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특강(1) - 위로의 하나님(고후 1:1-11) - YouTube
◈위로의 하나님 고후 1:1~11 2025.03.05. 고린도후서1강
오늘부터 고린도후서 공부를 12주간 함께 나눕니다.
고린도전서를 우리가 2년 전에 했습니다.
2023년 1학기에 고린도전서를 공부했고,
이제 2년이 지나서 2025년에 고린도후서를 합니다.
2년 전에 연이어서 할까도 생각을 해봤는데
이어서 하면 너무 재미없을까봐,
한 2년 정도 다른 성경을 강해하다가
이제 고린도후서 강해를 공부합니다.
우리가 학기별로 책별 공부하는 이 교재 책의 색깔이 조금씩 다릅니다.
집에다가 꽂아 놓으시면 아주 알록달록한 예쁜 책들이 꽂혀 있는 걸 볼 수 있을 텐데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의 교재는 색깔이 똑같습니다.
나중에 찾기 쉬우라고 고린도전서와 후서는 같은 색깔로 만들었습니다.
그건 별로 중요한 건 아닌데, 이제 고린도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좀 알아 봐야 됩니다.
◑고린도 교회가 어떤 교회인가요?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매우 사랑했습니다.
이 말은 맞는 말이기도 하고, 또 좀 어폐가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왜냐면 바울이 사랑하지 않은 교회가 없거든요.
본인이 개척한 교회들을, 다 사랑했지 않겠습니까?
근데 어떤 때는 빌립보 교회를 특별히 사랑했다고 하고,
또 어떤 때는 에베소 교회를 너무 가고 싶어 했다고 하고,
또 지금은 고린도 교회를 사랑했다고 하면,
그럼 바울이 진짜 사랑한 교회가 어디냐? 이렇게 물을 수 있잖아요.
근데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숫자적으로 따져보면 *편지 횟수, 방문 횟수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제일 사랑했습니다.
왜냐면 바울의 속을 제일 많이 썩였거든요.
사연이 많으면, 또 그 사연이 계속 쌓이다 보면, 또 사랑도 깊어지는 법입니다.
부모 자식간에도 오랫동안 싸우다 보면, 나중에 얼마나 절절 합니까?
부모님이 세상을 떠날 때, 그 절절함을 감출 수가 없는 것처럼,
고린도 교회와 바울의 관계는 애증의 관계입니다.
굉장히 많이 싸우고, 굉장히 많이 갈등했고, 또 바울의 속을 너무 많이 썩였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전후서를 읽으실 때는,
'우리 자식을 본다' 이런 마음으로 읽으시면 됩니다.
자식이 속을 썩이지만 버릴 순 없잖아요. 내쫓을 수도 없고...
근데 또 사랑스럽고... 또 (속썩임을) 자주 잊어버리고... 그런 존재인 것처럼,
고린도 교회가 바울에게는 꼭 그런 교회였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2차선교여행 때 개척했는데,
아시다시피 2차선교여행 때 바울의 목적지, 본인이 원했던 목적지는 에베소였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막으시죠. 아시아(에베소)로 못 가게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바울이 유럽(마게도냐)으로 갑니다. 정처 없이 갑니다.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따라 그냥 가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이 건너간 곳이, 오늘날의 그리스 지역입니다.
그리스의 북쪽 지역, 거기를 마게도니아 라고 부르죠.
마게도냐에서 바울이 2차선 여행 때 갔던 세 성을 기억하실 겁니다.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행16:11~17:15
그 북쪽 마케도니아 지역을 개척하고 나서, 바울은 그리스 남쪽으로 갑니다.
남쪽이 살기 좋고 경치도 좋은 곳인데, 과거엔 그 지역을 '아가야' 라고 불렀죠.
아가야 지역에서 바울이 두 도시를 갔습니다.
첫 번째는 아덴 (아테네) 17:16~34
근데 아덴에서는 바울의 열매가 거의 없었습니다.
왜냐면 아테네는 알다시피 철학의 도시 아닙니까?
바울이 거기서 철학자들과 논쟁했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교과서에서 배웠던 스토아 학파, 에피쿠로스 학파들과 논쟁을 합니다.
아테네 사람들이, 바울이 논쟁을 잘하니까
'이 말쟁이를 데려다가 광장에 세워서 한번 이야기해 보자 하자'
해서 바울이 그 사람들과 함께 가서 아레오바고 광장에 서서 설교를 합니다.
근데 이 설교가 굉장히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설교였습니다.
그들의 눈높이에 맞는 설교를 한 겁니다. 그런데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소수의 열매만 맺었습니다. 17:34
(아덴에서는 교회가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그게 굉장히 실패감이 있었고 참담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고린도로 내려오죠.
그때 개척한 교회가 고린도교회 입니다. *여전히 2차선교여행
그리고 나중에 에베소에서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쓰는데, *3차선교여행 중
그때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만 복음을 전하겠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예수 외에는 전하지 않기로 작정했다.' 고전1:21, 23
이제는 인간의 철학과 인간의 생각으로 복음을 혼동시키지 않겠다...
그런 결단을 합니다. 아마 아덴에서 받은 교훈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오래 머뭅니다. 1년 6개월을 머물죠.
그리고 고린도에서 바울의 일생의 동역자들이 다 모이거나 만나는데,
한번 기억해 볼까요?
바울과 같이 갔던 2차선교여행의 동역자 실라,
그리고 바울이 2차선 여행 때 픽업했던 디모데,
그리고 바울의 주치의 누가,
바울의 평신도 동역자 두 사람 브리스길라 아굴라 ... 이렇게 다 만납니다.
그래서 이분들과 함께 고린도에서 1년 6개월 동안 뜨겁게 복음을 전합니다.
원래 좋은 사람들과 함께,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내면 좋잖아요. 기억에도 오래 남고...
그래서 바울에게는 고린도 라는 곳은 그런 곳이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몇 번의 편지를 보냈을까요?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두 번 아닙니까?
결론부터 얘기하면, 편지를 네 번 써서 보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굉장히 아끼고 사랑했고, 속을 많이 썩였다는 겁니다.
편지를 네 번이나 보냈을 정도이니까요. 다른 교회에는 이렇게 한 적이 없었죠.
1) '전에 너희에게 쓴 편지' 고전 5:9
2) 고린도전서
3) '많은 눈물로 쓴 편지' 고후 2:3~4
4) 고린도후서
그 근거를 한번 살펴볼게요. 주1)
▲그렇다면,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보내기 전에, 고린도를 몇 번 방문했습니까?
1) 첫번째 방문
먼저는, 바울이 2차 선교 여행 때 처음으로 갔죠. 가서 고린도 교회를 개척했죠.
그게 사도행전 18장에 나오거든요. 거기서 1년 6개월 머물렀어요. 행18:11
2) 두번째 방문
고후2:1 '내가 다시는 너희에게 근심 중에 나아가지 아니하기로 스스로 결심하였노니'
이 말을 미루어보면,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갔다는 말입니다.
왜 갔을까요? 문제 해결을 위해서 간 거예요.
자신의 사도권을 비방하는 사람들이 교회를 어지럽히니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갔는데... 결국 해결을 못하고 돌아온 거예요.
그래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3rd 편지를 써서, 디도에게 준 거거든요.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쓰기 전에, 이미 고린도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문제가 해결됐잖아요. *디도의 옴으로
3) 세 번째 방문
그 다음 바울이 결정한게 이겁니다.
고후13:1절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리니...'
이 세번째 방문 대한 더 자세한 사항은, 성경에 밝혀진 게 없습니다.
*참고로, 고린도후서는 마게도냐의 빌립보에서 사도 바울이 썼습니다.
에베소에서 고린도전서를 쓴 후 1년 이내에 썼다고 여겨지며,
고린도전서를 쓴 연대가 AD 55년 경이라면
고린도후서는 같은 해 가을이나 다음 해의 이른 봄에 썼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바울이 한 교회를 세 번 방문한 것은, 갈라디아 지역 교회에도 세 번 방문했습니다.
1차, 2차, 3차선교여행 때마다 다 갔거든요.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들은 바울이 1차 선교 여행 때 개척했던 교회들입니다.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오늘날의 Konya), 루스드라, 더베
이렇게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는 바울의 첫사랑입니다. *터키 중부 산악지대
그래서 바울이 2차선교여행 때도 거기를 방문했고,
3차선교행 때도 또 가요. 첫사랑이니까! *에베소로 가기 전에 행18:23
그 외에 세 번 방문한 곳은, 고린도교회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뜨겁게 사랑했다는 거죠.
4번이나 편지를 쓰고, 세 번 방문한 교회니까요.
◑그렇다면 고린도는 어떤 도시인가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코린티아죠마이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을 기억할 필요는 없지만, 참고로 들어두시면 됩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 '고린도 화되다' 라는 뜻입니다. Korinthiazomai, κορινθιάζομαι
이 말의 의미는 '성적으로 타락하다' 라는 뜻입니다.
헬라어 사전에 정식으로 올라와 있는 단어입니다. *성경에는 안 나오죠.
즉 고린도라는 도시가 성적으로 굉장히 타락하고, 굉장히 문란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런 단어가 생길만큼, 고린도는 굉장히 성적으로 문란했던 도시였죠.
그 이유는, 원래 이 고린도라는 도시는 BC 146년에
로마의 뭄미우스라는 장군에 의해서 멸망당했습니다.
로마가 여기를 정복해 버린 거예요. 고린도를 황폐화 했습니다.
그런데 율리우스 시저 황제가 기원전 44년에, 고린도 시를 재건했습니다.
그래서 아가야 지방의 중심도시로 발전시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유가 있어요. 율리우스 시제가 굉장히 똑똑한 황제잖아요.
로마를 발전시킨 위대한 황제 중에 하나인데,
그가 이 도시를 재건한 이유는, 고린도가 항구를 2개나 갖고 있기 때문이었죠.
고린도의 오른쪽으로는 겐그레아, 바울이 서원이 있어서 머리를 깎은 곳이죠.
또 왼쪽으로는 레케온 항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 '레케온'(Lechæon) 또는 '레케움'(Lechæum)
한 도시에 큰 항구가 두 개나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를 개발한 겁니다.
자, 겐그레아 항구에서 배를 띄우면, 동쪽으로 에게 해를 거쳐서 터키(아시아)로 가죠.
왼쪽 레케온 항구에서 배를 띄우면, 이오니아 해 - 아드리아 해를 거쳐 로마로 갑니다.
(1893년에 고린도 운하가 연결되어, 지금은 동서로 쉽게 배로 이동이 가능합니다.)
그러면 고린도라는 도시를 정복하고 거기를 개발했다는 것은,
여기를 아가야 지역에 거점 도시로 삼아서, *지정학적 요충지니까
아시아와도 무역을 하고, 유럽과도 연결하겠다는 거죠.
로마에서 배 타고 오면 레케온으로 도착하는 거예요.
레케온에서 육로를 거쳐서 겐그레아에서 배를 타면 터키로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도시를 개발했습니다. * rfcdrfcd.tistory.com/15981724
그렇지 않고,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빙 둘러서 배로 가면, 뱃길도 멀고,
또 풍랑이 거센 지역이라서, 대부분 레케온에서 하선하고, 육로 약 7Km를 거쳐서,
육로를 거친다는 말은, 고린도 시를 통과한다는 말입니다.
겐그레아까지 가서 거기서 다시 배를 탔습니다. 당시의 항로 노선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운하를 뚫은 거죠. 1893년에.
자, 그러면 여기에는 상인들이 많이 모이겠죠.
전 세계의 배타는 무역상들이 이곳 고린도를 반드시 거쳐가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고린도 시는, 통행세 toll 도 받고,
숙박업, 요식업, 유흥업이 자연히 발달하게 되고, 부자 도시가 되는 거죠.
그래서 이 도시가 타락한 도시가 되는 거예요.
아래는 '아크로 고린도' 사진이에요.
돌산 같은 거 보이죠. 여기를 '아크로 고린도'라고 부릅니다.
아크로폴리스 들어보셨죠? 큰 도시들마다 있는데, 높은 산에 신전들을 지은 곳을 뜻하죠.
'아크로'는 높다 라는 뜻이고, '폴리스'는 도시라는 뜻이잖아요.
아크로고린도 Acrocorinth 는, 고린도의 아크로폴리스 입니다.
율리우스 시저가 고린도를 개발하고 나서,
산꼭대기에 아프로디테 신전을 세웠습니다. 주2) 사진 보기
고린도 시의 산꼭대기에 '미의 여신'을 모시는 신전을 어마어마하게 크게 지었습니다.
신전을 지었다는 건, 그 신전의 사제가 있다는 거거든요.
거기에 여자들이 신전 창기, 또는 여사제로 거기에 산다는 얘기입니다.
그럼 고린도를 방문한 상인들이, 돈을 벌었으니까
제사도 하고, 신전 창기에게 돈을 다 쓰는 겁니다.
그래서 고린도가 성적으로 문란하고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로마는 원래 이곳을 이제 이런 컨셉으로도 개발했다고 해요.
다민족, 다인종, 다종교 사회!
그러면 여기에 질서가 있겠습니까? 뭐가 질서겠어요?
권력자, 돈 많은 자가 질서인 거예요.
로마의 권력과, 상업으로 벌어들인 물질이, 이 도시의 질서를 지배하는 겁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이런 음란하고 타락한, 말도 안 되는 도시에 교회를 세웠을까요?
바울은 왜 거기에다 교회를 세웠을까요?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여러분들은 거기에다가 교회를 짓고 싶습니까?
거기서 복음을 전하고 싶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거기 고린도에 교회를 세운 이유는, 시저의 눈과 똑같은 거예요.
항구가 두 개나 있잖아요.
동쪽으로 아시아로도 뻗어 갈 수 있고, 서쪽으로 로마로도 뻗어 갈 수 있었거든요.
소아시아 (터키)로도 갈 수 있고, 로마로도 갈 수 있거든요.
그러니까 그 이전에 누가 거기에 터를 잡았건,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거예요.
복음의 능력이 거기에 들어가면,
'고린도 도시가 성적으로 타락하고 문란하다'
이것은 다 복음 안에서 다 굴복될 거라고 믿었기 때문에,
복음의 능력과 십자가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에, 바울은 거기에 교회를 세운 겁니다.
여러분, 교회가 서지 못할 곳이 있습니까? 복음이 전파되지 못할 곳이 있습니까?
복음이 '여기는 피해가야 되고, 저 사람은 안 되고,
저 집은 안 되고, 이 지역은 안 되고...' 그런 곳이 있습니까? No
그래서 율리우스 시저는 똑똑한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 하나님을 몰라서 그렇지, 보는 눈이 있잖아요.
항구 두 개를 가지고 있고, 동서 뱃길(무역로)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
정치가는 거기에다가 도시를 개발했고,
바울은 거기에다가 교회를 세웠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우리의 복음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고,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공동체이죠.
그런데, 아니 복음이 세상에게 영향을 받고, 오염되고, 교회가 세속화되고
이건 복음의 문제가 있는 겁니까? 교회에 문제가 있는 겁니까?
교회가 문제가 있는 거죠.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세상에 물드는 것은,
복음이 문제가 있는 겁니까? 내가 모자란 겁니까?
내가 모자란 거예요. 복음은 아무 문제가 없어요. 복음은 강하다니까요.
보십시오. 여기 고린도에 복음이 전해지고, 여기에 교회가 세워지는데
결국 교회가 되잖아요. 성장하고 발전하고...
거기에 성도들이 모이고... 물론 그 과정에 문제가 많았죠.
그 문제도 해결해 나가면서, 그렇게 성숙해지는 겁니다.
그걸 우리가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고린도가 그런 곳이다...
◑고후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자 이제 오늘은 고후1:1~11절까지 함께 봅니다.
바울의 편지를 받는 교회와 성도들은 누구입니까?
1:1절 보니까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우리는 이걸 그냥 읽으시면 안 되고, 좀 비교해서 읽어 봐야 됩니다.
고후1:1절은 바울은 이런 식으로 시작했는데,
그럼 고린도전서는 어떻게 시작했을까요?
고전1:1절을 보니까 똑같아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똑같죠.
바울은 이걸 굉장히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사도가 되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쓰면서, 뒤에 이제 쭉 나오는 내용인데요.
바울이 가장 많이 공격받았던게 "자신의 사도권"이었거든요.
바울이 일평생에 자신의 아킬레스 건이었고, 유대인들의 공격의 무기였습니다.
그게 왜냐하면, 그 당시 '사도'의 통용되는 개념은
'예수님과 함께 3년이라는 시간을 보낸 사람' 그걸 사도라고 했거든요.
행1장에 나와요. 사도의 자격이 뭐냐?
'요한의 세례로부터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서 하늘로 올라가실 때까지
우리 가운데 출입하던 자' 그게 사도의 자격이에요. 1:21
이 자격 요건을 누가 정한 거예요? 하나님이 정한 겁니까? 자기들끼리 정한 거예요.
자기들끼리 왜 정했느냐? 가롯 유다가 죽었고, 12사도에 궐이 나니까,
새로 사도를 한 명 뽑는 과정에서, 이 자격 요건을 정하게 되었어요.
유대인들은이 항상 12라는 수의 강박관념이 좀 있거든요.
11명만 가지고는 찝찝하니까, 불편하니까... 하나를 더 채우려고 했는데,
그러면 어떤 자격으로 사도를 채울 거냐? 그때 자기네들끼리 정한 기준이 그거예요.
그 기준으로 두 사람을 천거해서, 최종적으로 제비를 뽑았거든요.
맛디아가 뽑힙니다. 그래서 가룟유다의 자리를 대신 채웁니다.
그런 기준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사도가 맞습니까, 아닙니까? 아닌 거예요.
근데 행9장에 보니까, 하나님이 바울을 택하잖아요.
'너는 이방을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다'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바울이 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나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부르심을 받은 사도다' 고후1:1, 갈1:1참조
누구의 뜻도 따름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이게 바울이 평생 동안 사도로서 살 수 있었던 내적 동기입니다.
여러분,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성도 된 것, 내가 직분자가 된 것,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내 의지로 된 것이라면,
내 의지가 사라지면... 우리는 여기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내가 섬기고, 봉사하고, 일하고, 직분자로 사는 것이죠.
이게 우리를 사역하게 하고, 주의 일을 하게 하는 내적 동기가 되어야 됩니다.
세상의 간판이 중요하고, 교회에서 시간을 보낸 햇수가 중요한게 결코 아닙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여러분, 이 말이 좀 이제 느낌이 오십니까?
고린도라는 도시가 어떤 도시인지 아까 살펴봤잖아요.
세속도시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그러면 이 교회는 세속도시의 영향을 받습니까, 안 받습니까? 받죠.
근데 영향을 받기만 합니까? 아니죠. 영향을 주는 거예요.
교회가 세속도시의 영향을 줘야 되거든요.
그래서 교회는 항상 세속도시와의 관계 가운데서
영향을 받아서 잠식 되느냐, 아니면 영향을 끼치느냐? ... 이 싸움이예요.
이게 영적 싸움이에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그랬잖아요.
고린도라는 이 더럽고 타락한 도시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교회니까, 하나님이 주인 아닙니까.
우리는 내가 교회를 지키려고 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이 주인 되심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따르고, 성도로서의 삶을 살면 됩니다.
그러면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고, 세상에 영향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대로 살면 됩니다. 말씀대로!
그게 어려운데... 그런데 그렇게 살아내면
고린도 도시도 변화되고, 우리가 사는 지역도 변화되고, 이 나라도 변화될 줄로 믿습니다.
◑고후1: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이게 바울의 시그니처 인사인데요.
바울이 공식처럼 말하는 은혜와 평강의 출처는 누구로부터입니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은혜와 평강' 이게 바울이 너무 자주 얘기하니까 좀 식상한데,
은혜와 평강의 출처가 누구로부터예요? 하나님과 또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입니다.
여러분, '은혜'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은혜는 방향이 중요하죠.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임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은혜는 사람이 주는게 아니에요. 근데 그건 기억하셔야 돼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주실 수 있다'
우리는 은혜의 출처는 될 수 없으나. 은혜의 통로는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은혜의 통로가 되어야 돼요. 은혜를 가로막는 자가 되면 안 돼요.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누군가에게 은혜를 베푸시려고 할 때,
나의 이 순결한 마음과 깨끗한 영을 통해서,
나를 은혜의 도구로 사용하시기를 소원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근데 교만한 사람들은, 내가 은혜의 출처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내가 너에게 은혜를 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내가 너에게 은혜를 베푼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러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빼고 우회해서,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은혜를 주실 겁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주기를 원하시거든요.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기를 원하시는데, 반드시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내 말이.. 타인에게 은혜가 되어야 하고요.
내가 사용하는 물질이.. 은혜가 되어야 하고,
그러면 하나님이 나에게 물질을 더 풍족히 주시지 않겠어요?
내가 물질을 흘려보내서 은혜의 통로가 된다면...
나의 이 예쁜 말을 통해서, 누군가 쓰러져 있는 자가 일어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다면...
그건 내가 은혜의 통로가 되고, 은혜의 도구로 쓰임 받는 거예요.
인간은 어떤 일이 있어도 은혜에 출처가 될 수 없습니다.
'은혜의 시작과 출처는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시다' 그걸 우리는 기억해야 됩니다.
자식들한테도 마찬가지예요. 부모가 착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내가 너한테 베풀어 준다'고 생각하잖아요. 근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가지고 있는 건 다 하나님께 받은 건데... 그렇잖아요.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자녀에게 주는 거예요.
나는 통로라는 사실을 절대로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그거 잊어버리면 버림받습니다.
무서운 거예요.
▲두 번째, '평강'을 얘기했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2
이 평강이 너무너무 중요한데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달리시고 부활하시고 제자들을 찾아오셨잖아요.
요20장에 보면, 제자들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뭡니까?
무서워서 문을 다 닫고 꼭꼭 숨어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뭐예요?
'내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20:19
아니 평강하지 않은데, 무슨 평강을 준다는 거예요?
평강을 주려면, 저 로마 사람들이 다 죽어야 되고, 빌라도도 죽어야 되고,
나를 잡아먹으려고 하는 위험 요소가 다 제거되어야죠.
제자들이 생각할 때는 그게 평강인 거죠.
근데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오셔서
평강을 선물하셨거든요.
그게 예수님이 너무 하고 싶었던 말씀이에요. 평강이 언제 깨어졌습니까?
평강이 깨어진 자리를 찾아야 돼요.
창3장에서 평강이 깨집니다.
창1~2장까지는 평강이었어요. 하나님과 인간이 얼마나 평화로웠습니까?
에덴동산에서 같이 잘 지냈잖아요. 행복했잖아요. 하나님과 아담 사이가 좋았어요.
그런데 죄가 들어오면서부터 평강이 깨집니다.
근데 평강이 깨진 건, 4가지 차원으로 나타납니다.
1)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관계가 깨집니다.
하나님은 찾는데, '아담아 내가 어디 있느냐?' 하셨는데
아담은 '내가 벌거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습니다.'
죄가 들어오니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평강이 깨졌어요. 화평이 깨졌어요.
2) 죄가 들어오니까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깨집니다.
아담이 뭐라 합니까?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한 이 여자가 내게 주므로 먹었나이다'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고 하던 아담과 하와 사이에,
죄가 들어오니까 인간과 인간 사이에 평강이 깨지죠.
3) 죄가 들어오니까 나와 나 사이에 인격의 분열이 옵니다.
그러니까 내가 나를 용납하지 못합니다.
또 수치심이 찾아온 거예요. 자기가 벌거벗은게 보이는 거죠.
4) 죄가 들어오니까 인간과 자연 사이에 평강이 깨집니다.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냅니다.
이런 상태로 창3장에서 요한복음 20장까지 왔다니까요.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
유대인들은 평강을 샬롬이라고 부르죠.
샬롬은 그냥 '반갑다'는 인사가 아니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서 피 흘려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셔서
(인간의 죄 값을 치르시고) 평강을 이루어 내셨다는 뜻입니다. 회복했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다시 회복했고,
-인간과 인간 사이를 다시 회복했으며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있게끔 했으며
-또 인간과 자연 사이도 회복했습니다. 그게 '평강'이에요.
근데 그 평강이 누구로부터 오는 겁니까?
이 놀랍고 위대한 평강을 인간이 줄 수 있습니까?
그 평강의 출처도 '하나님으로부터' :2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평강이 오는 거예요. :2
그래서 이 평강은, 우리는 생각할 때 그러죠.
'나는 가난해요. 돈만 좀 있으면 평강할 것 같아요. 나에게 샬롬이 올 것 같아요.'
근데 돈이 있다가 또 떨어지면, 또 다시 평강 하지 않은데...
'나는 몸만 좀 안 아프면 평화로울 것 같아요...'
근데 안 아프고 갑자기 세상 떠나면 제일 좋은데, 자꾸 아프잖아요.
몸도 아프고 계속 그렇잖아요.
그러니 어떤 요소가 결여된 것이 채워져서 내가 '평강'한게 아닙니다.
우리의 평강은, 죄와 죽음의 근본 원인이 해소되어야 평강한 거예요.
그래서 은혜와 평강은 누구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2
그래서 누가 이렇게 말한다면, 즉 '내가 너에게 평화를 주는 거야'
이건 새빨간 거짓말이에요.
핵무기가 우리에게 평화를 줄 수 있습니까? 안 됩니다.
나라의 지도자가 우리에게 평강을 줄 수 있습니까? 절대 안 됩니다.
참 평강은 오직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겁니다.
그걸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바울이 '은혜와 평강'이라는 용어를 지속적으로 쓰는 것은
'나는 이 고린도교회의 설립자야.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주겠다. 내가 너희에게 평강을 주겠다...' 이게 아니에요.
'나는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의 통로야, 나는 그 도구로 지금까지 쓰임 받았을 뿐이야!'
그 얘기를 계속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바울을 통해서 배워야 되는 건, 인간의 도구됨입니다.
자기가 그냥 쓰임 받는 거예요. 그 기간 동안.
근데 자기가 주인 노릇 하려고 하니까... 교회가 삐걱거리는 거죠.
바울은 그런 적이 없거든요. 그걸 우리는 여기서 배우는 겁니다.
자, 바울은 이제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소개하는가요?
이제 바울이 계속 얘기해요. 위로를 얘기하거든요. *은혜, 평강에 이어서 이제는 위로
◑고후1: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1: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바울이 지금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거의 버림받기 직전까지 갔거든요.
다른 유대인들이 와서 바울의 사도권을 막 무시했고,
'저 사람은 가짜야! 학위도 없어. 저 사람은 정식 신학교도 안 다녔어.
저 사람은 사도도 아니야... 너희는 잘못 배운 거야...' 그런 말을 자꾸 하니까,
고린도 교인들이 헷갈려 가지고 '그런가 보다...' 하고 바울을 막 멀리 했거든요.
근데 바울은 그것 때문에 찾아가기도 했는데, 봉변당하고 쫓겨나죠.
그래서 다시 편지(3rd 눈물의 편지)를 써서 디도에게 줘서 보냈죠. 그래서 해결됐잖아요.
그래서 바울은 그걸 고린도후서에서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표현하는 거예요. :3
근데 이 '위로'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이 위로의 의미가 뭐냐?
'위로'는 헬라어로 명사 파라클레시스 입니다.
요15:26절에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보혜사는 성령의 다른 이름입니다. 보혜사가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 예요.
'중보자, 위로자' 입니다. 즉 성령은 '위로자'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하시는 사역이 '위로 사역'이에요.
그럼 여러분은 위로의 진정한 의미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누가 울고 있으면.. 손수건 주고 눈물 닦아주고
누가 배고파하면.. 데리고 와서 밥 사 먹이고
누가 돈 떨어졌다 그러면.. 돈 좀 도와주고
심심하다 그러면.. 같이 놀아 주고...
그게 위로죠. 우리가 할 수 있는 위로죠.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극진한 위로 잖아요.
같이 곁에 있어 주는 것!
그런데 그런 차원이 아니에요. '성령의 위로'는 보세요.
요15:26 '내가 Jesus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라 그랬습니다.
즉, 위로자 성령의 본질이 '진리의 성령'이라 그랬어요.
그럼 성령은 우리를 어떻게 위로하시느냐?
진리로 위로하신다는 말 이에요.
여러분 진리가 뭡니까?
진리는 100년 전이나, 오늘이나, 천년 후나 변치 않고 똑같은게 진리예요.
100년 전에 그랬다가, 오늘 이게 좀 바뀌었다가, 내일 또 다르게 바뀌면
그건 진리가 아닙니다.
물은 100℃에서 끓는다. 진리입니까, 아닙니까? 아닙니다.
왜냐하면 해발 600M 고지에서 물을 끓여 보세요.
100℃ 보다 낮은 점에서 끓습니다. 기압이 낮아서. 그건 진리가 아니에요.
그냥 과학적 사실인 거죠. 진리는 1점1획도 변함없는 것이 진리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미래나... 예수님 오시는 그날까지 영원토록 변함없는게 진리예요.
인간사에 그런 진리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진리가 뭡니까?
'풀은 마르고 꽂은 시드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사40:8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 아닙니까. 그렇잖아요.
그러면 '위로하시는 성령의 사역'
성령은 어떤 식으로 우리를 위로하십니까?
변함없는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위로하시는 거예요.
그게 위로예요.
때로는 성령께서 이렇게 위로합니다. 내가 쓰러져 있으면,
날카로운 말씀으로 나를 찔러서... 나를 위로합니다. 일어서라고 책망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죠. '야 지금 상태가 저런데... 쟤를 책망하면 안 되지...'
근데 성령께서는, 널부러져 있는 사람을 막 책망하기도 합니다.
'일어나라고... 자빠져 있지 말라고...' 그렇게 진리로 그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거예요.
그게 위로예요.
위로의 궁극적 목적이 뭡니까? 사람답게 사는 거 아닙니까?
다시 그리스도 앞에 세우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 앞에 살게끔 하는 것이잖아요.
쓰러지지 않게 하는 것,
그래서 성령께서는, 다양한 말씀으로 우리를 위로합니다.
때로는 불꽃 같은 말씀으로, 때로는 따뜻한 어머니의 목소리 같은 말씀으로,
때로는 '괜찮다.. 괜찮다.. 좀 울고 있어도 괜찮다...' 그렇게도 위로하시고
다양한 형태로 위로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위로는 말씀이 위로라는 거예요.
그게 성령의 하시는 사역이라는 사실! 그거를 기억하셔야 돼요.
▲그러면 다시 바울로 돌아가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 때문에 내적인 고통을 받았다 그랬잖아요.
자신의 사도권 때문에 힘들었다 그랬잖아요.
근데 바울이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찬송한다' 그랬어요.
'찬송하리로다. 그는 위로의 하나님이시다' :3
그러면 바울이 이 기간을 어떻게 버텼다는 말입니까?
말씀으로 버텼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버텨냈다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어둠의 길고 긴 터널을 지날 때,
우리를 견디게 하는 힘은 말씀밖에 없습니다. 그거밖에 없어요.
사람을 아무리 찾아다녀 봐도, 사람은 같이 있는 딱 한 시간,
그 사람이 나랑 1년을 같이 있어 줍니까? 10년을 같이 있어 줍니까?
이제 바쁘다고 갈 텐데... 자기 볼 일 보러 돌아가잖아요.
근데 하나님의 말씀이 바울을 위로한 거예요.
그를 일으켜 세우고, 견디게 하고, 버티게 한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정말 어둠의 긴 터널을 지날 때, 사람 찾지 마세요.
말씀 읽고, 말씀으로 위로 받고,
동시에 진짜 어려운 인생을 사는 자에게는, 말씀이 위로가 되기를 기도해 주셔야 돼요.
말씀의 자리로 그를 이끌어내는게, 진짜 위로입니다. 그래야 힘을 받고 위로 받습니다.
그게 진리거든요. 진리의 성령께서 하시는 사역이거든요.
◑1:5절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그러면 이 위로는 뭡니까? 말씀이라 그랬잖아요.
'이 위로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친다'고 했죠.
그러면 '예수께서 우리에게 말씀으로 위로를 주신다'는 뜻이에요.
축복송 불러주고...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래서 위로가 되는게 아니고,
말씀으로 우리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면서 위로하십니다.
◑1:6절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고난을 견디게 하는 건 뭐라고요? 위로인데,
그 위로의 본질은 뭐라고요? 말씀입니다.
이사야 40:1~2절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위로 사역에 본질이 뭐라고요? 말씀이라 그랬잖아요.
위 2절에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라' 그랬어요.
말씀을 전하라는 거예요.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게 선포거든요. 말씀의 선포가 그들에게 위로가 됩니다.
사40:3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외치는 자의 소리가' 광야에서 외칩니다.
그게 말씀이 전해지니까 위로가 되는 거예요.
여러분, 이 말씀하니까 딱 생각나는 분이 누구입니까? 세례 요한이 생각나죠.
방금 우리가 이 말씀을 읽으니까, 세례 요.한이 스스로 자기 정체성을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다' 그랬습니다.
근데 우리는 누가복음 말씀을 잘 알고 있는데요.
세례요한은 원래 제사장 가문이었잖아요.
가만히 있으면 제사장이 되고, 대제사장도 될 수 있는 사람이에요.
근데 이분이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 잡아먹고, 석청 따먹고,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근데 그 당시 좀 한다 하는 사람들은, 다 로마로, 예루살렘으로 다 몰려갔습니다.
근데 세례요한 혼자 거꾸로 광야로 갔어요. 사람이 없는 곳이에요.
근데 그곳에서 외쳤어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하고 외쳤어요.
근데 놀라운 것은, 사람들이 세례요한이 외치는 음성을 들으러 그기로 모였다니까요.
모이는 사람들에게 세례요한이 뭐합니까? 세례를 베푸는 거죠.
왜 사람들이 그쪽으로 갔을까요?
세례요한이 외쳤던 말씀은, 그들에게 따뜻한 말씀이 아니었어요.
'독사의 자식들아...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다. 회개하라...' 하는
강력한 선포의 말씀이었거든요. 죄를 지적하는 말씀이었어요.
근데 그게 그들에게 위로가 되었거든요.
내 죄를 지적하는 말씀이 위로가 된다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위로를 받으려면, 옛날 흘러간 7080 노래 들어봐야 위로 안 됩니다.
옛 친구 만난다고 위로 안 됩니다.
내 심령을 찔러 쪼개는 추상 같고 불꽃 같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야
그래야 위로가 됩니다.
위로의 목적은 일으켜 세우는 거니까요. 다시 일어서야 되니까요. 그렇잖아요.
그래서 여러분, 어떤 일이 있어도 말씀을 떠나면 안 됩니다.
힘들 때일수록 말씀을 꼭 붙잡고 견뎌야 됩니다. 그게 위로입니다.
그 다음은 똑같은 말씀이 반복되는데요.
◑고후1:7절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바울이 고난 가운데서 고린도 교인들을 격려할 수 있었던 것은 `소망' 때문이었죠.
'소망'(엘피스)은 문자적으로 '강한 확신'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소망이 무엇인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바울은 그것이 견고하다고 말합니다.
아마 그것은 고린도 교회가 겪고 있는여러 가지 문제들
즉 이단의 문제, 바울의 사도권에 관한 문제, 교회의 분열에 관한 문제에 대해
지금은 다소의 혼란이 있지만, 결국에는 바울과 그의 가르침이 참되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는 소망이 있었을 것이고,
이러한 확신은 고린도를 다녀온 디도를 통하여 기쁜소식을 들음으로써
더욱 확신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7:6~7
◑고후1:8절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고린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1:9절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고전15:32절을 보니까 '아시아에서 당한 환란'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8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여기서 '맹수'라고 표현했는데요. 바울이 진짜 콜로세움 같은데 들어가서
사자와 더불어 싸웠을까요? 그런 표현이 아니에요.
여기서 '맹수'는 자기를 물어뜯는 사람들, 유대인들,
자신의 사도성을 가지고 자꾸 문제 제기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얘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바울은 '아시아에서 당한 환란 심한 고난'
이게 자기 정체성에 대한 공격일 것인데,
그래서 교회를 어지럽히려고 하는 유대인... 그런 사람들을 '맹수'라고 얘기한 겁니다.
◑1:10절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즉 '내가 죽을 것 같은 사망의 고통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후에도 건지시기를 그 God 에게 바라노라' 그랬어요.
이미 나는 건짐 받았어요.
말씀으로 위로받고 힘을 얻었어요.
근데 앞으로 이런 일이 또닥칠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됩니까?
'나는 또 말씀을 붙잡고 위로 받을 것이다. 그러면 그 말씀이 나를 건질 것이다.
또 건져 주시기를 바란다.'
즉 '과거에 나와 함께 하셨던 하나님이, 현재도 나와 함께 하시고,
미래도 함께 하실 것이다.' 그런 기대를 여기에 포함하고 있습니다.
◑1:11절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인해서)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11절을 보시면 부탁을 합니다. 이제 고린도 성도들에게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여러분 성도가, 지도자 즉 목회자, 바울 같은 목회자를 도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도움은 기도입니다. '간구함으로 우리를 도우라' 그랬잖아요.
'간구'는 헬라어로 데에시스, 청원 부르짖음 입니다.
'기도해서 나를 좀 도와달라'하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은사는 선물 gift 입니다.
'많은 사람이 기도해서 얻은 선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많은 사람이 감사하는 이유가 뭡니까?
그 기도가 이루어져서 응답되니까 감사해요.
사람들이 바울을 위해서 기도해 줬어요. 힘내시라고!
힘을 냈어요. 말씀 붙잡고 이겨냈어요.
그래서 그걸 본 사람들이 감사하는 거죠.
'아, 우리 기도가 응답되었구나'
그래서 성도들은 목회자를 위해서 기도해 주셔야 되고, 그게 가장 큰 선물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도 성도들끼리도 서로 기도해 줘야 되고, 그게 가장 위로입니다.
말씀 앞에 세워 주시는 것이, 또 큰 위로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주1) 바울이 고린도에 보낸 네 번의 편지
1) 소위 '이전 편지'
고전5:9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쓴'이 과거형이거든요. 영어로 wrote
고린도전서 이전에 이미 쓴 편지가 있었다는 겁니다.
근데 그 편지 어디에 있습니까? 아직까지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2) 두 번째 쓴 편지가 고린도전서예요.
고전1:11절에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고린도 교회의 첫 번째 문제가, 분쟁이었죠.
바울파, 아볼로파, 예수파, 게바파로 나눠져 싸웠잖아요.
그외 여러 문제들이 있었죠.
그래서 글로에 편으로 소식을 듣고
고린도전서 앞서 소위 '이전 편지'를 써서,
디모데나 에라스도 통해서 보냈습니다. 에베소에서요.
그걸 가지고 해결책을 써서 보낸게 고린도 전서였습니다. 두 번째 편지예요.
3) 소위 '눈물의 편지'
고후2:4절을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썼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고린도후서 이전에 또 편지가 하나 있었다는 겁니다.
이건 왜 썼느냐 하면, 바울의 사도권을 가지고 문제 삼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를 어지럽히니까, 바울이 편지를 써 줬어요.
그리고 그 편지를 누가 가지고 왔을까요? 바울의 심부름 잘한 사람이 있잖아요.
디도가 그 편지를 가지고 갔어요.
편지를 가지고 가서, 해결책을 들고 와야 되거든요.
근데 디도가 오지 않으니까, 바울이 이게 걱정이 된 거예요.
고후2:13절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하지 못하여'
즉, 고린도교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소위 눈물의) 편지를 써서
디도 편에 보냈는데, 디도가 아직 답을 가지고 오지 않아서
심령이 편하지 못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고후7:6~7절을 보면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디도가 드디어 왔어요)
그가 온 것뿐 아니요 오직 그가 너희에게서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고함으로
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해결이 됐다는 거예요. 세 번째 편지가 성공했죠.
4) 그리고 고린도후서를 쓴 겁니다.
그게 감사해서.. 기뻐서.. 그래서 고린도후서는 네 번째 편지예요.
편지를 네 번 썼는데요.
첫 번째 편지와 세 번째 편지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편지가 고린도전서, 네 번째 편지가 고린도후서입니다.
바울이 한 교회의 편지를 4번이나 보낸 곳은 고린도 교회가 유일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가장 사랑했다고 표현하는 겁니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 너무 많이 속을 썩여서...
그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 편지를 4번이나 썼습니다.
주2) 아크로고린도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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