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언약의 핵심인 성령 겔36:27, 고후3:6 여러 설교 정리
겔36: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새언약과 성령의 관계
새언약은, 구약성경에 이미 예언되었는데, 렘31:31~33절이 대표적입니다.
▲렘31:3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위 구절은 31절에 '새언약' 이라고 분명히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특징이 뭐냐?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입니다. 렘31:33
옛언약은 돌비에 기록한 반면, 새언약은 우리 마음 속에 기록한다는 거죠.
우리 마음을 부드럽게 해서 (겔36:26),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게 한다는 뜻입니다.
인격적으로 순종한다는 거죠. 외형으로가 아니라.
신약 히브리서에 '새언약'이란 표현이 네 번 등장합니다. 8:8, 8:13, 9:15, 12:24
특히 8:8~10절은, 렘31:33절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 설교의 주요 논지는 "새언약의 핵심은 성령이다"인데,
위에서 살펴본 렘31장이나, 히브리서에
'새 언약'과 '성령'을 매치시킬 어떤 단서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겔36:25~27절도 '새언약'에 관한 말씀으로 봅니다.
여기에 '새 언약'이란 말은,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새 영, 새 마음'이 나오지요.
특히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겔36:27
이 말씀은, 신약(새언약)시대에 되어질 일에 대한 예언이 분명합니다.
겔36:25~27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원래 이 말씀은,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예언이지만,
확장해서 보면, 신약시대 새 언약의 백성들에게도 적용되는 예언이라서,
새언약으로 볼 수 있죠.
▲그런데 새언약, 즉 신약 복음의 핵심이 무엇이냐?
그것은, 오순절 성령의 강림으로, 신약시대에는 성령이 내주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돌비에 새긴 율법, 옛언약’을 따르지 않고,
‘심비(마음)에 새긴 율법’을 따르는 것입니다.
겔36: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여기에 분명히 ‘율법을 지켜 행하게 하신다’ 하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신약(새언약)에는 율법이 없다고 주장하는 ‘무율법주의’나
율법이 있어도 안 지켜도 된다고 하는 ‘율법폐기론’은 비성경적인 거죠.
요즘도 그런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과거에 한 때, ‘이제 복음 시대가 왔으니, 구약 율법은 폐지되었다’는 식으로
복음(?)을 전하던 분들이 있었죠.
의식법, 시민법으로서의 율법은 폐지된 게 맞지만,
도덕법으로서의 율법은 여전히 신약시대에도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룰’
것입니다. 마5:18
◑오늘날 전해지는 복음의 심각한 불충분성
‘맹인 코끼리 더듬기’라는 우화를 잘 아실 것입니다.
코와 배와 다리를 각각 만진 맹인들이, 코끼리에 대해 죄다 ‘부분적으로’ 진술한다는 거죠.
▲1. 먼저는, 복음을 전하면서 ‘자동 성화론’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구원론을 칭의 한쪽으로만 이해하는 것입니다. 성화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러니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는데, 오직 ‘예수 믿어 구원(칭의)’ 한쪽만
집중적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설교자 자신도 그렇게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온전한 구원론은 칭의론+성화론 둘을 같이 전파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정확하게 계산해 본 것은 아니지만, 대략 성경은 칭의론과 성화론이
2:8로 구성되어져 있다고 봅니다.
만약 성경에서 성화론을 빼버린다면, 성경은 20% 그 이하로만 남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를 설교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바울은 칭의론과 성화론을 둘 다 한꺼번에 가르쳤습니다. 로마서 한 권으로!
근데 사람들은, 로마서를 한 번에 5구절씩 강해하다 보니까,
로마서 앞쪽에, 갈라디아서 앞쪽에 ‘칭의론’만 계속 강조하게 됩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칭의론’이 로마서의 전부인 줄로 착각하게 됩니다.
바울은, 로마서를 쓸 때, 처음부터 끝까지 로마서를 다 읽으라고 썼습니다.
즉 칭의론과 성화론을 골고루, 한꺼번에 다 배우라는 것입니다.
로마서는 1~5장까지는 ‘칭의론’을 다룬다면, 6장부터는 ‘성화론’을 다룹니다.
특별히 8장에 이르러 ‘생명의 성령의 법’을 논하면서 8:2
신자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면서 살게 됨을 가르치죠.
새언약을 말한 것입니다. 새언약이 뭐라고요?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하나님의 법(율법,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겔36:27
물론 처음부터 완벽하게 지킬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점점,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지향’하여 가는 거죠.
방향성을 ‘성화, 예수님의 형상’에 맞추고, 그쪽으로 지향해 나아가는,
즉 성숙한 길로 가는, 온전해지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칭의론만 전파해서, 구원받는다고 가르치는 것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맹인 코끼리 더듬기’와 같습니다. 일부만 가르치고, 중요한 것을 빼먹는 것입니다.
오늘날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성화론’은
성도가 죽을 때, 자동으로 ‘그리스도처럼 변화된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니 애써서 성화를 이룰 필요도 없고,
어차피 율법을 지키려고 해도 안 된다며 지레 포기하고, 그게 복음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을 하는 성경적 근거가 있습니다.
고전1: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위 구절은, 예수는 우리에게 ‘의로움’ 뿐만 아니라 ‘거룩함’도 되신다고 합니다.
예수 믿고 ‘칭의’ 받을 때, ‘성화’도 같이 받는다고 하는 소위 ‘자동 성화론’(만든 말)입니다.
또한 사도바울이 서신서를 쓸 때, 예를 들어 고린도 교인,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
‘성도들’이라고 불렀죠. 고전1:2, 빌1:1
아직 고린도교인들, 빌립보 교인들은 믿은 경력이 별로 오래 되지도 않았는데,
‘성도들 (거룩한 자들)’로 인정한 것입니다.
이것은 ‘칭의’처럼, 그들이 ‘성화’의 자격을 얻었다는 것이지,
완전히 자동 성화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제 ‘성화된’ 자격을 얻었으니, 계속적으로 앞으로 성화되어져 간다는 뜻입니다. 주1)
△또 한 가지, 신자들은 ‘내가 죽으면 자동 성화되어, 예수님처럼 된다는데,
뭐하러 힘들게 성화의 삶을 추구해야 하나?’ 하는 논리를 갖고 있습니다.
그 근거를 제공해 주는 구절이 요일3:2절이죠.
요일3:2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그러나 위 구절은, 그가 나타나실 때, 즉 재림의 때에,
우리의 썩을 육체가, 썩지 않을 육체를 입게 된다, 부활체를 입게 된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자동 성화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동 성화된다면, 성화론이 성경에 나올 필요가 없죠.
비슷한 구절이 빌3:21절입니다.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우리 몸을, 육체를
예수님의 몸, 부활체로 변하게 하신다는 거지,
우리의 인격을 자동 변화시켜 주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요일3:2절을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자동성화론’에 빠져 있으면, 너무나 중요한 구원론을
맹인 코끼리 더듬기 식으로, 부분적으로만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온전한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되는 거죠.
△그렇다면,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들이
만약 성화의 삶을 살지 않고 죽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 주변에 그런 신자가 있을 수 있잖아요.
답은, ‘그런 일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진실로 회개하고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은,
삶의 방향이 바뀌게 되고, 자발적으로 성화의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의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그를 책망하시고,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요16:8
그런데 만약 예수 믿어 세례 받은 신자가
그 후에 성화의 삶을 살지 않고 죽었다면...
그건 진실로 회개하고 예수 믿은 게 아니라, 지적 동의로 예수 믿은 것입니다.
그의 심령에 새 생명의 씨앗이 심겨지지 않은 것입니다.
▲2. 복음을 전하면서 ‘성령’을 언급하지 않는 것입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렸는데 ‘새언약의 핵심은 성령’입니다.
겔36: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새언약의 핵심인 성령이 오신 것은, 행2장의 오순절 성령강림 때입니다.
이는 이미 예수님이 예고하신 것입니다.
요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래서 새언약의 성도들, 즉 신약성도인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원리는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인도, 감화, 충만을 통해
하나님의 (도덕)법을 지키는’ 방식입니다.
그저 ‘믿음으로 내가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계명을 지키며 산다’ 입니다.
이것은 억압이나, 자유를 강제로 빼앗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가 물 속에서 자유를 누리듯이,
진정한 에덴동산의 회복,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려면,
무법주의, 반율법주의, 율법폐기론으로 사는 것보다, 도덕법을 지키며 사는 것이
도리어 우리의 ‘행복’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새언약의 핵심인 성령’을 무시하는 신앙생활입니다.
일부 장로교에서는 ‘성령에 관하여’ 1년 내내 거의 언급하지 않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결교, 감리교, 오순절교회에서는
그들의 신앙기초강령(원리) 중에 성령이 들어있습니다.
그들은 성령론을 기초로 해서, 성령론을 한 축으로 해서 태동된 교단들입니다.
그들 교회들은 ‘성령’을 종종 언급합니다.
만약에 교회 강단에서 ‘성령’을 언급하지 않는데,
‘성화의 삶을 산다’는 것은... 학생이 독학해서 고시에 패스하는 것처럼 어려울 겁니다.
간혹 그런 사람이 있기는 하죠. 성령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그런 어휘를 쓰지 않는데,
자기도 모르게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성화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건 예외적인 경우고,
대부분은 ‘성령’을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면,
사실 성화론을 거의 포기하고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혹은 유교적 도덕주의로 신앙생활 하는 거죠.
그저 ‘칭의론’ 하나만 붙들고, 구원 받겠다는 얘기인데...
그것은 성경의 일부만 이해한 것이지, 구원론의 전체적인, 통합적인 이해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칭의로 구원받았다고 칩시다. (그렇지 못하고 ‘지적 동의’인 경우가 많죠)
그런데 ‘성령의 인도를 받는 성화의 삶’에 아주 무지하거나 등한시한다면,
그건 마치 대학을 입학하고, 중퇴한 것과 같다고도 하겠습니다. 졸업을 못하는 거죠.
구원의 완성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출애굽하고도 가나안에 이르지 못한 성도들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과거에 한 때, 성령론이 너무 ‘은사론’ 쪽으로 치우친 적도 있었죠.
신유, 예언, 방언 등의 은사도, 성경에 나타나 있는 것은 분명하나,
그보다 ‘성령’의 더욱 큰 방점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에 있습니다. 겔36:27
이른바 ‘인격적인 성령’이시죠. 그분과의 교제입니다.
이것을 알기 쉽게 예를 들자면, 운동경기에서 ‘코치’의 역할입니다.
코치가 옆에서 고함지르고, 지시하며,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운동선수가 훨씬 더 경기력을 잘 해 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코치가 그 선수 대신 뛰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코치해 줄 뿐이죠.
성령님이 이렇게 우리가 성화의 삶을 살도록 코치해 주시고,
실제로 성화의 삶은, 본인이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우리가 억지로 거룩하게 살라고 우리를 부르신게 아닙니다.
물론 성도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거룩에 대한 부담감을 가지고
우리들이 거룩하기 위해서 노력을 합니다.
그런데 잘못 이해하면 큰일나요.
거룩함은.. 우리들이 거룩함을 이루기 위한 부담이나 의무가 아니라,
성령충만해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다 보면, 거룩함이란 결과를 가지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거룩하기 위해서, 부담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충만해서 주와 함께 기쁨으로 살아갈 때, 우리들의 삶이 거룩해지는 결과를 맞이하는 것이죠.
그것이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친밀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마치는 말
기독교의 교리가 다 중요하지만 ‘구원론’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일반 교인들은 ‘교회만 다니면 다 구원받는다’는 안이한 인식을 갖고 있습니다.
‘구원론’에 대해 무지하며,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구원론은 칭의론+성화론이 동전의 양면처럼 이루어져 있는데,
진정한 칭의에 이른 사람은, 자연스럽게 성화론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성화론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은 ‘성령님’이십니다.
새언약의 핵심은 ‘성령님’이십니다.
렘31:33 ‘그 날 후에 (포로 귀환 후, 또는 예수님 십자가 후)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위에 ‘성령’의 언급이 빠져 있지만, 위 밑줄이 가능하게 하는 것은
성경 전체를 볼 때 ‘성령의 역사로 가능’한 것입니다.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즉, 자신의 의지로는 불가능합니다.
겔36:26~27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이 새언약은 신약시대를 예언한 것입니다.
그 핵심은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그리하여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언급조차 하지 않는 신약교회가 있다면,
어쩌면 ‘구약의 신앙, 율법주의적인 신앙’을 갖고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성령님과 인격적인 교제, 성령의 인도, 감화를...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칭의론’만 굳게 붙드는 것은, 어쩌면 그 ‘칭의론’조차도 흔들입니다.
왜냐면 동전이나 지폐에, 앞면만 있고 뒷면이 없는 것은, 위폐이거든요.
새언약은, 예수님이 오셔서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성령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죽으심과 부활로... 거기서 복음이 끝나면 안 됩니다.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주신 것까지... 계속 나아가야 ‘복음, 새언약’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그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행2: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그가 설교할 때 (위 구절은 베드로의 설교), ‘부활’로 끝내지 않았습니다.
‘성령 부어주심’까지 연결해서 설교했습니다.
행2: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그래서 사도행전에 성령의 인도를 받은 예가 반복해서 나오죠.
빌립 집사가 성령의 인도로, 에티오피아 관리 간다게를 만는 것 등이죠.
많이 나옵니다. 성령의 은사적 측면도 필요하지만,
원래 성령의 방점은 ‘내주하시는 성령이 인도하셔서, 율법을 지키게 도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화’를 추구하며, 구원의 완성을 이루어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도적이라도, 설교할 때 자꾸 '성령님, 성령님의 인도'라는 말을 언급해야 합니다.
그게 신약의 복음이요, 새언약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예수 믿어서 구원받는다'에서 끝나지 않고,
그래서 '성령 받아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며, 주님과 교제하며 산다'까지 가야
온전한 복음입니다.
히브리서에 ‘새언약의 중보’라는 표현이 세 번 나옵니다. 8:6, 9:15. 12:24
여기서 ‘중보’는 ‘중계자, 중간에서 연결해 주는 사람’이란 뜻이죠.
신약과 구약의 중간에서, 예수님이 옛언약에서 새언약으로 중계, 연결해 주셨죠.
바울은 자신을 ‘새언약의 일꾼’으로 불렀습니다. 고후3:6
그런데 나는 과거에, 1년에 한 번도 ‘성령’을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옛 언약의 일꾼’으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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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장로교에서는 신대원에 입학하자마자 ‘전도사님’으로 불러줍니다.
신대원 3년을 거치면, 인턴쉽을 거친 후에, 빠르면 20대 후반에 목사로 안수받습니다.
사실 아직 어리고, 미숙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10년, 20년, 30년이 지나면, 그 미숙한 목사가 후에는 진짜 목사가 되어 있습니다.
먼저 ‘자격’을 인정해 주니까, 나중에 점점 ‘목사’로 변모, 성장되어 가는 것입니다.
자기가 목사니까 (성도 saint, 장로, 집사도 마찬가지) 점점 목사에 걸맞게 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네가 일정 자격 조건이 되면 목사, 의인, 성도 자격을 줄게’ 했다면,
아마 20년, 30년이 지나도, 그 자격 요건을 갖추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회개하고 예수를 믿는 그 순간부터,
의인의 자격, 성도의 자격(거룩한 자 라는 자격)을 주십니다. 은혜죠.
그런데 진짜 그 은혜를 받으면, 정말 사람은 정말 그대로 살아가려고 지향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