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카테고리 없음

나그네인가 토박이인가?

LNCK 2025. 3. 16. 14:07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나그네, 순례자, 떠남>

나그네인가? 토박이인가? (창세기 12:1-5) -  - 2021.10.06

 

◈나그네인가 토박이인가?              창12:1~5        2021.10.06.  교정예정


◑도입 / 두 문화 속에 사는 그리스도인, 토박이 문화와 나그네 문화

오늘은 '나그네인가 토박이인가?' 어떻게 보면 '두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누게 됩니다. 

두 문화 이야기는, 제가 구약성경의, 특별히 창세기의 큰 흐름으로 보고 있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우리 신앙적으로 우리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부분을 
다시 한번 생각하는 시간인데, 이 일이 정말 중요한 시점인 것 같습니다. 

어려움(코로나)이 오니까.. 힘들고 괴로운 시절이 오니까.. 
진정한 신앙과, 그렇지 않은 신앙이 (수면 위로)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코로나 기간이라서) 영상으로 예배드리면서도 
간절히 주님 앞에 나가는 진실한 노력들이 있는 것을 감사드리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우리가 다시 한번 새로워지는 은혜를 바라봐야 할 때라고 확신합니다. 

그런데 이 삶의 태도는, 우리가 두 문화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도성> 책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두 세계 안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태도는 토박이가 아니라, 
나그네로 부름을 받은 것을 함께 기억하기 원합니다. 

성경에 두 문화는 '토박이 문화'와 '나그네 문화'가 있습니다.
떠돌이하고는 좀 다른 나그네 문화입니다. 

'요새 문화'가 있는가 하면, '장막 문화'가 있고, 
'바벨 문화'가 있는가 하면, 무지개 언약을 따르는 문화가 있는 것입니다.

이 구분 속에 우리의 모습이 어떠해야 할까를 
다시 한번 주님 앞에서 생각하기를 원합니다. 

신앙생활 하다 보면, 우리는 '하늘 나그네'의 정체성으로 우리 삶을 생각하게 됩니다. 
재밌는게, 우리 심방 가서 기도하면서 '주님이 장막을 축복해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게 되는데요. 무슨 콘크리트로 지은 장막이 있습니까? 

아파트 크게 지어 놓은 곳에 들어가서, 
뭐 조금도 흔들릴 것 없는 견고한 곳에 들어가서, 거기를 '장막'이라고 기도합니다. 
왜 그럴까요? 
'장막'이란 말이, 우리의 신앙의 삶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 <떠남의 영성>

우리는 벽돌로 지은 바벨탑 요새에 사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조상들이 거하였던 장막 tent 에 사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우리는 생각합니까? 

첫째, 성경이 그렇게 부릅니다. 
벧전1:1~2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우리를 '흩어진 나그네'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표현이 디아스포라 유대인을 향한 표현이긴 합니다만
이 '나그네'라는 표현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는 거죠.

그런데 이 모습은, 나그네로서의 삶은, 
선택하거나 혹은 보완적인 것으로 얘기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얘기되고 있는 것임을 여러분의 마음에 두셔야 합니다.

믿음의 조상들이 장막에서 산 것을 '믿음의 삶'이라고 성경이 증언합니다. 
'믿음으로 그가 이방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의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받은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히11:9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갔을 때, 그곳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 
'내가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영원히 주겠다' 약속하신 땅이에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거기서 판벽한 (벽이 있는) 집을 지은 것도 아니고, 
벽돌 집을 지은 것도 아니고, 장막 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나그네의 삶을 얘기하는 중요한 표현입니다. 
히11:9절에는 이 표현과 더불어 우리가 마음에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천국을 향하여 순례자로 살아가는 것이고, 
'하늘 나그네'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성도는 이 세상의 문제를 그렇게 힘들어하지 않습니다. 
왜요? 갈 곳이 있기 때문이죠. 

'집 떠나면 고생'이라고 얘기하는 것처럼, 여행 중에 고생이 있어도, 
돌아갈 집이 있으면, 우리는 안정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의 영원한 본향, 하나님 나라가 있는 삶을 우리는 살아가는 것이죠.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나그네 인생'이 허무한 나그네 인생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죠. 
제 또래나 더 연세 드신 분들은, 유명한 우리 노래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 거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가?' 하고 불렀던 
그 뭔가 애잔하게 다가오면서도, 공감하면서도, 우
리로 이렇게 달관, 체념으로 가게 하는 그런 대중 가요를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런데 '나그네의 삶'이라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건 그와는 조금 다른 개념입니다. 
'허무한 인생, 나그네' 얘기가 아니라, 
여기가 아니라 하늘의 목적을 둔, 종착역을 하늘에 둔 뚜렷한 삶을 얘기하는데
그 강조점이 있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결국 이것이 어떻게 보면 
내가 구상하고 내가 얻어낼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결국 얻어내도 행복하지 못한 허망한 미래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장하신 그 미래를 향하여 나가는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여러분 그래서 '나그네'는 예수님의 종, 자유로운 종입니다. 
어디든지 움직여 갈 수 있는 사람.

이 개념이 '사단의 노예', 방탕하고 책임 의식 없는 노예의 모습과는 다르죠. 
여러분 노예가 매여 있습니다. 그런데 노예의 정신은 책임감이 없습니다. 
정신 놓고 사는 거죠. 뭘 해야 되겠다는 의지도 없고요. 하라는 대로, 시키는 대로 해요. 
자기 안에 소원이 없어요.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매여, 창조주의 종이 되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결단하고,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아니하고 
세상에 위협도 가로막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자유로운 종이 된 것이죠.

자 '하늘 나그네'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나는 죽고 예수로 살아가는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살죠. 
이것은 세상에서 '자기 주도적' 태도로 교만하여진 사람과는 구별되는 모습입니다. 
자신의 문화를 고집하지 않고, 자신의 놓여진 상태에서 그 문화를 파악합니다. 

배울 점은 배웁니다. 귀를 기울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의 삶을 펼쳐가며, 
결국 영원한 나라의 영광, 그날의 영광, 다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존귀하게 서는 모습을 이어가는 사람인 것이죠. 

나그네는, 떠돌이와는 구별됩니다. 
떠돌이는 책임지지 않고, 멋대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나그네는 떠돌이의 유혹을 버린 사람입니다. 

토박이는 멸망의 땅에 안주하고요. 
나그네는 세상의 유혹을 버립니다. 
자신을 주변인으로 인식하면서도, 왕 같은 제사장으로 하나님 앞에 책임적 주체로,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펼쳐가는 사람이 나그네인 것이죠.

그래서 그냥 나그네가 아니라, 천국 대사로 파견된 나그네인 것이죠. 
이 영광을 바라보고 나가는 믿음의 식구들이 되어야 합니다. 
결국 우리의 인생은, 정처가 없는 삶이 아니라, 
목적지가 있는 삶을 사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무리 누리고 있는 것이 좋아도, 가야할 종착지가 어딘지 아는 삶을 사는 거죠. 

▲가깝게 지내시는 분들을, 오랜 기간 못 보다가 만나서 
'요즘 어디 살고 있냐?'고 물을 때, 
제가 '분당에 삽니다'고 그러면, 꼭 하시는 말씀이 있어요. 
'천당 밑에 분당에 사는구만!' 이렇게 얘기를 하십니다.

제가 그때 꼭 드리는 말씀이 있습니다. 
'천당 아닌 곳은 다 지옥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 천국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를 묵상해 보셔야 해요. 
그 나라의 소망이 강렬하게 내 마음에 심겨져 있도록, 
주님은 하늘나라를 펼쳐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여러분의 삶에, 여러분의 영혼에 뚜렷한 흔적으로 남아 있습니까? 
이게 안 되면, 자꾸 토박이가 되고 싶어 합니다. 

여러분 원래 우리 한민족이 떠돌이(유목민)이었다고 
역사적으로 유전자가 증거해 줍니다. 

(우리 조상들은 대체로 중국 만주 지역와 그 이북의 유목민족이 섞여서
우리 민족을 형성해 왔으며, 언어학상으로는 알타이 어족과 가깝다고 봅니다.) 

혹자는 '우리가 단지파에서 여기까지 왔다'고 까지 하시는데 
재밌는 얘기여서 한 번 들어볼 만 하지만, 따라가기에는 아직은 좀 주저돼죠.

그 실크 로드가 우리 조상들이 다니던 길이 것이 거의 확실하다고 봅니다. 
이렇게 여겨지는 흔적들이 있고, 언어적인 흔적까지 있는 것들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의 조상들이 한반도의 정착했어요. 
정착한 우리 민족의 문화가 떠돌이 문화입니까? 토박이 문화입니까? 
철저하게 토박이 문화입니다. (원래는 유목민이었으나, 이제 토박이가 됐죠)

특별히 '쌀 문화'와 '밀 문화'를 비교해 보면 더 그렇습니다. 
여러분 밀 문화는 길을 내고, 무역을 통해서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밀은, 밀만 먹으면 못 살아요. 
또한 밀은 윤작을 해서 땅을 바꿔야 되죠. 

그런데 쌀 문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밀보다 영양가가 훨씬 많아요. 
그래서 쌀 문화에,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이 사는 겁니다. 인구 밀도가 높은 것은
쌀 먹고 사는 것이 훨씬 생존하는데 유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벼농사를 지으며 정착한 우리 민족이 조심하게 됩니다. 
여러분, 밀 문화는 언어의 정확성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쌀 문화는 정확하게 얘기하는 걸 좀 피하고 싶어 합니다. 

왜요? 불편한 관계를 만들면 (쌀농사가) 어렵기 때문에, 그래서 조신스러운 말을 합니다. 
이런 태도들 속에서, 우리 민족이 문화적인 억압을 만들어냈던 요소가 있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요즘 한국문화가 전 세계에서 거의 최고 수준인 거 같아요. 
저는 무슨 '오징어 게임' 그래가지고 무슨 게임 하는 줄 알고 착각했다가,
그게 영화인 줄 최근에 알았습니다. 

그런데 왜 한국적인 거가 통하냐면,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는 DNA가 
특별히 다른 것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외국 사람들도 말을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본질적으로 주어져 있는 노마드(유목민, 떠돌이) 의식이 살아날 때에 
우리의 삶이 세워지는 걸 보게 됩니다. 

여러분, 어느 민족이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처럼 
전 세계에 나가서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는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거의 없어요. 

중국 사람들은 중국 식당하면서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요. 
일본 사람들도 여기저기에 흩어져 나가 있지만, 
우리나라 사람처럼 많이 흩어져 있지는 않다고 봅니다.

제가 우리 창조교회 교인들이랑 첫 번째 단계 선교를 1998년도 겨울에 갔는데, 
마이크로네시아에 갔습니다. 거기에 축 이라는 곳에 들어갔어요. 

우리는 정말 멀리 간다고 꽤나 노력했는데, 거기도 한국분이 이미 와서 계시더라고요. 
참 제가 놀라운 경험을 했던 기억이 마음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노마드 의식'이 없어지고 안정하려고 할 때 
오히려 이 세상의 문화에 중요한 특성이 드러나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완전한 곳이 아닙니다. 
지속 가능한 것에 대한 소망은 있지만, 지속 가능성을 확보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어요. 
여러분, 우리가 지금 코비드 펜데믹 이후에 
경제적인 위기가 올 것이라는 얘기를 합니다. 
뭐 실질적으로 중국의 중국에서도 얼마나 큰 경제위기들이 
우리와 연결되어 있는 가운데, 그 위기가 노출되고 있습니까? 

분명한 것은 여러분, 기후 재앙이라는 무서운 파도가 밀려오고 있고, 
또 우리 지구 생태계가 붕괴된 조짐들이 곳곳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원래 이 지구는 영원한 것이 아니라고 주님이 말씀해 주셨어요. 
그러나 '무책임해도 된다' 하는 것을 얘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창조 질서를 보존하는 일에 대한 부분을, 마음에 두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걸 넘어서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영원한 나라의 소망이 
정말 내 안에 뚜렷하게 살아 있는가요? 
바울은 하늘의 상급을 바라보기 때문에, 온몸을 앞으로 기울여 달려가고 있다는 
믿음의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토박이인가, 나그네 인가?' 가 믿음의 태도로 주어지는 겁니다. 
믿음이 딱 가르는 거예요. 

'하늘 나그네'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일은 
하나님의 창조, 명령, 문화, 명령에서부터 주어져 있는 것처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에 흩어져 다스려라(돌보라) 나가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다스려 가는 
아름다운 일에 대한 사명이, 우리의 가운데 주어져 있는데 무지개 언약 때 
하나님이 다시 약속하십니다. '내가 다시는 홍수로 심판하지 않겠다. 
흩어져라 그리고는 번성해라. 만물을 창조주의 뜻대로 다스려라'고 재차 선언해 주셨습니다. 

▲근데 문제는 뭡니까? 흩어지려고 보니까, 뭉쳐(모여) 있는게 좀 좋아 보이는 거예요. 
사람이 같이 뭉쳐 있어여, 힘 약한 사람을 일도 시켜 먹고 
뺏을 것도 좀 있게 되고... 

욕심부리고 사는 삶을 생각할 때는, 흩어지는 것보다는 뭉쳐 있는게 나은 거예요. 
흩어져서 각 곳을 개척해 가는 삶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뭉쳐 있으면, 속일 수도 있고, 또 가지고 있는 권력으로 
뭔가 해볼 것 같은 마음이 있으니까... 안 흩어지고 바벨탑을 쌓은 겁니다. 

여러분, 이 일이 중요한 문화적인 특성인 것을, 마음에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파트 문화를 선호하게 되는 것도, 편리함 때문에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뭐 아파트가 바벨탑이다 라는 그런 얘기는 아니고요. 
우리의 마음 태도를 보셔야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명령을 따르고자 하는가? 
내 이익을 추구하고자 하는가? 

하나님의 뜻을 명확하게 분별하고 싶다고.. 
상담하고 고민하며 얘기하시는 분의 얘기를 듣다가, 
어느 날 제 마음에, 주님이 툭 던진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 내담자가 성공을 원하는 것인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는 것인지를 
분별함이 필요하다' 는 마음을 주시더라고요.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뜻을 정확히 알고 싶은 이유가, 
실패하고 싶지 않아서 (성공하고 싶어서) 그럴 때가 더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고, 
하나님이 지으신 목적으로서는 일(직업, 소명)에 대한 소망을 
우리 안에서 먼저 일으켜 세워야 되지 않겠습니까? (성공보다는)

▲바벨 문화는, 토박이 문화 안에 거하려고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7

그런데 성을 쌓는 일의 조상이 가인이거든요. 가인이 성을 쌓습니다. 

하나님이 살인한 가인에게 '너는 유리하는 자, 방랑하는 자가 되어라' 이렇게 말씀하셔요. 
그것이 가인이 살 길이었어요. 

근데 가인이 방랑(유리)하다 보니까, 좀 힘드니까, 에덴동편에 거주하려고 했습니다. 창4:16
그리고 성을 쌓습니다. 방황의 성을 쌓습니다.
그게 바벨 문화의 중요한 특성인데요. 

하나님의 보호의 약속이, 믿어지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 성을 쌓는 거죠.
자신의 이마에 표를 주시고 '가인을 죽인 자는 벌을 칠배나 더 할 것이라'고 선언해 주신 
하나님을 못 믿습니다. 

왜요? 자신이 하나님을 따르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주신 명령에 권위와 능력을 인정할 수 없게 되는 거죠.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내 불안을 해소하기 위하여, 
나의 힘으로 나의 안전을 확보하려고 하는, 바벨 문화의 성향이 
성을 쌓고, 벽돌을 안전하게 쌓아올리는 일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 그 그늘에서 그 음지에서 곰팡이가 자라고요. 
좀이 먹고 사망의 기운이 자라나는 것을, 성경이 이야기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자신이 살 길을 말씀해 주시는 그 길을,  *너는 유리 방황하는 자가 되라' 창3:12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겸손히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새 사람이 되셨습니까? 구원을 받으셨습니까? 
생명의 구원의 복음이 여러분을 구원하셨습니까? 그러면 누리십시오. 
그 생명의 능력을 누리는 삶이,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이고, 영광인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주님의 선언하셨어요.  고후5:17

골3:1~2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앉아 계시느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왕이 하늘에 계십니다. 
우리는 그 왕의 통치를 받는 천국 백성인 거예요. 

비록 땅의 발 딛고, 땅의 문제 안에, 땅의 어려움 속에 시달리지만 
오히려 하늘 Kingdom of God 을 믿고, 하늘을 펼쳐가는 천국 제자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자식입니다. 
자기 정체성이 분명해야 합니다. 

청소년들이 사춘기의 자기 정체성을 혼돈스러워하며 확인하는 과정이 있어요. 
반항해 보면서 자기의 길을 확인하는 거가 있습니다. 

이때쯤 부모님들이 잘해 주실 필요가 있어요. 
뭐든지 '이유가 있겠지...' 이렇게 받아주는게 중요하죠. 

그게 잘 안 되면, 그 방황이 또 일어나고, 또 일어나고... 
'결국은 40대에 자기 정체성 위기를 겪는다'는 얘기를 하는데, 그 대표자가 모세입니다.

모세가 40세에, 자기가 이집트 왕자인지, 이스라엘 백성인지 헷갈려 하다가 
아무래도 이스라엘 사람이 되어야 할 것 같다.. 라는 마음으로 행하다가 
어려움 당하고는, 정체성 위기를 겪어요. 자기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정체성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늘나라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정확히 가지고 있다면, 
그 정체성이 가져오는 삶의 태도가 있는 거예요. 

여러분! 일관된 신앙생활을 하셔야 됩니다. 이랬다. 저랬다 하는게 아니라요. 
농부가 씨를 뿌리면, 그 씨로부터 무엇이 나올 줄 알기 때문에, 
거기에 가장 적합한 노력을 하는 것처럼, 

여러분이 천국 소망으로 심겨져 있다면, 천국적 삶의 태도로 
여러분을 세워 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인간이라는 면에 있어서는, 예수 믿는 사람이나 아닌 사람이나 다를게 없죠.
그러나 우리가 '구별된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있다면,
삶이 다른 모습이 당연히 나와야 되지 않겠습니까? 

소속이 하늘나라인 삶은, 하늘나라를 기다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 소망, 재림 신앙,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시는 그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단들이 다 이상하게 만들어 가지고, 온갖 말들을 섞어 놓고 혼돈스럽게 하지만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 우리 주님이 우리를 새롭게 하셔서 
온전히 드러내신 그 창조의 영광 안에 살아갈, 그날을 바라보는 것이죠. 

하늘 나라의 소망 둔 사람은, 그 나라에 걸맞은 마음의 목표를 가지게 됩니다. 
돈 버는 것 같고 만족하고, 안주할 수 없는 거예요. 
사람들이 인정해 준다고 뻐기고 살지 않는 거예요. 

내가 지위를 확보한 것이, 내가 이 모든 것들을 확보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매일의 삶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찬송할지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셨다'  벧전1:3
이게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비록 예수님을 눈으로 보지 못하지만 그분이 부활하여 살아계시기에 
지금도 보지 못하지만,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며 
그분과의 동행을 행복해하는... 삶의 현실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벧전1:8

이 현실이 자꾸 희미해지니까... 세상이 눈에 들어오는 거예요. 
세상의 것을 자꾸 따라가는 거예요. 

여러분, '세상의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고는
천국 소망으로 실제로 살아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과 동행하면서요.

 

하늘나라의 길을 걷는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아브라함을 통하여 보여주는 것이 '떠남의 영성'을 가진 사람입니다. 
고향 친척 아버지 집에 안주하지 않는 것입니다. 

 

◑2. 두 번째는 <거함의 영성>입니다  

 

고향은 어떤 곳입니까? 익숙한 곳이에요. 
여러분 사람이 익숙한데 살고 싶지, 새로운 곳에 살고 싶지 않아요. 
여러분 어디를 떠나서 새로 자꾸 움직이고 싶으셔요, 한 곳에 정착하고 싶으셔요? 
정착하고 싶은 것이 우리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정착할 곳이 어디 있습니까? 
그저 제일 정착하기 좋은 데가 교회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할렐루야! 

앵간하면 교회를 떠나지 마세요. 그냥 죽을 때까지 한 교회 섬기는게 좋습니다. 
제가 우리 아버님 밑에서 목사 되어가지고, 
군목 갔다가, 우리 창조교회에 부임해 와가지고 지금까지 굳세게 있습니다. 할렐루야! 
얼마나 저한테 축복인가 하는 걸 저는 주님께 감사하고 있어요. 

그런데요. 교회도 바뀌어질 수 있죠. 변화될 수 있어요. 모든게 온전한 건 세상에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우리가 소망이 하나님 나라에 있고, 
내가 안주하려고 하는 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익숙한 걸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되고요. 

그 다음에 도움 주는 사람들, 친척, 인맥도 내려놓을 의지가 있어야 되고요. 
그 다음에는 아버지의 집도... 명하시면 떠나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버지 집의 특징이 뭡니까? 
아버지 집에 특징은 무노동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겁니다. 

우리 모두가 많은 사람들이, 무슨 경제적인 자유, 경제적인 독립... 
이런 개념으로 얘기하지만, 무슨 얘기 하나 들어봤더니 
'더 이상 일하라고도 먹고 살 수 있는' 그런 삶이 되기를 원하더라고요.

여러분, 그건 떠나야 할 자리입니다. 
여러분이 돈 많이 벌어 놓고, 그래서 연금 등으로 여러분들이 살 수 있는 자금들이 
여러분들에게 흘러 들어오는 걸로 먹고 지낸다고요? 

아니에요. 우리는 이 땅에서는 끊임없이 생산적인 일을 하도록 부름 받았고, 
우리가 나중에 쉬고 먹는 곳은 어디입니까? 하늘나라이고요. 

제가 이해하는 바대로는, 하늘나라도, 하나님의 창조적인 그 능력과 더불어 
우리가 놀랍게 펼쳐갈 아름다운 일(사역)이 있는 곳이죠. 그저 놀고 먹는 곳은 아닙니다.
'떠남의 영성'을 마음에 두셔야 됩니다. 

결국 하늘나라에 가서 거할 것이지만 
여기서도 그 나라에, 내 마음의 뿌리를 박아야 되는 것이죠. 

여러분, 오늘 '은혜 아니면' 우리가 고백하며 찬양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삶이 은혜에 뿌리를 받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가 이루어온 일, 내가 한 일, 세상에 주고받는 거래 속에 
여러분의 인생이 놓여져 있습니까? 

우리가 진정 만세 반석이신 주님 안에 거하는... 그 은혜 속에 우리를 거하고 세우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는 보이는 것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안주하며, 그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대상17:7~9 '또한 내 종 다윗에게 이처럼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 떼를 따라다니던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들의 이름 같은 이름을 네게 만들어 주리라
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그들을 심고 그들이 그 곳에 거주하면서

다시는 옮겨가지 아니하게 하며 악한 사람들에게 전과 같이 그들을 해치지 못하게 하여'

'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그들을 심고

그들이 그 곳에 거주하면서 다시는 옮겨가지 아니하게 하며'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축복 중의 한 가지가, 한 곳에 정착하는 것입니다.

떠돌아다니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떠나서 가고 / 정착하고를 반복하는 것이죠.

 

평생 떠돌아 다닌다는 것만 아니요, 평생 토박이로 붙박이로 한 곳에 계속 사는 것도 아니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떠날 때는 뗘나고, 또 머물 때는 머물고... 하는 것입니다.

   ☞흩어지고 모이다를 반복하다  https://rfcdrfcd.tistory.com/15982255

 

◑3. 하늘 나그네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드림의 영성> 입니다  

여러분 집착을 벗어나는 일에는 '드림의 영성'이 있어야 돼요. 
우리가 헌금을 드리고 헌물하고 헌신하는 일이 왜 중요하냐면, 
그 일을 통하여 세상의 미련을 내려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십일조를 뗄 때, 가끔 돈이 아깝다는 생각 드신 적 없으세요? 
없으시면 참 이상한 거예요. 아까워요. 내가 쓸 수 있거든요. 유혹이 있어요. 

그런데 드림으로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돈이 얽어매는 집착을 딱 끊어내는 거예요. 

여러분 이삭이 보여준게 무엇입니까? 
이삭이 우물을 파는데요. 뺏겨요. 
약속의 유업을 이어가는 이삭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아버지가 팠던 우물을 블레셋 사람들이 메꿨어요. 
본인이 다시 찾아내서 물을 길어 냈어요. 
그랬더니 블레셋 사람들이 '우리 우물'이라고 와서 싸우는 거예요. 

이삭이 거기를 떠납니다. '다툼' 이라는 이름을 짓고 떠납니다. 
그리고 결국 '르호봇'에 이릅니다. '여기서는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에, 그리고 르호봇의 우물을 파고는 
거기 머문 것이 아니라 또 브엘세바로 가서 우물을 또 팝니다. 
무슨 생고생을 그렇게 하냐고요? 아니요. 

우물을 공유하며, 나눠주며 사람들의 살기를 축복하며 
가는 곳마다 셈이 솟아나게 하는 것, 그게 우리의 길입니다.

이 세상은 그리스도인이 아니고는 살 수가 없는 곳이에요. 
우리가 희망을 주고, 축복을 나눠주며,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는
영광스럽고 능력 있는 모습으로 우리를 세워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기도하기를 원하는데요. 
혹시 아직도 하란에 머물러 계시진 않습니까? 
데라은 아브라함과 온 식구들을 데리고 하란에 갔다가, 
하란에서 더 이상 가나안 땅으로 가지 않았어요.

눈앞에 보이는 황량한 사막들을 보면서 못 갔어요. 
여러분, 하란에서 죽어버린 대라를 기억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에 마감이이 땅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종착적인 점이 하늘나라입니까? 
오늘 그 목표를 바로 세우고, 다시 한번 주님 앞에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애굽으로 돌아가려는 반역의 무리에 섞여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반역의 세대가, 이 세상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고라의 자손 후대는, 아버지의 반역에 참여하지 않고
결국 시편에 보면, 고라 자손은 찬양하는 성가대로
생명을 이어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끊어내고 구별하여 헌신하는 것으로 세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하늘나라 백성으로서 자기를 세울 때, 떠돌이가 되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여기 세상에 집착하면, 결국 세상과 더불어 불타 없어지는 것입니다. 

심판의 불이 우리를 시험할 때, 도리어 우리는 보석으로 그 본질을 드러내며, 
우리 안에 있는 빛나는 영혼이 주님 앞에서 아름답게 드러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