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강해(02)/사사기1:27-36/‘안한 것인가? 못한 것인가?’/ - YouTube
◈안 한 것인가? 못한 것인가? 삿1:27-36 사사기강해(02)
지난주부터 우리는 사사기를 시작했습니다.
사사기를 시작하니까 자꾸 중동전쟁이 더 심해지네요.
참 걱정인데, 기도때마다 여러분들이, 무고한 인명이 죽어가는 이 전쟁이
지구상에서 소멸될 수 있도록 꼭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정복 전쟁을
오늘날의 현실적인 정치와 결부시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사고방식입니다.
그것은 성경을 세대주의적으로 해석을 하거나,
또는 근본주의적인 입장에서 오류가 일어날 수 있어요.
사실 가나안 정복의 이야기는, 땅을 뺏는 전쟁이기보다는, 그 담아져 있는 속 메시지가
‘하나님께 얼마나 온전히 순종하느냐, 안하느냐?’의 메시지가 있지,
‘땅을 뺐느냐, 빼앗기느냐’의 싸움이 아닙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전쟁과 정복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느냐, 안하느냐’에 초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적용을, 현대적인 시선에서 잘못해 버리면, 해석상 오류가 벌어질 수 있죠.
지난 주는 사사기 1강에서는,
유다가 선봉에 서서 ‘누가 먼저 올라가리이까?’ 하나님께 여쭤보니까,
‘유다가 먼저 올라가라’ 그래서 유다가 올라갈 때, 시므온과 합력하여 순종해서 올라가죠.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지도를 이렇게 놓고 보면,
북쪽에 자리 잡은 지파들의 땅을 점령해 가는 장면인데,
그 부분을 좀 조밀하게 들여다 보도록 하겠습니다.
◑쫓아내지 못한 게 아니라, 사실은 쫓아내지 않은 것!
삿1:27 ‘므낫세가 벧스안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다아낙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돌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이블르암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므깃도와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들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
사실 1:27절은, 앞서 22절부터 봐야 되는데,
왜냐하면 22절이 요셉 가문도 베델을 치러 올라가는 이야기가 이렇게 돼 있죠.
1:22 ‘요셉 가문도 벧엘을 치러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니라’
그리고 오늘 이야기는 요셉 가문의 이야기로 끝이 나요.
근데 요셉의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애굽에서 출생한 두 아들이 있었는데, 므낫세와 에브라임이죠.
22절의 요셉 가문은 ‘므낫세와 에브라임 지파’를 뜻합니다.
오늘은 그 두 지파의 이야기를 주로 다루게 될 겁니다.
27절을 보면, ‘...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들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
우리 개역개정의 성경을 보면 ‘쫓아내지 못했다’ 라고 되어 있어요.
불가능을 암시하는 이야기를 이 표현 속에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원문을 보면 ‘로 야라시’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 말은 그냥 직역하면 ‘쫓아내지 않았다’라는 뜻입니다. didn't drive out
원문은 couldn't drive out 이 아니에요. '쫓아낼 수 없었다’라는 뜻이 아니에요.
근데 개역개정의 ‘쫓아내지 못했다’는 번역은, '쫓아낼 수 없었다’라는 뉘앙스를 담고 있죠.
그러니까 쫓아내지 못한 게 아니라, 사실은 쫓아내지 않았던 겁니다.
그 이유는, 경제적 이익 때문이었어요. 사실은 다 쫓아내기에는 아까웠던 거죠.
그런데 '쫓아내지 못했다'는 개정개역 번역도 사실 일리는 있어요.
19절을 보면, 유다지파가 점령할 때의 모습입니다.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셨으므로 그가 산지 주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주민들은 철 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could not drive out *로 야라스
이미 가나안은 일찍의 철기 문명을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철기 문명과 철기 문명에 의한 산업들이 발달되어 있었어요.
그 당시에는 가공할 무기격인 철병거가 존재해 있었습니다.
원시시대 전쟁의 그 열악한 무기를 가지고, 어떻게 철병거를 대항해 싸울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쫓아내지 못 했다’라는 말이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은 아니에요.
쫓아내기 힘들어서 못한 것도 있지만, 다 쫓아낼 마음도 없었던 겁니다.
여기까지는 이해를 해요. ‘아 정말 그럴 수 있겠다’ 굉장히 합리적이죠. 상식적인 표현이죠.
근데 사실은 이것마저도 우리가 백번 양보해서 이해를 하는 수준이지,
원론인 즉슨 신명기 7장에 보면,
일찍이 모세에게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가나안 땅에 들이기 전에 하신 약속의 내용입니다.
신7:1~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센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이미 그 가나안의 철기 문명과 함께 철병거가 있는 것을, 하나님이 염두에 두셨습니다.
신7: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하나님이 ‘그들의 수가 많으나, 힘이 강하나, 그들을 물리치게 할 것이고,
약속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실 것을, 점령케 하실 것’을
하나님께서 언약 가운데 이미 알려주신 거예요.
그럼 물어봅시다. 불가능한 상황이 중요한 겁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중요한 겁니까?
물론 하나님의 약속이 중요하죠! (우린 말은 이렇게 해요.)
그런데 정작 현실 상황에 내몰리면, 우린 자꾸 계산을 하게 되고, 분석을 하게 되고,
평가를 해서... 거기서 비교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될 첫 번째 주제가 뭐냐 하면,
따라서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가 관리하는 게 아니다”
즉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매니지먼트(관리)를 하는 게 아니에요.
믿습니까?
하나님의 명령은 절대 순종하는 겁니다.
처음엔 ‘강물이 넘실거리고 있는데, 왜 거기에 발을 디디라 그래?’
‘왜 홍해가 지금 멀쩡히 바닷물이 있는데, 거기에 어쩌자고 들어가라는 거야?’
사람의 머리로는 이해가 안 되죠. 설득도 안 되죠. 계산이 안 되는 거죠.
그런데 이런 시대야말로, 사실은 더 담백하게
하나님의 명령을 복종하는 순종이 필요한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꾸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척 하긴 하는데.. 자꾸 분석하고 계산해요.
하나님의 명령을 관리(매니지먼트)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쫓아내지 못했어요. 그런데 사실은 쫓아내지 않았던 거예요.
근데 보세요. 1:28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이스라엘이 힘이 세졌어요.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힘이 세졌어요.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족속에게 노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그러니까 노역을 시키고, 종으로 부려먹으려고... 사실은 다 쫓아내지 않았고,
일부는 남겨둔 것입니다. 다 쫓아내기는 아까웠던 거죠.
그래서 일부 남은 원주민들하고 어떻게 했겠습니까? 같이 사는 거예요.
그런데 이거는 하나님의 원래 명령이 아니에요.
가나안 족속을 다 쫓아내야 되는데, 강성해 졌으면 힘을 가졌으니까 :28
원래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다 쫓아내야 될 거 아니에요.
그런데 쫓아낸 것이 아니라... 그러기에는 아까워요.
그래서 남은 가나안 족속을 노예로 삼아서, 노역을 시킵니다. :28
이건 뭘 먼저 염두에 둔 겁니까?
경제적 가치, 이익, 편의성!
우리가 굳이 지저분한 일을 하지 않아도, ‘이 사람들은 어차피 포로니까,
여기는 점령지니까 내쫓지 말고, 오히려 경제적 가치 창출을 위해서 부려먹으면 딱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명령을 자꾸, 순백의 담백함으로 받아들이질 않고,
자꾸 매니지먼트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 성경에서 ‘가나안 정복’이라는 싸움은 땅을 뺏으라는 말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명령을 얼마나 온전하게 순전히 순종하는가의 싸움이에요.
땅 뺏기 싸움이 아니라고요!
그런데 이런 부분이, 또는 영역이 오늘날 우리 속에도 있단 말이에요.
우리 속에 정복해야 될 가나안이 있어요, 없어요?
아직 많아요. 정복되지 못한, 아니 정복하기 싫은 영역!
하나님의 명령과, 하나님의 질서와, 하나님의 가치로
내 안에 가나안의 그 악하고 불순종의 영역을 계속 속아내고 잘라내고 제거해야 되는
진짜 영적 싸움이 내 안에 있단 말이죠.
▲제가 이런 얘기를 들었어요.
콜센터에 근무하던 자매님인데, 너무 정말 가슴이 아프고 힘이 들어서
‘다시는 이 직장에 돌아오나 봐라’ 그리고 짐을 챙겨서 사표내고 나왔어요.
그러니까 팀장이 말리는 거예요. ‘왜 그러냐고? 또 진상 고객 만났구나!’
그러니까 그 자매가, 그동안 마음으로 겪었던 무너진 이야기를 그제서야 털어놓는데,
콜센터 직원이 주로 하는 게, 전화하는 일 아니에요.
전화를 받기도 하고, 전화를 하기도 할 텐데...
그래서 자기가 전화 딱 해가지고,
전화벨 소리가 벌써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이 찬송 소리가 들리면,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대요.
‘교회 다니는 사람이구나...’ 크리스찬 들이겠죠.
그래서 CCM이나 그런 컬러링 노래소리가 나오면, 자기 가슴이 털컹 내려앉는대요.
왜 그러냐 하면,
거의 하대하고, 말 함부로 하고, 따지고,
뭐 별거 아닌 이권 가지고 심지어는 욕까지 하는 사람들 중에,
교회 크리스천 들이 그렇게 많대요.
그래서 전화기에서 컬러링 그 소리가 들리면, 자기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대요.
그 다음에 더 놀라운 얘기를 들었어요.
컬러링 소리에 ‘마하반야 바라밀타...’ 이런 소리가 나오면, 자기 가슴이 편안해진다는 거예요.
그런 불교인들은, 비교적 조곤조곤하게 관대하게 응대해 준다는 거죠.
세상에 이게 어떻게 된 노릇이에요? 실화입니다, 실화.
아주 가까운 분한테 제가 들은 얘기예요.
기독교가 왜 이렇게 됐을까요? 우리 신앙인들의 믿음 생활이 도대체 뭡니까?
국내외 선교 가야죠. 그것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가장 가까이 있는 우리의 이웃들에게, 먼저 그렇게 신망을 잃어버린다면,
차라리 그런 찬송가 컬러링 하지 말고, 그냥 트로트로 해놓으세요.
▲가나안 정복이라는 것은, 이런 시시콜콜하고 사소한 문제에서부터 시작해서
내 안의 것(가나안 속성)들을 속아내는 싸움이에요.
저 적이 외부에 따로 있는 게 아니고...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들 가나안 족속들을 쫓아내지 못했어요.
아니 정확히 얘기하면 쫓아내지 않았어요.
왜요? 이익과 편리성, 경제적 가치 때문에!
이것이 또 하나의 현대판 우상인 거 아세요?
사실은 현대판 우상이에요.
얼마 전에 통신사 개인정보가 한번 털려가지고 온 국민이 난리가 났댔죠.
너무 이렇게 디지털화되어 가는 게 점점 무서워요.
요만한 스마트폰 안에 개인정보, 그거 한번 털리면, 내 인생 전체가 다 털리는 거예요.
그거 하나예요.
그래서 삶이라는 것은, 한 템포 반 템포 느리게 가는 게, 오히려 유익될 때가 훨씬 많습니다.
너무 디지털 문명을 따라가지 않는 것도, 오히려 유익될 때가 있다는 거죠.
그런 문명의 이기가 디지털화되는 세상을 통해서...
요즘은 디지털을 넘어서, 또 생성형 AI 시대를 우리가 마주하고 있지 않습니까?
점점 우리는.. 생각할 필요가 없는, 그런 디지털의 종속되거나 노예가 되고 있어요.
AI 시대의 편의성, 편리성, 이익... 이런 보이지 않는 것들이,
우리에게 현대판 우상이 되어있단 말이에요. 또 사람들은 그 노예가 되어 있고요.
◑쫓아내지 않았더니.. 나중에 옆구리에 가시와 올무가 되다
자 성경 말씀을 우리가 좀 볼까요?
삿1:29 ‘에브라임이 게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게셀에서 그들 중에 거주하였더라’
가나안 족속이 게셀에서 에브라임 지파 중에 거주하게 됩니다.
1:30 ‘스불론은 기드론 주민과 나할롤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가나안 족속이 그들 중에 거주하면서 노역을 하였더라’
‘노역을 하였더라’
28절과 패턴이 똑같죠.
사사기 지금 점령의 역사 속에서, 패턴은 세 꼭지점으로 반복이 됩니다.
-‘쫓아내지 못했다’
-‘거주하였다’
-‘노역을 시켰다’
사실 들키고 싶지 않은 진짜 동기는, 쫓아내지 않은 겁니다. 쫓아내지 못한 게 아니라요.
이 패턴이 계속 반복 돼요. 또 볼까요?
1:31 ‘아셀이 악고 주민과 시돈 주민과 알랍과 악십과 헬바와 아빅과 르홉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32 아셀 족속이 그 땅의 주민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주하였으니 이는 그들을 쫓아내지 못함이었더라
33 납달리는 벧세메스 주민과 벧아낫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그 땅의 주민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주하였으나 벧세메스와 벧아낫 주민들이 그들에게 노역을 하였더라’
계속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듯 보이는데,
그들 가나안 부족들과 타협하고, 그들을 자기들의 생활 속에 편리한 도구로
노역을 시키는 거예요. *다 쫓아내지는 않았던 거예요.
▲여러분 이것은 하나님이 이들에게, 원래적으로 명령한 명령의 그림이 아니었습니다.
신명기 7장을 다시 보겠습니다.
신7:3 ‘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4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5 오직 너희가 그들에게 행할 것은 이러하니 그들의 제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조각한 우상들을 불사를 것이니라’
여러분, ‘가나안 땅’이라는 공간은, 이스라엘을 진공 상태의 공간에 들여보내신 게 아니에요.
이미 거기에는 갖은 더럽고, 악한, 음란한 문화와,
특별히 그 음란한 문화가 이방 신상을 섬기는 데서부터 만들어지고 생성된 문화예요.
그 속에 이스라엘을 들여보내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걸 모르고 들여보냈을 리가 없단 말이에요.
그러면 먼저 그들이 ‘안식’을 위해서 뭘 해야 될까요? 전쟁을 해야 되는 거예요.
오늘날 우리 삶도 전쟁이잖아요. 매일매일 우리는 전쟁을 하는 거예요.
전쟁은.. 궁극의 적이 있단 말이죠.
어둠의 권세 잡은 자의 나라와, 영역이 있단 말이에요.
그것과 매일 우리는 전쟁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전쟁을 해가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연단시키고, 우리를 훈련시키고자 하는 초점은 딱 하나예요.
‘그의 백성으로 만들어가시는’ 게 목적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렇게 반복된 불순종의 패턴에 대해, 성경은 뭐라고 평가하고 있는가요? ↙
삿2:2~3 ‘너희는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며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니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이스라엘 자기들의 편리와 이익을 위해서 남겨두었던 그것들이
이스라엘에 옆구리의 올무가 되겠대요. (하나님이 이제 쫓아내도록 도와주시지 않는 겁니다)
자, 그 실증적 결과를 한번 볼까요?
1:34 ‘아모리 족속이 단 자손을 산지로 몰아넣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하지 아니하였으며’
아모리 족속은 가나안 원주민의 대표 중에 하나입니다.
그 아모리 족속이, 단 지파를 골짜기에 내려오지도 못하게, 저기 산지로 밀어넣었어요.
그러고는 ‘너희들은 이 이상은 더 이상 내려오지마!’
그 가나안 원주민들을 진멸하지 않고, 남겨놓은 불순종의 결과,
시간이 지나자, 다시 강성해진 가나안 일부 족속들이 하나 둘 씩
인근에 거주하고 있던 이스라엘 족속들을 컨트롤하고, 핸들링 하는 걸 볼 수가 있습니다.
결국은 이렇게 된 거죠.
하나의 맥락을 따라서 키워드를 정리해보면
‘쫓아내지 못했다’
‘타협하고, 함께 거주했다’
‘노역을 시켰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서로 좋았겠죠.
그런데 나중에는 그 타협의 결과들이,
이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시, 올무’가 되고, 그들을 옭아매는 결과를 빚어요.
사사기 후반부에 넘어가면, 이들 가나안 족속들 때문에 이스라엘이 고통을 당하고,
그래서 하나님께 부르짖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사들을 보내셔서 구해주시는..
그런 일들이 생기죠. 쫓아낼 타이밍에, 쫓아내지 못해서, 그들이 가시와 올무가 된 겁니다.
그래서 역사가 무서운 겁니다.
갈라디아서의 제일 무서운 표현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그 말씀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갈6:7
또 1:35절을 보면 ‘결심하고 헤레스 산과 아얄론과 사알빔에 거주하였더니
요셉의 가문의 힘이 강성하매 아모리 족속이 마침내는 노역을 하였으며’
요셉의 가문인 므낫세, 에브라임 지파가 점점 힘이 더 좋아져요.
‘강성하매’ 그 다음을 잘 보세요. ‘아모리 족속이 마침내는 노역을 하였으며’
강성해지면, 점점 강성해졌으면.. 정작 원래 하나님의 명령대로 어떻게 했어야 옳았습니까?
‘걷어내고, 잘라내고, 속아내야’ 옳았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대신에 노역을 시켰죠)
그 악한 문화에 익숙해 있는 사람들을, 그 문화를 제거해야 옳았습니다.
강성해졌는데... 그들은 결국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자기들의 개인적인 이익과 경제적인 가치를 확보하는 데만 하나님을 수단화한 겁니다.
우상숭배가.. 다른 게 우상숭배가 아니에요. 대상을 수단하는 게 우상숭배입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 삶의 전부가 아니라, 하나님을 수단화해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오늘날 우리의 신앙의 영역에는 그런 영역이, 그런 부분이 전혀 없을까요?
아니요, 많습니다.
▲여러분,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사사기 전체의 목적을 한번 살펴봐야 돼요.
하나님은 과연 인간의 이런 악한 죄악들의 열전인 사사기를, 기록한 진짜 목적이 뭘까요?
사사기 끝에 보면, 백성들 마음속에 어떤 요구가 일어나기 시작하죠?
왕을 요구해요. ‘우리에게도 왕을 세워 주시옵소서’
해서 당시 선지자이며 제사장이었던 사무엘에게, 왕을 허락해 줄 것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세운 첫 왕이 중후장대하고, *重厚長大 : 무겁고, 두텁고, 길고, 큰 것
크기나 외모로 말하자면 어디에 내놔도 꿀리지 않을, 스펙 좋은 사울을 택했어요.
그에게 무슨 해답이, 뾰족한 수가 있었던가요?
사사기 이후에 그래서 시작된 역사가 열왕기서의 역사입니다.
유다든 북이스라엘이든 많은 왕들이 뜨고 지고, 뜨고 지고 했지만
거기에... 왕들이 백성들을 어떻게 했습니까?
갖은 고역과, 노동과, 세금 부담과, 혹독한 부림에
백성들은 점점 피폐해지고 지쳐갔습니다.
열왕기서의 역사는, 왕들의 역사를 기록한 단순한 차원이 아니라
‘여기 세상에는 진정한 왕이 없다’
그래서 백성들의 마음속에 또 어디로 모아지도록 성경은 인도합니까?
‘왕 중의 왕은 누구신가?’, 즉 그리스도께로 모아졌습니다.
▲[킹 오브 킹스] 왕 중의 왕은 누구신가?, 이제 곧 개봉합니다.
이 영화가 미국에서 대박이 났어요. 순수 100% 한국에서 제작한 애니메이션 영화인데,
감독이 저희 교회 장성호 감독이십니다.
10년 전에 제 방에 종이쪽지 몇 개를 들고 들어오셔서
‘이 일을 위해서 기도 좀 해 주세요’
그래서 이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재정은 어떻게 확보됐습니까?’ 그랬더니, 돈은 아직 약속된게 없대요.
그래서 ‘참 믿음이 좋으시구나’
어쨌든 우리 교회 성도니까 제가 기도를 해 드렸죠.
근데 이분이 이런 얘기를 해요.
‘목사님 이거는 되는 겁니다. 확실히 될 겁니다!’
미사여구도 없이 ‘이건 됩니다!’ 그래요.
제가 속으로 ‘대단한 분이다!’
한 2~3년 있다가 시나리오(대본)를 자꾸 보내오세요.
봤더니 ‘감수를 해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감수를 해 드렸죠.
그래서인지 영화 맨 마지막에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에 보면
‘감수 : 삼일교회’가 거기 나와요.
‘뭐 애니메이션 영화를 굉장히 꼼꼼하게 이렇게까지 하나?’ 싶었는데,
10년 만에,
이걸 한국에서 먼저 개봉한 게 아니라, 미국에서 먼저 개봉을 했는데,
<기생충>을 뛰어넘었어요. 엄청난 흥행에 성공한 겁니다.
그러니까 <십계, 쿼바디스, 벤허> 이런 영화 60년대, 70년대 영화 이후에
기독교 영화의 걸작이 나오진 않았어요. 어느 나라에서도. 미국도 포함해서!
그런데 이번에 <왕 중의 왕>이 미국 영화계에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단순히 흥행을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제가 우리 장감독님하고 얘기를 하면서
‘만약에 이거를 한국에서 먼저 개봉을 했다면, 별로 흥행을 못했을 것 같습니다.’
맞대요. 정확히 보셨대요.
근데 이분이 아주 머리가 좋은 게, 이걸 미국에서 먼저 개봉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겁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랬더니
미국에는 그런 기독교 문화가 생태계 자체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미국에서 먼저 개봉해서 이게 흥행을 하면,
한국 사람들은 또 이런 게 있잖아요. ‘미국에서 대박난 영화' 그러면 다 본다고요.
그래서 정말 영화를 잘 만드셨어요.
철저히 성경의 고증을 통해서, 영화를 잘 만들었어요.
내일 시사회를 하고 16일 날 개봉을 하는데 *2025.07.16.국내 개봉, 미국은 2025.04.11.개봉
저는 이 영화의 순이익과 흥행 여부를 떠나서,
이렇게 한국교회,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어쩌다가 참 빌런의 자리에 자리매김이 되어있는
이 참 서글픈 시대에, 이런 문화적 신선한 컨텐츠를 통해서
좀 한국교회가 사회에 새로운 영향을 미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영화를, 미국의 부모들이 자기 애들을 데리고 들어가서 영화를 보고 나올 때
다 울고 나오는 거예요.
△영화 <달마야 놀자> 그거 하나로
불교계에 얼마나 부흥을 가져왔는지 아세요? 그거 사실은 조폭 영화잖아요.
그런데 그게 스님들과 절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까닭에, 불교계가 뜻밖의 큰 이득을 얻었어요.
요즘 문화의 힘이 얼마나 강력합니까?
그래서 방송국에서 수고하는 PD분들을 위해서, 우리가 기도해 줘야 돼요.
그분들도 그런 콘텐츠를 만들면서 고민이 많아요.
PD들이 가끔 찾아와요.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야 되겠냐고?’
아주 뭐 우리나라 예능계의 1, 2위를 다투는 프로의 PD들입니다.
그 이름은 내가 얘기할 수 없지만...
이런 것 하나가 우리가 시시콜콜한, 자질구레한 일상에서부터 철저히 순종할 때,
하나님이 열어놓으시는 역사예요.
★관련글 / 언약의 갱신 rfcdrfcd.tistory.com/15983224
▲어느 분이 저한테 그런 얘기를 해요.
“오래 전에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나는 그런 말을 했는지 기억도 안 나죠.
내가 한 말이래요. 제가 무슨 얘기를 했냐면,
“내 안에 동기가 생길 때까지, 머뭇거리고 순종하지 않는 것은, 절대 순종할 수 없다”
제가 그랬대요.
이 말이 맞아요, 틀려요? 맞습니다!
가끔 저도 신통한 얘기를 해요! 하하하
내 안에 동기가 분명해질 때까지, 우리는 순종을 안 하는 경향이 강하죠.
그런데 여러분, 이걸 아셔야 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처음엔 이해가 안 되고, 납득이 안 되고, 설득도 안 되고, 이유를 몰라도,
그냥 순종해서 착수하는 거예요.
그런데 순종해서 그 일을 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그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표정과 얼굴을 내밀어 주세요.
‘너 이건 왜 하는지 네가 몰랐지?’
몇 주 전에 금요일 날 조혜련(연예인) 씨가 오셔서 똑같은 얘기를 해요.
‘이 성경을 이걸 왜 읽는 거야?’ 그랬대요.
어쨌든 옆에 어느 동료의 정말 끊임없는 독촉에 의해서
성경을 읽고 읽고, 외우고 외우다가,
어느 날 그 성경이 자기의 어두운 눈과 무지를 열어주는데... 너무너무 놀랐다는 거죠.
거기에 숨겨진 보화가 있는 줄을, 나를 살리는 길이 있는 줄을 몰랐다는 거죠.
하나님의 일은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근데 우리는 너무 요즘 상식을 따라가서 에둘러 가는 경향이 있어요.
아니에요. 그럴 필요 없어요.
▲그래서 오늘 결론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명령은 매니지먼트를 하는 게 아니다. 계산하는 게 아니다. 믿습니까?
두 번째, 편리함, 이익, 편의... 이것들은 현대판 ‘보이지 않는 우상들’입니다.
세 번째, 불순종에는 다 이유가 있어요.
그렇지만 그 이유를 다 걷어내고, 이것이 주님의 명령이라면
뚜벅뚜벅 우직하게 감당하며, 순종하며 걸어갈 때
하나님의 얼굴을 만나는 믿음의 역사의 행전이,
여러분들을 통해 이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