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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내지 말라 2

LNCK 2017. 5. 15. 06:53

탐내지 말라 2              출20:17               17.01.29  탐내지 말라 1

 

 

오늘은 십계명 스물아홉 번째,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 탐내지 말라

두 번째 말씀이 되겠습니다.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십계명의 마지막이면서 십계명 전체에 있어 매우 중요한 키가 되는 계명이라 볼 수 있습니다.

 

십계명의 열 번째, 이 탐내지 말라. 이 탐욕의 문제는 큰 주제입니다.

탐욕. 이 탐내다는 원어적인 의미는 강한 욕망을 말합니다.

 

욕망의 문제는 동서고금 없이 가장 뜨거운 감자죠. 나이와 상관 없습니다.

욕망은. 죽을 때 숨질 때까지도 욕망이 있습니다.

학식과도 상관 없고요. 지위와도 상관 없습니다.

 

남녀노소. 이 욕망은 모든 인간으로 살아가는 날들 동안에

뜨거운 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모든 것들 안에는 돈과 권력과 성.

이 문제 안에는 탐욕의 문제가 있습니다.

탐욕이 끼어들면 모든 것이 복잡해집니다.

 

이 탐심은 삶에 파탄을 일으키고 인생을 불행으로 내몰게 하는 근원 중의

근원입니다.

 

열번째 계명은 오늘 우리 시대에 가장 강력히 도전해오는 주제입니다.

물론 아홉번째까지 모든 주제가 그러했지만 이 마지막 열번째 계명.

앞부분은 모두가 행동화한 것이라면 이 마지막은 마음의 문제. 탐심.

내면에 숨겨진 욕망의 문제를 우리 주님이 다루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계명에 매우 진지하게 대해야 하고

이 열번째 계명의 순종 여부에 따라 우리 신앙은 물론이고

삶 전체의 운명이 걸린 말씀일 수 있습니다.

 

오늘 열번째 계명에 대해서 잘 묘사해주는,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말씀의 신약에 누가복음 12장이 있습니다.

 

이 탐욕에 대한 아주 적절한 비유를 주님이 해주셨는데요.

어떤 사람이 자신의 형이, 유산을 몽땅 가지려고 하는 것에서 예수님께 찾아와 선생이여, 우리 형이 몽땅 자기가 다 먹을려고 합니다.’

일종의 분쟁조정을 요청했습니다.

 

주님은 그 사람에게 비유를 알려주시기 전에 먼저 경고로 시작합니다.

15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해요.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에 넉넉함에 있지 아니하니라.’

일종의 경고를 하는 겁니다.

 

탐심은 매우 위험하다. 조심하라.’ 그러면서 우리 주님이 비유를 드십니다.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의 소출이 풍성함에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였습니다.

 

농사가 너무 잘되고 쌓아둘 곳이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넘쳐 흘렀습니다.

오늘 이 본문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게 인칭대명사입니다.

 

내가’, ‘내가’, ‘내가’. 영어 성경을 보면 더 많이 나옵니다.

I, I, Myself. 아주 많이 나와요. I.

 

탐심에 빠진 사람을 아주 잘 묘사하는 거죠.

탐심에 빠진 사람들의 특징은 오직 I, 자기 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안중에 없는 것입니다. 철저히 나 중심이에요.

 

재물을 쌓고 창고를 헐고 창고를 짓고 그 모든 것이 자기를 위하여.

I. My, Mine. Myself.

탐심이 가져다주는 불행은 자기 자신의 세계에 갇혀버린다는 겁니다.

자기라는 성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겁니다.

 

탐심은 자기 자신을 독방에 가두고 격리하는 것입니다.

탐심은 일종의 자기집착이라 볼 수 있습니다.

자기만 바라보기에 이웃이 그 시선에 들어올리 없습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행복을 너무 집착하다보니

다른 사람의 행복에 관심이 없는 거죠.

다른 사람의 행복까지 빼앗아 나의 행복을 추구하게 되는 거죠.

 

탐심을 가진 사람은 계속 쌓습니다. 쌓는 목적은 뭘까요?

내가 내 영혼에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뒀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I, 라는 중심에 탐심이 가는 곳은 결국 쾌락입니다.

육체적 만족. 돈에 대한 탐욕을 가진 사람은 돈을 손에 쥔 순간

그 돈으로 쾌락을 사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적 사람이 탐심으로 얻은 돈은 결국 즐기는 쪽으로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요즘 세상은 더 노골적이죠. 욕망하라. 그렇게 뚜렷한 선정적 문구는 쓰지 않지만

오늘 미디어와 세상의 모든 문화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욕망하라,

마음껏 욕망하고 그 욕망을 즐기고 욕망을 누릴 자유가 있다.’

 

오늘날 세상은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즐기라고 속삭이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선 영혼의 만족이라는 주제는 인기가 전혀 없습니다.

탐심을 처리하지 않으면 자연스레 비영적으로 흐르게 되고, 비도덕적으로 흐르게 됩니다.

 

탐심을 우리는 우상숭배라고 했습니다.

탐심을 추구하는 사람에겐 하나님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 본문, 누가복음 12장을 보면서 이천년 전에 주님께서 드신 비유라기엔

너무 놀랄만큼 현대적입니다.

 

어쩌면 이천년 전에 예수님이

팔레스타인의 소수의 사람들에게 얘기했다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매우 현대적인, 오늘 우리의 문화를 간파하고 해주시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어도 탐욕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이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이천년 전에 살아갔던 사람들의 모습이나 천년 전의 사람이나

근대 사회나 현대 사회나 모두를 통틀어 탐욕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삶은 다 비슷합니다.

 

우리가 오늘 새해를 또 맞습니다만은. 새해가 들면 우리의 삶이 변화될 것인가? 아니에요.

우리의 탐욕. 탐심을 해결하기 전엔 우리의 삶은 여전히 어제와 같습니다.

 

오늘 여기 보십시오. 모으고 쌓고 짓고 헐고 더 크게 짓고 먹고 마시고 놀고.

이천년 전에 우리 주님이 하신 말씀. 철저히 감각적이고 육체적인 것에 넘쳐나요.

 

결국 탐욕은 쾌락을 부르는 것입니다. 이 탐욕의 끝은 어디인가, 끝이 없어요.

나 중심의 삶의 특징은 또 하나 있습니다.

 

. 나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매우 중요한 하나의 정신은 더, More.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좀 더 좀 더이 좀 더가 탐심의 주체요, 형태입니다.

 

탐심은 멈출 줄 모릅니다. 계속 목이 마릅니다.

목이 말라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아요. 그러나 또 다시 목이 마릅니다.

 

가장 치명적인 인류의 질병은 무엇입니까, 암이 아니에요.

만족하지 못하는 병. 탐욕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끌려가는 자기도 지겨워 죽을 것 같지만 멈출줄 모르는 거죠.

어디까지 가야 할 지 알 수 없습니다. 탐욕의 끝은 아무도 몰라요.

 

어느 정도에서 충분하다고 할 지 아무도 몰라요. 가끔 보면 그러죠.

3자 입장에서 어떤 사람을 보면 저 사람 저 정도면 만족해야 해.’

그러나 당사자에게 물어보면 NO.

 

인간 자신 안의 탐심은 자기 말을 듣지 않아요.

적당한 수준에서 끝나자가 없습니다.

 

마음 속에 일어난 탐욕을 떨쳐내기 어려운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모든 것이 넘쳐나지만 갈증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돈을 추구하는 사람이 돈으로 만족이 되나요? 안됩니다.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이 권력으로 만족이 돼요? 아니에요.

명예를 아무리 가져도 그 명예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결론은 만족이란 물질의 많고 적음, 이 소유와 상관 없다는 것입니다.

소유함으로 만족할 수 있다면 부자는 다 행복해야죠. 자살하지 않아야죠.

우울증에 걸리지 않아야죠. 그러나 아니잖아요. 더 많아요.

 

삶이 힘든 이유는 탐욕 때문입니다.

자신의 모든 부유가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을 안고 있어요.

 

아무리 쌓고 모아도 불안한 겁니다. 그것이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불안감.

이 탐욕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언제까지요, 죽을 때까지.

 

우리는 치열하게 싸워야 할 주제입니다. 탐심을 만만히 여기면 안됩니다.

더럽고 때론 치사하고 때론 추하고 냄새가 나지만. 과감하게 떨쳐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제가 잘 못보는데 예전에는 유원지에 가면 꼭 있었는데 두더지 게임이 있습니다.

망치를 가지고 뿅 올라오면 탁 때리면 끝나야 하는데 다른데서 또 올라오고.

아 정신없이 두들기는 겁니다, 나중엔.

 

꼭 우리 안에 있는 탐욕을 잘 묘사하는 거죠. 부흥회하고 또 부흥회하고,

탐욕이 죽은 것 같았는데 어느날 뿅하고 올라옵니다.

 

탐욕의 뿌리는 생각보다 깊어요. 우리가 신앙생활 하루 이틀 한 게 아닙니다.

수없이 말씀 읽고 묵상하고 은혜를 받고 결심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끄러운 부분에 아주 별 것 아닌 것 때문에 넘어지고 실패하는 이유는

이 탐욕의 뿌리가 매우 깊은 거예요. 탐욕은 잡초와 같습니다.

 

이 식물, 아주 귀한 것들은 가꾸면 조금이라도 신경 안 쓰면 죽어버리는데.

이 독초들 말이에요. 이 잡초들은 물을 안 줘도 돼요. 짓이겨도 살아납니다.

 

거름도 필요없습니다. 심지어는 제초제를 뿌렸는데도 다 안 죽어요.

제초제도 깊이 뿌려서 땅을 다 뒤집어놔도 어디서 돋아요.

 

우리 안에 있는 탐심이 그런 것입니다. 탐심을 그대로 두는 한

세상과 마귀는 우리를 노략질하고 넘어뜨립니다.

우리 안의 탐욕이 똬리를 틀고 우리를 조종하는 거예요.

 

결국 탐욕은 인생을 불행과 비극으로 몰고 갑니다. 탐욕을 추구하면

그 끝은 만족이 아닙니다. 비극입니다.

 

6세기의 그레고리우스는 탐욕은 일곱 딸을 낳는다이런 표현을 썼습니다.

이 탐욕이 일곱 딸을 낳는다.

 

첫번째 딸의 이름은 배신입니다.

두번째 딸은 사기에요.

세번째 딸은 거짓.

네번째 달은 위증.

다섯번째 딸은 불안.

여섯번째 딸은 폭력.

일곱번째 딸은 냉담.

 

탐심에 빠진 사람은 그 탐심 때문에 회사의 기밀을 팔아넘기고. 배신이죠.

사기를 치고. 폭력을 행사하고. 심하면 사람을 죽이고.

더 심하면 가족도 죽이고. 탐심은 각종 악을 만들어내는 죄입니다.

 

지금도 우리 삶의 모든 죄악의 원인은 탐욕입니다. 탐욕은 치명적인 위력을 드러내죠.

하루 아침에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아닙니다.

탐심은 순간순간 머리를 들고 일평생 우리의 삶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후 승리를 거두는 날까지 영적인 다림질을 멈추어서는 안돼요.

우리가 죄의 유혹 앞에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를 인정해야 합니다.

 

나는 이길 수 있다는 치기어린 호언장담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탐심을 부추기는 그 모든 요소로부터. 우리 자신을 경비하여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서 53절에 이런 표현을 씁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이름조차도 부르지 마라.’

여러분, 이런 것들의 치명적인 영향력을 말하는 겁니다.

치명적 위력을 말하는 겁니다.

바울은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입에 담지도 말라는 거예요.

언급조차 말라는 겁니다.

 

탐심을 한번 받아들이면 마치 폭군과 같아요. 매우 거칠게 밀고 들어옵니다.

가볍게 생각하고 내버려두면 우리가 끌려다니기 때문에

초기에 대응하라는 것입니다.

 

부자에 대해서 어떤 판정이 일어납니까. 20절에 보면 하나님이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내 영혼을 도로 찾을지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오늘밤이라는 건 여러분 인생이 무너지려 하면 한순간입니다.

쌓을 때는 오래 걸립니다. 근데 무너지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아요. 한순간입니다.

허망한 것이죠.

 

우리 주변에도 너무 많이 보는 그림입니다. 오늘밤에. 인생의 유한성을 이야기합니다.

무서울 정도로 탐욕에 차서 살았지만 그 탐욕이 채워지기 전에 죽습니다.

 

부자의 착각이 무엇입니까. 인생이 짧다는 걸 몰랐다는 겁니다.

자신의 인생을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처럼 착각한 것이죠.

 

네 영혼을 도로 찾을지니

영혼을 찾는다는 것은 영혼의 주인이 따로 있다는 얘깁니다.

영혼의 주인은 자기가 아니에요.

모든 걸 다 가지고 있어도 영혼의 주인은 하나님이세요.

 

부자가 놓친 것은 자신의 영혼을 간과한 것입니다.

영혼을 도로 찾으면 끝이에요.

 

여러분, 인생은 생각보다 짧습니다. 송구영신 예배 여러분, 엊그제 드리셨죠?

한 달이 지났어요. 믿어지세요?

 

우리 원로 목사님과 제가 식사를 자주하는데 종종 그러세요.

인생이 너무 빨라.’ 너무 짧아요.

인생이 짧다면 그 짧다는 걸 아는 사람은, 선택이 중요하다는 걸 압니다.

무엇이 더 귀중한가. 무엇이 더 가치 있는가를 알고 바른 선택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 천년만년 늘어져서 다 하고 싶은대로 하는 인생이 아니에요.

오늘밤이라도 끝날 수 있는 게 우리 인생입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바른 선택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 가장 가치 있는 걸 선택하는 일.

 

그렇지 않으면 이 부자처럼 어리석은 자여!’ 바보 같은 삶을 산다는 겁니다.

 

우리가 인생의 날수를 계산하며 살아야 합니다. 탐욕에 빠져 살다보면

한순간에 인생이 끝나는 거죠.

 

탐심은 눈이 멀게 하고 눈에 보이는 것만 존재하는 줄 알게 합니다.

영혼의 눈을 감겨버리게 합니다.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는 거죠. 자기가 죽는 줄도 모르고요.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거둬들이시면

그것으로 모든 상황은 끝입니다.

우리의 생명줄은 하나님이 쥐고 계신다는 것을 한시도 잊어선 안돼요.

 

그러므로 돈을 잃어버려도 영혼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탐심으로 달려가는 사람은 자기 영혼의 상태를 인지하지 못해요.

그 순간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죠.

 

영혼을 돌보지 않고 탐욕에 내맡긴 삶은 결국 비운으로 끝납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내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 것이 되겠느냐.’

 

갑자기 찾아온 죽음은 그동안 악착같이 모아온 모든 것들의 주인이 바뀌는 순간입니다.

얼마나 기가 막히는 순간입니까. 이 탐심의 문제를 어떻게 풀까요.

오늘과 다음 주일을 계속해서 살필 것입니다.

 

탐심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 . 마지막 계명의 심,

이 마음에 관심을 기울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항상 마음을 살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전쟁 중인데 가장 최고의 격전지는 휴전선 근처가 아니고

우리의 마음이에요.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비유의 핵심을 보면 형제간의 재산의 분쟁의 문제로 봤지만

예수님은 탐심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형제의 갈등은 탐심이 원인입니다.

 

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유산을 둘러싼 형제가족 간의 분쟁이 급속도로 많아지고 있습니다.

 

오래됐어요. 제가 한국에 있을 때입니다.

장례를 치르고 난 다음에 형제들이 들어온 부조 가지고 싸우는 것도 봤습니다.

관 안에서 벌떡 일어날 일이에요. 기가 막힌 일인 거죠.

 

가족 간의 갈등과 불행은 탐심이 주 원인입니다.

탐심을 다루려면 마음을 점검해야 합니다. 근데 여러분, 마음은 숨어있어요.

관찰하기 쉽지 않아요.

 

해운대 바다에 들어가면 깊은 바다는 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 길이 없어요.

동서고금의 책들을 보면 그런 물속보다 더 알 길이 없는 게

사람의 마음이에요.

 

깊은 곳을 들여다보려고 하면 탐조등을 켜야 합니다.

우리 영혼의 탐조등을 켜야 합니다. 켜보셨습니까.

내 마음의 깊숙한 곳에 무엇이 있는지. 마음에 무엇이 일어나는지 예리하게 살피는 것.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마음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마음을 보지 않으면 신앙이 아닙니다. 자신이 오랫동안 돌보지 않은 마음은

이미 내 마음이 아니에요. 가득찬 탐욕은 모든 것을 추동하는 주인 노릇을 하고요.

내가 주인이 아니에요. 탐심이 주인이에요. 탐심이 운전대를 잡고 있는 겁니다.

 

그 탐심이 내 인생을 끌고 가는 겁니다. 신앙이란 내면세계를 들여다보며

가꾸는 작업입니다. 탐심. 골로새서도 탐심이 곧 우상숭배다.

우리 신앙의 행위에요. 살인이 뭡니까. 미워하는 게 살인이다.

음욕을 품는 것이 간음이다라고 얘기했던 이 모든 신약의 관점입니다.

 

이 모든 신약의 관점은 외부적 행위가 아니라 마음을 보는 겁니다.

신앙이 자란다는 것은 마음을 가꾸는 것입니다.

신앙의 변화는 마음의 변화에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로마서 121절에 마음의 변화를 받아. 마음에 있는 것이

행동으로 옮겨지면 마음의 상태가 곧 인생입니다.

 

탐욕으로 가득 차 있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탐심을 그대로 두고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탐욕은 주변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에 전체 영향을 미치는 핵심 요소에요.

잠언 423절의 말씀.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 내 마음을 지켜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나느니라.

 

제가 참 좋아하는 애송 구절입니다. 여러분 이걸 붙들어야 해요.

모든 지킬 만한. 돈이 아닙니다. 재산이 아닙니다. 지킬 만한 것.

마음을 지켜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나옵니다.

죽고 사는 게 여기서 결정됩니다.

 

잠언 2528절에 이런 말씀이 나와요. 자기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르게 표현하면 자기 마음을 다루지 않는 사람은 성벽이 없는 것과 같다는 거예요.

 

요즘으로 치면 집을 사는 데 벽이 하나도 없어요. 도둑이 들어왔다가 나갔다 하는 겁니다.

벽이 없는 집에서 산다 생각해보세요. 성벽이 없고 성읍이 무너졌습니다.

그 인생은 어떻습니까. 주인이 없는 겁니다.

 

영성 훈련은 마음을 다루는 것입니다. 변화는 마음의 변화에요.

복음이 능력이 있는 것은 제도나 시스템 이전에 마음의 변화를 이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음이 삶을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살펴야 해요.

영성 훈련이란 우리의 마음이 어떤 것에 빼앗긴 것을 하나님께로 되돌리는 작업입니다.

 

영적인 일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자기 마음의 작은 탐심을 금방 알아차려요.

마음을 돌보는 사람은 전에 없던 생각이 끼어들면 당장 알아차려요.

 

그리고 그것을 다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다 보면, 자꾸 마음 안에 뭔가 밀고 들어와는 어떤 탐욕이 감지되잖아요.

이게 왜 불편한 이게 나를 힘들게 하지? 이 근원이 어디서 온 거지?’

 

마치 신발에 작은 돌멩이라도 들어가면 발을 불편하게 하는 것처럼.

우리의 심정에 작은 무엇이 끼어들면 그 작은 탐욕이 나를 불편하게 하면

그것을 다뤄야죠.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 탐심이 잡초와 같기 때문에 다루지 않으면 밭을 몽땅 다 망가뜨립니다.

작은 것에서 출발하여 내 마음을 인생을 완전히 황폐화시키기 때문에

잡초를 제거해야 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런 표현을 쓰죠.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여러분 이런 선지자의 표현을 빈다면 참 우리의 마음을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게 우리 마음이다...

 

근데 여러분 쓰레기통에서 부패하고 썩은 것을 보면서

, 내 마음이 이것보다 더 심하다고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야기하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있는 이 마음은 그런 마음은 아주 부패하기가 쉽고

아주 독초가 자랄 기가 막힌 토양이란 겁니다.

잠시라도 방심해버리면 금방 잡초 같이 되는 것처럼

내 영혼이 육체의 소욕이 번식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그 탐심을 잘못 다루면 내 인생을 다 불태워버립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교회 안에서. 우리 사람의 눈을 의식하고 행동하기보다는

마음을 다뤄야 합니다.

자칫하면 가면을 쓰고 외적인 행동만 근사하게 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멋있는 말을 하지만 속으로는 끓어오르는 탐심에 힘들어하는 겁니다.

 

우리가 다뤄야 하는 것은 탐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적 행동이 아니라

마음과 중심을 보십니다.

가룟 유다는 물리적으로 아주 가까이 주님과 있었던 제자였어요.

돈궤를 갖고 있으니 가장 가까이 있던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배신자에요. 믿어지세요?

 

인간이 그런 겁니다. 외적인 행동과 숨겨진 마음이 다를 때가 있다는 겁니다.

황금은 액수가 아니라 마음입니다. 돈을 얼마나 내었느냐, 봉사를 얼마나 했느냐,

헌신을 얼마나 했느냐, 중요하지 않아요. 마음이에요.

외적인 행위가 아니라 탐심으로 가득 찬 마음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그래서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종교적 열심은 탁월했지만

그들의 속은 탐욕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겁니다.

 

복음서의 주님은 끊임없이 마음의 문제를 지적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마라.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마라.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너의 마음에 탐욕이 가득하다.

탐심이 가득 찬 채로 종교적 열심을 얼마든지 행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끊임없이 너의 마음을 살펴라, 너의 마음을 살펴라, Heart, Heart.

기도를 왜 하고 금식을 왜 하느냐. 그 속의 동기를 보아라.

네 안에 숨은 생각이 무엇이냐.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모든 탐심을 물리치고. 끊임없이 일어나는 마음의 탐욕을 그대로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조그만 탐심이 나를 우습게 만들고 비참하게 만들고 불행하게 만듭니다.

성령의 사람들은 탐심을 그대로 두지 않습니다. 불편해서 살 수가 없어요.

탐욕은 영원의 잡초기 때문에 그 독초를 두고 살 수 없습니다.

마음의 정원을 가꿔야 합니다.

 

우리 모든 성도는 영혼의 정원사들이 되어야 합니다.

탐심의 그 조그만 싹이라도 나면 잘라버리고

날마다 우리의 영혼에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을 부지런히 심어야 하는 것입니다.

 

돈을 세지 말고 말씀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판정이 무엇입니까.

21절에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에 대하여 부유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인간적으로 보면 재물을 쌓아두었으니 부자에요.

그런데 주님의 판정은 너가 재물을 쌓아두었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부유하지 못하구나.’

아무리 재산이 많든, 하나님에 대해서 부유하지 못하다면 불행하다는 얘깁니다.

 

진짜 부유함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부유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것입니다.

영적인 부유함을 말합니다. 영혼의 부유함입니다. 내적 충만함입니다.

 

아무리 모든 것을 다 가져도 영적 부유함이 없다면 거지라는 겁니다.

영적으로 부유하다는 게 도대체 어떤 것입니까.

 

마태복음 619절과 20절의 말씀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마라.

거기는 좀과 동녹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녹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너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한 번은 연세 든 권사님이 평생 아꼈던 패물 상자가 있는데

어느 날 도둑이 와서 그걸 가져간 겁니다. 어느 날 저를 만나서

목사님, 도둑놈이 제 패물을 다 가져갔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랬어요. 속으로.

그냥 말했으면 상처 받을 거 아니에요. 속으로.

땅에 쌓아두면 좀과 동녹이 해하고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한다는 겁니다.

 

이 도둑질이 무슨 도둑놈만 하는 게 아니에요. 돈이 어디로 새나가든지 새나가는 거.

병원으로 가든지 변호사에게 가든지 사기로 가든지 무슨 이상하게 별별 일이 다 일어납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부유하다는 건 뭘까요. 하늘에 쌓는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요.

디모데전서 618절과 19절이 그 말씀에 답합니다.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주기를 추구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틀을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저는 올 한 해 여러분이 이렇게 사시길 바랍니다.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주기를 좋아하고.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많은 걸 주셨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도 이걸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많이 주셨어요. 지금도 많이들 나누고 있지만 끊임없이 나눠야 합니다.

받은 것을 나누지 않으면 탐심이 우리를 지배해요. 탐심은 무섭다고 그랬잖아요.

 

한번에 다룰 수 없다는 거. 나누는 것은 연약한 자들에게 선을 베풀고 나누는 행위는

결코 그 사람을 위해서기 이전에 자기 자신을 위해서에요.

 

나눌 때 내 영혼이 살아요. 탐심을 이길 수 있어야,

나눌 때만 탐심을 이길 수 있습니다.

 

나누지 않으면 탐심이 나를 사로잡아요. 우리는 생명을 걸고 나누어야 합니다.

내 영혼이 살기 위하여. 아멘. 이게 여러분의 영혼에 깊이 새겨지길 축원합니다.

이게 우리를 살리는 겁니다.

우리 교회도 살고 저는 이 민족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이 민족이 나누어주는 국가가 되어야 합니다.

예전엔 다 얻어먹던 백성들이에요. 그래서 우린 공짜를 좋아하고.

공짜라면 양잿물도 좋아하고.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깁미 깁미 츄잉껌, 했어요.

 

이제는 나눠야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 나라에 보물을 쌓는 것입니다.

하늘에 쌓아둔 것은 아무도 뺏지 못합니다. 그것만 남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의 여행을 하는 사람들, 중요한 숙제는

우리 영혼이 무엇으로 만족할 것인가 하는 거죠.

그러나 세상에 어떤 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어요.

 

우리는 요한복음 4장에 한 여인을 만납니다. 사마리아 여인. 정오의 시간,

팔레스타인의 뜨거운 태양을 맞서 목마름을 채우기 위해서 물동이를 들고

야곱의 우물을 찾았습니다.

그가 목이 말라 물동이를 들고 야곱의 우물을 찾았지만

여인이 진짜 목마른 것은 영혼의 목마름이었어요.

 

그 정오의 시간에 다가왔던 유대인 남자와 대화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대화가 깊어지면서 그분이 메시아라는 걸 알게 되죠.

그분을 만나며 대화 속에 이미 그의 영혼의 목마름이 채워집니다.

그 어떤 남자도 채워주지 못했던 그 갈망, 그 갈망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채워지죠.

 

그분은 누구입니까.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가 되나니.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니라. 그분을 만난 거죠.

결국 물동이를 버렸고 동네로 뛰어들어가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 메시아를 만났다.’

 

여러분, 주님을 온전히 만나면 그때 일평생 우리를 가슴앓이하게 하는

이 탐심, 탐욕. 이 가슴앓이가 그때 치유가 돼요.

주님을 온전히 만나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바울 사도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빌립보서를 보면 명확해요.

그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가난한 여행 나그네 전도자였어요. 독신이었어요.

깊은 육체에 찌르는 가시를 안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모든 것이 있다고 빌립보서 마지막을 마감합니다.

내겐 모든 것이 있다. 내가 가난한 자 같으나 모든 사람을 부유하게 하는 자다.’

 

그는 그리스도를 온전히 만났기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

허접스럽게 하면 이 탐욕을 이길 길이 없습니다.

끝까지 승리하는 힘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분만이 우리를 만족하게 합니다. 그분만이 우리 안에 안식을 줍니다.

그분만이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주십니다. 오늘 2017, 어떤 것이 아니라

그분에게 초점을 맞추시길 바랍니다. 탐심은 어떤 것에 초점을 맞춰요.

 

그러나 영성은 그분에게만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면 승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 순간 여러분은 자유하게 될 것입니다. 그 순간 여러분은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그 순간 여러분은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자처럼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 승리가 여러분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을 붙잡고

2017년 달려가며 승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게 하시고 우리 영혼이 끼어드는

잡다한 탐심을 분별해내는 영성을 허락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으로 성령의 도식으로 제거하고 다루어

탐심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시고

주님이 주인되시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타자 J.H.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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