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카테고리 없음

고전3장 하나님의 눈으로 타인과 자신을 바라보라

LNCK 2025. 5. 25. 08:33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고린도전서

https://www.youtube.com/watch?v=oCu0GU5Gyro  정리

◈하나님의 눈으로 타인과 자신을 바라보라       고전3:18~4:5       2025.05.11. 

◑도입

오늘 말씀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게 되는데 
3:18~20절 : 지혜자가 되는 길, '어떻게 하면 지혜자가 될 수 있는가?'
3:21~23절 : 이 원칙을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에 적용해서
   우리가 영적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되는가? 
4:1~5절까지는 자기 자신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눈으로 나 자신을  바르게 볼 것인가?

그런데 먼저 염두에 둘 것은, 지금 고린도 교회에 여러 가지 다툼과 분쟁이 있는데, 
왜 다툼과 분쟁이 일어났는가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소위 고린도 교회에 '지혜있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스스로를 지혜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자기를 자랑하고, 또 자기가 따랐던 지도자들을 자랑을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자기 자랑과, 자기가 추종하는 지도자 자랑이 
교회에 다툼과 분쟁을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늘 본문 18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3:18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바울이 첫 번째 교훈을 합니다.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그러니까 '지혜자가 되는 길'인데 (3:18~20),
바울이 첫 번째로 바울이 도전하는 것은
아무도 자기 자신을 속이지 말라.. 하고 도전합니다.  

'자신을 속인다'는 게 무슨 말이겠습니까? 
이 말씀은 바울서신에 여러 번 등장하는데, 본문의 문맥을 잘 살피셔야 됩니다. 

본문은 앞서 다루었던 3장 내용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거기에 어떤 사람이 있을 수 있느냐? 
자기는 성전인 교회를 세운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보실 때는, 교회를 허물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누구냐? 자기를 속이는 사람이죠. (즉 '스스로 속는 사람'입니다)

자기는 교회를 지금 세우고 있고, 건설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교회를 오히려  무너뜨리고 있는 사람'으로 판단하실 수가 있습니다.  

 

또 우리가 교회를 함께 세워갈 때, 
자기는 금과 은과 보석 등 불에 타 없어지지 않는 영원한 재료를 가지고 교회를 세우고 있다.. 
자기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하나님이 보실 때는, 나무와 풀과 짚과 같은 불타 없어질 재료로 교회를 세우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결국 그 사람들도 누구냐? 자기를 속이고 있는 (스스로 속는) 사람이죠.  

또 고전3장에 신령한 사람이 있었고, 육신에 속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3:1
그런데 많은 경우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들을 신령한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실 때, 그들은 육신에 속한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는 사람들이었죠. 
이 모든 것은 무엇이냐? 바로 자기를 속이는 겁니다. 
'나는 신령한 사람이다. 나는 불타 없어지지 않는 재료로 하나님의 집을 세워가고 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떠냐? 

육신에 속한 사람이고, 불에 타 없어질 재료로 성전(교회)을 세워가고 있고,  
또 이 성전을 세우기보다는 허물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고린도 교회도, 결국 시기와 다툼, 분쟁이 일어났던 그 중심에는 누가 있었느냐? 
'스스로 지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3:18
그 사람들이 분쟁과 다툼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속는 사람'이었습니다.  3:18

이것은 오늘날에도 똑같습니다. 오늘날에도  한국교회 많은 곳에서 
지금 다툼과 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심에는 누가 있느냐? 
신앙 생활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교회 속에서 스스로를 가장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가장 신앙이 좋다고 생각하고,
가장 자기가 교회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시기와 분쟁, 다툼이 일어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바울이 첫 번째 도전을 하는 거죠.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마라' 

▲그러면 이런 자기 기만 self-deception 의 희생양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나요? 

오늘 설교 제목과 같이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게 될 때'는
자신을 속이는 잘못에서, 우리는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본다'는 게 결국 무엇인가요? 
두 가지 과정이 있는 거죠. 
먼저는 비움의 과정입니다. 그래서 계속 이어지는 말씀에서 이렇게 권면하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3:18b

'어리석은 자가 되라' 이 말은 바보가 되라는 거예요.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다른 말로 하면, 지혜자가 되는 길은 무엇이냐?  
자기 기만의 희생양이 되지 않는 길은 무엇이냐?  
자신의 지혜를 버리고, 자신은 어리석은 자로 여기고, 
하나님의 지혜로 자신을 채우는 것, 이것이 지혜자가 되는 길이다..   
라고 바울은 권면하고 있습니다. 

▲저는 위 말씀, 고후3:18절 후반부의 말씀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서울로 가면서, 그때 처음 객지 생활을 하면서, 
매 순간 순간이 사는 게 너무 힘이 들었고, 무엇보다도 '내가 어떻게 해야 되나?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되나?' 매 순간마다 너무너무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구한 것이 '하나님 저한테 지혜를 주십시오. 
어떻게 하면 이 혼란한 세상을, 제가 바르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때 이 말씀을 발견하게 된 거죠. 
지혜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먼저 어리석은 자가 되라. 
네가 정말 지혜로운 자가 되고 싶거든, 먼저 어리석은 자가 되라

이 말씀은 저한테 정말 충격이었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제 기도 제목은 
'하나님, 제가 하나님 앞에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 지혜로운 자로 살게 해주십시오!'  하고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지혜자가 되는 길은 무엇인가요? 
세상의 지혜, 나의 지혜를 비우고, 그 자리에 하나님의 지혜로 채우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왜 그러면 우리가 스스로를 어리석다 라고 여겨야 되나요? 
19절을 보시면 '왜냐하면' 으로 시작됩니다.  *헬. 가르

◑3:19 '(왜냐하면)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왜냐하면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다'  
이것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장과 2장에서도 계속 가르쳤습니다. 

1장에서 '십자가의 말씀(십자가의 도)이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지혜다.' 1:18, 24
그러면서 이 세상 지혜는 헛되다 라고 바울이 이야기했고,  

2장에서 '깨닫게 하는 성령'에 대해서 가르칠 때도 
'이 세상은 자기 지혜로 하나님의 지혜, 영광의 주를 알지 못했다.'  
라고 바울은 계속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이 세상은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 수 없고 
하나님의 구원의 길을 그들은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입니다.  

나중에 칼빈 선생은, 이것을 조직신학으로 정리하면서  
'아담 이후 타락한 인간이 가장 귀하게 생각하는 지성과 이성은 어떻게 되었느냐?
이것은 왜곡되어져 있다. 뒤틀려져 있다.  
하나님의 영으로 바로 잡아주기 전에는, 인간의 이성과 지성은, 
인간이 가장 신뢰하는 인간의 이성과 지성은 뒤틀려져 있다...' 그것도 타락했다는 거죠.
라고 기독교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이 이야기하죠. 이 세상 지혜를 왜 비워야 되느냐? 
이것은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다. 그러면서 두 개의 성경 구절을 19절에서 인용합니다.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것은 욥5:13절의 인용이고요. 
욥5:13 '지혜로운 자가 자기의 계략에 빠지게 하시며 간교한 자의 계략을 무너뜨리시므로'

이거는 무슨 장면인가 하면 사냥꾼이 짐승을 잡는 장면입니다. 
사냥꾼이 짐승을 잡을 때 어떻게 하느냐? 덫을 놓죠., 
덫을 놓는데 결국 짐승 입장에서는 어떻게 그 덫에 빠집니까? 

자기 지혜로 봤을 때 '여기에는 덫이 없을 거다' 
자신의 꾀와 지혜를 의지해서 덫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곳에 
바로 덫을 놓아서 그 짐승을 잡죠.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신다는 말은,
결국 자기 꾀, 그게 덫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잘난 자들의 야망, 잘난 자들의 자기 신뢰와 교만이 어떻게 되느냐? 
바로 자기를 무너뜨리는 덫이 된다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가 이 세상의 지혜를 비워야 되느냐? 
첫 번째 바울은 성경을 통해 이야기합니다. 
'세상의 지혜는  파괴적일 수 있습니다. 
자기를 파괴시키고  가정과 교회를 파괴시킬 수 있습니다' 하고 지금 바울은 이야기 하죠.
인간이 생각했던 최고의 지혜가, 역설적으로 덫이요, 파괴적이 될 수 있습니다.  

◑3:20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이어지는 20절 말씀은, 시94:11절을 인용했는데요.
시94:11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

이게 무슨 뜻입니까? 언제 우리는 '헛되다' 라고 생각합니까? 
언제 우리는 '헛되다' 라는 표현을 사용합니까? 

내가 최선을 다해서 지혜를 사용해가지고 방법을 찾아냈는데, 
그 방법을 통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 우리는 '헛되다' 라고 표현하죠. 

내 모든 생각과, 내 모든 노력들이, 문제를 해결해 내지 못할 때 
그때 우리는 '헛되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인간의 지혜, 세상의 지혜는 뭐냐? 파괴적이고 무기력합니다. 
즉 자기 꾀(덫)에 빠지게 해서 파괴적이며, :19
자기 지혜로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기에 무기력하고 헛됩니다. :20

우리들이 자랑하는 인간의 지혜가, 
우리 삶을 가장 복되고 아름답게 이끄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무기력하다... 

그래서 바울은 두 개의 성경구절을 인용하면서, 
이 세상의 지혜는 파괴적일 수 있고 무기력하다...

그래서 이것을 비우고, 하나님의 지혜로 우리들 자신을 채우는 것, 
이것이 바로 지혜자가 되는 길이다... 라고 바울은 교훈합니다. 

저는 앞으로 우리들의 삶의 질, 
앞으로 교회의 지도자들과 성도들의 삶의 질은, 아마 여기서 결정되리라 봅니다.

-자신을 속이지 않고(:18),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한국 교회와 성도들이 가지게 되면,  한국 교회는 다.시금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교회가 못하고 있는 게 무엇이냐? 
자신을 살필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냥 자기 도취에 빠져 있어요. 
스스로 속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지 못하고, 

파괴적이고  또 무기력한 인간의 지혜와 꾀를,  :18~20
마치 하나님의 지혜인 것처럼 포장하고 표현하는 그런 것들이 
바로 교회를 무기력하게 만들어가고 있는 거죠. 

바울은 이야기했습니다. 지혜자가 되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스스로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면서 
자기의 지혜를 비우고, 하나님의 지혜로 채우는 것이다... 라고 교훈했습니다.     주1)

그 다음, 이것을 타인을 바라보는 것에 적용을 하는데, 21절을 보시죠. 

◑3:21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3:22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3:23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의 것임이라'  :21
무슨 뜻이냐면, '사람'으로서 구체적인 세 명을 언급합니다. 

바울과 아볼로와 게바... 이 사람들이 어디에 등장을 했죠?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분쟁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1:12
분쟁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죠. '나는 바울에게 속했다. 어떤 이는 아볼로에게 속했다. 
어떤 이는 게바에게 속했다.' 거기 등장했던 세 명의 인물을, 바울은 언급합니다. :22 

그러면서 바울, 아볼로, 게바는... '다 너희의 것이다' 라는 표현을 합니다.  :22  
1:12절에서는 '나는 바울에게 속했다... 아볼로에게 속했다... 게바에게 속했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나는 바울의 것이다... 저 사람은 게바의 것이다... 아볼로의 것이다.'  
이것 때문에 고린도 교회는 싸움과 분쟁이 일어났는데, 바울은 이야기하죠. 

'너희가 바울, 아볼로, 게바의 것이 아니고, 
바울과 아볼로와 게바가 바로 너희들의 것이다.' :22 라고 바울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들이 특별히 신앙 생활을 할 때, 
목회자들과 또 특별히 신앙의 선배들과 관계가 정말 중요하잖아요.  

지금 이 구절을 잘 기억하셔야 돼요. 
특별히 목회자, 또는 존경하는 신앙의 선배들은... 추종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분들은 우리의 추종의 대상이 아닙니다. 자랑의 대상도 아닙니다.  
서로 경쟁시키는 대상도 아닙니다. 

그분들이 다 누구의 것이냐? 우리들의 것이라는 거죠. :22                주2)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21
온 세계가 바로 우리들의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이 살아가는 삶의 마지막에 찾아오는 죽음까지도, 
생명과 사망이 바로 우리의 것이다... 라고 말씀합니다.  :22

현재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  또 앞으로 장래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다 우리의 것이다... 라고 바울이 말씀합니다. :22

'아니, 이런 일이 언제 일어났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일이 있었네?' 
이런 (다소 황당한) 생각이 드시겠습니다. 

저도 이 구절을 읽으면서 '아니,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나서, 언제 세계가 우리 것이 됐나요?'
하고 의문을 품었던 적이 있습니다.
 
또 여기 나오는 '생명과 사망,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온 세계가 우리들의 것이다' :23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언제 나도 모르게 이런 일이 일어났대?' 
'진짜 이 말씀이 사실인가? 아니면 듣기 좋은 뻥인가?' 

제가 본문 21~23절을 읽고서 고민을 많이 했어요.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언제죠?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바로 내 삶의 구세주와 주인으로 모시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과 연합하는 겁니다. 예수님과 내가 연합을 하는 거죠.  

예수님을 믿었을 때 일어나는 일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연합하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됐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만물을 창조하셨고, 만물의 소유주가 되시는 분이 
바로 우리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또 역사를 주관하시는 만앙의 왕 만주의 주이신 예수님이, 
바로 우리와 연합이 되셔서 하나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될 때 
놀랍게도 만물이 바로 우리의 것이 되었다는 거죠. 우리가 바로 상속자들이니까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 상속자가 되었으니까요.                

롬8:16~17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제가 읽었던 책 중에, 제가 정확한 저자 이름을 기억을 못 하겠는데, 
그는 무신론자였어요. 그런데 이분은 이 세계와 나는 철저하게 그냥 이질적인 관계로 보았죠.

근데 이분이 예수님을 만나게 됐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그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그때 그분이 느낀 감격을 이렇게 표현하셨죠. 

'제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 
온 우주 만물이 바로 나를 향해 우호적이 되었습니다.' 

온 우주 만물이 바로 나를 향해 우호적이 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고  
그가 표현을 했습니다

저는 정말 그 문장을 읽고, 막 가슴이 뛰었어요. 
'그래, 예수님을 믿는다는 게 바로 이거구나!'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 나의 아버지가 되셨으니까, 
역사를 주관하시는 예수님과 내가 하나가 되었으니까, 
바로 그분이 가지고 있는 이 우주 만물, 세상의 모든 것이
예수님과 함께 공동상속자 co-heir with Christ (롬8:17)가 된, 우리 것이 된 것입니다. :21~23  

나아가, 그분이 다스리시는 역사가 어떻게 되었느냐? 
'나를 돕는 것이 되었다. 나를 우호하고 나를 빛나게 해주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것은 나는 예수님 안에서 우주와 역사와 화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창3장의 인류의 타락 이후에, 역사와 환경과 피조물은 인간에게 적대적으로 변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후,
역사와 환경과 피조물은.. 우리에게 우호적이 된 것입니다. 그것들과 화해가 일어난 거죠.

지금 바울의 고백이 이런 내용입니다.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이 예수님 안에 있는 순간, 모든 것이 바로 우리의 것이 되었고,  
특별히 영적인 지도자들까지도 무엇이냐? 우리들의 것이 되었어요. :22

이 표현을 조금 더 쉽게 설명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귀한 선물이 되었어요.  
꼭 기억하셔야 됩니다. 지도자들은 추종해야 될 대상이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23a
만물이 너희의 것인데,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가장 쉽게 이야기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었다 라는 뜻이죠. 

그렇지만 이 말의 구체적인 의미가 뭔가? 저도 사실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제가 공부를 하면서 비로소 조금 알게 됐어요. 

뒤에 나오는 표현이 힌트가 됩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다'
이 말의 의미를 알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이다' 라는 말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겠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어떻게 사셨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그분의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분의 삶의 목적이었고, 
그분의 존재 방식은 무엇이었느냐?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그분의 존재 방식이었어요. 

그래서 그분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었고, 매 걸음 걸음이 무엇이었느냐?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것이었던 그리스도의 삶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라는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삶의 목적이 무엇이 되어야 되느냐? 
그리스도를 빛내는 것이 우리들의 삶의 목적이죠.  
삶의 방식은 무엇이냐? 그리스도의 그 뜻에 순종하는 것,  
순종이 우리들의 삶의 특징이오, 삶의 방식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4: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이건 바울의 자기인식(4:1~5)입니다. 나는 누군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다...
여기서 '일꾼'은, 헬라어로 휘페레테스 입니다.

'휘페레테스' 는 영어로 'under' 곧 '밑'이라는 뜻과 '노를 젓는다.'라는 뜻이 하나로 
된 단어입니다. 즉 underower 죠.
당시에 큰 배의 밑창에서는 노를 젓는 노예들이 있었습니다.
유명한 영화 벤허에서는 주인공 벤허가 노예가 되어 전투함 밑에서 휘페르테스가 되어 
노를 젓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행26:16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휘페레테스)과 증인(마르투스)을 삼으려 함이니'

여기에서의 '종'도 휘페레테스 이죠.

 

노예라는 말이 기분나쁠지 모르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 모두도 무엇인가의 노예
였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도 자기도 모르게 노예로 살아갔습니다.

명예 집착의 노예, 물질의 노예, 행복강박관념의 노예, 쾌락의 노예, 
또는 분노와 미움의 노예...
사도바울은 이제 주님의 노예가 되기를 자청했습니다! 주님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배 밑에서 노를 젓는 것은 쉬운 일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특히 전쟁 때 전투를 하는데 배가 느려서는 이길 수 없었기에 전속력으로 달리기 위해 
전투함의 맨 밑바닥에서 힘을 다하여 노를 저어야 했습니다!

훼페레테스 - 종의 특징이 있습니다.
함께! 입니다. 함께 힘을 모으는 것입니다. 혼자가 아닙니다. 혼자서는 할 수도 없습니다.
함께 호흡을 맞추고 리듬을 맞추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했습니다.
실제로 조정 경기에 임하는 선수들은, 호흡까지도 서로 같이 맞춘다고 합니다.

휘페레테스는, 주님의 뜻을 이루어내기 위해 자기를 숨기고 보이지 않는 사역자입니다.
배의 밑창에서 일하니까, 그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배는 움직이지만, 보이지 않는 존재입니다.

바울은 이름없이 빛도 없이 자기는 숨기고 주님의 뜻을 드러낼 뿐이라는 
마음으로 사역했습니다. 이것이 휘페레테스 정신입니다!

조정경기에는 인기스타가 없습니다. 그냥 팀웍이 있고 팀 이름만 있습니다! 
매우 상징적입니다. 사도바울도 자신이 드러나기를 원치 않았고 
오직 예수님의 이름만 드러나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일꾼(휘페레테스)' 이라는 의미입니다. 

학자들이 이야기하기를, 정말 바울이 사역자들을 표현할 때 
이렇게 바울은 노예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겁니다.  
지금 바울은 여기에 막 엄청나게 놀라운 영광을 가진 직분으로 자신을 소개하지 않습니다.
  
노 젓는 노예들은 북소리에 맞추어서,  주인들의 북소리에 맞추어서, 
노를 저어야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일꾼'이라는 것은 누구냐? 
그리스도의 북소리에 맞추어서, 그 삶의 순간순간을 살아가야 될 사람들, 
그리스도가 지시하는 방향으로, 드러나지 않게 배를 저어나가는 노예들...
바울은 자신을 바로 그렇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4: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그리스도의 일꾼,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들에게 4:1
하나님이 가장 기대하시는 덕목은 무엇이냐? 그것은 충성입니다.  4:2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소위 외적인 성공이다. 웅변으로 대표되는 달변이다...
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무엇이냐? 충성, 신실함이다... 
라고 바울은 권면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번 주가 어버이주일이기 때문에 
저도 소천하신 부모님들 생각,  또 저희 할머니까지 한번 기억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세월이 지나가지고  아버님이 소천하신지가 벌써 7년이 되셨고, 
어머니께서 소천하신지 벌써 10년이 되셨더라고요. 저도 깜짝 놀랐어요. 
'세월이 이렇게 빨리 지나갔나...' 

그러면서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 쭉 생각해 보면 
그분들은 세상에서 어떻게 보면 고생도 많이 하셨고, 또 경제적으로 실패도 많이 하셨습니다. 
또 흠도 어떻게 보면 많으셨을 수도 있죠. 그런데 저는  부모님,  할머님을 기억하면 딱 하나!  
저희 부모님과  할머님은 누구셨나 그러면, 저는 딱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어요. 
'그분들은 신실한 분이셨다.'  *신실한 : 충성과 같은 말 faithful

아버님은 사업에 많이 실패를 하셨지만, 어떻게 보면 시골교회에서 한 10년 동안
아버님이 진짜 충성하셨거든요. 
그 후에 대구에 오셔서 또 장애인 교회에서 한 10년 정도 정말 또 충성하셨습니다.  

어머니를 제가 기억을 하면, 어머니도 고생을 많이 하셨지만 딱 하나,  
'어머님은  신실한 분이셨다'   
할머님도 기억하면 다른 거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할머니는 끝까지 신실하셨다.' 

그래서 정말 그분들이 제게 주신, 삶으로 보여주신 것이 가장 큰 유산이 무엇이냐? 
'그분들은 성공이 아니라 신실함을 보여주셨다...' 

그래서 어쩌면 저와 제 동생들이, 다 주님 안에 (신실하게) 머물러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분들이 끝까지 신실하셨기 때문에, 귀한 신앙 유산이 저의 세대로 물려진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이 말씀이 저에게 너무 큰 위로가 됐어요.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화려한 성공이 아니고, 그분은 신실함(충성)을 원하신다.' 4:2 

저는 그래서 제가  부모님들,  할머님, 어르신들의 그 신실함을 통해 
제 속에 바로 그리스도가 새겨졌고, 또 그 신실함을 닮고 싶었던 마음들이 
제 속에 일어났던 것처럼, 
저도 자녀들과 다음 세대에게, 정말 신실한 목회자로 기억될 수 있다면...  
신실하였기 때문에 그들 속에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새길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낼 수 있다면... 정말 이거면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우리는 자꾸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것은 뭔가 화려한 결과, 외적인 성공, 가시적인 결과물인 것 같지만, 
바울은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맡은 자들에게 하나님이 가장 우선적으로 구하는 것은 신실함이다. 충성이다' 4:2

4:3~5절까지는, 그런데 충성하고 있는지 아닌지, 
만약에 제가 지금 하나님이 보실 때 신실함 충성하고 있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어요? 누가 판단합니까? 

그래서 바울은, 유한하고 정확하지 않고 최종적이지 않는 두 개의 판단을 먼저 언급하고, 
마지막으로 완벽하고 최종적인 판단, 심판에 대해서 바울이 이야기합니다. 

◑4:3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다른 사람'이라는 것은, NIV에 human court 입니다. 인간 법정. 
먄약에 저 같으면, '너희는' 내일 교회 성도들이 되겠죠.  
'다른 사람'은 누구냐? 교회 밖에 있는 소위 인간법정을 포함해서 떨어져 있는 다른 사람들,  

 

'그들에게 내가 판단받는 것이 매우 작은 일이다.' 
이 말씀을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 판단에 전혀 신경 쓰지 않겠다... 이게 아니고, 
'매우 작은 일이다' 라는 것은, 인간의 판단은  한계가 많습니다. 

그들은 다 알지 못해요. 그러니까 그들의 판단은 한계가 많고, 또 최종적이지 않습니다. 
그런 뜻에서 이것은 '작은 일'입니다. 
그래서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않는다'

◑4:4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학자들은 여기서, 바울의 과거 기억이 아마 여기에 표현되어 있지 않는가? 라고 봅니다. 
그럼 바울이 갈라디아서나 빌립보서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자신의 삶을 어떻게 소개했습니까? 

'나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 말은 무엇이죠? 
자기가 볼 때, 율법의 의로는 아무 결점이 없는, 정말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죠. 

그러나 그가 어떤 삶을 살았죠? 그는 결국 그리스도와 교회를 핍박했죠. 
주님이 찾아오셔서 그에게 뭐라고 말씀하셨느냐?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그가 하나님이라고 불렀던 그분이 '네가 왜 나를 핍박하고 있느냐?'  
자신이 볼 때 정말 나는 아무 자책할 것이 없다 하더라도, 
그것이 자기 의로움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죠. 
자신의 판단이 최종적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만 나를 심판하실 분은 주님이시다' 

◑4: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하지 마라'  
그날이 오면 두 가지가 일어납니다. 

-'어둠에 감추어진 것들이 드러날 것이다.' 
사람 눈에 안 보이는 것, 특별히 이중적인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들의 어둠에 감추인 것들이 드러날 것이다. 

-또 하나는, '마음의 뜻이 나타날 것이다'
어떤 행동을 했을 때, 마음에 숨은 동기들이 그때는 나타나게 될 거다.  

하나님의 심판은 무엇입니까?  어둠의 감추인 것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까지도 나타내시는 완벽한 심판이고, 그분의 심판은 최종적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야기하죠. '다른 사람의 판단, 심지어 네 자신의 판단에도 목숨 걸지 마라' 
그럼 어디에 목숨을 걸어야 되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판단 최종적인 판단에는 정말 목숨을 걸어야 되는 거죠. 
그때까지는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 라는 것입니다.

바르게 살면, '마지막 그때 각 사람에게 하나님이 칭찬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상급은 무엇이냐? 칭찬입니다. 

 

이런 표현을 한 것은, 고대 사회의 배경이 있습니다. 당시는 '명예 사회'였습니다.
고대 사회는 수치와 영광의 시대였거든요.  
옛날에 사람들한테 가장 수치는 뭡니까? 자기 몸을 더럽히는 것, 가문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쉐임, 수치가 가장 치욕적인 삶이었어요. 

반대로 칭찬, 가문의 이름을 빛내는 것은 무엇이냐? 영광이잖아요. 칭찬이잖아요. 
이것이 최고의 삶이었습니다. 
지금 그걸 반영하고 있는 거죠. 

하나님은 우리에게 칭찬을 해 주실 거다. 
이 말의 그저 '칭찬'만이 아니라, 그 속에 모든 것이 담겨져 있는 거죠.  
하나님이 칭찬하시면, 모든 것들이 함께 주어지게 됩니다. 


자 말씀을  정리하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바울은 어떻게 인식했는가? 
(3:21~23절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
4:1~5절은 '자신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자기 자신을 여겼습니다.  

그가 가장 마음에 두었던 덕목은 무엇이냐? 신실함, 곧 충성이었어요.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4:2
우리 성경에는 '충성'으로 번역했는데, NIV, KJV는 'faithful' 즉 '신실함'으로 번역했어요.

또 다른 사람에 대한 판단이나, 자기 자신에 대한 판단을 내려놓고, 
누구의 판단에 그는 초점을 맞추었느냐? 
바로 하나님의 판단에 초점을 맞추고, 그렇게 하루하루 하나님께 상받는 인생이 되기 위해 
그는 순간순간을 살아갔습니다.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첫 번째는, 성도님들이  지혜자가 되셨으면 좋겠어요.  3:18~20
그러려면  자기 기만의 희생양이 되시면 안됩니다. 
자기 기만, 스스로 자신을 속이지 말고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서 
내 삶, 내 인생을, 내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로 채워가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지도자들은 누구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3:21~23
이들에게 종이 되지 말고, 이들을 마음껏 활용해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에게 최고의 삶이 될 수 있도록 이분들을 이용하고 활용하셔야 돼요.  

세 번째, 우리는 누구냐? 함께 그리스도의 일꾼들입니다. 4:1~5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하시는 것은 무엇이냐? 바로 충성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심판, 최종적이고 완전한 하나님의 심판을 바라보면서  
매순간 매순간을 하나님께 칭찬받는 삶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주1)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말씀은 
예수님에 대해서 예언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적으로 볼 때는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습니다. 
그의 풍채, 외모, 학력, 직업, 가정환경 등 세상의 지혜와 가치로 보면 
버림받기에 딱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지혜자들은 예수를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예수님을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가장 중요한 
집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으셨습니다. 

이처럼 세상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세상의 질서와 하나님의 질서는 완전히 거꾸로 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부요합니다. 

‘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분의 판단은 헤아릴 수 없으며, 그분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롬11:33 

주님은 지혜와 지식이 얼마나 부요한지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구하라고 말씀하셨고, 
구하는 자들에게 후히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약1:5). 

한번 쓰면 없어지는 약처럼, 중요한 때에 쓰기 위해 
주님은 무엇을 아껴 두시고 보관하셔야만 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무한합니다. 
값없는 선물로 아무리 나누어주어도, 조금도 줄어들지 않습니다. 

주님은 마르지 않는 무한한 부요함을 가지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희소가치가 있는 것을 귀한 것으로 여기고, 
그 귀한 것은 부요(풍부)하지 않습니다. 즉 희소가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아주 귀한 것이라도 그 양이 작지 않습니다. 
주의 은혜는 부요합니다. 주의 긍휼은 풍성합니다. 주의 능력은 큽니다. 
주의 지혜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주의 명철은 무한합니다. 
우리는 그 지혜를 길어올리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길어낸 조지 워싱턴 카버 (땅콩) 박사 https://rfcdrfcd.tistory.com/15978378

주2) 
저는 교회 성도님들이 정말 이것을 기억하시면 좋겠어요.  
과거에 한국교회가 주의 종 목사님들을 추종하는 이거는 
정말 제가 볼 때는 거의 우상 숭배에 준하는 죄였습니다. 
(혹자는 이게 '샤머니즘 문화'라고 얘기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지금 망가지고 있는 가장 큰 원인을 꼽으라고 하면, 
우리를 잘 섬겨서,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하나님께 놀라운 열매 맺는 삶이 되도록 
우리를 섬기라고 보낸 종에 불과한 이 사역자들을, 교인들은 어떻게 했느냐? 
바로 지도자들을 추종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 것, 
이것 때문에 지금 온 한국교회가 다 망가졌던 시절이 과거에 있었습니다. 

제가 극단적으로 말씀드리면, 뷔페 식당 가면 많은 음식이 있잖아요.  
취향대로 드실 수 있잖아요. 그것처럼 목회자들은 누구냐? 
만약에 여러분들이 저한테, 배울만한 긍정적인 부분이 있다고 한다면, 설교를 통해서요. 
저한테는 그걸 잘 배우시면 되겠죠. 

또 찬양과 관계되는 부분은, 저는 찬양 잘 몰라요. 
여러분들이 찬양에 은사있는 목사님께 배우시면 됩니다.

모든 삶의 영역에서 교회에게 주신 이 영적인 자산들을, 
추종의 대상이 아니라, 비교의 대상이 아니라, 자랑의 대상이 아니라, 
성도들이 마음껏 활용해서,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만들도록 그들을 사용해야 될 대상들이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