 미니마이스 시켜 버렸어요. *최소화
어떤 것도 추구할 수 없는 상황, 감금된 상태에서 
비로소 요나는 자신의 존재를 확인합니다. '나는 신이 될 수 없다' 

어설픈 시도를 멈추어야 합니다. 자기 한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나를 바로 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요? 

자, 요나는 이제 깨닫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자기 자신을 위해 소비한 죄!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망각한 죄! ... 그 죄를 이제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합니다. 

 

◑2:9절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

9절에서 요나는 하나님의 구원을 지금 의심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죠. 
이제 요나의 기도가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근데 이 기도의 끝이 너무도 아름답게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이 기도는 세 가지입니다. 


1) 첫째는 감사입니다. 
요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기도의 마무리는 감사이어야 합니다. 

기도가 성화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통하여 보여줍니까? 감사입니다. 
요나는 지금 물고기 뱃속에 여전히 갇혀 있습니다. 스올이요. 깊은 웅덩이입니다. 

여러분 이런 상황에서 감사한다는 것은 놀랍지 않습니까? 
그동안 요나가 보여왔던 미숙함과는 매우 다른 모습입니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감사는, 매우 눈에 띄는 대목이에요. 
아직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감사할 수 있는 이유는, 
모든 문제를 하나님과 함께 마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문제를 하나님이 다루고 계신다는 믿음을 가지면.. 감사할 수 있습니다. 
내 문제가 그냥 동떨어져 있는 것이라면, 그건 불안한 거지만,

'이 문제를 하나님이 다루고 계신다. 이 문제를 하나님이 알고 계신다.
이 문제를 하나님과 함께 풀어가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면, 
내가 당한 어떤 일들 속에서도, 우리는 감사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감사하는 걸 통하여 무엇을 보여주는 겁니까?
이 감사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기도의 정상에 감사가 있는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감사로 끝나면 해피엔딩입니다
하나님의 충분한 은혜에 대한 반응이.. 감사인 것이죠. 
여러분, 오늘 여러분들의 삶 속에, 감사가 기도 속에 살아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2) 둘째는 예배에요. '주께 제사를 드리겠습니다' :9 
제사(예배)는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핵심이요, 방향전환입니다. 

'더 이상 우상에 빠지지 않겠습니다. 내가 더 이상 하나님의 자리에 앉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에게만 초점을 맞추겠습니다.' 이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요. 

불순종이 어디에서 시작이 되었겠습니까? 예배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배에 문제가 생기면, 불순종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요나의 삶에 예배가 깨어졌습니다. 그것이 불순종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제 그는 다시 예배를 회복합니다. 
그는 이제 순종으로 나아가게 되는 거죠. 

3) 세 번째는 서원입니다. '내가 주께 서원을 갚겠나이다' 그랬습니다. 

헌신에 대한 고백입니다. 도망자에서 헌신적으로 바뀝니다. 
불순종해서 순종으로! 요나의 확실한 변화를 알려주는 대목입니다. 

그는 본래 헌신자였습니다. 
요나가 다시 돌아오는 장면을 보면, 그는 어렵게 어렵게 순종을 배웁니다. 


자 이렇게 기도 가운데 그의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회복됩니다. 
이것이 기도의 위력입니다. 

기도가 시작될 때는 힘들었습니다. 모든게 캄캄했습니다. 
근데 기도하는 가운데, 기도가 깊어졌습니다. 

기도가 깊어지면서, 기도하는 사람에게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는 모든 것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시선을 옮깁니다. 
그리고 헌신을 결단합니다. 
이것이 기도의 아름다운 마무리죠.

여러분,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는 깊은 스올에서 그의 영혼이 깨어났음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영혼의 깨어남이 없으면, 우리는 온전한 기도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요나는 이제 알았습니다. 도주불가! 
추격하시는 하나님 앞에 그는 항복합니다. 
그것이 그의 기도 속에서 나타난 요나의 변화입니다. 

◑2:10절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2:2~9절에 이르는 요나의 기도가 끝나자마자
10절은 '여호와께서'가 딱 나옵니다. 그의 기도에 응답하여, 하나님은 액션을 취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기도의 끝은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물고기 뱃속에서의 생활의 끝입니다. 
하나님이 요나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더 이상 물고기 뱃속에 요나가 있어야 될 이유가 없습니다. '요나를 석방하라' 
하나님이 물고기에게 말씀하십니다.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통하니라' 
물고기가 토했습니다. 

약간 코믹할 수도 있는데, 물고기 입장도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큰 물고기가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속이 얼마나 거북했을까요? 
이건 소화시킬 수도 없고, 내뱉을 수도 없고... 
뭐가 하나 들어있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토해내는 순간이, 물고기가 웃었을 것입니다. '속이 시원하다...' 

요나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 동물이 많아요. 

그가 육지로 나왔습니다. 그의 몰골이 말이 아니겠죠? 
물고기가 어디로 토해냈는지는 언급이 없습니다. 어디인지 알 수 없으려나 
한 가지 주는 의미는 있어요. '원점으로 돌아왔다' 

니느웨로 가라고 했던 그 출발점으로, 요나는 다시 돌아온 거예요. 
돌고 돌아 다시 원점으로 돌아옵니다... 복귀이죠. 

하나님이 요나를 처음 불러 주셨던 그 지점으로 돌아간 거예요. 새로운 시작입니다! 
'이제 살았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살려주신 이유를 이제 알게 되는 거죠. 
불순종해서 순종의 길로 돌이키는 일이 이렇게 복잡하고 어렵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요나의 기도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은혜와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요나서 안에 가득 차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입니다.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요나가 돌이킴으로, 비로소 은혜를 베푸신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에, 요나가 돌아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없었다면, 요나는 돌아올 수 없었어요.  

은혜를 지금 하나님이 베푸시는게 아닙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 은혜가 요나의 스토리 내내 흐르고 있습니다. 

요나의 인생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주었다, 말았다' 하는게 아닙니다. 영속성! 
그 은혜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변치 않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1:1
그가 불순종하여 도망을 칠 때도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 은혜가 아니었다면, 그런 풍랑이 휩쓸려 사라져 버렸을 거예요. 
제비에 뽑힌 일도, 그가 바다에 빠진 것도, 물고기에 잡아먹힌 것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었죠.
은혜는 요나가 아밋대의 아들로 태어나기 전부터, 그는 은혜 안에 있었습니다. 

은혜의 강은 그 발원지가 어딘지 알 길이 없을 정도로 깊습니다. 
추격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요나는 끝이 났습니다. 

여러분, 요나에게서 구원(구조받음)의 근거를 찾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눈을 닦고 보아도, 요나는 문제투성이입니다. 
사랑받을 만한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도주하는 자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도망을 쳤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보다 더 못한, 허약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설명이 안 됩니다. 
요나의 돌이킴보다, 하나님의 돌이킴이 더 큽니다. 
요나의 의지보다, 하나님의 의지가 더 강합니다. 

하나님은 요나 한 사람에게 얼마나 공을 들이시는지... 
여러분, 하나님이 얼마든지 요나 한 사람 좀 내버려둘 수도 있습니다. 
추격하시다가 '아이 피곤하다. 그냥 끝내자' 하고 스탑 할 수도 있습니다. 

관계를 끊고 다른 사람에게로 고개 돌려도 됩니다. 요나 외에도 쓰실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도 말 안 듣는 사람(요나) 따라다니며 신경 쓰는 일이 얼마나 번거로워요?
하나님의 자존심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누구를 선택하여 사용해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마음대로 하셔도 됩니다. 

하나님은 누가 댓글 달아도 꼼짝도 안 하실뿐입니다. 
사람 눈치 보고 행동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요나보다 성격 좋고, 요나보다 실력이 있고, 요나보다 모든 걸 갖춘 사람... 많습니다. 
근데 하나님은 마치 요나 한 사람만 있는 것처럼, 그를 데리고 가십니다. 신기합니다. 

하나님이 입에서는 '요나 요나 요나!'만 외치는 것 같습니다. 
한순간도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당신만 사랑하시나? https://rfcdrfcd.tistory.com/15973323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 말하는지 모르지만,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아'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그런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그 약속을 깨지 않는 분입니다. 
나를 사랑하실 때, 오직 나 하나만 사랑하시듯이 우리를 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집요한 추격자이신 하나님의 시선과 눈을 
여러분, 정면으로 마주쳐 본 적이 있습니까?

요나의 도주국은 끝이 났습니다. 그는 마침내 하나님께 항복합니다. 
요나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그는 이 기도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그의 시선이 오직 하나님께로 집중하고 있습니다. 

요나의 바다 침수 사건은 익사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요나가 가는 길을 멈추게 하시고, 그를 기도에 깊은 자리로 이끄셨습니다. 

그리고 그 절망의 끝에서, 다시 그를 시작하게 하십니다. 
이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 내일 새벽에 뵙겠습니다. *신년 21일 연속 특새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