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특강(3) - 그리스도의 편지(고후 3장) - YouTube
*44:00~끝까지 녹취, 정리
◈그리스도의 편지 P2 고후3:12~18 고린도후서3강 P2
바울이 소망을 가지고 담대하게 말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고후3:12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이 같은 소망'이 뭘까요?
바울이 '담대히 말하는' 소망은 뭘까요?
그것은 새 언약의 일꾼(3:6)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 언약의 중보(히9:15, 12:24)였으니까,
나는 새 언약이 일꾼이 되는 거예요.
나도 그런 일꾼으로 사는 겁니다.
◑고후3:13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이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출34:29~33절까지의 말씀을 보셔야 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돌판을 받아 왔습니다.
두 번째 돌판을 받아온 거예요.
지금 첫 번째 돌판 받으러 올라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만들고 야단법석이었잖아요.
그래서 모세가 첫 번째 돌판을 박살냈습니다.
그리고 다시 두 번째 돌판 받으러 가서, 받아서 내려왔습니다.
그랬더니 그때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나서, 사람들이 모세를 볼 수가 없게 된 거예요.
모세는 처음에 자기는 몰랐어요. 나중에 알게 됩니다.
그래서 모세가 자기 얼굴을 수건으로 덮었습니다. 본문은 그 얘기를 하는 거예요.
13절에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장차 없어질 것이 뭡니까?
결국 그 광채는 영원하지 않고, 없어지는 거잖아요.
'그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모세가 왜 얼굴에 수건을 썼는가요?
모세는, 자기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이 일시적인 것임을 알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을 보고 현혹되어, 거기에 영원한 절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그랬을 것입니다.
즉 모세는, 그의 백성들이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한 것으로 착각할까봐
자기 얼굴에 수건을 썼지만,
바울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복음의 영광이 영원한 것이므로,
사람들의 오해를 두려워할 필요없이 당당하게 공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수건을 써서 가릴 필요가 없었어요)
◑고후3:14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완고하여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모세의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얼굴의 영광
즉 율법의 영광이 곧 사라질 한시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것을 영원하고 절대적인 것이라고 이해했죠.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완고함에 기인하는 것이었고, 이 완고함으로 인해
그들의 눈에는 진리를 바로 보지 못하도록 하는 수건이 씌어지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수건'은
-유대인의 영적 무지와 오해, 예수그리스도를 거부하는 불신앙,
-사랑이 상실된 편견과 엄격한 율법주의적 편견등을 상징합니다.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그랬습니다.
이 수건이 뭐냐?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전히 '율법이라는 수건'을 뒤집어 쓰고 있다는 뜻입니다.
'할례 받아야 구원받는다' 이것은 율법이라는 수건입니다.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이미 이 땅에 그리스도가 오셨고, 자기를 십자가에 내어 주셨어요.
그런데 여전히 그리스도 이전에 그 (율법의) 수건을 뒤집어 쓰고,
그 세계관으로, 그 인생관으로 그 가치관으로,
자꾸 사람을 보고, 교회를 보고, 세상을 보는 것... 그거 하지 말자는 뜻입니다.
그 율법의 수건을 벗겨내고, 우리는 새 언약의 일꾼으로, 사람을 살리는 자로 살아가자...
이런 얘기입니다.
▲사실 우리도 그런 수건들을 많이 뒤집어 쓰고 있습니다.
내가 예수 믿기 전에 가졌던 내 방식들, 내 세계관들, 내 가치관들,
이런 등등의 내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상'이라는 것이 상당히 무서운 것이죠. 공산주의 사상은 대단히 무서운 겁니다.
공산주의는 그냥 철학이 아니고, 그건 종교에 가까운 겁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잖아요. 저 북한 사람들...
저게 종교쯤 되니까, 저렇게 3대 세습이 가능한 거 아니겠어요?
그냥 사상이면 그냥 무너질 것인데... 거의 종교적인 기능을 수행하니까 저러고 있는 거예요.
대단히 무서운 거예요.
그래서 그 수건을 뒤집어 쓰고 있으면, 다른 것은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그 수건을 뒤집어 쓰고 세상을 보면, 뭐가 보이겠습니까?
그거 공산주의 외에 아무 것도 안 보이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어린 아이들에게, 특별히 우리 청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을 제대로 잘 가르쳐야 됩니다. 정말 잘 가르쳐야 됩니다.
이상한 세계관과 이상한 세상의 가치에 그들이 물들지 않도록,
곳곳에 팽배해 있는 세속적인 가치관과 공산주의적 사고가
그들의 가슴을 지배하지 않도록...
그거 한번 그 수건이 뒤집어 써져 있으면, 그 외 아무 것도 안 보입니다.
아무리 얘기해도 소용 없습니다.
그래서 잔소리 같지만, 계속 부모는 가르치고, 교회도 가르치고... 계속 가르쳐야 됩니다.
토요일 날 우리 교회에 한번 와보세요. 교회 비전센터 한번 쭉 돌아보세요.
꼬맹이들이... 우리 초등학교 1학년 2학년 아이들, 또 유치부 아이들이
제자반 훈련 받는다고 교회에 막 바글바글합니다. 각 방마다 막 난리입니다.
얼마나 보기에 좋은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게 세계관 교육이거든요. 가치관 교육이고.
어릴 때부터 가르쳐야죠. 그거 안 가르치고 학교에 가면,
거기서 진화론 배우고, 유물론과 세속주의 배우고...
유튜브로 세상의 영상들을 보고 이런 거를 계속 보면
전부 다 그게 나도 모르게 다 학습되는 거예요.
한 번 그 뒤집어 쓰고 있는 수건들을, 벗겨내는 건 너무 힘들거든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그 전에, 수건을 쓰기 전에 가르쳐야 됩니다.
우리 아이들 제자반 훈련 열심히 하고, 가르치고,
교회에서는 그 일에 최선을 다해서 투자하고 가르치고 해야 됩니다.
그래야 이상한 사고방식에 휘둘리지 않고, 내 영혼을 좀 먹는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전13:9~10절에 보면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그랬습니다.
온전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그러니 그 이전에 율법을 붙들고, 내가 율법으로 그거 지키고 구원받으려고 했던 것은
이제는 의미 없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새 언약의 중보가 되셨기 때문에! 히9:15, 12:24
◑고후3: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유대인들이 계시의 본질을 바로 보지 못하고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마음에 수건이 덮여져 있으므로,
여전히 옛 것만 보고 새 것은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후3: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바울은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서, 참된 자유와 영안을 얻을 수 있는 길은
다름 아니라 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오는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돌아가면'(에피스트렙세)은 '돌이키다', '회개하다' 등의 뜻을 지니고 있어
회심의 의미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율법의 지배 아래 있는 누구라도 언제든지 회심하고 주께 돌아오면
마음의 수건이 벗겨져, 영적 무지와 오해, 불신으로부터 벗어나게 되고,
율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됨으로써 없어지게 되며(롬10:4)
새로운 언약,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복음의 시대가 열려지게 됩니다.
◑고후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본절은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는 6절과 연관해서 이해해야 됩니다.
즉 바울은
'조문'과 '영',
'옛 언약'과 '새언약',
'율법'과 `복음'을 대조하면서
후자의 우위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본절에서 말씀하는 초점은
옛 언약과 새 언약의 관계 및 대조에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본절은, 그리스도께서 빛과 생명의 원천이시므로
그분께 돌아오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운 바 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건 (자유, 새언약, 복음은) 어떤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씀일까요?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으려고 열심히 살아본 사람들... 근데 그게 안 됐어요.
나의 무능을 느꼈어요. '내가 그거는 해도 안 되는구나'
처절하게 자기 존재의 절망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고 회개하고 구원받고 성령이 나에게 임했습니다.
그런 자에게 주시는 말씀이에요.
근데 그것도 안 하고, 이런 과정 다 생략하거나 하나도 없고
'그냥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17
이것만 외워가지고 '왜 이 공동체는 이렇게 자유롭지 않느냐?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자유가 있지 않느냐?' 이건 방종이죠. 자유가 아니죠.
그걸 통과한 자들이 누리는 자유는... 가만히 놔둬도 죄짓지 않는 자유입니다.
가만히 놔둬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합니다.
그런 자들은 이걸 잘 통과해서, 주의 성령이 나에게 임해서
성령이 주는 진리의 자유를 경험한 자는 교회를 어지럽히지 않습니다.
그런 자들은 사람을 살립니다.
그런데 그걸 통과하지 않은 사람들은, 자꾸만 공동체를 어지럽히고, 사람을 정죄하고,
사람을 죽이고... 그렇게 됩니다.
◑고후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우리가 다'
바울은 본장(고후3장)을 시작할 때는 자신의 사도직에 관한 주제를 언급하였으나
이제 본장을 마감하는 시점에서는 출34:29-35절을 배경으로 해서
새 언약의 우월성을 전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지시키고 있습니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주의 영광을 보매'
새 언약 가운데 살고 있는 성도들은, 수건으로 덮인 마음(15절)을 가지고
아직도 율법을 읽고 있는 유대인들과는 달리
벗은 얼굴로 복음의 거울 속에 비춰지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에 이르니'
주의 영광을 바라보는 성도는, 주의 형상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성도들의 존재가 신격화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마치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영광이 성도들의 얼굴에서 빛으로 나타난다고 보아서도 안 됩니다.
본문의 의미는,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그에 대한 지식을 받고, 그 내면이 변화 transform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러할때 성도들은 점점 더 높은 단계의 영광으로 진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의 재림이 실현될 때는, 성도들의 몸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과 같은
완전한 영광의 형체를 얻게 될 것입니다(빌 3:21, 요일3:2).
그런데 이렇게 변화되고 영광스럽게 되는 것은 조문의 율법이 아니라
주의 영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도들의 영광은 자신들의 노력이나 업적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은총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롬8:29, 30).
이거 잘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어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여기 '변화하여' 라는 말은 헬라어로 '메타모르포' 입니다.
메타모르포는 '점진적으로 변화되어, 또 성화되어'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성화입니다. 롬12:2
성화 다음엔 영화가 있죠?
그래서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8
성화와 영화는 성령께서 이끌어 가십니다.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율법 조문 그거 지키려고 발버둥 쳤습니다. 되던가요? 안 되죠.
그래서 누가 필요해요.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새 언약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내 죄를 구속하시고 회복시킵니다.
그런 자는 주의 영, 즉 성령을 받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성령의 선물로 회개가 일어나고,
그 회개한 자는 참 자유를 얻습니다.
그 자유한 자가 성화의 자리에 서게 되고, 그 성화는 (죽은 후에) 영화로 이끕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게...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율법 조문... 이건 우리를 좌절하게 합니다. 근데 그렇게 한번 좌절해 봐야 됩니다.
우리가 그렇게 율법대로 살아보려고 몸부림치는 그 과정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구원받습니다.
행2:37절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하나님 말씀을 들으니까 마음에 찔리잖아요.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 할꼬?'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베드로가 말합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그랬습니다. 행2:38
그렇죠. 내가 어찌할 바를 모를 때, 내 마음이 막 찔려서 견딜 수 없을 때, 괴로울 때,
그때는 율법을 지키려고 애써서는 안 됩니다. 그건 못 지킵니다.
결국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습니다.
선물로 성령을 받은 후에 우리는 성화에 이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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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을 잘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눈 말씀은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한 꼭지와
또 '율법의 조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과해야 성화와 영화에 이를 수 있다.
또 예수님은 새 언약의 중보이시다' 이거를 잘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기도 / '은혜가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 바울은 종이 추천서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열심히 목양하고 길러냈던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그의 추천서였습니다.
주여, 우리가 길러낸 우리 자녀들이,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교회가 힘써 양육한 우리 믿음의 2세대들이, 또한 우리 모든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편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는 사람들에게 읽히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봉해지지 않는 편지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삶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 온전히 노출되어 있으니,
믿는 자로서의 삶을 제대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율법으로는 구원할 육체가 없습니다. 율법으로 좌절하고 절망하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죄와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이렇게 절규했던 사도 바울이,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았던 것처럼
우리도 율법의 조문으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고, 성령을 통해서 성화에 이르고, 영화에 이르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이런 존재로 온전히 모든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하고 그들을 품어 안고 섬기는
존재로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