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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15장 집나간 탕자의 귀환

LNCK 2025. 3. 6. 18:25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 사랑

내일교회 2024-03-10 주일 3부 예배 실시간 스트리밍 (정리)

집나간 탕자의 귀환      눅15:11~24     2024-03-10                 교정예정

오늘은 눅15장 "탕자의 비유"에 대해서 우리가 나누려고 합니다.

 

탕자 이야기가 싫은 사람들
어떤 목사님이 교도소에 재소자들을 위하여 설교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가서 시편 23편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소개하며
희망을 잃지 말라는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예배를 마치고 나니, 그 교도소에서 봉사하는 목사님이 오셔서
말씀에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하시며 감사 인사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시는 말씀이
“그리고 특별히 은혜를 받은 것은 탕자의 비유 이야기를 안 해 주셔서 
너무 감사하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동안 목사님들을 교도소에 초대할 때마다
오셔서 많이들 ‘탕자의 비유’를 설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재소자들이 목사님에게
‘탕자 이야기는 신물이 난다’고 불평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탕자 같은 존재들인데도
자신들을 그렇다고 하면 싫어하는 것이 사람들의 공통 심리입니다...

그러나 존 뉴턴 목사님은 자신의 묘비에 다음의 글귀를 적어달라고 유언했습니다.
“한 때 이교도였으며 탕자였고 아프리카 노예상이었던 존 뉴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하신 긍휼로 말미암아 용서받고 크게 변화되어 
마침내 성직자가 되었으며 

자신이 그토록 오랫동안 부인했던 바로 그 믿음을 전파하며 
버킹검에서 16년간, 올니교회에서 27년 간을 섬겼다." 
그는 평생 구원받은 은혜에 감격하며 살았습니다.  *어메이징 그레이스 작사가


▲먼저 서론적으로 세 가지를 기억하셔야 되는데,

1) 첫 번째는, 이 비유가 어떤 상황 속에서 주어졌는가요? 
눅15:1~2절이, 오늘 본문 15:11~24절의 배경이 됩니다. 

15:1~2절에 보면,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죠. 
그런데 이 모습을 보고 바리세인과 서기관들이 이렇게 불평, 수군거리게 됩니다. 
'예수가 죄인들을 영접하고, 그들과 함께 식사하며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있다'

 

이렇게 수군거리고 비난하고 있는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 탕자의 비유

2) 두 번째 기억하셔야 되는 것은, 앞서 나온 두 개의 비유,
즉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 잃어버린 은전(드라크마)을 찾는 여인에 대한 비유는,
초점이 '찾으시는 분'(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찾을 때까지 찾는 목자, 찾을 때까지 찾는 한 여인, 
그래서 '찾는 분'에게 비유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비유를 통해서, 잃어버린 우리를 찾을 때까지 찾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비유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인 세 번째 비유는, 초점이 '잃어버린 자'(탕자)에게 맞추어져 있죠.

3) 세 번째 기억하셔야 되는 것은, 이 비유 가운데 
'탕자는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다' 라는 것을, 꼭 기억하셔야 됩니다. 

그래서 탕자의 비유는, 눅15:11~32절까지 나오는데, 
오늘 설교는, 15:11~24절, '집을 나간 탕자(작은 아들)'에 대해서 살피고,
다음 설교는, 15:25~32절까지 '집에 있는 탕자(큰 아들)'을 살필 것입니다.

     ☞집 안의 탕자 rfcdrfcd.tistory.com/15982239

배경을 통해서 보면, 둘째 아들은, 예수님께 돌아온 세리와 죄인들이 해당하고 15:1 
집안에 있는 탕자인 첫째 아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해당됩니다. 15:2

◑눅15: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5: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여러분이 직접 예수님께 이 말씀을 처음 듣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둘째가 아버지한테 참 무례한 그런 요구를 했습니다. 
'아버지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주소서'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면, 그때 유산을 자식들에게 물려주는데, 
그때 물려줄 그 유산을, 지금 나한테 좀 앞당겨 주십시오. 
이렇게 아버지한테 무례한 요구를 하게 되는 거죠. 

여러분 이 요구에는 최소한 한 두 가지 정도 의미가 담겨져 있는데, 
1) '저는 이제 아버지와 더 이상 같이 있고 싶지 않습니다. 
정말 아버지는 없어지면 좋겠습니다.' 
바로 이런 뜻이 둘째 아들의 요청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2) 그리고 또 이 요청 속에는, 아버지 뿐만 아니라 

'이제 나는 아버지 집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이제 관계를 끊고 살겠습니다. 
나는 아버지 뿐만 아니라, 이 집과 내가 관계를 끊고 살겠습니다. 
아버지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는 존재가 되시면 좋겠고, 
나는 이 집과 관계를 이제 앞으로는 영영 끊고 살겠습니다!' 

이런 참 무례하고 충격적인 요청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때 아버지의 반응, 
여러분이 만약에 아버지였으면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짝대기 하나 들고 와서, 둘째의 다리몽둥이를 부서트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소위 폭력적인 위협을 가해서 아들을 단념을 시키거나, 
아니면 회유를 하거나, 아니면 유예기간을 갖거나, 
뭔가 이런 어떤 행동을 했을 텐데... 

본문의 아버지는 어떻게 하시나요? 그 살림을 각각 나눠주었습니다.  :12 
12절 앞에는 '분깃'으로 표현이 되어 있는데, 
12절 뒤에는 '살림'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살림'은 헬라어로 '비오스'인데, 생명입니다. 
아버지가 나누어준 분깃은 뭔가 하면, '생명'이라는 거죠. 
생명같이 소중한 그 분깃, 그 살림을 이제 나누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12절에서 꼭 기억하셔야 되는 것은 
아버지를 떠나는 아들! 
그렇지만 아버지는 누구십니까? 

아들에게 자유를 주는 아버지, 
배신할 자유까지도 허락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예수님께서는 12절에서 먼저 표현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비유 속에는, 창조 - 타락 - 구속으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이 속에 다 담겨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여러분 지금 이 아들의 모습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었던 모습을 
우리들에게 연상시켜 줍니다.
즉 '이제 하나님 아버지는 없어지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내 인생은 오직 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선악과를 안 두셔도 되는데, 
그 선악과를 통해 배신할 수 있는 자유까지도, 
하나님은 인간에게 허락을 하셨습니다. 
이제 아들은 재산을 나눠 받고는 집을 떠났습니다. 

◑15: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아버지의 집을 떠난 아들의 행동이 13절에 표현이 되는데 

1) 첫 번째는,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가졌습니다.

12절의 재산은 아버지 것입니다. 
그런데 13절의 재산은 이제는 둘째 아들의 것이 되었습니다. 

유산을 받았으니까, 이제 자신의 것이 된 돈을 다 모아서 
'이거는 내 것이다. It's mine' 

여러분, 타락한 인간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인간 불행의 근원이 되는 표현이 무엇이죠? 그것은 'It's mine 이거는 내 겁니다'

저도 외국 가서 유학하면서 어린 자녀들을 거기서 키웠는데, 
우리 아이들이 어려서 영어도 잘 못하는데, 어느 순간 영어를 한마디 하는데 
'아빠, It's mine. Don't touch' 하더라고요.

여러분 지금 둘째 아들이 '내 거야, 손 대지 마!' 하는 것입니다. 

2) 두 번째는, 먼 나라에 갑니다. 
먼 나라는 어떤 곳입니까? 더 이상 아버지의 간섭이 통하지 않는, 
그리고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요즘 말로 하면 익명성이 보장되는 곳이죠.

여러분, 세상이 죄악으로 가득 차게 될 때,  
아는 곳에서는, 사람이 조심을 하죠. 
그러나 아무도 아는 곳이 없는 익명성의 세계에 처하게 되면, 
사람은 함부로 행동을 합니다. 
그래서 그는 익명성이 보장되는 먼 나라로 가게 됩니다. 

3) 세 번째는 허랑방탕합니다. 
이것은 결국 무엇이냐? 통제하는 것을 포기합니다. 
자신의 욕망을 더 이상 통제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내가 원하는 대로, 
오직 나만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 그게 바로 허랑방탕입니다. 
그래서 그 재산을 다 탕진하게 됩니다. 

이렇게 13절에서 예수님은, 집을 떠난 아들의 모습을 세 가지로 설명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내 것이다 라고 하면서 
-익명성이 보장되는 먼 나라로 가서 
-자신의 욕망을 통제하지 않고, 오직 자신만을 위해 모든 것을 허비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탕자'는 사실, 하나님을 떠난 인간 전체의 모습입니다.

특별히 나쁜 놈이 탕자가 아니라, 원래 인간의 본성이 탕자적이라는 거죠. 바로 내가 탕자죠.

 

그래서 13절에는, 이 아들은 세상을 사랑했습니다. 
그렇지만 14절에는, 세상은 언제까지 그를 사랑했느냐? 
그 아들이 돈이 풍족할 때까지만, 세상은 그를 사랑했습니다. 

◑15: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이건 지금도 똑같죠. 세상은 언제까지 우리를 향해, 사랑을 베풀어주나요? 
내가 이용 가치가 있을 때까지! 
그게 돈이든, 외모든, 권력이든... 내가 이용 가치가 있을 때까지만 나를 사랑하지만, 

그 이용 가치가 사라지게 되면, 세상은 나를 외면하게 됩니다. 

그래서 14절에, 이제 재산이 금방 다 없어졌습니다. 그때 어떤 일이 생겼느냐? 
그 나라에 큰 흉년이 들었고, 그는 곧 궁핍해졌습니다. 

'비로소 궁핍한지라'
이게 참 재밌는 말인데, 그가 욕망을 통제하지 않았을 때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소비하였을 때, 그의 삶에 어떤 일이 생겼나요? 
통제할 수 없는 재앙이, 그의 삶에 닥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도, 우리는 흔히 이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그 욕망을 통제하지 않을 때, 
여러분 그것은 끝이 있고, 그 끝이 온 후에는 어떤 일이 생기느냐? 
통제할 수 없는 재앙이 우리들의 삶에 닥치기 시작을 합니다. 
먼저는 우리가 가진 소중한 재산부터 다 잃는 거죠. 

그리고 이제 15절, 그 아들의 삶은 무엇으로 바뀌나?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얹혀 살게 되고,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대지를 치게 하였습니다. 

◑15: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먼 나라에 갔던 이유는 단 한 가지죠. 자유 때문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먼 나라였습니다. 

그는 자유(사실은 방종)를 찾아서, 아버지의 집을 떠나 먼 나라로 갔지만 
가진 돈이 떨어지고 나니까, 그 자유로운 땅에서 그는 무엇이 되었느냐? 
역설적으로  그는 품꾼이 되었습니다. 남에게 얽매이는 사람이 되었던 거죠.

그는 돼지를 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유대인들에게 돼지는 두 가지를 상징합니다. 
-부정을 상징합니다. 레위기에 기록된 부정한 가축을 대표하는 게 바로 돼지죠. 
-돼지를 가까이 한다는 것은, 타락을 상징합니다. 

부정과 타락을 상징하는 것이 돼지인데, 
그 돼지를 치는 품꾼으로 그는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돼지를 치게 되었다'는 것은 역겨운 일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죠. 
소위 막장에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가 정말 살아생전 절대로 하고 싶어 하지 않았던 그 역겨운 일들을 
그는 이제 하게 되었습니다. 

◑15: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쥐엄 열매'는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지중해 연안에 많이 있는 나무 열매인데, 이것은 가축들의 사료로 사용되었습니다. 

돼지, 낙타 등 가축들의 사료로 사용되어졌는데, 
기근이 들 때는, 바로 이것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식용으로도 사용되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쥐엄 열매는 결국 무엇을 상징하나? 모진 가난을 상징합니다. 
그는 모진 가난에 빠져서, 돼지가 먹는 그 가축을 위한 사료, 
그 사료도 그에게 주는 사람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허랑방탕했던 둘째 아들, 
그 둘째 아들에게 주어진 삶의 모습은 무엇이었느냐? 

짧은 쾌락이 주는 기쁨이 끝난 후에, 
그는 통제할 수 없는 재앙이 그의 삶에 닥치게 되었고, 
그리고 또 그는 자유를 누렸던 땅에서 품꾼으로 전락했고 
그는 역겨운 일을 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모진 가난에 시달리는... 그런 환란에 이 아들은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자유(방종)를 위해, 기쁨과 쾌락을 위해 사람들은 세상을 사랑하지만, 
세상은 그런 사람들을 (단물만 빼 먹고는 결국) 외면하는 것입니다. 

◑15: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여러분 이렇게 정말 모진 가난, 역겨운 삶에 떨어졌던 둘째 아들이 처한
이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이 주는 한 가지 유익이 무엇이냐? 
여러분, 고난은 우리를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탕자의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표현 중의 하나죠.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위 구절을 원문으로 하면, 문자적으로 하면 '이에 자신에게 돌아왔다'
쉽게 표현하면 come to his sense 제정신을 차렸다,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입니다.

여러분, 고난이 우리에게 주는 정말 귀한 유익 중에 바로 하나죠. 
우리로 하여금 정신을 차리게 만듭니다. 자신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탕자는 이제 깊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생각의 내용은 뭔가 하면, 
'아버지의 집과, 그리고 그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서' 
그는 이제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된 인식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 그가 품꾼으로서 돼지 쥐엄 열매조차도 주는 이가 없는 
이 모진 가난에 시달릴 때, 우연히 그에게 생각이 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가 아버지 집에 있을 때, 아버지 집에 있었던 품꾼들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품꾼은 hired man 입니다. 장단기 고용인이죠. *헬. 미스씨오스

자기 아버지 집에 있던 품꾼들은, 풍족한 양식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그는 아버지의 집에 대해서 새롭게 생각하는 거죠. 

그곳은 과거에 그에게는 억압의 땅이었습니다. 
자기 자유를 통제하는 억압과 통제의 땅이다.. 라고 생각을 했고, 
그곳에서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이제 자기가 정신을 차려보니까, 
외국에서 품꾼이 된 자신의 현실과, 
고국의 아버지 집에 있는 품꾼들을 비교할 때 
아버지의 집이 행복의 근원이었다 라는 것을 그는 깨닫게 되고, 

그곳이 억압과 통제의 땅이 아니라, 
참된 자유와 풍성함이 있는 땅이었다 라는 것을, 그는 비로소 생각하게 된 것이죠. 
이런 깊은 생각과 인식 가운데, 그가 행동하기로 결심을 합니다. 

◑15: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5: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나의 실패, 나의 무능력, 세상의 차가움... 그런 것들을 다 떠나서 
자신이 처해 있는 이 비극적 현실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이었느냐? 
아버지의 집을 떠나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무능력, 나의 연약함 정도가 아니라 
'내가 이 행복의 근원이 되는 아버지의 집을 떠나 있었구나' 

그래서 그는 결심한 것이 무엇이었느냐?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로 가겠습니다. 
지금 내 삶이 아무리 만신창이가 되어서 굶어죽어간다 할지라도, 
바로 아버지의 집에 가면, 나는 살아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께로 가기로 결심을 하고,     주1)
이제 아버지를 만났을 때 그가 하게 될 이야기, 대사를 준비하게 됩니다. 

두 가지를 준비하는데 
1)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8
한마디로 하면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하나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2) 두 번째는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19

이렇게 말씀드리겠다고 그는 결심을 하게 되죠. 
이렇게 아버지에게 할 이야기를 정리하게 됩니다. 

▲그런데 17~19절까지 우리말 번역은 조금 선명하지 않지만 
참 인상적인 표현이 있습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하다' :17
여러분, 아버지를 어떻게 불렀느냐? 
'My Father, 내 아버지' 입니다. 

앞서 12절에, 아버지한테 재산 상속을 요구할 때는 '내 아버지'가 아니었어요. 
그저 '아버지'였죠. 

18절에 '내가 일어나 아버지에게 가서' 라고 되어 있는데,
원문도 그렇고 영어 번역을 보면 '내 아버지에게 가서' 로 되어 있죠. 

여러분, 그 비참한 삶의 현실, 
아버지에게 고통과 상처, 그리고 그 가문을 수치에 빠뜨렸던 그 아들이, 

그렇지만 그 인생 밑바닥에서, 그가 포기하지 않았던 한 가지가 무엇이냐? 
'그분은 내 아버지이십니다. 그리고 나는 그분의 아들입니다.'  *주제

그런데 여러분 그것을 이제는 요구할 수 없으니까, 
여러분 그는 무엇을 의지하기로 결심했느냐? 

아버지의 긍휼과 아버지의 은혜와 사랑에 
자기 인생을 맡기기로, 그는 결심을 하게 된 거죠. 

여러분 이거 정말 중요합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의 기초가 무엇입니까? 
나의 능력입니까? 
우리를 지금 우리를 향해 환호하는 세상 사람들이, 우리 인생의 기초가 되나요? No, 

아내, 남편, 우리 자녀들, 우리를 향해서 호의를 베풀어 주는 사람들이 
우리 인생에 참된 기초가 될까요? No

그러면 우리도 둘째 아들과 같은 절망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결코 무너지지 않는 인생은 무엇이냐? 

우리 인생의 기초를, 예수님을 통해 나타내 보여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긍휼이 우리 인생의 참된 기초가 될 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사랑 속에, 바로 우리를 맡기게 될 때, 던지게 될 때, 
그때 무엇이 열리느냐? 구원의 문이 열리게 되고, 
우리 인생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주제 

자, 이제 아들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반응이죠. 

◑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게 됩니다. 

'거리가 먼데' 어디에서 사용되었죠? 
아들이 떠나 먼 나라에 갈 때, 똑같은 단어가 사용되어졌습니다.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13

아들은 아버지 안 보기 위해서 멀리 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멀리서, 거리가 먼데도, 아버지는 그를 알아보고,
그를 측은히 여겼습니다. 

'측은히여기다' 헬라어로 스플랑크니조마이, 영어로 had compassion 
이거는 내장이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 그 긍휼한 마음으로 불쌍히 여김을 뜻하죠.
예수님이 병자들을 보셨을 때, 가지셨던 마음입니다. 마14:14

그 극휼한 마음이 넘쳐서 어떻게 하느냐? 
아버지는 달려가서 아들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게 됩니다. 
과격한 환영이죠. 

두려움에 쌓여서 아버지께 나아가는 아들, 
그런데 아버지는 그를 먼저 알아보고, 그에게 과격한 환영을 베풀어 줍니다. 

이 행동 속에 담겨진 것이 무엇이죠? 
그 아들을 받아들이고 용서해 주시는, 
그 아들을 용납하고 그 아들을 용서해 주시는 그 사랑을, 
이제 아버지께서 베풀어 주시게 됩니다. 

◑15: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이 이야기가 끝나기가 무섭게, 아버지는 이제 종들에게 명령해서 
좋은 옷과, 손에 가락지, 발에 신을 신겨라 ... 이렇게 명령합니다. 

◑15: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여기서 학자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뭔가 하면, 순서입니다. 
지금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향해 회개하였을 때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아버지께,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자격이 없습니다' 

바로 그가 회개했을 때, 아버지가 과격한 환영, 과격한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과격한 사랑이 먼저죠.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바로 과격한 사랑을 통해서, 
바로 그를 용납해주고, 그를 용서해 주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그에게 베풀어 줬습니다. 

그때 이제 아들은, 자기가 준비했던 대사를 고백하죠. 
이 대사는, 즉 아들이 준비했던 이야기는, 중간에서 중단되고 맙니다. :21

뭐까지 말해야 끝이 납니까? '저를 품꾼으로 서 주십시오!' 
원래 여기까지가 준비했던 대사인데, 
아버지께서 그 대사를 중간에 막아버린 거죠. 

아들의 이야기를 중단시키고, 어떻게 하느냐? 
종들에게 제일 좋은 옷, 손에 가락지, 발에 신을 신겨라... 이렇게 명령하게 됩니다. 

아들은 돌아옵니다. 돌아오는 아들, 
그리고 아버지는 어떻습니까? 기다리는 아버지. 

아들은 돌아왔고, 기다리는 아버지가 멀리서 먼저 그를 알아차리고, 
그에게 과격한 환대와 사랑을 베풀어 줍니다. 

'제일 좋은 옷, 손에 가락지, 발에 신을 신겨라' 
여러분, 이 표현과 거의 유사한 것이 
창41:42절입니다. '자기의 인장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사슬을 목에 걸었다' 누구에게 해준 겁니까? 

애굽 바로가 요셉을 총리로 임명하면서 했던 행동입니다. 
'그 손에 반지를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혔습니다. 이것은 무엇이죠? 

감옥의 죄수에 불과했던 그를, 애국의 총리로 높이는 것이, 바로 반지와 옷입니다. 
지금 아들에게는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아들의 신분을 회복시켜 주는 겁니다. '주인의 아들'이라는 거죠!

또 하나는 신발입니다. 
노예의 상징이 신발이 없습니다. 

그런데 신발도 없던 그 아들에게, 신발을 신겨 주는 것은 무엇이냐? 
그에게 자유를 허락해 주는 것이죠. 
바로 품꾼이었던 그에게, 아들의 신분을 회복시켜 주고, 
그에게 참된 자유인의 그 권리와 그 참된 자유를, 부여해 주게 됩니다. 

◑15: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유대인들은 돼지고기도 못 먹는데, 그래서 살찐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하는 거죠.
원문에는 사실은 '그 살찐 송아지'입니다. 
잔치를 위해 평소에 준비해 두는 송아지입니다.

'우리가 먹고 즐기자'

천국의 잔치를 예표합니다.
아버지가 그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을, 모든 사람들과 함께 나눕니다. 
언제? 집을 나간 탕자가 돌아왔을 때. 

여러분, 아버지는 이렇게 놀라운 사랑을 베풀어 주시죠. 
그리고 24절에는 큰 기쁨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15: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여러분, 둘째 아들은 어떤 모습으로 돌아왔습니까? 
모든 것을 다 허비한, 초라한 인생으로 아버지께 돌아왔습니다. 

근데 아버지는 그에게 무엇을 베풀어 주셨습니까? 
모든 은혜와 사랑을 그에게 허비해 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허비한 아들에게, 하나님은 모든 은혜와 사랑을 
다시금 그에게 허비하면서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제 제가 책 두 권을 소개할 텐데, 
먼저는 팀 켈러의 <탕부 하나님 Prodigal God>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탕자가 영어로 Prodigal Son 이죠.
팀 켈러는 일종의 언어유희로, 하나님을 Prodigal God 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즉 그의 사랑과 은혜를 한없이 허비, 탕진해 주시는 분이란 의미로,
Prodigal God 이란 말을 만들어 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허비한 인생들, 모든 것을 허비한 우리에게 
하나님은 그의 모든 사랑을 우리에게 허비해 주셨습니다. 

두 번째 소개하는 책은 헨리 나우엔의 <탕자의 귀향>이라는 책입니다. 
제가 토론토에 유학을 갔을 때, 제가 제일 알고 싶었던 분이 헨리 나우엔이었고,
그 즈음에 이 책이 나왔는데요.  

이 그림은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의 마지막 그림입니다. 


이 그림을, 헨리 나우엔이 러시아의 한 박물관에서 보고, 
이 그림을 깊이 묵상하면서, 
이 그림과 눅15장 탕자의 비유를 깊이 묵상하면서 
어쩌면 그의 가장 대표적인 책이라고 할 수 있는
<탕자의 귀향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귀향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 렘브란트의 그림을 통해 나우엔이 언급하는 게,
탕자가 머리도 엉망이 됐고, 한쪽 발에는 신발이 벗겨져 있고 
정말 남루한 모습으로 아버지에게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연로한 그 아버지가, 빨간 옷을 입고 있죠.
그 아버지가 아들을 이렇게 딱 사랑으로 품고 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손을 보면, 아버지의 손이
하나는 거칠게 보이지만, 다른 하나는 예쁜 손입니다. 
왜 렘브란트가 이렇게 표현을 했을까요? 

렘브란트는 30대에 미술가로서 누릴 수 있는 온갖 부귀 영화를 누렸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정말 탕자같이 자신만 위해서 살다가, 
그에게 통제할 수 없는 재앙이 찾아왔습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 다 죽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까지도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 이제는 세월이 지나면서, 또 새로운 미술 스타들이 등장하니까 
그는 점점 잊혀지는 존재가 되고, 
그리고 그를 끝까지 남아서 도와줬던 사람들까지 다 죽게 되고... 
이제 60세가 가까웠을 때, 그는 그냥 외로운 한 노인으로 그는 전락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마치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보았느냐? 
렘브란트는, 바로 '돼지를 치고 있는 탕자의 모습, 
그렇지만 그 돼지우리를 치고 있는 탕자가, 아버지의 집을 기대했던 것처럼 
만신창이가 된, 그리고 삶의 끝을 얼마 두지 않았던 그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성경의 이 비유에서 찾으면서 
이 그림을 그리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누구신가? 
남자의 손, 아버지의 손은.. 나를 보호하는 손이고, 
여인의 손은 무엇이냐? 어머니의 돌보시는 사랑!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보호하는 손으로 나를 지켜 주시고, 
나를 돌보시는 사랑의 손으로 나를 맞이해 주시는... 그런 하나님을 묘사합니다. 

그리고 옆에서 빨간 옷 입고 째려보는 사람은, 큰 아들입니다. 
큰 아들은, 다음 주에 살필 것입니다.

여러분, 그림에 파란색 네모안에, 칼이 나오죠?
누가복음에도 안 나오는데, 저 칼은 뭔가요? 

그림을 연구하신 분들은, 저 칼은 아마 렘브란트 당시에 '아들의 표시였다'고 봅니다.
'그 가문의 표시,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표시가 저 칼이었다' 그렇게 이해합니다.

둘째 아들이, 그 밑바닥 인생, 만신창이가 되었다가 
정말 이렇게 돼지 쥐엄 열매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그 상황에서도 
그가 포기하지 않았던 하나가 무엇이냐? 

'나는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이것을 그는 끝까지 끝까지 포기를 하지 않았고, 
바로 이것 때문에 돌아오게 되는 거죠. 

여러분 우리가 꼭 기억하셔야 되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여러분, 우리 인생의 기초를 어디에 둘 것인가요? 
나 자신의 능력, 세상 사람들의 환영, 내가 가지고 있는 부귀 영화에 
내 인생의 기초를 두게 되면, 언젠가 우리도 이 둘째 아들처럼 무너질 날이 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인생을, 아들이 마지막 의지했던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긍휼,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에 두고,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능력을 바로 우리 인생의 기초로 삼고, 

지금 우리가 어떤 상황 속에 놓여져 있던지 
그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에, 우리들의 인생을 던지는 것이 무엇이냐? 
그게 바로 믿음입니다. 

바로 우리들의 인생을 그 주님의 변함없는 은혜와 사랑과 능력에 
내 인생에 기초를 두게 될 때, 
우리들의 삶에는 다시금 하늘의 문이 열려지고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의 권세를 갖게 되고 
참된 자유를 갖게 되고, 아버지 집의 풍성함을 누리는 복된 삶을 살게 됩니다. 
이런 은혜와 믿음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


주1) 사실10%, 반응90%
심리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사실>은 단 10%만 영향을 미치고,
그 사실에 대한 나의 <반응>이 90%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자기가 키가 작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에게 영향을 미치는 90%는, 그 사실에 대한 자기 <반응>입니다.

키가 작아도 떳떳하게 사는 사람이 있고, 
키가 작아서 죽고 싶은 사람도 있습니다.

탕자는 스스로 돌이켰습니다. 눅15:17
자신의 현실(사실)에 대해 반응을 기가 막히게 잘 한 것입니다.
그 결과 그의 인생은 완전히 반전됩니다.

자신의 신분을 회복하고, 다시 사랑받는 아들이 되었습니다. 
아버지와 그 집안의 종들이 즐거워하며 잔치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최고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변화될 수 있었습니까?  
스스로 돌이킨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현실에 대한 반응이 중요한 것입니다.


▲아들의 죄를 대속한 아버지 (감동글)
미국에 사는 한국인 이야기입니다.

공군 대위로 전역하고 
현대자동차에 입사하여 
차장으로 고속 승진했습니다. 

당시 대졸 초임이 2만 원일 때 
자신은 15만 원을 받았습니다. 

좋은 직장을 퇴사하고 
아들 둘, 딸 셋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왔습니다. 

그런데 중학교 2학년인 
큰 아들이 교도소에 
가게 되었습니다.

자식을 
잘 키우겠다고 이민 왔는데 
아들은 학교에서 왕따를 당했고, 
미국 아이들에게 
놀림감이 되었습니다. 

그 때마다 
아들은 반격을 가했고, 
이 때문에 교장에게 여러 차례 
불려가 체벌을 받았습니다. 

불만이 쌓인 아들은 
어느 휴무일 이틀 동안 
다른 미국인 친구와 함께 

학교에 들어가 
건물 이곳저곳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사건은 
지역신문 1 면에 났고 
온 가족은 좁은 응접실 
구석에 모여 앉아 통곡했습니다.

“한국인의 얼굴에 먹칠했다.”는 
비난은 기본이었고, 등하교 때 
“그 집을 피해 가라.”는 
한인들도 있었고, 

“같은 교육구 학교에 
내 아이를 보낼 수 없다.”며 
전학을 시키는 부모도 있었습니다.

나이 젊은 어떤 한인은 면전에서 
“당신 자식 교도소에 갔다며?” 
하고 빈정거리며 말했습니다. 

겨우겨우 섬기던 교회에서 조차도 
성도들의 눈길이 예사롭지 않아 
출석을 끊었습니다.

교장은 
“세상에 이렇게 학교 건물을 
때려 부순 사건은 처음입니다. 

카운티(County: 자치주) 내의 
어떤 학교에도 전학이 불가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는 '아들 죄가 바로 내 죄' 
라 생각하고 속죄를 위해 
매주 주말에 온 가족을 동원하여 
학교 청소를 하겠다고 했고, 
교장은 '별난 아버지'라는 
표정으로 허락했습니다. 

이 별난 
행동은 나중에 다시 한 번 
플로리다 주 주류 사회를, 
아니 전 미국을 흔들었습니다.

교도소에 간 
중2 아들의 속죄를 위해 
부부가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다니는 네 아이와 함께 주말마다 
학교에 나와 청소하는 장면을, 
운동장을 청소하는 광경을 

AP통신 기자가 
“가족의 명예와 아들을 위해 
부모는 모른 채 하지 않았다.”는 
제하의 기사를 보도했습니다.

기사에는 
“내 아들이 죄를 지었으면 
내가 죄를 지은 것이다. 

내 아들이 저지른 행위에 대해 
변상은 물론 어떤 일이든 하겠다.” 
라는 그의 말이 들어 있었습니다.

美 전역의 신문들이 
AP통신 기사를 받아쓰면서 
아들이 다니는 학교에는 
며칠 만에 수백 통의 편지가 왔습니다. 

변호사비로 쓰라며 
5불, 10불 짜리 수표와 
현찰을 동봉하기도 했습니다.

미국의 신문들은 아버지의 
'아들 죄가 바로 내 죄' 
라는 고백을 들어 

“미국인 부모들도 본받아야 한다.” 
라거나 

“미국 교육계도 
유교적 가족관계에서 이뤄지는 
독특한 교육 철학을 배워야 한다.” 
라는 논지의 기사와 논평을 내보냈습니다.

며칠 후에 반가운 소식이 
가족에게 전달됐습니다. 
법정에서 아들을 
방면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교육청에서는 다니던 학교로는 
되돌아 갈 수 없지만, 
멀리 떨어진 다른 학교에는 갈 수 
있다는 서한도 보내왔습니다.

그 후 말썽꾼 아들은 변하여 
센트럴 플로리다 대학교(UCF) 학사와 
플로리다 텍(FIT) 석사 학위를 받은 후 
미 우주항공국(NASA) 산하 
방산업체에 근무하며 고위 
우주선 탑재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우주선을 쏘아 올릴 때 
수십 명이 달라붙어 점검하는데 
그 가운데 최고참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 오는 'VVIP
(Very Very Important Person)' 들에게 
직접 브리핑하는 유일한 한국계라고 합니다.

'기름때 묻은 
원숭이의 미국 이민 이야기'라는 
책을 쓴 송석춘 씨 이야기입니다.

큰아들 송시영 씨가 
사고를 쳤을 때만 해도 
“아이고 저놈이 자라서 뭐가 될까?” 
하고 걱정이 태산이었는데, 
지금은 가장 가까운 곳에 살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낚시를 
시도 때도 없이 함께 가 준다고 합니다.

선트러스트 은행 부사장으로 
일하고 있는 큰딸도 명절 때마다 
제법 큰 용돈을 보내주고 있답니다.

한 아버지의 대속(代贖)으로 
사고뭉치 아들이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고, 
자녀들 모두 스스로 제자리를 찾아 
우뚝 일어선 아름다운 가정사 입니다.

세상은 누군가를 위해 
대속(代贖) 해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대속(代贖) 할 수 있습니다. 
내 몸처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무서운 아버지 밑에서 자란 사람은 하나님도 무서운 분,
벌주시는 분으로만 아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지금 이 시간 ‘육신의 아버지’는 예로 든 것이고,
사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영적 지도자’의 경우입니다.

그러니 우리 영적 지도자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하고
우리의 사랑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우리 각자의 언행에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을 왜곡하게 하기도 하고
반대로, 하나님의 참 사랑을 전달해 주기도 하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존재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의 전달자입니까, 왜곡자입니까?

신자들에게, 또는 제자들에게
가끔이라도 진심어린 충고를 해 줄 때도 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사람들이 나를 ‘하나님 사랑의 왜곡자’로 규정하는 일이 없도록
특히 충고하고, 책망할 때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도록.. 성령님의 인도를 구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