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20] 영적인 초보를 버리라 (히5:11-6:8)┃2025.2.14. - YouTube
7분 이하부터 녹취~
◈영적인 초보를 버리라 히5:11~6:8 2025.02.14.
◑서론 / 영적으로 우민화 되어져 가는 기독교회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는.. 이런 영적 정체 현상은, 당시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중세 시대의 타락도, 성도들의 무지함 때문이었고요.
현대 교회의 위기 역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크리스천의 정체성, 성도의 정체성을
주일성수, 십일조, 교회 봉사.. 이렇게 만드는 것은, 여러분 '영적인 우민화'예요.
성도들을 우민하게 만드는 거라는 거예요.
근데 여러분, 이 컨셉이 현대 교회 안에 지금도 편만하지 않습니까?
거기서 조금 더 헌신하면 '성가대'
이게 우리나라만 그런게 아니고, 뭐 어디가 봐도 비슷해요.
'당신이 크리스찬이라고 하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하고 물어보면
1) '주일날 교회 가는 거예요. 빠지지 않고 교회 갑니다.' 하는 주일 성수.
2) 그리고 십일조 합니다.
3) 그리고 성가대도 합니다.
이게 전 세계 어디 가든지 비슷한 현상이에요.
그래서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건 어떻게 규정하냐 하면
주일 성수 / 십일조 / 성가대 참여 .. 이렇게 규정하지요.
자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뭐 이런게 틀렸거나 잘못됐다는 것은 아닙니다.
뭐 좋은 거죠. 주일 성수, 당연히 해야 되는 것이고,
십일조도 성경에서 명하는 거니까 좋은 겁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뭐예요?
단지 '그리스도 신앙의 초보'라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오늘 본문이 하고 있는 거죠.
크리스천을 규정할 수 있는 요소는 전혀 아니고요.
그저 크리스천들이 지키고 행하는 '도의 초보' 중에 몇 가지일뿐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으로 스스로의 신앙을 정당화하고 스스로 위안하면서,
자신의 진짜 에너지는 온통 다른 것, 세상 것에 두고 있다면,
과연 이것이 올바른 신앙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본문 성경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6: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대로 나아갈지니라'
무슨 말씀이냐 하면, 기초적인 교훈에서만 계속 맴돌고 있다는 거예요.
오늘날로 말로 하면 '주일 성수, 십일조, 좀 더하면 성가대' 이것만 계속 한다는 거죠.
도의 초보에만 계속 머문다는 것입니다.
참 슬픈 현실이죠. 만물을 창조하시고 온 인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장성한 분량을 닮아가도록 창조된 그런 위대한 성도들이,
그런 단순한 노예 같은 삶을 살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면,
여러분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더구나 초대 교회 때는, '그리스도 신앙의 초보'라고 말해도,
그래도 수준이 있었습니다. 어떤 것이냐면
'회개와, 신앙과, 세례와, 안수, 부활과, 심판'이래요. 6:2
요즘 수준으로 하면, 이게 초보가 아닙니다.
뭐 이 정도 이해하고 있는 사람도 많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초대교회 때는 그래도 수준이 있었어요.
'그리스도교 신앙의 초보 단계'라고 얘기하는 것도, 꽤 수준이 있었는데,
현대 교회는 어떤가요?
주일 성수, 십일조, 성가대 ... 이거에만 갇혀 버렸어요.
히브리서 기자가 오늘날 이 현실을 본다면, 아마 기가 막혀 꼬꾸라졌을 겁니다.
아니 회개와, 신앙과, 세례와, 안수와, 부활과, 심판도 성에 안 차는데,
현대 교회는, 크리스천은 어떻게 규정하냐 하면
고작 주일 성수하고, 십일조하고, 좀 더 나아가면 성가대 하는 사람들로
그렇게 규정해 버립니다. 여러분, 이것은 모욕입니다.
이건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닮아가도록 창조된 사람들을 엡4:13
우민화시키는 거고요. 바보로 만드는 거고요. 이건 범죄에요.
저와 여러분은,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거예요.
저와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을 닮아가도록,
예수 같은 존재가 되도록 그렇게 창조되었는데,
아니 그냥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것을
고작 주일 성수하고, 십일조하고, 좀 더 나가면 성가대! 그렇게 규정하느냐는 거죠.
아니요.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이 위대한 하나님 백성의 수준이, 어쨌든 이렇게 전락해 버렸냐는 거예요.
기억하십시오. 저와 여러분은
주일 성수하고, 십일조하고, 좀 더 하면 성가대하고...
뭐 그런 거라고 창조하신 존재가 아니에요. 그건 초보입니다. 왕 초보입니다. *도의 초보 6:1
뭐 틀린 건 아니지만, 그거는 정말 초보 중에 초보이고...
그러면 뭐하도록 지원받았어요. '완전한 대로 나아가라' 6:2
그 완전한 데가 뭐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을 닮아가는' 엡4:13
즉 '예수와 같은 존재가 되는' 그런 영광된 성도들로 창조됐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누구신지를 알고, 어떻게 창조되었는지를 알고,
이런 모욕들에 여러분, 휘둘리지 마세요.
아니 어떻게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정의가,
주일 안 빼먹고, 십일조하고, 성가대하고... 이런 걸로 정의될 수가 있습니까?
그건 진짜 모욕이에요. 아멘이십니까?
◑<영적 우민화>의 책임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요?
▲1. 물론 일차적으로는 <목회자의 책임>일 것입니다.
(근데 사실 목회자의 책임만도 아니에요. 여러분들도 공범이에요.
이건 나중에 말씀드릴 거고요)
일단은, 일차적으로 목회자의 책임이 맞습니다.
목회자들 사이에 공공연한 어떤 얘기들이 있냐면
'성도들이 똑똑하면 목회자가 피곤하고 교회가 시끄럽다'는 소리가 있어요.
자, 여기에는 몇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우민화 되는 데는 몇 가지 원인이 있는데
첫 번째는 뭐냐면, 목회자의 미성숙함입니다.
맞아요. 목회자들이 미성숙하기 때문에, 성도들이 우민화 되는 거죠.
사실은 '성도들이 담임목사의 영적인 수준을 뛰어넘는다'고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거의 불가능하다고 얘기하는데,
(저는 불가능하다고 하는 건 너무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한 거 같고) 쉽지는 않아요.
그러니까 목회자들이 미성숙하면, 그 밑에 있는 양들도 당연히 미성숙해지는 거죠.
성도들의 존경을 받을 만한 영적인 실력이 없으니까,
성도들이 영적인 실력을 갖추는 것을, 목회자들이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똑똑하면 피곤하다고 합니다.
그걸 상대하고 압도할 만한 영적인 실력이, 목회자에게 없으니까, 피곤한 겁니다.
성도들의 우민하는 일차적으로 목회자의 책임입니다.
목회자는, 진짜 목숨 걸고 기도해야 되고요.
미친 듯이 성경을 연구해야 됩니다.
적어도 기도와 말씀에서는 성도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어야죠. 그렇지 않습니까?
물론 지식적으로나 지능적으로 똑똑해야 된다는 얘기는 아니에요.
성경 연구 미친듯이 한다고 모르는게 아무것도 없느냐?
그렇지 않죠. 모르는게 있을 수도 있고, 몰라서 실수할 수도 있죠.
그건 그냥 정직하게 '모르겠습니다' 말할 수 있는 용기만 있으면 돼요.
근데 여러분 이게 주님 안에서 자존감이 있어야 '내가 모르겠다'는 얘기를 할 수 있죠.
자기가 계속 열등감에 찌들어 있으면, '내가 모르겠다'는 얘기를 못 합니다.
그러니까 진짜 실력이 있는 사람은, 모르는 건 모르겠다고 얘기하면 돼요.
내가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 앞에 정말 금식하며 기도하고
정말 미친 듯이 말씀을 연구했는데
그래도 뭐 틀릴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는 거죠.
그거는 '아유 죄송합니다. 제가 부족해서 모르겠습니다' 뭐 이렇게 대답하면 되고요.
그렇죠. 사람이 어떻게 완전하겠습니까? 목회자도 사람인데...
당연히 틀릴 수도 있고, 또 설교하다 보면, 틀릴 수도 있고...
뭐 저도 사실 틀리는 거 많아요. 설교할 때 이렇게 얘기해 놓고
딱 돌아서서 내려가면 '아이쿠 잘못 얘기했구나' 이런 거 있거든요.
그럼 '인터넷에 올리기 전에 다 잘라서' 올립니다.
그래서 여러분, 하다 보면 뭐 틀릴 수도 있고 그런 거예요.
모든 면에서 완벽해야 된다는 건 아닙니다.
그냥 모르는 건 '모르겠습니다.'
또 실수한 건 '제가 틀렸습니다' 그럼 그냥 되는 거고요.
그러나 적어도 기도와 말씀에 있어서는
'내가 우리 성도들 수준보다, 어떤 성도들보다 많이 기도하고,
어떤 성도들보다 말씀과 씨름하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고...'
사실은 그건 있어야 된다고 믿습니다.
'성경을 얼마나 틀리지 않고 많이 알고 있느냐?'
뭐 그거는 여러분, 지적 능력하고 상관이 있기 때문에,
어떤 성도들보다 성경에 있어서 더 잘 알고, 박학다식하고... 이러진 않을 수 있어요.
그건 뭐 타고난 지적인 능력이 각자 다르니까!
그거를 '영적인 성숙함'이라 그러는 건 아니에요.
그러나 말씀을 대하는 열정과, 기도에 대한 불은,
당연히 목회자가 압도적으로 많아야 됩니다.
그래야 존경을 받을 수 있겠죠.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이 성도들이 우민화되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목회자의 영적 미성숙!>
▲2. 성도들이 우민화 되는 두 번째 이유는 <영적 성숙함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자 목회자들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가장 어려운 성도는 대학 교수'라는 거예요.
그래서 공공연한 얘기가 있습니다.
목사들이 모이면 '목사 잡는게 교수라고'
어느 목사님이 실제로 저한테 이렇게 하소연 하셨던 말씀이에요.
설교 끝나고 나면, 그 교회에 교수님이 한 분 계신데,
장문의 이메일이 온다는 거예요.
-맞춤법 틀린 것부터 시작해서,
-논리적인 비약
-성경 잘못 인용한 것
-숫자 틀린 것들을 일일이 지적하신대요.
와~ 아주 목사님의 피를 말린답니다.
(여러분은 이거 듣고 또 배워서 따라 하지 마세요.)
그래서 목사님은, 설교 때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것 같아요.
그 교수님 입장은 '우리 목사님을 도와드린다고 그런다'는 거예요.
틀린 거 바로 잡아줘야, 다음 번에 안 틀릴 테니까... 하는 거죠.
결국 이 목사님은, 그 교회를 사임하셨어요.
자 그런데 정말로 이게 영적 성숙일까요?
-맞춤법 틀리지 말고, 국어, 표준어를 쓰는 것
-논리적인 비약 말고, 논리적인 완벽성
-성경 잘못 인용한 것 말고 바로 인용하는 것
-숫자 틀리는 것들 안 틀리는 것 ... 이런 것들이 물론 올바라야 하지만,
그게 "영적 성숙"은 아닙니다.
자, 그런 논리라면, 지적으로 똑똑한 사람 말고는, 목회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완전한 대로 나아가라'고 하는 것은, 이런 의미가 아닙니다. 6:2
지적인 실력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전혀 아닙니다.
뭐 설교하다가 좀 틀릴 수도 있고요. 알아도 말이 헛갈려서 나올 때가 있고요,
맞춤법이나 문법도, 시제도 틀릴 수도 있고,
뭐 성경을 착각해 가지고, 다른 거를 잘못 인용할 수도 있고 그래요.
매번 설교 때마다 수 십 번씩 틀리면 안 되지만,
어쩌다가 한 두 개 틀릴 수는 있다고요.
그렇지만, 한 두 번 틀린다고 해서, 영적인 미성숙이 아니라라는 거예요.
오늘날 '영적인 성숙'을, '지적인 성취'로 이해하는 오해가, 교회 안에 편만합니다.
지적 성취에 대해서 성경이 뭐라고 얘기하는지 아십니까? 이렇게 얘기합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고전8:1
지식이 많으면요. 교만해진다는 거예요.
영적 성숙은 지적인 성숙이나 유식함이 아닙니다.
영적 성숙은 뭐냐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거예요. 그게 진정한 영적인 성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
그 분의 충성, 감사... 이런 것들을 닮아가는게 성숙함이지,
지적으로 똑똑해지는게 성숙함이 아니라는 거예요.
말 안 틀리고, 논리적으로 얘기하고, 뭐 논리적으로 비약하지 않고...
이런게 성숙함이 아니라는 거예요.
교회 안에 이런 '잘못된 성숙함'이 편만해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성령의 열매' 어디에 '지식의 열매'가 있습니까?
성령의 열매 중에 '지식'이라는 거 있어요? 없잖아요.
그러므로 여러분, 교회에서는 누가 존경받아야 됩니까?
예, 겸손한 사람이 존경받아야 됩니다.
교회에서 누가 존경받아야 됩니까?
희생하는 사람이 존경받아야 됩니다.
또 한결같이 신실한 사람,
또 늘 감사하는 사람
또 환란 가운데도 끝까지 낙심하지 않는 사람
또 인내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존경받아야지, 지식만 뛰어난 사람이 존경받아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좀 미안한 얘기지만, 그 교수에게 설교하라고 해 보십시오.
문법은 정확하게 맞을지 모르지만, 성도들은 다 졸다가 교회는 망할 겁니다.
과연 영혼을 변화시킬 만한 힘이 있을까요?
영혼을 살릴 만한 능력이 있을까요?
없잖아요. 말만 안 틀리게 잘하는 거지.
메신저(설교자)는, 틀리지 않는 정보를 정확하게 전달하는게 메신저가 아니에요.
영혼을 살리는게 메신저지요.
말은 좀 어눌하고 서툴러도
그 설교를 듣는 영혼이 살아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영혼이 살아나서 믿음의 길을 가고...
이게 영적인 성숙함이고, 파워지요.
영적인 성숙함은, 지적인 성숙이 아니에요. 그거와는 별로 상관없습니다.
영적인 성숙함은 마치 아이를 키우는 부모와 같은 거거든요.
부모는 여러분, 똑똑해야 부모가 될 수 있는게 아닙니다.
아이를 키우고자 하는 사랑과 열정이 있으면, 부모가 되는 거지요.
영적인 리더 라는 것은, 영적인 어미고, 아비인데
영적인 어미, 아비가 되는 것은 똑똑해서 되는게 아니에요.
뭐 많이 배우고, 박사 되어야 아이 잘 키우는 거는 아니잖아요.
아이를 잘 키우는 건 뭐예요? 그 아이를 향한 사랑과, 희생...
그런 마음이 있으면 아이들을 키우는 건데...
영적인 리더십이라고 하는 건 그런 거예요.
그래서 모든 교회들은 알아야 됩니다.
영적인 성숙함은 지적인 능력하고 크게 상관없어요.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느냐' 하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과 희생과 감사와 인내와 충성...
이걸 닮아가는게 영적인 성숙함이지,
말만 번지르하게 잘하는게 영적인 성숙함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게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우민화 하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여러분, 영적인 권위는, 똑똑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닮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거지요.
그래서 앞서 이야기했지만, '목회자가 실력이 있어야 된다'는 건 이런 의미죠.
똑똑해야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전혀 아닙니다.
교회 안에 영적 성숙에 대한 오해가 있어요.
이게 교인들이 우민화 되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3. 교인들이 우민화가 되는 세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성도들의 게으름이에요.
물론 목회자들의 잘못이 일차적인 잘못이겠지만,
성도들도 이게 (우민화가) 편한 거예요.
잘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목회자가 성도들한테, 주일성수, 십일조, 좀 더 하면 성가대... 이것으로 끝!
그 다음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면, 얼마나 편하겠어요?
(*이신칭의로 믿으면 천국간다.. 믿으니까 천국은 따 놓은 당상이다.. 그러니까 더 이상은 No)
그런데 목회자가 그냥 막 이것저것 훈련하라 그러고,
말씀 안 본다고 막 다그치고, 기도하라고 막 끌고 다니고... 그러면 피곤하잖아요.
그러니까 목회자뿐만 아니라, 성도들도 그게 (우민화가) 편한 거예요.
굳이 뭐 이것저것 신경 쓰지 않고, 그냥 최소한으로 하라는 거 하는 겁니다.
주일 성소하고, 십일조하고, 좀 더 하면 성가대...
'아 이거 해 주고, 그 나머지는 나 하고 싶은 대로 할 거니까, 나를 건들지 마'
이게 편한 거죠.
그러니까 골치 아프고 복잡하게 이것저것 신경 쓰게 하지 말라는 거죠.
그리고 자기 관심과 에너지는, 세상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에 올인하는 거,
이게 편한 거죠. 목회자도 편하고, 성도들도 편하고...
괜히 기도하라 그러고, 말씀 훈련, 영적 성장, 제자도, 셀모임... 피곤합니다.
이 영적인 게으름이 목회자들의 '우민화 목회'를 허용하는 거예요.
아니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부추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실 엄밀하게 얘기하면, (우민화는) 목회자의 책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성도들의 책임입니다.
'우민화 목회'를 하도록 허용하는 건 성도들이고요.
오히려 그것을 부추기는 건 성도들이에요.
성도들이 진짜 깨어서, '아 우리 목사님 위해서 기도해야지'
그래서 금식하며 기도하고, 격려하고, 도전하고...
아 그러면 목사님들도 여러분 '우민화 목회'를 못 합니다.
그런데 그냥 그걸 허용해 주고 있는 거잖아요.
서로 짬짬이 하는 거에요. '돈 터치 미, Leave me alone' 그러면 편한 거죠.
그러면 목회자도 뭐 거기서 굳이 뭐 더 열심히 안 해도... 서로 편한 거죠.
이건 아닙니다. 이렇게 되면 안 돼요. 우민화 목회 하면 안 됩니다.
영적인 진지함은 목회자들의 몫이고,
평신도는 그냥 주일 성수, 십일조, 좀 더 하면 성가대, 그것으로 끝!
자 오늘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성도들, 이런 교회를 향해서 질타하는 거예요.
'때가 언젠데 아직도 젖이나 먹고 있느냐?
그리스도 신앙의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 대로 나아갈 지니라' 6:1~2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6:1
여기서 '버리고' 의 원어는 '폐지한다'는 뜻이 아니에요.
'다음을 향해 떠나다. 지금 위치에서 졸업하다' 이런 의미입니다.
'거기서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성숙한다' 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도의 초보를 버리고'는 '도의 초보를 폐지하고' 라는 뜻이 아니고,
'그걸 토대로 더 위로 나아가라'는 뜻입니다.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6:2
'완전한'은.. 헬라어 어근이 '텔레오'인데, '성숙한 mature'이란 뜻이고요.
'연단'은.. 훈련 discipline 이란 뜻이에요.
그러니까 초보적인 것에 머물지 말고,
끊임없이 훈련 discipline 을 받아서 성숙함 mature 에 이르러라 하는 의미입니다.
'완벽함 perfect 에 이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럴 수도 없고요. 주1)
이게 히브리서의 경고이자 권고입니다.
◑자 그렇다면 '성숙함'이란 어떤 걸까요?
'완전한 (성숙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텔레오테스
이게 '성숙한 maturity 데로 나아갈지니라' 라는 뜻이라고 했죠. *어근은 텔레이오스
▲1. 첫째, 성숙함에 대해서 히브리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성숙함에 이르는 첫번째는, '받아먹기만 하면 안 되고, 가르치는 자가 되라'는 거예요.
5:12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가르치는)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자, 가르친다.고 하는 것은, 앞서도 얘기했지만, 지식을 가르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할 뿐이라고 했잖아요.
'가르친다'고 하는 것은, 누군가에게 영적인 임팩트(영향, 충격)를 준다는 거예요.
누군가를 영적으로 이끌고 인도한다는 거예요.
그 가르치는 방법은, 뭐 강의를 통해서 가르칠 수도 있겠지만,
주로 삶의 모델이 되기도 하고, 또 함께 기도해 주기도 하고,
힘든 일이 있으면 같이 하기도 하고...
하여간 그 사람에게 영적인 임팩트를 준다는 뜻이지,
지식을 가르친다는 의미로 제한하지 마십시오.
그것도 필요할 때가 있긴 하겠지만, 그게 가르치는 것의 본질은 아니에요.
영적으로 '가르친다'고 했을 때는, 지식은 그것의 한 파트일 뿐이지,
그것보다 훨씬 포괄적인 의미입니다. 영적인 임팩트를 준다는 뜻이에요.
영적으로 인도한다는 뜻입니다.
△두 종류의 크리스천이 있습니다.
소비형 크리스천이 있고요. 생산형 크리스천이 있습니다.
'소비형 크리스천'은 컨슈머 크리스천이라고 영어로 부르는데,
말 그대로 생산하는 건 없고, 소비만 하는 크리스천이에요.
그러니까 모든 신앙생활이, 나를 위한 종교적인 소비입니다.
치유, 위로, 회복, 관계적인 유익, 자녀교육, 이게 다 자기 신앙생활의 목적이에요.
하나님께서 이런 것들을 결과적으로 주시기는 해요.
그런데 그것이 결과인 것과, 목적인 것은 많이 다릅니다.
그것들은 그냥 하나님께서 결과적으로 주시기는 해요.
치유도 주시고, 위로도 주시고, 은혜도, 회복도 다 주세요.
그런데 그게 우리의 목적은 아니에요. 차이를 아시겠어요?
소비형 크리스천은 철저하게 자기 중심이에요.
'내가 어떤 이익을 얻을까? 내가 얼마나 좋을까? 나에게 어떤 유익이 있나?'
철저히 그것을 위해서 신앙생활하는 사람이, 소비형 크리스천이에요.
이런 소비형 크리스천에게는, 예배조차도, 나의 즐거움과 유익을 위해 드립니다.
이들이 예배하는 목적은, 은혜(종교적 위로 라는 뜻)받기 위한 거예요.
그럼 은혜 받지 말아야 되나요? 물론 은혜 받는 거는 좋은 건데,
그게 결과적으로 따라오는 것과, 목적인 것은 달라요.
우리가 예배하는 목적은 뭐예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죠.
내가 은혜 받는게 최우선 목적이 아니에요.
은혜 받는 건, 하나님이 결과적으로 주시는 거죠. 안 주시면 할 수 없는 거예요.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이지, '내'가 아니에요.
소비형 크리스천의 가장 큰 문제는 뭐냐면,
다 나를 위해서 모든게 소비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자기가 생산하는 건 하나도 없어요.
모든게 받고, 받고, 또 받고...
치유를 받고, 은혜를 받고, 뭐를 받고, 또 받고... 계속 끊임없이 그거 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여러분 소비형 크리스천입니다.
은혜 받는 것.. 당연히 좋은 거죠. 뭐 은혜 못 받는 거보다 훨씬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건 '도의 초보'라는 거예요.
소비형 크리스천은 모든 신앙생활의 목적이
나의 기쁨과, 나의 유익과, 나의 은혜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은, 전도... 당연히 하지 않습니다. 사역... 당연히 하지 않습니다.
그건 특별한 사람들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미성숙한 크리스천이에요. '도의 초보'
분명히 예수께서는 '가서 제자 삼으라'고 하셨지,
'가서 은혜 받으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럼 은혜는..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주시는 거예요.
은혜는.. 내가 요구하는 순간, 은혜가 아니에요.
요구하는 순간 은혜가 아니고, 아무 자격이 없는데, 주어지는게 은혜잖아요.
내가 무슨 권리가 있는게 아니고, 주시면 감사하고, 안 주시면 할 수 없고...
이게 은혜지요. 그게 은혜의 정의이지 않습니까.
당연히 받아야 되는 거라면, 그건 은혜가 아니고, 내 권리지요.
'은혜'라고 표현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냥 아무 조건 없이 주신다는 거에요.
하나님의 권한이라는 거예요.
은혜는.. 주시면 할렐루야 아멘, 안 주시면 당연한 거, 그게 은혜의 정의입니다.
모든 예배는, 모든 신앙은, 여러분, 나를 위해서 하는게 아니에요.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거지!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거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 주시려고 존재하는게 아니란 말이에요.
이 기초가 잘못되어 있으니까, 신앙생활이 꼬이는 겁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이 이상하게 꼬이는 거예요.
미성숙과 성숙함의 첫 번째 차이는 이거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거.. 그게 미성숙이고요. *천동설 신자
그럼 성숙한 건 뭐냐면..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 거예요.
그게 성숙함으로 나아가는 길인 것입니다. 아멘 *'완전한' 6:2
자 그렇기 때문에, 성숙함이란 누군가를 인도하는 사람이에요.
히브리서 표현으로 말하면 '의의 말씀을 경험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 이예요. 히5:13~14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대로, 온 마음과 힘을 다해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영혼들을 살리고, 가르쳐 지키게 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렇게 얘기합니다.
5:12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가르치는)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마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이거 하라고 하셨어요. 성숙함을 향해 나가라고 하는 건 뭐냐면
이 열매를 맺으라는 겁니다.
'가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이 사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가슴에 이렇게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을 통해서 예수 믿은 사람이 몇 명이 됩니까?
여러분이 '나의 영적인 제자'라고 할 만한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여러분을 통해서 성숙해 가고, 성장해 가고, '이 사람은 정말 내가 영으로 낳은
영적인 아들이야' 그런 사람이 몇 명이나 되세요? 솔직하게 물어보셔야 돼요.
만약 이런 사람이 한 명도 없다면? 그럼 이제껏 뭐 하신 거예요?
제 얘기가 아니고 성경의 얘기입니다.
제가 여러분을 질타하는게 아니고요. 제가 무슨 권리로 질타를 하겠습니까?
저도 부족한 사람인데, 지금 히브리서가 그거를 질타하고 있는 거예요.
'너희는 도대체 뭐 하고 있었던 거냐?
때가 언젠데 아직도 그러고 있느냐?
아직도 젖이나 먹고 있느냐?
당연히 너희가 가르치는 자가 되어 있어야 되는데(5:12), 아직도 배우고 있느냐?'
이게 여러분, 성경의 질타라는 거예요.
여러분을 통해서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여러분을 통해서 예수 믿은 사람이 몇 명이나 됩니까?
그 예수 믿은 사람들 중에서, 여러분의 영적인 영향력을 받은..
그래서 성장해 온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만약 한 명도 없다면, 그러면 여러분의 기독교 신앙에 대한 정의는 뭐냐면,
주일성수하고, 십일조하고, 잘 하면 성가대 하는 거예요. *도의 초보 6:1
그게 여러분들이 믿고 있는 기독교 신앙의 정의인 거죠.
그러니까 그거 이상 아무것도 안 하는 거죠.
아니요, 여러분 성경은 그렇게 얘기하지 않았어요.
분명히 예수님 뭐라 그러셨냐면 마28:19~20절을 다시 읽어보세요.
'가르쳐 지키게 하라', '가서 제자 삼으라'
이 열매가 없다면... 성경은 우리를 질타하고 있지 않습니까? 질책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질책의 소리를, 여러분이 겸손한 마음으로 들으십시오.
한번 여러분의 삶을 진지하게 돌아보세요.
'나에게 예수 믿는다고 하는 건 뭔가?'
'왜 성경에서 얘기한 이 일들이, 내 삶에 열매로 나타나지 않는가?'
진지하게 돌아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들이 구원은 받으셨겠죠.
그런데 '때가 오래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가르치는)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5:12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5:12b
이 질책이 저와 여러분을 향한 질책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그리스도 신앙(도)의 초보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아니라, 단단한 음식을 먹는 자,
배우는 자가 아니라, 가르치는 자,
여기서 '배운다. 가르친다'고 하는 건, 다시 한번 얘기하지만,
지식에 대한 얘기가 아닙니다. 영적인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사람,
누군가를 영적으로 양육하고 키워낼 수 있는 사람을 뜻해요.
그런 사람들이 되시기를 도전합니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열망들이 있으셔야 돼요.
거기서부터 영적 성장이 일어나는 거예요.
'아휴 그냥 이대로 있으면 편해요.'
여러분, 자전거는 그대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반드시 넘어집니다.
반드시 넘어져요.
한 1, 2년 동안도 여러분 영적인 성장 없이는,
그 신앙을 (본전으로) 유지하는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반드시 넘어지고 실족하지요.
끊임없이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성장해 가는 사람만, 넘어지지 않게 돼 있습니다.
이게 영적인 원리에요. 아멘!
▲2. 두 번째로, <영적인 성숙함>은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 집니다.
5:12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자 성숙함이란 의의 말씀을 경험하는 거예요.
말씀을 아는 것을 넘어서 경험하는 것... 그게 성숙함입니다.
자,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많이 알아야 되지요.
그리고 그 말씀을 믿음과 결부시켜야 됩니다.
그럴 때 그 말씀이 역사하고,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 경험이 한번 두 번 쌓이면서 성장이 일어납니다.
영적인 성장은, 여러분, 말씀 없이 절대 일어나지 않아요.
말씀 없이 절대로 영적인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일성수. 십일조.. 백 날해도, 말씀이 없으면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읽고, 그 말씀에 매일 자신을 비추어 보고,
그 말씀을 순종하기 위해서 힘쓰고,
그 말씀을 믿기 위해서, 자기 믿음과 결부시키고...
이 싸움을 싸워 나갈 때, 의의 말씀을 경험하는 일들이 일어나거든요.
그 경험이 우리를 영적으로 성장하게 하는 거예요.
시작점은 뭐예요? 말씀을 펼치는 것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2025년도에 계속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이.. '말씀'입니다.
미혹에 대응하는 것도.. 결국 말씀이고,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도.. 결국 말씀입니다.
'말씀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읽는 사람들이 되시고,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 한 구절이라도... 그냥 그 말씀대로 순종하기 위해서 씨름하고, 기도하고,
안 되면 철야하고... 이게 좀 있으셔야 돼요. 말씀 가지고 씨름하는게 있으셔야 돼요.
'아, 이 말씀이 왜 나한테는 안 이루어질까?' 막 이런 고민들이 있어야 돼요.
'이건 과연 순종할 수 없는 말씀일까? 이건 과연 경험할 수 없는 말씀인가?'
막 이거 가지고 안타까워하고, 씨름하고, 고민하고, 기도하고... 이게 있으셔야 돼요.
그걸 통해서 성장해 가는 거지...
아니 말씀에 대한 씨름이 없이, 영적인 성장은 절대로 안 일어납니다. 절대로!
제가 여전히 부족하긴 하지만, 그래도 지나온 지난 3~4년의 신앙생활을 되돌아보면
제 삶에는 이 씨름이 정말 있었어요.
막 잠을 안 자고 밤새도록 말씀 가지고 씨름하고...
말씀 가지고 기도하고...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 아니 그렇다면 왜 안 이루어지는가?'
이렇게 씨름하는 시간들을 통해서, 그나마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성장해 온 거지...
말씀에 대한 씨름 없이, 어떻게 영적인 성장이 일어납니까?
말씀에 대한 씨름 없이 우리의 (죄송합니다) 개 같은 성격이
어떻게 예수님을 닮아가겠어요?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서로 깊이 몰라서 그렇지,
좀 깊게 알면, 다 환장하는 성격들 아닙니까? 다 아시잖아요.
그게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되겠어요?
말씀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연단이 일어나는 거 아니겠습니까?
정말 우리 안에 있는 이 변하지 않는 나의 한결같은... 이 이리 같은 성격을 가지고,
정말 말씀 앞에 씨름하고, 회개하고, 막 울고, 기도하고...
그럴 때 조금 변하고... 또 조금 변하고... 그 씨름이 있으셔야 돼요. 아멘!
오래 걸리는 싸움입니다. 그러나 멈추지 마세요.
킵 고잉 Keep going 하셔야.. 언젠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될 줄로 믿습니다.
▲3. 세 번째, 성숙하면 영적인 분별력이 생깁니다
5:14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여기서 '지각'은 분별력을 의미합니다.
지각을 사용함으로... 즉 분별력이 있다는 거예요.
성숙한 자는, 영적인 분별력(지각)을 사용해서, 끊임없이 훈련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선악을 분별할 줄 압니다.
'선악'은 뭐냐면, 마땅히 해야 될 일과, 하지 말아야 될 일들을 분별할 수 있다는 거예요.
교회는 이 성숙함이 필요합니다.
마땅히 해야 될 일이 뭔 줄 알고,
하지 말아야 될 일이 뭔지를 아는... 이 성숙한 성도들이 교회 안에 있어야 돼요.
교회가 어렵고, 또 교회 안에 분쟁이 있고, 교회가 힘을 내지 못하는 이유는
이 분별력들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마땅히 해야 될 일은 하지 않고,
마땅히 하지 말아야 될 일들은 열심히 하는... 정말 이게 환장하게 하는 일입니다.
분별력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자 불행하게도 현대 교회에서 리더를 세울 때 보면,
이런 성숙함과는 기준이 좀 달라 보여요. 어떤 사람을 리더로 세우느냐?
어떤 사람을 집사로 세우고, 어떤 사람을 장로로 세우느냐?
사회적인 영향력, 교회를 다닌 연수, 재정이 얼마나 많냐?
이런 세속적인 기준으로 집사를 세우고, 장로를 세웁니다.
자, 그러다 보니까 황당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마땅히 해야 될 일은 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 될 일은 열심히 합니다.
이게 뭐예요? 초보가 초보를 인도하고 있으니, 교회가 어지러울 수밖에 없죠.
아니요. 여러분, 교회에서는 영적인 사람이 리더가 돼야지,
사회적인 지위가 있다고 리더가 되면 안 됩니다.
당연히 영적인 사람이 집사가 돼야 되고, 영적인 사람이 장로가 돼야죠.
우리 침례교회는 '장로 제도'가 없긴 하지만,
하여간 영적인 사람이 교회에서 존경받고 리더십을 발휘해야지
돈 있다고 리더가 되면 안 되고요. 사회적인 영향력이 있다고 리더가 되면 안 됩니다.
이게 단순한 원리인데요. 이 단순한 원리를 지키지 못하니까
교회가 다 무너지고, 어려워지는 거예요.
교회는 여러분! 겸손함이 있어야 돼요.
저도 전통적인 교회에서 모태신앙으로 커왔기 때문에,
볼 걸, 못 볼 걸 다 보면서 교회 다녔습니다.
'저분은 장로님이신데 왜 저러실까?'
어휴 제가 학생 때 교회 다닐 때는, 장로님이 부목사님을 따귀 때리는 것도 봤어요.
제가 아무리 생각해도 부목사님이 옳았거든요.
'분명히 부목사님이 말씀하시는게 옳은데
저 장로님은 왜 부목사님의 따귀를 때리실까?' 정말 별꼴을 다 보면서 자랐습니다.
또 청년부에서 교회에다 뭔가 이렇게 요구를 했어요.
'이렇게 이렇게 좀 바꿔 주십시오'
근데 위에서 '안 된다' 그런 거예요. 뭐 그것 때문에 문제가 됐어요.
그랬더니 청년부 담당하셨던 부목사님이
'성경적으로도 그게 옳다'고 건의를 했더니
그래서 장로님들 계신 자리에서 말이죠.
그랬더니 그 부목사님의 따귀를 때렸습니다.
여러분, 이게 영적인 사람이 리더가 되어야 되는 거예요.
돈 있다고 리더가 되면 안 되고요. 지위가 있다고 리더가 되면 안 되고요.
그게 결국 교회를 다 망치고 말아 먹는 거 아닙니까.
근데 또 문제가 뭐냐면,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지위가 있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분들은, 교회 오래 다녔는데 직분을 안 주면,
그것 때문에 시험 들어요. '내가 그래도 세상에선 이런 사람인데..
내가 교회 다닌지 지금 몇 년인데... 아직도 형제님이야?'
그래서 차라리 우리 교회가 좋아요. 아주 평등하게 모든 사람이 형제자매 잖아요.
교회에서는 하여간 '형제님'이라고 부르면 되는데,
왜 모든 사람을 '집사'로 부르려고 그래요?
교회 나온지 몇 년 됐는데 '집사'라고 안 불리면, 창피하다고 생각하나 봐요.
아니 위대한 호칭이 있는데... '형제님' 그게 가장 성경적인 호칭이잖아요.
그거면 충분하지... 왜 그렇게 직분을 받고 싶어해요?
그게 그만한 영적인 성숙함이 있어서... 그렇게 됐으면 괜찮아요. 할렐루야!
성경에도 장로 세우라고 했으니까... 세우는 거 자체가 틀린 건 아니죠. 성경적이에요.
그런데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세워져야 되는 거죠.
시간 지났다고 저절로 세우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마구) 세우니까 이게 사실 교회가 타협한 거 아닙니까?
교회가 타협한 거잖아요.
'어휴, 저 사람 저러다가 시험 들어서 교회 떠나면 어떻게 해... 빨리 직분 줘야지!'
그건 타협이죠. 성경 어디에 집사를 그렇게 함부로 세우라고 돼 있어요?
집사의 자격을 읽어보세요. 얼마나 까다로운지...
그만큼 영적으로 준비되고 성숙한 사람들 세우라고 했는데...
아니 교회 그냥 1년 나오고, 2년 나오면
마치 선심 쓰듯이 '집사님!' 이게 타협한 거죠. 그렇게 가면 안 됩니다.
정확히 성경적으로, 성경에서 하라고 명하는 대로 영적으로 준비된 사람들,
그 사람들을 세워야 되는 거예요. 아멘이십니까?
만약 전도한 영혼이 없고, 만약 내가 키운 영적인 제자가 없다면... 죄송합니다.
집사되고 장로 되면 안 됩니다.
목사나 전도사는 더 말할 것도 없고요.
영적인 제자가 없다 그러면, 집사 되면 안 되고, 장로 되면 안 되고요.
그 사람은 목사가 되거나, 전도사가 되어도 안 됩니다.
참 당황스러운 것은, 이거 (전도, 제자양육) 한 번도 안 해보고
집사 장로는 물론이고, 전도사 목사가 되더라고요.
신학교 졸업하고 그냥 어찌어찌 교회 일을 하다가,
시간 되면 전도사 되고, 또 시간이 지나면 목사 안수 받고, 그리고 목회자가 됩니다.
다 이런 건 물론 아니지만, 꽤 많더라고요.
전도해 본 적도 없고, 개인적으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해 본 적도 없고, 한 사람의 영혼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세우기 위해서
밤새 가며 기도하고, 힘쓰고, 마음 쓰고... 이런 일을 한 번도 안 해본 사람이
신학교 졸업했다고, 바로 전도사가 되고, 목사가 되면... 그게 어떤 교회가 될까요?
이렇게 되면 안 됩니다. 목사 전도사뿐만 아니라, 집사 장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사 장로는 여러분 단순히 행정 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목회적인 리더로 세운 사람들이에요.
영혼을 돌볼 줄 알고, 영혼을 세울 줄 알고, 가르칠 줄 알고...
성경에 집사의 조건이 있잖아요. 딤전3:8~10
가르치기를 잘하며... 딤전3:2
이렇게 장로의 자격이 나오잖아요...
이런 영적인 성숙함이 있는 사람들이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면
여러분 교회가 평안합니다. 그러면 교회가 평안합니다. 아멘이십니까?
영적인 성숙함에 이르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리더쉽이 되면 안 돼요.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에 있는 사람입니까?
초보자 답게 교회에서 훈련받아야 되는 거고,
영적인 성숙함에 이른 사람들이, 교회 리더십으로 세워져야 되는 줄 믿습니다.
자 이런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로서는,
현대 사회에서 일어나는 복잡하고 미혹적인 일들을,
제대로 분별할 수도, 해석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인본주의 관점으로 교회를 끌고 나갑니다.
지금도 여러분, 세상이 어지럽고, 사회가 어지럽다 보니까 참 어렵지 않습니까?
'어느 편에 서는 게 성경적인가? 어느 편에 서는 게 하나님의 뜻인가?'
이게 어려운 이유가, 성경적인 성숙함에 이르지 않은 거예요.
지식은 많을 수도 있어요. 성경에 대한 지식, 신학에 대한 지식이 많을 수는 있는데
그게 성숙함은 아니거든요.
영적인 성숙함은, 한 영혼을 예수 그리스도가 사랑한 것처럼 사랑해 본 적이 있느냐?,
그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정말 잠 못 자고 눈물 흘리며 기도해 본 적이 있느냐?
그 영혼을 하나님 앞에 정말 흠 없는 성도로 세우기 위해서
자기 인생을 드리고, 시간을 드리고... 이거 해본 적이 있느냐는 거죠.
이거 해본 적이 없으면, 여러분, 절대로 영적인 성숙함이 이르지 못해요.
머리만 커지는 거예요.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고전8:1
지식이 불필요한 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지식은, 사랑과 함께 가야지,
그래야 유용한 지식이 되는 거거든요.
정말 영혼을 향한 사랑, 영혼을 향한 열정, 제자 삼으라고 하는 말씀에 대한 순종,
이게 병행이 돼야, 그래야 온전한 성숙함에 이르게 되는 거죠.
이게 없이 지식으로만 계속 신앙을 키워왔어요.
그런 사람은 결국, 지각을 사용하여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거예요. 5:14
그게 영적인 초보인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사역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역자든, 평신도든 마찬가지예요.
성경에는 여러분, 평신도와 사역자의 구분 자체가 없습니다.
사역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영적으로 성숙하지 않습니다.
사역이라는게 특별한 게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고요.
그 사람에게 정말 가르쳐 지키게 하기 위해서, 그 영혼은 사랑하고, 그 영혼을 세우고
이게 사역인데... 이 사역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영적인 성숙함에 이르지 못해요. 아 이건 정말입니다.
뭐 아무리 많이 배우고, 아무리 뭐 지식만 커도
분별을 못 해요. 분별을 못 해요...
*후략된 부분은 히6:4~8 배도자에 대한 경고 rfcdrfcd.tistory.com/15982217
....................................
주1)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이 말은 한글성경은 히6:2절로 나오지만, 헬라어 성경엔 6:1절로 나옵니다.
틀린게 아니라, 헬라어나 영어는 동사가 먼저 나오고,
국어는 동사가 맨 뒤에 나오는 관계로... 문장을 매끄럽게 하다보니 그렇게 배치된 것입니다.
'완전한 데'를, NIV, NASB 등은 maturity (성숙함)으로 번역했으나,
KJV 는 perfection (완벽함) 으로 번역했습니다.
KJV가 perfection (완벽함)으로 번역한 이유는,
라틴어 성경 벌게이트가 perfectum 으로 번역한 것을, 그대로 영어 perfection 으로
옮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벌게이트나 KJV 성경을 쓰던 과거엔 perfectum, perfection 이란 단어의
의미가 오늘날처럼 '완벽주의, 무결점'이란 뜻이 아니었고, 그저 '성숙한' 뜻이었죠.
그래서 KJV가 perfection 으로 번역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성숙함'으로 이해해야 옳죠.
KJV는 좀 오래 전에 번역한 영어성경이고,
그래서 비교적 최근에 번역한 영어성경인 NIV, NASB 등은
그런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아예 maturity 로 번역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