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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장 아담의 족보, 셋의 족보

LNCK 2026. 5. 28. 11:40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 삶의 통찰력

2026 05 24 창세기 강해 (16) / 창세기 5:1-24 / 아담의 족보(셋의 족보) Youtube

 

◈아담의 족보, 셋의 족보             창5:1~24               2026.05.24.      

 

오늘 본문 창5장은 족보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누구의 족보이죠?

아담의 족보, 정확히는 셋의 족보입니다. 셋이 아담의 계보를 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담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가인과 아벨입니다.

가인 때문에 아벨이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또 다른 아들을 주셨습니다. 바로 셋입니다.

 

셋이라고 해서 셋째라는 뜻이 아닙니다.

가인과 아벨 그 다음에 ‘셋째가 셋이었나 보다’ 하면 안됩니다.

 

셋 이전에도 아담과 하와는 많은 자녀들을 낳았습니다.

지난 번에 한번 제가 계산해 봤었죠.

그러나 아벨을 이을 믿음의 계보로 하나님은 셋을 주셨습니다.

 

이때부터 인류는 두 부류로 나누어졌습니다. 가인의 후손들과 셋의 후손들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족보셋의 족보를 구분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이 구분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죄가 들어온 후에, 세상은 구분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세상 나라로,

하나님 나라 백성들과 세상 사람들로 구분되었습니다.

창3:15절의 표현으로는 뱀의 후손여인의 후손으로 구분되었습니다.

 

가인의 족보는.. 세상 나라, 세상 사람들의 족보입니다.

불택자의 족보이고, 불신자의 족보이고, 뱀의 후손의 족보입니다.

 

반면 셋의 족보는.. 하나님 나라 하나님 백성들의 족보입니다.

택자의 족보이고, 신자의 족보입니다. 여인의 후손의 족보입니다.

우리는 지난 15강에서 가인의 족보를 살펴봤습니다.    ☞rfcdrfcd.tistory.com/15983379

 

▲오늘 본문은 셋의 족보입니다. 아담부터 시작되는 셋의 족보가 나옵니다.

오늘은 이 셋의 족보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이 족보를 볼 때 주의해야 할 게 있습니다.

이 족보에 보면 에노스까지 9명이 나옵니다. 뒤에 노아까지는 10명이 나옵니다.

아담부터 노아까지 10명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족보는 바로바로 이어지는 직계의 자손이 아닙니다.

아빠가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이 또 바로 다음 아들을 낳은 게 아닙니다. (빠진 세대 있음)

보통 우리는 누가 누구를 낳았다고 하면, 바로 밑에 있는 친아들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쓰였던 이때는 조금 달랐습니다.

할아버지가 손자를 보았을 때나, 아주 먼 훗날에 자손이 태어났을 때도

그냥 ‘낳았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수대를 건너뛰어도 ‘낳았다’ 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5장의 족보는 빈틈없는 족보가 아니라, 생략이 있는, 건너 뛴 족보입니다.

이 10명은 직계의 자손이 아니라, 요약된 족보, 압축된 족보입니다.

 

아담부터 노아 사이에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은 인물이 있었지만,

중간에 수많은 세대가 생략되어 있는 족보입니다.

 

왜 이런 말을 하냐면, 이 족보를 가지고 연대를 계산하려는 사람들이 실제 있기 때문입니다.

노력은 참 고마운데 무리한 일입니다.

 

오늘 본문의 족보는 가족관계증명서가 아니라,

대표적인 셋의 후손을 요약한 족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압축된 셋의 족보에서 우리는 무엇을 봐야 할까요?

이 족보에서 우리는 세 가지 사실, 혹은 표현을 봐야 합니다.

 

-첫 번째는 ‘나이’입니다.

-두 번째는 '죽었다'라는 표현을 봐야 되고요.

-세 번째는 '낳고'라는 표현을 봐야 합니다.

 

◑1. 첫 번째는 <나이>입니다.

 

앞에 가인의 족보에는 나이가 기록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셋의 족보에는 다 나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인의 족보는 다음과 같습니다. 창4:20~22절인데요.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이처럼 가인의 족보에는 나이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이룬 업적은 나오는데, 정작 몇 년을 살았는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들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거의 무가치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오늘 본문의 셋의 족보를 한번 보겠습니다.

창5:3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4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6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7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8 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이처럼 셋의 족보에는 나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담은 930세를 살았습니다. 셋은 912세를 살았다고 나옵니다.

몇 년을 살았는지, 나이가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럼 질문이 생깁니다. 왜 하나님은 가인의 족보에는 나이를 기록하지 않으시고,

셋의 족보에만 나이를 기록하셨을까요?

 

나이가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살았던 그 삶의 연수가, 이 땅에서 누렸던 화려한 세월이

하나님 앞에 깡그리 무시될 만큼,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사실 가인의 후손들은 대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경제(야발) 예술(유발) 과학(두발가인) 분야에서 대단한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그들은 당시 사회에서 셀럽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인생을 가치있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반대로 셋의 후손들은 매우 평범한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족보를 보면, ‘얼마를 살고 자녀를 낳은 후 죽었다’는 이야기뿐입니다.

 

가인의 후손들처럼 내세울만한 훌륭한 업적이 없습니다.

그냥 자녀를 낳고 살다가 죽었다가 끝입니다. 평범한 삶이었다는 거죠.

어느 집의 아버지들처럼 평범하게 살다가 죽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인의 후손들의 나이는 지워버리신 반면,

셋의 후손들은 그 정확한 나이를, 하나님의 책에 영원히 기록해 두셨습니다.

 

여러분 만일 역사학자에게, 가인의 후손들과 셋의 후손들에 대해 기록하라고 했다면,

그들은 누구의 나이를 기록했을까요?

셋의 후손들이 아니라, 가인의 후손들의 나이를 상세하게 적었을 것입니다.

가인의 후손들이 대단한 일들을 많이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위인전을 봐도 그렇지 않습니까? 위인들은 누가 몇 년도에 태어나서,

몇 년도에 죽었다고 기록합니다. 가인의 후손들이야말로 연수가 기록될 만한 사람들이었죠.

 

하지만 하나님의 기준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후손들이 아니라

셋의 후손들의 나이를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셋의 후손들이 더 대단하고 가치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셋의 후손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태어나 아무리 이름을 날리고,

뛰어난 업적을 남기고, 남에게 박수받는 훌륭한 직업을 가져도,

여러분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하나님과 관계가 없다면

여러분의 연수는 하나님께 기록되지 않습니다.

어쩌면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텅 빈 인생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세상에서 별로 대단한 일을 하지 못하고,

그냥 그래도 나를 만드시고 지으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산다면,

여러분의 평범한 연수는 기억되고 기록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자녀라면, 무조건 평범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반문할 수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을 믿으면, 평범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요?’

특별히 지난주 말씀과 연결해서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업적도 이루면 안 되는가요?

경제나 예술 또 과학 분야에서 업적도 내면 안 되는 건가요?

성공하면 안되고, 돈 많이 벌면 안 되고, 사회 발전에도 기여하면 안 되는 건가요?’

‘교회는 패배주의자들의 양성소인가요?’ 물론 그런 말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들도 부르신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자기 집업적 소명의 일들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러나 방향의 문제이고, 목적의 문제입니다.

누구를 위하여, 또 무엇을 위하여 그 일을 하느냐? 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영광을 위해,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바울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이 최우선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나머지는 다 그것을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공부하는 것도, 내가 돈을 버는 것도, 내가 그 일을 하는 것도.. 다 수단에 불과합니다.

목적과 방향은 하나님을 위하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의 삶을 받으십니다. 그 사람이 평범한 삶을 살았을지라도요.

평범한 삶 속에 하나님이 계시다면, 내 삶이 하나님을 위한 방향의 삶이었다면,

하나님은 그 어떤 (불신자) 위인의 삶보다 더 가치있고 귀하게 보십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사실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실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 이 자리에서 예배하는 사람 중에 역사책에 기록될 만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교과서나 역사책에 기록될 만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여러분 어떤 사람이 우리의 연수를 기억해 주겠습니까?

누가 우리의 삶을 특별하다고 여기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사실 우리는 가인의 후손보다는 셋의 자손들과 같습니다.

있다면 가인의 후손들을 따라가려고 하는 것 뿐이겠죠.

 

사실 우리의 삶은 셋의 자손들과 같은 평범한 삶입니다.

그냥 여느 아빠들처럼, 여느 엄마들처럼, 여느 학생들처럼, 여느 직장인들처럼

그냥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아가는,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에게는 위로가 됩니다.

저도 그렇거든요. 저는 목사인데 평범한 목사입니다. 지극히 평범한 목사이죠.

여러분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평범함이 결코 무가치한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나도 가치 있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삶이라면요.

오늘도 그 평범하고 반복되는 일상을 하나님을 위해 살아간다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라면... 하나님은 그 삶을 가치 있게 여기십니다.

 

▲제가 지난주에 말씀 드린 드라마 제목이 있는데요.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라는 제목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목사님이 요즘 이상하다.. 드라마 덕후가 됐나 보다..

뭔가 결핍이 있나 보다..’ 그건 아닙니다.

 

저도 제 자신이 무가치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거든요.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사실 우리 모두는 다 이 싸움을 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무가치함과의 싸움... ‘가정에서 내가 무가치한 사람은 아닌가?’

‘직장에서 내가 무가치한 사람은 아닌가? 교회에서도 내가 무가치한 사람은 아닌가?’

 

김진혁 교수님이 쓰신 <신학의 슬픔과 기쁨>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의 앞부분이 “무가치함”이라는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살면서 무가치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는 겁니다.

특히 오늘날 현대사회는 많은 것들이 빠르게 변화하지 않습니까?

이런 사회일수록 나의 생각과 행동이, 나의 주변에 영향을 미치기가 힘들어집니다.

그럴 때 더 무가치하다고 느껴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특히 SNS, 저는 하지 않는데요. SNS나 카톡 프로필 사진을 보면

더 그런 감정이 들지 않습니까? 그런 프로필 사진들을 보면 화려하고, 대단합니다.

이때 드는 자연스러운 감정이

‘나만 뒤처지는 건 아닌가, 나만 불행한 건 아닌가, 나만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건 아닌가?’

 

그러면서 저자가 솔직한 고백을 하나 하시더라고요.

자신이 무가치함을 가장 많이 느꼈던 곳이 있었는데

그곳은 아이러니하게도 교회였다고 합니다.

 

자기가 부교역자로 사역을 하게 되었는데, 보통 부교역자들에게 요구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찬양 인도도 잘해야 되고, 악기도 잘 다뤄야 하고, 운전도 잘해야 되고,

심지어는 축구도 잘해야 되고...

그런데 본인이 이런 것들을 하나도 잘 하지 못했고,

내향적인 기질 때문에 교인들에게도 살갑게 인사도 하지 못하고,

또 게을러서 새벽기도라든지, 여러 이벤트들 같은 것도 잘 준비하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선배 교역자들로부터 많은 핀잔도 받고, 눈치도 봤다고 하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자신이 교회에서 무가치하다’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교역자로서 내가 이 교회에서 별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라는 느낌!

그것이 본인을 목회의 길이 아니라, 신학을 가르치는 길을 결국 선택하게 하지 않았나..'

라는 생각을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그분이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보통 사람들은 확신이 강하고, 두드러진 업적을 가진 사람들에게 주목하기 마련이라고!

 

왜냐하면 우리 눈은 가시적인 것에 더 끌리기 때문에,

뭔가 이룬 사람, 뭔가 대단한 사람,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입증한 사람에게

주목을 하고, 그들이 이루어가는 성취와 업적에 관심을 기울인다고요.

 

그러나 그분이 하시는 말씀의 핵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요. (제가 좀 더 살을 붙여서 얘기하면요)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 아닙니까?

하나님은 전혀 쓸모없어 보이는, 혹은 유용성 없어 보이는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고요!’

 

사실 유용성(효율성)의 관점에서 보면

이 급변하는 세상, 그리고 모두가 자본과 권력을 쫓아가는 세상 속에서

이 성경을 곧이곧대로 믿고 가르치고,

그리고 얼마나 듣고 얼마나 변화될지 모르는 이 설교를 준비하고 전하는...

저 자신도 무가치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니라는 거죠. 하나님은 그런 평범하고

때로는 무가치하게 보일 수 있는 일들을 통해서,

그런 반복되는 일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신다는 거죠.

 

▲여러분, 오늘 셋의 자손들을 한번 보십시오. 사실 뭐 대단한 삶이 아니었죠.

애 낳고 키우고 땀 흘려 일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평범한 일상 속에서 믿음으로 자녀들을 키웠습니다.

 

가인의 후손들과 다르게, 믿음으로 자녀들을 키웠습니다.

믿음으로 자녀를 키우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하나님을 가르치는 삶,

세상 사람들 보기에 우스워 보일 수 있습니다. ‘그게 뭐 대단한 거야? 그게 무슨 돈이 돼?

그 아이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어? 그게 인생에 어떤 영향력이 있어?’하고 조롱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믿음으로 자녀를 키웠을 때,

그 자녀가 다시 또 그 자녀를 믿음으로 키웁니다.

믿음의 자손들이 이어져서... 그리고 그 믿음의 계보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실 여인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평범해 보이지만 가치 있는 삶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자녀를 키우는 것만으로도

하나님 보시기에, 충분히 가치 있는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믿음으로 일상을 살았습니다.

큰 능력을 가지지 않았더라도, 탁월한 업적을 남기지 않았더라도,

내 스스로의 가치를 입증할 만한 어떤 일을 이루지 않았더라도,

 

믿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았을 때, 하나님이 부르신 그 자리를 묵묵히 믿음으로 살아냈을 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살아냈을 때... 하나님은 이들의 연수를 기록하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살아온 삶의 걸음걸음들을 기억하시고, 그들의 연수를 하나님의 책에 기록하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은 평범한 삶입니다.

평범한 속에서 우리도 ‘무가치함’이라는 단어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정말 가치 있는 존재일까?’

끊임없이 우리는 내가 스스로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입증하려고 발버둥 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뭔가 특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은사가 있어야 하고, 특별한 업적을 이루어야 하고,

눈에 띄는 변화나 열매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오늘 본문의 ‘셋의 족보’처럼,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자랑할 만한 것들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하루하루를 세고 계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을 위해 살아내는

그 이름없고 드러나지 않는 발걸음을 하나님은 모두 세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여러분의 평범하고도 진실한 하루하루를

하나님은 기쁘게 받으십니다.

 

비록 세상의 눈에는 무가치해 보이고 조명받지 못하는 이름 없는 삶일지 몰라도,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눈에는, 그 어떤 위인의 일대기보다 가치 있고 눈부신 삶입니다.

그 증거가 바로 셋의 족보에만 기록된 나이입니다.

 

◑2. 두 번째 이 족보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표현은 <죽었다> 입니다.

 

오늘 본문에 반복되는 표현이 있는데 ‘죽었더라’입니다. 다 ‘죽었더라’로 끝납니다.

셋의 후손들이 다 죽었습니다.

 

물론 셋의 후손들은 다 오래 살았습니다. 굉장히 오래 살았습니다.

아담은 930세까지 살았고요. 셋도 912세까지 살았습니다.

가장 오래 산 사람이 므두셀라입니다. 969세까지 살았습니다.

31년만 더 했으면 1000년을 채울 뻔했습니다.

 

오늘날은 ‘백세 시대’인데요. 이때는 ‘천세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숫자를 믿지 못합니다.

‘옛날 사람들이니까.. 과학을 모르던 고대 근동 사람들이니까... 막 지어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같이 이성적이고 과학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이런 거 (장수를) 안 믿는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창세기를 누가 기록했습니까?

물론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책이지만, 모세를 통해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창세기의 1차 독자는 막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러면 모세 시대, 막 출애굽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았던 시대의 평균 수명은 얼마였을까요?

감사하게도 시90편에 보면 이런 모세의 고백이 있습니다.

‘우리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시90:10

 

놀랍게도 이 창세기를 기록하고 있는 모세 시대의 평균 수명 역시 70세였고,

강건하면 80세였습니다. 여러분 착각하시면 안됩니다.

우리나, 모세나, 이 글을 처음 읽는 창세기 1차 독자들이나.. 평균수명이 다 똑같습니다.

 

우리만 900세 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는 게 아니고요. 모세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 평균 수명이 70세~ 80세였습니다.

 

우리가 900살이라는 나이를 비상식적으로 느끼듯이,

모세에게도 이 900살이라는 나이는 비상식적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모세뿐만 아니라, 이 창세기의 1차 독자들에게도

역시 경험적으로 상식적으로 안 맞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모세는 하나님이 게시해 주신 말씀,을 자기의 상식에 맞춰 변경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 같으면, 아담이 930세를 살았다고 할 때,

‘아 93세였겠지..’ 하고, 끝자리 0을 빼서 93으로 적고 싶었을 겁니다.

그게 상식적으로 더 맞으니까요.

 

므두셀라가 969살을 살았다고 하며, 그 옆에다 각주를 달았을 겁니다.

‘이것은 과장법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상징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계시해 주신 그대로 다 적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자꾸 우리의 얄팍한 이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도 내 입맛에 맞게 편집하고 재단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물론 성경에는 상징적인 숫자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14만4천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이 숫자를 상징으로 해석하는 데는, 분명한 성경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14만4천을 분해해보면, 12 x 12 x 1000 입니다.

성경에서 12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는 완전수입니다.

구약의 열두 지파와 신약의 열두 제자가 그 증거입니다.

즉 구약과 신약의 구원받은 백성을 대표하는 숫자가 12입니다.

 

또한 1000은 크고 충만한 수를 의미합니다. 10 x 10 x 10 *10은 滿數

따라서 이 숫자들을 곱한 ‘14만 4천’은 구약과 신약의 모든 구원받은 백성 전체를 아우르는

완전하고 충만한 수를 의미합니다.

 

신천지처럼 14만4천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건 틀린 해석입니다.

이처럼 성경의 어떤 숫자를 상징적이라고 해석할 때는,

반드시 그럴만한 성경적인 해석의 근거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이 숫자들은 그런 근거가 하나도 없습니다.

상징적이라고 볼만한 성경적 해석의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신 말씀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이성과 경험을 들이대며 뜯어 고치려 하면 안 됩니다. 액면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이 숫자를 그대로 믿어도, 과학과 전혀 어긋나는 일이 아닙니다.

이때에는 인간이 이렇게 오래 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자녀를 많이 생산하고 퍼트려야 될 사명이 있었기 때문이죠.

 

그러다가 노아의 홍수를 기점으로, 인간의 수명이 확 줄어들게 됩니다.

그 전까지 우리는 오늘 이 족보의 기록대로 오래 살았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족보의 핵심은 단순히 ‘오래 장수하며 살았다’가 아닙니다.

오늘이 족보에서 반복되는 표현은, ‘죽었더라’입니다.

 

아담이 930세를 살았지만 ‘죽었더라’

셋도 912세를 살았지만 ‘죽었더라’

므두셀라는 무려 969세, 천년을 가까이 살았지만 결국 ‘죽었더라’

 

창세기 5장 족보의 핵심은 ‘사람이 오래 살았다’가 아니라,

아무리 오래 살아도 ‘인간은 결국 죽더라’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5장은 ‘죽음의 족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여러분 기억나십니까?

셋의 후손 에노스의 이름의 뜻이 뭐였습니까?

‘죽는 존재,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 였습니다.

 

하나님은 창2:17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이 말씀대로 사람은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에노스’라는 이름처럼, 이제 사람은 아무리 오래 살아도

사망의 지배 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원래 아담은 죽지 않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처럼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죄 때문에 죽음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아담 안에서 같이 타락한 우리도,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슬픈 운명이 오늘 본문의 다른 곳에서도 암시되어 있습니다.

바로 1절과 3절의 대조인데요.

 

5:1절에 보면 ‘아담은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5:3절을 한번 보세요. ‘아담은 130세에 자기의 모양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고 지었고’

 

여러분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셋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아담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셋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첫사람 아담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런데도 왜 성경은 굳이 셋이, ‘아담의 형상으로 태어났다고 강조해서 말할까요?

바로 타락의 결과를, 우리에게 똑똑히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만약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지 않고 범죄하지 않았다면,

그의 자녀들은 모두 온전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형상으로 태어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이 죄짓고 타락한 이후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죄인의 모양을 입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지만, 죄로 깨어진 하나님의 형상,

죄로 손상된 하나님의 형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즉 셋이 아담의 형상으로 태어났다는 말은,

아담의 타락한 본성과 죄성 그리고 결국은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하고 비참한 운명을

그 후손들이 고스란히 물려받았다는 뜻입니다. 이제 죽음이 시작되었다는 거죠.

 

자 그래서 오늘이 족보에 반복되는 표현이 무엇입니까? 바로 ‘죽었다’라는 표현입니다.

타락한 아담부터 시작해서 이제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죽었더라'로 인생이 끝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죽음의 족보에서도 복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낳고'라는 표현입니다.

 

◑3. 그래서 이 족보에서 우리가 세 번째로 봐야 할 표현은 <낳고>입니다.

 

첫 번째는 ‘나이’를 봐야 되고요.

두 번째는 '죽었다'라는 표현을 봐야 되고요.

세 번째는 '낳고'라는 표현을 봐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족보는 ‘죽음의 족보’라고 했습니다. ‘죽었다’라는 표현이 계속 이어집니다.

그런데 이 죽음의 족보 속에 뭐가 있냐면, ‘낳고.. 낳고..’가 있습니다.

죽었지만 또 ‘낳음’이 이어집니다.

죽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계속 ‘낳고.. 낳고..’가 나옵니다.

 

‘낳고 죽었더라, 낳고 죽었더라, 낳고 죽었더라’ 여러분, 누구를 낳는 겁니까?

바로 ‘여자의 후손’입니다.

창3:15절에 약속한 ‘여자의 후손’을 낳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의 계대가 계속 낳아지는 겁니다.

죽음의 인생 속에서 생명의 역사가 믿음의 계보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게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죄와 죽음의 종노릇 하는 인간들 가운데서도

생명의 역사가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그 낳는 역사가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요., 복음입니다.

 

왜냐하면 이 ‘낳고 낳고’를 계속 따라가다 보면,

결국 이 낳고 낳고를 통해서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가 낳아지시기 때문입니다.

약속한 여자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가 낳아졌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뭐 때문에 죽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죄 때문에 죽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뭐 때문에 죽으셨습니까? 자기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었더라로 끝나셨습니까?

예수님은 죽었더라로 끝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지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으로 끝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을 믿으며 무엇으로 끝납니까? 부활로 끝납니다.

죽음이 아니라 생명으로 끝납니다. 영원히 하나님 나라에서 영생으로 끝납니다.

 

그저 ‘죽었더라’라고 끝낼 수밖에 없는 인생들에게,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은 이 죽음의 족보 한 가운데에

‘낳고’라는 단어로 알려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여기서 그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이 놀라운 생명의 복음을, 우리의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도록,

한 명의 시청각적인 인물을 준비해 주십니다. 그가 바로 에녹입니다.

 

에녹은 앞에 사람들과 차이점이 있습니다. 앞에 사람들은 다 낳고 죽었더라라고 끝납니다.

그러나 에녹에 대해서는 전혀 다르게 기록합니다.

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심으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에녹에게는 죽었더라라는 기록이 없습니다.

죽었다 대신에 ‘데려가셨다’ 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에녹은 이 죽음의 족보에서, 유일하게 죽음을 맛보지 않은 사람입니다.

에녹은 죽음의 공식이 깨진 유일한 예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에녹을 그대로 하늘로 데려가셨을까요?

아담의 타락 이후, 죽음이 왕노릇하는 이 절망의 역사 속에서도

죽음을 이기고 영원히 사는 생명의 길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똑똑히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는 죽음이 결코 끝이 아님을,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에녹을 통해 시청각적으로 증명해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여러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에녹 말고 다른 조상들은 모두 죽음으로 끝났으니,

구원을 받지 못했다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창세기 5장의 족보는, 철저히 믿음의 족보입니다. 신자의 족보입니다.

아담부터 시작해서 셋, 에녹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다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누구를 믿었습니까? 창세기 315절에 약속하신 여인의 후손, 여자의 후손,

곧 오실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계속 자녀들을 낳았던 겁니다.

 

‘우리의 출생을 통해 하나님이 약속한 여자의 후손 메시야를 보내실 것이다’ 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오시면 우리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 믿음으로 그들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의 끝은 하나같이 ‘죽었더라’라고 끝났을까요?

이 말은 그들이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아담의 범죄 이후 인류에게 찾아온 육체의 죽음이라는 굴레를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었음을 뼈아프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무리 900년 넘게 이 땅에서 오래 살았을지라도

결국 모든 인간의 끝은 죽었더라로 끝난다는 엄연한 현실을

성경은 담담히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끝없이 펼쳐지는 ‘죽었더라, 죽었더라’로 이어지는

이 절망적인 족보를 읽으며 자연스럽게 탄식하게 됩니다.

‘아, 인간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 죽음으로 끝나는구나’

 

▲그런데 여러분, 끝없이 이어지던 이 절망적인 리듬이, 에녹에 이르러 갑자기 멈춥니다.

에녹은 다른 조상들처럼 ‘죽었더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는 육체적인 죽음을 통과하지 않고, 곧바로 하나님의 품으로 옮겨졌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죽음의 끝이 아니라, 죽음을 이기는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에녹이라는 인물로 생생하게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은 에녹이라는 한 사람을 세상 무대 위로 훌쩍 들어 올리시며

온 우주에 선포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보아라! 죽음이 끝이 아니다. 육체의 죽음을 뛰어넘는 영원한 생명이 있다.

죽음을 이기는 생명이 있다.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는 이 죽음을 이기는 생명이 주어진다!’

 

‘이 영광스러운 생명, 영생’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셋의 족보에서 발견해야 할 위대한 복입니다.

바로 ‘낳고’라는 단어입니다.

 

▲여러분 때로 우리는 믿음을 우습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실을 너무 가볍게 우습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주일에 교회에 나와서 예배 드리고 예수 믿는 게, 뭐 그리 대단한 건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저는 늦게 믿은 편입니다.

믿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적이 있지 않습니까?

당시 저는 교회 가서 설교만 들으면, 그렇게 잠이 왔다고요.

 

목사님이 설교 시작하면, 저도 모르게 잠들었습니다.

기가 막힌 것은, 설교가 끝나면 딱 그 시간에 맞춰 깨어납니다.

설교 끝나는 동시에 눈이 떠지면서, 정말 기적같이 고개가 들립니다. 놀라운 기적입니다.

 

지금 보니까 이 기적을 체험하고 있는 분들이 여기에 계시는데요.

그런데 더 놀라운 기적은, 그런 제가 후에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저도 가볍게 여깁니다. 이제는 익숙해졌으니까요.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얼마나 놀라운 기적인지를... 놓치고 살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닙니다. 우리는 다 믿지 못할 때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못했을 때가 있었습니다.

죽음을 이기는 생명이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기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었더라’로 끝나는 인생들 속에서

죽음을 이기는, 생명을 얻은 자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 생명을 확신하고 누리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두려울 것도, 무서울 것도 없는 자들입니다.

 

가장 두려운 죽음도 무섭지 않으니까요. 죽음이 아니라 생명으로 끝나니까요.

죽음 이후에 영원한 생명, 영원한 부활, 생명이 있으니까요.

죽음을 이기는 진짜 생명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도합니다. 이 믿음이 있기를요. 이게 진짜 생명이니까요.

이 세 가지 사실을 우리는 셋의 족보에서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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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사람의 행복도 넉넉한데 있지 않습니다.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은, 부부가 서로 애써서 도와가며 살려고 애쓰지만

좀 여유가 있는 집들은, 심심해서 싸우다가 심심해서 이혼하더라고요.

부자치고 무사한 가정이 별로 없어요.

 

넉넉한데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불화가 많고, 문제가 많고, 이혼이 많은가요?

병도 많습니다. 왜 이렇습니까?

 

아무리 부자이면 뭘 합니까?

건강을 잃으면, 부부간 화평을 잃어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래서 예수님 말씀이

‘사람은 생명(행복, 영생)이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 진리입니다. 눅12:15

 

복권 당첨된 사람들 조사해보면, 다 망하고, 다 이혼해 버렸습니다.

여러분, 강남 아주머니들 모아놓고, 어떤 교수가 세미나를 하면서

이런 질문을 해 보았습니다.

 

‘여러분이 100억짜리 로또에 당첨되었으면, 뭘 하겠습니까?’ 물었더니

60%가 ‘이혼부터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답니다...

 

♣생명의 소중함, 생명의 가치를 아는 사람

에베레스트 산을 등정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그 산을 등정할 때는 셀파의 도움을 받는데,

거기에는 현지인 네팔 '여자'가 셀파로 일하기도 한다.

 

그런데 하루는 한 여자 셀파가 등정 길에 병이 들었는데

일행은 그녀를 도중에 내버려 두고 가 버렸다.

 

아마 수년에 걸쳐 준비한 등반 원정을

그 여자 셀파 한 명 살리느라 포기하고 후퇴할 수 없거니와,

빙벽이 겹친 얼음산길에서, 어른 한 사람을 엎고 내려오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자기 목숨도 위태한 빙벽 길인데, 어찌 남의 목숨까지 염려하며 행진하랴!

 

그런데 다른 원정 팀도 지나가는 길에, 그 신음하는 여인을 발견했지만

그냥 내버려 두고 자기 길을 바삐 떠났다고 한다.

 

그런데 한 미국인 등산가와 셀파가 그렇게 길에 버려진 여인을 발견하고는,

약 12시간의 사투를 벌인 끝에, 그녀를 무사히 산 아래로 데려왔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나서 하는 말이

“나의 동료는 나를 버리고 사라졌지만, 나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이렇게 나를 살려줘서 너무 감사드린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한 생명을 구하는 역사’에 영원한 가치가 있다.

나중에 내가 천국에 들어갈 때,

그 입구에서 막 나를 향해 박수 쳐주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바로 내가 살아생전에 전도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천국에 들어가서도,

내가 전도한 사람을 한 사람도 만날 수 없다면,

외롭기도 하거니와... 얼마나 상급과 면류관이 적겠는가!

언제나 사람 살리는 일에 초점을 두고 기도하며 살아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