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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17장 내가 엘리야다

LNCK 2026. 3. 1. 17:00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고독, 독대>     <청년, 젊은이>

https://blog. naver. com/karamos/220118256610

 

◈내가 엘리야다!                   왕상17:1~16 

 

여러분 중에 일본이란 나라를 좋아하는 분은 별로 없을 겁니다.

저 역시도 마찬가지인데 특히 독일이란 나라를 자주 접하는 이 나라에서는

더더욱 일본이란 나라가 좋지 않게 대비됩니다.

 

요즘도 독일 방송들은 자기들이 저지른 만행을 고백하듯이

자주 2차대전과 히틀러의 얘기를 방영합니다.

다시는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참회와 다짐의 마음이겠지요.

 

그러나 같은 당사국이었던 일본은 참회하기는커녕 정당화시키기 바쁜 모습인 겁니다.

신사참배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고, 보상은 딴 나라 얘기처럼 듣습니다.

이런 대표적인 사례 하나만 보고도 일본이란 나라는 참 좋아하기 어려운 나라입니다.

 

하지만 눈을 기독교계로 돌려보면 사정은 달라집니다.

일본의 기독교인은 전 국민의 2%가 채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소수의 기독교인들은 일당 백이 아니라 일당 만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해 왔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우찌무라 간조 선생이 있습니다.

 

그는 삿보로 농업학교에서 윌리엄 클라크 라는 미국 스승을 만나게 되고,

그에게 복음을 전해 듣게 됩니다.

스승이 기독교를 전파했다는 이유로 추방당하자 스승의 일을

우찌무라 간조가 대신 맡게 되지요.

 

그는 스승이 마지막으로 했던 강의인, “Boys be ambitios in Christ!”를 들으면서

자기가 할 일이 뭔지 알게 됩니다.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자 반전운동을 폈고,

정부를 향해서 예언 같은 독설을 수없이 퍼 붓습니다.

 

“하나님께서 불벼락을 내릴 것이다”, “천황도 사람인데 나는 사람에게 절하지 않을 것이다”

등등 듣기에도 위험천만한 말들을 서슴지 않았고,

한편으로는 선생이 돼서 전공과 함께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일본이 전쟁을 점점 확대시킬 때에도 그는6평 남짓한 조그만 다다미 방에서

성경을 계속 가르쳐 왔고, 그 가운데 패전 이후 일본 사회를 어떻게 할 거냐에 관한 것을

학생들에게 준비토록 했습니다.

 

(*1970~90년대까지, 그의 저서를 통해서 한국 목회자들도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서재에 그 분의 도서가 없는 집이 없었습니다. 

당시에 외국번역서적들은 읽으면 무슨 말인지 잘 몰랐는데,  *번역실력부족으로

일본어 번역서적은 무슨 말인지 쏙쏙 머리에 들어오니까, 인기가 더 좋았죠.

그래서 우리가 그 분께 빚진 게 많습니다.)              우찌무라 간조의 생애

 

전쟁이 끝나자 그 조그만 방에서 전후 일본을 책임졌던 인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두 명의 수상과 3명의 대학 총장이 나왔고, 우찌무라 간조 자신은 맥아더 장군으로부터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시요”라는 말을 들을 만큼 존경을 받았습니다.

 

우찌무라 간조에 대한 제자들의 추억은 대부분이 비슷한데 이런 거였습니다.

“선생은 단지 가르치고 이야기 했을 뿐인데 그 모든 가르침은 마치 내가 하지 않으면

역사의 영원한 죄인이 될 것 같은 큰 사명감을 불러 일으켰다.

나는 나도 모르게 일어나서 암울한 현실 속으로 깊이 들어가고 있었다”

 

일본의 사가들은, 전후 일본의 재건은 우찌무라 간조를 비롯한 기독교인들에게

힘입은 바가 크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핵심은‘내가 곧 일 맡은 당사자다’라는 자각과‘이 일을 시키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라는 사명감이었던 겁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들과 나눌 말씀도 이런 말씀입니다.

즉 우리는 우리가 할 일을 너무 소시민적이고, 작은 규모로 축소시키려고 한다는 겁니다.

기도 응답이 자기일 것이라는 것은 생각도 안 하고,

자신은 그저 ‘돕는 자’로서만 계속 있으려고 합니다.

일견 겸손해 보이지만 속을 드려다 보면, 다 된 밥에 숟가락 하나만 올려놓겠다는

심산인 겁니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결코 자기로서 끝나지 않고 옆으로 전염되거나

후대에도 똑 같은 모양으로 이어집니다.

즉 우리들 자녀들도 그런 성향을 이어받아 주도적이 아니라 질질 끌려 다니는 성향으로

굳어지기 쉽다는 겁니다.

 

그러므로‘이제는 내가 나서야 되지 않을까’를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준비를 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딜레마가 바로 또 여기에 있습니다.

 

현실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고, 내가 해결 당사자라고 자각한다 해도

실제 나설 때는 가깝지 않다는 겁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 가운데 전제해야 될 것은

첫째, 조력자가 아니라 주도자로 설 각오를 해야 한다 하는 것이고

둘째, 그렇게 다짐했어도 그 시간은 이른 시간이 아닐 수 있으므로

충실히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 모두를, 엘리야를 준비시키는 하나님으로부터 배울 수 있을 겁니다.

말씀을 통해 때로는 들러리가 아닌 주인공으로 나서야 될 때가 있음을 깨닫고,

그렇게 쓰임 받도록 결단하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엘리야는 여러분이 다 아시는 대로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얼마나 대단했던지850:1의 싸움에서도 승리한 사람이었습니다

850:1이면 그건 보통 싸움이 아닌데 어쨌든 엘리야는 그런 엄청난 전쟁을 이겼고,

게다가 죽었던 사르밧의 과부 아들을 살리기도 했습니다.

 

또 엘리야는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셨던지 에녹과 더불어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나 역사를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있지요.

하나님은 시대가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엘리야같은 인물을 준비시키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난세에 영웅이 나온다는 말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고,

성경적으로도 별 오류가 없는 말입니다.

 

이제 엘리야가 활동하던 시대를 주목해 보십시다.

그 동안 이스라엘 왕들의 행태를 보면, 한 마디로 왕들은 하나같이 악독한 왕이었고,

시간이 갈수록 그 악의 강도는 점점 더해지다가, 아합왕 때 와서는 최고 정점에 이릅니다.

 

왕상16:30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33 “그 이전의 이스라엘의 모든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 그랬습니다.

 

왕들 가운데 가장 악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했던 바로 그 시대에

엘리야는 어둠 속의 불꽃처럼 화려하게 등장했던 겁니다.

 

아합 왕 때보다 더하면 더했지 조금도 덜하지 않은 시대가 바로 지금인 겁니다.

이럴 때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어때야 하겠습니까?

말씀 드린 대로 시대가 악하면 악할수록 하나님은 분명히 엘리야 같은 사람을

준비시키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 사실은 성경 곳곳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활동하던 시대를 보면, 말씀이 희귀해서

모두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던 무법 천지였습니다.

그럴 때 사무엘 선지자가 일어나서 위대한 이스라엘 왕국의 문을 열었지요.

 

모세도400년 이상이나 노역에 신음하던 암울한 시대에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희망을 잃은 채 세월 따라 시간 따라 자기들을 내동댕이쳤던 게 이스라엘 백성의 삶이었는데

바로 그때 모세가 일어나서 출애굽의 대역사를 일으켰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확신하고 있어야 될 게 이겁니다.

주님은 지금도 어디선가 또 다른 엘리야를 기르고 계시다는 겁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 인물이 우리 가정, 우리 교회에서 나오면 안되겠습니까?

그리고 더 구체적으로 그 인물이 바로 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면 안되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외국까지 나와서 공부하고 일하는 게

그저 먹고 살기 위해서만 해서야 되겠습니까?

이 시간, 시대와 민족과 열방 앞에 크게 쓰임 받는 주의 일꾼이 되겠다고 선언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선언은 여러분의 사명을 이뤄줄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1절 이후로 갑자기 흐름이 이상해집니다.

 

엘리야는 오늘 왕상17장에 사전 설명 없이 갑자기 나타나지요.

하지만 분명히 하나님이 준비시킨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런 패역하고 암울한 시대에 내보내실 리가 없습니다.

영화로 치면 밋밋한 흐름을 갑자기 반전시키는 클라이막스에

엘리야를 배치시킨 게 틀림없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지금 있는 곳을 떠나서 그릿 시냇가로 가라는 겁니다.

그래서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음식을 먹고 살라는 거예요.  왕상17:3

지금 이 명령은 영웅 엘리야의 스타일을 완전히 구기는 명령입니다.

 

영웅은 사람이 많은 곳에서야 영웅입니다.

그리 시냇가에는 아무도 사는 사람이 없어요.

더군다나 하찮은 미물인 까마귀한테 음식을 공급받으라니요?

이어서 더더욱 참기 어려운 명령이 떨어지는데,

사르밧이라는 곳에 가서 과부한테 빌어먹으며 살라는 겁니다.  왕상17:9

인간적으로 볼 때 이것보다 견디기 어렵고 굴욕적인 명령은 없습니다.

 

그 불쌍한 과부에게 가서, 정말 아들과 마지막 음식을 해 먹고 죽으려고 하는

소망 없는 과부에게 가서“그거 나 주면 안될까!”구걸하라는 겁니다.

자존심이 조금만 있다면 순종할 수 없는 명령이지요.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왜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이런 이치에도 맞지 않고 상식에도 어긋나는 명령을 내리셨을까요?

때로는 우리에게도 이런 명령이 떨어질 때가 있지요?

준비도 다 됐습니다. 명분으로도 물러날 이유가 없어요

 

그런데도 그 상황과는 완전히 다른 명령을 내리실 때가 있다는 겁니다.

왜일까요?

오늘 우리가 이 면을 집중적으로 조명해 보길 원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깊은 섭리가 들어 있습니다.

 

물론 훈련을 시키시느라 그랬던 건데, 그것이 우리가 흔히 접해왔던 훈련과는

예사롭지 않게 다르다는 겁니다.

 

저 역시 이 부분을 묵상하다 의외의 결론을 얻어내고는 놀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함께 공유하고 여러분과 저, 다같이 또 하나의 엘리야가 되기를

다시 한 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가장 먼저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원하셨던 훈련은 <절제 훈련>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절제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절제입니다.

사실 엘리야의 입장에서는 왕에게 전쟁을 선포하는 것 자체가

보통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상대는 역대 왕 중에서 가장 포악했고

그 뒤에는 왕보다 한 술 더 뜨는 왕비 이세벨이 버티고 있었어요

그런 그들에게 “이제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가 없을 것이다”하고

외친 것은 영적 전쟁을 선포한 겁니다.  17:1

 

기세 좋게 하나님 명령 따라 이렇게 외쳤는데 그 다음 명령은,

선전포고가 전혀 없었던 것처럼 시침 뚝 떼고 그 자리를 떠나라는 겁니다.

 

사실 엘리야에게 더 어려운 것은,

그렇게 기세 등등하다가 맥없이 꼬리를 내리는 일입니다

죽을지언정 허풍쟁이가 되기는 싫은데, 지금 하나님의 명령은 허풍쟁이 소리를 듣더라도

그 자리를 떠나서 그릿 시냇가로 가라시는 거예요.

 

여러분! 이 과정 속에서 우리 하나님이 원하셨던 것은 뭘까요?

그렇게 호언장담하던 사람이 어느 날 조용히 사라지면 어떤 일이 벌어지지요?

온갖 비난과 조롱을 다 받게 됩니다.

세상에 그보다 더 실없는 사람은 없게 됩니다.

 

더욱이 엘리야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왕상19:10절을 통해서 “내가 만군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유별하오니” 고백합니다.

자기는 열심이 특출난, 열심이 유별난 열정의 사람이라는 거예요.

분출하는 열정을 억제할 수 없는 사람이었어요.

 

바로 이점 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하나님은 오히려 그를 절제시킨 겁니다.

뭐냐? 열정의 사람에게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약점이 있지요.

바로 좋은 일에 대한 절제가 안 된다는 겁니다.

선한 일에 대한 절제가 안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큰 일을 위해서 바로 이것을 참는 법을 가르치신 겁니다.

 

여러분 중에 모태신앙인이 많은데요.

그런 분들은 어려서부터‘해서는 안 되는 절제 훈련’은 잘 받아왔을 겁니다.

술 먹지 말아라, 담배 피우지 말아라, 대학 들어가기까지는 이성교제도 하지 말아라,

대학에 가서 이성교제를 하더라도 손목 이상은 잡으면 안 된다 등등

얼마나 금지시키는 게 많은 지 몰랐습니다. 풍토가 그랬습니다.

 

그런데 은혜 받고 성령 받고 열정이 생기면 어떻게 됩니까?

뭔가 일을 해야만 합니다

바로 이런 사람에게 나타나는 약점이 좋은 일, 선한 일에 절제가 안 된다는 겁니다.

 

사실 우리가 이 부분, ‘해도 되는 일을 안 하는 절제훈련’에 대해서는

배울 기회가 거의 없었습니다.

사실 해서는 안 되는 것에 대한 절제는 웬만큼 됩니다.

그런데‘해도 되는 일을 하지 않는 절제’는 결코 쉽지 않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더 크고, 더 넓고, 더 깊은 영성을 위해 이 훈련 받기를 바라시는 겁니다.

사실 지금 각 교회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어요.

명분도 있고, 준비도 웬만큼 되고, 의욕이 있어서 밀어 부치지요.

그러는 사이 성도들이 얼마나 큰 상처를 받는지 모릅니다.

 

아마 그 동안 우리교회에서 제가 추진한 일 중에도 그런 일이 많이 있었을 겁니다.

지난2월 로마에서 있었던 신년성회에서 주강사 유기성 목사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성도 여러분!제발 열심 좀 내지 말아 주세요. 교회 대부분의 문제가 거기서 일어납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그런 말씀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제가 가장 은혜 받았을 때가 고등학생 때였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매일 교회에서 살았습니다.

가서 기도하고 찬양하고 철야하고 교회 청소하고, 사택에 물길어다 놓고. .

별별 일을 다했지요.

 

그런데 그때 청년회 형이‘너 그렇게 교회만 붙어 있으면 공부는 언제 하니?

지금은 공부를 해야 돼. 교회 일이야 평생을 두고 할 거지만 공부는 때가 있는 거란다.

그러니 열심히 공부 해’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당시에는 그 얘기를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런 형을 보고 믿음 없다 그러고 쪼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까 정말 그때 교회 일을 좀 절제하고 공부를 열심히 했었어야 합니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지금보다 훨씬 더 나은 목회를 할 수 있었을 겁니다.

결국은 저 자신에게나 가족에게나 하나님께나 다 불충한 결과가 됐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지금 나가도 엘리야는 아합을 깨뜨릴 수 있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그런 능력을 갖췄습니다.

하지만 오늘 하나님의 요구는 무엇입니까?

 

“그래, 네가 지금 나가도 아합 왕을 무너뜨릴 수 있고850:1의 싸움에서도 이길 수 있단다.

하지만 지금은 절제할 때야. 지금은 기다리면서 네 영혼을 속속들이 영글게 할 때야!

그러니 지금은 참고 있어라. 순종해야 할 때란다!”

 

바로 이겁니다. 여러분께도 분명히 이런 부분이 있을 겁니다.

성숙을 위해 참으시고 절제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해서는 안 될 일에 절제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해도 되는 일에 대한 절제는 더 인내가 필요하고 더 기도가 필요합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이런 절제 훈련을 잘 통과해서

이 시대의 영성 깊은 엘리야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원하셨던 것은 뭐였을까요?

<고독훈련> 이었습니다.

 

17:3절에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그랬습니다.

아무도 없는 적막강산에서 혼자 살라는 거예요.

그 고독한 광야로 가서 그 외로움과 싸워보라는 거지요.

왜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이런 훈련을 원하셨을까요?

 

고독해 봐야 사람 귀한 줄 알고 겸손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훈련 역시 참으로 힘겨운 훈련입니다.

누구보다도 여러분이 이것의 아픔을 잘 알고 있을 거예요.

 

여러분 모두가 현제명 선생이 미국 유학 중에 만든‘고향생각’이란 곡을 아실 겁니다.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

밝은 달만 쳐다보니 외롭기 한이 없다.

내 동무 어디 두고 나 홀로 앉아서

이 일 저 일을 생각하니 눈물만 흐른다.

 

고향 하늘 쳐다보니 별 떨기만 반짝거려

마음 없는 별을 보고 말 전해 무엇하랴.

저 달도 서쪽 산을 다 넘어 가건만

단잠 못 이뤄 애를 쓰니 이 밤을 어찌해.」

 

여러분 어떻습니까? 남의 얘기가 아니지요?

아마 여러분 중에도 달 밤에 이 노래를 부르면서 우신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 혼자라는 외로움, 그 고독의 무게는 참으로 무겁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겨내야만 이곳 생활을 이길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생 전반에 걸쳐 맷집이 생기게 해 주는 거예요.

예수님 조차도 이 과정을 즐기셨습니다.

 

복음서를 읽다 보면 예수님이 인기 절정의 순간에 돌연 사라지는 모습이 여러 번 나옵니다.

요6:15절 끝에 보면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다시, 혼자, 산으로...

 

왜 이렇게 토막 토막 끊어 읽냐 하면 거기에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 전에 어떤 사건이 나오느냐 하면 그 유명한 오병이어 사건입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5000명을 먹이는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셨지요?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사람들이 예수를 붙들어서 억지로 왕을 시키려고 합니다.

일단, 예수님이 왕이 되면 자기들이 굶어죽지는 않겠거든요.

그리고 요술을 부려서 로마군들을 몰아 낼 수 있겠다 생각한 겁니다.

 

그러나 바로 이 때 예수님은 그 열광의 자리 가운데서 산으로 떠나신 겁니다.

그런데 여기 ‘다시’라는 말이 붙어 있습니다.

무슨 의미겠습니까?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겁니다.

 

사람들의 환호를 뒤로 하고 고독에 빠지기 위해

다시 혼자 산으로 가시는 게 늘 있었던 일이라는 거예요.

오늘 이런 모습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본은 뭐겠습니까?

누가 나에게 박수를 보내거든 거기에 취해 나자빠지지 말고

혼자 산으로 가서 기도하라는 겁니다.

 

이 과정 역시 우리가 깊어지기 위해 받아야 되는 필수코스입니다.

특히 시대와 민족과 세계를 가슴에 품은 여러분들은 반드시 극복해야 할 훈련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세요!

세상에서 위대했던 사람들은 대부분이 외로웠습니다. 고독했어요.

 

그런데 그 고독은 성스러움을 향해 나가는 지도자들이 반드시 치러야 할 대가입니다.

여러분!이 시대의 진정한 엘리야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자기를 고독에 빠뜨리십시오.

긴 긴 외로움에 자신을 절게 만드세요.

그래야 수심이 깊어집니다.

 

왕따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사람들은 외로움을 이기려고 온갖 방법을 다 쓰지만 하나님의 사람으로

훈련 받는 여러분은 그러시지 말라는 겁니다.

 

엘리야는3년간이나 혼자 그릿 시냇가에서 지냈습니다.

사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 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엘리야인들 그 시간이 달가왔겠습니까?

그러나 필요하기 때문에 그런 시간을 견딘 겁니다.

 

이것을 극복하지 않고는 쓰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를 고독으로 집어 던진 겁니다.

여러분도 예수님처럼, 엘리야처럼 박수칠 때 떠나는 법을 배우십시오!

단순히 떠나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 자리를 떠나서 교만하지 않도록, 자기를 다시 고독에 빠뜨리고 기도하라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다시 단독자로 서서, 겸손의 자리에 서기까지

스스로를 고독에 빠뜨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 <고독, 독대>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시대를 안고 가는 진정한 엘리야가 될 겁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외로운 생활과 고독을 즐길 줄 아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우리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 번째 훈련은 가장 중요한 훈련입니다.

앞의 두 가지 훈련을 아무리 잘 통과했어도 이 마지막 코스를 통과하지 못하면

우리는 엘리야가 될 수 없습니다.

뭐냐? <하나님만 의식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훈련>입니다.

 

말씀 드린 대로 그릿 시냇가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니다.

그리고 사르밧은 이방 땅입니다.

누가 자기를 상대해 주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엘리야를 훈련시키시려고 그런 환경으로 몰아넣으신 거예요.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또한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섰을 때

그 때가 바로 그 사람의 진면목입니다.

 

엘리야는 그 고독한 가운데 하나님 한 분만을 의식하고 의지하는 훈련이 필요했던 겁니다.

엘리야가 그랬다면 그것은 우리에게도 필수코스인 것입니다.

 

한 번 구약을 유심히 보십시오.

성경이 구약의 왕들을 평가하는 잣대는 딱 두 가지입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였더라’,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공통분모가 뭡니까?

‘여호와 보시기에’ 입니다.

 

사람이 보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겁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데서의 그 사람이 진짜 그 사람이라는 거예요.

사실 겉으로 보여지는 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보여지지 않는 내 내면의 모습이 백 배 천 배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 앞에 보여지는 내가 다라는 얘깁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강하게 의식하는 모습에 다름아닌 겁니다.

여러분 중에 하나님이 돌아가신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느끼느냐 질문하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을 의식하고 두려워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지금 내 일거수 일투족을 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지금 엘리야는 하나님이 보내신 땅에서, 의지할 분이라고는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는 것을

철저하게 배우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이미 훈련 받아 왔었습니다.

그러니까 아합 왕 앞에서도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17:1

하고 큰 소리를 칠 수 있었던 겁니다. 

 

소리칠 수 있는 근거가 어디에 있었다구요?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받은 훈련을 왜 또 받게 하시지요?

의식하고 의지하고 도움을 청하고 바랄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는 사실을 뼈에 새기라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 속에 갇힌 하나님, 설화 속의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라는 겁니다.

이 훈련은 하루 아침에, 일회적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조금만 긴장을 풀어도 물에 새긴 듯 떠내려 갑니다.

끊임없이 의식해야 하고, 의도적으로 주입해야 하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릿 시냇가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요, 내가 의지할 하나님이요,

살아계신 하나님이 되는 겁니다.

 

존 서덜랜드 일화  중략     주1) 

 

여러분!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지금도 우주를 돌리시고 내 삶을 운행하십니다.

이 하나님을 의식하고 의지하고 믿는 훈련이 꼭 필요합니다.

이 과정까지 마쳤을 때 비로소 엘리야는 갈멜산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이 훈련을 통과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도우실 겁니다. 매사에 주님을 의지하십시오.

여러분이 죄를 저지를 상황이 될 때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식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손을 거둘 것이고 발걸음을 돌릴 것이고 입을 닫을 것입니다.

이런 훈련을 잘 통과해서 시대가 필요로 하는 위대한 주의 일꾼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마치면서 저는 한 가지 간절한 소망이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그 위대한 엘리야들이 우리 교회에서 나와주길 바라는 겁니다.

우리의 형제, 우리의 자매들 가운데 그런 인물들이 배출되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겁니다.

 

제가 왜 다시 이 부분을 강조하냐 하면,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면서 늘 안타까운 것은 이런 설교를 듣는

열에 여덟 아홉의 부모들, 또는 우리 형제 자매들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두들 자기의 현재 위치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꼴이 이 모양인데, 하찮은 아줌마일 뿐인데, 내 실력이 지금 요 모양인데,

내 출신 학교가 별 볼일 없는데, 내 재능이 요만큼 밖에 안 되는데,

우리 부모의 지원은‘뻔할 뻔’자인데…이렇게 스스로 장애물을 구축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우리의 주인공인 엘리야는 어떤 사람인줄 아십니까?

히브리 사람들은 자기들을 소개할 때 제일 먼저 자기 가문을 소개합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그런 게 전혀 없습니다.

다만 길르앗 지역의 디셉에 사는 사람이라고만 나와 있습니다.

 

어디서 태어났는지, 어디서 자랐는지, 과거에 뭘 하면서 살았는지,

공부를 어디까지 했는지, 적통으로 태어났는지, 사생아인지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근본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런 그를 들어 쓰셨습니다.

 

여러분! 분명히 아십시오!

하나님은 우리 겉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으십니다.

오직 당신이 마련하신 훈련과정을 통과하느냐 못하느냐 거기에만 관심이 있으십니다.

엘리야는 잘 나고 실력 있고 재능있어 보이는‘옆 사람’이 아닙니다.

모든 훈련을 기꺼이 통과할 ‘내’가 그 주인공입니다.

 

바로 내가 엘리야입니다.

내가 시대를 품고, 민족과 열방을 품고 나갈 엘리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용기를 내세요!일어나세요!

당신이 이 시대의 엘리야입니다!

 

후략    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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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중략된 예화

존 서덜랜드가 헨델의 메시야 중 제45곡 ‘내 주는 살아 계시고’를 런던 심포니와 부르게 됐습니다.

당대 최고의 소프라노답게 완벽한 발성과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테크닉으로 불러냈습니다.

단지 리허설이었는데도 반주를 맡았던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박수를 치고 발을 구르고 난리가 났습니다.

 

지휘자인 콜린 데이비스가 웃으면서 다시 한 번 가자고 했습니다.

서덜랜드는 앵콜의 의미로 기꺼이 다시 한 번 연주를 해 주었습니다.

더 좋았습니다.

단원들의 환호성과 박수에 서덜랜드는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습니다.

 

그런데 데이비스가 다시 한 번 더 가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서덜랜드는 불쾌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데이비스는 오케스트라 지휘를 시작했고 서덜랜드는

다시 보란 듯이 완벽한 테크닉으로 연주를 마쳤습니다.

최상이었습니다.

 

그제야 데이비스는 웃으면서 말합니다

“최고의 연주였습니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연주였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

그래 놓고는 오케스트라를 향해“한 번만 더 가십시다”그러는 겁니다.

화가 난 서덜랜드가“지휘자님!도대체 왜 그러십니까?뭐가 문제입니까? “묻습니다.

 

그러자 데이비스가 서덜랜드를 향해 조용히 말했습니다.

“지금 당신은‘내 주는 살아계시고 날 위해 비심을’노래했는데 저는 당신의 노래 속에서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느끼질 못했습니다. 정말 당신에게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입니까?”

 

이 대화가 오간 뒤에 죤 서덜랜드는 다시 노래를 불렀지만

너무 울면서 불러서 리허설이 제대로 마쳐지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모두에게 잊을 수 없는 감동적인 리허설로 기억됐다고 합니다.

 


주2) 후략된 부분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온도계 같은 사람이 있고 온도조절기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온도계는 날씨 따라 그저 눈금을 나타낼 뿐이지요.

 

세상이 영하20도로 추워지면 그 눈금으로 내려가고,

영상20도가 되면 그저 그 눈금으로 올라갈 뿐입니다.

온도계 같은 사람은 시류 따라 흘러갈 뿐입니다.

시대의 대세를 따라 눈금을 올리고 내리고 할 뿐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온도조절계는 바깥의 날씨에 전혀 영향 받지 않습니다.

한 번 자기가 영상19도로 만들겠다고 하면 바깥이 아무리 영하20도가 됐든,

또는 영상30도가 됐든 자기 공간을19도로 만듭니다.

외부에 어떠한 날씨에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그 동안 어떤 사람으로 살아 오셨습니까?

온도계였습니까, 온도조절기였습니까?

그리고 앞으로는 어떻게 살고 싶으십니까?

온도계처럼 입니까, 온도조절기처럼 입니까?

 

이 질문을 가지고 이 한 주간 고민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질문의 심연에까지 다다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끝에서 해답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그 모든 질문을 하는 가운데서도 여러분이 결코 잊지 말아야 될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지금 이 순간에도 다른 사람 아닌

바로 내가 엘리야가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엘리야 입니다.

여러분이 시대를 이끌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조국을 품고 민족을 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열방을 책임지고 여러분이 세계를 책임져야 합니다.

저를 따라 해 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곧 엘리야다!” “나는 엘리야다!”

 

그렇습니다! 바로 여러분 하나 하나가 엘리야입니다.

여러분 하나 하나가 어두운 세상에 소금이 되고 빛이 되어서 세상을 바꿀 주인공들입니다.

스스로 과소 평가하지 마시고,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 자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 일을 위해서 절제하며 고독 훈련하며,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며 사는 훈련을 계속해서,

언젠가는 자기 자신이 엘리야로, 또는 자기의 줄기에서 또 하나의 엘리야를 보는,

그런 영광이 있게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