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05 17 창세기 강해 (15) / 창4:16-26 / 가인의 후손과 셋의 후손
◈가인의 후손과 셋의 후손 창4:16~26 2026.05.17.
★가인의 후손 라멕과 셋의 후손 라멕 (예수님의 족보 9강) rfcdrfcd.tistory.com/15980768
★에노스 이름에 담긴 복음적 메시지 (예수님의 족보 3강) rfcdrfcd.tistory.com/15974738
오늘 본문 창4:16~26에는 두 개의 족보가 나옵니다.
가인의 후손과 셋의 후손입니다.
사실 이 족보는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의 족보입니다.
창세기 3:15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결국 딱 두 개의 족보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입니다.
뱀의 후손은 불택자, 즉 불신자입니다.
여인의 후손은 택자, 즉 신자의 족보입니다.
영적으로는 이렇게 두 개의 족보만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가인의 후손과 셋의 후손도 이 족보를 따릅니다.
가인의 후손은 뱀의 후손, 즉 불신자의 족보입니다.
셋의 후손은 여인의 후손, 즉 신자의 족보입니다.
같은 집안이지만, 영적으로는 서로 다른 족보입니다. 정 반대의 족보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도 다릅니다.
이것을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라기는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셋의 후손처럼 살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는 가인의 족보, 그리고 셋의 족보를 살펴보겠습니다.
◑1. 먼저 <가인의 후손>
창4:16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여기 아주 중요한 표현이 나옵니다. 바로 ‘여호와 앞을 떠나서’라는 표현입니다.
이 말은 수동태가 아니라, 능동적인 표현입니다.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밖으로 나가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즉, 가인은 스스로 원해서, 하나님을 떠났다는 말입니다.
자기 스스로 하나님 없는 인생을 선포하고, 무신론자가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자기가 자신의 하나님이 되어, 자기 스스로를 지키며 살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완전히 하나님으로부터 독립된, 자기 만의 삶을 살아가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여러분, 가인은 영적으로 뱀의 후손입니다. 불신자의 표본이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영적으로 이 가인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들이 살아가는 삶의 양식의 출발점이 바로 이 지점입니다. ‘여호와 앞을 떠나서’입니다.
모든 죄악된 인생은, ‘하나님을 떠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을 떠나 자기 자신이 인생의 주권자가 되고,
스스로의 보호자가 되기로 결심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의 전형적인 삶의 양식이,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바로 ‘여호와 앞을 떠나서’ 가인은 여호와 앞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가 도착한 곳이 어디입니까? 에덴 동쪽 놋 땅이었습니다.
‘놋’ 땅이라는 말도 의미가 있습니다.
성경 아래 각주에 보면, 히브리어로 ‘놋’은.. ‘방황, 유리함’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분명 가인은 내 힘으로 한번 잘 살아보겠다고, 당당하게 여호와 앞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 당당했던 걸음의 종착지는, 다름 아닌 방황의 땅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결국은.. 이처럼 다 ‘방황’입니다.
다시 하나님께 돌아온 사람들의 간증을 들어보십시오.
결국은 다 돌고 돌아서,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는 것 아닙니까?
산전수준 다 겪은 후에 깨닫게 되거든요.
‘이 세상에서는 평안이 없구나, 안식이 없구나, 구원이 없구나...’
그래서 교회 전도지 뒷면에 보면, 이런 문구가 적혀져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방황은 하나님을 만나면 해결되고,
신앙의 방황은 좋은 교회를 만나면 해결됩니다!」
여러분은 방황이 해결되셨습니까? 어거스틴도 <고백록>에서 말했습니다.
‘우리 영혼은 하나님 품에서 안식을 찾기 전까지는, 결코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없다!’
어거스틴도 하나님 없이 방황했던 시절이 있었거든요.
하나님을 떠난 사람의 결국은 ‘방황’입니다.
오늘 가인의 행적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여호와 앞을 떠났는데, 그가 도착한 곳이 바로 ‘놋 땅’, 즉 방황의 땅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놋 땅이 주는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앞에서 하나님은 가인에게 벌을 주셨습니다. 어떤 벌을 주셨는지 기억나십니까?
창4:12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하나님은 가인에게 벌을 주셨습니다. ‘너는 앞으로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할 거야.
너는 앞으로 떠도는 삶을 살아야 돼. 유리 방황하며 살아야 돼’
그 하나님의 벌을 상기시켜 주시는 곳이 바로 ‘방황의 땅, 놋’ 이라는 땅이었습니다.
☞방황하는 이 세대 https://rfcdrfcd.tistory.com/15975151
▲그런데 가인이, 이 놋 땅에서 한 일이 있습니다.
창4:16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17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가인이 놋 땅에서 두 가지 일을 했습니다.
-하나는 성을 쌓았습니다. 성의 이름을 에녹이라고 지었습니다.
-또 하나는 자식을 낳은 일입니다.
창세기는 시작의 책이라고 했습니다. 최초로 성을 건축한 사람이 가인입니다.
건설사의 아버지가 가인입니다. 특히 ‘성’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이르’입니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마을, 도시를 일컫는 용어입니다.
일반적으로 평범한 도시는 히브리어로 '하체르',
성벽이 있는 도시는 '이르'라고 합니다.
가인이 만든 도시는 '이르'입니다. 평범한 도시가 아니라, 성벽이 있는 도시를 만들었습니다.
높은 성벽을 쌓고서, 그 안에서 살았습니다.
◑가인이 성을 쌓은 이유
그러면 왜 가인은 평범한 도시가 아니라, 높은 성벽을 쌓고서, 그 안에 살았을까요?
단순히 비바람을 피하고 살기 좋은 신도시를 만들기 위해서였을까요? 아닙니다.
이 높은 성벽에는 가인의 두 가지 불신앙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1. 가인은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누군가가 아벨의 복수를 위해,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사실 가인은 복수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을 보호하신다고 약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창4: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하나님은 떠돌아야 하는 가인에게 표를 주셨습니다. 이 표가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습니다.
몸에 새긴 어떠한 뭐 문양(문신) 같은 건지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하나님이 가인을 보호하고 계시다’는 표였던 것 같습니다.
이 표를 보는 사람들은 알았을 겁니다. ‘아, 가인을 죽이면 안 되겠구나.
하나님이 가인을 보호하고 계시는구나’ 그 표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가인에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가인을 죽인 자는 벌을 7배나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이는 피해의 보복을 막는 하나님의 장치였습니다.
왜냐하면 죽은 아벨의 다른 형제나, 조카 혈육이 있었거든요.
그러면 가인에게 찾아가 복수할 수 있습니다.
‘감히 가인 네가, 우리 형제, 또는 우리 삼촌 아벨을 죽였어? 너도 한번 죽어봐라’
이렇게 가인을 찾아와서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죽은 가인의 가족이 또 복수할 수 있습니다.
‘피의 복수’라는 악순환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악의 사슬을 끊으시려고, 가인을 보호하는 표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높은 성벽을 쌓고, 그 안에 살았습니다. 왜요?
하나님의 보호의 약속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지켜주신다고 표를 주셨는데, 그걸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두려웠겠죠. 불안했겠죠. 믿음이 없으니까요.
여러분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의 두려움도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는 데서 올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가인은 자기를 지켜줄 성을 쌓았습니다.
그러니까 ‘성을 쌓았다’는 것은 단순한 주거공간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 스스로 자기를 보호하겠다는 의미입니다. 불신앙적인 행위입니다.
오늘날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떠나간 사람들은 다 두려움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용감한 것 같아도, 속으로는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불안함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요즘에 하는 ‘모자 무사’ 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JTBC 토일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의 줄임말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드라마를 잘 안 보는데요. 그 드라마 작가를 제가 참 좋아합니다.
그 드라마에서 인상적인 대사가 있었습니다. 주인공이 구교환이라는 배우인데요.
극중에서 형이, 동생 구교환에게 묻습니다. ‘대체 네가 원하는 인생이 뭐야?
네가 원하는 삶이 대체 뭐냐고?’
그러자 부교환은 울먹거리면서 말합니다. ‘불안하지 않는 거, 그냥 불안하지 않는 삶!’
그 대사에서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하더라고요.
댓글을 찾아보니까 ‘나도 그렇다고.. 내 얘기라고...’
사람들은 이렇게 다 두려움과 불안함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두려움과 불안을 느낍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견고한 성이 되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다 두려움과 불안함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가인처럼 자기만의 성벽을 쌓으며 살아갑니다.
스스로 지켜줄 성을 쌓으며 살아갑니다.
누군가는 돈으로, 누군가는 인맥으로, 누군가는 권력으로, 누군가는 학벌 쌓기로...
다 뿌리는 ‘가인의 불안’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불안,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불안,
내가 스스로 나를 지켜야 한다는 불안, 불신앙적인 불안,
그래서 가인은 자기를 보호하려고 성을 쌓았습니다.
▲2. 가인이 성을 쌓은 것은 하나님께 대한 정면도전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벌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어떠한 벌이었죠?
‘떠돌며 살라’는 벌이었습니다. 4:12
그러나 가인은 성을 쌓고 그 안에서 살았습니다. 여러분 어떠한 의미죠?
‘나는 떠도는 삶을 살지 않겠다’는 거죠. 한 지역에서, 그 안에서 살았습니다.
머물며 살기로 결심했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유리 방황해야 하는 벌을 주셨는데,
가인은 마치 하나님의 징벌을 비웃듯 ‘나는 그것하고 아무 상관없이 관계없이 살겠다’는
반항입니다.
참 이 정도면, 여러분 대단한 ‘똘끼’ 아닙니까? *돌아이 기질
그러니까 가인이 성을 쌓은 것은, 단순한 건축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정면도전이자 반역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가인이 성을 쌓은 다음에 그 성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뭐라고 지었냐면 자기 아들 에녹의 이름으로 성을 지었습니다.
‘에녹성’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여러분 어떤 건물이나 거리에 사람의 이름을 붙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사람의 이름을 기리고, 그 이름에게 영광을 돌리는 행위입니다.
제가 신혼 때 살던 동네 주소가 ‘효창동 백범로’였습니다.
독립운동을 했던 김구 선생님의 호, ‘백범’을 기르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죠.
또 광화문에 가면 ‘세종문화회관’이 있습니다. 세종대왕의 이름을 딴 장소이죠.
누구의 이름을 딴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이름을 기리고, 그 이름에 영광을 돌린다는 뜻입니다.
가인이 성을 쌓고, 자기 아들의 이름으로 지었습니다. ‘에녹성’
아들의 이름을 기리겠다는 뜻입니다. 아들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겠다는 뜻입니다.
정확히는 아들을 통해 내 이름, 내 가문을 드러내고 영광을 받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라, 이제 우리의 이름을 내고, 우리의 이름을 알리겠다는 선언입니다.
△이 그림이 뒤에 또 한 번 나오는데요. 바로 바벨탑 건축입니다.
창11장에 가면, 사람들이 바벨탑을 짓습니다. 그때도 똑같습니다.
바벨탑을 쌓고 사람들이 뭐라고 말했냐면
‘우리가 우리의 이름을 내고 우리가 흩어짐을 면하자’고 했습니다.
바벨탑의 시조가 에녹성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사람들의 모든 초점은, 이렇게 자기 이름, 자기 영광에 몰두합니다.
여러분 오늘날도 그렇지 않습니까? 누구나 여건만 되고 능력만 되면
자기 이름을 남기려고 합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남겨야 할 이름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고전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우리 인생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지 않습니다.
우리가 남겨야 할 이름은 ‘하나님의 이름’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정반대의 길을 걸어갑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라, 자기 이름 자기 영광을 남겼습니다.
그 이름이 바로 ‘에녹성’이었습니다.
이 에녹성에서 가인은 자식들을 낳으며 정착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가인의 자손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하나님을 떠나 살았으니 망했을까요? 아니면 번성했을까요?
일반적으로 가인과 그의 후손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살았기 때문에
망했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가인의 후손들은 망하지 않았습니다.
망하기는커녕 성공하고 번성했습니다.
본문 18절부터 가인의 후손들이 나오는데요.
4:18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18절은 시간이 빠르게 지나갑니다. 가인의 5대손이 한 절에 다 나옵니다.
에녹부터 라멕까지 빠르게 지나갑니다. 성경이 이렇게 서두르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라멕이라는 인물에게 우리의 시선을 고정하기 위해서입니다.
▲라멕 (가인의 5대손)
라멕 한 사람만 제대로 들여다보면, 가인의 후손들이 그 성벽 안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모든 것을 알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라멕의 삶이 19절에 나옵니다.
4:19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세기는 '시작의 책'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또 다른 시작, 일부 다처제가 처음 나옵니다.
라멕은 두 아내를 맞이했습니다. 라멕이라는 이름의 뜻이 ‘강한 자’입니다.
강한 자, 힘있는 라멕은 아내도 둘이나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질서는 일부일처제입니다. 그러나 라멕은 하나님의 질서도 보란듯이 깨트립니다.
일부다처제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성적 부도덕과 타락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라멕은 왜 두 아내를 두었을까요? 누가 삶의 중심이기 때문이죠?
자기 자신이 삶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이런 거죠.
‘하나님이 무엇을 제정하시든 상관없어,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하고 말 거야!’
‘선과 악의 기준은 다 내가 정하는 거야’ 그래서 아내도 둘이나 얻었습니다.
그러니까 가인보다 더 악해져 갔습니다. 죄가 더 깊어지고, 넓게 확장되고 있습니다.
가인은 그래도 한 아내를 두었는데, 5대손 라멕에게 이르러서는 일부다처제가 생겨났습니다.
두 아내를 두었습니다.
한 아내의 이름은 아다, 또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습니다.
△두 아내 모두 자식을 낳았습니다.
4:20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아다는 야발을 낳았습니다. 야발은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물론 아벨도 전에 가축을 쳤습니다. 그러나 아벨은 작은 가축을 쳤습니다. 양을 쳤습니다.
또 들에서 쳤습니다. 방목의 형태였습니다.
그러나 야발은 큰 가축을 쳤습니다. 작은 가축만 아니라, 큰 가축 떼들을 쳤습니다.
또 들이 아니라, 집에 붙들어 놓고 대규모로 길렀습니다.
단순히 몇 마리가 아니라, 기업적인 목축을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야발은 장막에 거하면서 가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20
특히 중동 지방에서는, 한 분야에서 대단히 성공한 자들을 ‘그 분야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야발은 평범한 목자가 아니라, 엄청나게 성공한 목자였습니다.
기업형 목축업자로서 상당한 부를 축적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기업형 축산업을 세운 대기업 CEO와 같은,
마치 삼성과 같은 대기업을 이룬, 그 시대에 엄청난 부와 자본을 축적하여 성공신화를 쓴
가장 부유하고 힘있는 경제인이 야발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다는 둘째 아들을 낳았습니다. 야발의 동생 유발을 낳았는데요.
4:21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유발은 세상 음악가들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음악의 아버지’는 바아가 아니었습니다.
최초로는 유발이었습니다. 문화예술의 조상이 유발이었습니다.
유발도 ‘조상’이라고 하는데요. :21
대단히 탁월한 음악가였다는 뜻입니다.
△라멕의 두 번째 부인인 씰라도 아들을 낳았습니다.
4:22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씰라의 아들 두발가인도 탁월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기계공학의 아버지였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엔지니어의 아버지였습니다. 구리와 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들었죠.
공업의 발전과 과학기술의 발전이 두발가인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두발가인을 ‘과학자’라고도 부릅니다.
게다가 씰라의 딸 나아마가 소개됩니다.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22b
여러분 놀라운 기록입니다. 그 당시 여자의 이름은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아마’란 이름이 나온다는 것은, 그만큼 당대에 굉장히 유명한 인물이었다는 뜻이죠.
그녀는 무언가 세상 사람들에게 주목받을 만한 어떤 것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미모가 출중했다든지, 아니면 다른 그 무엇으로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는 여인이었습니다.
이처럼 가인의 후손들은 다 성공했습니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대단히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인류 문명의 시조, 조상들이 다 가인의 후손들이었습니다.
인류 문화와 문명이, 놀랍게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인의 후손들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경제면 경제, 예술이면 예술, 과학이면 과학, 다양한 분야에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어쩌면 그 시대에 모두가, 가인의 자식들을 부러워할 만큼, 대단히 큰 성공을 이루었습니다.
자식들이 다 성공했고요. 하나같이 다 잘 풀렸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속으면 안 되는 게 있습니다.
가인의 후손들은 겉보기에는 다 성공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렇잖아요.
야발.. 목축, 즉 경제인의 조상,
유발.. 음악예술의 조상,
두발가인.. 과학과 기술의 조상... 다 여기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딱 하나 없는 게 있습니다. 뭐가 없습니까?
딱 하나 없는 거는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없습니다.
세상 것은 다 있는데, 예배드리는 사람이 없습니다.
음악이 있는데, 예배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는 음악이 여기서 시작되었습니다.
세속적인 음악의 시작이 가인의 후손들이었습니다.
목축업도 마찬가지죠. 원래 아벨이 양을 쳤습니다.
아벨이 양을 칠 때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고 양을 쳤습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목축업이 시작되었습니다.
단순히 돈을 많이 벌기 위한, 돈이 목적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또 기술과 과학이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발전이었습니다.
문명이 발전하고 예술이 꽃을 피우는데, 하나님과 전혀 상관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자기중심적이며, 인간중심적인 문명을 건설했습니다.
△그러면 정말 발전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죄악의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4:23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라멕은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그런데 라멕은 살인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살인 행위를 자랑합니다. 아내들을 불러서 자랑합니다.
더 소름 끼치는 건, 소년도 죽였다고 자랑합니다. 어린아이인데요.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다’고 노래합니다.
여기서 ‘상함’은, 타박상이나 멍이 들 정도의 가벼운 상처입니다.
여러분 소년이, 어린아이가 상처를 입히면 얼마나 입히겠습니까?
기껏 타박상이나 가벼운 상처겠죠.
그런데 그 타박성을 좀 당하였다고, 라멕은 그 아이를 죽였다고 자랑합니다.
아내들을 불러놓고 자기 죄를 막 자랑합니다.
심지어 24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패러디합니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7배일진데,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77배이로다 하였더라’
하나님의 말씀은 7배였습니다. ‘가인을 죽이면 7배의 벌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라멕은 뭐라고 말합니까?
‘만약 누군가가 나 라멕을 건드리면, 나는 77배의 벌을 갚겠다’고 외칩니다. :24
자신이 하나님보다 더 큰 힘을 가졌다는 거죠.
내가 하나님보다 더 무서운 벌을 내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폭력적이고 교만한 모습이 나타납니다.
★'나는 77배의 벌을 갚겠다’가 수동태로 되어 있고, 그러면 전혀 다른 해석이 나옵니다. ↓
가인의 후손 라멕과 셋의 후손 라멕 (예수님의 족보 9강) rfcdrfcd.tistory.com/15980768
그러니까 하나님을 떠난 가인의 후손들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이 무엇입니까?
점점 더 죄가 심해져 갔습니다. 점점 더욱 죄를 짓고 악해져 갔습니다.
‘가인의 후손’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가인의 후손들은.. 세상적인 기준으로는 매우 성공하고 번성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으로는 매우 부패하고 타락한 사람들이었을 뿐입니다.
◑2. 이제 <셋의 후손들>을 살펴보겠습니다.
25절부터는 셋의 후손들이 소개됩니다. 그런데 밋밋해 보입니다.
두 절밖에 되지 않습니다. 4:25절과 26절이 전부입니다.
앞에 가인의 후손의 이야기는 9절이나 할애되었습니다.
그러나 셋의 후손의 이야기는 달랑 두절입니다.
읽어보시면 별 이야기가 없어 보입니다.
가인의 후손들과 같이, 성공한 이야기가 하나도 없습니다.
세상적인 성취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이 셋의 후손에는, 가인의 후손을 특징 짓는 것들이 하나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반전이 하나 있습니다. ↓
4:2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여러분, 가인의 후손들이 경제, 예술, 과학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이루고 있을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26
성경은 셋의 후손들에 관하여 한 가지 설명밖에 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했다는 말입니다.
가인의 후손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만을 추구할 때,
셋의 후손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물론 그 전에도 예배를 드렸습니다. 아벨도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에노스 시대에 이르러서는, 공적인 예배가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와 같이 공적이고 공동체적인 예배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규칙적으로 정기적으로 모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히 주목할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비로소’ 라는 표현입니다.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26
여러분 ‘비로소’라는 표현을 언제 쓰십니까? *히 ‘오즈’, 감탄사적 표현
한참을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비로소 마침내’ 그 일이 일어날 때, ‘비로소’라는 말을 사용하죠.
우리나라가 1910년에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45년 8월 15일에 비로소 해방이 되었습니다.
‘비로소’는 이럴 때 쓰는 표현이죠. ‘기다렸다’는 말입니다.
기다림이 길어지다가 마침내 발생했을 때, 그때 ‘비로소’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잘 보세요. 가인의 후손들이 문화와 문명을 만들었습니다.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그 모습을 묘사하는데, 단 한 번도 ‘비로소’를 얘기하지 않습니다.
가인이 비로소 성을 쌓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야발이 비로소 가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됐다고 하지 않습니다.
유발이 비로소 수군과 퉁소를 잡는 음악인의 조상이 됐다고 하지 않습니다.
두발가인이 비로소 철과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들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 모든 것들은 문명사적으로 위대한 전환점들이었습니다.
아마 세상 역사책에 보면 이 부분에서 다 ‘비로소’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을 겁니다.
‘인간이 비로소 그때부터 철기를 사용하게 되었더라’
‘인간이 비로소 어떤 기계를 개발하게 되었더라’ 혹은
‘그가 비로소 그 사업에 성공하게 되었더라’
그러나 성경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관점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인류문명의 대전환이 일어난 일에, 한 번도 비로소 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성공과 업적을 이룬 이래 단 한 번도 비로소 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왜요? 관심이 없거든요. 그거 정말 별거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다가 놀랍게도 오늘 성경을 선포합니다.
‘그때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26
하나님의 관심은 바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을 통해, 당신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은 셋의 후손 에노스를 통해, 오실 여인의 후손을 준비하셨습니다.
여러분 오늘 두 족보를 비교해 보십시오.
가인의 후손들은 경제, 예술, 과학 분야에서 대단한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그들은 대대손손 성공한 삶을 살았습니다.
반대로 셋의 후손들은 변변치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세상적으로 가인의 후손들과 같은 업적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셋의 후손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비로소(히. 오즈, 감탄사) 라는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비로소 그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진짜 성공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았던 셋의 후손들이었다는 겁니다.
반대로 진짜 실패하고 아무것도 아니었던 사람들은.. 가인의 후손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가인의 후손처럼 살아서는 안됩니다.
셋의 후손처럼 살아야 합니다.
가인의 후손들과 같이, 세상의 사람들이 다 눈에 보이는 성공을 쫓아갈 때
우리는 그 속에서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모두가 돈을 좇아가고
모두가 세상의 발전이 가져다주는 풍요와 쾌락과 안락에 마음을 빼앗기며 살아갈 때,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세상이 만들어놓은 그 길을 쫓아갈 때,
그것들만 가지면 성공이라고 말하고, 그것들만 있으면 다 될 것처럼 생각하는 세상에서
성도는, 셋의 자손들은, 하나님을 참되게 의지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이 있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셋의 후손들은 분명히 달랐습니다.
가인의 후손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만을 추구할 때
셋의 후손들은 그 길을 똑같이 쫓아가지 않았습니다.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가인의 후손처럼 살지 않았습니다.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살았습니다.
가인의 후손들은 성벽을 짓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내가 내 자신을 지킬 수 있다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찾아온 것은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지키려고 성벽을 더 높이 지었습니다. 오늘날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우리 셋의 후손들인 성도들은,
세상의 성벽이 아니라, 하나님을 성으로 삼아서,
하나님의 보호를 누리며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시144:2의 고백처럼 ‘여호와는 나의 사랑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방패이시니
내가 그에게 피하였고 그가 내 백성을 내게 복종하게 하셨나이다’
가인의 후손들이 쌓는 성과는, 다른 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무너질 수밖에 없는 유한하고 헛된 성벽을 의지하느라
두려움과 불안함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무너지지 않는 진짜 성벽, 하나님이 계시고 그 하나님을 성으로 삼고 살아가기 때문에
누리는 평안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가인의 후손들은 오늘날도 자기 이름을 내려고 살아갑니다.
자기 이름과 자기 영광을 드러내며 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우리는 진짜 드러내야 할 이름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또 다른 삶,
진정한 삶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하던 그것을 통해, 어떠한 업적을 이루던 그것을 통해
다른 삶,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삶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은, 가인의 후손들과 같이 세상의 성공을 쫓아갑니다.
그러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없어도 돈만 있으면 또 뭐만 있으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우리는 다르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죄악만 늘어날 뿐입니다.
가진 돈과 힘으로 죄악만 늘어날 뿐입니다. 교만해지고 악해질 뿐입니다.
중심이 바뀌지 않으면 어떠한 평안도 어떠한 구원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와야 진짜 생명이 있고, 진짜 구원이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삶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가난해도 되고 부해도 되는..
성공해도 되고 실패해도 되는..
높아져도 되고 낮아져도 되는..
그러나 단 하나, 어떤 삶의 자리를 통과하고 있을지라도,
여러분과 저의 부르심의 핵심은,
늘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 하나님을 예배하는 다른 삶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도록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세상에서,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습니까?
어쩌면 우리는 가인의 후손들처럼 살고 있진 않습니까?
그들이 추구하는 것, 그들이 성공이라고 말하는 것들,
우리도 똑같이 추구하고 똑같이 두려워하진 않습니까?
어느새 우리도 똑같이 그것들이 목적인 마냥 자랑하고 살아가진 않습니까?
여러분 제가 몇 번 말씀드린 적 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 전에 삶과 똑같이 사는데
단지 믿음만 하나 더해지는 게 아닙니다.
삶의 목적과 가치는 그대로이고, 단지 그것들을 이루는 수단만 바뀌는 게 아닙니다.
이제는 하나님이라는 새로운 수단을 의지해서, 그것들을 얻는 삶이 되는 게 아닙니다.
삶의 목적이 바뀐 존재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내 삶의 목적이 되는 삶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내 삶의... 목적이 되시고
그 전에 내가 목적이라고 달려왔던 생각했던 것들은, 전부 다 수단이 되는 겁니다.
내 삶의 목적은 단 하나, 하나님 그분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
어느 자리에 있든,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을 즐거워하며 살아가는 것,
내가 어떻게 되는지 보다, 나를 통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어떠하심이 드러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의 모습입니다.
가인의 후손들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셋의 후손인 우리가 부름 받은 삶의 모습입니다.
‘그때에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마지막으로 한 가지 확인할 게 있습니다. 질문인데요.
그렇다면 왜 에노스 시대에 와서,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는가요?
‘에노스’라는 이름의 뜻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에노스’의 히브리어 어원이 ‘죽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연약한 존재, 한계가 있는 존재,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앞에 ‘라멕’과는 대조되는 이름이죠. 라멕은 ‘강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에노스’는 약한 자, 죽는 존재라는 이름입니다.
만약 여러분이라면 여러분의 자식 이름을 지을 때. 라멕으로 짓겠어요?
아니면 에노스라고 짓겠어요?
사람들은 보통 라멕(강한 자)으로 짓겠죠.
어느 아버지가 자기 자식 이름을 ‘너는 죽을 존재야’ 하고 에노스라고 짓겠습니까?
그런데 셋은 아들을 낳고, 에노스라고 지었습니다.
아마도 셋에게 충격적인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셋은 충격적인 진리를 깨닫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바로 인간은 어떤 존재라는 것입니까? 죽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때 당시 사람들이 죽는 일이 드물었거든요. 평균 수명이 900세가 넘어가니까요.
죽음이 이렇게 지배하는 걸 본 적이 없는 거죠.
그래서 사람들은 죄를 범하고 나서도, 자기들은 죽지 않는다고 알았습니다.
그런데 셋은 깨닫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아 인간은 영원히 살 수 없구나 우리 인간은 죽는 존재구나’
그때 비로소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라멕은 강한 자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에노스는 약한 자, 죽는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하나님을 성으로 삼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고 믿고 따랐습니다.
그는 다시 깨닫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는 게 복이라고요.
자신의 유한함을 깨닫는 게 복이라고요.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사는 것이 진짜 복이라고요.
그게 진짜 성공한 삶이라고요.
여러분 우리가 다 연약한 자들 아닙니까?
강하면 얼마나 강하고, 잘나면 얼마나 잘났습니까?
속으로는 다 두려움과 불안함 가지고 살아가지 않습니까?
그렇죠. 겉으로는 다 이렇게 나이스해 보이지만,
마음에 부패함이 가득하고, 다 똑같이 너나 할 거 없이 죄의 추함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죠.
그냥 다 거기서 거기 아닙니까? 잘 감추고 살아가는 것 뿐이죠.
다 연약하고 죽을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말고는, 우리에겐 소망이 없습니다.
거기에 진짜 평안이 있고, 구원이 있습니다.
가인의 후손의 길이 아니라, 셋의 후손의 길에 서게 될 때,
진짜 다른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