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슥5장 에바를 탄 여인

LNCK 2026. 5. 19. 18:50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하나님의 나라

스가랴23 에바를 탄 여인 (2021.03.21 주일예배)

 

◈에바를 탄 여인     슥5:5~11     2021.03.21.    

 

*개인적인 신앙, 개교회적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인, 하나님 나라 차원의 신앙을, 본문이 말씀하고 있다고 해석합니다.

...............

 

스가랴 5장을 오늘 살펴보려고 하는데요.

스가랴 5장은 스가랴가 봤던 8개의 환상 중에 6번째, 7번째 환상이 해당됩니다.

 

<스가랴서에 나오는 8가지 환상>

1-붉은 말 탄 자의 환상 1:7~17

2-네 뿔과 네 대장장이들 1:18~21

3-측량줄을 잡은자 2:1~13

4-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옷 3:1~10

5-순금 등잔대와 두 감람나무 4장

6-날아가는 두루마리 5:1~4

7-에바 바구니 속에 앉은 여인 5:5~11

8-4대의 병거 6:1~8

 

자, 오늘은 7번째 환상에 대한 내용인데, <에바 바구니 속에 앉은 여인> 환상입니다.

6번째, 7번째 환상은.. 하나의 짝을 이루고 있다고 했죠.

이것은 죄의 심판에 대한 내용입니다.

 

스가랴의 8가지 환상 중에,

1~3번째 환상은.. 하나님의 영광과 약속입니다.

예루살렘 성을 다시 회복시키실 것이고, 그곳에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을 두시겠다는

그 영광에 대한 약속이고,

 

4~5번째 환상은.. 그것을 이루신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에 대한 것입니다.

타락하고 무기력한 인간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또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이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을 받게 되고, 이루어갈 수 있다는 그 이야기를 다루고 있고,

 

6~7일곱 번째 환상의 내용은.. 그러나 이 모든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은혜를,

그 약속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심판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6번째, 7번째 환상의 내용은 심판에 대한 것입니다.

*6번째 날아가는 두루마리 환상 rfcdrfcd.tistory.com/15982640

‘심판’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이기 이전에, 제거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심판은 우리 삶 가운데서 죄를 제거해내는 것입니다.

또 공동체에게서 죄를 제거해내는 것이고,

또 나라와 민족에게서 죄를 제거해내는 것이고,

그리고 마지막 때는 모든 우주 가운데, 모든 죄와 타락을 다 제거해내는 것이

심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획과 또 하나님의 은혜가 약속이 완성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심판이 필요합니다.

물론 은혜로 시작되고 또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이 있지만,

그것이 완성에 이르기 위해서, 마지막 점을 딱 찍는 건 뭐냐면 ‘심판’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6번째, 7번째 환상은 심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6 번째 환상, ‘날아가는 두루마리에 대한 환상’을 통해서

우리 각 사람의 개인에게 있는 죄의 문제,

그 죄를 어떻게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고, 죄를 어떻게 제거하셔서

우리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시는가? 하는 이야기를 살펴봤다면,

 

7 번째 환상의 내용은, ‘구조화되고 조직화된 죄에 대한 심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구조화되고 조직화된 죄에 대한 심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7 번째 환상, 에바를 탄 여인에 대한 환상

 

에바를 탔다, 또는 에바 속에 있는 여인...

제법 큰 바구니 속에 있는 여인을 상상하시면 됩니다.

 

슥5:5 ‘내게 말하던 천사가 나아와서 내게 이르되

너는 눈을 들어 나오는 이것이 무엇인가 보라 하기로

슥5:6 내가 묻되 이것이 무엇이니이까 그가 이르되 나오는 이것이 에바이니라 하시고

또 이르되 온 땅에서 그들의 모양이 이러하니라’

 

스가랴가 한 환상을 보는데, 그 환상 가운데 에바가 있습니다.

‘에바’라는 것은 당시에 곡식을 담는 바구니입니다.

이 에바라는 바구니는 사이즈가 일정하게 딱 정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곡물 거래를 하는데, 그 곡물의 양을 재는 그런 단위로 사용되었습니다.

우리도 ‘한 되, 두 되, 한 말, 두 말’ 하지요.

 

그래서 ‘에바’는, 출애굽기나 레위기에 보면, 현재 용량으로 환산하면 약 5갤런 정도 됩니다.

약 19~20리터 정도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지서에 보면, 당시에 살았던 상인들이

에바를 속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정상 사이즈보다 작게 만든 거예요.

정상 사이즈보다 작게 만들어서, 속이는 도구로 그렇게 사용했습니다.

 

성경 몇 구절 찾아볼까요?

미6:10 ‘악인의 집에 아직도 불의한 재물이 있느냐 축소시킨 가증한 에바가 있느냐

11 내가 만일 부정한 저울을 썼거나 주머니에 거짓 저울추를 두었으면 깨끗하겠느냐’

 

겔45:10 ‘너희는 공정한 저울과 공정한 에바와 공정한 밧을 쓸지니’

 

이런 이유로 해서 선지서에서 ‘에바’라는 것은,

부당한 이익을 취하고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는 죄, 그것을 상징하기도 했습니다.

 

성경 초반부에 나오는 율법서에서 ‘에바’는 그냥 단순한 측량 단위인데요.

뒤에 가서 선지서에 오게 되면, 그것이 속이는 어떤 도구가 된 거예요.

 

그런데 이 에바의 특징 중에 하나는, 자신이 속이려고 직접 에바를 만드는 게 아니라는 거죠.

에바를 만드는 사람들이 있죠. 그렇게 해서 공급하는 사람이 있는데,

거기서 조직적으로 에바를 작게 만들어버리면요.

그렇게 해서 공급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속이는 죄’에 동참하게 됩니다.

 

의도적으로 ‘내가 조금 줘야지’ 이런 마음이 없었더라도,

조직적으로 작게 만들어진 에바를 내가 모르고 그냥 구입을 해서,

그래서 그걸 사용해서 곡식을 팔면,

그러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속이는 죄', 착취하는 죄에 참여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이런 죄는 ‘개인의 죄’라고 말하기는 애매할 수 있습니다.

내가 뭐 의도적으로 한 게 아니고, 나도 모르고 그런 ‘속이는 에바’를 갖다 쓴 거니까요.

 

그렇지만 타락한 사회 구조 속에서 살아가다 보니까,

나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죄에 참여하게 되는 거죠. 이런 종류의 죄들이 아주 많다는 거예요.

 

우리의 삶 가운데 보면 내가 의지적이고 의도적으로 죄를 지으려고 한 건 아니지만,

이 타락하고 부패한 세상 속에서 살아가다 보니까,

그 구조 속에서 나도 모르게 그냥 죄에 동참하게 되고 참여하게 되는

이런 일들이 있다는 거죠.

 

그리고 7 번째 환상의 내용은, 그런 죄들에 대한 것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자 이 환상에서 두 번째로 등장하는 인물은 ‘여인’입니다.

이 여인이 무엇을 상징하는가는 어렵지 않습니다.

 

슥5:7 ‘이 에바 가운데에는 한 여인이 앉았느니라 하니 그 때에 둥근 납 한 조각이 들리더라

슥5:8 그가 이르되 이는 악이라 하고 그 여인을 에바 속으로 던져 넣고

납 조각을 에바 아귀 위에 던져 덮더라’

 

8절에서 ‘이미 악이라 하고’

이 여인은, 악 또는 죄를 상징한다고 본문에서 풀어서 설명을 했습니다.

그래서 여인은 ‘악 또는 죄’라는 거예요.

 

특히 성경에선 ‘여인’이라고 할 때, 주로 ‘탐욕, 욕심’ 이런 걸 상징하는 걸로 많이 사용됐죠.

흥미로운 것은, 이 여인이 ‘에바 속에 담겨 있다’는 거예요. 바구니 속에 담겨 있는 거예요.

 

‘에바, 그 속에 죄, 악이 들어있다’ 이건 뭡니까?

악 또는 죄가 계속 쌓인다는 거예요.

 

즉 어떤 바구니, 즉 어떤 구조 속에

죄가 계속 쌓여가고 있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죠.

 

그래서 이 에바 속에 있는 여인이 상징하고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어떤 구조 속에 죄가 차곡차곡 축적돼서 쌓이는 거,

내가 그냥 개인이 짓는 죄는 아닐 수 있어도,

어떤 구조가 있어서, 죄를 담을 수 있는 구조가 있는 거예요.

 

바구니라는, 바구니가 상징하는 바 죄를 담을 수 있는 어떤 구조가 있어서,

그 구조 안에 죄가 계속 쌓이는 거예요.

그래서 본문의 7 번째 환상은 구조화된 죄에 대한 환상이라는 거예요.

 

▲또한 이 여인은 뒤에 가서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볼 텐데

이 여인은 죄를 일으키는 핵심, 즉 영적인 존재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구약에서 , 라 그랬을 때는, 인격적인 의미들을 갖습니다. 마귀, 사탄을 상징하죠.

그러니까 죄라는 것은 비인격적인 어떤 행위가 아니라

특별히 구약에서 죄라 그랬을 때는, 그 죄의 원흉이 되는 마귀, 사탄, 인격적인 존재를

지칭합니다.

 

그래서 사실 계시록에 가보면, 이 스가랴서 5장의 환상은

계시록 18장의 환상과 정확히 같은 내용입니다.

나중에 궁금하신 분들은 계시록 18장을 찾아보시면,

큰 성 바벨론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환상이 나오죠.

그것과 이 스가랴서 5장은 정확히 같은 내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계시록 17, 18장에 보면, 여인(음녀)이 짐승의 머리를 타고 등장하는데,

이때 이 여인도 정확히 의미가 같습니다.

이것은 죄, 악을 상징하는데, 또한 그것을 일으키는 어떤 영적인 원흉을 가르치고 있죠.

이런 의미를 ‘에바 속 여인’이 가지고 있습니다.

 

◑죄의 문화화

 

그래서 이 모든 죄는, 처음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시작됩니다.

처음에 죄를 저지르는 것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이 타락하고 부패한 죄의 구조 속에 살지만,

첫 번째 죄는 어떻게 들어오게 됐냐면, 우리 하와 할머니가 죄를 지으면서 시작됐죠.

 

그러니까 죄라는 것은 처음부터 구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 개인적인 차원에서 항상 시작을 합니다. 누군가 죄를 짓는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죄가 계속 반복되면 어떻게 될까요? 죄가 해결되지 않고 계속 반복돼요.

그리고 그 죄가 반복되다 보니까, 그 옆에 있는 사람도 보고 따라해요.

그러면서 죄가 반복되고 퍼지고.. 그래서 개인의 죄와 탐욕이 지속적으로 반복되면,

그것이 죄의 문화를 만들게 됩니다.

 

‘문화’라는 건 뭐냐면, 그 사회 속에 속한 사람들이 모두 다

‘그건 자연스러운 거야.. 그건 당연한 거야’ 라고 부르는 것의 총합이 문화예요.

 

그러니까 문화가 뭡니까? 그러면 그 사회 속에 속한 사람들이 ‘다 그건 당연한 거야.

그건 모든 사람이 다 그렇지 뭐’ 하고 인정하는 자연스러운 것들을

다 모아놓은 것을 문화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죄가 반복되게 되면, 무슨 문제가 생기냐면

이 죄가, 모든 사람들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시작한다는 거예요.

이 사람도 그러고 저 사람도 그러고 나도 보니까

매일마다 그 짓을 하고 있어요.

 

‘아 사람은 다 그렇게 하는 거지 뭐’ ‘이거 누구나 다 그렇게 하지, 안 그런 사람이 어딧어?’

당연하다고 여기기 시작하는 인식이 생기기 시작하죠.

그게 뭐냐 하면 죄가 문화가 된 거예요. 죄의 문화가 생기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낙태나, 또는 우리 과거에 갖고 있던 혼전순결에 대한 문제나,

그런 문제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과거에 제가 어렸을 때까지만 해도 ‘낙태’라는 것은

‘그걸 어떻게 해?’ 누구나 다 명백한 죄라고 생각했어요. 왜냐면 생명을 죽이는 살인이니까요,

 

또 혼전순결에 대해서도, ‘성관계는 또는 동거는 결혼한 관계 가운데서만 가능한 거지’

‘아유 처녀가 애를 낳았대?’ 그러면 믿는 사람이든, 심지어 믿지 않는 사람이라도

다 같이 ‘아이고 어쩌다 그랬대?’ 이렇게 나오지,

‘그럴 수도 있지’ 이런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것이 슬금슬금 몰래몰래 사람들이 낙태를 하기 시작합니다.

몰래몰래 낙태를 하기 시작하고, 어느 순간 결혼의 범위를 벗어나서 성관계를 가지기 시작

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 사회에 슬금슬금 들어오기 시작하더니,

그것이 지속적으로 반복됩니다. 지속적으로 여러 사람 사이에 반복됩니다.

 

그러자 뭐가 생겨요? 새로운 인식이 생깁니다.

‘뭐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상황이 안 되면 낙태해야지..’

그런 자연스러운 인식들이 생기기 시작해요. 그게 뭐예요? 문화가 된 거죠.

 

그래서 이것이 인식이 점점 확대되면서, 사회적으로 합의가 이루어집니다.

‘낙태는 할 수도 있는 거야’

‘부부관계라는 것은, 성관계라는 것은, 사랑하면 당연한 거야’

이런 인식이 생기면서, 문화가 만들어지는 거죠. 이게 뭐예요? 죄의 문화예요.

죄가 문화가 되어버린 거예요.

 

그런데 이 죄가 문화가 되면, 가장 큰 문제가 뭐냐 하면,

죄가 문화가 됐을 때 가장 큰 문제는.. 죄책감이 없어지는 거예요. 죄책감이 없어져요.

 

그게 죄라는 것을 깨닫지 못해요. 그리고 오히려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조롱하고 비난하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문화가 끝이 아닙니다. 죄가 문화가 되면 그 다음 단계가 있는데,

그 다음 단계가 뭐냐 하면.. 구조화, 법제화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사회에 법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그 문화를 반영하는, 합리화하는 법을 만들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과거에는 낙태가 금지되어 있었는데, 그 법을 바꿉니다. 새로운 법을 만드는 거죠.

그 법을 바꿔서 자유롭게 낙태할 수 있는 법 구조를 만듭니다.

 

또 과거에는 간통죄라는 게 있었는데, 그것도 법을 바꿉니다.

문화가 바뀌었기 때문에, 그걸로 처벌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거는 그냥 다 같이 인식하고 있는 자연스러운 거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도 법을 바꿉니다. 이게 뭐냐 하면 ‘구조화, 법제화’예요.

 

그래서 죄는 처음에 개인적으로 시작하지만 → 문화화가 되고,

그 다음에 제일 마지막 단계는 뭐냐 하면 → 구조화, 시스템, 법제화가 되는 거예요.

 

△다른 이슈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저희가 오늘날 보고 있는 동성애 이슈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죠.

 

동성애 이슈도 한 20년 전까지만 해도 동성애에 대해서 사람들이

‘그건 잘못된 거야’ 다들 그렇게 동의했어요.

아무도 거기에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한 사람이 없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이 동성애가 사회 속에 슬금슬금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슬금슬금 자리잡기 시작하더니,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이슈화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더니 온통 미디어를 통해서, 정치적 아젠다로 꾸준히 회자되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 이게 문화로 자리잡아가려고 하는 거예요. 세계적인 문화적 추세가 됩니다.

 

그래서 이미 아마 우리 사회도, 이것이 어느 정도는 문화화됐다고 생각을 합니다.

신실한 크리스찬들 빼고 나면, 여기에 대해서 거의 다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그건 개인의 선택이지’ 이렇게 생각을 한다는 거죠. 문화화가 된 것입니다.

 

◑문화화 → 법제화로

 

그러면 여러분, 그 다음 단계가 뭐라고요? 법제화하려고 해요

법을 통해서 법제화하는 거예요. 구조화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법제화되고 있는 게 뭐예요? ‘포괄적 차별금지법’ 같은 거죠.

 

‘포괄적 차별금지법’ 같은 것들은, 사실은 차별을 하지 말자라는 내용보다는,

마치 ‘동성애라는 것에 대해서 틀렸다고 얘기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에요.

 

사실은 굉장히 악한 법인데, 하여간 이것이 문화를 통해서

어느 정도 그 사회 구성원들이 합의가 되고 나면, 그 다음에 반드시 무슨 단계로 넘어갑니까?

구조화 단계로 넘어가요 법제화하기 시작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동성애가 만약 동성애로 인한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법제화 되고 나면 어떻게 됩니까?

동성애가 잘못됐다고 얘기하는 순간, 처벌받게 되는 그런 사회 구조 사회 시스템,

법 구조가 만들어지는 거죠. 이것이 죄가 진행되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구조화 되고 나면요, 문제는 생각보다 훨씬 심각해집니다.

훨씬 심각해지는 것이...

문화화됐을 때도 어느 정도 그런 현상이 생기는데,

한 걸음 더 나아가 구조화가 되면, 그것보다 몇 배 더 심각해집니다.

 

그 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강제성을 가지게 되는...

문화화 되는 것은, 강제성까지는 아직 가진 않아요

이것은 사람들로부터 조롱받고 무시당하고 그런 것으로 끝나는데,

 

이것이 한 걸음 더 나아가 법제화가 되게 되면

그 다음부터 강제성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동성애가 잘못됐습니다’ 라고 얘기하면, 처벌을 받게 되고,

또 낙태의 경우, 산부인과 의사가, 그 시술을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이 없어지는 거죠.

그것은 환자가 요구하면 당연히 해야 되는 법이 되니까요.

 

그래서 그것이 죄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사회 구조가 가지는 강제성에 의해서 죄에 동참하게 됩니다. 이게 무서운 거예요.

 

‘나는 개인적으로 그거 하기 싫어.. 나는 그거에 대해서 반대해!

나는 그렇게 참여할 생각이 없어!’

그래도 법제화가 되고 나면, 강제성을 가지게 되기 때문에, 법으로 말미암아 강제하는 거죠.

강제성을 가지기 때문에, 내 의지와 상관없이, 그 죄에 참여하게 된다는 거예요.

안 하면 법으로 처벌을 받게 되죠.

그게 무서운 거예요. 하나님 앞에서 참 무서운 일입니다.

 

▲성적인 죄뿐만이 아니라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돈도 우리는 사실은 이미 이렇게 죄가 법제화된 것이 만연한 구조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사실은 깊이 들어가 보면, 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 의도하지 않은 죄들에 얼마나 많이

참여하고 있는지 놀라실 거예요.

 

그래서 그 부분은 진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수밖에 없는데,

2014년도에 미국 통계를 보니까, 미국 기준으로

대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 연봉 평균을 조사한 게 있어요.

 

개인업체나 중소기업 말고, (월급이 좋은) 큰 기업들, 대기업들만 해서

노동자들의 연봉 평균을 조사하고, 그 대기업들의 CEO의 연봉 평균을 조사를 해봤는데,

조사 결과가, 임금 격차가 아주 크게 나타났어요.

 

2014년이니까.. 지금은 아마 더 심해졌을 것 같은데,

노동자들이 받는 평균 연봉이 CEO의 0.33%였어요. 놀랍죠?

 

그러니까 CEO가 1천만 원 받으면, 노동자는 3만3천원 받는 거예요.

그래서 대기업 기준으로 봤을 때, CEO가 일반 노동자들에 비해서

300배가 넘는 연봉을 받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도 미국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 뭐냐면,

‘이게 과연 정당한 보수냐?’ 하는 것에 대한 논란이 있어요.

 

‘아유 원래 CEO는 많이 받는 거지...’ 그게 여러분 문화화된 거라는 거예요.

이 비율이 어떻게 바뀌어왔는지 아십니까?

 

그러니까 지금은 300:1인데,

1965년도에 보면 20:1이었어요.

1989년까지도 59:1이었어요.

 

그러던 것이 딱 10년이 지나고 나서 2000년이 되니까, 376대 1이 됐어요. 376:1

여러분, 이게 정당하다고 얘기하기는 조금 그렇죠.

 

그러니까 불과 한 세대 전까지만 해도, 한 20배 정도 차이였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정도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그렇게 심각하게 느끼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렇지 뭐, CEO는 아무래도 그만큼 투자한 것도 있고, 또 그만한 역할을 하니까,

일반 노동자의 20배는 받아야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2000년에 들어서서 ‘임금격차가 376배가 됐다’ 이거는 진짜 뭔가가 좀 불편하죠.

376배가 됐다고 생각하는 순간, 뭔가가 좀 불편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 구조가 가능해진 이유는,

사람들 사이에 그것에 동의하는 문화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래요.

‘CEO는 그 정도 받는 게 당연하지..’

그 문화가 정착되고, 그것이 구조화되어 간 것입니다.

 

그래서 20대 1이었다, 30대 1이었다, 60대 1이었다... 마지막에 376배가 되는 그것이

구조화되어 가는 거죠. (굳어져 가는 거죠)

 

자 그래서 이 구조 속에 들어가면, 누구도 직접적으로 도둑질한 사람은 없어요.

그러나 성경은, 이런 구조 자체를 ‘착취’라고 규정합니다.

 

선지서들을 보세요. 특별히 이사야서 같은 데 보세요.

그 주인이요 무리하게 세를 거둔다든지,

무리하게 노동자들로부터 이렇게 압제하는 것에 대해서 ‘착취’라고 했어요.

 

근데 그것도 그냥 사유를 그렇게 정해놓으면, 그게 그냥 법이거든요.

그래도 상식을 뛰어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옳다고 하지 않으셨거든요.

 

그래서 이런 구조 속에 들어가 보면, 내가 개인적으로 도둑질하는 건 아니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착취하는 죄에 참여하게 되죠.

별 생각 없이, 가난한 자들의 돈을 뺏는 죄에 참여하게 된다는 거예요.

 

이렇듯이 개인의 탐욕과, 죄가 모이고 쌓이면, 그것이 죄의 구조를 만듭니다.

악한 경제구조, 악한 사회문화구조, 악한 정치구조, 악한 교육구조,

악한 종교구조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 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우리의 개별적인 의지와 관계없이

그 죄에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계시록 18장에 보면 이런 죄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계시록 18장과 스가랴서 5장 후반부는 정확히 같은 내용을 얘기하는 거예요.

 

계18:2 ‘힘찬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3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로 말미암아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인들도 그 사치의 세력으로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4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5 그의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

 

자 여기 보면 '바벨론'이 나오는데, 이 바벨론이 상징하는 것이

오늘 본문 스가랴서 5장의 ‘에바 속의 여인’이에요 그러니까 정확히 똑같은 얘기에요.

 

한 사회 속에 죄가 구조화된 죄에요.

그래서 계18:3절에 보면, 왕들도 거기에 취했고, 또 각종 더러운 영들이 그 안에 있고...

이게 뭐예요? 아까 얘기했던 구조 속에 들어와 있는 영적인 악의 근원들, 더러운 영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거기에 취했다’는 건 뭐예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죄에 참여하게 되고, 그 죄를 누리게 되고... 이런 모습들이죠.

이게 정확히 앞서 얘기했던 ‘구조화된 죄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자, 그런데 중요한 건 계18:4절이에요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해서 ‘나의 백성아, 그 죄에 참여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 죄에 참여하지 말라’는 거예요. 계18:4

 

그러니까 크리스찬에게 주시는 명확한 메시지입니다.

비록 우리 사회에 구조적인 죄들이 있지만

‘너희는 그 죄에 참여하면 안 돼, 너희는 거기서 나와서 그 죄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래서 어떻게 거기서 나와야 되는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방법이 있을 거예요.

우리 사회에 그 죄의 구조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처음에는 저항해야 되는 것이고,

뿌리를 내린 것이 있다면, 어떻게든 그것을 다시 바꾸려고 노력해야 되는 것이고,

진짜로 이것도 저것도 안 돼서, 그 안에 계속 우리가 죄의 구조 가운데 머물러야 된다 그러면

거기서 빠져나와야 되는 거예요. 하여간 그 죄에 참여하지 말라는 거예요.

 

‘어떻게 됐든지 간에 그 죄에 참여하지 말라’는 것이 성경의 메시지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계시록 18장에서 얘기하는 바벨론은 구조화된 죄입니다.

 

인간의 죄와 탐욕이 모이고 쌓여서 만들어 놓은 우리 삶의 환경들, 삶의 무대들, 삶의 터전들..

 

▲스가랴서 초반에 공부할 때, 두 가지 삶의 터전을 얘기했죠.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이 주시는 예루살렘 터전이 있고,

인간이 만들어내는, 죄가 만들어내는 바벨론 터전이 있다고 했는데... 정확히 그 얘기예요.

 

이 바벨론이 상징하고 있는 것은, 죄가 만들어낸, 악한 영역에 의해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만들어낸 그 삶의 터전들, 우리의 문화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어떤 환경들, 그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가랴가 본 ‘에바 속 여인’과 정확히 같은 의미입니다.

죄가 쌓이고 모이는 곳, 에바, 그래서 죄가 담기는 바구니라는...

구조가 되어버린 그 에바, 그리고 그 가운데 죄와 악을 상징하는 악한 영,

그 여인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 바벨론으로부터 나와서 그 죄에 참여하지 말라고 얘기합니다.

근데 그 나오는 방법에 대해서는, 계시록에서는 ‘나오라’고 얘기했고,

근데 스가라서에서는 떠나보내잖아요.  *시날 땅으로 떠나 보냄, 슥5:11

 

꼭 우리가 물리적으로 떠나는 게 아니라, 이 구조를 떠나보낼 수도 있는 거예요.

자 어찌됐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그 죄에 참여하지 않도록 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구조 속에서 살게 되면, 우리는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으면,

그 죄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참여하게 됩니다.

성경은 ‘그 죄에 참여하지 말라’고 분명하게 얘기하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바벨론 구조 속에 살아가는 크리스찬은

적어도 세 가지 차원에서 죄와 싸워야 돼요.

 

▲1. 첫 번째 차원은 뭐냐면, 개인적인 차원에서 싸워야 돼요.

우리 삶 속에 거룩함을 유지하고, 우리 삶 속에 정직한 마음을 가지고,

음란한 것을 멀리하고, 또 가난한 자들과 나누기를 힘쓰고 하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죄와 싸우는 싸움이 반드시 선행돼야 됩니다.

 

이 죄라는 것은 반드시 개인적인 차원에서 먼저 시작되지,

개인적인 차원을 스킵해서, 위로부터 떨어지는 구조적인 죄라는 건 없어요.

 

그래서 각 사람 각 사람이 죄에 대해서 선한 싸움을 싸우지 않는다면,

‘구조화되는 죄’도 결국 막을 수 없어요.

 

그래서 이 싸움의 시작은 뭐냐 하면, 내 개인의 삶부터 시작해야 됩니다.

이 개인의 삶에 대한 죄를 스킵하고, 우리 사회의 구조에 대해서...

아니요, 여러분 그건 위선이고요. 그렇게 싸움이 이루어지지도 않아요.

 

그래서 가장 먼저 싸워야 될 싸움은,

우리 개인의 삶 가운데 어떻게 거룩함을 유지할 것인가?

어떻게 우리 삶 가운데 바벨론의 음란을 멀리할 것인가?

어떻게 우리 삶 가운데 정직함을 유지할 것인가?

어떻게 우리 삶 가운데 겸손과 또 가난한 자들을 향한 긍휼의 마음들을 계속 유지할 것인가?

이 싸움들을 우리가 부지런히 싸워야 됩니다.

 

▲2.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거예요.

두 번째 죄에 대한 싸움, 저항이 있는데

그것은 죄가 우리 사회의 문화로 자리 잡지 못하도록 저항해야 돼요.

 

하여간 이 죄가 ‘우리 사회에 당연하지’ 라는 문화로 자리 잡지 못하도록, 저항해야 됩니다.

죄의 문화가 확산되는 것을,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참여하지 않아야 돼요.

 

그래서 그 문화가 왜 악한 것인지를 부지런히 알리고,

또 그 문화에 반대되는 선한 문화를 만들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힘쓰고...

그렇게 해야 된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보면 저는 개인적으로 물론 동성애에 대해서는 반대합니다.

그런데 단순히 동성애를 반대하는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저는 이 문화가 정착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동성애가 등장하는 영화나 미디어도 일절 보지 않습니다.

 

그게 그 영화의 메인 타픽이 아닐 수도 있어요. 메인 타픽은 좋은 내용인데,

그 가운데 동성애가 일부 좀 등장하고, 이런 거라도 저는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봄으로 말미암아,

영화라면 관객 수를 늘려주는 거고요.

미디어라면 조회수를 늘려주는 거예요.

 

그러면 제가 직접적으로 ‘저는 동성애를 지지합니다’ 이렇게 하지 않더라도,

간접적으로 그 문화가 확산되는데 일조한 거죠. 그렇지 않습니까?

간접적으로 거기에 일조한 거예요.

 

그래서 악한 문화가 등장하는 미디어가 있다면,

저는 그것이 메인... 주제가 아니고 그냥 슬쩍 흘러가듯이 지나가는 거라도,

아주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으면, 절대로 참여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참여하지 않습니다.

 

왜요? 죄의 문화를 확산하는 데, 일조하는 거잖아요.

잘못된 죄의 문화들을 이 사회에 퍼뜨리는 데,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거잖아요.

조회수가 올라가면, 그만큼 더 많은 사람이 볼 거 아닙니까?

관람객 수가 올라가면, 더 많은 사람들이 볼 거고,

 

그런 종류의 영화가 만들어지는 것이 흥행한다고 하면,

더 많은 그런 종류의 영화가 만들어질 거고...

그러니까 그렇게 하지 않도록 참여하지 않아야 되는 거죠. 

 

또 동성애만 예를 들었는데, 동성애뿐만 아니고

다른 악에 대해서도 전부 다 같은 원리를 적용해야 됩니다.

 

또는 악한 문화를 만들어내는 기업이 있다면, 그 기업에 대해서 불매운동을 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될 겁니다.

그런 악한 것을 계속 지지하는 기업이 사업이 잘 되면 어떡하겠어요?

그런 영향력들을 계속 덮어뜨릴 거 아닙니까?

 

그래서 그런 문화가 정착하지 못하도록,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간에 참여하지 않는 거예요.

그게 저항하는 겁니다.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참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문화가 왜 악한 것인지를 적극적으로 알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 문화의 문제점이 뭐고 왜 악한지를, 가족과 친구들에게 알리고,

더 나아가 미디어를 통해서 알리고... 그런 거죠.

 

△또한 그런 문화를 대체할 수 있는 선한 문화를 만들어 내는 것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대안은 없이... ‘계속 그것에 참여하는 잘못된 것이다’라고 말만 해서는 승리할 수 없죠.

 

그래서 그런 악한 문화 말고, 선한 문화를 가지고도

우리가 얼마든지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실제로 보여주고,

그 문화를 누리면서 살아내고...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죄의 문화가 만들어지는 걸 막을 수 없어요.
크리스찬에게는 개인의 죄뿐만이 아니라,

죄의 문화가 만들어지고 확산되는 것을 저항하고 막아야 되는 책임이 있습니다.

 

▲3. 마지막 세번째 저항은, 구조화되지 않도록 저항하는 거예요.

법제화되지 않도록 싸우는 것입니다.

 

죄가 여러분 문화가 되면, 개인적인 차원일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파워를 갖습니다.

개인적 차원의 죄는 죄책감을 가지고 몰래 몰래 저질러지지만,

문화가 되고 나면요 당당하게 합니다.

 

죄에 대한 감각도 없고요, 당당하게 죄를 짓게 되고,

반대하는 사람들을 조롱하면서 행해집니다.

 

그래서 오히려 ‘죄를 죄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받고요,

‘죄를 죄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약간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게 되는 그런 파워를 갖습니다.

 

그런데 구조화되고 법제화된 죄는, 문화화된 죄하고는 비교할 수 없고

상상할 수 없는 파워를 갖습니다. 이것은 비교할 수 없고 상상할 수 없는 파워를 가져요.

 

법을 통해서 구조화된 죄는, 그 사회 구성원에게 죄를 강제할 수 있는 파워를 갖는 거예요.

문화화가 됐을 땐 여전히 선택권이 있습니다. 그 문화를, 내가 선택 안 할 수 있어요.

사람들이 다 옳다고 해도... 나는 선택하지 않을 자유가 있는 거죠.

 

그런데 법제화 되고 나면요, 그다음에는 선택권이 없어요.

강제하는 파워를 갖는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예요.

 

문화화구조화의 제일 큰 차이는, 강제할 수 있는 파워가 생긴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죄에 참여하지 않으면, 물리적인 제재를 받게 됩니다.

 

△예를 들어 동성애 차별금지법이 법제화된 나라들에 가보면

동성애자들이 와서 성직자에게 주례를 해달라는데,

목사님이 거부한다거나 그럴 수 있는 권한이 없는 거예요.

그걸 거부하는 순간 법적 강제성이 들어오는 거죠.

벌금을 내야 되는지 아니면, 다른 처벌을 받게 되는 거죠. 범법자가 되는 거죠.

 

그런 것들에 대한 ‘강제성을 갖게 된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입니다.

단순히 조롱하고 압박하는 차원을 넘어서, 죄를 강요하고,

그것에 순응하지 않을 때 물리적인 제재를 가합니다.

 

그래서 죄가 일단 구조화되고 나면, 그 사회의 가치와 문화는 급속도로 붕괴됩니다.

그것이 우리가 앞서 서구 나라들을 관찰해 본 결과예요. 아주 급속도로 붕괴됩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또는 동성간 결혼법, 이런 것들이 합법화된 나라들을 보면

다들 깜짝 놀라게 돼요.

‘이렇게 급하게 우리 사회의 가치가 붕괴될 줄은 몰랐다’고 합니다.

 

사회가 아주 급속도로 붕괴됩니다. 가족의 가치도 붕괴되고.. 결혼의 가치도 붕괴되고..

이것이 아주 급속하게 붕괴됩니다.

왜냐하면 교육에 강제성을 두게 됩니다.

 

그래서 그것을 어린아이 때부터 교육시키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금방입니다.

이 아이들이 10년만 있으면 성인되는 거거든요.

그리고 10년 안에 완전히 다른 가치가 이 사회를 지배하게 되는 거예요.

 

또 미디어를 통해서 강제하거든요 그래서 그거에 반대하는 이야기는

아무도 못하도록 다 입 틀어막고... 그 이야기만 계속 미디어를 통해서 공급하기 때문에

아주 순식간에 그냥 무너져버립니다. 순식간에 전통적, 성경적인 가치는 붕괴되버리고요

 

그리고 세 번째로 무서운 게 뭐냐면 돌이킬 수가 없다는 거예요. 돌이키는 게 안 돼요.

‘아이고 우리가 잘못했나 보다’

그러니까 캐나다도 그렇고, 많은 나라들이 이 현상을 보면서 ‘아차’ 싶은 거예요.

 

‘아차’ 싶어서 부모들이 ‘아이고 이거 우리가 잘못 선택했구나’

그때는 그냥 조용히 있었던 사람들이, ‘그때 우리가 저항하고 반대했어야 되었던 거구나’

그래서 나중에 들고 일어났습니다.

 

나중에 들고 일어나서, 다시 돌이키자고 했는데... 전부 실패했어요.

한 번 법제화가 되고 나면, 돌이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가능한 방법이 있긴 한데, 가능한 방법이 뭐냐 하면,

바벨론이나 앗수르가 쳐들어와서, 그 나라를 몽땅 망가뜨리면 돼요.

그렇게 하지 않는 한, 구조가 무너진 예는 없어요.

 

그러니까 일단 구조화되고 나면, 엄청난 충격이 와서

그 악한 구조뿐만이 아니라, 그 사회가 갖고 있는 모든 구조를 한꺼번에 무너뜨려 버리는...

그런 게 오기 전에는, 그것만 뽑아서 무너뜨리는 건 안 된다는 거예요.

 

이미 문화화 됐고, 그 문화 위에서 법제화 됐기 때문에

그것만 빼서 무너뜨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그 모든 구조를 한꺼번에 무너뜨려 버리지 않는 한,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결국 이 악이 구조화되면, 마지막으로 심판하시는 건 뭐냐면

그 사회 전체를 무너뜨릴 수밖에 없어요. 안 그러고는 그것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해서도, 결국 마지막에 이 악이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서 문화가 되고, 마지막에 구조화됐을 땐 어떻게 해요?

앗수르를 들어 일으키시고, 바벨론을 들어 일으키셔서, 이스라엘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리셨어요.

 

그래서 바벨론도 하루아침에 순식간에 무너졌다.. 그런 속성을 가지게 돼 있어요. 계18장

왜? 구조화됐기 때문에...

그냥 서서히 빼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와르르 무너뜨려 버리는 수밖에 없는데,

그거만 무너지는 게 아니고 다 무너지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 '구조화, 법제화' 되지 않도록, 우리가 힘써 저항해야 돼요.

단순히 내 개인의 차원의 거룩함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크리스찬에게 주신 사명은 너희의 거룩함을 지켜라뿐만이 아니라,

참여하지 말라는 사명이 함께 있어요.

 

바벨론의 죄악에 참여하지 말라18:4

여기엔 그것이 법제화되고 구조화되지 않도록 저항하라는 의미가 함께 들어있어요.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사회 가운데서도 악한 법, 악한 구조가 만들어지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창의적이고 다양하고 적극적인 방법으로 저항해야 될 의무가 있습니다.

 

그냥 가만히 있다가 ‘이런 법이 생겼네’ 이렇게 하면 too late,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거예요.

구조화되지 않도록, 미리 싸워야 될 책임이 있는 줄 믿습니다.

 

◑다시 스가랴의 환상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냐면, 둥근 납두껑을 이렇게 드셨어요.

 

에바 가운데 여인을 집어넣고, 그 납두껑으로 탁 막아버리십니다.

이 악한 영이 작동하지 못하도록 봉인시켜버린 거예요.

 

▲1. 그래서 이 구조적인 악을 대항하는 첫 번째 방법은 뭐냐 하면,

그 안에 있는 영적인 세력을 묶어야 돼요. 봉인해야 돼요.

그렇지 않고 이 뚜껑이 열려있는 상태에서 아무리 해결하려고 해봐야 해결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전쟁의 시작은 뭐냐 하면.. 기도입니다. 반드시 기도를 시작하는 거예요.

기도를 통해서 에바 안에 있는 그 에바의 구조를,

계속 움직이려고 하는 그 영의 세력을 묶어야 돼요.

납뚜껑을 만들어서 탁 닫아버리신 거예요.

 

그래서 더 이상 영의 역사하지 못하도록, 그래서 기도로 먼저 시작하는 것인 줄 믿습니다.

 

이어지는 환상의 내용을 보면, 그래서 하나님께서 에바 속에 있는 여인을

예루살렘으로부터 멀리 떠나보내십니다.

죄를 제거하시는 심판을 하신 거죠. 멀리 시날 땅으로 떠나보내십니다. :11

 

슥5:8 ‘그가 이르되 이는 악이라 하고 그 여인을 에바 속으로 던져 넣고

납 조각을 에바 아귀 위에 던져 덮더라’

 

그래서 크리스찬에게는 우리가 구하는 이 터전이 거룩한 곳이 될 수 있도록

우리가 선 땅이 거룩한 곳이 될 수 있도록,

에바와 여인이 똬리를 틀지 못하도록 해야 될 책임이 있어요. 그 사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은 이 영의 세력을 묶는 기도로부터 시작하는 줄 믿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9절부터 11절까지 내용인데요.

 

슥5:9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두 여인이 나오는데 학의 날개 같은 날개가 있고

그 날개에 바람이 있더라 그들이 그 에바를 천지 사이에 들었기로

슥5:10 내가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묻되 그들이 에바를 어디로 옮겨 가나이까 하니

슥5:11 그가 내게 이르되 그들이 시날 땅으로 가서 그것을 위하여 집을 지으려 함이니라

준공되면 그것이 제 처소에 머물게 되리라 하더라’

 

자, 환상 가운데 보니까, 학의 날개를 가지고, 날개의 바람을 가진 그 여인들이 나타나서

여인 두 명이 나타나서, 에바와 여인을 들고 어디론가 옮겨갑니다.

 

이 ‘학의 날개를 가진 여인 두 명’이 누구를 상징하느냐? 명확하지 않아요.

학자마다 의견들이 달라요.

그런데 어떤 학자들은 천사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왜냐면 두 여인이 그 날개가 있고, 날개 밑에 바람이 있다고 했는데,

이 바람이 ‘루하흐’거든요. 루하흐는 영, 호흡, 생명.

 

그래서 거의 대부분이 하나님의 속성을 지칭할 때 사용됐던 단어예요.

그러니까 루하흐라는 단어를 부정적인데 쓴 예는 거의 없어요.

이건 거의 항상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호흡, 생명 이것을 상징하는 단어로 쓰였기 때문에

‘날개 밑에 바람이 있다’고 하니까, 당연히 천사가 아니겠냐? 5:9

 

그런데 또 한편 문제가 되는 건 뭐냐면, 날개만 있었으면 괜찮은데 ‘학의 날개’라는 거예요.

율법에 보면, 학은 ‘부정한 짐승’으로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정한 짐승의 날개를 달고 나타났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거를 하나님의 어떤 천사나 하나님의 존재로 보기에도 애매한데,

그런데 그 날개 밑에 ‘바람’이 있단 말이에요.

 

바람은 분명히 ‘하나님이 행하신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이 학의 날개를 가진 여인이 나타났는데,

이 여인이 아무리 날개가 있어도, 그 밑에 바람이 있으니까, 날아가는 거죠.

 

날아가게 하는 힘은 어디서부터 온다는 거예요?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거예요.

날아가도록 하는 힘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데,

또 날개만 놓고 봤을 때는, 부정한 짐승인 학이에요.

그래서 이게 좀 애매한 존재죠. 해석하기에 까다로워요.

 

그래서 또 반대로 어떤 학자들은

이 ‘두 여인’이라는 것을, 바벨론과 앗수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고, *악한 나라

또 어떤 사람은 로마와 헬라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 무엇이든지 간에 이 ‘학의 날개를 가지고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두 여인’은

애매한 존재이긴 한데, 하여간 하나는 분명합니다. 그건 뭐냐면 하나님의 섭리적인 존재,

섭리적인 역사에 의해서 예루살렘으로부터 구조적인 악을 제거하는 존재라는 뜻이에요.

그건 분명하죠.

 

그런데 그 존재가 정말 천사일지,

아니면 그 존재가 바벨론이나 앗수르처럼, 별로 거룩한 존재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주권적이고 섭리적으로 사용하신 건지... 그거는 잘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하여간 확실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이 땅 가운데 있는 구조적인 악을 하나님이 제거하실 거라는 거예요.

 

▲그리고 실제 역사를 보면 그렇게 일하셨죠.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가운데, 죄가 구조화되고 죄가 극에 달했을 때에,

바벨론하고 앗수르를 사용하셔서 그 악의 구조를 무너뜨리시잖아요.

 

그렇다고 앗수르와 바벨론이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들이냐? 또 그건 아니잖아요.

걔네도 그냥 죄인이에요. 걔네도 타락한 자들이지만,

그냥 하나님께 섭리적으로 사용하신 거죠. 구약에 보면 그런 예들이 많이 나옵니다.

 

예후와 하사엘을 들어서 아합과 이세벨의 잔당들을 처리했는데,

그렇다고 예후나 하사엘이 하나님의 사람이냐? 그건 또 아니에요.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악을 들어서 악을 치시는 예도 많이 나옵니다.

악을 들어서 악을 무너뜨리는 일이 많이 나와요.

 

그런 의미에서 이 ‘학의 날개를 가진 두 여인’은, 그 정도로 이해하시면 될 것 같아요.

하나님의 섭리적인 어떤 역사에 의해서, 그것은 하나님이 직접 뭐를 행하실 수도 있고,

아니면 비록 거룩한 존재는 아니지만, 하나님이 사용하실 수도 있고...

하여간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의 도구로 쓰였던 자들.

 

△우리나라로 예를 들자면, 이런 악한 구조와 악한 법들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지도자로 세우셨는데,

그렇다고 이 사람이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 사람은 아니에요. 그냥 불교신자일 수도 있어요.

 

그래도 그 사람을 사용하셔서, 이 법을 무너뜨리실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게 ‘학의 날개를 가진 두 여인’에 대한 의미입니다.

 

어쨌거나 ‘하나님께서 섭리적으로 사용하셔서 이 일들을 행하신다’ 하는 정도로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7 번째 환상의 내용은, 구조화된 악인 ‘에바와 여인’을 봉인하셔서,

멀리 옮기셨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 내용은 계시록 18장에 나오는 큰 성 바벨론이

하루아침에 무너진 것과 똑같은 내용입니다. 같은 결(무늬)의 내용이고, 같은 예언입니다.

 

이 '바벨론 구조'라는 건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무너질 때는 한꺼번에 무너지는 속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조를 해결하려면, 전쟁이나 경제 위기나 이런 걸 통해서,

그냥 한꺼번에 흔드시거든요. 보통은 그렇거든요.

 

항상 그렇다고 하면, 우리가 너무 절망적이겠지만, 하여간 보통은 그렇거든요.

그래서 이런 구조가 무너질 때 보면, 순식간에 무너져요.

점진적으로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그런 속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슥5:10절과 11절에 보면↑,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 나옵니다.

이들이 에바와 여인을 예루살렘에서 떼어내서 어디론가 옮겨가는데,

어디라고 나오죠? 시날이라는 거예요.

 

시날이 어디냐면 바벨론입니다. 시날은 바벨론이랑 같은 말이에요.

그러니까 바벨론으로 옮겨간다는 거예요.

 

시날, 즉 바벨론으로 옮겨가는데, 그래서 그 여인과 에바가

그 시날을, 즉 바벨론을 처소로 삼고, 거기에 집을 짓습니다.

 

지금 그 학의 날개를 가진 두 여인이

예루살렘에서 악한 영과 구조를 제거하는데, 그 제거된 것이 어디로 가요?

바벨론으로 옮겨가서, 그곳에 처소를 삼고 집을 짓는다는 거예요.

 

무슨 얘기냐면, 이 ‘구조화된 악, 에바 속의 여인’은

비록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에 의해서 예루살렘을 떠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이 땅에서 완전히 제거되는 것은 아니라는 거예요.

 

비록 예루살렘을 떠나지만, 이 땅에서 완전히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시날이라는 다른 장소에 가서, 거기서 다시 똬리를 틀고,

그곳을 다시 처소를 삼고, 다시 집을 짓는다는 거예요.

 

에바 속 여인이 ‘악한 영’이라면, 에바는 그 영이 만들어내는 어떤 구조죠.

그 악을 담아낼 수 있는 구조입니다. 문화화되고 구조화되는...

 

그래서 여러분, 보면 문화가 되고 구조화되는 죄들을 보면, 개인의 죄도 마찬가지이긴 한데,

그 배후에 보면 반드시 영적인 것이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세요.

 

이 죄라는 것은, 원래 인간의 양심에 의하면 거부해야 되는 거거든요.

‘저걸 어떻게 거부해야 되는데’

한두 사람도 아니고, 수많은 사람들이 거부하는...

죄를 보고도 아름답다고 하고, 죄를 보고도 괜찮다고 하고,

이 정도 역사가 일어나려면, 뒤에 역사하는 (마귀의) 영이 있는 거예요.

 

아무 영이 없는데, 그 수많은 사람들이 똑같이 속겠습니까?

사람도 생각을 할 수 있는 존재인데, 그게 영이 있는 거예요.

개인적인 죄도 마찬가지이긴 한데, 특별히 이렇게 죄가 문화가 되고 구조화되는 데는,

반드시 그 뒤에 역사하는 영이 있습니다.

 

음란의 영이 있던지, 아니면 권력의 영이 있던지,

착취하는 영이 있던지, 동성애의 영이 있던지...

하여간 그것을 계속 좋은 것이라고 속이고, 사람들을 미혹하는 영적인 게 있는 거죠.

 

그래서 이 구조화된 악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뭐를 먼저 해야 된다고요?

납으로 에바를 먼저 봉인해야 돼요.

떠나보내는 게 먼저가 아니라, 여인을 활동하지 못하도록,

딱 납으로 에바를 봉인해버리는... 이게 영적인 전쟁의 시작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이 영의 세력들을 계속 묶어야 돼요.

‘더 이상 우리 사회 가운데, 이런 악한 영적인 영향력이 없도록 해 주십시오.

사람들이 미혹되지 않게 해 주십시오.

이 악한 영의 영향력으로 말미암아, 악이 의로운 것처럼 속이는 그 역사가

멈추게 해 주십시오’

 

‘동성애의 영이 끊어질지어다. 음란의 영들이 더 이상 작동하지 못할지어다.

또 탐욕과 욕심의 영들이 다 묶임을 당할지어다!’

이 영적인 전쟁이 교회에서 먼저 수행되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압으로 이 에바 뚜껑을 탁 봉인해버리지 않으면,

그럼 그 다음에 떠나보내는 것도 없는 거죠. 먼저는 봉인해야 된다는 거예요.

순서가 먼저는 봉인해야 된다는 거예요. 5:7~8

 

우리의 영적인 싸움이 어디서부터 시작돼야 되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이 죄악의 영, 여인으로 묘사된 죄악의 영은 마귀죠.

원수마귀인데... 예수께서 다시 오셔서 이 땅을 완전히 새롭게 하실 때까지는,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게 성경의 메시지죠.

 

그래서 마지막 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원수마귀를 잡아서

영원한 무저갱에 집어넣어 버리시는데,

그 전까지는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지진 않는다는 거예요.

예수께서 오실 때까지는...

 

그래서 비록 우리가 선 곳 예루살렘에서,

이 영을 묶고 에바를 떠나보낼 수는 있지만,

그러면 그것은 다른 곳, 시날로 가서 처소를 삼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도 보면, ‘처소’라는 것은 뭐냐면, 성경에서 처소는 뭐예요?

‘우리 몸이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인 거죠.

처소는 영이 거하는 어떤 베이스를 얘기하는 겁니다.

 

영이 거할 수 있는 어떤 베이스를 상징한다면, 집이라는 것은 구조를 상징하는 거예요.

그래서 시날에 가서 ‘처소를 삼고 집을 짓는다’ 그건 뭐예요?

이 영이 시날 땅에 머물면서 그곳에 역사하면서,

거기도 또 다른 구조들을 만들어간다... 이런 뜻이죠. 5:11

 

그러니까 이 영을, 이 ‘에바 속의 여인’을,

우리가 예루살렘에서 영적 싸움을 통해서 떠나보낼 수는 있는데,

그렇다고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떠나보내면, 또 저기 가서 똬리를 틀고,

또 저기서 떠나보내면, 또 그 다음 자리로 가서 똬리를 틀고... 이런다는 거예요.

 

거기서 ‘처소를 삼고 집을 짓고’ 이렇게 한다는 거죠. 5:11

그래서 성경에 보면 이 시날, 즉 바벨론은 결국

역사의 마지막이 됐을 때, 완전히 해결하세요. 그 전에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어요. 계18장

그 전에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고, 역사의 마지막까지 계속 미뤄집니다. 심판이 미뤄져요.

 

그건 아마 하나님께서 심판하다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칠까 봐 그러신다고, 저는 믿는데,

하여간 그래서 미루고 미루고 미루시다가,

마지막 예수님께서 오실 때, 큰 성 바벨론을 계18장에서 하루아침에 무너뜨리시고,

그리고 원수마귀는 잡아다가 무저갱에다 집어넣으시고, 계20장

그때까지, 즉 재림 때까지 미뤄진다는 거예요.

 

그래서 재림 전까지는 이 악한 영이 모양만 바꿔가면서

계속 여기서 쫓겨나면 저기 가서 역사하고, 저기서 쫓겨나면 여기 가서 역사하고,

이런 식으로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날’이라는 것은, 어떤 특정한 물리적인 장소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이 악의 구조가 만들어지는 곳을, 다 ‘시날’이라고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죠.

 

그래서 예를 들면 우리가 서울에서 열심히 영적 전쟁을 해서 쫓아내면,

악한 영적 세력들이 또 대구에 가서 그 영이 똬리를 틀 수 있고,

대구에서 쫓아내면 어디 다른 곳에 가서...

자, 그런 식으로 이 악한 영이 역사하는 곳을 다 ‘시날(바벨론)’이라는 상징적인 표현을

쓴 것이에요.

 

그렇다면 예루살렘도 역시 마찬가지예요.

예루살렘도 물리적으로 이스라엘의 예루살렘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는 땅, 하나님의 법이 다스리도록 거룩하게 만들어간 곳,

그 성읍, 그 터전을 예루살렘이라는 거죠.

 

그래서 우리에게는 두 선택이 있는 거예요. 예루살렘이냐, 시날이냐?

이 두 선택이 우리 앞에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에바와 여인, 바벨론 시스템이 이 땅에서 완전히 제거되는 때는,

구원이 구조적으로 완성되고, 하나님 나라가 구조적으로 완성되는 마지막 때까지 미뤄집니다.

 

그러나 중요한 건 뭐냐면, 이 에바와 여인을 지구상에서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어도

예루살렘, 하나님의 백성이 거하는 성읍에서 떠나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게 크리스찬의 사명이고, 이게 중요한 거예요. 그게 사명이고 이게 중요한 거예요.

 

▲마치는 말

악한 구조와 악한 영과 모든 악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까지

완전히 해결되는 건 불가능해요 어차피 여기서 쫓아내면 저기서 역사하고,

저기서 쫓아내면 여기서 역사하고... 이렇게 돌아다닐 거예요. 시날에 똬리를 틀 거예요.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요. 그것은 예루살렘에서 쫓아낼 수는 있어요.

그 얘기를 바꿔 얘기하면, 우리가 선 곳이, 우리의 터전이,

예루살렘이 되게 할 수는 있다는 거예요.

우리가 선 곳이 예루살렘이 되게 할 수는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께서 다시 오시기 전까지,

우리는 우리가 속한 성읍을 예루살렘이 되게 할 것인지,

아니면 시날(바벨론)이 되게 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됩니다.

이것이 우리 크리스찬들에게 주어진 사명이라는 거예요.

 

정치구조, 사회구조, 경제구조, 교육구조, 종교구조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에바와 여인을 봉인하고 우리가 사는 이곳에서,

우리가 숨쉬고 있는 이 상황 가운데서 멀리 떠나보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을 봉인해야 되고, 납뚜껑을 들어서 봉인해야 되고

우리가 사는 곳으로부터 멀리 떠나가도록 싸워야 될 책임이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은 가능하다는 거예요. 죄를 완전히 지구상에서 멸하는 것,

그것은 주님 다시 오실 때 일어날 일이겠지만,

그 전이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사는 곳에서부터 에바와 여인을 봉인하고

멀리 떠나보내는 일은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사회구조가, 우리의 교육구조가, 우리의 정치구조가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고 선한 구조가 되게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건 불가능하지 않다는 거예요.

 

‘온 세상의 모든 구조를 그렇게 바꾸겠다’ 그건 아니에요, 그건 불가능해요.

예수님 오실 때까지 안 돼요.

 

오시기 전에,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역,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는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거예요. 이 싸움을 싸울 수 있다는 거예요.

 

비록 우리가 쫓아낸 ‘에바 속 여인’이, 시날 땅에 가서 또 다른 똬리를 틀고,

물론 그렇게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숨쉬고 있고 우리가 살고 있는 예루살렘에서는 쫓아낼 수 있다는 거예요.

그것을 행하라는 거예요.

그것을 행하라는 것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인 줄 믿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 사명에 실패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렇다면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시날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시날은, 즉 바벨론은.. 마지막 때에 심판받고 무너지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선 곳이 시날이 된다, 바벨론이 된다는 것은..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예수께서 심판하실 때에, 무너지는 곳이란 뜻이에요.

 

예수께서 그 구조를 무너뜨리실 때, 우리 사회 구조까지 다 한꺼번에 무너져버리는 거예요.

마치 바벨론과 앗수르의 날처럼!

 

이것이 우리에게 주시는 경고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마지막 때를 맞이하는 우리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는 거예요.

-예루살렘에서 맞이할 것이냐?

-아니면 시날에서 맞이할 것이냐? 두 가지 중에 선택하는 거예요.

 

종말은 여러분, 그냥 무기력하게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모든 종말에 대한 메시지는,

굉장히 적극적인 사명이 부여되는 때이지,

종말은, ‘어차피 고난이 있는 거야.. 어차피 그냥 우린 어쩔 수 없어..

핍박 가운데 도망다니다가 죽든지 살든지 하는 거야..’ 이게 성경의 메시지가 아니라는 거죠.

 

종말에 대한 메시지는, 굉장히 적극적인 사명이 부여되는 때입니다.

그래서 종말에 대한 제일 큰 사명이 뭐예요?

 

마24:14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증거하라’는 것이죠.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증거해야 될 책임이 있고,

또 우리가 선 곳이 시날이 아니라, 예루살렘이 되도록 할 책임이 있다는 거죠.

 

그래서 종말을 맞이해도.. 똑같이 맞이하는 것이 아니에요.

예루살렘에서 종말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있고요.

시날에서 종말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종말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하면서,

큰 영광과 사명과 기쁨 가운데 하나님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 시날에서 맞이하는 사람들은.. 구원은 받겠죠. 개인적으로.

그러나 시날에서 맞이하는 사람들은.. 큰 두려움과 핍박과 심판과 몰락 가운데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선택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개인적인 선택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선 땅은

단순히 우리의 개인의 삶에서 주신 죄를 제거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의 환경과 터전에서,

악한 것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시날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 땅을 잠식해오고, 이 땅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모든 영적인 세력은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리 묶임을 당할지어다’

우리가 함께 저항하고, 함께 싸우고, 그것이 구조화되지 못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똬리를 철지 못하게 하고,

 

그래서 우리가 마지막 때를 맞이할 때,

우리가 선 땅이 영광스러운 예루살렘이 되도록 합시다. 할 수 있습니다.

깨어서 우리가 기도하고, 깨어서 이 문화와 법을 지혜롭고 적극적으로 저항한다면,

우리는 시날에서 예수를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맞이할 수 있어요.

 

물론 마지막 때는 심판과 큰 환란이 있는 때이긴 하지만, 다 똑같지 않다는 거예요.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사명을,

어떤 교회들은 그들의 사명을 놓치고 간과하였기 때문에

시날 땅에서 훨씬 더 큰 두려움과 환란 가운데 종말을 맞이하는 사람들도 있겠고,

 

반대로 이 거룩한 싸움, 거룩한 죄에 대한 저항을 선한 싸움을 충실하게 싸워왔기 때문에

영광된 예루살렘 가운데 새하늘과 새 땅을 보게 될, 그런 하나님의 백성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도록 우리 기도하며 성도의 싸움을 싸워 나갑시다!

우리 이 마음 가지고 ‘주여’ 세 번 같이 부르고 합심해서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