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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여사 Rosetta Sherwood Hall

LNCK 2005. 12. 16. 19:40
로제타 셔우드 홀 여사                 출처         

      1865~1951    

      1890~1935   한국 사역 기간 45년

 

“하나님, 한국에서 남은 아들과 (빨리 죽지 않고) 오래 사역할 수 있게 해 주세요!”

 

한국에서 남편과 딸을 잃었지만, 끝까지 한국에 남아서

남편의 뜻을 이어 받아 의료선교에 평생을 바쳤던 순교자의 아내.

한국에서 낳은 아들까지 의사로 키워서, 한국의 결핵퇴치 사업에 대대로 헌신했다.

 

 




<홀 여사 가족 사진, 윗쪽은 남편 윌리엄 홀 >

 

 

 

로제타 홀여사는 한국에 남편 보다 1년 먼저 와(1890),

43년간을 한국을 위해 봉사하였으며

우리나라에 여러 '최초'를 기록해 놓은 인물이다.

 

평양에 최초의 병원 설립, 맹인 농아학교 설립, 점자도입과 한글용 점자개발,

어린이 병동설립, 여자의학교 설립(현재 고려대 의대의 전신),

동대문병원(현 이대부속병원), 인천 기독교병원, 인천간호보건대학 등 설립, 또는 시작하였다.

 

또 한국의 최초여의사(서양의학), 김점동(에스더 K.박)을 키웠고,

한국여성의 인권을 위해서도 일하였다.

그녀는 미국에서 가장 뛰어난 미국여성 200인중 한사람으로 인정을 받았다.

 

 

로제타 선교사는 한국에 여자 의사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정보를 듣고,

조선에 선교사로 가기 위하여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에서 병원실습을 하고 있었다.

 

그때, 같은 병원에서 근무하는 윌리암 선교사를 만나게 되었고,

윌리암 선교사는 로제타의 성품과 성실성에 반해,

한평생 함께 사역하기를 원하여 프로포즈를 했다.

 

그러나 로제타는 그 프로포즈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윌리암은 이미 중국 선교사로 가기로 내정되어있었기 때문이었다.

 

로제타윌리암 홀을 좋아하고 있었지만,

조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조선에 오기 위하여 윌리암의 프로포즈를 거절하고

1890년, 한국에 처녀의 몸으로 혼자 들어온다.

 

윌리암로제타가 조선을 향해 떠난 후,

결국 선교부에 찾아가 선교지 변경을 요청했고,

우여곡절 끝에 결국 윌리암은 조선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1891년 12월 한국 땅에 오게 된다.

 

그들은 1892년 6월 21일 서울에서 결혼을 하게 되는데,

이 결혼식이 한국 최초의 서양식 결혼식이 되었다.

로제타는 윌리엄 홀과 결혼함으로, 그때로부터 홀 부인으로 칭함 받게 된다.

 

윌리엄 홀 선교사는 평양선교를 위해 책임자로 임명되어 평양선교를 시작했다.

첫 아들 셔우드 홀이 태어나는 그 다음해 메켄지 목사와 함께 평양으로 들어갔다.

 

그 해 7월에 일어난 청일전쟁(1894~1895)으로 평양은 전쟁터가 되었고,

월리엄 홀은 그곳에서 수많은 사람을 치료하다가 도리어 자신이 병에 감염되었다.

 

1894년, 병든 몸을 이끌고 겨우 평양에서 서울에 도착한 윌리엄 홀 선교사는,

부인 로제타와 아들 셔우드 홀의 손을 붙잡고,

마지막 기도와 유언을 하고 끝내 숨을 거두게 된다. 이국땅에서 순교한 것이다. 

 

한국에 온지 2년 만에, 그는 한국 땅(지금의 양화진)에 묻히게 되었다.

 

미국에 있던 닥터 윌리엄 홀 선교사의 시댁 가족들은,

순교자의 아들 셔우드 홀과 며느리 로제타를 애타게 보기 원해서

그들의 미국 귀국을 종용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래서 로제타는 어린 아들 셔우드를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거기서 남편 제임스 홀의 모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다.

 

남편 제임스 홀의 모습을 닮은 아들 셔우드를 본 교우들은 눈물로 그들을 반겼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로제타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사랑하는 딸아 네 남편 윌리암 홀이 이루지 못한 조선 사랑을 네가 이루어라"

 

그래서 1897년, 로제타아들(미국서 출산)을 데리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다.

 

조선에 오자 몇 해 후에, 이 또 한국의 풍토병을 이기지 못하고 죽게 된다.

 

로제타을 남편의 묘 옆에 묻으면서 다시 한번 결심을 하게 된다.

 

"하나님, 남은 내 아들 셔우드와 한국에서 오랫동안 사역을 할 수 있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

 

결국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셨고, 그들은 한국에서 그 후 오랫동안 사역했다.

 

이렇게 1897년 남편의 의료선교사역을 완성하기 위하여 다시 한국에 온 로제타 홀

맹인교육(한국 최초로 점자교육을 실시), 병원사업등을 활발히 펼치다가

후에, 43년간의 한국 선교사역을 마감하고 1935년 귀국하였다.

 

그 후 로제타 홀은 1951년 미국 뉴저지에서 소천했다.

그녀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화장하여, 그 재를 서울의 남편과 딸 곁에 묻었다.

아들 셔우드 홀도 자기가 죽으면 서울의 가족과 함께 묻어달라고 벌써부터 유언했다.

 

★셔우드 홀(홀 여사의 아들)은 189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국에서 성장하였고 미국에 건너가서 터론토 의과대학을 졸업하였다.

재학 중 의사가 된 메리안(Marian Bottomly)과 결혼하여

1926년 부부가 함께 내한 해주구세주병원 원장으로 부임한 후

1940년 일제가 간첩의 누명을 씌우고 강제 추방할 때까지 의료사업을 계속했다.

 

한국에 있을 수 없게 되자 그들은 인도로 가서 역시 결핵퇴치 의료선교에 힘쓰다가

1963년 은퇴하여 카나다 리치몬드에서 부부가 함께 살고 있다고 한다.

1984년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국민복지향상에 이바지한 바가 인정되어

모란장 훈장(520호)을 받았다. 

 

셔우드 홀은, 어머니 로제타 홀과, 아버지 윌리엄 홀의 사역을 자세히 그린

<닥터 홀의 조선 회상>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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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 여사는 한국 최초의 여의사 박 에스더도 키워냈다

그리고 간호대를 설립하고 여성간호사 양성에도 힘썼다.

 

당시 조선 부인들은 남자 의사에게 진찰을 거부했기 때문에 여의사가 필요했다.

그래서 메타 하워드 여자 의료 선교사가 한국에 오게 되고

한국 최초 부인병원인 보구여관(Caring for and Saving Woman's Hospital)은

메타 하워드 의사에 의해 1887.10.20. 정동 이화학당 구내에 세워졌으나

그녀는 2년 만인 1889년, 건강상 이유로 미국으로 귀국한다.

 

후임으로 1890년 10월 로제타 셔우드(Miss. Rosetta Sherwood, M.D.)가 부임한다.

그녀는 오자마자 "여성을 위한 의료사업은 여성의 힘으로"라는 표어를 내어걸고

의료사업과 함께 여성들을 모아놓고 의료강습을 시작하였다.

 

홀 부인은 한국인 조력자 박 에스더(박점동)와 함께 평양 일대에서

진료소를 차리고 의료 선교활동에 주력했다.  

 

이 후, 남은 홀 부인은 자녀와 조력자였던 박 에스더를 데리고 미국에 돌아간다.

거기서  박 에스더는 1900년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에서 한국인 최초로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의사가 된다.

 

1897년, 홀 부인은 남편의 순교지인 한국에 돌아와서 다시 의료선교를 재개했다.

후에 미국에서 의사가 된 박 에스더도 한국으로 돌아왔고

이들은 또 다시 평양에서 힘을 합치게 된다.

과거에 박 에스더는 미숙한 조수였지만 이제는 어엿한 동역자였다.

그래서 이들은 광혜여원의 건물을 신축해서 한국 최초의 간호원 양성소를 열었다.

 

그의 이러한 수고가 인정이 되어,1908년 4월 28일에는 신사숙녀 7,800여명이

모인 자리에서 고종황제로부터 치하를 받기도 하였다.

 

박 에스더는 1910년 폐침윤에 걸려 34세를 일기로 영원히 잠들고 말았다.

가장 가깝게 가족처럼 지냈던 홀부인의 가족은 더욱 슬펐다.

 

이로 인해서 닥터 홀의 아들인 셔우드는 (당시 16세) 장차 결핵 전문의가 되어

한국에서 꼭 결핵요양소를 설립하여야겠다는 결심을 갖게 되었고,

1928년, 그의 결심대로 해주에 최초의 요양소 및 결핵전문 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1932년에는 최초로 결핵퇴치를 위해 "크리스마스 실"을 도입하였다.

 

 *홀여사의 사역과 사진은 -클릭-

 

 

 

◑「닥터 홀의 조선회상」

 

한국선교는 부활절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1885년 부활절 아침

언더우드, 아펜젤러 선교사 두 분이 제물포에 첫 발을 딛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언더우드, 아펜젤러 선교사뿐만 아니라 양화진 선교사 묘지에 가보면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선교사님들의 묘도 많이 있습니다.

 

이곳에는 약 450명의 유해가 있는데, 대부분 이 땅에 복음을 전하다 죽은

선교사님들의 묘지다. 그 가운데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중에 우리나라에 와서 복음을 전한 윌리엄 홀(William James Hall)과

그의 부인 로제타 홀(1865-1951) 선교사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사실 저는 오늘 설교에서 이 분들의 삶을 소개하는 것은

이들이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부유하고 여유 있는 삶을 마다하고

당시 미개하고 풍토병이 심했으며 기독교의 박해가 심하였던 조선,

당시 미국에서 조선으로 오려면 한 달 이상 배를 타고 와야 했고

생명을 잃을지도 모르는 당시의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상황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헌신했던

그들의 삶의 동기가 무엇인지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무엇 때문에 당시 미개했고 문명에서 멀리 떨어진 조선까지 와서

복음을 전하였을까요?

로제타(Rosetta)는 뉴욕의 리버티에서 태어나

그곳에 있는 대학을 졸업하고

당시 초등학교와 고등학교의 교사로 일하다가

교회에서 <케네스 챈들스>란 부인이 인도를 여행하고 난 뒤에

인도여성에게 복음전도자와 의사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가슴이 불타올라 의사가 되어 의료선교사가 되리라 결심합니다.

 

그래서 필라델피아에 있는 의과대학에 입학하며 공부하였고

공부하는 동안 뉴욕에 있는 중국 여성들의 무지를 알게 되었고,

당시 세계에서 중국보다 훨씬 더 무지하고 복음을 알지 못하고 있는 민족,

조선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녀는 1889년 3월에 그 대학을 졸업하고, 조선 선교의 꿈을 갖고

뉴욕의 한 병원에서 소아과 인턴으로서 임상실습을 하던 중에 거기서

그의 남편이 될 윌리엄 홀 박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윌리엄 홀 역시 교사로 제직 중 그는 “다시 주어진 인생을 값지게 살겠다”

라고 결심을 하고, 2년 후에 캐나다 온타리오 주 킹스턴에 있는 퀸즈대학교

의과대학에 들어가, 국제의료선교회 조지 도우넛 박사를 만나

의료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1889년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의 메디슨 가의 선교진료소에서

진료를 하다가, 이곳에서 소아과 인턴과정을 하던 로제타를 만났습니다.

이들은 처녀 총각으로 한국에 들어와 한국에서 1892년 6월 27일에

한국 최초의 서양식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남편 윌리엄 홀의 순교

남편 윌리엄 홀은 평양에서 치료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1894년 8월1일 청일전쟁으로 평양은 청일 양군의 격전지가 되었습니다.

이때 신변을 걱정하여 감리교 선교부 서울본부에서 귀환하라고 하였지만

닥터 윌리엄 홀은, 의사로서 부상당한 군인들을 도저히 외면할 수 없다며

평양에 계속 머물며 혼신의 힘을 다하던 중에

결국 과로와 발진티푸스 감염으로 1894년 11월 24일

아내 로제타와 결혼 2년 5개월 만에 34세로 순직하여 양화진에 묻혔습니다.

 

당시의 일을 로제타 홀이 이렇게 회상한다; 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내게

말하려 한 것은, 그가 평양으로 간 것을 후회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그 일을 하였고, 하나님이 나에게 갚으실 것 이라는

말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때에 로제타 홀에게는 셔우드 홀이라는 두 살 된 아들과

그의 뱃속에는 7개월 된 아이가 또 있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복음 때문에 사랑하는 남편을 잃었습니다.

로제타는 어린 아들 셔우드를 대리고 임신 말기에 있었기 때문에

아이를 낳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귀여운 딸 에디스가 태어난 후,

남편 윌리엄 홀이 자라고 섬겼던

캐나다의 글렌 뷰엘의 작은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남편 제임스 홀의 모습을 닮은 아들 셔우드 홀과

딸 에디스를 본 모든 교우들은, 눈물로 그들을 반겼습니다.

그 교회는, 당시에 미개하여 복음을 듣지 못했던 한 작은 나라 조선

윌리엄 홀이라는 선교사님을 파송하고 기도하며 헌금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로제타 홀, 아들 셔우드, 딸 에이미

 

▲로제타 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다

거기서 큰 감동을 받은 로제타는 아들과 딸을 데리고 다시 조선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조선에 돌아오자 얼마 되지 않아 사랑하는 딸 에디스가

또 한국의 풍토병을 이기지 못하고 죽어 양화진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로제타는 그 딸을 남편 옆에 묻으면서 다시 한번 결심을 합니다;

하나님! 사랑하는 남은 내 아들 셔우드 홀과 한국에서 일찍 죽지 않고

오래 살아남아 평생 사역을 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닥터 로제타 홀은, 평양의 병원에서 근무하면서 여자환자를 위한 광혜여원을

개원했다. 그리고 어린이를 위한 병원을 개원하여 맹인소녀들에게 점자를

교육하면서 한국 최초의 맹인학교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김점동(또는 박 에스더)이라는 한국 여자 분을 미국에 유학시켜

한국 최초의 여의사로 교육시켰다. 지금 서울 동대문 옆 이화여대부속병원이

로제타가 세운 병원이며, 서울에 조선여자 의학전문학교를 설립하게 되는데

그 학교가 지금의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전신이 되었습니다.

 

또한 인천에 간호대학과 인천의 기독병원이 모두 로제타가 세운 병원입니다.

43년간의 한국 사역을 통해 하나님은 큰일을 이루셨습니다.

미국은 그의 사역을 인정하였고 로제타 선교사는 <미국이 뽑은 훌륭한 여성

2백인 중의 한사람>이 되었습니다. 85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면서 양화진 땅에

남편과 딸이 묻혀있는 곳에 함께 안장되었습니다.

 

▲아들 셔우드 홀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녀와 그녀의 남편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 셔우드 홀도 이 땅에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는 16세가 되면서 미국으로 건너가 의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의사인 부인 마리안과 결혼하여 다시 한국에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 셔우드 홀은 한국 최초로 결핵협회를 창설하였고

한국 최초의 크리스마스 씰을 만들어 판매하며 결핵환자들을 치료하였습니다.

이 셔우드 홀이 선교지에서 은퇴하여 캐나다에서 쉬고 있던 어느 날

한국에서 온 편지를 받았습니다.

결핵협회와 아버지가 세운 광성고등학교에서 보내 온 초청장이었습니다.

91세의 나이로 사랑하는 한국 땅을 밟은 셔우드 홀 부부의 감회는 남달랐습니다.

 

그 때가 1984년 선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해였는데,

그는 양화진에 묻혀있는 아버지와 어머니, 여동생의 묘를 방문하고

광성고등학교 예배시간에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유언을 남겼습니다;

 

저는 여전히 한국을 사랑합니다. 제가 죽거든 나를 절대로 미국이나 캐나다

땅에 묻지 마시고 내가 태어나서 자랐던 사랑하는 이 나라 또한 내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버지, 누이동생이 잠들어 있는 한국 땅에 묻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98세의 나이로(2002년도?) 숨을 거두었고 그의 부인 마리안과 함께

아버지인 윌리암 홀과 어머니인 로제타 홀, 동생 에디스와 함께

소원대로 양화진 땅에 묻혔습니다.

 

성도 여러분! 제가 왜 윌리엄 홀과 그의 부인 로제타 홀,

그의 아들 셔우드 홀, 그의 부인 마리안 홀, 그의 딸 에디스의 이야기를

소개하였을까요?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당시에 미개하고 풍토병이 많고

청일전쟁을 위시하여 갖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던 한국을 찾아 희생하고

봉사하는 삶을 살았는지를 <그 동기를>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이 육신의 안락과 편안함을 포기하고 조선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한 것은

바로 복음은 나를 구원한 대속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타인을 위함 섬김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