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카테고리 없음

암2장 유다에 대한 심판

LNCK 2006. 10. 17. 14:35

https://blog.naver.com/karamos/80049265570

 

◈유다에 대한 심판             암2:4-5            여러 설교 정리

 

암2:4~5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유다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하며

그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그의 조상들이 따라가던 거짓 것에 미혹되었음이라

내가 유다에 불을 보내리니 예루살렘의 궁궐들을 사르리라’

 

▲이 두 나라 사이에는 형제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전쟁이 계속되었습니다.

우리가 대표적으로 몇 구절만 찾아서 읽어보겠습니다.

 

왕상14:30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사이에 항상 전쟁이 있으니라’

 

왕상15:7 ‘아비얌과 여로보암 사이에도 전쟁이 있으니라’

 

왕상15:16∼21 ‘아사와 이스라엘 왕 바아사 사이에 일생 전쟁이 있으니라’

 

왕하14:13∼14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벧세메스에서 아하시야의 손자 요아스의 아들

유다 왕 아마샤를 사로잡고 예루살렘에 이르러 예루살렘 성벽을 에브라임 문에서부터

성 모퉁이 문까지 사백 규빗을 헐고 또 여호와의 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금은과 모든 기명을 취하고 또 사람을 볼모로 잡아가지고 사마리아로 돌아갔더라’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북방 이스라엘 왕국의 창건왕이었던 여로보암은

단(북쪽)과 벧엘(남쪽)에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두었습니다.

그리고 레위 지파의 자손이 아닌 사람을 제사장으로 세우고, 임의로 절기들을 정해서

지키도록 했습니다. ↓

 

왕상12:28∼33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하고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이 단까지 가서 그 하나에게 숭배함이더라.

 

저가 또 산당들을 짓고 레위 자손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

팔월 곧 그 달 십오일로 절기를 정하여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 하고

단에 올라가되 벧엘에서 그와 같이 행하여 그 만든 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렸으며

그 지은 산당의 제사장은 벧엘에서 세웠더라

저가 자기 마음대로 정한 달 곧 팔월 십오일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절기로 정하고

벧엘에 쌓은 단에 올라가서 분향하였더라’

 

또 북방 이스라엘 왕국은 가나안의 종교였던 바알 종교를 영입했습니다.

선지자 엘리야 때 갈멜 산에서 있었던 여호와 종교와 바알 종교 사이의

피비린내 나는 대결을 여러분은 잘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이런 등등의 이유로 유다와 이스라엘 사이는 점점 더 간격이 넓어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북방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다를 형제 국가라기 보다는

자기들과 적대 관계에 있는 나라라고 간주를 해왔습니다.

따라서 아모스가 유다에 대한 심판을 전했을 때

그의 메시지를 듣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상당히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을 것입니다.

(곧 자기들 북이스라엘의 심판에 대한 메시지가 이어질 줄 모르고 말이죠)

 

▲그러면 남방 유다 왕국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유다의 특별한 죄가 무엇이었습니까?

 

2:4 ‘이는 저희가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하며 그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그 열조의 따라가던 거짓 것에 미혹하였음이라.’

 

유다 백성들이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했다고 했습니다.

다른 이방 나라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의문儀文에 기록된 율법이 아니라

마음에 새겨진 율법, 곧 인간의 상식이나 양심에 의해서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될 비인도적이고 잔인한 행동을 저질렀기 때문에

저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다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삶의 지침서인 율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여호와께서 주신 율법을 멸시해 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저들로 하여금 주변에 있는 이방국가들의 바르지 못하고 잘못된 관습들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지시해주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의 방식대로 살라고

그 기준으로서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 백성들은 율법이 정해놓은 그 기준대로 살지 못하고,

율법이 없는 이웃 이방 나라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결국은 하나님의 율법을 멸시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율법의 대강령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셨지요?

그것은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옆으로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을 순종치 아니하고

이방 나라와 조금도 다를 바 없이 행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열조의 따라가던 거짓 것에 미혹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2:4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 나오는 ‘거짓 것’을 우상으로 번역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거짓 것, 거짓된 가르침으로 보는 것이

오히려 문맥에 더 적합하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서 유다의 지도자들이 그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잘못된 교훈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2:4절에 ‘지도자’라는 말이 나오지 않지만,

행간에 ‘백성의 지도자’들이 숨겨져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아모스가 의도하고 있는 바는, 앞에 나오는 모압의 재판장이라든지 방백들이나,

유다의 왕과 방백들이나 하나도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을 잘 인도해서 이웃을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도와가면서 살도록 교도를 해야 할텐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사3:12∼15 말씀을 찾아서 읽어보겠습니다.

 

사3:12∼15 ‘내 백성을 학대하는 자는 아이요 관할하는 자는 부녀라

나의 백성이여 너의 인도자가 너를 유혹하여 너의 다닐 길을 훼파하느니라

여호와께서 변론하러 일어나시며 백성들을 심판하려고 서시도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장로들과 방백들을 국문하시되 포도원을 삼킨 자는 너희며

가난한 자에게서 탈취한 물건은 너희 집에 있도다

어찌하여 너희가 내 백성을 짓밟으며 가난한 자의 얼굴에 맷돌질하느뇨

주 만군의 여호와 내가 말하였느니라 하시리로다’

 

암1:1절에, 아모스가 예언하던 시기가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라고 했습니다.

이사야는 웃시야 시대에 남유다에서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사1:1

그러니 위 이사야의 예언은, 본문 암2:4~5절의 시기와 일치하는 것입니다.

 

여기 이사야서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유다 백성들의 잘못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지 못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학대하고 짓밟은 죄,

이른바 사회적인 불의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와 같은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유다를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위 사3:12 ‘내 백성을 학대하는 자는 아이요 관할하는 자는 부녀라’

하나님의 백성을 이끄는 인도자가 “아이와 부녀”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무능하고 무자격한 지도자에 의한 재앙'을 반복해서 지적합니다. 사3:4

'아이와 부녀'는 무능하고 나약한 지도자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들이 지도자의 자리에 앉아서 행한 일이 무엇입니까?

백성을 학대하고 유혹하고 파괴하는 짓을 서슴없이 행하였습니다. ☞사3장 해설

그래서 상류층이 집결된 '유다의 궁궐들을 불사르겠다'는 것입니다.

 

본문 암2장으로 돌아가서 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내가 유다에 불을 보내리니 예루살렘의 궁궐들을 사르리라."

 

유다의 경우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내용이, 다른 이방 나라들과 똑같습니다.

‘유다의 궁궐들을 사르리라’

1:4 ‘(다메섹의) 벤하닷의 궁궐들을 사르리라’

1:7 ‘(블레셋의) 가사 성에 불을 보내리니 그 궁궐들을 사르리라’

1:10 ‘두로 성에 불을 보내리니 그 궁궐들을 사르리라’

1:12 ‘(에돔의) 보스라의 궁궐들을 사르리라’

1:14 ‘내가 (암몬의) 랍바 성에 불을 놓아 그 궁궐들을 사르되’

2:2 ‘내가 (모압의) 랍바 성에 불을 놓아 그 궁궐들을 사르되’

 

백성을 미혹하는 유다의 지도자들이 살고 있는 궁궐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해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적용1

여러분! 오늘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깨달아야 할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남유다가, 다메섹, 블레셋, 두로, 에돔, 암몬, 모압과 똑같이 심판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남유다도 이방과 똑같이 ‘궁궐이 불 살라지는’ 예언을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율법을 지키지 않아서 였습니다.

2:4 ‘이는 그들이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하며 그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그의 조상들이 따라가던 거짓 것에 미혹되었음이라’

 

오늘날에 이런 이상하고 잘못된 가르침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소위 율법폐기론적인 주장인데요.

 

‘율법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리가 얼마나 죄인이라는 것과,

우리가 절대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주신 것이다’

 

율법을 주신 제 1번 목적이 ‘너는 율법을 절대로 지킬 수가 없어.

대신에 너는 그것을 통해서 네가 죄인 됨을 깨달아야 돼. 그 목적으로 율법을 주셨어!’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를 들어 봅니다. 우리나라와 세계 각국에 교통법규가 있습니다.

다른 민법, 상법, 형법도 다 마찬가지입니다만, 교통법을 예로 들어봅니다.

 

‘교통법은 너는 절대로 지킬 수가 없다.

그것은 네가 얼마나 교통법을 지킬 수가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법이다’ ... 이게 말이 되는 얘기입니까?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은, 지키라고 주신 것이지,

‘너는 지킬 수 없으니, 이것을 통해 너의 죄인 됨이나 깨달아라’ ... 말도 안 되는 얘기인데,

이런 잘못된 율법론 이해가, 여전히 시중에 유통되고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 주어진 법입니다.

신10:13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율법을 어기면, 우리 삶에 고통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예루살렘의 궁궐들처럼 불사름입니다. 2:5

 

그런데, 우리 행복을 위해서, 우리의 풍성한 삶을 위해서 지키라고 주신 율법을 *도덕법 뜻함

‘네가 죄인됨을 깨닫게 하기 위해 주신 법이다. 너는 예수 믿기만 하면 천국에 간다’

이렇게 가르치는 것이, 본문에 나온 ‘거짓 것의 미혹’입니다. 2:4


위에도 설명했듯이, 율법을 어기면, 유다인이나 이방인이나 똑같이 심판 받습니다.

유다인은 율법에 의해 심판 받고,

이방인은 양심의 법에 의해 심판 받는 것입니다. 그들의 양심에도 율법이 새겨져 있으니까요.

롬2:12~16

 

그럼 언제 아모스의 예언처럼, 예루살렘이 이방인에 의해 불에 탔나요?

마지막은 예언이 주어진지 약 150년 이후인, 바벨론에 의해서 불에 탔습니다. BC 586

그러나 1차포로 때인 BC 605, 2차포로 때인 BC 597에도 일부가 불에 탔을 수 있습니다.

 

더 일찍은,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기 전에도 부분적인 공격이나 약탈은 있었을

수 있습니다. 바벨론 외에도 애굽이나 기타 이방 민족들이 예루살렘을 공격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이때 그 성읍의 궁궐 일부가 불에 탔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세상 사람들과는 무엇인가 달라야 할 것입니다.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야 할 귀한 사명이 우리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꺼져 버린 촛불이 된다든지, 맛을 잃어 버린 소금이 된다든지 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마치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특혜를 저버림으로써 벌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우리들도 명목상의 신자가 되어 버린다면,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 하나님의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많이 맡은 자에게는 오히려 많은 것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다.

본문에 ‘남유다’ 얘기를 하는 중입니다.

 

눅12:48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2. 적용2 ‘하나님은 불로 심판하신다’

 

마3:10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불에 던져지리라’는 말은.. 궁극적으로 지옥 불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음의 말씀은, 마태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쓴 복음서입니다.

유대인들은 다 하나님을 수천년 동안 믿어오던 사람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안 믿는 유대인은, 아마 인구 중에 0.01%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 당시의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믿는’ 증거는 무엇이냐?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유대인인데, 하나님을 믿는데,

만약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요?

본문 2:4~5절에 그 답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는 그들이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하며 그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그의 조상들이 따라가던 거짓 것에 미혹되었음이라

내가 유다에 불을 보내리니 예루살렘의 궁궐들을 사르리라’ 2:4~5

즉 ‘불의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럼 ‘좋은 열매 맺지 않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진다’고 말씀한

세례요한은 ‘율법주의’를 가르친 것인가요? No

세례요한이 율법주의자인가요?

 

‘좋은 열매 맺지 않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진다’고 말씀한 세례요한의 뜻은

‘진정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좋은 열매를 맺게 되어 있다’라는 뜻이죠.

 

그런데 본문에 ‘그의 조상들이 따라가던 거짓 것에 미혹되었음이라’ 2:5

라는 말씀의 뜻을, 오늘날에 맞게 적용한다면

 

‘하나님을 믿어라, 예수님을 믿어라, 믿기만 하면 천국에 간다.

너는 유대인이니 (너는 모태교인이니) 천국에 가는 것은 따 놓은 당상이다.

그러니 이제 성경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세상을 요령 있게 사는 법을 배워라.

그래서 이 세상에서 좀 더 머리 되고, 좀 더 성공하고, 좀 더 부자로 살아라’

이게 바로 ‘거짓 것, 거짓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거짓 것, 거짓 가르침의 결과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마3:10, 눅3:9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똑같은 ‘불’인데,

‘심판의 불’도 있고, ‘성령의 불’도 있는 것입니다.

 

즉 사람은 두 가지 불 중에 하나는, 받게 되어 있다는 거죠.

-심판의 불을 받든지

-성령의 불을 받든지

오늘도 우리는 두 가지 불 중에 하나는 받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고전3:12~15 

 

오늘도 우리는 각자 ‘신앙의 집, 영원한 집’을 건축하는 건축자들인데,

불에 타 버릴 나무, 풀, 짚으로 건축하는 신자도 있고,

금, 은, 보석으로 건축하는 신자도 있다는 거죠.

 

우리 각자의 지난 10~20~30년을 되돌아보면 됩니다.

-나는 내가 지금까지 쌓아온 것들이 불에 타 없어지고, 잔해만 남아있나?

-아니면, 나는 내가 지금까지 건축해온 것들이, 고스란히 그대로 남아있나?

 

‘우리가 쌓고 건축해 온 것들’이란

먼저는 내면적 신앙, 영적인 신앙, 인격적 신앙이고,

다음으로는 외적인 사역, 가정 등 외적인 모습이 될 것입니다.

 

어쨌든지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인 ‘남유다’가

다른 이방 나라들, 이방 불신자들과 똑같이 ‘불로 심판하신다’라는 섬짓한 예언 앞에서

-내가 오늘 성령의 불을 받고 있나?

-내가 불의 심판을 받고 있나?

를 깊이 생각하고 분별해 보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이런 무서운 최후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오늘 내가 성령의 불을 받고, 심판의 불을 피하는’ 길입니다.

 

오늘 그가 매일같이 ‘심판의 불’을 받고 있다면,

최후의 심판 때, 마3:10, 눅3:9절의 말씀이 그에게 적용되는 거죠.

 

..............................................

 

◑암2장 절별 해석

 

암2:1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모압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가 에돔 왕의 뼈를 불살라 재를 만들었음이라

 

모압은 원래 암몬의 사촌으로 롯이 큰 딸에게서 낳은 아들이다(창 19:37).

본절의 모압은 그 후손들로 암몬보다는 많은 성읍들의 이름이 나온다(사 15,16장, 렘 48:20ff).

 

모압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에 발람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했고(민 22-24장, 수 24:9),

바알브올에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범죄케 하였다(민 25장, 호 9:10).

 

사사 시대에는 18년 동안이나 이스라엘을 괴롭혔다(삿 3:12-30).

사울 왕 때까지만 해도 모압과 이스라엘은 간헐적으로 전투가 계속되었고(삼상 14:47),

다윗 왕 때에 이르러서야 모압이 제압되었다(삼하 8:2, 대상 18:2,11).

 

특히 본절에서는 모압이 저지른 비윤리적이고 비인도적인 범죄를 지적한다.

'뼈를 불살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사르포 아츠모트'는

극단적인 고통을 비유적으로 나타내기도 했지만(욥 30:30, 시 102:3),

대개 시체 자체를 태우거나(6:9,10), 시체가 썩고 남은 뼈를 태우는 것을 의미한다(왕상 13:2, 왕하 23:20, 겔 24:10).

 

여기서 모압 왕이 저지른 죄악은 에돔 왕의 시체를 불에 태우기까지 하여

최악의 모독을 주는 식으로 복수 하였음을 의미한다.

 

암2:2 내가 모압에 불을 보내리니 그리욧 궁궐들을 사르리라 모압이 요란함과 외침과 나팔 소리 중에서 죽을 것이라

 

그리욧'은 간혹 성읍들(the cities)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모압의 중요한 성읍을 가리키는 고유 명사로 보는 것이 좋다(렘 48:24,41).

 

이곳에 궁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수도였을 것으로 보이며,

'모압의 알'(Ar of Malb) 같은 도시일 것으로 추정된다(사 15:1).

 

또한 '요란함과 외침과 나팔 소리'는 물밀듯이 몰아닥치는 적군의 모습을 묘사한다.

즉, 적군의 침략으로 인해 모압 백성은 순식간에 초토화될 것을 의미한다.

 

암2:3 내가 그 중에서 재판장을 멸하며 지도자들을 그와 함께 죽이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내가 그 중에서 재판장을 멸하며 방백들을 저와 함께 죽이리라'

'그 중에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키르바'는 가장 중심되는 부분을 가리키는 것으로

모압의 핵심부를 말한다.

모압은 B.C. 734년에 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셀 3세에 의해 정복당했고,

그 후 바벨론이 고대 근동 지역의 패권을 잡았을 때에는 그들에게 조공을 바쳐야 했다.

B.C. 598년에 바벨론에 반기를 들었지만 느부갓네살에게 진압당하고 말았다.

 

암2:4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유다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하며 그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그의 조상들이 따라가던 거짓 것에 미혹되었음이라

 

아모스는 지금까지 주변 국가들의 죄악상을 폭로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선고하였고,

이제 본 메시지의 핵심적 대상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관심을 집중하기 시작한다.

 

유다 족속은 가나안 땅의 남부를 차지하고 있었고, 하나님은 그들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많은

복을 주셨다. 하지만 그들은 언약을 파기하기 일쑤였다.

이런 점에서 유다의 죄악은 이방 민족의 죄악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유다는 엄연히 하나님의 법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불순종하였다.

주변 국가들은 일반적인 인간의 법에 근거하여 지적 받았을 뿐이지만,

유다는 무엇보다도 먼저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한 것에 대해 질책을 받는다.

 

'여호와의 율법'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토라트 아도나이'는 본서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토라'는 자주 '율법'으로 번역되지만, 보다 정확하게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을 위해 주신

교훈'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유다 백성은 율법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가르침에 순종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로부터 멀어졌을 뿐만 아니라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그 열조의 따라가던 거짓 것에 미혹하였음이라'

아모스 당시의 유다 왕 웃시야(아사랴)는 그 부친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긴 했지만, 산당을 제거하지는 않았다(왕하 15:3).

그는 후에 강성해지자 교만해져서 제사장의 권위를 빼앗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향단에

분향하려 했다가 문둥병에 걸리고 말았다(대하 26:16,19).

 

이런 약순환은 그 이후로 계속되었다. '거짓 것'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키즈베이헴'은

본 구절에서는 열조의 따라가던 것을 가리키므로 '우상'을 의미한다.

우상을 '거짓 것'으로 표현한 것은 우상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유일신 사상에 근거한다.

 

암2:5 내가 유다에 불을 보내리니 예루살렘의 궁궐들을 사르리라

 

'내가 유다...예루살렘의 궁궐들을 사르리라' 하나님께 대한 종교적 순결을 상실한 유다는

B.C. 586년 바벨론에 의해 멸망되었다. 이로써 아모스의 예언이 완전히 성취되었다.

 

암2:6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 팔며

 

'이스라엘의...이는 저희가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례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팔며'

아모스는 유다를 향한 심판에 이어 본격적으로 이스라엘의 죄를 들추어 내며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한다.

 

'이스라엘'은 야곱의 다른 이름으로 여기서는 북이스라엘을 지칭한다.

'의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차디크'는 '의'(righteousness)를 의미하는 것으로

본절에서는 올바름(rightness), 정의(justice)등의 개념을 갖는다.

 

또한 문맥상 '가난한 자'와 병행을 이루고 있어서,

여기서는 의를 추구하다가 정당한 근거를 가지고 궁핍하게 된 사람을 의미한다.

 

구약 성경은 이런 어법을 많이 사용하였다(출 23:7, 신 25:1).

그러므로 이 구절은 뇌물을 받고 불의한 재판을 진행하거나,

죄없는 자를 노예로 팔아 넘기는 행위를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암2:7 힘 없는 자의 머리를 티끌 먼지 속에 발로 밟고 연약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아버지와 아들이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내며'

'탐내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쇼아핌'은 '열망하다'(pant after), '짓밟다'(trample upon)

등의 뜻을 가진 '솨아프'에서 온 분사형이다.

NIV는 '짓밟다'는 의미로 '그들의 땅의 티끌을 짓밟듯이 가난한 자의 머리를 짓밟는다’

(They trample on the heads of the poor as upon the dust of the ground)라고 번역하였다.

 

여기서 아모스는 가진 자들의 탐심을 아주 생생하게 나타낸다. 모세 율법에 의하면,

가난한 자에게 공평할 것과 뇌물을 받지 말 것을 명령하고 있지만(출 23:6-8),

이스라엘은 이를 무시하였다.

 

'부자가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한 젊은 여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나아라'에서 정관사 '하'는 동일한 여인임을 가리킨다.

모세 율법에 의하면, 아버지와 아들이 동일한 여인과 동침하는 것은 사형에 해당되었다(레 18:6-18, 20:17-21).

비록 그녀가 창기일지라도 근친 상간에 해당하는 것이고,

이외에 어떠한 근친 상간도 금지되어 있었다.

 

더욱이 이 여인이 카일(Keil)의 견해대로 '케데샤',

즉 바알 신전에 있는 성녀(sacred harlot)였다면,

더욱 심각하고도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거룩성을 침해하는 것이다.

 

또한 '다녀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옐쿠'는 미완료 시제로 습관적인 행동을 뜻한다.

그렇다면 계속해서 이런 악행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암2:8 모든 제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그들의 신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

 

'모든 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옷'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베게딤'은

'베게드'의 복수형으로 온 몸을 감쌀 수 있는 옷을 가리킨다.

이런 옷은 밤 사이에 추위를 막을 수 있기 때문에

가난한 자들에게는 몸을 보호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러므로 모세 율법은 전당잡힌 옷을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도록 명하였다(출 22:26,27, 신 24:12,13).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를 무시하고 무자비함을 그대로 드러냈다.

이런 일이 모든 제단 옆에서 자행되었다는 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만큼 신앙과 실천의 완전한 괴리 상태에 있었음을 강조한다.

 

'저희 신의 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

'저희 신의 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베이트 엘로헤이헴'은 문자적으로

'그들의 하나님의 집'(the house of their God)이라는 뜻이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지배층들은 여호와의 종교를 표방하고 종교 생활을 영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우상 종교를 도입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고 혼합 종교를 만들었다.

 

'벌금'은 가난한 자들의 옷을 저당잡아 받아낸 무자비한 돈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들은 겉모양새는 그럴듯하게 꾸몄지만, 실속없는 형식적인 종교 생활을 했음을 보여준다.

 

암2:9 내가 아모리 사람을 그들 앞에서 멸하였나니 그 키는 백향목 높이와 같고 강하기는 상수리나무 같으나 내가 그 위의 열매와 그 아래의 뿌리를 진멸하였느니라

 

아모스는 이스라엘의 종교적 타락을 언급하고 나서

곧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한 이스라엘의 과거를 회상한다.

 

'내가 아모리 사람을 저희 앞에서 멸하였나니'

'아모리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이전에 있었던 가나안 거민을 가리킨다(창 15:16).

 

'그 키는 백향목 높이와 같고...진멸하지 아니하였느냐'

아모스는 과거 역사를 돌이켜 보면서, 아모리 사람들이 아무리 강하였더라도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으로 가나안에 들어가

려고 정탐꾼을 보냈을 때 돌아온 정탐꾼의 보고는 본문과 같았다(민 13:22-33).

 

암2:10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인도하고 아모리 사람의 땅을 너희가 차지하게 하였고

 

본절에 이르러서는 인칭의 변화가 있다.

즉, 아모스는 그의 민족들에게 직접 말하고 있는 형태를 취하는 것이다.

 

'이끌어 내어'의 히브리어 '헤엘레이티'는 '이끌어 올린다'(bring up)는 의미로

출애굽 기사에 언급된 용어 그대로이다(출 32:7, 33:1, 신 6:12). 아모스는 이처럼

이스라엘의 역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시작되었고,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암2:11 또 너희 아들 중에서 선지자를, 너희 청년 중에서 나실인을 일으켰나니 이스라엘 자손들아 과연 그렇지 아니하냐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본절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향한 관심이 가나안 정착으로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또 너희 아들 중에서 선지자를, 너희 청년 중에서 나시르 사람을 일으켰나니'

아모스는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하게 부각된 선지자로 모세(호 12:10,13)와

엘리야(왕상 17장)와 미가야(왕상 22장)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나시르 사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네지림'은 문자적으로

'구별되거나 성별된 사람'(seperated or consecrated ones)을 의미한다.

그들은 특별한 서원을 하였고(민 6:1-12),

사무엘처럼 평생을 나실인으로 보낸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삼상 1:28),

얼마 동안만 나실의 서약을 지키는 사람도 있었다(민 6:5-8).

 

그들은 포도나무의 소산과 발효시켜서 만든 독주는 일체 마시지 않았고,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았으며, 머리도 깎지 않았고, 시체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삿 13:3-14).

이처럼 나시르 사람들은 철저하게 거룩성을 유지하며 하나님께 바쳐진 삶을 살았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과연 그렇지 아니하냐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앞서 아모스는 출애굽 역사에 이어 선지자와 나실인을 언급함으로써

이스라엘 전역사를 축약하여 개괄하였다. 이로써 타락의 일로를 걷고 있는 회중들에게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하고, 앞으로 경고할 내용에 대해 수긍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본절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네움 아도나이'는 히브리어 본문에

대개 문장 끝에 나온다(16절, 3:10,15, 4:3,6,8-11, 6:8,14, 9:7,8,12,13).

 

이 표현은 사실상 '아마르 아도나이'와 동의어이긴 하지만,

'네움''신음하다'(groan), '탄식하다'(sigh)라는 의미를 내포한 '나암'에서 온 것으로,

'아마르'보다 깊이있는 표현이다.

 

즉, 깊은 묵상을 통해 잔잔하게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 등을 가리킨다.

이 단어는 간혹 선지자가 계시의 말씀을 전달할 때 주어가 되기도 하지만(민 24:3,15, 삼하 23:1),

보통은 하나님의 말씀을 언급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만큼 이 단어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예언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특별하고 직접적인 계시라는 사실을 지지한다.

 

'그러나 너희가...포도주를 마시게 하며...예언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 같은 행위는 단순히 나시르 사람이나 선지자 개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다. 즉, 여호와의 말씀을 거부하고 하나님께 헌신하는 행위를 비웃는 일이었다.

 

암2:12 그러나 너희가 나실 사람으로 포도주를 마시게 하며 또 선지자에게 명령하여 예언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가...포도주를 마시게 하며...예언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 같은 행위는 단순히 나시르 사람이나 선지자 개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다. 즉, 여호와의 말씀을 거부하고 하나님께 헌신하는 행위를 비웃는 일이었다.

 

암2:13 보라 곡식 단을 가득히 실은 수레가 흙을 누름 같이 내가 너희를 누르리니

 

히브리어 본문에는 '보라'(behold)의 의미를 가진 '히네'가 본절 처음에 나와서

청중들로 하여금 주의를 환기시킨다. 그리고 곧바로 '내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노키'가

있어서 이스라엘을 행한 심판 내용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한편, '누르리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본절에만 나오는 단어로 해석하기가 난해한데,

능동형과 수동형의 번역이 모두 가능하다.

그래서 어떤 번역본들(개역 성경, RSV, JB, NIV)은 능동형으로 간주하여

'내가 너희를 누르리니'라고 했고,

어떤 번역본들(KJV, NASB)은 이를 수동형으로 간주하여 '내가 너희 아래 눌리리니'라고 번역하였다.

 

이 가운데 전자의 번역이 자연스럽다. 왜냐하면, 본절은 줄곧 이스라엘의 심판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아마도 땅을 가르시겠다는

즉, 지진에 대한 예언으로 여겨진다.

아모스는 다른 부분에서도 지진에 대한 모습을 묘사하였다(1:1, 8:8, 9:1,5).

 

암2:14 빨리 달음박질하는 자도 도망할 수 없으며 강한 자도 자기 힘을 낼 수 없으며 용사도 자기 목숨을 구할 수 없으며

 

'도망할 수 없으며’

심판이 급속하게 이루어질 것을 보여준다.

 

'강한 자도 자기 힘을 낼 수 없으며 용사도 피할 수 없으며'

히브리어 본문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피할 수 없으며'(로 예말레트)는

'탈출하다'(escape), '구출하다'(deliver)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고,

강한 의미를 나타내는 피엘(Piel)형 동사이다.

 

암2:15 활을 가진 자도 설 수 없으며 발이 빠른 자도 피할 수 없으며 말 타는 자도 자기 목숨을 구할 수 없고

 

'활을 가진 자도 설 수 없으며' 아무리 활을 잘 쏘고 자기 방어에 뛰어난 사람이라도

더 이상 제자리를 지킬 수 없고 달아날 수밖에 없으리라는 말이다.

 

'발이 빠른 자도 피할 수 없으며 말 타는 자도 피할 수 없고'

아무리 민첩한 사람이라도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한다.

 

암2:16 용사 가운데 그 마음이 굳센 자도 그 날에는 벌거벗고 도망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용사 중에 굳센 자는 그 날에 벌거벗고야 도망하리라'

'그 날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욤 하후'는 아모스가 장래의 날에 관심이 있음을 나타낸다.

이 용어가 종말의 날을 가리키기도 하지만(사 24:21), 구태여 종말론적인 의미만을 부여할

필요는 없고, 임박한 포로 시대를 의미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