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Cry From Iran | Documentary | Mehdi Dibaj | Joseph Hovsepian | Andreh Hovsepian
https://www.youtube.com/watch?v=CBtO7AiHle8
◈이란 한 목사의 죽음이 100만 기독교인을 살렸다 요15:13, 히11:38 ▣ 순교 이란 선교
요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즘 뉴스를 틀면 이란이라는 나라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 소식이 나옵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그 폭격이 쏟아지고 있는 그 땅에서
목숨을 걸고 숨어서 예배드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까?
이란은 기독교 박해지수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전세계에서 기독교가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박해 속에서 어떻게 교회가 성장할 수 있는 걸까요?
그 답은 30년 전, 한 목사의 죽음에서 시작됩니다.
이 간증은 이란에서 태어난 아르메니아계 목사입니다.
음악을 사랑했고, 유머 감각이 넘쳤고,
누구에게나 따뜻한 미소를 건넬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란 개신교 전체를 이끄는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기도하다 잡혀간 동료 목사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등에 표적지를 붙였습니다.
(스스로 표적이 되기로 자원했습니다.. 라는 뜻)
덕분에 동료 디아즈 목사는 9년 만에 감옥에서 풀려났습니다.
그런데 동료가 석방된 지 3일 뒤, 이번에는 그가 사라졌습니다.
하이크 홉세피안 목사가 사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11일 뒤, 가족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시신을 확인해주세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란 정부는 ‘기독교 지도자가 죽었으니 교회가 무너질 거라고’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정반대의 일이 일어난 겁니다.
그의 죽음 이후 이란 지하교회는 역사상 전례 없는 속도로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1979년 이슬람 혁명 전 수백 명에 불과하던 개종자가, 지금은 추산 100만 명이 넘습니다.
한 명을 죽였더니, 100만 명이 일어난 겁니다.
지금 이 시간, 미사일이 떨어지고 있는 바로 그 이란 땅에서,
100만 명의 기독교인들이 여전히 숨죽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오픈도어스, Age News, 그리고 하이크 홉세피안(위 순교자)의 아들들이
직접 제작한 다큐멘터리 'A Cry From Iran'에 기록된 실화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어떻게 한 나라의 교회를 살렸는지요!

하이크 홉세피안 목사 Haike Hovsepian
▲하이크 홉세피안, 그의 이름은 이란 교회 역사에서 가장 아픈,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편안히 앉아 간증을 들을 수도, 성경을 읽을 수도,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쟁의 한복판에서 목숨 걸고 예배드리는 그들을 생각하면,
우리가 노리는 이 자유가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요.
오늘의 간증이 우리가 잊고 살았던 형제자매들을 다시 떠올리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며
살아있는 간증이야기 시작하겠습니다.
1994년 1월 30일, 이란, 테헤란 한 시체 안치소에 20살 청년(아들)이 혼자 걸어 들어갔습니다.
가족들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직원이 사진들을 한 장씩 넘겼습니다. 훼손된 시신들, 낯선 얼굴들... 청년은 안도했습니다.
'아버지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때 직원이 말했습니다.
'아, 사진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 청년의 이름은 조셉 홉세피안.
그리고 그가 찾고 있던 사람은 이란 개신교 전체를 이끌던 목사이자 그의 아버지인
하이크 홉세피안이었습니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기에 20살 아들이 시체 안치소에 혼자 서 있어야 했는지요?
▲1945년 1월 이란에서 아르메니아계 중산층 가정에서, 한 남자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이름은 하이크 홉세피안! *아르메니안 인구는 이란의 0.2%
아래로 새 남동생이 있었고 가정은 명목상 아르메니아 정교회 신자였습니다.
하이크는 어려서부터 음악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15살이 되던 해, 그의 인생을 바꾼 일이 일어납니다.
그는 테헤란의 한 오순절 교회를 방문한 것입니다.
그곳에서 하이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삶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합니다.
놀라운 것은, 하이크는 겨우 17살에, 테헤란 마지디 지역에서
작은 교회를 맡아 목회를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17살, 우리 기준으로 고등학교 2학년입니다.
그 나이에 그는 이미 강단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군 복무를 마친 뒤 하이크는, 이란 북부 카스피해 근처에
고르간 이라는 도시에서 가정교회를 개척했습니다.

1966년 타쿠쉬 사모와 결혼,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이름을 조셉이라 지었습니다.
목회는 순탄했고 가정은 행복했습니다.
1969년 10월 24일, 하이크는 목사들을 위한 집회에서 통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하나님이 묻고 계셨습니다.
'너는 이란의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고난을 감당할 수 있느냐?'
하이크는 무릎을 꿇고 속삭였습니다.
'주님, 제가 무엇이든 감당하겠습니다.'
바로 다음 날이었습니다.
하이크 가족은, 동료 선교사 블리스 가족과 함께, 고르간으로 향하는 차를 탔습니다.
6시간 거리에 좁고 구불구불한 도로, 어둠이 내려앉은 밤길,
맞은 편에서 달려온 차의 불빛에 눈이 멀었고, 앞에서 달려오던 화물차를 피하지 못했습니다.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하이크 목사와 아내 타쿠쉬 사모는 살았습니다. 블리스 선교사 부부도 살았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블리스 선교사의 세 자녀가 그 자리에서 숨졌습니다.

그리고 하이크의 아들 생후 6개월 된 조셉도, 아버지의 품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180일, 이 세상에 겨우 180일 머물다 간 아이였습니다.
자신도 부상을 당해서 병원 침대에서 치료를 받던 하이크는
갓난 아들의 죽음 소식을 듣고, 두 손을 들어 올렸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었습니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가 어떻게 찬양을 할 수 있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그가 사역을 포기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이크는 오히려 더 깊이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고르간 교회를 14년간 목회했습니다.
훗날 하이크와 타쿠쉬 사모님 사이에 네 자녀가 더 태어났습니다.
그 중 장남의 이름은 다시 조셉이었습니다.
▲1979년, 이란에 거대한 폭풍이 몰아쳤습니다. 이슬람 혁명!
왕정이 무너지고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이끄는 이슬람 신정국가가 수립되었습니다.
그 순간부터 이란의 기독교인들에게는 공포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새 이슬람 정권이 선포한 법률은 이렇습니다.
'무슬림이 기독교로 개종하면 배교죄, 처벌은 사형!
무슬림에게 복음을 전하면.. 불법
개종자를 교회에 받아들이면.. 불법
기독교 서적을 출판하면 전면 금지
파르시어, 즉 이란의 공용어로 예배를 드리는 것도 금지'되었습니다.
이 이슬람 샤리아법 하나하나가 한 가정의 믿음을 짓밟는 칼날이었습니다.
교회들이 문을 닫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들이 체포되었습니다.
서양 선교사들은 모두 추방되었습니다.
남아있는 이란 교회 지도자들은, 정부의 압박 앞에 하나 둘 무릎을 꿇었습니다.
1990년 12월, 마슈아드에서 호세인 수드만드 목사가 배교죄로 처형되었습니다.
이란 교회 최초의 순교자였습니다. 공포가 이란 교회를 짓눌렀습니다.
바로 이 시기에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습니다. 1981년 하이크 홉세피안
이란 하나님의 성회의 감독 주교로 취임했습니다.
이슬람 혁명 정권 아래서, 이란 내 7개 오순절 교회 전체를 이끄는 위치에 오른 것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이 박해의 한복판에서 하이크는 5개의 교회를 더 개척했다는 것입니다.
1986년, 하이크는 이란개신교 연합협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이제 그는 오순절 교회뿐 아니라, 이란 내 모든 개신교회를 대표하는
유일한 목소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정부를 향해 점점 더 크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란 정부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두 가지를 요구했습니다.
첫째, 무슬림과 개종자를 교회에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서약서에 서명하라
둘째, 이란의 기독교인들은 완전한 권리를 누리고 있다는 성명서에 서명하라
대부분의 교단 지도자들이 서명했습니다. 그들을 탓할 수 있을까요?
서명하지 않으면 교인들이 위험해집니다. 가족이 위협받습니다.
그것은 항복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하이크 목사는 서명하지 않았습니다.
단 두 명의 지도자만이 거부했는데, 그 중 하나가 하이크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누구에게든 열려있습니다. 절대로 이런 비인간적이고 불의한 요구에
나는 복종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서명하는 것이 교인을 지키는 길이었고,
거부하는 것은 양심을 지키는 길이었습니다.
하이크는 양심을 택했습니다. 하이크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란 내 기독교인들에 대한 인권침해보고서를 작성해
유엔특별대표 레이날드 폴에게 제출했습니다.
이슬람 지도부 소수 종교 담당관을 직접 찾아가
1979년 헌법에 명시된 종교 자유를 보장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이란 정부의 눈에 하이크 홉세피안 이란 이름은 점점 더 위험한 이름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정부는 보복으로 오순절 교회 5곳을 강제 폐쇄했습니다.
교회의 문이 닫히고 성도들이 흩어지고, 하이크를 향한 압박은 더욱 거세졌습니다.
하지만 하이크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993년, 하이크 목사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 찾아옵니다.
앞서 9년 전인 1984년, 이란 정부가 한 목사를 체포했습니다.
이름은 메흐디 디바즈, 14살에 무슬림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인데,
그의 죄목은 배교였습니다. 그는 감옥에 갇혔습니다.
디바즈가 감옥에서 보낸 세월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독방에 갇혔습니다. 가로 1M, 세로 1M, 높이 1M.
여러분, 지금 앉아계신 의자의 팔걸이에서 팔걸이까지가 대략 60 CM입니다.
그보다 조금 더 넓은 공간, 사람이 서지도 눕지도 못하는 그 공간에서
디바즈는 2년을 보냈습니다.

하이크 목사의 장례식에서 메흐디 디바즈 목사
간수들은 반복해서 요구했습니다.
'무슬림으로 돌아왔다고 서명만 해! 그러면 석방시켜 주겠다.'
'당신이 해외로 나가서 목사를 하든, 뭘 하든 우리는 상관 안 하겠다.'
서명만 한 번 하면, 석방이고 자유의 몸이었습니다.
그러나 디바즈 목사는 서명을 거부했습니다. 그는 말했죠.
'하나님의 품에서 누구에게로 돌아간단 말입니까?'
9년이 흘렀습니다. 3285일.
그리고 1993년 12월, 이슬람 혁명 재판소가 마침내 판결을 내렸습니다.
사형, 배교죄!
이슬람을 떠나 예수를 믿었다는 이유로, 메흐디 디바즈 목사에게 사형이 선고되었습니다.
사형 집행이 며칠 남지 않은 어느 날, 디바즈는 법정에서 읽을 최후 진술문을 작성했습니다.
그리고 그 문서를, 감옥의 한 간수를 통해 몰래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그 문서가 하이크 홉세피안 목사의 손에 들어왔습니다.
디바즈의 진술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나는 배교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너는 무슬림이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처음부터 나의 것이었다."
나는 감옥에 있는 것으로 만족할 뿐 아니라,
주 예수를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 진술문을 읽은 하이크는 결심했습니다.
'형제를 죽게 내버려두고, 우리만 편안히 예배드리는 것은 죄다!'
하이크 목사는 디바즈의 사형선고와 진술문을 전세계에 알리기로 했습니다.
개신교 협의회 이름으로 국제 호소문을 작성하고,
해외 기독교 단체들에게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움직임을 감지한 이란 당국이 하이크 목사에게 거래를 제안했습니다.
'이 사실을 국제사회에 알리지 않겠다고 서약하면,
당신의 교회와 성도들의 안전을 보장하겠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였을까요?
서약서에 서명하면 교회가 안전합니다. 가족이 안전합니다.
하지만 감옥 안의 디바즈 형제는 죽습니다.
하이크는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디바즈의 최후 진술문을 영어로 번역해서
전세계 기독교 단체에 배포하기 시작했습니다.
요한복음 15:13절 말씀입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하이크는 형제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기로 결심했습니다.
디바즈의 최후 진술문은 전 세계를 뒤흔들었습니다.
영국 런던 타임스의 저명한 칼럼니스트 버나드 레빈은
그날 자신의 칼럼을 쓰지 않았습니다.
대신 칼럼 전체를 디바즈의 법정 진술문으로 대체해 게재했습니다.
한 수감자의 글이 세계적인 신문의 한 면을 통째로 차지한 것입니다.
Dibaj's Defense Statement : A Plea for Justice
https://banneroftruth.org/us/resources/articles/2015/testimony-defence-mehdi-dibaj/
국제 엠네스티가 나섰습니다. 오픈도어즈가 나섰습니다.
각국 정부가 이란을 향해 항의의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리고 1994년 1월 16일, 국제적 압박에 이란 정부가 굴복했습니다.
9년만에 메흐디 디바즈 목사가 석방되었습니다.
디바즈 목사가 살아서 감옥 문을 나왔습니다.
▲하이크는 매우 기뻤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에게 무엇이 다가오고 있는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사실상 자신의 등에 표적지를 붙인 것이었습니다.
'이란 정부를 국제적으로 망신시킨 장본인!'
다음 차례가 누구인지는 누구나 알고 있었습니다.
이미 1990년 수드만드 목사가 처형된 선례가 있었습니다.
하이크는 국제 기독교 단체들의 경고를 받았습니다.
가족들은 걱정에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하이크 목사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란 당국에 직접 면담을 요청하여 종교 자유 보장을 촉구했고
유엔 인권특별보고관에게 이란 방문을 요청했습니다.
어느 날 설교에서 하이크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대 페르시아(이란)의 다니엘과 모르드개와 에스더가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듯이
이란 교회도 그래야 합니다."
그리고 동료 디바즈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크리스천이 자연사하는 것은 끔찍한 낭비입니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하이크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디바즈 목사가 석방되기 며칠 전이었습니다.
하이크는 딸의 약혼 파티를 열었습니다. 웃음이 넘치는 자리였습니다.
가족과 친구들이 모여 딸의 앞날을 축복했습니다.
손님들이 모두 돌아간 뒤 조용해진 거실에서,
하이크는 남동생 곁으로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나는 이제 순교를 맞이할 준비가 되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도 말했다"
"내가 돌아오지 않더라도 슬퍼하지 마라. 이것이 나의 사명이다!" 라고 전해집니다.
여러분,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평안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것은 절망이 아니었습니다. 체념도 아니었습니다.
딸의 약혼을 축하하고,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아내의 손을 잡은 뒤에 한 말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1:38절 말씀입니다. '이런 사람은 이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하이크 홉세피안 목사는 이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사람이었습니다.

홉세피안 목사의 장례식
영하의 추운 겨울날씨, 테헤란에서, 하이크 홉세피안 목사의 장례식 날,
2천명이 넘는 성도들이 3시간을 추위 속에서 기다렸습니다.
정부 요원들이 참석자 명단을 적고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아무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파리의 이란 대사관 앞에서도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런던의 이란 대사관 앞에서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서울의 이란 대사관 앞에서도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전세계 교회가 한 목사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시편 116:15절 말씀입니다. '성도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
석방되었던 디바즈 목사가 하이크 목사의 장례식에서 울면서 말했습니다.
'내가 죽었어야 했습니다. 하이크 형제가 아니라!'
이 한마디가, 장례식에 모인 2천명의 가슴을 찢었습니다.
*하이크 목사의 장례식에서 조사 弔辭하는 디바즈 목사 영상
(디바즈 목사님도 얼마 후에 피살 당해 순교하십니다)
https://rfcdrfcd.tistory.com/15977168 (강추)
이란 정부는 계산했습니다. 지도자를 제거하면 이란 교회가 무너질 것이라고.
성도들이 두려워서 숨을 것이라고!
그러나 정반대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이크의 아들 앙드레는 훗날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아르메니아인인 아버지가 이란을 위해,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을 보고
무슬림들이 묻기 시작했습니다. '왜 신앙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 내놓는가?'
그 물음이 사람들 안에서 일어났었고, 친구에게 전해지면서 이렇게 교회는 배가 되었습니다."
숨어 지내던 성도들이 담대해졌습니다.
하이크의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는, 무슬림 배경의 개종자들도 있었습니다.
정부 요원들이 이름을 적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은 자리를 지켰습니다.
핍박의 두려움이 그들을 이기지 못한 것입니다.
▲하지만 순교는 하이크 목사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1994년 6월 24일, 석방되었던 메흐디 디바즈 목사가
막내 딸의 17번째 생일 파티에 가던 중 사라졌습니다.
얼마 후 7월 5일, 테헤란의 한 공원에서, 그는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가슴에 다수의 자상을 입고서요. 석방된 지 불과 5개월 만이었습니다.
디바즈 목사의 실종 5일 뒤에는, 하이크 목사의 후임으로
기독교 협의회 의장이 된 타테오스 미카엘리안 장로교 목사도 사라졌습니다.
훗날 총에 맞아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6개월 사이에 이란 개신교 지도자 3명이 연달아 순교한 것입니다.
이란 정부는 무자헤딘 반정부 조직의 소행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1995년 유엔 인권특별보고관 압델파타 아무르는 이란을 직접 방문한 뒤
이렇게 결론지었습니다.
“이란 정부가 개신교 지도자들을 처형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무자헤딘 조직에 책임을 전가하여 범죄를 은폐하고
동시에 개신교 공동체의 지도부를 제거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이란 정부의 의도와 정반대로 흘렸습니다.
1979년 이슬람 혁명 이전, 이란에서 무슬림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은
불과 수백 명이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100만 명에서 ~ 300만 명에 이르는 이란인들이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세계선교 전문기관 [오퍼레이전 월드]는 이란 교회를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복음주의 교회!
연간 성장률 약 20%”
1백만명, 이 숫자를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백만명이란, 백만개의 가정에서 백만명의 삶 속에서
체포의 위협을 안고도, 주님을 예배드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사도행전 2:9절 말씀입니다.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2000년 전 오순절 성령 강림의 그날, 예루살렘에 이란 사람들도 와 있었습니다.
‘엘람’은 이란의 옛 이름입니다.
2000년 전에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시는 모습을 목격했던 그들이,
고국인 엘람(이란)에 돌아가서 복음을 전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 땅에 지금 다시 성령이 부어지고 있습니다.
하이크의 아내 타쿠쉬 사모님과 네 자녀는, 1999년 미국 캘리포니아로 이주했습니다.
국제 사회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아들 조셉과 앙드레는 영상 제작자가 되어 아버지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A Cry From Iran을 제작했습니다. *페이지 상단에 링크 있음
2007년에는 [홉세피안 미니스트리]를 설립하여 지금도 이란 지하교회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타쿠쉬 사모님은 남편의 순교 25주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편 하이크 목사님이 순교한지 25년이 지났습니다.
사랑하는 남편을 잃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모든 상황 속에서 찬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남편 하이크 목사님의 순교 이후 이란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변했는지,
그 간증들을 들을 때마다 위로와 힘을 얻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었습니다.
그리고 백만 알의 열매가, 지금 이 시간에도 계속 맺어지고 있습니다.
하이크 홉세피안, 그는 49년을 살았습니다.
형제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등에 표적지를 붙인 사람입니다.
그는 침묵할 수도 있었습니다. 서약서에 서명할 수도, 해외로 망명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란에 계속 남아서 외쳤습니다. 그리고 쓰러졌습니다.
저는 이 간증을 듣고, 오늘 편안히 앉아 예배드리는 것에 감사하면서도 동시에 부끄러웠습니다.
‘형제를 죽게 내버려두고 편안히 예배드리는 것은 죄라고..' 하이크 목사는 말했습니다.
그 말이 저에게 묻습니다. ‘나는 지금 누군가를 위해 불편해질 용기가 있는가?’
하이크 목사님의 삶을 통해, 제가 얼마나 안일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 준비한 이 짧은 영상이, 편안한 자리에서 잊고 살았던 자유에 대한 감사함을
다시 떠올리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란의 지하교회의 성도들은 목숨을 걸고 모여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