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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53장 우리 때문에

LNCK 2026. 3. 30. 11:08

 

설교본문 색인            <대속, 속죄>          <고난주간>     출처

 

◈우리 때문에                  사53:4~6                 2024.03.27.

 

사53:4~6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서 53장은 “고난받는 종”에 대한 예언입니다.

“고난 받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입니다.

이 고난 받는 메시아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1. 우리(나) 때문에 고난 받으심

 

오늘 본문은 그 고난받는 예수님의 마지막 고난을 예언합니다.

바로 십자가 고난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실 너무 유명한 구절이죠.

그런데 우리가 다시 눈여겨 봐야 할 표현이 있습니다.

 

▲‘그’와 ‘우리’라는 단어가 대비되서 계속 나옵니다.

4절에 ‘는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가 대비됩니다.

 

5절에도 ‘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가 4차례나 대비됩니다.

 

6절에도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렇게 우리가 대비됩니다. 우리가 계속 짝지어 나옵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그분의 고난은 우리를 위한 고난이었다는 것입니다. ★

 

여기서 우리는 또 다시 알게 됩니다.

그분이 왜 고난받는 종으로 오셔야 했었는지..

왜 그분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모습이 상했어야 했는지..

왜 그분의 피가 쏟아져야 했는지..

왜 그분이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고, 멸시를 받아야 했는지... 분명히 보게 됩니다.

 

바로 ‘우리’ 때문입니다. 그분의 고난은 몽땅 우리를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우리를 위하지 않는 고난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를 대신한 고난이었습니다.

 

이걸 교리적으로 ‘대속’이라고 부릅니다.

대속이란 .. ‘남의 죄를 대신하여 형벌 받음이란 뜻입니다. Atonement

 

▲예수님은 고난으로 얼룩진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고난을 받은 이유는,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당한 고난이었습니다. 그분의 고난은 대속의 고난이었습니다.    주1)

 

그걸 보여주는 본문의 한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4절에 나오는 ‘실로 Surely’라는 표현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실로’라는 말은, ‘진실로, 확실하게’라는 뜻입니다. surely

‘그분의 고난은 우리를 위한 대속의 고난이 확실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그분은 무엇을 계속 하셨습니까?

그 대속의 내용이 이어지는 5절에 나옵니다.

 

◑2. 나의 반역 때문에 고난 받으셨습니다

 

먼저 이사야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53:5

여기서 ‘허물’은 정확히는 ‘반역 rebellion’입니다.

 

영어성경들은 대부분 transgressions 로 번역합니다. 뜻은 ‘선을 넘는다’죠.

‘반역’이, (하나님께 대해 인간이 지켜야 할) 선을 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이 지은 죄의 본질은 반역이죠.

그걸 우리는 첫 사람 아담의 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함입니다.

하나님을 밀어내고, 자기가 하나님이 되고자 했습니다.

영적인 쿠데타, 영적인 반역이, 죄의 본질입니다.

 

그 반역의 결과, 인간에게 죄의 대가로,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우리 모두 다 이 반역의 DNA를 가지고 태어난 자들입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응애하고 태어나는 순간,

우리는 마치 이렇게 외치며 인생을 시작합니다. ‘내 인생의 주인은 나입니다.’

그 외침을 시작으로, 모두가 다 내가 주인 되어 살아갑니다.

 

반역(본문에 허물)이라는 죄에 대한 대가로, 모든 사람은 죽음 아래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그분이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의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53:5

그분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여기에 죄악은, 내면의 죄성까지 말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죄뿐만이 아니라, 겉으로 보이는 죄를 행하게 하는 내면의 죄성까지,

내면의 죄까지 아울러 가리킵니다.

 

우리의 내면의 죄 때문에, 그분이 상함을 당하셨습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의 내면까지도 다루는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로마서를 통해 살펴보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은 진리대로 되는 심판입니다.

진리대로 되는 심판은, 우리의 마음과 숨은 동기까지 살피는 심판입니다.

 

세상은 겉으로 드러나는 죄만을 물어 형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숨은 동기까지 물어 심판을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는 죄만이 아니라,

우리 안에 부패한 마음의 죄까지도 해결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마음의 죄는, 우리 스스로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마음이 여러분 마음대로 됩니까 말이 좀 이상한데요.

 

예레미야 선지자는 말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렘17:9

 

이 말씀 앞에 우리는 소망이 없습니다. 누가 마음까지도 다스릴 수 있습니까?

누가 마음까지도 ‘조금도 흠 없다. 깨끗하다’ 할 수 있으니까?

누가 마음의 죄까지 씻을 수 있으니까?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누구도 ‘죄 없다, 의롭다’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뭐라고 말합니까? ‘아니야 소망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여기 ‘상함’의 히브리어를 직역하면, ‘부스러뜨려지다. 으스러지다’라는 뜻입니다. crushed

 

그리스도의 몸이 부스러지고 으스러지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십자가에서 그 으스러진 그분의 찢겨진 육체 사이로

그분의 거룩한 보혈이 흘려져 내렸습니다. 바로 우리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그분의 거룩한 보혈로, 우리 마음에 깊은 죄악까지도 깨끗이 씻겨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깨달은 믿음의 사람은 이런 찬송가 가사를 썼습니다.

 

「예수 십자가에 흘린 보혈로 그대는 씻기어 있는가

마음속에 여러 가지 죄악이 깨끗이 씻기어 있는가」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대속의 내용입니다.

-하나는 우리의 허물, 반역

-또 하나는 우리의 죄악, 마음에 부패한 죄성까지.

 

◑3. 그리고 이 대속의 결과가 이어서 이렇게 나옵니다.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사53:5

 

대속의 첫 번째 결과는 <하나님과 평화>입니다.

그분의 십자가 고난은, 분명히 이사야 선지자가 말했듯이,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메시아 자신의 허물과 죄악에 대한 징계가 아니라,

우리의 허물과, 우리의 반역과 죄악에 대한 징계였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모든 고통은, 하나님과 영적인 단절에서 기인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상실하게 된 이유는, 바로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하나님을 기뻐하며 살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과, 지극히 더러운 죄인 사이에

새로운 교제의 통로가 생겼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통하는 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대속의 공로를 힘입어,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평화의 십자가, 화평의 십자가’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하나님과의 평화가, 십자가 사건을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며 살게 되었습니다.

 

◑4. 대속의 두 번째 결과는 무엇입니까? 바로 질병의 치유입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53:5

 

여기 ‘나음을 받았도다’라는 말은, 절망적인 질병으로부터의 완쾌를 의미합니다.

   ※위 구절의 신약적 의미 https://rfcdrfcd.tistory.com/15978921

 

구약시대에 가장 절망적인 질병은, 아마도 나병이었을 것입니다.

나병에 걸리면 온몸에 고름이 흐르고, 또 손가락과 발가락이 떨어져 나갑니다.

또 귀와 코가 문드러지고 입술이 뒤틀립니다.

 

이 나병이라는 절망적인 상태는 무엇으로도 고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나병 환자는, 오직 하나님의 기적적인 치유만을 기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우리의 처지가 바로 그런 나병환자 같았습니다.

영적으로 우리는 나병 환자 같은 자였습니다.

죄에 빠진 우리는, 무엇으로도 고칠 수 없는 절망 속에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엡2:1절에 말씀처럼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였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마귀의 노예로 살았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 밖에는 받을 것 없는, 비참한 상태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절망적인 상태에서 고쳐 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자기 몸을, 대속 제물로 바침으로써 말입니다.

 

그분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굽었던 손을 다시 펴서,

하나님을 향해 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병으로) 굳어 있던 혀와 입술을 움직여,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은 메시아가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심으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자 그리고 이 일이 어디에서 일어나게 되었습니까?

어디서 우리를 위한 그분의 대속이 이루어졌습니까?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대속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십자가는 그리스도가 자기 죄 때문에 죽은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우리 때문에 우리를 위한 대속의 장소였습니다.

 

죄는 다 우리가 범했는데, 고난은 다 그분이 당하시고,

모든 구원의 은택은 다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5. 그런데 여러분 그 우리가 어떤 존재였습니까?

53:6절에 보면 ‘우리는 다 양 같았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양은 어떤 동물입니까?

양은 순하고 착한 짐승이 아닙니다.

이란과 이라크 같은 중동 지방에서는, 시중에 통용되는 가장 상스러운 욕 중에 하나가

바로 ‘양 같은 놈’이라라는 말입니다. 머리가 나쁘고 어리석다는 뜻이죠.    주2)

 

양은 자기를 지킬 능력이 없습니다. 시력도 매우 나쁩니다. 앞을 제대로 보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고집이 셉니다.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길을 잘 잃어버리는 동물의 대명사가 ‘양’입니다.

그러다가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는게 양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는 다, 모두가 하나같이 양 같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다 ‘양 같은’ 존재였습니다.

너무나 고집이 세서 말을 듣지 않습니다. 자기 고집대로 살아갑니다.

각기 제 길로 다닙니다. 얼마나 강팍하고 고집이 센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그릇 행하는 줄도 모르고 다닙니다.

그 길이 멸망의 길이라는 것도 모르고 다닙니다. 구원이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지옥으로 가는지도 모릅니다. 이게 양 같은 우리 모두의 상태였습니다.

 

‘다 그릇 행하여’ 각자 자기 길로 갔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구원을 요청하는 자도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말합니까?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거늘’  :6

 

그때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놔두신게 아니라 어떻게 했다고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 :6

 

그분이 우리를 살리러 오셨습니다. 우리를 살릴 만한 가치가 있어서입니까?

우리가 구원을 요청해서요?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서요?

아닙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우리를 살리러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대신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죄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 죄 때문입니다.

언제요? 우리가 다 양 같았을 때입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았을 때입니다. 하나님은 거부하며 살았을 때입니다.

예수님을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았을 때입니다. 죽어 마땅한 죄인이었을 때입니다.

 

하나님은 없다고 소리치고 다닐 때입니다. 누구도 구원을 요청하지 않았을 때입니다.

그렇게 각각 자기 길로 갈 때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그래서 롬5: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롬5:8

오늘 본문의 버전으로는 ‘우리가 다 양 같았을 때’

 

누가요? 그리스도께서!

누구를 위해서요? 우리를 위해서!

어떻게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래서요?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5:8

 

여기(롬5:8)서도 또 우리가 대비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 때문에, 우리를 위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을 깨달은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일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 두 가지를 확신합니다.

-하나는, 우리가 얼마나 쓸모없고 더러운 죄인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의로운 행위로 하지 아니하시고,

그분의 긍휼하심을 따라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딛3:5

 

우리가 죽어야 하는데, 아들 하나님을 보내사, 대속하시는 고난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께서 땅에 있는 성도를, 우리를 존귀하게 보시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바로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속죄함을 받은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아들 하나님의 생명을 값 주고 사신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 십자가에서 나타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본문에 계속 나오는 이 ‘우리’라는 표현에, 여러분들이 속해 있다고 믿으십니까?

여러분, 오늘 이 새벽에 또 다시 믿어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 ‘우리’에 저와 여러분들도 들어가 있습니다.

그분의 고난은 우리를 위한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9세기에 스코틀랜드의 목사였던 호라티우스 보나르는 이렇게 찬송가를 지었습니다.

「거룩한 피 내가 흘리게 했네

내가 그분을 나무에 못 박았네

내가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 모욕하는 일에 나도 참여했네.

 

네 그 소리치던 모든 군중 속에 나도 있었음을, 나는 안다네.

그 무례한 외침의 소음 속에서, 내 목소리가 들리네.

십자가 주위에 군중을 내가 보니, 그 고통 받으시는 분의 신음을 비웃도다.

하지만 거기서도 내 목소리가 들리네.

마치 나 혼자서 비웃는 듯이」

 

다른 누군가가 그리스도 그분을 죽인게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우리가 그분을 못 박았습니다.

내가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그 못 박힌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은, 그가 아니라, 우리, 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우리 대신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도 이 사랑을 기억하며 살아갑시다.

대속의 사랑을 기억하며 살아갑시다.

 

오늘만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 있는 날 동안, 우리의 생명이 다 하는 그날 동안,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 그 사랑을 기억하며 살아갑시다.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 그분을 사랑하며 살아갑시다.

 

그분의 기쁨을, 우리의 인생에 보람으로 여기면서 말한 말입니다.

그래서 각기 ‘제 길’이 아니라,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복된 우리의 인생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대신 죽으신 분

 

브라질 산호세의 캄포라스라는 도시 근처에는 이상한 시설이 있다.

20년 전, 브라질 정부는 교도소의 운영을 두 명의 그리스도인에게 맡겼다.

그 건물은 휴마이타 라고 개명되었고, 기독교 정신에 바탕을 두고 운영되었다.

 

오직 두 명의 전임 직원을 제외하면, 모든 업무가 수감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척 콜슨은 그 교도소를 방문한 후에 다음 같은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나는 휴마이타를 방문하였을 때, 모든 수감자들이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를 안으로 들여보낸 사람(안내자)은, 살인을 저지르고 잡혀온 사람이었다.

내가 어느 곳을 가든지 사람들은 평온해보였다.

 

안내자는 나를, 예전에 죄수들을 고문하던 작은 독방으로 인도하였다.

지금은 단지 한 사람만 갇혀 있다고 말했다.

‘정말로 들어가보고 싶으세요?’ ‘물론이지요.’

 

그는 천천히 육중한 문을 열었다. 나는 그 독방에 있는 죄수를 보았다.

휴마이타의 식구들이 아름답게 조각해놓은 십자가가 눈에 들어왔다.

그 교도소의 유일한 죄수인 예수는 그 십자가에 달려 있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위해 남은 형기를 채우고 계십니다.’

안내자가 조용히 말했다.”

죄의 감옥에서 석방되는 유일한 방법은

그 죄의 형벌을 누군가가 다 갚는 것이다.

하지만 그 대속은 갈보리에서 이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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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잠깐 개념 정리

 

Redemption ‘구속, 속량’ : 값을 치르고 노예나 포로를 해방시킴.

Atonement ‘대속’ : 죄에 대한 대가를 대신 치름. 그렇게 신을 달래기 위한 제물

그래서 ‘대신 죄값을 받는다’ 또는 ‘죄값을 대신 받는 제물’을 뜻함

 

둘은 비슷한 뜻이며, 공유하는 부분이 많지만,

Redemption은 ‘대신 값을 치른다’에 방점,

Atonement는 ‘대신 죄값을 받는 제물’에 방점이 있음

 

비슷한 개념으로 롬3:25, 요일2:2, 4:10에 ‘propitiation’ 이 나오죠.

우리 말로 ‘화목제물’로 번역합니다.

이 말은 atonement와 비슷한 말입니다.

그래서 NIV는 sacrifice of atonement 로 번역했죠.

 

주2)

이란과 이라크 같은 중동 지방에서는, 시중에 통용되는 가장 상스러운 욕 중에 하나가

바로 ‘양 같은 놈’이라라는 말입니다. 이런 뜻이랍니다.

 

-머리가 나쁘고 어리석은 양: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무리만 따라가다가 위험에 처하는

어리석음을 뜻합니다.

 

-맹목적인 추종자: 주관 없이 집단이나 지도자를 맹목적으로 따르며,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을 비꼬는 표현입니다.

 

-수동적이고 약한 존재: 주체성이 없고, 위기 상황에서 대처하지 못하고

누군가(목자)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수동적이고 나약한 성격을 비하할 때 사용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