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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바스의 두 번째 공박에 대한 욥의 응답 I 욥16:1~17:5 2006-10-23
"너희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여"
엘리바스를 비롯한 세 친구들은 이중적인 모습을 가집니다.
처음에 그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욥을 위로하려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적대자로 바뀌어져갔습니다.
더 이상 욥을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욥을 심문하고 정죄하는 심판자가 되어 갔습니다.
지금까지의 대화만 종합해봐도, ‘고난은 죄의 결과로서 온다’는 원리가
이들에게 하나의 도그마(교리)로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기에, 죄없는 사람이 고난당하도록 방치하실 수 없습니다.
욥이 오늘 재앙을 당하는 것은, 반드시 어제 욥이 지은 죄의 결과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을 욥에게 줄기차게 알리고 가르치려고 한다는 사실에서
이들은 예언자들이나, 파수꾼들과도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아,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하는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하여라"(겔3:17).
친구들은 욥으로 하여금 죄지어서 이 고통을 당한다는 사실을 빨리 깨닫고
회개하도록 만들어서, 예전의 경건자, 행복자로 되돌아가도록 외쳐야 하는
파수꾼의 사명을 자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예언자적이요 파수꾼적인 사명을 수행하다보니
이들은 어느새 위로자의 모습은 잃어버리고, 심문자와 심판자의 모습으로 탈바꿈해갔습니다.
욥이 더욱 더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이들이 하나님의 공의와 지혜를 변호한다는 명목으로
하나님의 대변자로 자처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엘리바스의 두 번째 발언에 대한 욥의 응답은, 자신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주제 넘는 책망과 훈계로 일관하는 친구들에 대한 저항입니다.
◑1.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 16:1-6
3장 이후부터 전개되어온 담화를 살펴보면
욥의 응답은 친구들에게 먼저 말한 뒤, 하나님께 호소하는 식으로 끝을 맺어왔습니다.
(6:7-21, 10:2-22, 13:20-14:22)
그런데 16-17장에 나타난 엘리바스의 두 번째 발언에 대한 욥의 응답은 조금 다릅니다.
친구들에 대하여 간간이 언급하는 가운데, 독백으로 결론을 맺기 전(17:11-16),
주로 하나님께 간략히 말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욥은 친구들이 자신을 위로하기는커녕, 공모자가 되어서 자기의 고통을 가중시킨다고
생각합니다. 16:2-3절을 보세요.
"그런 말은 전부터 많이 들었다. 나를 위로한다고 하지만,
오히려 너희는 하나같이 나를 괴롭힐 뿐이다.
너희는 이런 헛된 소리를 끝도 없이 계속할 테냐?
무엇에 홀려서, 그렇게 말끝마다 나를 괴롭히느냐?"
욥이 죄를 지어서 이 고난을 당하니 빨리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라는 친구들의 말이
견딜 수 없다는 말이지요. 이들은 개역 성경에서는 '번뇌케 하는 안위자들,'
개역 개정판에서는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 이런 말을 'oxymoron,' 즉 모순어법이라고 합니다.
서로 정반대 되는 단어를 결합시켜 삶의 부조리를 통렬하게 지적하는 언어형식이지요.
예컨대 '침묵의 소리,' '깨끗한 혼란,' '지독한 친절,' '창조적 파괴,' '똑똑한 바보,'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노년의 뉴턴이 어느 날 난로 앞에 앉아있었는데, 불이 너무 뜨거워
하인을 불러 벌겋게 단 석탄을 꺼내도록 했습니다.
이 때 하인 왈, "석탄을 꺼내는 대신 왜 의자를 난로에서 조금만 옮겨 떨어져 않지
않으십니까?" 라고 물었답니다.
또 뉴턴은 크고 작은 고양이 두 마리를 길렀는데, 서재에 들어오려고 서로 다투는 모양을
보고서는, 자기 딴에 기발한 아이디어를 하나 냈습니다.
문짝에 큰 놈을 위해서는 큰 구멍을, 작은 놈을 위해서는 작은 구멍을 각각 뚫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상식으로 볼 때, 큰 고양이가 큰 구멍으로만,
작은 고양이가 작은 구멍으로만 들어온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이 경우 뉴턴을 '우둔한 천재'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요?
이렇게 모순어법은 대립적인 사실이나 상반된 생각을
상호 모순되게 표현함으로서, 아이러니컬한 상황을 날카롭게 드러내는 언어표현법입니다.
친구들은 욥을 위로한다고 갖가지 말을 쏟아 놓는데
실상은 다 재난만 안겨주는 말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지요.
입에 발린 말로 욥의 아픈 마음을 더욱 후벼팠던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16:6절 말씀은 욥의 참담한 처지를 유감 없이 드러냅니다.
"내가 아무리 말을 해도, 이 고통 줄어들지 않습니다.
입을 다물어 보아도 이 아픔이 떠나가지 않습니다."
아, 얼마나 재치 있는 표현인지요!
우리가 극심한 고통을 당할 때 고함을 질러봐도 입을 꼭 다물고
깊은 침묵 속에 잠겨 들어가도 아픔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웃어봐도 울어봐도 소리쳐봐도 입을 꾹 다물어봐도
비수처럼 가슴을 도려내는 아픔은 영영 사라지지 않습니다.
겪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아픔이지요.
◑2. 하늘에 계신 증인 16:7-17:5
이 부분에서 욥은 하나님을 ‘자기를 인정 사정없이 다루시는 원수’라고 묘사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욥은 친구들이 이 처절한 고통에 대해 증언해주기를 바랍니다.
8-10절을 보세요. "주님께서 나를 체포하시고, 주님께서 내 적이 되셨습니다.
내게 있는 것이라고는, 피골이 상접한 앙상한 모습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나를 치신 증거입니다.
사람들은 피골이 상접한 내 모습을 보고, 내가 지은 죄로 내가 벌을 받았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내게 분노하시고, 나를 미워하시며, 내게 이를 가시며, 내 원수가 되셔서,
살기 찬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시니, 사람들도 나를 경멸하는구나.
욕하며, 뺨을 치는구나. 모두 한패가 되어 내게 달려드는구나." *새번역
(*경어체는 하나님께, 일반체는 독백)
16:12-14절을 보면 군사적인 용어까지 동원해가면서
하나님이 욥을 얼마나 가혹하게 공격하시는 지에 대해서 말합니다.
욥을 과녁 삼아 사방에서 화살을 날리시며 욥을 갈기갈기 찢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하나님의 집중포화 한 가운데에서도
욥은 여전히 자신의 결백을 확신합니다. "그러나 나는 폭행을 저지른 일이 없으며
내 기도는 언제나 진실하였다"(16:17).
아무 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제 욥은 6:18-22절에서, 친구들이 욥이 지금 당하고 있는 이 부당한 고통을
하나님께 증언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욥이 하나님을 상대로 무죄 소송을 벌일 때, 친구들이,
자기가 지금 아무 잘못한 것이 없이, 견디기 어렵고 부조리한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이 엄연한 사실을 양심껏 증언해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 본 것처럼 친구들은 욥의 기대를 저버리고
거꾸로 욥이 지은 죄에 응당한 벌을 받고 있다고 코너로 몹니다.
그리하여 욥은 땅이 이 억울한 고통을 숨기지 말아달라고, 정의를 찾는 자신의 부르짖음이
허공에 산산조각 흩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절규합니다(16:22).
20절에 보면 친구들이 자기를 조롱하니 욥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아무도 욥의 억울한 고통에 귀기울이지 않으니
욥이 호소할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19절과 21절을 보세요. "하늘에 내 증인이 계시고, 높은 곳에 내 변호인이 계신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변호하듯이, 그가 하나님께 내 사정을 아뢴다."
여기서 욥은 하나님이 자기를 부당하게 핍박하시는 원수같은 하나님인 동시에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를 변호해주실 분이라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욥에게 하나님은 원수인 동시에 자신의 무죄함을 옹호해주시는 벗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읽을수록 예수 그리스도를 연상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중보자가 되셔서 우리의 억울한 사정을 하나님께 증언하고 변호해주십니다.
욥도 지상에서 자기의 무죄를 입증해주고 결백을 변호해 줄 증인을 찾지만
조롱만 돌아올 뿐 찾을 수 없습니다.
결국 17:3의 말씀처럼 욥은 ‘자신의 보증이 되실 분은 주님 한 분밖에 없다’고 확신합니다.
이와 같이 결국 주님께 되돌아 갈 수밖에 없는 것은
주님께서 친구들의 마음을 마비시키셔서
다시는 욥에게 우쭐대지 못하게 해달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런데 17:5절에 흥미로운 격언이 하나 소개되어 있습니다.
"옛 격언에도 이르기를 돈에 눈이 멀어 친구를 버리면, 자식이 눈이 먼다 하였다."
보증은 경제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손해 보지 않도록 함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친구들이 욥의 무고한 고난에 대해서 보증 서기를 꺼려하는 이유도
혹시 부주의하게 끼어 들었다가는 낭패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지요.
친구들이 마치 돈에 눈이 멀어 친구를 버리는 사람들처럼 손해 보지 않으려고
욥의 무죄함을 증언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보증 삼게 될 때 친구들의 이기적이고 약삭빠른 처신,
즉 손해 보지 않기 위하여 욥의 보증이 되지 않으려는 행위는
그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3. 본문 말씀이 주는 교훈
이 말씀을 읽으면서 '재난을 주는 위로자'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이 말은 욥이 친구들이 '돌팔이 의사들'(13:4)과 마찬가지라고 힐난한 말과도 연결됩니다.
우리는 이웃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이 말 저 말 내뱉다가
실제로는 더 큰 고통을 가중시키는 일은 없는지요.
어설픈 지식과 쓸데없는 우월감으로 고통 당하는 이웃을 심문하고 정죄한 적은 없는지요.
그저 겸손히 상대방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알고 따뜻하게 품어주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것은 다시 지식과 실천, 이론과 경험의 문제로 넘어갑니다.
비슷한 경험을 당해본 사람만이 상대방의 아픔을 조금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이 당하는 고통의 실제적 경험이 아닌 인과율이라는 낡은 도그마,
이데올로기의 입장에서 말을 걸기 때문에 욥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욥이 그토록 목말라 찾는 증인, 변호자는 어디 있을까요?
오늘 우리의 억울한 사정을 있는 그대로 대변해 줄 증인, 변호자는 또 어디 있을까요?
예수님이 바로 그 증인이요, 변호자이십니다.
예수님도 아무 죄도 없이 부당한 고통을 당하실 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절규했지만,
결국 그 하나님이 당신의 무죄성을 변호해주심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므로 욥과 같이 부조리한 고통을 직접 겪으신 우리 주 예수님이시기에
우리가 억울한 일을 만나 하염없는 눈물을 뿌릴 때 홀로 임마누엘 되셔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중재자가 되셔서 우리를 변호해주십니다.
지옥은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이라고 했습니다.
또 사르뜨르는 지옥이 "서로 싫은 사람이 함께 있어야 할 곳"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모시고 서로 사랑하는 사람끼리 함께 있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지 천국이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여러분의 시간과 공간을 천국으로 만들어 보시지 않으렵니까?
♣진실한 위로를 통해 58세에 거듭난 여의사 이야기 (강추)
https://rfcdrfcd.tistory.com/15972456
◑욥기 16장 절별 해석
욥16: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엘리바스의 변론에 대하여 두 번째로 변론하는 장면이다(6:1).
욥16:2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로구나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 이는 악인이 하나님의 징계를 면할 수 없다고 하는 식의
교조적인 교훈에 대해서는 욥 또한 익히 들어 아는 바라는 뜻이다.
이미 욥은 그의 친구들이 그를 악하다 단정하고 비판 및 책망하는 변론을 여러 차례
들은 바 있다(4, 5, 8, 11절, 15장).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구나 – 과거 개역엔 ‘번뇌케 하는 안위자로구나’
친구들이 욥을 비판하고 정죄하기 위해서 사용한 위로의 말을 가지고
오히려 욥 자신이 그의 친구들에게 역으로 (재난을 주는) ‘위로자’라고 말함으로써,
욥은 그의 친구들이야말로 욥의 어려운 처지를 고려해 주기는커녕
도리어 해를 끼치는 악인들이라고 공박하고 있는 것이다.
욥16:3 헛된 말이 어찌 끝이 있으랴 네가 무엇에 자극을 받아 이같이 대답하는가
헛된 말이 어찌 끝이 있으랴 - '헛된'의 히브리어 '루아흐'는 '바람'을 뜻한다.
이는 그의 친구 엘리바스가 욥에 대해 '헛된(바람) 지식'을 갖고,
'동풍'으로 그 품에 채운 자로 비판한 것에 대하여(15:2)
욥이 오히려 역으로 엘리바스를 비판하는 말이다.
네가 무엇에 자극을 받아 이같이 대답하는가 - 욥의 친구들이 처음에 찾아왔을 때는
욥을 조문(弔問)하고 위로해 주기 위해서였다(2:11).
그러나 이들이 정작 입을 열었을 때에는 위로와 동정의 말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의 경험, 전통, 정통 주의를 근거로 욥을 책망하거나 정죄하기에 급급하였다.
따라서 욥은, 그들이 돌이키고 잠잠하기를 원하였는데(6:29 13:5, 13),
본문 또한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욥16:4 나도 너희처럼 말할 수 있나니 가령 너희 마음이 내 마음 자리에 있다 하자 나도 그럴 듯한 말로 너희를 치며 너희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 수 있느니라
나도 너희처럼 말할 수 있나니...흔들 수 있느니라 -
앞에서 엘리바스는 자신이 욥의 처지에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를 말한 바 있다(5:8).
그러나 그것은 욥의 고난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에 불과하였다.
반면에 여기서는 역으로 욥이 친구들과 뒤바뀐 입장을 가정하고 있다.
즉, 그럴 경우 욥 자신도 그들 못지않게 적당한 미사여구나 정연한 논리를 동원시켜
그들을 공박해줄 수 있지만, 적어도 자신은 위로와 동정을 잃지 않겠다는 것이다(5절).
한편 ‘머리를 흔든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의 행동에 대해서 정죄하며 조롱, 조소하는
것을 암시적으로 나타내는 외적 표현으로 본다(왕하19:21, 시22:7, 사37:22, 렘18:16, 애2:15, 마27:39).
욥16:5 그래도 입으로 너희를 강하게 하며 입술의 위로로 너희의 근심을 풀었으리라
이것은 현재 고난당하는 욥 자신에게 그의 친구들이 얼마나 매정하게 굴었는가를
역설적으로 나타낸 말이다. 한편 본문은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는 말씀을 생각케 한다.
욥16:6 내가 말하여도 내 근심이 풀리지 아니하고 잠잠하여도 내 아픔이 줄어들지 않으리라
여기서 욥은 말을 하든지 안 하든지 자신에게 닥친 고통은 여전히 존속되고 있음을 고백한다.
이는 곧 앞으로 전개되는 내용이 하나님을 향한 절망 섞인 탄식조라는 사실과 조화를 이룬다.
즉, 당시 욥으로서는 친구들과 변론을 주고받기보다는
차라리 독백조의 탄식을 하는 편이 한결 낫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욥16:7 이제 주께서 나를 피로하게 하시고 나의 온 집안을 패망하게 하셨나이다
주께서 나를 피로하게 하시고 - 이제 욥은 친구들에 대한 반박을 멈추고
그의 내밀(內密)한 고통을 독백 형식으로 토로한다.
이는 곧 욥이 그나마 호소할 데라고는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고 생각하였음을 시사한다.
나의 온 집안을 패망하게 하셨나이다 - '무리'(에다)란 문자 그대로 '군중', '회중' 등을 뜻하며
본문에서는 욥의 가까운 친족 특히 가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패망하게 하셨나이다'란 문자적으로 '황폐케 하다'를 뜻한다.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께서 욥의 가족들을 치사 멸망케 하셨다는 뜻을 암시한다 하겠다.
욥16:8 주께서 나를 시들게 하셨으니 이는 나를 향하여 증거를 삼으심이라 나의 파리한 모습이 일어나서 대면하여 내 앞에서 증언하리이다
주께서 나를 시들게 하셨으니 - '시들게 하셨으니'(카마트)는 '뜯다', '주름 살지다',
'일그러지다' 등의 뜻이 있다. 영역본 KJV나 드라이버(Driver), 그레이(Gray) 같은 학자들도
'주름살지다'의 의미로 본다. 이것은 욥이 질병과 고난을 당함으로 온몸이 일그러진 것을
뜻한다.
이는 나를 향하여... 증언하리이다 - 이것은 욥이, 병들고 고난당하는 것이
그의 범죄에 대한 공정한 징벌임을 시인하는 말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무죄한 자신의 입장을 안타깝게 호소하는 뜻을 드러내는 말이다.
즉 욥 자신은 이런 징계를 받아야 할 만한 범죄를 저지른 적이 없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에게 임한 극한적 재난은 자기 죄악을 증거하는 격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욥은 이제 자신이 친구들에게 결백을 호소해 봐야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고 탄식하고 있다.
욥16:9 그는 진노하사 나를 찢고 적대시 하시며 나를 향하여 이를 갈고 원수가 되어 날카로운 눈초리로 나를 보시고
하나님께 대한 욥의 묘사는, 8절의 2인칭에서 이제는 3인칭으로 바뀌고 있다.
한편 본문에서 욥이 하나님을 무시무시한 대적자로 묘사한 것은
다시 말해서 욥의 고통이 그만큼 극심하였음을 반증한다 하겠다.
'이를 갈고'란 아주 극단적인 원수 관계에 처해 있는 자를 향한 미움, 분노의 표시를 나타낸다
(시35:16, 37:12, 애 2:16).
한편 혹자는 본문의 후반부 '대적이 되어 날카로운 눈초리로 나를 보시고'를
10절 초반부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고,
여기에서 '대적'이란 하나님을 가리키지 않고 오히려 욥의 불행을 기뻐했던 사람들을 뜻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러한 견해는 대부분의 영역본들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KJV, mine enemy sharpeneth his eyes upon me
NIV, my opponent fastens on me his piercing eyes
RSV, my adversary sharpens his eyes against me
욥16:10 무리들은 나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며 나를 모욕하여 뺨을 치며 함께 모여 나를 대적하는구나
이는 욥이 육신의 고통은 물론이고 여기다 모든 친지들로 부터 버림과 모욕을 당하는
사면초가와도 같은 처지를 한탄하는 말이다.
여기서 '무리들'이란 고난당하는 욥을 멸시했던 일반 대중이나 친지를 가리키며
더 직접적으로는 본서에 나오는 세 친구들을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겠다.
그리고 '입을 벌리며'란 일종의 모욕 또는 조롱의 행위를 암시하며(시 22:13).
'뺨을 치며'란 모독하며 적대적인 행위를 취하는 것을 뜻한다(애 3:30 미 5:1 요 18:22 19:3).
한편 본문의 이와 같은 상황은 시22:12-18의 다윗의 상황을 연상케 한다.
욥16:11 하나님이 나를 악인에게 넘기시며 행악자의 손에 던지셨구나
본문의 '악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윌'은
그 해석상 다음과 같이 두 가지 견해로 나뉜다.
1) '울'(젖을 먹이다', '젖먹이')에서 유래된 말로 '어린이', '소년'을 뜻한다는 견해.
2) '아왈'('왜곡하다', '불의하다')에서 유래된 말로 '불의한 자'를 뜻한다는 견해.
이중, 본절 후반절에서 '행악자'가 언급된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1)의 견해가 더 무난하다.
즉, 욥은 자신이 어린아이처럼 철없고 무지한 자들에게 조차 경멸거리가 되고 말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본문에서 유의할 사항은 욥이 자신에게 닥친 고난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인식하였다는 점이다.
즉, 욥은 비록 그 고난의 원인이 무엇인지 자세히 알지 못해 고뇌하기는 했지만
궁극적으로 만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시라는 생각은 떨쳐버릴 수 없었다(6:4 10:2-11 13:23-28).
욥16:12 내가 평안하더니 그가 나를 꺾으시며 내 목을 잡아 나를 부숴뜨리시며 나를 세워 과녁을 삼으시고
마치 철천지 원수가 자신을 공격하여 철저히 때려부수는 듯한 신랄한 표현을 통해,
욥은 참기 어려운 고난에 직면한 자의 참담한 심경을 생생하게 나타내고 있다(10:2-11 13:23-28).
특히 여기서 욥은 한때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평안하게 되었음을 토로함으로써,
행복했던 지난날에 대한 그리움을 암시하고 있기도 하다(1:13-2:10).
한편 '꺾으시며'(파라르)란 '분쇄하다', '산산이 부수다'는 뜻이다.
욥16:13 그의 화살들이 사방에서 날아와 사정없이 나를 쏨으로 그는 내 콩팥들을 꿰뚫고 그는 내 쓸개가 땅에 흘러나오게 하시는구나
12절에 이어 본절에서도 욥은 섬뜩할 정도의 표현을 통해 자기 곤경을 적나라하게 토로한다.
한편 하나님의 징벌을 화살에 빗대어 표현한 것은,
엘리바스의 첫 번째 변론에 대한 반론에도 나온다(6:4).
성경에서 '살'을 쏘는 것은 대개 하나님의 징계의 표현으로서 진노하시고 징벌을 내리심을
암시한다(신 32:23 시 18:14).
한편 '허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킬야'는 '신장 kidney'을 가리킨다. (NIV, RSV)
그런데 이를 사람의 사고와 감정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마음'으로 번역한 곳도 있다(잠 7:23).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께서 욥의 중심을 화살로 꿰뚫었다는 뜻으로서
그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셨음을 의미한다.
욥16:14 그가 나를 치고 다시 치며 용사 같이 내게 달려드시니
여기서 '치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12절의 '꿰뚫고'(파라르)와는 달리
'파라츠'로서 큰 돌로 성벽을 파괴하여 커다란 구멍을 뚫거나 허물어 뜨린다는 의미인
'부숴뜨리다', '파괴하다'의 뜻을 갖는다.
이것은 '용사같이'라는 표현과 더불어 13절과 연관된 이미지를 제공하는 바, 성벽을 파괴하고
그 안으로 달려드는 용사같이 하나님이 욥을 징계하시고 패망케 하신다는 말이다.
욥16:15 내가 굵은 베를 꿰매어 내 피부에 덮고 내 뿔을 티끌에 더럽혔구나
일반적으로 '굵은 베'를 입는다는 것은 비참하고 낮아진 처지를 애도하며 나타내는 외형적인
표현이다(왕하 6:30, 시35:13, 사3:24, 단 9:3, 마11:21).
내 뿔을 티끌에 더럽혔구나 - '뿔'이 일반적으로 '힘', '권능', '능력'등을 상징하는 바(시 75:5,
10 89:17 92:10 148:14 렘 48:25), 본문의 의미는 욥이 극도의 재난에 직면함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사회적인 힘, 명성, 권능 등이 온전히 실족되고 상실되고 말았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혹자는 이 표현을 마치 상처받은 황소가 그 뿔을 흙 속에 파묻으려 하는 것에
빗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욥16:16 내 얼굴은 울음으로 붉었고 내 눈꺼풀에는 죽음의 그늘이 있구나
내 얼굴은 울음으로 붉었고 - 이 울음은 너무도 큰 고통 때문에 욥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며 통탄한 것을 연상케도 하며(3:2-26), 또한 극심한 환난 가운데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으로도 볼 수 있다(왕하 20:1-7 시 56:8 사 22:12).
내 눈꺼풀에는 죽음의 그늘이 있구나 - 혹자는 '죽음의 그늘'이 단지 병든 환자의 눈 주위에
어린 음울한 기색을 뜻하는 것으로 본다. 영역본들도 이를 '깊은 그늘'(NIV, deep shadows),
'깊은 어두움'(RSV, deep darkness) 등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문자 그대로 이해하여 죽음의 전조로서 눈 주위에 드리우는
'어두운 그늘'로 보는 것이 더 무난하다.
욥16:17 그러나 내 손에는 포학이 없고 나의 기도는 정결하니라
그러나 내 손에는 포학이 없고...정결하니라 - 이는 욥이 현재 고난과 징계를 받고 있지마는
여전히 무죄하다고 주장하고 있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욥 자신이 고난받는 것은
그의 친구들의 비난처럼 자신의 특정한 범죄 때문이 아니라
영문 모를 하나님의 징계 의지로 말미암은 것일 뿐이라는 뜻이다.
아울러 본문은 무죄한 자신이 징계를 받고 있는 이유를
하나님께 진지하고도 열렬하게 아뢰는 말이기도 하다(7:11-21 10:2-22 13:20-28 14장).
욥16:18 땅아 내 피를 가리지 말라 나의 부르짖음이 쉴 자리를 잡지 못하게 하라
땅아 내피를 가리우지 말라 - 욥은 그의 피가 자신의 무죄성을 증명하고 보증할 수 있도록
땅으로 하여금 덮지 말도록 호소하고 있다. 이와 같은 하소연은 창 4장에서 불의한 가인이
의로운 아벨을 죽였을 때 그 아벨의 피가 땅에서 하나님께 호소함으로 하나님이 하늘에서
들으시고 그 피에 대한 보복으로서 가인을 심판 하신 사실과 관련된다(사 26:21 겔 24:8).
나의 부르짖음으로 쉴 곳이 없게 되기를 원하노라 -
고난당하는 욥의 흘린 피가 그의 무죄성을 증명하고 나타낼 수 있도록 멈추지 않고
계속 부르짖게 해달라는 호소이다(RSV, let my cry find no resting place).
욥16:19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중보자가 높은 데 계시니라
이것은 19:25에서 언급되는 '구속자'와도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욥은 앞에서 자신의 무죄성을 하나님께 계속 하소연해 왔으며(10:2, 6, 13:20-23),
그의 피로 하여금 무죄한 중에 고난 받는 자신의 억울한 사연을 증명할 수 있게 해달라고
호소한 바 있다.
따라서 본절 또한 이러한 생각의 연장선상에서 하나님 앞에 판단받기를 원하는 내용이다.
특히 이는 욥이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공정하심 등을 믿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욥16:20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고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니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고 - '조롱하나'(루츠)는 '조롱하다', '조롱자'라는 뜻 외에 '해석하다',
'해석자'라는 뜻도 지닌다. 따라서 혹자는 본문을 '그의 해석자는 그의 친구이다’
(his interpreter is his friend)로 번역하기도 한다.
반면에 랑게(Lange)나 델리취 등 많은 학자들은 본문을 한글 개역 성경과 같이 해석하며
KJV, RSV 등의 영역 성경들도 이를 지지한다. 그리고 성경 내에서도 이 말이
시 119:51에서는 '조롱하다'의 의미로, 33:23 창 42:23 등에서는 '해석자'의 의미로 쓰여졌다.
그러나 어떤 해석을 따르든 지간에 본문이 전달하고자 하는 기본 의미는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는다. 즉, 이를 '해석자'로 번역할 경우 본문의 뜻은 욥의 친구들과는 달리 하나님께서는
욥의 참되신 해석자(변호사)로서 욥의 무죄성을 드러내고
욥의 사정을 밝혀주시리라는 기대를 암시한다 하겠다(본절 후반절 참조).
욥16:21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와 인자와 그 이웃 사이에 중재하시기를 원하노니
본문의 '사이에와'의 '와'에 대해서 수리아역, 벌게이트, 탈굼역, 히브리 본문 등에서는
개역 성경과 마찬가지로 '그리고'(and)로 번역하나
KJV, NIV, RSV등의 일반 영역본들은 '...처럼', '...과 같이'로 번역한다.
이들 영역본대로 해석할 경우에는(NIV, onbehalf of a man he peads with God as a man
pleads for his friend) 욥이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열망하고 있다는 측면이 강조되고,
개역 성경에서처럼 번역할 경우에는 친구들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마저 깨어져버린 듯한
욥의 절박한 위기 의식이 강조되어진다.
어쨌든 본문은 19, 20절과 계속 연관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욥의 증인, 증거자로서
그의 무죄성과 온전함을 증명해 달라고 하는 또는 증명해 줄 것이라는 염원과 확신이 깃든
말이라 하겠다. 본문의 '변백하시기를'(야카흐)이란 '올바르게 잡아주다', '논증하다', '변론하다'의 뜻이다.
욥16:22 수년이 지나면 나는 돌아오지 못 할 길로 갈 것임이니라
원문에 의하면 본문의 서두에는 '키'('왜냐하면' RSV, For)가 있다.
즉 여기서 욥은, 얼마 안 있으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음부의 길로 가므로 (7:9)
그 전에, 즉 그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의 무죄성과 깨끗함을
변론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한편, 역설적으로 이해할 경우에는 욥이 이 세상에서 공정한 판결을 받기를 포기하고
내세에 가서야 비로소 모든 문제를 해결받게 되리라고 기대했다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