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돌이키시다 | 요나 3:9-10 | 25.1.13 - YouTube
◈하나님이 돌이키시다 욘3:9-10 2025.01.13.
요나서를 우리가 따라가다 보면 굉장히 부담스러운 부분도 있고,
또 우리에게 도전이 되는 그런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실은 제가 요나서를 다루지만,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우리가 다 힘들어져요.
그래서 약간 강도를 조금 줄여서, 여러분들하고 나누고 있는데요.
이번 주간의 내용이, 요나서 전체 중에서 압권입니다.
니느웨에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악독이 가득했던 큰 성읍 니느웨가 하나님께로 돌아옵니다.
기적이죠. 대대적인 부흥이 이제 일어났습니다.
죄에 대한 회개가 일어났고,
그리고 사회 그 곳곳에 포악했던, 불법이 만연했던 그 땅에
정의가 회복되는... 정말 멋진 그런 부흥이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에 의해서 조작될 수 있는게 아닙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죠.
우리가 부흥을 달라고 기도를 많이 하는데, 우리가 달라고 해서 주시는 건 아니고,
부흥은 하나님이 임의로 행하시는 역사이기 때문에,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니느웨에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욘3:9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이 본문은 니느웨 왕의 조서에 담긴 내용입니다.
왕이 백성들에게 자신의 심경을 알리고 있는 내용입니다.
니느웨 왕이 백성들에게 무엇을 부탁합니까?
욘3:7~8 '왕과 그의 대신들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이르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 옷을 입을 것이요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니느웨 왕은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부르짖으라, 힘써 부르짖으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혹시 뜻을 돌이키시고
진노를 그치고 멸망하지 않게 하실지 누가 알겠느냐?' 3:9
이것은 전적으로 니느웨 왕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나님이 그 니느웨 땅을 용서하시고, 그들이 심판을 면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뜻을 돌이키지 않으십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오는 질문은, '하나님이 마음을 갑자기 바꾸신 것처럼' 보입니다.
9절에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셨다' 라는 대목을 볼 때, 그렇게 보이죠.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 분으로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이 변화무쌍한 세상 속에서 '변하지 않는 하나님'을 우리가 믿고 살아요.
근데 그 하나님이, 마음을 수시로 변한다면, 우리가 그분을 신뢰할 수 있는가요?
막 화를 내시다가 갑자기 웃으시고, 웃으시다가 또 갑자기 화를 내시고...
이런 하나님이신가요?
망하기로 결정되어 있었는데, 그들의 회개로 하나님은 마음을 돌이키셨는가요?
왕의 베옷을 입고, 죄를 뒤집어쓰고 금식을 하면,
'멸망하게 될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계획이 물려질 수 있는 것인가요?
이 질문은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바꿀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면, 이루어진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다른 쪽으로 생기는 질문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기도에 하나님이 휘둘리시는 분인가?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계획과 주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 의해서, 하나님이 얼마든지 조절될 수 있는 분인가? 에 대한 질문이죠.
여러분, 성경 안에서 때로는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는 주제가 있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획과 주권에 의해 돌아간다'는 하나님의 주권사상과
-'하나님의 주권과 계획이 있을지라도 얼마든지 변경 가능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가 맘대로 바꿀 수 있는가?' 우선 대답은 아니죠.
하나님의 마음과 작정과 계획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은 변함이 없는 분'이라는 걸 믿습니다.
왜냐면 그분의 계획은 완전하고,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우리가 볼 수 있는데요.
민23:19절에 보면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아니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하나님은 거짓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은 당신이 결정하신 일에 후회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하신 말씀을 행하지 않거나, 되돌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니느웨 성의 무너짐.. 그 하나님의 예언은 변경되고 말았습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주1)을 보세요.
◑요나서는 '뜻을 돌이키신 하나님'
자 그런데 오해를 불러일으킬 대목이, 오늘 본문에 나온 거죠.
욘3:4절에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그랬어요.
이게 요나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예언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주신 말씀이에요.
'만약 무너질지도 모른다. 이게 아닙니다' 반드시 무너진다는 거예요.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니느웨의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니느웨가 무너지지 않았어요.
반대로 오히려 니느웨 전무후무한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정반대의 일이 일어났어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건가요?
요나가 당황스러운 거예요.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했는데,
무너지지 않고, 도리어 부흥이 일어났어요.
요나 자신이 거짓말을 한 셈이 된 거예요.
니느웨 사람들이 보기에는 요나의 예언은 틀린 거예요.
'당신은 40일이 지나면 무너진다고 했는데, 우리를 봐라...'
3:10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나님의 당신의 계획을 바꾸신 것인가요?
하나님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모르고 말씀하신 것인가요?
그러나 하나님은, 미래의 모든 걸 다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히4:13절을 보면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미리 아십니다.
일어나고 난 다음에 '내가 이렇게 될 줄 몰랐다'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전지하신 분이십니다. 미래를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미래에 되어질 일을 모르고, 그냥 '아무 말 잔치'를 한 것입니까? 그럴 리는 없습니다.
더 자세한 설명은 주2)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여러분 우리는 신학적으로 크게 두 부류가 있는데,
하나는 칼빈주의, 또 하나는 알미니안 주의입니다.
우리 장로교회는 칼빈주의를 따르죠.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합니다.
알미니안 주의자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더 강조해요.
오늘 본문은 알미니안주의자들이라면 받아들이는게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근데 문제는, 칼빈주의자들입니다.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믿어요.
그러니까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가 정해져 있습니다.
결론을 가지고 모든 걸 들여다본다는 거예요.
일어난 상황이, 결론(예정, 작정, 주권)과 맞지 않으면,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거예요.
때로는 그 믿음이 너무 강해서, 억지로라도 하나님의 편에서 (끼워맞춰서) 방어하려고 해요.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하는 대목이 있는가 하면,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내용들도 있어요.
어느 쪽을 더 강조할 것인가?
자 여기에는 조직신학적인 접근과 성경신학적인 접근이 있어요.
대부분의 우리 목사님들은, 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공부하고
그 영향을 많이 받아 봤기 때문에, 성경을 이해할 때도, 조직신학적인 면이 강해요.
조직신학적인 면이란 것은, 교리적으로 정리하고 체계화해서
모든 게 논리적으로 딱딱 떨어지게 하는 거죠.
근데 요즘에 서구의 신학의 경향들이 조직신학보다, 성경신학이 강화되는 추세입니다.
성경신학이란, 성경 자체에 집중하고, 성경 본문에 충실한 해석을 하려고 하는 거예요.
조직신학으로 맞아 떨어지는 것보다는, 좀 더 자연스럽게 읽으려고 하는 경향을 갖고 있어요.
오늘 내용은 조직신학적인 것보다, 성경 신학적인 해석을 따르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우리의 방식이나 틀에 집어넣으려고 하면 힘들어집니다.
하나님이란 존재를 우리의 수준으로 끌고 내려와서,
우리의 사고의 틀 안으로 넣으려고 하면... 힘들어진다는 거예요.
왜요? 하나님은 우리와 같지 않으니까!
이사야 55:8~9절 '이는 내 생각이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의 지혜와 이해력을 능가, 초월하시는 분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수는 우리보다 훨씬 더 높습니다.
바둑을 보면, 고수들이 두는 걸 보면, 하수들은 이해가 안 됩니다.
왜 지금 저기에 돌을 놓을까?
하수들은 그냥 '아다리' 치면서 잡아먹기 바빠요.
하수들이 보기에는, 고수가 두는 걸 알 수가 없어요. 알아낼 길이 없어요.
여러분 바둑은, 이 지구상에 모든 게임 중에서
가장 경우의 수가 많은 게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수학적으로 단순히 계산을 해도, 700자리 수가 되어 계산이 불가능합니다.
이 바둑은 룰 뿐만 아니고, 두는 사람에 따라 수억 ~ 수조 가지로 조합이 생긴다고 그래요.
바둑을 기록한 역사가 200년이 되지만, 아직 단 한 번도 똑같은 바둑은 없었다고 그래요.
그러니까 바둑의 고수의 세계들이 두는 그 세계를, 하수들은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바둑을 예로 들었지만,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은, 바둑을 훨씬 능가하는 거죠.
*체스의 고수이신 하나님 https://rfcdrfcd.tistory.com/6250919
신앙생활을 하는데. 항상 '자기 틀' 안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절대로 자기의 틀을 안 깨요.
말씀을 들을 때도, 자기 틀이 있어요. 자기 프레임이 있어요.
자기가 원하는 스타일이 있어요.
그러니까 말씀을, 자기 틀 안에 모든 걸 집어넣으려고 하는 거죠.
문제는, 하나님 마저도 자신의 틀 안에 가두려고 하는 거죠.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보다 높다는 것을 알지만,
하나님의 가능한 수준을 좀 낮추셔서, 우리의 틀에 맞춰 주시기를 원해요.
히포의 어거스틴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해되어진다면, 그분은 하나님이 아니다.'
우리가 이해되어진다면, 그건 하나님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해를 훨씬 더 넘어선 분이시라는 거죠.
우리의 이해의 영역을 넘어선 분이라고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통 공식들이 있습니다. 수학도 공식을 외우고, 공식 안에서 문제를 풀어 갑니다.
공식 안에서는 쉬워요.
근데 공식을 벗어난 것이 나오면, 갑자기 혼란에 빠져 버립니다.
하나님은 공식 안에 갇히는 분이 아닙니다.
성경 안에는 일정한 원리와 원칙이 있습니다. 기준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이나 속성이 분명히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의 예상을 벗어난 일이 얼마든지 일어난다는 거예요.
여러분 공식만 따라가다가 어느 순간에 혼란에 빠지는 경우가 많아요.
조직신학은 공식을 중요시 하죠.
▲사도행전의 베드로를 보면, 그는 성령 충만한 사람이었어요.
그럼에도 이방인 고넬료의 가정에, 성령을 부어 주신 것을 받아들이기 매우 힘들어 해요.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
왜요? 자기가 아는 공식 안에는 없던 장면이에요.
'이방인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게' 자기의 공식에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베드로가 한동안 혼란 속에 빠져서 당황을 해요.
여러분! 공부를 못해서 빠지는 오류가 있는가 하면,
공부를 너무 잘해서 빠질 수 있는 오류가 있어요.
요나가 마찬가지인 거죠.
지금 그런 이방의 도시가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는 일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해요.
니느웨가 회개하고 돌아오는 일은, 요나가 생각했던 그림이 아닙니다.
요나가 원했던 본래의 생각은, 니노웨가 40일 만에 무너지는 것이었어요.
그래야 맞아요. 하나님의 공의가 니느웨에게 시행되면, 너희는 무너져야 됩니다.
그들의 죄악이 이미 하늘의 상달됐단 말이죠.
그 정도면 하나님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는 예언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합당한 결정이라고 요나는 믿었어요.
그런데 실상은 무엇이죠? 이스라엘과 원수인 그 나라에 부흥이 일어났어요.
졸지에 그는 니느웨의 부흥을 이끄는 일에 공헌을 하게 된 거죠.
그야말로 니느웨의 빌리 그레이엄이 된 거예요.
이건 요나가 원한 그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우리의 생각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나의 틀 안에 하나님을 집어넣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비교 조차 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기대한 니느웨
니느웨 왕은, 이미 하나님께서 그 땅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정이죠.
그럼에도 왕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소망을 가집니다.
'우리가 회개했으니 살려달라'가 아니에요.
소망의 근거를 자신들의 어떤 것에 두지 않았습니다.
소망의 근거를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두고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욘3:10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여러분, 니느웨 왕은 '하나님의 은혜'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대로 하실 수 있습니다.
당신이 마음 먹은 대로 행하실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그걸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은혜를 구합니다.
여러분, 은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편에서 일방적으로 내려 주시는 겁니다.
그 은혜를 받을 근거는 우리에게 전혀 없습니다.
죽이든 살리든 하나님께 달려 있어요.
하나님이 어떻게 판결을 내리시든지, 그분은 언제나 옳다는 거죠.
니느웨 왕은, 그 안에서 은혜를 구합니다.
용서받을 자격도, 공로도 없습니다. 그러나 다만 긍휼을 구하는 거죠.
여러분, 칼빈주의자들은 모든 것은 다 정해져 있다고 믿습니다.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이 있어요. Hyper-Calvinist 라고 부르죠. (부정적인 의미)
그들은 너무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는 나머지, 우리가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거예요.
기도할 필요도 없다는 거예요. 아주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입니다. 다 정해져 있다는 거죠.
회개할 사람은, 회개할 때가 되면 회개할 것이고,
그러니 '회개하라 / 말라' 말할 필요도 없다.
전도해봐야 '구원 받을 사람은 다 정해져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꿀 수 없다고 여기고, 결론이 이미 나 있다는 것입니다.
알미니안 주의자들은 '우리가 노력하기에 달렸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는 부분이 약하기 때문에 늘 불안한 거죠.
하나님은 자신의 노력 여하의 모든게 달려 있다고 생각하면, 미래가 불안한 것입니다.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습니다. 마음에 평안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구원을 받았으니 이제 내 마음대로 살아도 천국 갈 것이다' 라고 하는
안일함에 빠질 위험성이 있어요.
이런 것을 보면, 여러분, 신학이라는 것은 완전하지 않다는 걸 보여줍니다.
존 칼빈도 위대한 신학자이지만, 그 역시 하나님을 완전히 다 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거죠.
성경을, 또는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어느 유명한 신학자는 그런 얘기를 했어요.
그는 어마어마한 세계적인 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그 표현을 해요.
'나는 하나님에 관해서 언제나 초보자다'
여러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도 우리의 편에서 설명해 내기가 어려워요.
우리가 '은혜, 은혜' 굉장히 많이 말을 하는데,
그 '은혜'라는 말을, 우리가 우리 편에서 온전히 설명해 내기가 어려워요.
은혜는, 하나님 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 은혜가 어느 정도가 되는지는' 가늠이 안 돼요.
여러분 보십시오, 이스라엘은 어려운 지경에 있는데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힘들게 했던 나라(앗수르-니느웨)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는 장면을 지켜보는 요나가 어떻게 그걸 받아들이겠어요?
그러시는 하나님이 이해가 돼요?
분명히 벼락 맞아야 할 니느웨 사람들인데, 은혜를 받고 더 잘 돼요.
그들의 어떻게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올 줄은, 요나는 꿈에도 몰랐던 거죠.
(이스라엘도 회개를 잘 안 하는데... 말이죠)
'하나님이 어떻게 그들을 받아 주실 수 있는가?' 설명이 안 되는 겁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줏대가 없으신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어떻게 그렇게 기준도 없고, 원칙도 보이지 않는가?'
요나는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심판하시기로 마음을 작정하셨다면, 하나님은 그대로 하셔야 하지 않는가?'
▲여러분, <요나서>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깊이 들어가 있는지를
다 알 수가 없어요. 그 하나님의 은혜의 강이 얼마나 깊은지를....
사실 여러분, 요나 자신을 보세요. 그 자신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습니다.
내세울 것 없는 선지자, 도망치던 자예요.
물고기 뱃속까지 들어간 사람이에요. 그냥 내버려 두었다면 수장 water burial 이었어요.
근데 하나님이 그를 살려내시고, 니느웨의 부흥에 쓰임 받게 하시는 것,
이거는 설명이 안 되는 거죠.
우리가 그렇죠. '하나님은 어떻게 저런 인간을 다 구원해 주십니까? 말도 안 됩니다.
저 정도면, 거의 끝을 내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하나님이 그때 뭐라고 하시는지 아세요?
'그러면 너는? 너는 왜 내가 구원해 주었는지 설명해 봐라!'
여러분, 우리는 우리에게 허락하신 은혜에 대해서는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나니까... 나니까,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나에 대해서는 관대해요.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너무 인색한 거예요.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여러분 죄에 대해서 묻기 시작하면, 용서받을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일일이 따져보면 우리에게 어떤 판결이 날까요?
우리의 죄를 따지면 '너는 죄가 너무 많아서 판결이 어렵다...' 하실 것입니다.
'너를 들여다.보니까, 죄 아닌게 하나도 없네!'
아무리 감면을 해 주려고 해도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편에서 아무리 자기 공로를 내세워도, 그것을 감할 수가 없어요.
이건 하나밖에 없는 거예요. 하나님 편에서 '일괄 사면' 외에는 길이 없는 거죠.
여러분, 하나님의 용서는 설명이 안 됩니다.
우리는 그래서 '은혜'라고 얘기를 할 뿐이에요.
자, 요나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는 아직 '니느웨를 받아 주시는 하나님'이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받아 주셨는데, 그는 못 받아들이는 거예요.
앞으로 우리는 요나의 이 편협성을 이제 다음시간부터 살펴보겠죠.
그의 앵글이 얼마나 좁은지...
이스라엘 민족주의와, 그 안에 있는 특권의식, 우월 의식이 그를 더 좁게 만들었어요.
그는 매우 날카로워집니다.
◑적용
'여러분, 예수를 믿는데도 계속 사고의 폭이 좁고, 생각이 갇혀 있고, 마음이 협소하다면,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 내가 예수를 믿는데, 내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자꾸 늘어납니까?
내게 문제가 있는 거예요.
'왜 저 사람은 저러냐? 왜 하나님은 저런 사람 안 데리고 가시나?'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낭비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자기'라는 울타리 안에 갇혀 있는 거예요.
자기 안목이 얼마나 좁은가를 모르는 거예요.
율법적 기준으로 평가하는 거예요.
요나를 보면, 요15장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큰 아들' 그대로예요.
그 '큰 아들'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에요. 영락없이 우리를 닮았어요.
은혜를 베푸는 아버지도 못 마땅하고,
'도대체 저런 인간을 어떻게 받아주냐?'
'아버지의 재산을 창기와 함께 말아먹은 저 인간, 인간 말종, 내 동생도 아니야'
그는 실제로 '동생'이라는 표현도 쓰지 않습니다.
여러분, 요나는,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슴은 닫혀 있어요.
여러분! 우리에게 관용이 필요합니다. 복음이 관용이란 말이에요.
'하나님의 받아들여주심' 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가슴이 좀 넓어져야 돼요. 점점 넓어져야 돼요.
여러분, 관용이 언제 생기는 거예요?
여러분 나에게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큰가에 눈을 떠야 돼요.
그 은혜에 눈을 못 뜨면, 관용이 생길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열린 마음을 가져야 돼요.
여러분, 신앙이 자랄수록, 다른 사람에 대한 관대함이 커져야 돼요.
우리는 평가하고 결론을 쉽게 내리는데,
하나님이 봐주시는 사람이면, 시비를 걸지 말라는 거예요.
중요한 것은, 여러분 뭐예요? 하나님이 (그를, 그 단체를) 쓰신다면, 쓰시는 거예요.
내가 그 사람을 막 욕을 했어요.
근데 알고 보니까, 하나님이 그 사람을 통해서 일하고 계셔요.
그럼 내가 누구를 욕한 거예요? 하나님을 욕한 거예요.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은혜를 베푸실 수 있습니다.
그 범위를 내가 정해놓고, 하나님을 판단하지는 말라는 거예요.
'나'라는 존재를 보면 알잖아요. '내가 은혜를 받을 만해서 받은 건가?'
'왜 나 같은 죄인을 살리셨는가?' 답은 무엇이죠? 나는 모르겠습니다.
그건 오직 은혜입니다. 여기에 누구도 시비를 걸 수가 없어요.
여러분, 신앙의 여정에서 늘 확인하는 것은,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자 요나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이 설명이 안 됩니다.
그냥 하나님이 요나를 끝내 사용하신 것을, 우리 편에서 설명서를 붙이려고 해서는 안 돼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왜 저런 사람을 쓰시는가?'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결함이 많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쓰임을 받습니다.
사람들이 다 고개를 절래절래 합니다. 혹은 갸우뚱 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한마디 하십니다. '내가 그를 쓴다. 내 마음이다. 나는 모두를 긍휼히 여긴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에 우리의 삶을 맡기는 거죠. 그때부터 내 마음이 넉넉해져요.
하나님이 하신다는데, 내가 시비를 걸지 말자는 거예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내가 평가를 내리지 말자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의 믿음이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내가 '그건 틀렸습니다'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내 수준으로 끌어와 설명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 사도를 보십시오.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한 설명을 간추려 한마디로 귀결시킵니다.
그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고전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심지어 바울 자신이 겪는 육체의 가시마저도 제거해 주시지 않음에도,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주님은 말씀해 주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고전12:9
우리는 우리 한계에 붙잡혀 힘을 못 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한계로 인해, 더 큰 하나님의 능력에 사로잡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한번 보세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최고의 명작, 그게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이나,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이해 못 합니다.
미켈란젤로는 천재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천재입니다.
그들의 대작들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한 모퉁이만 살짝 보고 감상할뿐입니다.
대가들의 작품의 세계 안으로 들여다보기에는, 우리 존재가 너무 작아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십자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인류의 최고의 대작, 최고의 걸작, 하나님의 가장 큰 명작,
그분의 지위와 능력이 다 감추어져 있는 그 십자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도대체 누가 있겠어요?
인류의 역사에 가장 편견에 시달린 분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그분의 십자가는 여전히 오해와 평견 속에, 지난 인류의 역사속에서 다루어지고 있어요.
그러나 그 십자가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면, 한순간에 무릎 꿇고도 남는 거죠.
요나는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는 설교를 힘있게 전했습니다.
그 설교는 요나의 생각과 맞아 떨어진 주제예요.
요나는 내심 '그래, 너희들은 이제 죽었다' 설교자가 가끔 요럴 때가 있어요.
'당신은 망하는게 좋아, 망할 짓을 했잖아!'
요나가 생각하기에는 40일은 너무 길다고 여겼을 거예요.
하나님의 진노는 매우 마땅하여... 40일도 길다는 거죠. 요나는 정의감에 불타올라요.
여러분, 우리가 정의감에 불 탈 때가 언제예요?
자기 자신의 불의에 대해서는 정의감이 불타지 않아요.
다른 사람의 불의를 보면서 일어나는 감정이, 정의감이예요. 근데 거꾸로 되어야 돼요.
▲요나는 자신이 생각하던 것과 다른 결과가 나오자 충격에 빠집니다.
무엇 때문에 충격을 받는 겁니까?
하나님의 자비로우심 때문이에요.
이 말도 안 되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에, 선지자가 당황하는 거예요.
문제는, 그 자비로우심이 자신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아니라,
숙적 니느웨에게 베풀어졌다는 것에, 요나는 분노하는 것입니다.
요나는 그걸 받아들이기가 힘들어요.
여러분, 하나님은 요나와 같지 않으십니다. 그게 은혜입니다.
요나 같은 하나님이었으면, 우린 벌써 다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가슴은 너무 크고, 너무 넓습니다.
능력의 하나님이시기에, 적절한 순간에 당신의 뜻을 바꾸실 수 있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의 목적!
하나님의 본질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의 설득에, 당신은 아무 의지도 없는 사람인 것처럼 행동해 주시는 분!
설득당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니느웨 왕, 이방의 왕은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실 것이다' 라는 걸 믿고 기도했다는게 놀라워요.
여러분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의 눈을 뜰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계적으로 설명할 수 없어요.
우리의 연약함이나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목적지까지 데리고 가시는 거죠.
분명한 것은, 우리의 삶은, 우리에 의해 돌아가기보다, 하나님에 의해서 돌아갑니다. *주권
그렇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분석하고 설명해 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풍덩 빠지는 경험이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내 뜻대로 돌아가지 않아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돌이키심은, 인간이 실수를 하고 후회하고 돌이키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달라요.
그래서 이 부분을 유명한 프랑스의 신학자이기도 하고, 또 철학적인 자크 엘륄은
'돌이키신다'라는 표현을 잘 해석했어요.
'인간이 자신의 죄로 인해 돌이키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대신 심판을 받으심으로써, 스스로 마음을 돌이키셨다'는 거예요.
심오한 깨달음입니다.
'하나님은 그 죄인이 받아야 할 죄의 대가를 대신 치르신다'는 의미가
이 '돌이킴' 안에 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로부터 돌아서기 이전에, 하나님의 돌이키심이 먼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예요.
그 돌이키심이 오늘 우리를 살게 한 것입니다.
그 은혜로 우리가 용서를 받을 수 있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얼마나 큰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우리를 위해, 오늘도 바꾸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때로 자기 생각을 바꾸시기도 하십니다.
예수님은 기준과 선이 분명하신 분이에요.
그러나 때로는 선을 초월하여 넘나드는 분이셨어요.
그 이유는, 진노 가운데 있는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심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포기할 줄 모르시는 분입니다.
'변덕스러운 하나님'이라는 말을 들어도, 한 영혼을 살리시는 쪽을 선택하시는 예수는
누명을 뒤집어 쓰더라도 십자가를 받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명예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일에
더 관심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열심이 얼마나 맹렬하신가를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바로 이 점을 하나님은, 요나에게 가르쳐 주고 싶어 하는 거예요.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가르쳐 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이 요나를 달래가며 끝까지 데리고 가시는 하나님!
그 요나에게 베푸신 개인과외수업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가를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나서를 통하여, 니느웨에 베푸신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또한 요나에게 베푸신 그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
우리 모두가 흠뻑 젖는 그런 은혜가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요나서 지금 3장을 지나는데, 마지막 4장까지... 이런 하나님의 레슨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우리 '주여!' 세 번 부르고,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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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중략된 부분 : '하나님은 결코 그 뜻을 돌이키지 않으신다'는 논지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인간은 거짓말을 잘 합니다.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기도 하지만, 때론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을 때가 있죠.
돈을 빌릴 때 언제까지 꼭 갚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대출을 받아 갚으려고 했는데, 무슨 문제가 생겨요. 그러면 거짓말이 되는 겁니다.
제한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약속 시간을 꼭 지키겠다고 했는데, 가는 길에 앞에 자동차 사고가 나서,
길이 막혀서 늦게 도착해요. 내 잘못은 아니에요.
어찌 됐든 약속한 시간에 꼭 맞춰가겠다는 말이, 거짓말이 된 거잖아요.
여러분,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면 여러 가지를 갖춰야 합니다.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초월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내가 한 말을 지킬 수가 있습니다.
미래를 또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거짓 없는 성품 때문입니다. 상황에 따라 오락가락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변덕스러운 사람과는 교제하기 어렵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그렇게 변덕스럽다면, 우리가 그분을 어떻게 따라가겠습니까?
근데 하나님은 우리와 다르다는 거예요.
성경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말3:6절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약1:17절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삼상15:29절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번개함이 없으시니
그런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 그랬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것이나 행동하시는 것에 일관성이 있습니다.
신구약 성경 전체가 일관성을 갖고 있습니다.
만약 일관성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 진리요, 그 말씀들은 말씀들끼리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상호 모순이 없습니다.
불변하시는 하나님은, 당신이 하신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요.
그것이 우리의 믿음의 근거예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당신이 세우신 계획에는 실패가 없습니다.
이 부분에 우리가 흔들리면 안 돼요.
주2) 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 그 논거
자, 성경 속에서 몇 군데 오해를 일으킬 만한 내용들이 좀 있습니다.
창6:5~6절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었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땅 위에 사람을 지으셨음을 한탄하셨다'는 것입니다. 후회하셨다는 것입니다.
'아, 내가 잘못했어... 내 계획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 같애...
인간들을 짓지 말았어야 돼... 인간 창조는 대 실패야!'
이렇게 하나님이 후회하신다는 말인가요?
하나님도 당신의 계획이 실패하실 때가 있는가요?
자, 또 하나의 사건이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의 첫 돌판을 받고 있는 중에,
산 아래에서 백성들이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는 일이 일어났죠.
하나님이 분노하시고 모세에게 '그 백성들을 다 진멸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특이한 장면이 하나 나오는데, 그게 뭐냐면 모세가 하나님을 설득하는 장면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설득해요. 모세는 '주의 백성을 멸하실 그 뜻을 돌이켜달라'고 청원합니다.
간청을 합니다. '하나님, 당신의 그 멸하시려는 뜻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때 하나님이 그 모세의 청원을 들으시고, 뜻을 돌이키십니다.
출32:14절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백성들에게 내리시려던 재앙을 거두십니다.
왜 하나님의 마음은 수시로 바뀌는 것입니까?
우리가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는 분이신가요?
왕상20장에도 히스기야 왕이 죽을 병에 걸려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히스기야에게 전합니다.
'네가 죽고 살지 못할 것이다'
근데 히스기야 자기 낯을 벽을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설득합니다.
간절하게 눈물로 기도합니다. 근데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다'
그는 15년의 생명의 연장을 받습니다.
죽어야 할 사람으로 작정되었는데, 이미 선고가 내려졌는데,
죽어야 한다고 할 때는 언제고, 연장시켜 줄 때는 언제인가요?
우리는 여기에서 '그냥 하나님 마음대로 하신다'고 하면 간단해요.
하나님은 얼마든지 마음(주권)대로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근데 '하나님의 마음대로라면' 우리의 마음에 걸리는게 있어요.
우리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하나님을 믿고 따라간다면' 혼란이 생길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