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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9장 잃은 것과 얻은 것

LNCK 2026. 8. 20.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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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은 것과 얻은 것             마9:9-13                   2002.03.10.

 

지금도 그런 지 모르겠는데, 우리나라 초일류의 어느 그룹에서는 신입사원을 다 뽑고

마지막으로 사장이 면접을 하는데,

그 때 사장 옆에 앉아있는 어떤 사람의 승인이 나야 최종적으로 합격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냐 하면 관상쟁이입니다. 신입사원이 사장과 최종면접을 하는 사이에

그 관상쟁이는 그 사원의 관상을 자세히 살펴서 사장에게 알려 줍니다.

여태까지의 성적이 아무리 좋아도, 그 관상쟁이가 "No!"하면 그 사람은 불합격입니다.

즉 관상이나, 인상도 어느 정도 받쳐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적 관점이 아니지요. 

 

저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쓰라린 경험이 있습니다.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신문을 배달해 보려고 친구들 따라 신문사 지국에 간 적이 있습니다.

자리가 몇 개가 있었는데, 그 당시에 신문사 총무라는 사람이

같이 간 다른 친구들은 다 자리를 줬는데, 저더러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왜 나는 안되느냐?'고 물어봤더니, 어쨌든 저는 안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나왔는데, 나중에 다른 친구들 통해 들은 얘기가 참 너무 기가 막히더라구요.

 

그 총무가 제 친구더러 저를 가리키면서 하는 말이

"걔 생긴 것 좀 봐, 꼭 쥐새끼같이 생겼잖아!" 그러더라는 거예요.

제가 참 얼마나 황당한 지, 그래서 제가 한 동안 매일 거울을 한참씩 봤습니다.

"내가 정말 쥐새끼같이 생겼나!"

 

그리고, 정말 그렇게 생겼다고 해도, 일하는 거 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쥐가 얼마나 날쌥니까?

제가 그 일 뒤로 아직까지 그 신문사 발행 신문을 안 봅니다.

 

그리고 제가 좋아했던 영화배우 문희가 그 신문사 회장 아들하고 결혼을 한다고 했을 때

제일 섭섭해했던 사람이 저였습니다.

어쨌거나 사람을 쓰는 입장에서는, 모든 면이 골고루 갖추어져 있어야 믿음이 갑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3년 동안의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당신과 사역을 같이 할 제자들을 뽑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사람뽑는 기준은 참 특이하고 이상했습니다.

그 기준이 뭔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보통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아요.

실력이 있나 살펴보면... 어부들이 무슨 실력이 있겠어요?

맨날 고기만 잡던 사람들이 무슨 성경지식이며,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알겠습니까?

 

그렇다고 평판이 좋기를 합니까? 그저 그런사람들입니다.

성격이 원만하냐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뱃사람들이 얼마나 거칩니까?

모두가 다혈질에 싸울 일이 있으면, 사양하는 법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외모? 그 시대에 이발이나 제대로 했겠습니까? 전부 다 털보들.

경험? 고기잡는 데만 경험이 있지,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거의 백지상태입니다.

모든 면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뭔가 뛰어나 보이는 구석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열두 명의 제자들 중에서도 특히 예수님의 제자로서 정말 적합하지 않은 인물이

한 명 있었는데, 바로 마태였습니다.  *이 설교의 주인공

오늘 저는 이 마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해득실에 무척 민감합니다.

손해나는 일은 잘 안 하려고 하지요.

 

교회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믿음 생활을 잘 않하려고 하는 이유는,

뭔가 잃어버리는 게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물론 얻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잃어버리는 것은 표면에 금방 나타나지만, 얻는 것은 잘 표시가 안 납니다.

오늘 마태는 그런 갈등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해답을 줍니다.

 

예수를 믿기로 작정했을 때, 잃어버리는 것은 무엇이며 얻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마태를 통해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의 마태는 자신이 직접 쓴 자기 얘기를 지극히 간결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마9:9

 

자기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얘기를 쓴 건데, 예수라는 분이 지나가다가

세관에 앉아있는 자기를 보시더니 "따라와라"

그래서 바로 "예"하고 대답해서 제자가 되었다는 겁니다.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평생동안 들어보지 못하고 죽어가는

오지(奧地)의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여러 가지 매체를 통해 예수의 이름을 들을 기회가 많아졌습니다.

그리고 직 간접적으로 오늘 예수님이 마태에게 하신 말씀을 듣게 됩니다.

 

"나를 좇으라"

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물론 이 부르심은 '사람, 전도자'를 통해서 전달되지요)

마태처럼 즉시 응답하는 사람도 있고,

좀 미루는 사람도 있고,

전혀 요지부동인 사람도 있습니다.

 

아마도 마태처럼 따라 나서는 사람보다,

그 초청을 거부하는 사람이 아직도 많은 게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오늘 마태가 잃어버린 것들이, 자기에게도 올까봐 우려하기 때문이죠.

 

사람들은 잃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손해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이런 마음 때문에,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멸망의 길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서 마태가 <잃은 것>은 뭘까요?

 

▲1. 우선 마태는 <풍부한 수입>을 잃었습니다.

당시에 마태가 일하던 곳은 갈릴리 가버나움의 세관이었습니다.

가버나움은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가버나움은, 해안길과 왕의길이라는 큰 길이 만나는 곳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라끼리, 각 도시끼리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곳의 세관이라면 상당히 많은 물량들이 거래되고 있었을 텐데,

당시의 자료를 보면 과세를 해야 될 종류가 무척 많았고,

어떤 항목은 보기에도 이상한 항목이 있었습니다.

 

사람 하나 하나마다 인두세가 있었고,

거래 품목마다 일일이 관세가 매겨져 있었습니다.

만약 마차가 지나간다고 하면, 그 마차가 지나가는 데 대한 통행세와

마차 자체의 세에다가, 마차 바퀴마다 세금이 매기기도 했었습니다.

 

고대사회 당시엔 신문이나 무슨 과세 표준이 있는 것도 아니고해서

사람들은 자기가 내야 될 세금이 얼만지에 대해서 알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힘없는 평민들은, 세리들이 매기는대로 세금을 물어야만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로마는 정복지의 세금까지 자기들이 직접 걷지는 않았습니다.

로마는 한 나라를 정복하게 되면, 세금걷는 권리를 그 나라 사람들에게 경매에 붙여서,

로마정부에 가장 많이 내겠다고 한 사람에게 징수권을 팔았습니다.

 

그래서 그 세금걷는 사람은, 로마정부에 약속한 금액만 물면 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세리들이 로마에 계약한 것 보다 항상 더 많이 거둬들이는 겁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착복을 하는 겁니다.

또 아주 부자들에겐 세금을 적게 매기는 대신, 그 댓가로 거액을 받아 챙겼습니다.

 

그리고 만약 서민들이 조세 저항을 하거나, 납부를 불복하면

그때는 로마 군병들이 동원되는 거죠.

그래서 체포나 감금은 물론이요, 심한 경우 노예로 팔아버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여기에 대해 로마 정부는 일체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제국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세금만 걷으면 되니까요.

 

그러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 그렇지는 않겠습니다만 세리는 금방 부자가 되겠지요.

백성들이야 어떻게 되든 세리들은 배부른 겁니다.

 

마태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언제나 풍부한 수입이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방법은 아주 나쁘지만, 처음부터 그런 욕먹을 것을 각오했겠지요.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은 너무나 가난했습니다.

한 사람의 장정이 하루 종일 일해봐야 한 데나리온 정도 받을 수 있는데

한 데나리온이면 세 식구가 겨우 입에 풀칠할 수 있는 정도였습니다.

 

*예수님 당시 은 1데나리온은 3.85g, 오늘날 시세로 12,000원 입니다.

미국에 페니란 가장 작은 동전이 2.5그램이죠.

그것보다 조금 큰 -아주 조그만- 은전 하나를 하루 임금으로 받는 겁니다.

 

그런데 자료를 보면 예수님 당시의 한 가정의 식구 수는 5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죽어라 일해도 가족 중에 두 명은 항상 굶고 있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래서 이 돈에 대한 유혹은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태가 아니더라도 그 당시의 모든 사람들이

세리의 권리를 따낼 수만 있으면 따내려고 했을 겁니다.

배고픈 것보다는, 욕 먹는게 낫기 때문이지요.

 

아마 지금 우리는, 이 일이 우리 일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그 정도는 잃을 각오를 해야지'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세리가 아니기 때문에, 오는 안도감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얘기가, 단순히 예수의 제자가 되려는 한 세관원의 얘기일까요?

지금도 기독실업인의 많은 숫자가 탈세를 지속적으로 하기 위해

회계사나 변호사를 고용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도 부당이득을 챙기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의 참 제자가 되기 위해서,

그 부정수입을 다 버리라고 해 보세요. 그 사람들이 과연 그 얘기를 들을까요?

 

더욱이 믿지 않는 사람에게 크리스챤이 되는 조건으로,

이런 부당한 수입들을 포기하라고 하면... 그들이 포기하고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일까요?

있기는 있겠죠. 그러나 극소수일 것입니다. (마태는 대단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눈앞의 조그마한 물질의 손해에도 잘 참지 못합니다.

부모형제간이라도 돈이 걸리면 거기에는 양보가 없는 것을 봅니다.

수입을 잃는다는 것은, 때로는 목숨을 잃어버리는 부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새 마음을 먹어서 생활 중의 부당한 이득을 누리지 않겠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고, 또 용기를 내서 실천한다해도 그 액수는 아주 미미할 겁니다.

그런데 마태는 그 풍부한 수입전체를 잃은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쉽지않은 결단이었습니다.

 

▲2. 다음으로 마태는 <안정된 직장>을 잃었습니다.

사람에게 있는 욕구 중에서 가장 큰 욕구중의 하나가 뭐냐하면 안전과 안정입니다.

누구라도 이 육체의 안전과 마음의 안정을 위해 많은 것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에게 안정된 직장이 있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든든한 일인지 모릅니다.

 

결혼 적령기에 있는 여성들이 남자를 만나면 제일 먼저 보는 것이,

남자의 직업이나 직장입니다.

물론 그 사람의 인품을 처음으로 본다고 하지만, 사실은 제일의 관심사는 직장입니다.

 

그래서 직장이 괜찮다고 하면, 나머지는 좀 모자라도 가려지는 것입니다.

사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괜찮은 직업이나 안정된 직장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세관은 얼마나 튼튼한 직장입니까?

지금도 세관에서 근무한다고 하면 아주 괜찮게 봅니다.

 

한 15년 전 쯤에 세관에 다니던 선배를 알았는데,

세관에 들어간 지 몇 년 되지도 않았는데 집을 사더라구요.

아마 결혼할 때, 처가 많은 재산을 모아갖고 왔나 봅니다.

그래서 세관원들은, 요즘도 이렇게 의심을 받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세관이나 또 다른 자리라도,

좀 좋은 자리가 났다고 하면 온갖 방법을 써서 들어가려고 합니다.

그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저는 결혼을 하고 8년 후에 신학교를 들어갔는데,

그 전까지 8년동안 저도 안정된 직장을 찾으려고 무척 애를 썼습니다.

 

친구들이 좋은 사무실, 좋은 책상에 앉아 근무하는 것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죠.

그도 그럴 것이 8년 동안 저는 끊임없이 영업직에서만 일했습니다.

그것도 실적이 있어야만 월급을 타는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달은 200만원을 타다가, 어떤 달은 50만원을 타는,

매월 월급이 변화무쌍한 그런 직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소망이 "아! 한 50만원만 줘도 안정된 직장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랬습니다.

 

물론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영업직에서의 다양한 경험이 목회에 많이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

당시로서는 정말 안정된 직장이 저의 유일한 소망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 한 번 안정된 직장을 얻으면, 거기 계속있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다 하죠.

어떻게 해서 얻은 자린데 어떻게 그 직장을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마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서 그 좋은 직장을 잃었습니다.

 

언제나 넉넉한 수입이 보장되고, 생활에 안정까지 가져다 주는 그 직장을 잃었던 것입니다.

마태가 잃은 것은 그 뿐 만이 아닙니다.

 

▲3. 마태는 남이 넘볼 수 없는 <사회적 지위>를 잃었습니다.

고대 사회는 어디나 그랬지만 특히 당시 이스라엘은

땅이 척박해서 유난히 살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디를 가도 도둑이나 강도들이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말씀을 하시면서 여리고 길의 강도만난 사람을

예로 드신 것은, 실제로 그 지역에 그렇게 강도가 많이 출몰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항상 신변의 위협을 느끼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누구입니까?

로마 행정부의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로마 사람들은 자기들이 일을 해 주는 사람에 한해서는, 철저하게 보호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낮에나 밤에나 로마 병사들의 경호를 받았을 겁니다.

 

아무도 그를 해치지 못합니다. 일반 백성들은 그를 감히 넘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서 마태는 그런 사회적 지위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하시면서, 여러 번 죽음의 위협을 느끼셔야 했습니다.

그때마다 제자들도 똑같이 신변의 위협을 느꼈을 겁니다.

마태가 세관에 앉아 있으면 당하지 않을 일이었습니다.

 

최근 어떤 선교잡지에, 제가 러시아 연해주의 우스리스크에 가서 뵈었던 한 선교사님이

현지인 강도에게 칼에 찔려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읽었습니다. 2000.08.30. 김창식 선교사

그 집에 가서 식사도 했었는데, 참 안타까왔습니다.

 

아직도 러시아나 중앙아시아 지역은 우리 선교사님들을 노리는 강도들이 있답니다.

선교의 가장 큰 장애가 돈이나 언어가 아니라 '신변의 안전'이라고 합니다.

그분들을 지켜줄 경호원들이 밤낮으로 선교사님들을 지키고 서 있다면 얼마나 든든할까요?

마태는 그런 안전의 고리를 스스로 끊어 버렸던 겁니다.

 

▲정리하면, 그러므로 한 사람이, 풍부한 수입과, 안정된 직장과, 사회적 지위를 잃었다

고 하면 그는 모든 것을 다 잃은 것입니다.

 

그 동안 마태가 자기 동족으로부터 매국노, 흡혈귀, 배신자라고 불려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여러 가지 메리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서 그 동안 누렸던 모든 것을 다 잃게 되었습니다.

예수의 제자는 일정한 거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계속 여행을 해야 합니다.

 

당시의 여행이란 100%도보여행이었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비정상적인 사람들만 만나야 했습니다.

죄인과 여자와 병자와 미친 사람들과 만나야 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기약이 없는 나날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마태가 이렇게 잃기만 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2. 마태는 다 잃은 후에 <새로이 얻은 게> 있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 잃어버릴 그 무엇을 걱정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따르기 위해 버린 사람을 절대로 그냥 두시지 않습니다.

오늘 마태가 얻은 것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올 것입니다.

 

▲1. 무엇보다도 마태는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갈등을 끝까지 추적하다보면

막다른 골목에서 둘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 때문에 인생은 불행하게 되는 겁니다.

하나는 죄의 문제요, 다른 하나는 죽음의 문제입니다.

 

죄책감과 죽음에 대한 공포, 이것이 우리가 철학으로든, 예술로든, 관계로든

그 무엇으로든 풀어야 될 인간의 숙제입니다.

이것에서 해방되지 않는 한 사람은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해결된다면, 삶은 더할 나위없이 풍요롭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가 세관에 앉아 있었을 때는 언제나 양심에 찔려 있었습니다.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언제나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을 겁니다.

 

누가복음19장엔 이런 마태와 거의 똑같은 갈등을 겪고 있는 또 한 사람의 세리가 나오는데

여러분이 잘 아시는 난쟁이 삭개오입니다. 예수님이 지기 동네를 지나가신다니까

키가 작았던 삭개오는 뽕나무 위로 올라가서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봤습니다.

 

그가 바랬던 건, 예수님을 초청해서 자기 집에서 식사를 하려고 했던 게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또 하나의 제자가 되려고 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인생본질의 문제에 부딪쳐 있었습니다. '잘 먹고 잘 살지만 이게 인생의 다일까?

정말 못먹고 못살더라도 마음의 평안을 찾을 길은 없을까?'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 한 구석에 꼭꼭 감추어 두신 문제가 이제 튀어나온 겁니다.

영혼의 갈증을 겪고 있었던 겁니다.

그 '영혼의 갈증'은 하나님만이 채우실 수 있는 하나님 고유의 영역입니다.

 

△아직 어린 청년들에게는 이 얘기가 너무 어려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기억해 두세요.

여러분 모두한테 언젠가는 인생의 어느 길목에서

이런 자기 내면의 깊은 곳에서 타는 목마름이 올 겁니다.

그것은 돈으로도, 명예로도, 음악으로도 치유가 안될 겁니다.

오직 우리 주님으로만 치유될 것입니다.

 

그것이 기억나면 여러분은 서두르십시오.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이것이 삭게오와 마태가 세관에 앉아 있으면서 공통적으로 갈급해 했던 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마태는 그의 책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30번 이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이 28장으로 인데, 한 장에 한번 꼴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마태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단지 죽어서 가는 하늘나라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고,

또 장차 임하실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현재와 미래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안에서는, 모든 사람들 손에 닿을 수 있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왔고 또한 오실 하나님 나라의 겹쳐지는 부분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태는, 우리는, 초막이나 궁궐이나 그 어디나 하늘나라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마태의 영원한 생명입니다.

 

마태는 그것을 얻었습니다.

마태는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 이전까지 그의 삶은 우울한 인생이었고 회색빛의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뒤의 그의 삶은,

매일매일 놀라운 모험으로 가득 찬 인생이었습니다. 그는 신세계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마음의 평화를 얻었습니다. 안정을 얻었습니다.

그 동안의 삶은 억지로 끌려가는 삶이었습니다. 때로는 견딜 수 없이 지루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삶은 지루할 틈없이 날마다 새롭고,
예수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 삶이 된 것입니다.

마태가 얻은 새 인생에 권태란 없어졌습니다. 날마다 신비한 날들로 가득 채워 진 겁니다.

 

▲2. 마태가 또 얻은 것은 <붓>이엇습니다.

그는 세관의 자기 자리는 잃었지만, 대신 붓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 붓으로, 인류가 끝나기까지 영원히 읽힐 성경, 이 마태복음을 썼습니다.

 

성서학자들이 말하기를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체로 써진 성경이 66권 중 뭐냐?

구약에서는 시편이요, 신약에서는 마태복음이라는 겁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성서학자들이 말합니다.

표현이 좀 이상하지만 성경 66권을 꽊 쥐어짜면 마지막으로 남는 게 뭘까?

바로 마태복음5장에서7장까지, 산상설교만 남는다는 겁니다.

그것이 성경전체의 요약이라는 겁니다.

 

여러분께서도 그 마태복음을 읽어보세요. 특히 산상설교를 읽어보세요.

그 교훈과 언어가 너무 아름다워서 소화를 잘 못할 정도입니다.

 

제가 30대 중반의 어느 한 때, 내 나머지 인생을 '문학'에 승부를 걸어보겠다고 작심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학교에서 제 전공은 아니었지만,

시인 황지우 선생과 소설가 임철우 선생에게 각각 시와 소설을 한 강좌씩 들은 적이 있었죠.

 

제가 나이가 많은 학생이었기 때문에 그분들과 친해졌습니다.

한 번은 같이 두 분과 차를 마시면서, 제가 두 분께 각각 물어봤습니다.

 

먼저 황지우 시인께 "선생님 제가 한 번 시인이 되 보려고 하는데 가능성이 있겠습니까?"

그랬더니 그 선생님 말씀이 딱 한 마디였습니다. "아서라"

 

그래서 이번에는 임철우 작가께 물어봤습니다. "제가 소설가로 나서면 어떨까요?"

그랬더니 그 분은 점잖으신 분이었는데 그렇게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최영식씨, 신춘문예 원고보낼 등기우편값이라도 좀 아끼시지요!"

 

그래서 관두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정말 판단 잘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정말 직업적으로 글을 써볼까 하는 마음을 애저녁에 포기하게 된 진짜 이유는

이 마태복음에 있었습니다.

 

마태복음을 말씀으로 읽지 않고, 그저 문학적 관점에서만 봐도

마태복음은 글 쓰는 사람들의 의욕을 끊어버리게 할 만큼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한 생각이 뭐냐하면

"이 정도로 못 쓸 바에야 시작을 말자" 그렇게 된 겁니다.

 

저는 지금 문학적 관점에서만 말씀드렸지만,

실제 산상설교를 읽어보면, 거기엔 놀라운 말씀의 능력이 나옵니다.

저는 한 때 이 산상수훈 전체를 외운 적이 있었는데,

그것을 암송할 때면 얼마나 놀라운 평안함과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암송)

 

여러분께서도 산상수훈을 암송해 보십시오.

어느 때든 엄청난 힘과 평안으로 여러분을 가득 채울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거의 어부였습니다. 읽고 쓰는 일에 익숙하질 못했습니다.

그런데 세관에서 일했던 마태는 외국어와 각종 방언을 잘 구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의 전직을 하나님의 도구로 완벽하게 승화시켰습니다.

 

그는 자기 생애에 단 한 권의 책을 남겼지만, 그 책은 영원한 책이 되었고,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첫 번째 책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세리였던 마태를 제자로 삼으셨던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받았던 한 사람을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가 사람을 쓴다고 할 때

과거의 좋지 않은 경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쓸 수 있을까요?

그것은 위험부담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 속에 있는 가능성을 보시는 분입니다.

약간의 가능성만 보여도, 단 한 가지의 가능성만 있어도 무시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어부들을 제자로 삼으시더니,

유대사회에서는 강도나 창녀와 동급으로 취급받던 세리를 제자로 들어 쓰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흠이 있고, 죄가 많더라도 쓰시는 것입니다.

죄인이고 허물이 많기 때문에 더 예수님이 필요한 걸 아시는 분입니다.

 

오늘 본문 끝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자에겐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마9:12

 

우리가 아무리 죄를 많이 짓고, 보잘 것 없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주님께 나와야 할 근거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3. 그는 <예수님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오늘 9절 말씀 중에"마태라는 사람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9: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예수님은 마태를 사람으로 보셨습니다.

물론 이 부분도 마태 본인이 쓴 것이지만, 이것은 예수님의 시선이 틀림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마태를 죄인, 세리, 매국노, 흡혈귀, 배신자로 봤을지 몰라도

예수님만큼은 마태를 사람으로 보셨다는 겁니다.

'마태라는 사람이' a man, named Matthew

 

예수님의 그 따뜻한 시선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에 우리는 다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절대로 죄인취급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뿐입니까?우리를 형제로, 자녀로, 나아가서는 "이제 너희는 나의 친구라" 요15:14~15

그렇게 봐 주십니다.

마태가 이런 예수님의 은혜를 입은 후에 어떻게 살았으리라는 것은 짐작이 가실 겁니다.

 

그는 겸손한 사람이 됐습니다.

자기 책에 자기 얘기를 쓰면서도 절대로 자기를 미화시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의 이름을 열거할 때 다른 제자는 다 이름만 써 놨지만

자신의 이름은 앞에 전직을 붙여서 '세리 마태'라고 썼습니다.

 

자기의 부끄러움을 감추지 않고 그것을 영원한 교훈으로 가슴속에 남겨 둔 것입니다.

그의 이름 마태는 "하나님의 선물"이란 뜻입니다.

 

마태는 오늘 두 방면에서 선물이 되었습니다.

후에 그는 에디오피아로 선교를 떠나서 거기서 복음을 전하다가

목베임을 당해 순교를 함으로서 하나님께 순교의 선물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있은 후 2000년 후 지금, 우리는 그가 쓴 마태복음을 손에 들고 있습니다.

그게 그가 인류, 사람을 향해 남겨 준 영원한 선물이 되었습니다.

 

12명의 제자들 가운데 마태가 제일 많은 것을 포기했습니다.

마태는 문자 그대로 예수를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 다시 어선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언제든지 고기를 잡을 수 있었고, 옛날 직업으로 돌아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단 한 번의 행동으로, 순간적인, 눈 깜짝할 사이의 결심으로

그는 그의 직업을 영원히 버렸습니다.

세리는 한 번 그 직업을 떠난 다음에는 다시 그 직업에 돌아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치는 말

여러분! 모든 사람의 생애에 있어서 언젠가 한 번은 결정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어쩌면 자기가 가진 것을 다 버려야 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게 잃은 것은, 사실은 잃은 것이 아닙니다.

그 모두를 다 잃고 얻어지는 것은, 잃은 것에 비해서 비교할 수 없을만큼 가치있고,

영원하고, 큰 분량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생활 하시면서 무엇을 잃으셨습니까?

풍부한 수입을 잃으셨습니까?

안정된 직장을 잃으셨나요?

혹시 높은 사회적 지위를 잃으신 분이 계십니까?

저는 뒤늦게 선교사가 됐으면서도 잃은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잃은 것이 있어도 그것은 다 필요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께 죄송했습니다.

저는 재능도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기도하는 일 외에 기를 쓰고 하려는 일이 몸으로 때우는 일입니다.

그게 제일 쉽잖아요.

 

우리가 잃는다고 하는 것은 지금말씀처럼 거창하게 생각하기 쉬운데,

그것은 우리의 생활 속에서 작은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위해 바치는 시간, 예수를 위해 손실되는 물질, 형제을 돕기 위해 쏟는 수고,

우리 주님은 사실 이런 것들부터 시작하시기 원하시는 겁니다.

 

무조건 직장을 버리라고 하겠습니까?수입을 버리라고 하겠습니까?

왜 쓸 데없이 잘 하고 있는 음악을 버리라고 하겠습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 의외로 버려야 될 것은 아주 작은 부분부터일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마태에게 주신 것처럼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지상에서나 천상에서나 똑같이 누릴 최대의 선물인 것입니다.

죽음은 이미 우리를 비켜갔습니다. 죄는 우리 뒤편 저 멀리로 사라졌습니다.

 

저나 여러분에게도, 예수님은 마태에게 주신 붓을 한 자루씩 주셨습니다.

그 붓은.. 음악이거나, 사업이거나, 아직도 발견되지 않는 재능 talent 입니다.

우리도 마태처럼 우리의 붓을 하나님의 도구로 승화시킵시다.

우리의 가진 것들을 다 버리고 얻은 이 선물들을 가치있게 쓰십시다.

 

우리가 다 잃은 후에 얻은 것은 영원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누리면서, 또 나누어주면서 살 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나간 자리는 아름다운 흔적으로 오롯이 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예수를 따르면서 얻어지는 빛나는 훈장이 될 것입니다.

잃으면서 얻으시는 여러분의 생애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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