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30] 새 언약의 세 가지 특징 (히8:10-13)┃2025.4.13 Youtube
◈새 언약의 세 가지 특징 히8:10~13 2025.04.13. 히브리서 30강
히브리서의 중요한 주제 중에 하나는 "새 언약"입니다.
히브리서는 구약의 율법으로 대표되는 옛 언약 또는 첫 언약, 즉 구약과,
예수 그리스의 십자가로 대표되는 새 언약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난 주에도 '새 언약'에 대해 살펴봤는데요. 성경은 두 언약을 얘기하죠.
그래서 신약, 구약, 옛 언약, 새 언약 이런 뜻이잖아요.
성경도 신(어언)약과 구(언)약이라고 하는 이름 자체가 옛 언약, 새 언약 이런 뜻이죠.
그래서 성경은 이 두 언약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첫 언약 또는 옛 언약은 구약으로 대표되는 율법입니다.
그리고 이 율법은 하나님의 공의에 기초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거죠. '의로우신 말씀에 순종해라' 하는 것이죠.
반면 새 언약은 신약으로 대표되고, 은혜에 기초합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하죠.
하나님의 두 성품이 있는데, 그것은 공의와 사랑이죠.
그래서 구약은, 하나님의 공의에 기초해서, 그분의 의로운 말씀에 순종하라고 하는
율법이 주를 이루고 있는 그런 언약이라면,
신약은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해서, 그분의 은혜의 복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의 새 언약은,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지 용서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악을 기억도 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게 새 언약입니다.
그래서 우리 지난주에 이어서, 새 언약에 대해서 오늘 좀 더 살펴보려고 합니다.
새언약의 내용은 두 가지인데, 지난주에도 살펴봤지만 ☞지난 주 설교보기
1) 새언약은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기록하시겠다는 것이고,
구약, 옛 언약에는 돌판에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셨죠.
그래서 이 외부에 있는 말씀을, 우리가 읽고 듣고, 그것에 우리의 마음을 합해서
순종하는 것이 옛 언약의 내용이라면,
새 언약은 하나님의 법을 우리 마음 가운데 기록하셔서,
내주하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그 율법을 지키고 싶도록 만드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마음 가운데 역사하셔서,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싶고,
또 하나님을 섬기고 싶어 하는 마음을, 우리 가운데 주시겠다는 것이 새언약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새언약의 핵심은 '내주하시는 성령님'이세요.
2) 새언약의 두 번째 내용은, 우리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의 죄악을 다시 기억하지도 않으시겠다... 하는 것이 두 번째 내용입니다.
오늘은 이 새언약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특별히 새언약의 세 가지 특징을 살펴볼 텐데요.
이 세 가지 특징은 경외함, 그리고 자유함, 그리고 자발성,
이렇게 세 가지가 새언약을 이루고 있는 중요한 특징들입니다. 한 가지씩 살펴봅시다.
◑1. 새언약의 첫 번째 특징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함>입니다.
새언약은 경외함 위에 세워진다는 거예요.
히8:10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내 율법, 구약 율법)을 기록하리라'
그러니까 새언약은 은혜를 얘기하고 있긴 한데,
은혜를 이루는 기초는 뭐냐 하면, 하나님을 향한 경외함이라는 거예요.
그런 면에서 새 언약은 옛 언약의 기초 위에 세워집니다.
그러니까 구약과 신약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데
구약은 완전히 무시하고, 신약만 가지고 신앙생활하는 게 아니죠.
구약이라고 하는 기초 위에, 신약이 세워지지 않습니까?
구약이라고 하는 기초가 있기 때문에, 그 위에 신약이 세워지는데,
이 새언약의 성격이 정확히 그렇다는 거예요.
맞아요. 새 언약 또는 신약은 하나님의 은혜를 얘기합니다.
은혜를 얘기하는데, 그래서 복음의 핵심은 은혜예요.
우리가 어떤 죄를 짓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하신다고 하는 은혜가
이 새언약의 핵심인데,
이 은혜는 '하나님의 율법'이라는 기초 위에 세워졌을 때, 비로소 은혜가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옛 언약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고 얘기합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마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오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니까 예수님은 구약의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그 율법을 완전하게 하려 오셨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첫 언약인 율법은, 새 언약과 함께 서야 완전해진다는 것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새 언약이 우리에게 주어졌지만,
이 새 언약은, 옛 언약이 선행되어 있을 때 비로소 완전해진다는 거예요.
첫 언약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율법이고, 율법의 핵심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건강한 두려움을 '경외함'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데, 이
렇게 부정적인 종류의 두려움이 아니라,
존경과 하나님을 향한 경외... 이런 것 때문에 두려운 거 있잖아요.
여러분, 우리 안에 건강한 종류의 두려움이 있죠.
너무 우리가 존경하는 사람을 만나거나, 너무 훌륭한 분을 뵙거나,
그러면 우리 안에 좀 긴장감이 들잖아요. 그런 걸 '경외함'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이것(경외)이 이제 옛 언약의 핵심이라면, 새언약의 핵심은 은혜입니다.
그리고 경외와 은혜는, 함께 있어야만 온전해진다는 거예요.
함께 있는 것뿐만 아니라, 순서도 중요합니다. 경외함이 먼저 있어야 돼요.
그럴 때 비로소 은혜가, 은혜가 됩니다.
무슨 말이냐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내가 죄인이구나,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능력이 없구나. 지옥에 가는 것이 합당하구나'
하는 고백이 있을 때, 비로소 은혜가 뭔지를 알게 된다는 거예요.
그렇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지킬 수도 있고, 못 지킬 수도 있고...
여유가 되면 지키고, 어휴 말씀을 못 지킨다 그러면, 무슨 큰 일 나겠어?'
이런 사람에게는,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 별 의미가 없는 거죠.
▲제가 초등학교 때, 바닷가에 갔다가, 빠져 죽을 뻔한 적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3~4학년 때였던 것 같은데, 열심히 수영을 하고 있었는데,
딱 일어나 보니까 발이 밑바닥에 안 닿는 거예요. 파도가 세서 밀려간 거죠.
분명히 얕은 곳이라고 생각하고 수영을 하고 있었는데
일어나 보니까 발이 땅에 안 닿는 겁니다. 순간적으로 당황을 하게 되잖아요.
그래서 물을 엄청 먹었습니다. 꼴깍꼴깍 먹다가 '아이고 이러다 죽겠다'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살려주세요' 하고 소리를 치는데,
물이 계속 목구멍으로 들어가니까, 그 소리도 잘 안 나와요.
그래서 '정말 나의 짧은 인생을 이렇게 마감하는가 보다' 그러고 있었는데
그때 한 중학생 정도 돼 보이는 한 형이, 시커먼 고무 튜브를 들고 오더니
저한테 던져주는 겁니다. '잡아!'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걸 딱 붙잡았어요.
그랬더니 수영을 잘하는 분이었나 봐요. 수영을 막 해서 다가와서 저를 구해줬습니다.
그러고는 제가 이제 넋이 나간 거죠. 그래서 잠깐 정신을 차려보니까
그 형이 어디로 갔는지 없어졌더라고요.
그때 이 튜브는, 정말 10억을 준다고 해도 그 가치가 있었어요.
10억이 아니라 100억을 준다고 해도, 제가 튜브를 샀을 거예요. 이제 곧 죽는 건데...
그런데 만약에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물에 빠진 것이 아니고
제가 모래밭에서 공놀이를 하고 있었어요.
그때 갑자기 머리를 빡빡 민 중학교 형이 하나 나타나더니
시커먼 튜브로 확 던지면서 '잡아!'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제가 무서워서 도망가지 않겠어요? '뭐하는 사람이지? 갑자기 저걸 왜 잡으라고 그래?'
여러분 똑같은 튜브예요. 똑같은 튜브인데
어떤 때는 10억을 줘도 바꾸지 않을 정도로 소중한 튜브인데,
어떨 때는 '저거 뭐야 미쳤어?' 이런 생각이 든단 말이에요. 차이가 뭐죠?
'내가 처한 상황이 어떤 상황이냐?' 하는 거죠.
은혜가 정확히 그렇습니다.
은혜가 '아, 나는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존재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구나'
이거를 깨달은 절박함이 있는 사람에게는, 은혜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거예요.
은혜가 은혜가 됩니다.
그런데 이 깨달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은혜'라는 게 별로 의미가 없어요.
'그냥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로 보내셔서, 우리 대신 죽어주셨다는데, 왜 죽으신 거야?'
물론 교회 나오시는 분들은 머리로는 이해하겠죠.
하지만 자기 마음가운데 별로 이렇게 와닿는 게 없어요.
'그냥 그런가 보다... 그냥 하나님이 예수님으로 오셨나 보다...' 그걸로 끝!
왜그래요? 하나님을 향한 경외가 기초가 돼 있지 않은 거예요.
하나님을 향한 경외함이 있다는 건 뭐냐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된다'고 하는 일종의 강박관념이 있는 거죠.
그게 경외 아닙니까!
경외는 '그렇지, 하나님을 내가 경외해야지, 그럼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지!'
그런데 지키려고 하다 보니까, 그게 안 되는 거예요.
말씀을 지키려고 애를 쓰고, 애를 쓰고, 애를 쓰는데... 안 되는 거예요.
이거(지키려는데 안 됨)를 통과한 사람에게, 은혜가 은혜로 작동하는 거예요. 믿으십니까?
▲이 고백이 로마서 7장의 바울의 고백이죠.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롬7: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15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아멘
바울은 이전에 바리새파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은 어떤 사람들이냐면, 하나님을 향한 경외가 있는 사람들이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또 하나님을 향한 경외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경외감 속에서 바울은, 모든 율법을 지키려고 발버둥을 쳤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다 그랬잖아요. 외적으로 아주 정확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버둥을 쳤던 사람들인데, 이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 바울이었거든요.
그래서 바울은 정말 눈곱만큼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어요.
그런데 결과가 어떻습니까? 안 되더라는 거예요. 그게 로마서 7:24절의 고백이잖아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내 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싶은 원함은 있는데
그것을 행하지 않고 있는 나를 보는 거죠.
동시에 내 안에 두 마음이 있어서, 죄를 따르고 싶은 마음이 함께 있더라는 거예요.
이게 안 되더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율법을 지키려고, 지키려고 발버둥을 치는데,
내 안에 또 다른 법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죄의 법이죠.
그래서 바울은, 도저히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없는 자신을 보면서 한탄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는 이 고백!
이 고백이 첫 언약의 핵심인 거예요. 첫 언약의 핵심은 뭐예요?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 롬3:20
그렇죠. 이게 율법의 목적이고, 이게 첫 언약의 핵심인 거예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게 첫 언약의 핵심인 거예요.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 그랬을 때, 그 위에 이제 뭐가 세워지는 거예요?
새 언약이 세워질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새 언약의 기초는 뭐냐 하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라는 고백입니다.
그게 신약의 기초인 거예요.
구약을 통해서는 죄를 깨닫는 거예요.
그렇지만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은 없어요.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 롬3:20
그러니까 우리가 구약의 핵심은 뭐냐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건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통해서
'아~ 내가 구원받기에 합당한 존재가 아니구나
나에게는 이 죄를 해결할 능력이 없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거예요.
이게 새 언약이 세워지는 기초입니다.
이 깨달음 위에 새 언약이 세워지지,
이 기초가 없으면 새 언약이 세워지지 않아요.
첫 언약도 세워지지 않았는데, 두 번째 언약이 어떻게 세워지겠어요?
첫 언약 위에 새 언약이 세워지는 거거든요.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정말 어찌할 수 없는 죄인이라' 하는 것을 고백하는 고백 위에,
은혜가 세워지는 거예요.
이 고백이 있지 않으면, '은혜'라는 것이 굉장히 우스워집니다.
그러니까 그게 아까 얘기했듯이, 멀쩡하게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데,
갑자기 형이 튜브 던지면서 '잡아!' 이거 하고 똑같은 거예요.
'도대체 이 튜브를 내가 왜 잡아야 되는지?
저 사람은 멀쩡히 잘 놀고 있는 나한테 와가지고
왜 '이게 구원의 튜브야 잡아!' 하고 던지는데, 저게 무슨 구원인지
전혀 이해가 안 되는 거죠.
이 첫 언약의 기초가 없을 때, 우리 가운데 일어나는 일입니다.
소위 말하는 '값싼 은혜, 값싼 구원'이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첫 언약의 기초가 없이 신앙생활을 하니까,
그냥 구원이 무엇이고,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지도 못하고, 누리지도 못하는 거예요.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이 새 언약은 반드시 경외함 위에 세워지는 거예요.
경외함, 경외 위에! 구약 위에!
'아, 나는 하나님 앞에 구원 받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구나'
'나는 말씀을 지킬 능력이 없구나' 그럴 때.. 우리가 비로소 새 언약으로 나가게 됩니다.
이게 이어지는 로마서 8:1~2절의 바울의 고백이죠.
롬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외가 먼저 있을 때,
그래서 그분의 말씀을 경청하고, 지키려고 애쓸 때,
거기서 우리는 새 언약으로 인한 은혜를 만나게 되고,
놀라운 감격을 누리게 되는 거예요.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지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였노라' 롬8:1~2 하는 고백에 이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첫 언약이 먼저 있어야 돼요. 두 언약이 함께 있을 때에 비로소 완전해집니다.
그렇지 않고 여러분, 경외함(구약)이 없는 은혜는, 우리를 방종하게 하고요.
반대로 은혜(신약, 새언약)가 없는 경외는 종교가 됩니다.
그래서 이것이 온전한 복음이 되기 위해서는
경외와 은혜, 공의와 사랑이 함께 가야 되는 거예요. 아멘!
두 언약의 기초 위에 세워지는, 튼튼한 신앙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새언약의 두 번째 특징은 (죄책감에서) <자유함>입니다.
히8:12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새언약의 내용은, 우리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않으신다는 거예요.
이 놀라운 용서의 선포로 인해서, 우리는 자유함을 누리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감정은 긍휼이에요.
심지어 우리가 죄 가운데 있을 때도,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크리스찬들에게 설문 조사했습니다.
'당신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감정은 어떠실 것 같습니까?' 그렇게 질문했더니,
거의 80% 가까이가 '제게 화가 나 계신 것 같아요' 그렇게 대답했대요.
70~80%가 '내게 화가 나 계신 것 같아요' 이렇게 대답했다는 거예요.
그 얘기는 뭐냐면, 크리스찬들 안에 죄책감이 굉장히 강하다는 거죠.
그리고 죄책감이 우리를 종으로, 노예로 묶고 있어서,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그렇게 얘기 안 하거든요.
성경에서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감정은 '긍휼'이고, '사랑'이라고 얘기하지,
'분노'라고 얘기하고 있지 않아요.
그러니까 '분노'라고 얘기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감정은, 기억하십시오, 분노가 아니라 긍휼입니다. 8:12
그리고 이것이 새 언약의 선포입니다.
이것을 알 때, 우리는 첫(옛)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 넘어가게 돼요.
그런데 그렇지 않고 계속 '하나님은 내게 분노하실 거야, 화가 나 계실 거야' 라는
생각에 머물러 있으면, 우리는 옛 언약 안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자, 옛 언약은 뭐냐면, 하나님을 두려워만 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면, 어떻게 되냐면, 그분의 낯을 피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더 멀어지게 됩니다.
이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안에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는데, 그 사람 앞으로 막 가겠어요?
만날 때마다 그가 무서운데... 그에게 다가갈 리가 없죠.
이 두려움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가까이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낯을 피하게 합니다. 그래서 그 결국은, 사망이에요.
반면에 새언약은 다릅니다. 새언약은,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만들어요.
그래서 히브리서가 계속 얘기하는 것이 뭐냐면
'휘장을 지나 지성소로 나아가라'는 거예요. 담대히 나아가라는 거예요. 왜요?
'예수께서 너희 죄를 다 사셨기 때문에, 더 이상 하나님은 기억하지도 않으셔.
두려워할 필요 없어. 더 이상 기억하지도 않으셔!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감정은 분노가 아니라, 긍휼이고 사랑이야!
그러니까 휘장을 지나 지성소로 담대히 나아가!'
그래서 여러분 새언약은,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래서 그 마지막은 생명인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이 자유함 가운데 있지 않으면,
즉 죄책감으로부터 자유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국 옛언약의 저주 아래서, 사망에 이르는 걸로 끝나는 거예요.
아니요.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다루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세요.
그리고 그 시작은 뭐냐면,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거예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감정은, 분노가 아니라, 긍휼이라는 걸... 아는 거예요.
그랬을 때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그분의 얼굴을 구하게 되고,
그래서 점점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되고, 그 마지막은 생명에 이르게 되는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회개할 때,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세요.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뿐만 아니라, 죄를 기억도 하지 않으신데요.
지난주에 얘기했지만, 사람은 이게 안 됩니다.
잊어버리고 싶다고, 잊어버려지는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으로, 얼마나 고통당하십니까?
이 기억을 좀 지워버렸으면 좋겠는데, 안 지워지는 거예요.
계속 트라우마처럼 남아있고 이러죠.
그런데 하나님은 전능하세요. 이게 가능하신 분이시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기억을 지워버리신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게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지,
저와 여러분의 죄는, 그냥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는 수준이 아닙니다.
'그래, 내가 용서해줄게, 그냥 내가 한 번만 봐준다' 이 수준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냥 기억에서 지워버리셨어요. 기억에서 완전히 지워버리셔서 기억도 안 하신다는 거예요.
얼마나 완전히 지워버리셨냐면, 포렌식을 해도 안 나와요.
그냥 깨끗이 지워버리셨어요. 이게 여러분, 성경이 선포하는 진리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여러분 이걸 믿는 거예요.
'나의 모든 죄와 허물은 하나님께서 기억을 지워버리셨다. 기억도 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여러분 죄책감의 종이 되지 마세요. 죄책감의 노예가 되지 마세요.
물론 죄를 짓고도, 계속 지으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돌이켜 회개한 거라면, 그 망령에 계속 매어 있을 필요가 없어요.
돌이켜 회개한 것이라면, 하나님의 기억 속에 다 지워버리셨다는 거예요. 할렐루야!
그러므로 여러분, 회개한 죄들에 대해서는 자유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이 자유를 주셨습니다.
로마서를 다시 한번 읽어볼까요?
롬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율)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바울의 이 자유,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다'
이 자유가 여러분의 것입니다. 거짓이 여러분을 속일 때마다, 이 진리를 선포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나의 죄를 기억지도 않으신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다.'
이 진리를 여러분 끊임없이 선포하십시오. 거짓에 속으시면 안 돼요.
▲죄는, 죄책감을 통해서, 우리를 노예로 만들어요.
물론 죄를 짓는 것도 문제지만, 죄를 짓는 것만큼 심각한 문제가
'죄책감에 사로잡히는' 겁니다.
죄를 짓는 것하고, 죄책감에 사로잡히는 건 약간 다른 얘기거든요.
죄를 짓는 게, 물론 우리 삶 가운데 치명적인 영향을 줘요.
하지만 그것만큼, 죄책감에 사로잡히는 것도 치명적입니다. 왠지 아십니까?
죄책감에 사로잡힌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 앞에 나가야 문제가 해결되는데,
죄책감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가지를 못해요.
그러니까 부정적인 사이클이 계속 도는 거예요.
잘 보세요. 여러분, 우리 죄의 문제는... 죄를 몰아내려고 해서는 죄를 이길 수가 없어요.
하나님께 나아가서, 그 선한 빛으로 우리를 채울 때, 어둠이 물러나는 거거든요.
여러분, 성도가 죄와 싸우는 방법은,
죄는, 빼내려고 하면 안 돼요. 밀어내야 됩니다.
'죄를 밀어낸다'고 하는 건 뭐냐면, 더 좋은 게 내 안을 가득 채울 때,
그냥 죄는 밀려나게 되는 거죠.
그렇지 않고 죄를 빼내려 하면, 죄라고 하는 건 왜 오냐면,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공허함에서 오는 건데,
빼내면 여기가 진공일 거 아니에요. 그럼 다른 게 또 들어옵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무슨 죄를 짓는 게 있어요.
예를 들어 담배다 그러면, 담배를 끊어보십시오.
그럼 무슨 일이 생기냐면, 술 을마시게 됩니다.
이제 술을 끊어보십시오. 그 다음에는 마약을 하게 돼요.
도박을 끊으면, 그 다음에 쇼핑 중독 들어오고,
쇼핑 끊으면 다른 거 들어오고.... 왜요? 마음이 허해서 생기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죄는 여러분, 빼내는 싸움으로는 승부가 나지 않습니다.
계속 빼내면 딴 거 들어오고, 빼내면 딴 거 들어오고...
그래서 귀신 하나 쫓아내면, 일곱 귀신 들어온다고 성경에 그러잖아요.
죄는 어떻게 처리하는 거냐면, 하나님의 빛으로 내 영에 채워야 돼요.
더 좋은 것, 더 큰 기쁨으로 채워질 때... 죄에 관심이 안 가는 거예요.
그거 굳이 안 해도, 내 안에 충만함이 있는 거예요. 이게 죄와 싸우는 법이거든요.
그러니까 여러분, '어둠'이라는 것은 실체가 없는 거예요. 빛이 실체가 있는 거지.
'어둠'은 뭐냐면, 빛이 없는 상태를 어둠이라고 부르는 거지,
어둠의 입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니거든요.
빛은 실체가 있어요. 광자라고 하는 실체가 있지만, 어둠은 실체가 있는 게 아니에요.
그냥 빛이 없는 상태를 어둠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둠과 싸우는 것은, 실체가 없는 것하고 싸우는 거예요.
빛으로 채워야 되는 거지요. 그럼 어둠은 그냥 밀려나서 없어지는 거죠.
그런데 죄책감의 문제는 뭐냐? 빛으로 나아가지를 못하게 한다는 거예요.
빛으로 나아가야 이 죄의 문제가 해결되는데,
빛으로 나아가야 죄가 끊어지는데...
죄책감 때문에 빛으로 못 나아가요.
그러니까 계속 어둠 속에서 뒹구는 거예요.
내 안에 공허함은 있는데.. 채워지지는 않는데...
그런데 이 죄는, 이건 안 짓고 싶기는 한데,
죄를 지을 때 또 죄책감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가지는 못하고...
그러니까 다른 죄로 채우고, 또 다른 죄로 채우고, 이거를 반복하고 있는 거거든요.
그래서 죄책감은 여러분, 죄만큼이나 심각합니다. 죄책감은 죄만큼이나 치명적이에요.
이 죄책감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빛으로 나아가지 않게 돼요.
그러면 그 끝에는, 어둠만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기억하세요. 하나님은 여러분의 죄를 기억하지도 않으십니다. 이게 성경의 선포예요.
하나님은 우리 죄를 기억하지도 않으십니다. 자 따라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나의 죄를 기억하지도 않으십니다!'
이 진리를 여러분 선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새언약의 두 번째 특징은 자유함이에요.
죄책감으로부터 자유한 자유함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3. 새언약의 세 번째 특징은 <자발성>입니다.
히8:11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그들이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라' (자발적으로 섬기리라)
이건 '자유함'하고도 연결되어 있는데, *두 번째 특징
하나님을 섬기고 그 말씀을 따르는데, 기쁘게, 즐거이, 자발적으로
그렇게 하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이것이 새언약의 세 번째 특징입니다.
새언약의 동기는, 기쁨과 즐거움이에요.
새언약은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하는 언약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섬기는데... 옛 언약도 하나님을 섬기는 법이죠.
구약이라고 해서 다른 걸 섬기는 건 아니죠.
새 언약, 신약도 하나님을 섬기는 법인데, 섬기는 법이 구약과는 좀 달라요.
새 언약은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옛 언약은 우리의 '행동을 새롭게 함으로'
그런데 마음의 동기는 여전히 경외감이죠.
그래서 첫 언약은, 타의에 의해서 수동적으로 움직이며,
나의 드러나는 행동을 바꾸는 언약입니다. ↔ 내면
그리고 그 동기는 두려움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언약과 함께 드려지는 제물이 있죠.
구약에도 제물이 있고, 신약에도 예수께서 제물이 되셨는데
이 언약과 함께 들어지는 제물은, 그 언약의 속성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첫 언약 때 드려지는 제물은, 타의에 의해서 수동적으로 끌려갑니다.
그렇죠. 짐승이 자발적으로 제물되겠다고, 제단에 올라갈 리는 없잖아요.
그런데 새 언약의 제물은 달라요.
예수께서는 자발적으로 적극적으로 자신을 드리셨어요.
새언약의 동기는 뭐냐면 기쁨이에요.
그리고 이 기쁨으로 대표되는 생명 만이, 내 내면을 바꿉니다.
기쁨, 감사, 사랑, 열정... 이것이 우리 내면을 바꿔요.
옛언약이, 두려움을 기초로 해서, 우리 외적인 행동을 바꾼다면,
새언약은, 기쁨을 기초로 해서, 우리 마음을 바꿉니다.
옛언약에 역사하는 것이 죽음이라면,
새언약에 역사하는 것은 생명입니다.
새언약의 제물 역시, 새언약의 속성을 상징적으로 예표하는데,
예수께서는 기쁨으로 자원하여 자신을 드리시고,
그래서 그 끝은 죽음이 아니라 부활이죠. 생명입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요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룬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그래서 도표로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1) 구약으로 대표되는 옛언약이 있는데, 그것은 율법입니다.
신약으로 대표되는 새언약이 있는데, 그것은 은혜입니다.
2) 선택권의 관점에서 볼 때,
옛언약은 선택권이 없어요.
그런데 새언약은 자원하여 선택 해서 섬기는 거예요.
3) 동기는 두려움이냐 기쁨이냐?
옛언약의 동기는 두려움이고,
새언약의 동기는 은혜, 사랑이에요.
4) '영'의 관점에서 볼 때,
옛언약은, 죽음
새언약은, 생명
5) 제물의 관점에서 볼 때,
옛언약은, 타의에 의해서
새언약은, 자발적으로!
6) 태도의 관점에서 볼 때,
옛언약은 수동적으로 지키고
새언약은 (변화된 내면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킵니다.
7) 변화의 관점에서 보면,
옛언약은, 외형적인 행위의 변화, 겉형식적인 변화를 추구하지만
새언약은, 내면적인, 본질적인 변화를 추구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앞서 잠깐 언급했지만, 첫언약과 새언약의 제물의 속성이에요. *위 5)
이 제물의 속성을 들여다보면, 첫 언약과 새 언약이 무엇인지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물은 각 언약의 속성을 담고 있기에, 그 언약의 속성을 예표적으로 나타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제물은 언약 당사자인 우리 자신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구약의 제사에서, 제물을 죽여서 피를 뿌리죠.
그런데 제물을 죽여서 피를 뿌리는 의미가 뭐죠? 우리를 대신해서 바치는 거잖아요.
나의 죄 때문에 내가 죽어야 되는데, 우리를 대신해서 제물이 피를 뿌림으로써,
율법의 대가, 죄의 대가를 치르는 거죠.
그러니까 그 제물은 사실 뭐예요? 나를 예표하고 있는 존재인 거잖아요.
나의 죄를 저 짐승에게 전가해서, 그 짐승이 대신 죽는다는 거죠.
그러니까 제물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무엇을 상징하고 있습니까?
우리, 나 자신을 상징하고 있는 거예요. 신약의 제물도 마찬가지죠.
십자가에서 죽어야 되는 건 뭐예요? 내가 죽어야 되는 거죠.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해서, 나로서 우리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거잖아요.
그래서 완전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우리'를 대표해서 십자가에 죽으셔서...
그러니까 구약의 제물도 그렇고, 신약의 제물도 그렇고,
'우리'를 상징하고 있다는 거예요. 우리를 예표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물의 속성이, 언약의 속성을 나타낸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얘기입니다.
우리를 예표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과) (새)언약을 맺는 당사자잖아요.
그렇다면 이 제물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첫 언약의 제물은 어떻습니까? 첫 언약의 제물인 짐승은 타의에 의해서 드려집니다.
자발성이 1도 없습니다. 수동적입니다.
짐승은 끄는 대로 질질 끌려갑니다.
여러분, 짐승이 죽으러 가는데, 자발적으로 가는 짐승이 어디 있습니까?
당연히 짐승은 아무 생각도 없고요. 그냥 질질 끌면 끌려가는 거예요. 가기 싫은데...
보니까 죽음의 냄새가 나요. 짐승들이 도살장에 끌려갈 때 알거든요.
그런데 냄새로 안다고 그러더라고요. 짐승이 죽을 때 나오는 짐승의 호르몬이 있대요.
짐승이 두려워함에서 나오는 호르몬이 있는데,
그래서 개장수가 오면, 개가 꼬리를 감추고 도망가고 그러잖아요.
그 냄새로 아는 거라고 그러더라고요.
개가 극도의 공포가 있을 때, 죽음 직전에 분비하는 호르몬이 있는데,
개장수의 옷에 그 냄새가 스며 있는 거죠. 그 냄새를 개들이 안대요.
그래서 개장수가 오면, 개가 도망가고 이러는데
하여간 짐승들은 죽으러 갈 때, 짐승들이 안다 그러잖아요.
소도 알고, 개도 알고, 양도 알고 다 안 돼요.
그러니까 이 짐승들 죽으러 가는 걸 아는데, 그때 자원해서 기쁘게 가는 짐승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가 대속의 죽음을 죽어서, 하나님께 드려져야지' 그런 거 없어요.
그냥 끌려가는 겁니다. 짐승에게 선택권이라는 건 애초부터 없어요.
선택권이라는 건 없어요. 두려움으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그 종착지는 죽음이죠.
▲반면 새언약의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다르세요. 자발적으로 자신을 드리십니다.
자원해서, 적극적으로 자신을 드리세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물되심은, 스스로 선택하신 제물되심이에요.
그래서 그의 마음은 기쁨과 감사와 사랑으로 가득했고요.
그 종착지는 죽음이 아니라, 죽음을 이기는 생명이었어요.
이게 바로 새언약이 우리에게 역사하는 특징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새언약의 특징은 뭐냐면,
새언약의 제물되신 예수(우리의 대표)께서 자원하여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듯이,
새언약의 당사자인 우리 안에, 자원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이게 새언약의 특징이에요.
▲그리고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이세요.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나로, 하나님을 섬기고 싶게 도우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새언약의 핵심은, 히브리서를 자세히 읽어보십시오
새언약의 핵심은 내주하시는 성령님이에요.
새언약의 핵심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에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자원해서 하고 싶게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싶게 하시고,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고 싶게 하시고,
예수를 더 알고 싶게 하시고,
예배를 더 드리고 싶게 하시고... 이것이 새언약의, 옛언약과의 본질적 차이입니다.
만약에 여러분, 우리가 새언약의 시대를 살지만, 신약의 시대를 살지만,
이런 자발성이 없다면, 우리는 여전히 옛언약을 벗어나지 못하고,
지금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 겁니다.
종교생활의 특징은 뭐냐면, 끌려가는 짐승하고 똑같이 신앙생활을 해요.
교회도 끌려 나옵니다. 나오기 싫은데, 안 나오면 안 될 것 같고,
주로 아내들이 무서워서 끌려나오죠.
어렸을 때는 엄마가 무서워서 나오고... 상상을 해보세요.
여러분, 제단으로 끌려가는 짐승하고, 너무 오버랩되지 않나요?
맞아요. 하나님께 드려지긴 드려져요. 그런데 어떻게 드려져요?
질질 끌려나오는 거잖아요.
이게 자원해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짐승처럼 질질 끌려와가지고, 목이 탁 잘라져가지고 드리는 거예요.
이렇게 옛 언약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우리 안에 있다는 거죠.
끌려다니는 이게 종교생활이죠.
종교생활의 특징은 뭐냐 하면... 두려워서 하는 거예요.
두려워서 교회 나오고, 눈치 때문에 십일조하고.. 그 와중에 내면의 변화는 거의 없어요.
외부로 드러나는 행동의 변화에 그칩니다. *옛언약, 구약
주일에는 어쩔 수 없이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교회에 옵니다.
투덜대면서도 셀모임에 갑니다. 질질 끌려서 수양회에 참석합니다.
이게 뭐예요? 주일 성수, 십일조, 좀 더 하면 성가대...
질질 끌려서 번제단으로 끌려가는 구약의 제물, 짐승 같지 않습니까?
우리 안에 영이 거하시지 않으면... 그렇게 억지로, 수동태로 신앙생활 할 수 밖에 없죠.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인 이유는 뭐예요?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기 때문이잖아요.
그런데 이 영이 멈췄을 때, 그때 하나님은 뭐라고 그러셨어요?
'저희가 육체가 됨이라' 그러셨거든요. 창6:3
짐승하고 인간의 차이가 없어졌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형상은, 그 안에 영이 거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인 거예요.
'영이 거한다'는 건 무슨 얘기냐면,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존재라는 거예요.
그런데 제물로 끌려가는 짐승은 선택권이 없어요.
그냥 끌려가서 재단에 바쳐줘야 돼요.
이러면 (율법주의 신앙인이) 짐승하고 뭐가 다르냐는 거예요.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혹시 이 가운데, 번재단으로 끌려오신 분이 있으십니까?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아니면 습관을 좇아서...
아니면 지옥 갈까 봐, 아니면 죄책감 때문에...
특별히 모태신앙 가운데 이런 증상들이 많은데,
주일날 교회 안 가고 딴 거 하면 뭔가 찝찝해요.
그러면 알 수 없는 뭔가가 내 안에서 질질질 나를 억지로 끌고 가요.
그래서 예배 가는 게 기다려지고, 예배가 너무 소망이 되고... 그러는 게 아니라,
교회에 안 가면 안 되니까 끌려온 거죠.
이게 여러분, 질질 끌려가는 짐승하고 똑같잖아요.
하여간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지긴 바쳐집니다.
여러분, 이 구약의 제물, 이게 옛 언약의 백성이라는 거예요.
몸만 드려지지, 마음은 전혀 딴데 가 있습니다.
이런 옛언약의 '종교생활'은 10년, 20년 해도... 영적 성장이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걸 뭐라고 그랬냐면, 히브리서는 참 깊이 있는 책인데
구약의 제사를 뭐라고 그러냐면 '매년 같은 제사를 다시 드려야 된대요.' 히10:1 참조.
이게 구약 제사의 특징이래요. 매년 같은 제사를 다시 드려야 된다고 하는 건 뭐냐면,
성장이 없다는 거예요. 그냥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똑같은 일을 계속 한다는 거잖아요.
굉장히 예언적이고, 상징적인 얘기입니다.
옛 언약의 백성은, 매년 같은 제사를 다시 드리는 거예요. 히10:1
아무런 성장이 없습니다.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그냥 두려움에 기초해서, 겉으로 보여지는 행동만 바꾸는 거예요.
그걸 '종교'라고 부르는 거죠.
당연히 여기에는 기쁨은 없습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짐승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새 언약은 다릅니다. 성령이 그 안에 내주하심으로 기쁨이 충만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믿어지고, 그분을 자원해서 섬기고 싶어집니다. 이게 핵심이에요.
섬기고 싶어져요. 예배를 드리고 싶어져요. 순종하고 싶어지고, 헌신하고 싶어져요.
왜요? 자세히는 몰라요. 그냥 그러고 싶어요.
그게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라는 거예요.
그게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라는 거예요. (반복 강조)
만약에 지금 그게 이해가 안 되시는 분이 있다면,
더 많은 예배를 드리는 게 지금 중요한 게 아닙니다. 성령 받으셔야 되는 거예요.
이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 분이 있다면, 성령을 받으셔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얘기가 뭐예요?
'성령을 받으라' 그러신 거잖아요. 눅20: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눅20:22
복음의, 새언약의 핵심은 뭐냐 하면, 내주하시는 성령님이세요.
이게 새언약의 핵심입니다.
크리스찬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그 안에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사람이에요.
그 안에 성령께서 내주하셔서, 하나님을 섬기는 게 기쁜 사람이에요.
이게 크리스찬입니다. 이게 크리스찬이에요.
교회를 나온다.고 크리스찬이 아니에요. 교회를 나와도 질질 끌려온 사람들이 있어요.
그는 아직 옛언약 안에 사는 겁니다. '종교행활' 하는 거죠.
새언약은 뭐냐면, 신약시대 하나님의 백성은, 그 안에 성령께서 거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자원해서, 자발적으로 섬기고 싶은 거예요.
하나님을 섬기는 게 기쁘고 즐겁고, 더 섬기고 싶고, 더 드리고 싶고...
그게 새언약의 백성입니다.
마치는 말
신약, 새언약 복음은 겉으로 드러난 행동의 변화가 아니라, 우리 마음의 변화입니다.
우리 마음의 기쁨과 감사와 감격이, 우리를 충만하게 하는 거예요.
그리고 이 복음은, 우리를 부활의 생명으로 인도합니다.
쓰러져도 또 일어나고.. 쓰러져도 또 일어나고.. Keep going 하게 하는 거예요.
이게 부활의 생명입니다.
히브리서는, 옛언약은 먹고 마시는 것과, 씻는 것과, 육체의 예법일 뿐이라고 말씀합니다. 히9:10
이건 예수께서 폐하셨어요.
이제 새 언약으로 나아가십시오!
휘장을 지나 지성소로 나아가는 믿음,
지성소에서 성령과 내 영혼이 동행하는... 마음이 새롭게 되는...
내 존재가 새롭게 되는... 이것이 새 언약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아멘
새언약의 백성으로 살 때도, 바울이 고백했듯이,
우리 안에 여전히 스트러글은 있습니다.
죄에 대한 욕구도 있고요. 또 넘어질 때도 있고, 쓰러질 때도 있고,
설교하는 제 안에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지난 40년 신앙생활을 돌아보니까
제 안에 있는 가장 강력한 동기는 뭐냐면, 하나님을 섬기고 싶은 거예요.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싶은 거예요.
물론 연약해서 죄도 짓고, 넘어지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하고, 뭐 그러지만
여전히 제 안에 있는 그 기초를 이루고 있는 마음의 동기는 뭐냐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은 거예요. 그게 그냥 너무 좋은 거예요.
그게 그냥 너무 좋은 거예요.
'그게 뭘까? 왜 그럴까?' 생각해보면,
그게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이 하시는 거예요.
성령이 여러분 속에 거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에게도 똑같은 마음이 있을 겁니다.
비록 우리가 연약해서 실패하기도 하고, 죄도 짓고, 넘어지기도 하고 그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는 여전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은 그 마음이
있지 않습니까? 아멘! 그것이 새 언약입니다.
새 언약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자리에서 일어나 같이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