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2장 느슨한 신앙의 태도를 경계하라
https://www.youtube.com/watch?v=Le9dU3XqJjs
◈느슨한 신앙의 태도를 경계하라 계2:18-29 2025.03.30.
자 오늘은 두아디라 교회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지난주에 살펴보았던 버가모 교회와 흡사한 면이 좀 많이 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일곱 도시 중에서 가장 작은 도시입니다. 그런데 편지는 가장 깁니다.
이 두아디라 교회는 상업도시이고, 상공인들의 조합들이 있었고
거기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우상 숭배, 그리고 종교의식들과 함께
음란한 문화들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역시 칭찬과 책망을 동시에 받은 교회인데요.
◑그리스도가 7교회에 편지를 보낼 때마다, 자신을 다르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에는, 이렇게 자신을 소개하십니다.
계2: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이것은 심판주로서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라고요? 불꽃 같은 눈을 가지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상상이 되십니까?
눈에서 막 불이 나오는 불꽃 같은 눈을 가지셨다... 뭘 의미할까요?
주님의 눈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신다는 거죠. 꿰뚫어 보십니다.
겉만 보시는 게 아니고, 속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신다는 거죠.
이 '불꽃 같은 눈'앞에서 감히 누가 설 수가 있을까요?
사람들이 죄를 지을 때 뭘 생각하느냐 하면, '아무도 보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까 죄를 짓겠죠. 그리고 주로 죄를 은밀한 곳에서 짓습니다.
그런데 주님 앞에서, 이 불꽃 같은 눈동자 앞에서는, 은밀하고 숨겨진 곳은 없습니다.
요즘 범죄자의 검거율이 굉장히 높다고 그래요. 100%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다 잡힌대요.
이유가 뭘까요? cctv 입니다. 없는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cctv를 피해서 살기는 어려워요. 어디든지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디지털 사회는 투명 사회라고 그럽니다. 투명해요.
우리가 지금 무심결에 정보 검색을 하잖아요. 이게 다 정보 회사에 데이터로 축적되는 겁니다.
그래서 '구글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말이 있죠. 슈퍼 컴퓨터는 모든 걸 알고 있어요.
하물며 우리가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투시하시죠. 꿰뚫어 보십니다. 그분의 눈앞에 숨길 수 있는 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발이 '빛난 주석과 같다'고 그러죠. 주석은 놋쇠를 의미하죠.
그러니까 굉장히 묵직한 놋쇠의 발, 그 발로 짓밟으면 견뎌낼 자가 없다는 거죠.
이것은 심판주의 이미지입니다.
통치하시는 그분은, 죄에 대해서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계시합니다.
시2:9절에 '내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리며 질그릇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그러니까 주님의 심판을 피하거나 그 힘을 당할 자가 없으며,
그 앞에 복종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산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는 것이죠.
그리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랬어요.
심판자이신 주님 앞에 서는 날이 옵니다.
그날은 최고의 법정입니다.
아마 세상의 모든 재판을 했던, 판결을 내렸던 재판관들도, 그분 앞에 서야 할 것입니다.
최종적인 판결은 주님이 하십니다. 그분만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인간들끼리 시시비비를 가리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제대로 된 공의의 판단을 내리기는 어렵습니다. 억울한 일이 생기는 일들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무죄하신 분인데, 십자가 형의 언도를 받고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법정이 열리면, 모든 것은 명백히 드러날 것입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바로 잡으십니다.
우리의 (회개하지 않은, 용서받지 않은) 모든 행위와 말에 대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이 종말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렇게 편지에서 두아디라 교회에 대해
주님 당신이 어떤 분인가를 소개하시고 난 다음에.. 칭찬을 하십니다.
◑두아디라 교회에 대한 칭찬
2:19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이 불꽃 같은 눈을 가지신 그리스도는, 두아디라 교회의 성도들이 행한 것들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이건 대단한 것입니다.
왜냐면 여러분, 언제나 처음은 다 잘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가면 자꾸 희석이 되고, 나중에는 좀 안일해지고, 게을러지고,
자기 만족에 빠지고, 어느 순간 유혹이 오잖아요.
'처음에는 열심히 했는데 나 이제 좀 쉴래.. 좀 그만두고 싶어'
우리 신앙에도 정체기가 와요.
믿음의 길에서 경계해야 될 것 중에 하나는 태만입니다. 게으름!
여러분 '기독교 7대 죄'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나태입니다. 게으름!
성경은 이 게으름에 대해서 굉장히 혹독하게 잠언서에서 얘기하죠.
인간은 갈수록 편안해지고 싶습니다. 초심을 유지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어요.
갈수록 나빠지는 경우가 많아요.
열정도 처음에는 열정이 있었는데, 나중에 보면 좀 열정이 다 시들어 버려요.
여러분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갈수록 더 열심입니까?
아니면 정체되어 있습니까? 퇴보되고 있습니까?
우리는 느슨하게 만드는 문화들과 싸워야 돼요.
열정이 식는 순간 퇴보되는 거죠.
그런데 이 두아디라 교회는, 식지 않은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거죠.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19
열심히 하다가 왜 그만두느냐? 많은 사람들에게 섭섭한 감정이 밀려와요.
그래서 교회에 아주 무서운 손님 중에 한 분이 '섭섭이'라고 그러죠.
'아 섭섭하네.. 난 최선을 다 했는데 안 알아주네...'
자신의 수고를 몰라줄 때, 억울한 감정이 와요. 당해 본 분들은 압니다.
소위 '빅팀 신드롬 victim syndrome 희생자 증후군' 이라는 게 있습니다.
난 한다고 했는데, 거기에 대한 마땅한 보상이나 칭찬과 지지가 없으면, 섭섭해지는 거죠.
'나만 희생하는구나...'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아지는 거죠.
내가 손해본다고 생각하면, 사람이 약아집니다.
그러면 대충 하게 되는 거죠.
열심의 동기를 살펴봐야 합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것은
올바른 동기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의 박수와 칭찬을 받을 때는 좋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박수와 인정은 금방 사라져버립니다. 잠깐이에요.
그러니까 사람이 약해지면.. 자꾸 사람을 의식하는 거죠.
신앙이 약해지면 사람을 의식해요.
기억해야 할 것은, 불꽃 같은 눈을 가지신 주님, 그분은 다 알고 계세요.
여러분 마25장에 보면, 주님이 작은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을 대접한 것을 기억하시고
상을 주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언제 그랬습니까?
내가 언제 그런 일을 했는지 난 모릅니다.'
여러분 주님 앞에 신실하게 살아갔던 사람은, 자신의 선행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동기가 순수하니까, 주님이 기억해 주시니까... 깜짝 놀라는 거예요.
'내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
그런데 순수하지 않은 사람은, 자기가 한 선행을 노트에 다 적어놓고,
어느 날 며칠 몇 시에 누구에게 자장면 사준 것까지 다 기억해놓고 안 잊어버리는 거예요.
여러분 동기가 순수하지 않으니까... 섭섭한 거죠.
나에게 마땅한 어떤 반응이 오지 않으면, 섭섭해하는 거예요.
오늘 이 두아디라 교회는 '처음보다 나중이 더 신실하게, 더 열심히'
그 열심이 식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들의 열심을, 여러 가지로 오늘 본문에 소개합니다.
2:19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1) 그들의 열심을 보니까 먼저는 '사업'이라고 그랬죠.
이 사업은 무슨 비즈니스를 말하는 게 아니겠죠.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그 믿음을 행동으로 표현한 겁니다.
그게 봉사가 되든, 때로는 구제가 되든... 행동하는 그리스도인들이었다는 거죠.
머리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아니고, 입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아니고,
두아디라 교인들은 믿음을 행동으로 표현한 사람들이었죠.
여러분 특이해요. 은혜를 받으면 몸이 움직여요. 뭔가 하고 싶어요.
은혜가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주는 거거든요. 활성화시키는 거예요.
삶을 생동감 있게 만드는 게 은혜예요.
그러니까 받은 만큼 주고 싶은 거죠. 그게 봉사가 되고 그게 섬김이 돼요.
2)그 다음은 '사랑'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잃어버렸던 사랑을, 두아디라 교회는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진짜 사랑이 뭡니까? 한때 불같은 사랑이 아니잖아요.
끝까지 그 사랑을 가지고 갈 수 있느냐? 그게 진정한 사랑이죠.
두아디라 교회는 그런 사랑을 가졌다는 겁니다.
3) 또한 '믿음'입니다. 여러분 믿음은 뭘까요?
믿음은 다르게 살게 만듭니다. 믿음은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믿음은 사변적인 게 아니라는 거예요. 믿음은 드러나게 됩니다. 행동으로 증명됩니다.
그래서 믿음을 '동사'라고 그러죠. 삶에서 신앙이 묻어나야 정상입니다.
이렇게 두아디라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 그리고 성도들 간의 신뢰,
이게 그들의 삶에서 드러났다는 겁니다.
4) 넷째는 '섬김'입니다.
복음을 경험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이 자연스러워요.
이기적 삶에서 비이기적 삶으로 이동합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누군가를 섬기는...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모습이에요.
그리스도는 우리의 종으로, 섬기는 자로 오셨습니다.
바로 이 두아디라 교회에 섬김이 있었습니다.
5) 다섯 번째 '인내' 인데요. 계시록에서 강조되는 단어입니다.
믿음은 인내로 나타납니다.
신앙을 지켜내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필요한 것은 인내였다는 거죠.
인내가 없으면 버텨낼 수가 없습니다. 근데 누가 인내할 수 있습니까?
소망을 가진 사람이죠.
그런 의미에서 두아디라 교회는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가진 교회예요.
무엇보다 '처음 행위보다 나중이 더 많았다'
이렇게 두아디라 교회의 강점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이 교회는 열심이었고, 활발한 교회였고, 역동성이 있고, 수고와 헌신이 있었고,
믿음의 증거들을 드러냈고...
자 문제는 모든 신자가 그랬던 게 아닌 것 같아요.
세월이 흐르면서 두아디라 교회도 점점 변질되어 갔던 거죠.
그래서 그 두아디라 교회가 안타깝게도 주님의 책망을 받게 됩니다.
◑두아디라 교회가 받은 책망
2:20절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두아디라 교회는,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용납했다고 했습니다.
그 결과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백성들을 미혹하여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했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스라엘 역사에 가장 악명 높은 한 인물이 있는데, 그게 이세벨이에요.
아합 왕의 아내! 얼마나 악명이 높았는지, 왕인 남편보다 더 유명했어요.
그녀는 북이스라엘에 이방 종교를 들어오게 하는데 기여했는데,
그 이방 종교가 뭐냐? 유명한 바알숭배입니다. *종교를 통한 기복주의, 번영신학 추구의 원조
여러분, 이세벨은 오래 전에 죽은 인물입니다.
그러나 이세벨의 악령이 살아나서, 두아디라 교회를 어둠 속으로 빠뜨렸다는 것입니다.
우상숭배 의식에 그리스도인들을 참여하게 하고, 음란한 문화에 젖어들게 했습니다.
이것은 버가모 교회가 빠졌던 죄와 동일해요. 우상숭배와 음행,
제가 늘 얘기했지만, 우상숭배와 음행은 늘 친구처럼 같이 다니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에, 우상숭배와 음행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적이 없었어요.
여러분,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우상숭배와 행음.
유명한 팀켈러 목사는 <내가 만든 신>이라는 책에서, 우상숭배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우상숭배가 뭐냐? '좋은' 것을 '궁극적인' 것으로 바꾸는 것을 우상숭배라고 했어요.
돈이 여러분, 나쁜 거 아니잖아요. 돈은 원래 좋은 거예요. 어
떤 분은 '돈 싫어' 그런 분 있어요? 없죠.
돈은 사람에게 필요한, 그래서 좋은 거예요.
여러분 근데 문제는, 돈을, 궁극적인 것으로 바꿔버리는 거예요.
하나님보다 더 위대하게 바꿔버리는 거죠.
여러분, 성이라는 건 좋은 겁니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부부관계 안에서 성은 좋은 거예요. 단서가 그거예요. 예외가 없어요.
부부관계 밖에서의 성은, 그건 성경이 허락하지 않아요. 그건 죄라고 얘기해요.
그러니까 성은 너무도 좋은 선물로 주셨는데
인간이 욕망의 도구로 성을 사용할 때가 문제예요.
바로 그때, 좋은 것이 궁극적인 것으로 바뀔 때, 그건 우상숭배 라는 거죠.
어떤 것이든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만 드려야 할 열정을 엉뚱한 곳에 쏟는다면
그게 우상숭배예요.
이세벨은, 이 세상이 주는 즐거움을 추구하도록, 새로운 종교를 만든 겁니다.
바알 종교가 그겁니다. '너의 욕심을 억제하지 마, 너가 끌리면 해, 너가 원하는 걸 다 가져!'
여러분, 이런 유혹은 우리가 늘 드리는 예배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정말 인간 중심의 예배로 전락할 유혹이 많아요.
정말 우리의 예배가 '누구를 기뻐시게 하는 것인가?'를 물어야 되는 거죠.
나도 모르게 예배가, 우리의 만족을 추구하는 쪽으로 흐르기 쉽다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되죠? 내 마음에 드는 찬양,
'아이고, 오늘은 찬양곡이 마음에 안 드네...'
내 마음에 드는 찬양, 내 기호에 맞는 설교, 나에게 기쁨을 주는 예배,
내가 헌금을 드린 만큼 보상을 요구하는 예배...
그러면 그 예배가 우상이 되는 거예요.
그 예배를 통하여 자기의 만족을 추구한다면, '나'라는 존재가 우상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배가, 자아 만족을 위한 소비 형태가 될 수 있어요. 예배를 소비하는 거예요.
내가 봉사한 만큼, 하나님이 보상을 주셔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과의 거래 관계죠.
두아디라 교회는 오늘날 우리와도 닮아있습니다.
'너가 좋은 대로 해, 너가 원하면 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성공을 추구하라고 가르칩니다.
교회 강단에서도 이런 삶의 방식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성공주의, 형통신학, 번영의 복음이 바로 그런 것들이에요.
이런 가르침들이 한국교회에 없었다고 얘기하기가 어려워요. 굉장히 깊이 들어와 있어요.
힘들고 어려워도 말씀대로 살아가는 걸 강조하기보다는,
일상의 행복에 더 관심을 가지도록 한다면, 신자들을 미혹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메시지는 듣기에 매우 달콤합니다.
청중들, 사람들을 많이 끌어모으기 위해서라면
매우 달콤한 매혹적인 매력적인 설교를 할 수 있는 것이죠.
▲여러분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불손종하도록 가르치지 않습니다.
약간 느슨한 기준을 만들어 타협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주제
이세벨의 가르침은 은밀하고, 아주 교묘하게 밀고 들어오는 거죠.
슬며시 들어와서... 점점 모든 걸 장악해버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빨리 이세벨의 가르침에 익숙해집니다.
두아디라 교회 안에는, 거짓된 가르침이 조금씩 영향력을 확대해 나갑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가짜 신자들이 더 늘어나는 거죠.
진짜 신앙을 가진 사람의 수가 오히려 줄어들고 있어요.
이세벨의 가르침은 강력했습니다.
불순종하는 사람들이 다수가 되면 어떻게 되죠? 거짓도 진리처럼 들립니다.
세상으로부터 압력은 거세지고, 타협의 유혹은 커집니다.
그럼 유혹에 대한 저항의식이 약해지면서, 결국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두아디라 교회 안에 영지주의자들이 들어왔을 가능성을, 주석가들은 말합니다.
이론, 이원론적인 철학입니다.
그들은 물질은 악하고, 영적인 것은 선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문제는 영적인 것을 너무 강조하다가, 육체적인 것을 가볍게 다룬 거죠.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를 부정했던 사람들이, 영지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의 논리는, '육체로 지은 죄는 영혼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러니까 육체적으로 죄를 짓는 것에 대해서는,
자연히 허용적인 태도를 가지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 영지주의는 오랫동안 교회를 위협해온 거짓된 가르침 중 하나요,
2000년 기독교 역사 속에 가장 강력한 이단 중의 하나입니다.
이런 영지주의는, 도덕적으로 타락하도록 문을 열어주는,
아주 교모하고 거짓된 가르침임에도 불구하고,
그게 교회 안으로 밀고 들어와서, 교회를 세속 앞에 무릎 꿇게 만든 것입니다.
▲또 하나의 가르침, 거짓된 가르침은 율법 폐기론자들입니다. Antinomianism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었다면, 더 이상 율법에 적용되지 않는다.
은혜로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더 이상 죄 문제로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문제는 뭐죠? 죄를 너무 쉽게 생각하도록 영향을 끼친 것입니다.
이런 그릇된 가르침 역시, 부도둑한 죄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도록 만든 요인이 됩니다.
이 죄에 대한 허용적 분위기는, 결국 교회를 부패의 길로 걷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 두아디라 교회는, 죄에 대한 관용적인 태도를 가졌다는 거죠.
여러분 죄는요. 누룩과 같아요. 굉장히 빠르게 번져나갑니다.
여기에 무슨 단어가 하나 나오냐면 '관용'이죠.
오늘날 이 관용이라는 단어를 잘못 오해하고 있어요.
교회가 너무 베타적인 것은 문제가 있어요.
복음은 관용적이니까... 하나님은 온 세상을 사랑하시고 죄인까지도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될 게 있어요. 죄에 대한 용납입니다.
구분해야 되죠. 관용해야 되지만, 죄에 대해서는 관용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그런 것을 지지해 주는 구절이 없습니다.
'은혜롭게 하자'는 말도 잘못 사용하면 안 됩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그 정도는 봐 줘야지, 누구나 죄를 짓는 건 아닌가?'
여러분 이런 점에서 에베소 교회와 두아디라 교회는 대비가 돼요.
에베소 교회는 진리를 수호하는 일에 대해서 철저했습니다.
은밀하게 밀고 들어오는 거짓된 가르침을 단호하게 배척했습니다.
그런데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어요.
반대로 두아디라 교회는, 끝까지 사랑을 붙들려고 했지만,
결국은 거짓된 가르침을 용납하고 말았습니다.
이 두 가지를 다 같이 붙잡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를 말씀하고 있는 거죠.
◑적용
여러분, 죄에 대해서는 단호해야 합니다. 작은 죄는 없습니다. 무해한 죄는 없습니다.
용납해도 괜찮은 작은 죄는 없어요. 죄는 크든 작든 죄입니다.
아무리 작아보이도, 죄는 파괴력을 갖고 있습니다.
죄에 관한 허용적 태도를 가지면, 그 죄가 일파만파
우리의 삶의 어느 영역까지 망가뜨릴지 아무도 모릅니다.
여러분, 산불을 보세요. 작은 불길이잖아요.
처음 시작은 아주 작은 불씨로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냥 온 국토를 다 태워버려요.
죄가 한 사람의 인생을 파괴하는 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한 가정 무너뜨리는 거... 문제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죄에 대한 느슨한 태도는 매우 위험합니다.
인간은 죄를 지을 원초적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죄를 짓는 일에 최적합화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죄를 너무 가볍게 이기는 태도를 경계해야 합니다.
결국 죄를 허용하면, 죄가 우리의 삶을 지배하죠.
여러분, 포도원을 허무는 것은, 작은 여우 한 마리면 충분합니다.
이세벨 한 여인이 가져온 우상숭배의 죄가
이스라엘 전체를 지배해버렸습니다. 세상을 타락의 길로 이끌었어요.
'그 정도쯤이야?
그런 정도를 가지고 너무한 것 아닌가?'
아니에요. 여러분, 애매모호한 중립지대에 서 있으면 안 됩니다.
분명한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 시간이 흐를수록 경계선이 희미해져요.
영화를 보아도, 등급을 조금씩 올려보고 싶은 유혹과 싸워야 합니다.
경계선을 넘기 전에는 갈등을 합니다.
그러나 경계선을 넘어버리면, 감당이 안 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성과 속의 개념이 없어져 버리죠.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엄연한 경계선이 사라져 버리면,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포로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악한 세상과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습니다.
영적 방어선을 지켜야 합니다. 지금 전선은 매우 위태롭습니다.
절대적 기준을 무시한 다원주의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포스트 모던 시대의 핵심은 다원주의입니다.
다원주의는 뭘까요? 상대주의입니다. 절대적 진리가 없습니다.
기준 자체를 무너뜨려 버렸습니다. 이 시대의 특징은 뭐예요? 다양성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모든 것을 포용하라'고 하는 메시지가 설득력 있는 시대,
이런 문화 속에 기독교는 독선적, 배타적 종교로 몰아부칩니다. 절대 진리를 주장하니까요.
'오직 예수만 구원'이라는 말이, 다원주의자들에게는 굉장히 거슬리게 들리는 거죠.
그들은 구원을 위해 수많은 길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한 가지만의 대안이 아니라, 무수한 대안이 있다는 거죠. 그걸 포용하라는 거죠.
끊임없이 변하는 세상 속에서 어떻게 하나만을 선택하라고 하는가?
사람들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라고 가르칩니다. 이게 다원주의입니다.
이제는 '포스트 포스트 모던' 시대가 왔다고 할 정도로, 매우 세상에 많이 바뀌어 있어요.
▲또 하나의 다른 거짓된 가르침 무신론이죠. 다원주의 정도가 아닙니다.
아예 신이라는 개념, 진리라는 개념 자체를 다 없애버리려고 하는 시대인 거죠.
진리 자체를 거론하지도 못하게 만드는 시대!
'하나님'이란 존재 자체를 모든 영역에 밀어내버린 시대!
하나님이란 절대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시대에, 세상은 어떻게 될까요?
이미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세상입니다. 혼란입니다.
여러분, 어느 지점에서 무너지면, 그다음부터는 도미노처럼, 무너짐이 거대한 물결이 됩니다.
갈수록 기준을 낮춰버리는 것이죠. 기준 자체가 없어져 버려요.
이런 시대에 우리가 해야 될 선택이 뭘까요?
절대적 기준을 다시 붙잡는 것입니다.
말씀을 견고하게 붙잡는 것, 우리의 삶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중세시대 때 잃어버렸던 그 말씀을 다시 가지고 와서
'솔라 스크립트라'를 외쳤습니다.
'오직 성경' 그 성경적 기준에 대한 강조가 없었기 때문에
중세는 암흑기 속으로 들어가 버렸단 말이죠.
성경을 무시하는 순간, 세상은 카오스, 혼란 속에 빠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대야말로 우리는 십계명을 붙들어야 돼요. 오늘날 십계명이 어디 있습니까?
십계명은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절대 기준입니다.
제가 우리 교회에 와서, 오래 전에 십계명을 35주 정도, 제가 연속 설교를 했습니다.
또 다시 할 수는 없고, 여러분 유튜브에 들어가 보면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우리 교회 홈페이지에 들어오시면 있을 거예요. *2016~2017년초
10계명을 10주 설교한 게 아니고, 35주 가량 연속해서 설교를 했어요. 주1)
여러분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십계명은 십계명이에요.
아니 어느 시대보다 십계명이 더 중요해졌어요.
기준이 없거나 있어도 느슨해지면, 그 다음은 봇물이 터질 수 있는.. 무너지는 겁니다.
여러분, 주일 성수 하나만 해도 요즘 얼마나 느슨해졌습니까?
과거에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은, 주일을 성수하기 위해서 생명을 걸었죠.
왜냐면 주일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아이덴티티를 정확하게 드러내는
핵심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주일을 지켜냈단 말이죠.
여러분, 유대인들이 유대인의 아이덴티티를 지켜내는...
그들의 역사 속에 어디를 가나 나라를 잃어버려도
당신들의 아이덴티티를 지켜냈던 핵심 중에 하나가 뭐냐면
안식일을 지키는 거였어요. 요즘도 아주 철저하게 지켜요.
여러분 우리는 세속화의 영향 속에서
이제 앞으로 연휴로 인한 휴가 문화로 여행을 떠나면서
주일 성수 개념이 마구 무너질 거예요.
신자라고 하면서 술 먹는 것을 대수롭게 안겨 여기기도 하고요.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이 생명처럼 지켜냈던 철저한 신앙이 무너지고 있는..
기준이 없어져 버리는 거죠.
성경적 기준이 없는 게 아니라, 기준이 있는 거잖아요. 십계명이 있는 거잖아요.
세속의 물결이 거세게 일어나 교회를 덮치고 있는 거죠.
어느 회식자리에 어떤 분이 술 한잔 권하는데 안 먹더래요. '나는 교회 집사입니다'
그러니까 '나도 어느 교회 집사입니다'
그러자 다른 한 분이 그러더래요. '그만 먹어, 난 장로인데 먹는데, 집사가 안 먹냐?'
기준이 확 떨어진 거죠.
여러분, 과거에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가졌던 어떤 기준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 교회 다니는데 거짓말 하겠나?'라고 했던.. 그런 기준이 있었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다닌다면, 이 정도 수준은 될 거라고' 하는 기대감이 옛날에는 있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세상 사람들이 아무도 그걸 믿지 않아요.
그러니까 기준이 확 떨어진 거죠.
그 말은 뭘까요? 교회와 세상이 똑같아졌다.
그럼 우리는 세상을 향하여 전해야 될 메시지를 갖고 있지 못 하게 되는 거죠.
▲여러분 항상 무엇이 먼저입니까? 미혹입니다. 언제 미혹을 당하죠?
약해 있을 때, 영적으로 약한 상태가 되면 그냥 무너지는 겁니다.
사람이 똑똑해 보이지만, 죄 앞에서는 여러분 굉장히 무력합니다.
버가모 교회는 선지자 발람의 교훈을 쫓다가 망했습니다.
본문의 두아디라 교회는 이세벨의 미혹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의 영역에 언제나 미혹은 있다는 거예요.
지금도 발람은 어디에나 있고, 이세벨이 곳곳에 존재합니다.
이건 큰 싸움이죠. 우리의 싸움은 무엇입니까?
세상의 방식과 다르게 살아가는 것, 우리의 신앙의 기준은 언제나 십자가입니다.
혼란스러울 때마다 우리는 십자가로 돌아가야 되고, 십자가를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건 뭡니까?
언제나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거죠.
당장의 만족과 쾌락을 좇는 것이 아니라, 의의 소망을 바라보며 현재의 만족을 유보해 나가는 삶!
은밀하게 우리 안에 들어오는 이 이세벨을 내쫓아야 합니다.
이세벨을 그대로 용납하면, 이세벨의 세상이 되고 마는 겁니다.
이 이세벨 한 사람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요!
여러분, 성경적 관점으로 보면, 국력이 약해서 나라가 망하지 않습니다.
정치와 외교로 망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답이 있어요.
개인과 나라를 망하게 하는 건 '죄'입니다.
그런데 죄의 영향력은 한 사람으로 충분합니다. *이세벨
작은 죄가 들어와서 모든 것을 태우고도 남습니다.
여러분 로마의 패망, 몰락을 연구한 책들에 뭐가 있어요?
우리의 관점으로 보면, 로마가 번영할 때, 그 안에 무수한 도덕적 타락이 있었어요.
그래서 로마가 망한 겁니다.
여러분, 주님은 이 두아디라 교회를 향하여 회개를 촉구합니다.
자 그런데 어떻게 반응하죠?
▲21절,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회개를 촉구하신 거죠. '회개하라'는 말은 회개할 기회를 주신 겁니다.
자 그런데 회개할 기회를 주었는데 회개하지 않았다는 거죠. 왜 그럴까요?
여러분 죄의 힘이, 그들을 놓아주지 않았던 거예요.
죄의 힘에 한번 끌려가면, 빠져나오기 힘들어요.
음란한 죄에 한번 빠지고 나면, 거기에 사로잡혀 버려요.
돈의 마력에 한번 걸려들면, 쉽게 벗어나기 어려워요. 돌
죄를 이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도, 지금의 달콤함에서 벗어나기 힘들어요.
회개는 타이밍이거든요. 뒤에는 지나가는 겁니다.
주님은 강도를 더 높이십니다. 회개를 거부하면 어떤 결과가 올 것인가요?
▲22절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볼지어다' 하는 말은, 매우 강한 어조예요. 뒤에 이어져 나오는 말을 강조하는 거죠.
회개하지 않으면
-침상에 던져질 것이고,
-큰 환란 가운데 던져질 것이다.
여기서 '침상'은, '잠자는 침대', '잔치용 상', '환자용 침상' 등을 의미합니다.
즉 죄로 인한 심판과 관련되어, 우상 숭배를 위한 상이나 음행을 위한 침상이
병상으로 바뀌어짐을 암시합니다.
실제로 소아시아의 비문들은, 음행의 결과로 질병에 걸려 죽은 사실들을 전하고 있죠.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그로 더불어'는 이세벨과 짝한 것을 가리킵니다.
이세벨과 뜻을 같이하여 음행하거나 우상 숭배한 모든 자들이 회개치 않는다면,
이세벨과 동일하게 심판을 당할 것이다... 라는 거죠.
한편 '큰 환난 가운데'는 이세벨에게 주어진 심판,
즉 병상에 던져버림을 당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두아디라 교인들을 유혹하여 행음케 하고, 우상을 숭배케 했던 이세벨은,
물론 이세벨과 마음을 같이하여 회개치 않는 범죄한 교인들에게도
동일한 심판을 행하실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불꽃 같은 눈길을 가지고 계시는 주님 앞에
심판은 공정하고 그리고 맹렬할 것입니다.
▲23절,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리라'
여기 죽임당할 그의 자녀는 누구입니까?
이세벨에게 미혹을 당해 우상숭배와 음행을 하는 자들이죠.
그들에게 극심한 심판의 날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세벨이 받은 심판은 혹독했습니다.
구약시대에 이세벨은, 자기 아들들, 즉 아합왕의 70인의 왕자가
하루아침에 다같이 예후 장군에 의해 죽임 당하는 사건이 있었어요.
그리고 이세벨 자신도, 2층에서 떨어져 죽고, 그 시체는 개들이 먹어버린 심판을 받았죠.
그러니까 이세벨을 따르는 자들에게, 동일한 심판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리라'고 선포하십니다.
▲24절 '두아디라에 남아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에게 지울 것은 없노라'
'두아디라에 남아있는 자들이 있다'는 겁니다.
이세벨를 따르지 않고, 사단의 깊은 것을 용납하지 않는 성도들이 있다는 거죠.
남은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 미혹에 넘어간 게 아니에요. 그 유혹을 버텨낸, 시험을 이겨낸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들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겠다는 거죠.
그 짐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어요. 분명한 것은 '그들은 처벌하지 않겠다. 심판하지 않겠다'
▲25절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이것도 뭔지 정확히 모르지만 문맥상으로 보면
'거짓된 가르침으로부터 우상숭배와 음행을 피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실 때까지 그 태도를 유지해라,
내가 올 때까지 끝까지 충정하라는 거예요.
▲26절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여기에 계속 '이기는 자'가 언급됩니다.
게시록에 반복되어 나오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죠.
'이기는 자'라는 말에는 뭐가 있습니까?
이기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는 얘기예요.
모든 신자가 다 이세벨을 이기는 게 아니에요. 이기는 건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기는 자에게 약속이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두아디라 교회 안에서 현세의 많은 유혹들을 이겨낸 자들이 일부 있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이 유혹이 난무하는 시대 속에서 '이기는 자'로 남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지금도 매 순간 우리는 물질적 유혹을 받고 있습니다.
누가 대박났다 하면, 귀가 번쩍 뜨여요.
물질적 손해를 보아야 하는 순간에, 유혹이 오잖아요.
'신앙을 선택할 것인가, 돈을 선택할 것인가?'
돈과 하나님 사이에서,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은.. 쉽지 않아요.
세상의 논리에 타협하지 않고, 자신을 지켜낸 사람들이, 이기는 자가 되고,
그 이기는 자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다는 거죠.
승리하신 그리스도가 누릴 통치권을, 이기는 자들도 함께 누리는...
이런 특별한 지위를 주신다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통치에 참여하는 특권을 주신다는 거예요.
▲28절을 보겠습니다. '새벽 별을 주리라'
계22:16절에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새벽별'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그리스도! 언제나 그렇습니다.
여러분, 가장 큰 상 prize 은 예수 그리스도예요.
그리스도가 오시면 밤이 끝난다는 거예요.
그리스도가 오시는 순간까지 어둠은 계속되는데,
그리스도가 오시는 순간, 어둠이 걷히고,
새벽별이 뜨면 새벽이, 이제 아침이 밝아온다는 거죠.
모든 어둠이, 모든 혼란이, 잠재워지는 순간이 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의 시대가 얼마나 요란하고 혼란한 시대입니까? 혼돈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지구촌의 재난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류 미래가 어디로 흘러갈지 예측하기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AI 인공지능의 발달이, 인류의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아무도 모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어두운 역사의 끝지점에서
새벽이 올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역사의 마지막 날, 빛으로 가득한 순간, 역사의 새벽 그날은 올 것입니다.
그날을 기대하면서 우리는 소망 가운데 '그에게 새벽별을 주리라'
이 영광스러운 약속을 믿음으로 붙잡고, 이 시대 속에 타협하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9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오늘 주님이 주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는 거죠.
성령이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그 2000년 전에 주셨던 그 말씀을
오늘 성령께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고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거죠.
부패하고 타락한 교회 안에서, 남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세상에 오염되지 않고 자기를 지켜낸 사람들!
그러나 마귀와 이세벨은, 오늘도 성도와 교회들에게 끊임없이 타협하라고,
compromise 하라고, 유혹의 화살을 쏘아보내고 있습니다.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다 그쪽으로 가는데, 나만 그 길을 가지 않을 때는,
내가 왕따가 되는 거잖아요.
계시록에 끊임없이 나오는 음녀 바벨론의 유혹, 이것은 갈수록 거세지는 거죠.
우리는 영적인 긴장도를 끌어올려야 합니다.
느슨해진 기준을 다시 확실하게 붙잡아야 합니다.
기준을 하향 조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을 좀 더 엄격하게 지켜가고자 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주제
어쩌면 우리의 믿음의 길은 매우 외로운 길입니다.
여러분, 진짜 제대로 된 신앙생활 한번 해보세요.
그러면 외롭죠. 세상에 나가서 외로운 건 말할 것도 없어요.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외로울 수도 있어요. 왜요?
교회 안에도 진짜보다 가짜가 더 많을 수도 있기 때문에!
내가 제대로 믿으려고 하면, 사람들이 딴지를 걸어요.
'뭘 그렇게 야단이냐? 대충 믿어라, 너만 예수 믿냐?'
여러분 외로우면... 어쩌면 길을 제대로 가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거예요.
'좁은 길은 사람이 가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분명히 얘기하셨어요.
좁은 길로 가라시는데, 그런데 그 길은 가는 사람이 많이 없다는 거예요.
많은 사람이 가는 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 아니래요.
유혹이 넘쳐나는 세상입니다. 적당한 신앙으로는 버텨내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 원로 목사님이 마지막 숨 넘어가기 직전에 했던 설교가 그거예요.
'적당히 믿지 말고...'
그 산소포화도가 떨어지고, 죽음의 마지막 선상에서도
오늘 남겨진 성도들에게 마지막 하고 싶었던 얘기가 그거예요.
'적당히 살지 말라'는 거예요. '적당히 예수 믿지 말라'는 거예요.
적당한 곳은 회색지대예요. 중립지대예요. 그건 아무것도 아니예요.
영적 긴장감을 가지고 살라는 거죠.
불꽃 같은 눈을 가지신 주님이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주님이 오시는 날이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지금은 역사의 매우 어두운 시기,
믿음의 길을 걸어가기가 쉽지 않은 이 시대에,
마지막 날 주님 앞에서 이기는 자로 서는,
그래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온 땅을 다스리는 그 영광의 권세를 함께 누리는
승리하는 그리스도인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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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이규현 목사 십계명 설교 or 출애굽기 클릭해서 20장을 찾아가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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