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 슥2:10~11, 시4편, 시16편 2021.01.17. 스가랴12강
◑도입
우리가 2021년에 스가랴서를 함께 살펴보고 있습니다.
총14장인 스가랴서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특히 전반부인 1~6장까지는, 스가랴가 봤던 8개의 환상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주1)
그중에서 오늘 본문 스가랴 2장은 세 번째 환상인데요.
세 번째 환상 내용을 지난 금요일부터 쭉 이어서 살펴보고 있는데,
이 세 번째 환상의 큰 주제는 뭐냐면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상징하고 있는 바는.. 삶의 터전을 상징합니다.
스가랴서는 성전 재건에 대한 책입니다.
그런 뒤에 성전 재건에 대한 커다란 영적인 원리는 뭐냐면,
주의 백성들은 성읍을 짓는 자들이 아니라, 성전을 짓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성전을 먼저 재건하고, 또 하나님께서 머무실 집을 지을 때,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 되는 예루살렘 성은, 하나님이 세워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집을 짓고,
하나님은 우리의 집을 지으시고... 이것이 영적인 원리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성읍’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터전을 상징적으로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먹을 집, 일할 직장, 가정... 하여간 눈에 보이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기 위한
모든 터전들이 ‘성읍’인 거죠.
그래서 우리 각자가, 마음의 성전을 회복하고, 또 하나님의 임재를 회복할 때,
우리의 살아가는 모든 터전(삶의 환경)들은, 하늘로부터 주님께서 다 채워주시고,
제공해 주신다고 하는 것이 스가랴서의 메시지입니다. *마6:33절과 같은 맥락이죠.
▲성경에 보면 두 종류의 성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는 가인이 세운 ‘가인 성’이고,
또 하나는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예루살렘 성’입니다.
그런데 이 ‘가인의 성’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바벨론 (성)’ 이라고 이름하기도 하는데,
본질은 다 같은 성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세운 성인데,
예루살렘 성은, 그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고,
그 바깥에 하나님께서 불성곽으로 보호하시는, 그런 하나님이 중심에 계신 성읍이라면,
바벨론 성의 특징은, 그 중심에 인간, 자기 자신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벨론 성을 세우는 이유는 무엇이냐면,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의 욕심을 이루고자, 두려움으로부터 보호하고 싶어서,
자기의 힘으로 열심히 쌓아가는 성... 그것이 바벨론 성입니다.
반면 주님께서 제공하신 예루살렘 성은 전혀 다르죠.
그것은 그 성(삶의 환경, 생활 터전) 중심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가장 중심에 두고, 또 하나님을 가장 앞에 두고 살아가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 불성곽이 되어주시고, *2:5
필요한 모든 삶의 터전들을 제공해 주시는 그런 성입니다.
그래서 이 바벨론 성은, 결국 그 성에서 살아가는 삶이 ‘사냥꾼의 삶’이라고,
지난 금요일날 말씀드렸습니다. 사냥꾼과 농부 얘기 기억하시죠?
10강 슥2:1~13 가인의 성, 하나님의 성 rfcdrfcd.tistory.com/15982890
11강 슥2:1~13 가인의 성 바벨론과 사냥꾼 니므롯 rfcdrfcd.tistory.com/15983094
‘사냥꾼’이라는 것은, 무엇인가를 스스로 쟁취하는 사람입니다.
끊임없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고, 쟁취하고, 사냥하고,
그러기 위해서 무언가는 희생되는, 사냥당하는...
짐승들이 희생되거나, 아니면 사람들을 정복할 때, 그 피정복민 사람들을 희생시켜가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계속 세워가는... 그런 삶의 터전이 ‘바벨론’이고요.
이 바벨론은 이제 니므롯 으로부터 시작되는데, 그 니므롯은 용감한 사냥꾼이었죠. 창10:9
계속 정복해 나가고 남을 희생시키는 것입니다.
자 그래서 이 바벨론이 ‘사냥꾼의 삶’을 살아가는 거라면,
예루살렘은 하늘로부터 내려옵니다. 그래서 ‘농부의 삶’이라고 했죠.
농부는 하늘로부터 공급하시는 것들을 기대하고, 그것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농부의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바벨론에는 두려움과 욕심이 가득하지만, 반대로 예루살렘엔 평화와 기쁨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전을 재건하고,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갈 때
우리가 삶의 터전을 살게 되는 곳은, 바벨론이 아니라 예루살렘이 되는 것입니다.
코로나로 인하여 기존 질서의 재편이 일어나는 2021년 한 해,
바벨론에 거하는 여러분들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거하는 한 해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님께서 제공하시고 주님께서 세우시는 그 터전에 거하시는 한 해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 중심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전을 재건하는 것입니다.
성전을 재건할 때 그곳에 하나님이 임재하시게 되는데,
‘성전을 재건한다’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머무실 수 있는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임재하실 수 있는 상황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 하나님이 임재하신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임재하신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기를 기뻐하신다는 뜻입니다.
슥2:10~11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와서 네 가운데에 머물 것임이라
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네 가운데에 머물리라
네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네게 보내신 줄 알리라’
오늘 본문 슥2:10~11절의 핵심을 보면, 두 번이나 반복되는 말씀인데
‘내가 와서 네 가운데 머물 것이다’ 라고 말씀하세요. ↑
그래서 예루살렘이 예루살렘 되게 하는 핵심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그 가운데 와서 머무시는 거예요.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내가 네 가운데 와서 머물리라!’ ↑
우리가 예루살렘 성에 살아가게 되고, 하나님 중심으로 삶을 살아가게 될 때
그 핵심에는 뭐가 있냐 하면, 하나님의 임재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 되게 하는..
예루살렘을 예루살렘 되게 하는 가장 핵심은 뭐냐 하면..
우리 가운데 임재하고 거하시는 하나님이세요.
그래서 우리가 바벨론을 삶의 터전으로 하지 않고, 예루살렘을 터전으로 삼는 이유는 뭐냐면
그곳에 하나님이 임재해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이 임재하신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요?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하나님과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거듭난 그리스도 안에는 성령께서 내주하십니다.
그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또 무슨 임재 타령입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죠)
(거기에 대한 답은) 네, 임재는 단순히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신다는 뜻이 아니에요.
임재의 정확한 의미는 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거예요.
우리 안에 성령께서 내주하시고, 하나님이 함께 하셔도,
그 하나님이 여러 가지로 다른 모습일 수 있으세요.
슬퍼하실 수도 있고요. 근심하실 수도 있고요. 후회하실 수도 있고요. 그렇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비록 그리스도인이고, 우리 안에 성령께서 내주하시지만
우리가 반복적으로 죄에 거할 때 어떻게 되겠어요? 성령께서 근심하시겠죠.
또 반복적으로 불순종할 때 어떻게 하시겠어요? 성령께서 슬퍼하시겠죠.
우리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상태... 그것이 임재예요.
그래서 이게 임재의 정확한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기를 기뻐하시는 상태!
그것이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인 되는 핵심인 줄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를 기뻐하실 때,
그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향해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내가 와서 내가 너희 가운데 머물 것이다’ *본문 슥2:10~11
자 그래서 오늘은 세 번째 환상 중에 특별히 2:10~11절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임하실 때, 하나님이 내게 오셔서 거하실 때,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요?
슥2:10~13절까지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임재하실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요?
◑1. 첫 번째는, 성도에게 예배가 회복됩니다
2:10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와서 네 가운데에 머물 것임이라‘
자, 보세요. ’이는 내가 와서 네 가운데 머물 것임이라‘
그때는 노래하고 기뻐하게 된다는 거죠.
노래하고 기뻐하는 것이 무엇의 결과라는 거예요?
내가 와서 너희 가운데 임한 결과라는 거예요.
위 10절 말씀이 정확히 그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임재하실 때,
첫 번째 결과는 뭐냐 하면, 노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예배가 회복된다는 거예요.
주의 임재가 있을 때 제일 먼저 일어나는 현상은, 예배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예배의 감격이 돌아오고, 기쁨과 감사가 흘러넘치기 시작합니다.
이게 하나님이 임하실 때 나타나는 첫 번째 현상입니다.
예배는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존경하고 공경하는 것입니다.
’예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를 보면 ’납작 엎드리다, 풀이 죽다, 힘이 빠지다‘ 이런 뜻이에요.
그 얘기는 뭐냐면, 하나님 앞에서 납작 엎드리는 거예요. prostrate
그분을 그만큼 높게 평가하고 존중하고 공경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 앞에 순종하고 부복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때, 제일 먼저 회복되는 것이 예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께 감사하고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감격하고, 그 예배가 돌아오고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임재가 있을 때, 가장 먼저 일어나는 변화인 줄 믿습니다.
그래서 이 예배는,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의 자세입니다.
*예배 : 공예배, 찬양과 경배, 개인의 기도와 찬양 경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예배
하나님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마음, 그리고 하나님을 삶의 가장 중심에 두는 마음,
그래서 하나님을 가장 먼저 고려하고, 무엇을 선택하든 무엇을 행동하든
하나님 중심의 삶, 가장 먼저 하나님을 앞에 두는 그 마음의 태도,
그 마음의 자세가 예배인 줄 믿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배가 회복되는 것이 왜 중요하냐면
인간은 원래 지음받기를, 예배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로 지음받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원래 우리가 창조되기를 어떻게 창조됐냐면,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창조됐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예배하는 존재로 그렇게 지음받았다는 거예요.
예배할 때, 예배가 살아날 때, 삶이 정상적으로 돌아가도록 지음받았습니다.
원래 예배하는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예배가 살아있어야
삶의 다른 모든 부분들이 정상적으로 돌아갑니다.
사람이 예배할 때 영이 살아납니다. 영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게 됩니다.
그리고 영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 그 마음이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영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 예배할 때죠.
예배할 때 올바른 판단과 올바른 생각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또 예배할 때 영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정직해지고요. 예배할 때 행복해집니다.
사람의 마음은 마음 혼이죠. 마음은 영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배를 통해서 영이 살아나서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
우리 마음과 생각이 정직해지고, 지식과 감정과 판단이 모두 올바르게 작동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 내면이, 우리 마음의 생각이 영에 의해서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할 때
이웃과 누리는 관계도 정상적인 관계가 되기 시작합니다. 이웃을 이해할 수 있게 되고요.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되고, 예배할 때 이웃을 긍휼히 여기게 됩니다.
그랬을 때 우리가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 가족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친구와의 관계,
모든 관계들이 원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대로,
서로 사랑하고 서로 연합하는 그런 정상적인 아름다운 관계로 돌아올 수 있게 됩니다.
자, 이렇듯이 예배가 우리 삶에는 정말 정말 중요합니다. 정말 정말 중요해요.
사람은 예배할 때 모든 방식들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대로 풍성해지게 돼 있어요.
예배는 여러분, 여러분의 삶이 원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풍성함에 이르는 복을 받는 길입니다.
복을 받는 길입니다. 이것이 여러분 인간이 지음받은 방식입니다.
예배가 회복되는 2021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또 축복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예배가 막히면 어떻게 될까요? 반대로 예배가 막히면 어떻게 될까요?
영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무뎌지기 시작합니다.
죄에 대한 감각도 무뎌지기 시작합니다. 마음이 강팍해지기 시작합니다.
영이 떠난 그 자리를 혼이 대체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모든 생각은 자기 자신으로 집중되기 시작하고,
나의 욕심을 채우는 것에 집중되기 시작합니다.
모든 삶의 동기들은, 두려움에 기초하기 시작합니다.
영이 죽어버리면, 영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기 시작하면
나를 지키시는 하나님에 대한 걸 인식할 수가 없어요.
불성곽으로 나를 보호하시고, 눈동자처럼 나를 지키시는 이 여호와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왜? 영이 병들었거나 죽었으니까요.
영이 작동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예배가 막히면,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무뎌지고, 하나님을 인지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어이쿠 이러다가 내가 망하는 거 아니야?
어이쿠 이러다가 큰일 나는 거 아니야?’
그래서 끊임없이 방어적인 일들을 하게 됩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를 지키려고 열심히 노력하게 됩니다.
자 그러니까 여러분, 예배가 막히면 결국 삶이 어떻게 되는 거예요?
두려움과 욕심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되는 거예요. 자 이게 뭐였죠?
우리 지난 한 주 동안 계속 반복적으로 살펴본 거죠. 두려움과 욕심이 뭡니까?
바벨론 터전의 기초라고 그랬어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두려움과 욕심을 중심으로
두려움과 욕심에 의해서 부지런히 뭔가를 해서 성을 쌓아가는데
그 성이 바로 바벨론 터전이라는 거죠.
내가 나의 힘으로 나를 보호하고 싶고, 내가 나의 힘으로 나의 욕심을 이루어가려고 하는
그 성, 바벨론 성을 쌓게 돼서, 결국 바벨론에 거하게 되는 거예요.
바벨론에는 (겉으론 화려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복이 없습니다.
바벨론은 피폐하고 황폐한 땅이에요.
그래서 이 삶이 결국 어떻게 되냐면, 예배가 막히게 되면요.
마음에는 평강되신 두려움이 가득합니다. 인생이 불안하고 괴롭습니다.
그리고 주변에 보이는 모든 이웃은 의심스러워 보입니다. 질투가 납니다.
미움이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관계가 파괴되기 시작합니다.
삶이 총체적으로 삐까덕거리는 것을 느끼지만, 어찌해야 될지를 몰라요.
이 모든 것의 원인이 뭡니까? 예배가 막힌 거예요.
예배가 막혀서 영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거예요.
기억하십시오, 예배는요. 우리의 영이 살아나게 합니다.
예배할 때 우리의 영이 소생케 됩니다. 정상적인 기능을 하게 됩니다.
그래야 여러분의 모든 삶들이 정상을 찾아가게 되는 거예요.
그래야 여러분의 모든 삶들이 풍성함에 이르게 되는 거예요.
그러므로 여러분, 2021년 한 해는 예배의 회복에 생명을 거시는 한 해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예배가 살아나야만 우리의 삶이 풍성하게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배가 살아난 사람과, 예배가 죽었던 사람,
이 두 사람을 좀 대비하면서 살펴보려고 하는데, 사울 왕과 다윗입니다. (중략)
자 이것이 여러분, 오늘의 메시지입니다.
우리 삶 가운데 예배가 멈추고 나면요, 삶이 이렇게 피폐한다는 거예요.
삶이 피폐하게 망가진다는 거예요.
예배의 실패가 사울의 삶을 피폐하고 망가뜨렸습니다.
그렇다면 왜 사울의 삶 속에 예배가 멈췄을까요?
▲사무엘상 15:11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자 여기 보면 여러분 하나님께서 사울을 향해 뭐라고 말씀하세요? 후회하신대요.
자 하나님의 임재가 무엇이라고 했죠? 기뻐하시는 거라고 했어요.
그런데 여기 보면 사울을 향해서 하나님은 뭐라고 그러시냐면
‘내가 그를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느라’
사울에 대해서 후회하셨다는 거예요.
그와 함께하는 것을 슬퍼하셨다는 거예요. ↔기뻐하시는
이것이 여러분 예배가 멈춘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거두어 가신 이유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거예요. 그것이 예배가 멈춘 이유였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왜 사울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떠났을까요?
왜 사울의 삶에 함께하시기를 기뻐하지 않으셨을까요?
그게 같은 말인데, 사울의 삶을 왜 후회하셨을까요? 왜 임재를 거두어 가셨을까?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성경을 보면
삼상 13장과 15장에 보면 사울에게서 임제를 거둬가시는 결정적인 사건 두 개가 나옵니다.
사울에게서 하나님의 임재가 떠나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 두 개가 나오는데,
그 사건은 13장과 15장 사건입니다.
1) 13장 사건은 뭐냐면 전쟁을 하죠. 블레셋과 전쟁을 하고 있는데 사무엘이 늦게 옵니다.
늦게 오니까 사울이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가 주도해서 제사를 드리죠.
이게 13장의 첫 번째 사건이고, 삼상13:11~13
2) 두 번째 사건은 뭐냐면 아말렉과 전쟁을 했습니다.
아말렉 왕 아각을 잡았는데, 하나님이 뭐라고 그러시냐면
‘하나도 살려주지 말고 다 진멸하라’ 그래요.
그런데 다 진멸하지 않고, 그 가운데 좋은 양과 소와 이런 것들을 살려두죠.
이게 두 번째 불순종의 사건입니다. 삼상15:9, 22
삼상13:11~13절, 15:9, 22절을 각자 찾아서 읽습니다.
여러분 이 두 사건을 한번 잘 관찰해 보십시오.
사울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게 뭐였을까요?
첫 번째 사건입니다. 블레셋과 전쟁을 하려고 대치하고 있는데
보니까 적의 숫자가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민병대)들이 심히 떨면서 도망가기 시작했습니다.
‘야 이거 큰일 났다. 빨리 제사를 드려서
여호와가 함께 하시니까 우리가 승리할 수 있어..’ 그래서 좀 사기를 올려줘야 되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사무엘이 더디 오는 거예요. 제사장이 오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자기 임의로 제사를 집행합니다.
‘절차고 제사법이고 그건 다 모르겠고, 일단 백성들의 사기를 올려야 되잖아?’
그래서 부득이하게, 자기 표현에 의하면 부득이하게,
모든 절차와 법과 율법을 다 무시하고 제사를 드려버립니다.
여러분 사울의 중심에 무엇이 있었어요? ‘두려움’이 자기 중심에 있었어요.
사울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즉 두려움이 그의 선택의 기준이 됐던 거예요.
하나님이 그의 선택의 기준이 되지 않으셨어요.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법을 정하셔서, 제사는 이러 이렇게 해야 되고,
제사장이 드려야 되고... 법을 정해놓으셨지만,
사울이 이 순간에는 하나님이 그의 중심에 계신 것이 아니에요.
그의 중심에 뭐가 있었던 거예요? 두려움이 있었던 거예요.
‘아이쿠, 이거 큰일 났다. 아이쿠 이 상황을 어떻게 벗어나지?’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되지?’
이 두려움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된 거예요.
여러분 이거 잘 생각하십시오. 우리가 삶을 살아가고 무엇인가를 선택할 때,
어떤 방식으로 여러분의 삶의 프로세스가 일어나는지를 한번 짚어보시라는 거예요.
‘아이쿠, 이거 어떡하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지?’ 이렇게 생각이 돌아가기 시작하는지,
아니면 ‘하나님은 지금 뭐라고 말씀하시지? 하나님은 지금 어떻게 행동하라고 하시지?’
이렇게 내 판단이 돌아가는지요?
이 차이가 여러분들이 예루살렘에 거하는지,
아니면 바벨론에 가하는지를 결정하게 되고요.
이 차이가 결국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임재하실 것인지,
임재하지 않으실 것인지를 결정하고요.
이 차이가 결국 내가 예배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인지,
예배가 메마른 삶을 살게 된 것인지를 결정하고요.
이 차이가 결국 여러분들의 삶이 원래 창조하신 대로 풍성한 것에 이를 것인지,
아니면 사울처럼 피폐하게 살 것인지를 결정하는 거예요.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게 움직이고 있습니까? 사울처럼 움직이고 있습니까?
아니면 다윗처럼 움직이고 있습니까?
사울처럼 움직이고 있다면 조심하십시오, 지금은 어떤지 몰라도
멀지 않은 시간 가운데 사울의 번뇌가 여러분의 번뇌가 될 수 있어요.
사울의 질투가 여러분의 질투가 될 수가 있어요.
그런 저주가 임하지 않기를 주의 이름으로 다시 한번 축복합니다.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사십시오 두려움 중심의 삶을 사시면 안 돼요.
두려움으로 여러분의 삶이 움직여지면 안 돼요. 아멘!
2) 반면 두 번째 사건은 뭡니까?
두 번째 사건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정복하고
사람이든 짐승이든 다 진멸하라고 그러셨어요. 하나도 남겨두지 말라고 하셨어요. 삼상15:3, 9
그런데 사울이 이렇게 멸하고 나서 보니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양과 소가 너무 너무 좋은 거예요.
우리가 키우던 가축들하고 비교가 안 돼요. 극상품이에요. 트리플 A등급의 극상품이에요.
자기들이 맨날 먹던 수입육하고 달라요. 너무 보기에 탐스럽고 좋은 거예요.
그래서 비록 하나님께서는 전부 진멸하라고 하셨지만,
‘이걸로 제사드리면 얼마나 좋겠어? 제사 때 쓰기에 최고다..
그러니 최고로 잘 키운 가축은 남겨!’ 이렇게 했다는 거예요.
말이 제사 때 쓰기에 최고라는 거지, 사실은 뭐 때문에 남긴 거예요?
자기 욕심 때문에 남긴 거지요.
자 이 두 번째 사건의 핵심은 뭐냐면 ‘욕심’이에요. *첫 번째 사건은 ‘두려움’
욕심 사울의 중심에 뭐가 있었다는 거예요? 욕심이 있었다는 거예요.
▲자 우리 지난 한 주 동안 계속 살펴봤던 게 뭐예요?
하나님 중심으로 살 것이냐? 아니면 두려움과 욕심 중심으로 살 거냐? 이거잖아요.
예루살렘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자들이고,
바벨론에 살아가는 자들의 중심엔 뭐가 있는 거예요? 두려움과 욕심이 있는 거예요.
두려움과 욕심이 있는 거예요. 그것이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자기의 욕심을 위해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자기의 욕심과 두려움
그것이 자기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냥꾼으로 살아가는..
바벨론에 거하는.. 스스로 성을 쌓는 가인의 성을 쌓는 사들의 대표적인 특징이라는 거예요.
두려움과 욕심! 사울의 삶을 보면 여러분 정확히 그렇게 묘사되어 있지 않습니까?
사울의 삶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떠나게 되는 대표적인 두 가지 사건이,
두려움과 욕심에 기인한 거예요.
하나는 두려움에 기인한 거고, 하나는 욕심에 기인한 거라는 거예요.
이 두 사건이 보여주는 것은 사울의 중심입니다. 사울의 중심은 두려움과 욕심이었어요.
사울의 중심은 하나님이 아니었어요. 중심이라고 하는 것은, 다시 말합니다.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판단하는 기준이 뭐냐?’는 거예요.
내가 뭘 선택하고 뭔가에 반응하고 했을 때, 그 기준이 뭐냐는 거예요.
그게 중심인데, 사울의 중심에는 뭐가 있었냐면... 두려움과 욕심이 있었던 거예요.
사울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셨던 게 아니에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으십니까?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판단할 때, 무엇을 중심으로 기준으로 선택하고 판단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삶에 위기가 닥쳤을 때, 무엇을 중심으로 여러분들이 결정하십니까?
내 앞에 기회가 왔을 때, 여러분은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하십니까?
사울의 선택입니까? 아니면 다윗의 선택입니까?
만약 여러분들이 사울과 같이 두려움과 욕심에 의해서 움직여진다면,
여러분은 죄송하지만 바벨론을 쌓고 있는 자들입니다.
여러분이 쌓아온 삶의 터전은 바벨론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그 바벨론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 뭐냐 하면, 예배가 죽는 거예요.
혹시라도 여러분의 삶 가운데에 예배가 막혔다고 느껴지고,
뭔가 예배가 진부하게 느껴지고, 요즘 예배가 소홀해져가고,
예배의 감격을 느껴본 지 오래됐고 그렇다면,
여러분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러분이 지금 바벨론 터전 위에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바벨론 터전 위에 있다는 뜻이에요.
조금 더 디테일하게 들어가면,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임재가 없다는 뜻이에요.
왜 임재가 없느냐?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반복적으로 여러분에게 권면하고 도전합니다.
여러분 삶의 중심에 무엇이 있으십니까?
무엇을 기준으로, 무엇을 중심으로 여러분을 판단하고 행동하십니까?
무언가를 선택할 때 ‘아 이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가?’
‘이게 혹시 하나님의 이름에 누가 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가장 먼저 고려되는 중심입니까?
아니면 두려움과 욕심입니까?
‘어이쿠 이거 이렇게 안 했다면 큰일 나는 거 아니야?’
‘어이쿠 이렇게 안 했다면 나중에 손해보는 거 아니야?’
이게 혹시 여러분의 기준이라면, 죄송하지만 시간 문제입니다.
잠깐은 괜찮을 수 있어도, 결국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여러분들은 더 견고한 바벨론 성에 거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예배가 메마릅니다. 예배의 감격이 없어요.
작년 2020년 한 해는, 여러분이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예배의 감격 가운데 보내셨습니까?
혹시 예배의 감격이 메마르거나 줄어들지는 않으셨습니까?
가볍게 여기시면 안 돼요. 예배의 감격이 줄어드는 걸, 가볍게 여기시면 안 돼요.
그것이 얘기하는 것은 뭐냐?
오늘 내 마음이 좀 슬프고, 마음이 좀 우울하고, 영적 컨디션이 좀 안 좋고...
이걸 가볍게 생각하지 마시라는 거예요.
예배의 감격이 줄어들었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냐 하면,
영이 지금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지 않다는 거예요. 영이 그만큼 침체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영이 왜 침체됐을까요? 하나님의 임재가 없으니까 침체된 거죠.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데 왜 영이 침체되겠어요?
하나님의 임재가 있으면, 우리가 다음 강해에서 살펴보겠지만,
하나님의 임재가 있으면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영이 침체되지 않아요.
최악의 상황 가운데 영이 침체되지 않아요.
▲작년하고 올해하고 나온 책들을 제가 몇 개 리뷰하면서 보다 보니까,
요즘 많이 나오는 책들 중에 하나가, 말기암 환자인데
그 기쁨과 감격들을 나누는 간증집들이 많이 나와요.
그런 것이 베스트셀러로 두세 권 정도 올라왔는데, 그거 보다가 제가 다 보진 않았습니다만
그 내용들을 훑어보다가 정말 마음에 깊게 감동이 있더라고요.
말기암 환자고, 이제 생명이 얼마 안 남은 것이 거의 확실한데도, 전혀 주눅들지 않아요.
전혀 침체되지도 않아요. 계속 복음을 전하고, 오히려 기뻐하고, 오히려 감사하고...
여러분, 영이 살아있으면 말이에요. 사람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피폐하지 않아요.
주의 임재가 있으면,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예배가 죽지 않아요.
이거 여러분 기억하셔야 됩니다.
내 삶 가운데 예배에 대한 감격이 없고, 내 삶 가운데 예배에 대한 감동이 줄어들었다면,
상황, 환경 때문이 아니에요. 절대 상황, 환경 때문이 아니에요.
뭔가 여러분의 중심에 잘못된 게 있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그 상황으로 말미암아 내 중심이 흔들린 거예요.
그 상황으로 말미암아 내 중심이 지금 휘청거린 거예요.
그 전까지는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왔겠지만, 뭔가 위기가 오고, 뭔가 급한 일이 생기고,
뭔가 이 상황들이 나를 휘두르기 시작하니까... 내 마음의 중심이 이동한 거예요.
하나님으로부터 어디로? 두려움과 욕심으로!
두려움, 욕심 거기로 옮겨간 거예요. 거리로 옮겨가는 순간 어떻게 됩니까?
바벨론 성을 쌓기 시작하는 거예요. 바벨론 터전을 쌓기 시작하는 거예요.
사냥꾼으로 살기 시작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후회하시는 삶을 살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배의 감격이 줄어들기 시작해요. 하나님이 떠나시는 거예요.
그분의 임재를 거두어 가시는 거예요.
그래서 예배의 감격이 줄어드는 것, 예배의 감동이 줄어드는 것을 결코 허락하시면 안 돼요.
사람이 살다 보면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고 그래요. 근데 조금 침체됐을 때
아이쿠하고 빨리 돌이키셔야 된다는 거예요.
물론 가장 좋은 상태를 계속 유지하면 제일 좋겠지만, 사람이 항상 그러진 않을 수 있어요.
갑자기 어려운 일이 생기면 흔들리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래 방치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오래 방치하시면 절대로 안 돼요.
예배에 대한 갈망이 줄어들고, 예배에 대한 갈급함이 줄어들고,
예배에 대한 그 기쁨이 줄어들었을 때는, 빨리 여러분 영을 깨우셔야 돼요.
빨리 회개하셔야 돼요.
‘아, 내 마음의 중심이 지금 흔들렸구나.. 내 마음의 중심이 흔들렸구나..
내가 어느 순간에 예루살렘을 떠나서 바벨론으로 가고 있었구나..
내가 어느 순간에 농부의 삶을 내려놓고, 사냥꾼의 삶으로 가고 있었구나..
주여 죄송합니다. 회개합니다. 다시 한번 하나님을 의지합니다...’하고 돌아와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배의 감격을 계속 유지하셔야 되는 거예요.
저희가 작년 말부터 시작해서 꽤 긴 시간을, 지금 비대면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다시 대면 예배가 회복됐을 때 어떨까?’ 조금 염려돼요.
‘다시 대면 예배가 회복됐을 때, 여러분들이 예배에 대한 갈망과 갈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을까?’ 이게 여러분이 지금 싸워야 될 싸움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전을 향한 열심이, 하나님의 전을 향한 갈망이, 우리 안에 계속 살아있어야 돼요.
예배가 살아있어야 돼요.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은 마음,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릴 때의 그 감격,
감동, 영을 깨우는 거, 하나님의 임재... 여기에 대한 사모함이 늘 있으셔야 돼요.
조심하십시오. 계속 여러분의 영을 주시하십시오. 침체하도록 냅두지 마십시오.
조금이라도 틈이 보이면 빨리 돌아오십시오. 아멘!
그런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제, 다윗을 살펴보려고 하는데요.
◑2. 둘째, 예루살렘에 머물고 하나님이 구하시기를 거하실 때
두 번째로 회복되는 것은 ‘노래하고 기뻐하라’ 기쁨이 회복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거하시고 예배가 회복되면 당연히 따라오는 것인데, 그것은 기쁨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기쁨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해도 기뻐해요. 무엇을 해도 무엇을 해도 기뻐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곳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 삶의 임재가 회복되고, 우리 삶의 예배가 회복되면.. 정말 무엇을 해도 기뻐요.
무엇을 해도 기뻐요. 심지어 몸이 아파도 기뻐하고, 심지어 사업이 망해도 기뻐해요. 아멘!
다윗의 삶이 이 삶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울과 대척점에 있었던 인물 다윗이죠.
다윗은 시편에 보면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4:7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나이다
8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자 이 시편은 다윗이 쫓겨다닐 때 썼던 시입니다.
사울에게 쫓겨다닐 때라든지, 압살롬에게 쫓겨다닐 때라든지 둘 중 하나일텐데
아마 압살롬에게 쫓겨다녔을 때가 아닌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어쨌든지 간에 다윗이 가진 모든 것을 다 잃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하루를 보장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자기를 죽이려고 쫓아오는 자가 누구예요? 아들이에요.
세상에 이런 비극적이고 황당한 상황이 있단 말입니까?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어요. 그리고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몰라요.
그런데 자기를 죽이려고 쫓아오는 게 심지어 아들이에요.
이런 상황이 어떻게 있을 수 있어요?
그런데 다윗이 고백하는 것이 기쁨이라는 거예요. 기쁨!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 하나이다!’ 시4:7
시4편뿐만 아니라, 모든 시편이 마찬가지인데
시편을 읽는 여러분, 중요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항상 배경을 먼저 보셔야 돼요.
그래야 이 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게 돼요.
시편 4편의 배경은, 기쁨을 노래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에요.
슬픔과 낙심과 자기 자신의 운명을 저주해야 마땅한 그런 상황이지,
‘아들이 나를 죽이려고 쫓아오고 있는데.. 도대체 내가 어떻게 산 거냐?’ 하고
스스로 한탄하고, 낙심하고, 절망하고... 이래야 정상적인 상황이죠.
그 상황을 상상해 보세요. 왕위에서 쫓겨나서, 왕궁을 다 내주고 광야로 내몰렸습니다.
하루하루를 생명을 장담할 수 없이 쫓겨다니는 비참한 운명인데,
죽이려고 쫓아오는 게 아들이에요...
그런데 여기 뭐라고 그러냐면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여러분 이게 가능하지 않은 고백이잖아요. 그런데 기뻐한다는 거예요.
왜요? 주께서 내 마음에 기쁨을 두셨기 때문이라는 거에요.
이 기쁨은 내 안에서 나오는 기쁨이 아니라, 주께서 내 마음에 기쁨을 두셨기 때문에
내가 기뻐한다는 거예요. 주께서 내 마음에 기쁨을 두셨기 때문에,
즉 하나님이 지금 나에게 임재하셔서, 내 마음에 내가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는 기쁨을
불어넣으셨기 때문에, 이런 정말 처참한 상황 가운데서도 기뻐한다는 거예요. 아멘!
자, 그런데 언제 주께서 내 마음에 기쁨을 주십니까?
이게 바로 직전 구절에서 그 얘기를 합니다.
시4:4~5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셀라)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
오, 여러분 뭐예요?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
다윗의 마음 가운데, 언제 하나님이 임하셔서 기쁨을 두셨다는 거예요?
의의 제사를 드릴 때, 여호와께 예배할 때!,
하나님께 예배할 때 뭐 했다는 거예요?
주께서 내 마음 가운데 임재하셔서, 그 안에 기쁨을 두셨다는 거예요.
여러분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을 보면,
우리가 앞서 살펴봤던 스가랴서의 원리가 그대로 전개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 하나님께서 나에게 임재하시고,
임재하실 때 뭐가 일어났다는 거예요? 그 안에 기쁨을 두셨다는 거예요. 할렐루야!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하는 거지, 세상 두려움에게 자기를 내어주지 않은 거예요.
두려움에 그 마음을 내어주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을 그 마음에 중심에 두는 거예요.
그랬을 때 예배가 회복되고, 예배를 통해서 임재가 회복되고,
임재를 통해서 그 마음가운데 기쁨이 풀어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할렐루야!
다윗도 여러분, 사울과 똑같이 어떤 상황 가운데 있었냐면,
두려움과 떨림 속에 있었다는 거예요.
사울의 이야기도 아까 삼상13장, 15장을 읽어보면 두려워했다고 표현하고 있어요.
그런데 다윗도 뭐예요. 압살롬에게 쫓겨다니는 두려움과 떨림 가운데 있었는데,
선택이 서로 다른 거에요.
사울은 어떻게 선택합니까? 두려움과 떨림에서 육신적 선택을 하지만,
그에 반해서 다윗은 어떻게 선택합니까? 그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을 다시 두는 거예요.
비록 두려움과 떨림의 상황이 있지만, 내 마음의 중심에 다시 한번 하나님을 두는 거예요.
그것이 두 사람의 운명을 갈랐습니다. 운명을 갈랐어요.
바벨론에 거할지, 아니면 예루살렘에 거할지...
여러분의 선택은 무엇입니까? 혹시 여러분 안에 두려움과 떨림이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선택은 무엇입니까? 사울의 선택입니까? 아니면 다윗의 선택입니까?
마음의 중심엔 무엇이 있습니까?
그것이 여러분이 어디에 거하게 될지를 결정하게 될 겁니다.
▲자 또 다윗은 시16편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시16:11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자 여기도 보면 다윗이 기쁨과 즐거움을 노래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시16편은 배경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이 시16편은 다윗이 시글락에 있을 때를 배경으로 한다고 학자들은 추측합니다.
그래서 시16편을 처음부터 끝까지 쭉 읽어보면,
다윗이 큰 위기와 큰 좌절 가운데 있었던 것은 분명해요.
사무엘상 30장 상황인거죠.
뭐냐면 다윗이 사울에게 미움을 당해서 쫓겨다니다가, 갈 데가 없으니까
블레셋에 망명해서, 시글락을 할애받아서 추종자들과 함께 거주하게 됩니다.
그런데 블레셋 왕을 따라서 군사를 이끌로 출정했다가,
블레셋 방백들의 반대로 전쟁에는 참가하지 못 하고, 다시 시글락으로 돌아오게 돼죠.
와보니까 잠깐 출정 나간 사이에, 아말렉 원수들이 와가지고서 마을을 다 불태워버린 거예요.
마을을 싹 다 불태워버리고, 처자들과 모든 것들을 싹 약탈해서 가져가 버렸어요.
그 사건이 이제 ‘시글락 사건’입니다. 사무엘상 30:3~6절을 읽어보세요.
삼상30:6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여러분, 이 상황이 상상이 되십니까?
이게 어쩌면 시4편 상황보다도 더 처참한 상황인지 모르겠어요.
이보다 더 황망하고 이보다 더 절망적인 사건이 있겠습니까?
얼마나 울었냐면 울기력이 없을 때까지 울었대요. 삼상30:4
요즘처럼 여러분 뭐 이렇게 정보가 발달된 데도 아니고,
누가 와서 어디로 잡아갔는지... 뭐 이런 상황을 파악하는게 쉬운 게 아니잖아요.
그 넓은 땅 광야에서, 누가 와서 이 마을을 쳤는지, 또 어디로 갔는지...
처자식들이 아직 살아있는지... 뭐 아무것도 알 수가 없어요.
잡아가서 그 사람들이 노예로 팔아넘겼는지... 뭐 아무것도 상상할 수 없는...
그래서 얼마나 이들의 좌절과 실망이 컸는지, 울 기력이 없을 때까지 울었대요.
그리고 반란이 일어날 조짐이었어요.
‘야, 이게 다윗 때문에 이렇게 된 거 아니야? 죽이자!’
그래서 다윗을 죽이자고 지금 추종자들이 돌변해서, 자기를 돌로 치려고 하는 거예요.
얼마나 절망적이고, 얼마나 답답하고, 얼마나 황망했을까요?
슬픈 것뿐만이 아니라 다급했대요.
자기도 지금 슬픈데, 다윗도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감당이 안 되는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시16편이 기록됩니다.
자 시16편이 어떻게 시작하는지 한번 보십시오.
시16:1~2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자 이 다급한 상황 가운데, 가족을 모두 잃고 황망한데,
백성들까지 리더인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낙심되고 슬프고 다급한 이 상황 가운데
다윗이 무엇을 선택하는 거예요? 하나님께 매달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하고 하나님께 매달리기 시작하고, 하나님께 예배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렇죠?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급하고 다급한 일이 생기면 먼저 하나님께 예배하십니까?
아니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 부리나케 사방으로 뛰어다니십니까?
사울이 바로 이거였어요. 사울은 다급한 일이 생기니까,
하나님이고 뭐고 예배했단 말이 없어요. ‘어떻게 이 위기를 돌파할까?’ 그것만 연구했지요.
그러나 다윗은 이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먼저 하나님부터 붙잡아요.
‘하나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하나님 나를 구원해 주십시오’
하나님께 예배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 예배 속에서 다윗의 심령이 어떻게 바뀌어 가나를, 쭉 기록하고 있는 것이 시16편이에요.
시16편을 통해서 다윗의 심령이 어떻게 바뀌어 가는지 보십시오.
4절과 7절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시16:4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그들이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16:7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
다윗이 무엇을 선택하냐면, 다시 한번 하나님 중심을 내 마음에 두겠다고 선택하는 거예요.
‘다른 피의 제사를 드리지 않겠습니다. 다른 우상을 섬기지 않겠습니다.’ 뭐예요?
다른 인간적인 방법을 찾지 않겠습니다. 이거잖아요.
사울처럼 두려움과 욕심으로 이 방법, 저 방법, 이 길, 저 길... 그거 안 하겠다는 거예요.
내 마음의 중심에는 딱 누가 있다는 거예요?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을 두겠다는 거예요.
마음의 중심에 대한 얘기잖아요. 특별히 4절이.
즉 ‘내가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않겠습니다.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빽을 의지하지 않고, 돈을 의지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참여하는 그런 세상 길에 참여하지 않겠습니다.’ 이 얘기예요.
내 마음의 중심은 하나님이십니다. 나를 지키시고 살리시는 분 하나님이십니다.
이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을 딱 두겠다는 거예요.
‘그리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예배에 매달리기 시작합니다.
이 극악한 최악의 상황 가운데, 손발이 떨리고 입도 다물어지지 않고,
정말 울 기력조차 없을 때... 그 참담한 상황 가운데서 뭐예요?
하나님을 예배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내가 여호와를 송축할지니라’ 예배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시편이 계속 어떻게 이어집니까? 8절에 이렇게 얘기합니다.
시16: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가 내 중심에 계시다는 거예요.
내가 무엇이든지 가장 먼저 바라보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내가 무엇을 선택하든지 제일 먼저 고려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야.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심으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중심에 계심으로, 내 중심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내 중심에 계심으로, 내 중심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을, 다윗은 다시 한 번 결단하는 거예요.
다시 한 번 선택하는 거예요.
그러고 나니까 이어지는 9절에 뭐라고 얘기합니까?
16:9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10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시편을 통해서 다윗이 어떻게 변해가나 보십시오.
처음에는 기력이 없을 정도로 우는 상태였어요.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어요.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 나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구원의 기도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결단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세상 사람들이 선택하는 길을 선택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예배를 선택하겠습니다.
예배를 선택합니다.’
그리고 다시 무엇이라고 결단합니까?
‘하나님이 내 중심에 계십니다. 내 중심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랬더니 11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16:11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여러분 16편의 흐름이 보이십니까?
다윗의 심령이 어떻게 바뀌어 가는지... 예배하기 시작했을 때,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겁고 내 육체도 안전하대요.’
새해 2021년에 이 기쁨이 회복되는 해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낙심이 변하여 소망이 되고,
절망이 변하여 즐거움이 되는 해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뭘 하라는 거예요? 여호와를 마음에 중심에 두시라는 거예요.
다른 것에 여러분의 중심을 빼앗기지 마시라는 거예요.
두려움에게 휘둘리지 마시고, 욕심에게 빼앗기지 마세요.
중심에 항상 여호와 하나님을 두세요...
이 마음 가지고 함께 기도합니다. 기도하시면서 주님 앞에 나아가시겠습니다.
...........................................
주1) 스가랴서에 나오는 8가지 환상
-붉은 말 탄 자의 환상 1:7~17
-네 뿔과 네 대장장이들 1:18~21
-측량줄을 잡은자 2:1~13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옷 3:1~10
-순금 등잔대와 두 감람나무 4장
-날아가는 두루마리 5:1~14
-에바 바구니 속에 앉은 여인, 5:1~11
-4대의 병거 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