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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25장 있는 자에게 더하는 원리

LNCK 2026. 8. 16. 01:27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미혹>

https://blog.naver.com/karamos/80055187568

 

◈있는 자에게 더하는 원리           마25:23~30              1998.12.27.

 

(1998년) 몇 달 전에 러시아 정교회에 신학대학 총장이신 Johanes 박사님을

제가 초청을 해서, 한국교회와 그리고 한국신학대학들을 돌아보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의미로 그와 같이 했었습니다.

 

혹 3부예배에 나오시는 분들은, 그분이 나와서 여기서 교인들에게 인사하는 것을 본 분도

계실 겁니다. 그 모든 프로그램이 끝나는 마지막 저녁 만찬 때에,

제가 식사시간이지만 마지막으로 심각한 질문을 한번 해보았습니다.

 

"그처럼 기독교문화로 꽉 차있는 러시아가 어떻게 돼서 공산주의의 지배를 받게되었는지,

그것이 알고싶다. 어떻게 그렇게 됐느냐?"고, 제가 물어보았습니다.

 

아시는 대로 1917년 10월 공산주의 혁명으로부터 시작해서,

1989 베를린 장벽 붕괴까지, 약 70년 동안을, 무서운 공산주의 지배하에 고생을 했고,

또 그 후유증으로 지금도 러시아 경제, 정치가 엉망입니다.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고생을 치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를 방문해 보면, 그 유명한 붉은광장 한 가운데 교회당이 있습니다.

도처에 아주 우뚝우뚝 서있는 정교회당들을 볼 수 있고,

더구나 상트 페테스부르크 같은데 가보면, 그 뭐 온 도시가 기독교문화로 꽉 차있구요.

더구나 그 ‘이삭 성전’ 같은 것은, 로마에 베드로 성당하고 맞먹는 겁니다.

내가 보기에는 더 잘 지은 것 같아요.

 

이런 굉장한 기독교 문화 속에 있었던, 그 찬란한 그 옛날의 기독교 문화를 지닌 나라가,

어떻게 해서 공산당한테 먹혀 가지고,

이렇게 70년 동안을 모진 고생을 하게 됐고, 오늘까지 고생하고 있느냐?"

 

이렇게 심각한 질문을 했습니다.

그는 조용히 생각하더니.. 눈물이 핑돌더니 눈물이 뚝 떨어져요.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속았지요."  미혹당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심각한 말입니다. 속았다는 것입니다. 미혹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왜요? ‘노동자, 농민을 위한 평등사회를 만들어 준다는데...

프롤레타리아의 독재, 아름답고 귀한 평등사회를 이루어 준다고 해서 그만 속았다’는 거예요.

 

"아차!"하고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벌써 때는 늦었어요.

꼼짝 못하고 70년동안 그 고역을 치르게 됩니다.

이미 기회는 놓쳤기 때문에...

 

그들은 공산주의의 선전에 속았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알게 모르게 속고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됩니다. 스스로 속고 있고, 남에게 속고있습니다.

또한 미혹의 영인 마귀에게 속고 있습니다

그래서 늘 깨어있어야 됩니다.

 

▲여러분 ‘평등 분배, 평등 자유’란, 말이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우리가 다 같이 나누어서 평등하자’

이렇게 빈부차이가 많고, 계급 차이가 많고, 신분 차이가 많은데 ‘평등하자’

얼마나 좋은 얘기입니까?

 

그러나 정의와 진리와 신앙이 없는 평등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를 몰랐거든요.

정의가 없는 평등이 혁명이요, 진리가 없는 평등이 바로 폭동이요.

이것이 멸망으로 치닫는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건 제도로 해결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성경은 “평등과 참 자유”에 대해서 그 뜻을 깊이 설명해주는

아주 귀한 말씀이올시다.

오늘 이 세대를 향하여 주께서 말씀하시는 대단히 중요한 메시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성경을 이렇게 피상적으로 잠깐 보면, 여기에 엄청난 불평등이 있습니다.

불공평 이 있습니다. 보세요.

 

맨 마지막 부분에 가면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한 사람은 열 달란트를 가졌어요.

한 사람은 한 달란트를 가졌어요.

자 예수님의 마음 같아서는 어때야 되겠습니까?

 

"야 너 그 많이 가진 거 나누어 주어라.

하나 가진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라. 한 댓개 나누어 주어라."

그래야 되지않아요?

 

예수님의 말씀은 그게 아니요. 우리 보통 생각과는 다릅니다.

‘하나 가진 사람 것을 빼앗아서 열 가진 사람에게 주었거든요.

 

이세상에 그런 불공평이 어디 있습니까?

누가 얘기를 해도, 그건 끔찍한 얘기죠.

"없는 자의 것을 뺏어서, 더 많이 가진 자에게 주어라."

 

어째서 이런 일이 있느냐 이 말입니다. 이게 평등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서 평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공평을 말씀하고 있어요.

 

▲또 다시 생각하면, 애당초, 맨 처음 시작할 때부터 불평등이 있었어요.

한 사람에게는 5달란트, 한 사람에게는 2달란트, 한 사람에게는 1달란트를 주었다는 것이죠.

 

왜 그랬습니까? 이것도 불공평 아닙니까?

그러나 이 분배는, 주인이 오랫동안 경험하고, 그 종들의 능력을 알아서

그들의 능력에 따라서 공평하게 주어진 것이였어요.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은 1달란트 밖에는 관리능력이 없어요.

"너는 한 달란트가 족하다."

(*고대시대의 화폐는 은입니다. 1달란트는 34Kg, 오늘날 시세로 1억3천만 원 가량)

 

이게 평등이요. 한 사람에게는 관리능력이 넉넉해서

"너는 다섯 달란트 받아라. 그게 네게 적합하겠다."

 

이게 그 주인이 판단한 (경제 관리 능력에 있어서) 평등이란 말입니다. 여기에 이이가 없어요.

보세요. 돈 가질 사람이 돈을 가져야지.

 

어느 택시기사가 한번 내게 그렇데 말합디다요.

제가 택시를 타고 택시기사에게 공손하게

"이리 가십시다. 저리 가십시다."

 

좀 공대해서 말을 했더니

"아이구 선생님, 제가 기분이 좋으네요." 하더니, 한마디 하는데

 

"가끔 이상한 손님이 있어요. 어쩌다가 떼돈을 벌긴 벌었나본데,

아니꼽고, 치사하고, 더러워 못살 때가 있습니다.

돈 몇 푼 가졌다고 그까짓 택시 한 번 타놓고서 뭐 그냥 종 부리듯이

반말로 ‘이리 가라, 저리 가라. 천천히 가라, 차 조심해라’ 할 때 보면,

택시 기사 일도 쉽지 않습니다. *특히 지방에서 노인 손님들이 술드시고 주사가 많답니다.

 

그 왜 그랬을 것 같아요? 이게 문제라구요.

돈 못 가질 사람이, 돈을 가져 놓으면 이 모양이라니깐요.

그 자리에 올라가지 말아야 할 사람이, 올라 가 놓으면,

저가 가문 망신시키고, 나라 망치고, 피차 다 망하는 거예요.

 

그러고 보니까 지식도 그렇더라고요. 사람이 제대로 못되고, 지식을 가져놓으니깐

여러 가지로 어렵더구만요. 여러 사람을 괴롭혀요.

 

그러니까 그의 능력대로, 그의 오랜 경험에 의해서 평가되는 능력대로,

한 달란트도 주고, 두 달란트도, 다섯 달란트도 주었습니다.

 

또한 여러 모양의 사람이 필요하니깐, 이런 사람도 필요하고, 저런 사람도 필요한 거에요.

다 머리가 좋아야 되는 게 아니예요. 다 능력이 있어야 되는 것도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그것은 소위 말하면 Diversity, 하나님의 양성한, 다양적 은사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다양하게 이런 사람, 저런 사람에게 적합하게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공평이요. 이걸 인정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됩니다.

 

▲자, 이제 가만히 생각하면, 좀 하나님이 불공평하게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은 도대체가 너무 재주도 여러 가지가 있어요.

 

그 사람은.. 남은 한 가지도 없는데, 여러 가지 재주가 있고,

어떤 사람은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고... 그러나 자세히 보면, 뭐 하나 있긴 있더라구요.

있어요. 이걸 이제 발견하고, 바로 포착하고, 그것을 소중히 여겨야 됩니다. 자기 달란트를!

 

그런데 오늘 여기 본문에 보면, 이런 불공평이 있는가 하면, 또 공평한 것도 있습니다.

공평을 보세요. 문제는 주인과 종의 관계입니다.

 

어차피 종은 종입니다. 뭐 종이 주인이 되는 게 아닙니다.

주인 앞에 종이요. 종으로서 많이 가졌든 적게 가졌든, 상관할게 없어요.

(다같이 종이란 신분으로 5달란트, 1달란트 가진 자가 평등합니다. 제 것이 아닌 거죠.)

 

1) 똑같이 신분이 끝까지 종이라는 거. 그거 평등한 거죠.

2) 또 하나는 ‘맡겨졌다’는 것입니다.

 

자기 것이 아닌, 주인의 것을 임시로 맡아서... 둘 다 위임받은 것이에요.

잠깐동안 재산을 관리할 수 있도록 이렇게 위임받은 것이다.

소유주가 제 것이 아닌데, 5달란트니, 1달란트니.. 다 평등하게 주인의 것입니다.

 

‘맡겼다’는 게 바로 그런 의미를 가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평합니다.

그런데 재능대로, 그가 가진 재능대로,

재능에 적합하게, 적당하게, 정말로 공평하게 맡겼다는 것이죠.

 

외적으로 보면, 공평한 게 아니에오,

그러나 내적으로, 실질적으로는 공평하게 주어졌다 이거예요.

 

3) 또 그런가하면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집니다.

주인이 잠깐 타국에 가면서, 그 종들에게 맡깁니다. 그 자율적 기간이 주어집니다.

 

그간에는 주인이 간섭하지 않을 거예요.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요.

뭐 아침에 일어나라, 저녁에 자라... 뭐 그런 말도 안 할거예요. 내버려둘 거예요.

달란트를 주고 나서는, 주인은 가버렸으니까. 얼마 후에 돌아오겠지요.

그 기간동안은 ‘자율적 기간’이라는 것이 공평하게 주어집니다.

 

그게 중요한 것이예요. ‘자율기간, 그걸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하지요.

종들은 그저 상관없이 ‘난 나대로 내 할 일을 할 뿐이에요.’ 그러한 균등한 기회를 주었어요.

 

▲미안한 얘깁니다만 제가 젊었을 때 미국에서 공부할 때 말입니다.

여러분, 미국은 방학이 깁니다. 4개월이나 돼요,

 

그런데 이 여름방학동안, 저는 방학이라고 쉬어본 일이 없어요.

얼마나 귀한 시간을 냈고, 얼마나 귀한 장학금 받아 가지고 공부하는데,

아 이 3개월 동안을 멍청하게 놀아요? 안되죠.

 

제가 공부 끝날 때까지, 그 가까운 옆에 있는데, 어틀랜틱 시티를 한번도 안 갔어요.

유혹은 받았지요. 그 자동차도 있겠다... 좀 갔다오면 되지만 *도박장 있는 곳, 100마일

"저기는 내가 갈 곳이 아니다."

 

왜요? 여름 방학동안에 계속해서 도서관에서 공부했더니, 공부하는 학생이 둘 밖에 없어요.

그 사람하고 나하고. 그 4개월 동안 친했다고요.

그걸 교수 분들이 다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얼마 전에 그 학교로부터 The Man of the Year Prize 를 받을 때,

‘학교를 빛낸 동창’이라고 해서, 뭐 상패하나 주더만요. *프린스턴 신학교

그런데 그걸 주는 이유 중에 하나가, 여기 와서 공부할 때, 여름방학에 공부했다

그러더라고요. 그때 모범생이었기 때문에 준 다 이거예요.

 

그때 빈둥거렸으면 아무리 지금 뭘해도 안돼요. 그거는 모범생이 못 되니까.

자 자율성이라는 게 이렇게 중요한 거예요.

 

‘뭐 가라, 와라’ 거기에 매이는 건, 충성하게 아니죠.

해도 되고, 안할 수도 있는데, 내가 알아서 헌신하는 거죠.

누가 뭐라고 시켜서가 아니라, 나의 자율성, 그게 바로 진정한 충성이 아니겠어요?

 

자 이 주인이 원하는 충성이 무엇이었던가 보세요.

그것은 틀림없 양적인 것이 아니고, 질적인 것이요. 생산적이고 자발적이고,

자원적 충성을 요구하고 있어요.

 

"여기서 뭐 얼마를 남겨라. 뭘 해라. 뭘 해라."

그 말이 없어요. 자율적 충성을 요구합니다. 맡기고 외국으로 떠나버리잖아요.

 

그래서 착하고 충성된 종은, 그 자율 적인 기간에 열심히 스스로 일을 해서

능력대로 두 달란트 받았던 사람은, 두 달란트를 남겼어요.

5 달란트 받은 사람은, 5달란트를 남겼더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주인이 칭찬합니다.

"작은 일에 충성했다. 뭐 그거 큰 일은 아닌데,

작은 일에 충성을 다 했으므로 내가 큰 일을 맡기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런가하면 한 사람이 문제입니다.

이 사람은 한 달란트를 받았으나, 한 달란트를 땅에 묻었다가 도로 가지고 가서

"이거 주인의 것입니다."           *은34Kg, 요즘 시세로 1억3천만원

 

그래서 이 주인은 말씀하시기를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합니다.

나(설교자)는 그가 게으르다는 말은 인정하겠어요.

그러나 그가 악하다는 말은 조금 못마땅해요.

 

‘본전 잘라먹는 사람도 많은데, 아 그 본전 가지고 왔으면 그만하면 괜찮지..’

요새 같으면 이만하면 훌륭한 사람이에요. 본전은 지켰잖아요.

 

그런데 주인은 아니오, ‘악하다’고 책망을 하십니다.

그건 왜냐하면, 이 사람은 비생산적이고, 비능률적이었기 때문이요. 왜 이렇게 됐을까요?

모름지기 질투하는 마음이 거기에 있었다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세상에 이 질투라는 말은 참 무서운 말입니다.

모든 죄가 질투로부터 오기 때문이에요.

‘왜 다른 사람 5달란트 주면서, 나는 1달란트 주시나? 아 이거 창피해 못 살겠다’ 이거에요.

‘나 이거 정말 부끄러워...’ 그래서 주인에게 화가 난거에요. 동료에겐 질투요,

시험에 들고, 토라져버린 것이지요.

 

일류 대학 심리학 교수인 피터 살로비(Peter Salovey)라고 하는 교수님은

‘범죄의 20%가 질투에서 비롯된다’ 그랬고요,

또 그레고리 화이트 박사(Dr. Gregory White)라고 하는 분은 "질투 임상학",

"클리닉 오브 젤러시"(Clinic of Jealousy)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서 말합니다.

 

부부관계로 살다가 이하되는 거... 원인의 30%가 질투라는 거 예요.

여러분 사업도 ‘질투’ 때문에 실패하는 걸 아십니까?

우리가 그런 흔히 말하는 ‘무한 경쟁’이라고 합니다만,

이 경쟁이라고 하는 것이 사람을 병신 만드는 거예요.

 

경쟁하는 동안에 내 페이스를 잃어버려요, 도덕성도 잃어버려요.

더구나 허약한 체질이 남들과 경쟁을 하게되면 죽어요.

자기 수준, 자기 능력을 잊어버리기 때문이예요.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언제나 바로 된 인간은, 자기 존재와 수직적 관계,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크게 여깁니다.

남이 뭐라고 하든 말든, 자기 소명과 사명에 충실합니다. 남들과 경쟁 안 합니다.

 

그러나 시원치 않은 사람(1 달란트)은, 옆사람 말이면, 이 수평적 관계에 신경을 많이 써요.

‘남들이 뭐라고 하나? 체면이 어떤가?’ 이걸 생각 하다가 골병드는 거예요.

 

(*교회끼리도 경쟁하고, 질투하고, 비교하고...

그거 하느라 자기 페이스를 놓치기 쉽습니다. ‘준거집단’과 이렇게 비교하죠.)

 

정신병자가 따로 없어요. 이렇게 될 때, 사람은 병신 되는 거예요. 그걸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받은 1달란트를.. 그냥 파묻어버리는 거죠. 화가 잔뜩 나 있는 거예요.

 

‘남이 어떻게 한다’에 끌려 다니지 마세요. 남 같이 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런데 이 사람이, 다른 사람이 높이 평가받고, 자기가 낮게 평가되는데 대해서 불평했어요.

또 주인의 그 자기 재능 평가에 대해서 불만이예요.

‘왜 하필 이면 나를 1달란트 밖에 관리할 능력이 없는 자로 평가했느냐?’는 거죠.

이걸 수용할 마음이 없었어요.

 

그래서 주인에게 화를 내고 있어요. 그 증거는,

그래서 본문에 보면 책임을 주인에게 전가합니다.

 

"주인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분 인줄 알았기 때문에,

주인의 것을 땅에 묻었다가 가져왔나이다. 당신의 것을 받으소서."

아주 못됐어요. 그렇게 불평을 하지 않습니까? 거기에 더하여 주인에게 책임을 돌려요...

 

그리고 오늘 본문에 보면 '두려워하여' 그랬습니다.

주인을 두려워하고, 또 손해 볼까봐 두려워했죠.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만일에 이 사람이 1달란트를 홀랑 다 잃어버리고 와서

주인에게 엎드려서

"주인이여, 주인이 나를 보신 바와 같이, 처음부터 나는 시원치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내 딴에는 수고를 했습니다만, 홀랑 잃어버렸습니다. 어떡할까요. 죄송합니다."

 

만약 그렇게 했더라면, 제가 생각하는 바는, 주인이 꼭 그랬을 것만 같아요.

열 달란트 가진 사람보고,

"야! 그 중에 다섯 달란트 이 사람에게 줘라."

"Try again! 다시 도전해 봐!" 꼭 그랬을 거 같아요.

 

그런데 이 사람이 이걸 땅 에다 묻어놨다가,

본전치기, 이 본전치기 가지곤 안 통해요. 하나님은 그걸 용납하지 않으셨어요.

 

그리고는 여기 보니까, ‘있는 자에게 더 주라’ 이거는 평등이 아니지 않습니까?

오히려 그 능력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자세히 성경을 읽으면,

너희는 유능해서 5달란트를 10달란트로, 2달란트를 4달란트로 벌었으니까

이제 주인에게로 가져와라. (수고 많았다. 너희는 종이니까, 이거 다 내 차지다. 내 것이다)

그런 얘기가 아니예요.

 

5 달란트 주었던 사람이 5 달란트를 남겼더니... 10 달란트를 종에게 주어버렸어요.

또 더 큰 기회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걸 우리는 잊어서는 안돼요.

 

2 달란트를 더 번 사람에게는 4 달란트를 주어 버렸어요.

그러니까 그가 다시 더 큰 기회를 얻게 되었다... 하는 말입니다.

주인이 종들의 능력을 착취하는 게, 그 목적이 아니었다는 거죠.

 

우리가 쓰는 용어가운데 그런 말이 있지요. 뷰로크라시(Bureaucracy) 관료주의,

아리스토크라시(Aristocracy) 귀족주의, 귀족이 다스리는 사회.

그리고 데모크라시(Democracy) 민주주의 이렇니다만,

요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이 뭐냐 하면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 입니다.

이것은 실적주의 입니다. 능력주의입니다. 능력에 따라 분배하는 것입니다.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와 반대되는 개념이 ‘은혜’지요. 성경에는 이런 면도 나오고, 저런 면도 나옵니다.

둘 다 받아들이면 됩니다. 부모가 자녀를 키울 때도, 엄격과 은혜 두 면을 다 가집니다)

 

만일에 이 한 달란트 가진 사람이 굳이 나는 그럼 어떡할까요?

오늘 본문엔 벌을 내리려 했다면,

"너는 열 달란트 가진 집에 가서 얻어먹어라." 그랬을 거예요.

 

왜요? 그것이 그에게 마땅한 일이니까요.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능력대로 평가받는 세상에 왔습니다.

이제 뭐 몇 시에 출근해서 몇 시에 퇴근 했다고, 뭐 그것 가지고 말할 때는 지났어요.

하루종일 담배 세 대 피운 것밖에는 없으니까. 한 일이 뭐요? 이건 본전치기도 못하고,

월급만 가져가는 사람이에요. 이런 사람은 필요없다 그거 아닙니까.

 

여러분 우린 하나님 앞에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십시다.

소유는 복이 아닙니다. 소유란 기회일 뿐이요, 소유란 내게 맡겨진 중요한 사명입니다.

이제 내가 이것을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중요해요.

 

얼마를 가졌느냐 묻지 마십시다. 가진 것을 가지고 얼마나 생산적으로, 능률적으로 살았느냐

가 문제입니다. 이제 그 능력에 따라서 다시 다음 기회가 주어질 것입니다.

 

주인 앞에서, 주인의 평가에 대해서, 우리는 온유, 겸손하게 받아들입시다.

그리고 주의 뜻을 알았으면, 이제 우리는 다시 정비해서, 진실과 정의와 하나님 앞에

정직함을, 생산적 정직함을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이것이 내일을 위한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

 

♣공산주의의 미혹

 

... 오늘날 우리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앞서 살펴봤던 교회의 다섯 가지 상황, 우리랑 참 비슷하지 않아요?

 

그 얘기는 뭐냐면, 우리도 지금 굉장한 위기 가운데 서 있다는 거예요.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위기 가운데 서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 교회가 깨어나야 될 때입니다.

영적으로 깨어나서, 도대체 본질이 뭐고,

도대체 마귀가 무슨 일을 하고 있고,

도대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고... 이거를 정확히 보지 못하는 순간

우리는 충성되게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엉뚱한 짓을 할 수 있어요.

 

충성되게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북한에서도 그랬고, 러시아에서도 그랬고,

목사이고 헌신된 하나님의 종들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했던 선택과 지지는,

하나님과 반대편에 서는 거였어요.

 

그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순교하며,

한 세대가 완전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이런 비극을 낳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여기에 대한 역사의식을 가져야 되고, 시대의 책임의식을 가져야 돼요.

 

더욱 더 심각한 건 뭐냐면 이게 ‘미혹의 영’이라는 거예요. 미혹의 영!

그래서 말로는 안 돼요. 말로는 안 되고,

정말 이 땅 가운데 다시 한 번 부흥이 일어나야 돼요.

 

그래서 성령께서 사람들을 일깨우시고,

이게 참 희한한 게 성령 받고 나면 사람들이 생각이 달라져요.

‘그게 아니었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었네..’

 

성령 받고 나면, 마침 뭐에 취해던 사람이 깨듯이 깨요.

근데 성령 받지 못한 사람들은, 아무리 얘기해도 얘기가 안 통해요.

참 이게 뭐에 홀린 것 같다는 거죠.

 

제가 이제 어떤 분하고 이런 얘기를 하다가,

그 분이 전혀 엉뚱한 얘기를 하셔서, 그걸 수학적 논리로 증명을 해드렸어요.

‘그거는 이러저러해서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일입니다.’ 했는데, 설득이 안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 사건을 겪으면서 ‘아 이게 그냥 설득해서 될 게 아니구나’

수학으로 완벽하게 증명을 해줘도..

수학으로 증명했다고 하는 건 100% 증명이라는 거거든요.

‘그래도 안 믿으려는 사람은 안 믿는구나’ 이게 이제 영의 문제인거죠.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 진짜로 깨어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챗GPT 한테 물어봤습니다.

챗GPT 한테 물어봤더니, “러시아, 중국, 북한을 보았을 때

오늘날 한국교회, 나아가 세계교회가 반복하지 말아야 될 역사적 교훈을 다섯 개만 뽑아줘”

제가 이렇게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챗GPT가 이렇게 말해주더라고요. 똑똑하더라고요.

제 얘기가 아니고 챗GPT의 얘기입니다.

 

「1) 첫째, 사상의 영적 본질을 분별하지 못하는 오류.

러시아, 중국, 북한 교회는 공산주의가 가난한 자들 사회적인 평등을 이야기하니까

이것을 기독교적 가치라고 믿었다. 그러나 공산주의의 본질은 무신론, 반자유, 인간 숭배다.

교회는 사상이나 이념 배후에 있는 영적 본질을 분별해야 된다.

겉으로 정의, 평등을 말해도, 하나님을 반대하는 사상이면 결국 교회를 파괴한다.

 

오늘날 교회는 세상의 사상, 진보, 보수, 좌우에 휩쓸리지 말고,

성경적 세계관으로 영적 본질을 분별해야 한다.

 

2) 두 번째, 자유의 가치를 가볍게 여긴 오류.

볼셰비키도 중국 공산당도 북한도 정권을 잡자마자 가장 먼저 예배의 자유를 제거했다.

왜냐하면 예배의 자유는 곧 하나님께만 복종하는 자유인데,

이는 전체주의가 가장 두려워하는 자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교회는, 신앙의 자유는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고, 그걸 지킬 준비도 없었다.

복음의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지키지 않으면 잃는다.

교회는 신앙표현, 가정, 양심의 자유를 공격받을 때 침묵해서는 안 된다.

(제 얘기가 아니고 챗GPT 입니다.)

 

3) 셋째, 정치적 중립을 가장한 영적 무감각

‘정치 이야기하지 맙시다 우리는 영적인 것만 하면 됩니다.’

이러한 태도 때문에 러시아, 북한, 중국 교회는 공산주의에 대해 영적 경고를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결과 교회 전체가 무너졌다.

 

신앙을 파괴하는 이념 앞에서 중립은 없다.

교회는 불의, 억압, 자유박탈 앞에서 선지자적 목소리를 내야 한다.

정치적 편향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기준으로 분별하고 말해야 된다.

 

4) 영적 지도력의 부재와 분열

러시아나 북한에서도 위험을 경고했던 지도자들은 있었지만,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입을 닫았고, 두려움 때문에, 경고하는 다른 지도자들을 비난했다.

그래서 교회를 하나로 모으지 못했다.

 

공산주의가 들어올 때 교회는 내부적으로 이미 약해져 있었다.

영적 위기 앞에서 하나님의 사람들끼리 분열돼서는 안 된다.

지도자들은 분별, 용기, 연합, 그리고 선지자적 목소리를 내야 한다.

 

5) 다섯 번째, 설마 여기까지 오겠냐는 안일함.

이게 이제 역사적 교훈이라는 거예요.

러시아, 북한, 중국 모두에서 기독교인들의 가장 큰 오판은 이것이었다.

‘설마 기독교가 무너지겠나? 우리는 큰 교회인데, 여긴 부흥의 땅인데,

하나님이 지키실 거야.. 그러니 준비 안 해도 돼!’

 

그러나 결과는 비극이었다. 교회는 폐쇄되었고 성경은 금지되었다.

목회자들은 숙청되었고, 신앙의 자유는 사라졌다.

 

영적 전쟁에서 가장 위험한 태도는 ‘설마’라는 생각이다.

사탄은 항상 자유를 빼앗고, 진리를 무너뜨리게 한다.

교회는 깨어있어야 하고, 지켜야 할 것을 지킬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이상 챗GPT의 대답이었습니다.

사실 웬만한 목사보다 똑똑한 것 같지 않아요?

정확하게 본질을 깨뚫고 있더라고요.

 

제가 한 얘기가 아니고, 그냥 챗GPT 한테 질문을 주고, 얻은 답입니다.

제가 얘를 세뇌시킨 것도 아닙니다.

그냥 객관적인 데이터들을 준 다음에, ‘그때 혁명이 일어나고 난 다음에 교회가 어땠어?

거기서 우리가 무슨 교윤을 얻어야 돼?’ 그렇게 물어본 거예요.

그랬더니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

-고성준 목사 설교 중에서 인용 “자유를 엿보는 자들 3” 2026.01.16. [갈라디아서 12강]

 

 

♣6.25 동족 상잔의 참혹한 비극, 이어진 남북 분단의 아픔.. 이런 환난들이 왜 일어났는가?

에 대한 기독교적 질문들이 아직까지도 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신사참배' 와 '기독교인끼리의 반목, 분열' 등이 지적되었습니다.

 

아래 설교는, '공산주의'라는 거짓선지자의 가르침에 우리 민족이 속았다고 분석합니다.

'거짓에 미혹되었다'는 거죠. 특히 당시 '식자'들 중심으로 공산주의를 환영, 지지했다는 거죠.

 

배척해야 될 공산주의를,

미혹을 당해서, 속아서, ‘평등 사회, 모두가 잘 사는 사회’가 좋아보여서,

당시 한국의 식자 층에서 상당수가 그걸 환영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북한이 급속하게 공산화 되었고, 그로 인해 625가 일어나게 된 것이죠.

 

동구권이 다 공산화되고, 중국과 동남아의 많은 나라들이 공산화 되는 마당에,

남북한이 모두 공산화되지 않고, 남한은 그나마 공산화를 막은 것이,

그래도 한국 기독교의 힘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미국의 '소련 팽창주의 견제 정책'도 있었지만요!

 

설교 전문은 ☞ rfcdrfcd.tistory.com/159834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