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선지자는 배부른 웨이터 마7:15 2025.10.30.
마7: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에게 나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거짓 선지자는 겉으로는 아무리 양같다 보여도, 속으로는 노략질하는 이리‘라고 하십니다.
이 노략질하는 이리라는 말 속에는 두 가지 뜻이 들어있지요.
굶주림과 포악함입니다.
’마음의 굶주림‘을 가리키지요.
그리고 이 마음의 굶주림은, 어떤 대상을 마주하든지 무조건 잡아먹으려는
’포악함‘으로 표출됩니다.
이렇게 굶주려서 모든 대상을 잡아먹으려는 포악함이,
바로 영적인 거짓됨의 정체라는 겁니다.
일시적으로 교리를 잘못 이해했거나, 윤리적인 잘못을 범했거나 하는 등등은
거짓됨의 최종적인 확정 근거는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연합함으로써, 새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짓의 분별 기준은 바로 마음의 굶주림을 끝까지 계속 유지하는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참 선지자의 증거는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바로 배부름입니다.
사람에게 다가올 때, 그의 마음은 이미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으로 배불러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잡아먹어 배부름을 얻으려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마음의 굶주림은 한 사람의 인격에 대해서 강력한 지배력을 가집니다.
그의 모든 일거수 일투족이 결국은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한
수단들이 될 수밖에 없게 만듭니다.
그래서 굶주림의 상태에서는, 가장 온유하고 예절 발라 보이는 모든 말과 행동조차도
실제로는 굶주림에서 발생하는 포악함의 위장막에 불과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목사님이 계신다고 합시다 그런데 목회 현장에 들어서기 전에
그분의 마음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 자신으로 배부름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목회자로서 교인들 앞에서 하는 모든 말과 설교와 목회 활동은
어떠한 신령하고 아름다운 말로 포장이 되더라도
본인 마음의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들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이럴 경우에 이 목사님이 꼭 다른 분들보다 더 악해서가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 자신만으로 자기 굶주림이 해결되지 않는 한
어쩔 수 없이 교인들을 잡아먹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상태가 거짓 신앙인이고 거짓 선지자의 상태라는 겁니다.
△또 예를 들어 하나님을 믿는 어떤 여집사님이 계신다고 합시다
그런데 자녀들을 만나기 전에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만으로 배부르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어머니로서 자녀들에게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은
하나도 예외 없이 어머니 본인의 마음이 배부름을 위한 포악함의 표현들이 되어버립니다.
자기 마음의 굶주림이 있는 한, 신사임당이라고 해도
결국 자기 배부름을 위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본질적인 구조입니다.
인격적 구조이죠.
▲그래서 참 선지자의 기준은 바로 '마음의 배부름'이에요.
가령 아직 목회 현장이 없는 목사님이 있다고 해봅니다.
그런데 예수님 안에서 만나게 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로
이미 충분히 마음의 배가 부릅니다.
더는 뭐가 있어도, 마음으로 더 먹을 수도 없을 정도로 하나님으로 배불러요.
그런데 이런 상태에서 목회 현장이 주어집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부른 배로 오직 교인들 먹일 생각만 하면서 말하고 행동합니다.
이렇게 먼저 하나님만으로 자기 배가 불러야 노략하는 이리로서
양을 잡아먹는 대신, 참목자로서 양을 치는 목양활동이 가능합니다.
또 어머니의 경우도 마찬가지예요. 일단 자녀가 없다고 가정해 봅니다.
그런데 예수님 안에서 마주하는 하나님 아버지로만 마음이 가득 차서 배가 불러요.
그런데 이렇게 배부른데 하나님이 자녀들을 내 앞에 세우십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어머니로서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은
오로지 자녀들만을 위하는 것들이 됩니다.
이제 비로소 양의 가죽을 쓴 노략하는 이리가 아니라, 참 어머니가 되는 겁니다.
참선지자와 참어머니뿐 아니지요.
참아버지, 참공무원, 참택배아저씨 등등 이 세상의 모든 신분과 직위 앞에
‘참’자가 붙으려면 다른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으로 배 불러야만 합니다.
굶주림이 있는 한 모든 사람을 대하여 하는 말과 행동은
어떤 직위에 있던 사람이라도 결국은 노략질하는 이리의 위장된 사냥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비유하자면 우리는 웨이터이고, 몸으로 사는 이 세상의 삶의 현장은
레스토랑의 홀입니다.
웨이터는 손님들이 음식을 먹는 홀에서는 자기 굶주림을 해결하지 않습니다.
오직 손님들을 위해 서비스를 할 뿐이지요.
웨이터는 홀이 아닌 별도의 장소에서 자기 배의 굶주림을 해결합니다.
우리는 웨이터의 인생을 삽니다. 삶의 현장은 레스토랑의 홀과 같습니다.
우리는 삶의 현장인 홀이 아닌 별도의 장소,
즉 지금도 천국보좌 우편에 계시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 자신만으로 우리 마음의 굶주림을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때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연쇄 과정을 마음으로
들락거리는 거지요. 하나님 자신만으로 배부르려고 말입니다.
이 사실을 모른 채, 삶의 현장으로 나가는 모든 사람은
꼭 거짓 선지자가 아니더라도, 모든 신분과 지위에서 양의 옷을 입은 가짜로서
노략질하는 이리가 됩니다. *'정글의 법칙'에 따라서 삽니다.
오로지 그들의 궁극적인 관심은 누구를 상대하든 무슨 일을 하든
어떻게 자기 배의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한 것인가를 위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모든 사람은 목회자든 어머니든 아버지든
대통령이든 공무원이든 회사원이든 택배 아저씨든
삶의 현장이라는 레스토랑에 홀로 들어설 때는
이미 배불뚝이 웨이터가 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더 자세히 보시려면 rfcdrfcd.tistory.com/15973540
◈좁은 문 좁은 길은 좁아서 좋다 마7:13~14 2025.10.28.
※좁은 문, 좁은 길을 ‘십자가’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좁은 문과 좁은 길, 넓은 문과 넓은 길,
모두 다 마음이 들어가는 문이고, 마음이 걸어가는 길입니다.
몸보다 마음이 우선합니다.
마음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을 걸으면.. 생명에 이르고,
마음이 넓은 문으로 들어가 넓은 길을 걸으면.. 멸망에 이릅니다.
좁은 문이나 넓은 문이 무엇이냐를 묻기 전에,
마음이 도달하게 되는 생명이나 멸망이 무엇이냐를 알아야 합니다.
최종 목적지를 알면, 길도 더 뚜렷해 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죠.
우리 마음은 두 가지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중략 주1)
▲먼저 ‘생명’이 뭐고, ‘멸망’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삶은 자기 마음 속에서 발생하는 근원적인 불안과 공허와의 싸움이지요.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 존재감과 만족감을 하나님으로 인해 얻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내 마음 안으로 받아들여, 하나님의 존재감으로 충만하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한 존재감이
자기 삶의 현장에서도 가장 큰 현실감으로 유지되는 상태를 위해
기독교를 믿고,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좋음을, 내 마음 안으로 받아들여 하나님으로 인한 만족감으로 충만합니다.
이 역시 삶의 현장에서 그대로 현실감으로 유지되어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으로 마음이 채워지면, 현장에서 나타나는 증거가 있지요.
산해진미로 배부른 자가 더는 무엇도 먹고 싶지 않듯이,
이 세상을 향해서는, 더는 그 어떤 좋음도 바라지 않는 상태로 나타납니다.
이것을 위해 예수님을 믿는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의 존재감으로,
하나님의 선하심 좋으심으로 인한 만족감으로 충만한 상태를
예수님은 바로 “생명”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왜 생명이라고 하셨을까요? 하나님 이외에 다른 대상으로 내가 존재감을 느끼잖아요?
그러면 그 모든 것들은, 다 일시적인 것들이기에 반드시 사라집니다.
즉, 내 존재의 토대가 사라지고, 근원적인 불안이 다시 나를 지배합니다.
오직 영원하신 하나님 있음에 대한 존재감으로, 내 존재의 토대를 삼았을 때만,
내 존재의 발판도 역시 영원한 겁니다.
내 인생에 만족, 좋다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님 이외의 다른 모든 만족으로는, 내 마음을 채울 수도 없지만,
만약 채웠더라도 다 일시적입니다.
내 몸이 죽으면 어차피 다 사라지고, 우리의 영인 마음은
다시금 근원적인 공허에 빠지게 됩니다.
오직 영원하신 하나님의 선하심과 좋으심으로 채워진 만족감만이,
내 마음 안에서 영원합니다.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존재감을, 내 존재의 토대로 삼고
선하신 하나님의 존재로 인한 만족감으로, 내 마음의 공백을 가득 채운 상태,
이 상태로 영원히 존재감과 만족감이 유지되는 상태가.. 바로 “생명”의 상태입니다.
▲이제 ‘넓은 문’과 ‘좁은 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면 실제로 넓은 길로 이어지는 넓은 문과,
좁은 길로 이어지는 좁은 문은 어디에 있지요?
넓은 문은 우리 몸에 있습니다. 오감각입니다.
눈과 귀와 코와 입과 피부(촉각)이지요.
내 마음이 몸에 밀착하면, 이렇게 오중으로 열린 문을 통해,
내 마음은 세상으로 깊숙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오감각으로 포착하는 대상 중에서,
내 존재에 만족과 채움을 줄 대상을, 내가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서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넓은 문으로 들어가 넓은 길을 가는 삶입니다.
그 결과, 자기 존재의 토대가 사라지는 근원적 불안,
자기 공허함을 채울 수 없는, 근원적 공허의 두려움을 감당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본문에 표현된 ‘멸망’인 것입니다.
그러면 좁은 문과 좁은 길은 어디에 있지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님이, 바로 우리 마음이 들어가야 될 ‘좁은 문’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안에서 육의 몸을 벗는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는다고 하셨어요.
즉 동일시를 통해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인해서
우리 몸은 우리 마음에서 잘려나갑니다.
즉 몸으로 만나는 세상에 대해 죽는거지요.
그러면 더는 있음의 존재감과 채움의 만족을 위하여 육의 몸에 밀착하여
마음이 오감각이 이끄는 길을 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좁은 문으로 들어선 마음은 이제 좁은 길을 갑니다.
좁은 길은 좁은 문인 십자가 죽음에 이어집니다.
부활과 승천과 천국보좌 우편에 이르는 길입니다. 이보다 더 좁을 수는 없습니다.
모든 마음은 오직 혼자만이 이 길로 들어서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맙시다. 말씀처럼 넓은 길은 넓어서 사람이 많이 찾을 뿐이지
쉬운 길이 아닙니다.
인류는 지금 넓은 길을 가면서 모두가 다 험악한 인생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좁은 길은 좁아서 사람이 찾지 않을 뿐이지 찬송과 가사처럼 기쁨이 넘치는 길입니다.
좁은 길을 걸으며 항상 기뻐하는 것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
주1) 중략된 부분
마음 자신의 있음을 위한 발판과,
마음 자신의 채움을 위한 좋음입니다.
첫째, 나는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니지요.
그래서 반드시 다른 대상의 있음을, 내가 있음의 근거로 삼습니다.
이렇게 나 있음의 발판을 찾지 못하면, 근원적인 불안함이 작동해서
두려움으로 인해 잠시도 견딜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실제로 다른 대상의 있음을 끌어다가, 나 있음의 근거로 삼을 수 있을까요?
그 대상의 존재감을 느낌으로써, 나 있음의 발판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내가 만나는 대상 중에서 가장 강하게 실감하는 존재감의 대상이
바로 그 순간, 나 있음의 발판이 되는 셈이지요.
둘째, 만족감은 왜 필요합니까? 인간의 마음은 근본적으로 비어있습니다.
비워둔 채 있을 수가 없는 것은, 그 근원적인 공허감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절대로 ‘스스로’ 그 공백을 채울 수는 없지요.
역시 좋음이라 믿어지는 다른 대상으로 채워야만 합니다.
다른 대상으로 내 마음을 채우는 일은, 실제로 어떻게 나타납니까?
바로 그 대상을 내 것으로 가짐으로써, 만족감을 얻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