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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가치를 지키라는 계명

LNCK 2017. 5. 13. 11:31

가정의 가치를 지키라는 계명                    출20:14         16.10.16.스크랩

 

 

어떤 분들은 이 메시지를 들으면서 약간 불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계명을 다루는 게 우리의 죄를 고발하는 게 목적이 아니죠.

 

어떤 형태로든 우리 연약함이 비춰질 때 십자가를 붙잡고 나아가면

주의 긍휼과 자비가 있고 회복할 수 있는 은혜가 언제나 있기에

여러분들이 들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칠계명, 간음하지 말라는 개인의 문제. 특별히 이성적 문제는

은밀한 영역이기에 공론화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 강단에서도 이 성적인 문제를 다룬다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고

또 다루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이 사실 많이 있습니다.

 

성의 문제는 실제적으로 사실 심각한 문제인데 교회에서 잘 언급하지 않죠.

우리의 문화에 성의 문제는 도배되어 있습니다. 몸 둘 곳이 없습니다.

성적 범람이 도를 넘었습니다, 우리 사회는. 한국 드라마. 불륜이 주제입니다.

불륜이 없는 드라마 있습니까? 거의 없습니다. 막장으로 가는 것도 많고요.

성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자극이 넘쳐나죠.

 

우리 청소년들 정말 힘들어요, 요즘. 예전에는 인터넷이 없었거든요.

핸드폰도 없었고. 핸드폰 하나에 세상의 온갖 잡다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외도와 일탈이 만연한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한국은 어느 나라보다도 성적으로 개방된 나라입니다.

비교적 많은 나라를 경험해본 적 있습니다. 서구의 문명을 경험해봤습니다만

이렇지는 않아요.

 

요즘 시골 곳곳에도 보면 곳곳에 러브호텔, 이게 뭔지 모르겠습니다.

성을 사고 파는 문화, 비즈니스 안에도 성은 반드시 들어가 있습니다.

성접대라는 단어.

 

현대인들에게 성은 거대한 우상입니다.

우상. 하나의 종교에요.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에 비해서

조금도 밀리지 않는 부도덕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오늘 십계명은 우리에게 매우 절실한 명령입니다.

성은 본래 거룩한 것이죠. 하나님이 주신 겁니다.

너무 놀라운 선물이고 축복입니다. 고귀한 것이죠.

가치 있는 것이고. 너무도 아름다운 것입니다. 복된 것입니다.

 

이것을 죄가 망가뜨려 놓은 거죠. 성은 죄악시하지 않아요.

성경에 굉장히 구체적으로 솔직하게, 침묵하지 않고 상세하게 나와있습니다.

 

문제는 죄가 끼어들면서 오염되고 말았다는 거죠. 성을 왜곡시킨 게 죄입니다.

성적 자유, 성의 해방, 개인의 기호, 취향. 어디까지 갑니까?

동성애까지 갔습니다.

 

성을 오직 자신의 육체의 만족과 정욕을 해결하는 수단으로 전락시킨 것.

이게 죄입니다. 이 아름다운 성을 인간은 왜곡시킴으로써

부끄럽고 쑥스러운 것으로 변질시키고 말았습니다.

 

기독교에서 몸은 매우 중요합니다. 근데 두 가지 극단을 조심해야 합니다.

몸을 너무 부정하게 봄으로 세상의 즐거움을 부인하는 금욕주의, 이것이 있죠.

 

둘째는 몸으로 과도하게 즐거움을 추구할 때 방종에 이르는 쾌락주의.

이 두 극단을 조심해야 합니다.

 

몸을 너무 부정하게 여겨도 안 되고

몸에 너무 지나치게 몰두하는 것도 위험합니다.

 

간음은 다른 죄와 달리 특이한 면이 있습니다.

모든 죄악은 몸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간음죄는 몸 안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어떤 것보다도 경계해야 할 죄라고 성경은 말하고

 

종교개혁자인 존 칼뱅도 이 부분에 대해 언급한 적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615절부터 20절을 찬찬히 볼 필요가 있어요.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 알지 못하느냐.

네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의 죄를 범하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 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한 영의 결합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성령이 거하시는 전으로써의 육체를 의미하는 거죠.

육체도 거룩하게 되었다는 것. 우리의 영혼만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담는 몸도 고결하게 되었습니다.

 

몸과 영혼은 분리되어 있지 않죠. 몸과 영이 분리되면 저는 죽을 것이죠.

몸과 영혼의 이 깊은 연관성, 그 몸이 우리의 몸이 아니고 그리스도께

연결되어진 몸으로. 이 몸으로 음행을 범하게 될 때

그 음행을 범하는 자와 한 몸을 이룬다는 게 가능하냐, 그럴 수 없다는 거죠.

 

그러므로 몸의 성결을 잃으면 우리의 몸이 거룩함을 잃어버리고

거룩함을 잃으면 영혼도 잃습니다.

우리의 몸과 영혼은 그냥 세상의 더러움에 마귀에게 넘겨주는 게 되는 거죠.

 

삼손이 나실인 이라고 하는 그 규칙을 어기고 여자와 놀아난 동안에

그의 모든 능력이 사라져버립니다. 그리고 비참한 지경에 이르게 되죠.

성적 탈선은 몸의 문제로 끝나는 게 아니라

영혼과 삶의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는 치명적 결함을 갖게 합니다.

 

이 칠계명을 주신 목적이 뭘까요. 그 목적은 가정을 보호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간음을 금지한 것은 단순히 성적 순결을 강조한 게 아니라

신성한 결혼을 지키기 위한 명령입니다.

 

간음죄가 심각한 것은 가정을 깨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핵심은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경계선은 성이라는 것은

부부의 관계 안에서만 허용되는 것입니다.

 

간음의 죄가 끼어드는 순간 부부의 관계는 깨져버리고 맙니다.

가정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가, 성경은 창세기부터 우리에게 쭉,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제도, 그 가정을 통하여 모든 것을 담는 것입니다.

 

축복도 가정을 통하여 담는 것이고 행복도 가정을 통하여 담는 것이고

모든 게, 가정을 통하여 담깁니다.

 

가정이라는 그릇이 깨져버리면 담을 수 있는 게 없어져요.

가정이 흔들리면 모든 게 흔들립니다. 가정이 흔들리면 근간이 흔들립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간음에 대해 율법이 어떻게 다룹니까.

레기위 2010절을 보면 이런 말씀,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 지니라.’

 

오늘 아침 좀 무시무시한 얘기를 해도 여러분 용서하시길 바랍니다.

신명기 2222, 어떤 남자가 유부녀와 동침한 것이 드러나거든

그 동침한 남자와 여자를 둘 다 죽여 악을 제거할 지니라.

 

여러분 구약에서 간음을 어떻게 규정합니까. 남자가 미혼이거나 결혼했거나

상관 없어요. 남편이 있는 여자와 관계를 맺으면 그것이 간음입니다.

마찬가지로 남편이 있는 여자가 아내가 있는 남자와 관계를 맺는 것도 간음입니다.

 

구약에서는 여인이 결혼을 했는지 안 했는지가 중요해요.

그가 누구에게 속하지 않은 상태라면 결혼하지 않은 상태라면

그때는 칠계명을 직접 적용하지 않았어요. 대신 배상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이 신약과는 좀 차이가 있습니다.

구약 시대는 아직 타락한 시대 속에 법이 완결되지 않은 미약한 면이 있었기 때문에 그랬죠.

문제는 간음죄에 대한 처벌은 강력한 겁니다. 죽이라는 거.

 

왜 이렇게 사람을 죽일만큼 죄를 지었느냐는 거예요. 어떤 죄가요?

가정을 깨트리는 죄를 죽일만큼 강한 죄로 본 겁니다.

 

그토록 가정이 귀중하다는 겁니다. 간음은 가정을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가정만 파괴하는 게 아니고 그 당시로 보면 부족 사회 전체를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부족으로 살아가는 그 시대 속에 남의 아내를 뺏고

남편을 뺏는 그 일이 좁은 바운더리 안에서 일어나면 그 부족 자체가 망합니다.

 

그러니까 죽이라, 이거죠. 간음죄는 죽여야 할만큼

그 죄로 인하여 그 사회 전체가 망하게 되는 일로 본 거죠.

 

가정이라는 제도는 아무렇게나 생겨난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주신 제도입니다.

 

가정이 깨어지면 후유증이 큽니다. 간음죄는 한 가정은 물론이며

사회 전체 근간을 흔드는 중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칠계명을 통하여 성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 가정 안에서

남자와 여자라는 합법적 부부의 관계 안에서만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외 관계 밖에서는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분명한 기준입니다.

부부라는 관계를 벗어나 성을 즐기는 것은 간음이고 음행이라고 보는 겁니다.

 

결혼은 남녀가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간음은 한 몸을 깨트려버리는 행위라고 보는 거죠.

간음의 죄는 생각보다 치명적입니다.

남의 가정이 귀중하듯이 다른 사람의 가정도 지켜주어야 한다는 거죠.

 

간음의 죄는 한 사람의 문제로 끝나지 않습니다.

가장 먼저 간음죄를 지으면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고.

그 다음 자신의 배우자에게 죄를 짓는 것이죠.

 

자신의 불륜 상대와 그 배우자에게까지 죄를 범하는 것이 됩니다.

만약 남자가 다른 여자와 죄를 지을 경우에

그 여자의 남편과 또한 자신의 아내에게 죄를 짓는 겁니다.

간음죄는 많은 관계를 깨트리고 실망시키는 일입니다.

 

성도 여러분, 가정은 순결함으로 보전됩니다.

순결이 유지되지 않으면 부부관계는 깨어집니다.

 

결혼식에서 매우 중요한 것은 어느 대목인가 하면 순결 서약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한 남자의 아내로서 한 아내의 남편으로서 위치를 지키는데,

정절을 지킬 것에 대한 서약. 그것이 하나님과 그리고 사람들 증인들 앞에서 하는 겁니다.

 

결혼식은 그냥 둘이서 좋다고 하는 게 아니고 증인들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증인들 앞에서. 가정이라는 관계 안에서만

참된 만족과 행복을 보전하셨습니다. 그 사용설명서를 지켜야 합니다.

 

지침을 무시하면 안됩니다. 가장 중요한 지침은 부부라는 가정 안에서.

이게 하나님이 결혼에 대해 주신 매우 중요한 지침입니다.

 

이 지침이 불편하게 여겨질지 모르지만 우리를 위하여 주셨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고

만약 이것을 깨트리면 혹독한 대가를 지불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간음은 법적인 문제로만 취급하면 안됩니다.

사람들은 교묘한 법 적용을 하며 자신의 성적인 범죄를 합리화하려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법 기준을 넘어선 마음의 태도에서부터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십계명은 사람의 자유로운 욕망을 너무 억제하는 게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인간이 성적 욕망에 사로잡혀 살아가지 않도록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기 위해서

이 칠계명을 주신 것이지 우리의 욕망을 억압하기 위하여 주신 게 아니라는 겁니다.

 

인간이 성적 욕망에 사로잡혀 살아갈수록 노예적 삶을 살게 됩니다.

갈수록 매이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 속으면 안됩니다.

행복과 만족을 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정반대라는 겁니다.

 

여러분, 오늘 세상에 타락이 극에 달해 있습니다. 기준이 너무 느슨해졌어요.

예수님께서는 간음에 대해 보시는 관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칠계명을 어떻게 재해석해주셨습니까. 마태복음 27, 28절을 보십시오.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이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이전 개역판은 이걸 다르게,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 라고 얘기했어요.

지금 개역개정에는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이 이미.

이게 중요한 것은 주님이 몸의 문제뿐만 아니라

마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겁니다.

 

음욕을 품고 있다면 이미 간음한 것이 됩니다.

음욕이 일어나게 하는 경로가 어디죠. 보는 것입니다. 통로는 눈이에요.

 

오늘 성경이 우리의 욕망이 일어나게 하는 세 가지 중 하나가

안목의 정욕 아닙니까. 눈은 아주 중요합니다.

 

현대문화는 어떻습니까. 화려한 눈요기감이 얼마나 많습니까.

근데 이 보는 것은 강력한 영향을 끼칩니다.

 

보는 것은 자유지만, 계속 보면 자유를 잃어버립니다.

사전에 차단해야 합니다. 계속 본다는 건 뭡니까. 의도성을 가진 거예요.

의지가 들어간 겁니다. 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내면에 숨겨진 죄성에 불을 당기게 됩니다.

 

우리 내면은 악에 쉽게 오염됩니다. 죄성을 가진 인간이기에

작은 것 안에도 그것을 보는 동안에 거기에 끌려가는 힘이 있는 거죠.

 

그래서 자신을 믿으면 안됩니다.

훈련되지 않은 마음일수록 죄에 오염되는 속도는 매우 빠릅니다.

 

자기의 배우자가 아닌 이성을 계속 바라본다면

그것은 이미 음욕을 품은 것이다, 주님이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물론 그것은 실정법을 어긴 것이 아니고 행동하지 않아서

세상에서 중죄할 수 없지만 하나님 앞에선 명백히 죄가 된다는 겁니다.

 

마음에 음욕을 품는다. 여자가 오는 데 봤어요.

지나갔는 데도 또 보면 이게 죄라는 겁니다.

그냥 눈에 띄는 건 어쩔 수 없어요.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거죠.

내가 보려고 해서 본 것이 아니기에 책임은 아니에요.

 

그러나 또 다시 보는 건 자신의 의지가 담겨있다는 거죠.

어떤 대상을 지속적으로 보는 것은 이미 욕망에 사로잡힌 상태입니다.

 

다윗의 죄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밧세바와의 불륜은 왕궁 옥상에서

한 여인의 목욕 장면을 보고. 그렇게 끝난 게 아니죠. 또 보고. 이게 문제에요.

 

다윗 왕가의 추락, 그 끝없는 추락의 첫째는 생각보다 작은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보는 것에 의해서. 와우. 그러면서 계속 탐닉한 거죠.

 

요즘은 이목을 집중시키는 일들이 많이 있어요. 소위 비쥬얼의 시대라 그래요.

시청각적인 게 발달했어요. 인터넷 영상 문화가 매우 도발적이에요.

 

그래서 주님은 아주 아까 읽었던 526, 27, 28

그 다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29. 내 오른쪽 눈이 너로 실족하건 빼버리라.

자꾸 눈으로 죄를 짓고 실족하면 그 눈을 빼버리라.

그 눈을 잃고 천국 가는 게 낫지, 그 눈으로 계속 죄를 짓는 것보다 낫지 않느냐.

 

이 말씀을 실제로 문자적으로 지킨 사람이 있어요. 진짜 눈을 뺀 사람도 있어요.

오리겐이라고 하는 교부 같은 사람은 거세도 했어요.

끊임없이 죄를 짓게 만드는 요인 자체를 제거하기 위해서 문자적으로.

오늘도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해버리나면

오늘 여기 눈 남아서 돌아갈 사람이 어딨겠습니까.

 

이 말씀을 주님이 하신 이유는 진짜 눈을 빼라는 게 아니죠.

그런만큼 마음을 강하게 잡고 강한 결단을 하라는 겁니다.

쉬운 게 아니라는 겁니다.

눈을 빼버리라 할 정도로. 욕망의 근원은 아주 강력한 결단이 아니라면

그 눈을 통하여 밀고 들어오는 세상의 수없는 음란한 인터넷 시대의

우리의 마음을 뺏아가는. 죄를 짓게 만드는.

 

보세요, 뉴스를 보십시오. 정상인지. 바울은 이런 말을 합니다.

자신을 쳐 복종시키라는 것.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라는 것은 복싱 용어입니다.

코너로 몰아서 다운시키라는 겁니다. 자기 몸을 쳐서. 굴복시키라는 겁니다.

 

이것은 지속적인 훈련을 필요로 하고 의지적인 훈련을 필요로 합니다.

한때 감동받고 찬양하는 게 끝이 아니라

끊임없이 주님의 말씀을 자신의 삶에 쳐서 복종시키는

그 의지적 훈련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훈련이 없으면 유혹 앞에 속수무책입니다.

 

반복적으로 유혹을 하게 하는 요소들을 근원적으로 차단해야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의 훈련을 해야 하는 것. 욥은 이렇게 말합니다.

 

욥기 311. 내가 내 눈과 약속하였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이 주목한다는 게 중요합니다. 대단히 강력한 행위라는 거죠.

강력한 행위. 주목하는 동안 내 속에서 마음이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겁니다.

주목하면 욕망은 더 강해집니다.

 

육체의 힘이 강해지면 영혼은 흐려지고 맥을 못춥니다.

상상과 함께 즐기는 단계로 가면 상당히 나아가버린 겁니다.

 

우리 시대는 볼 것이 도배되어져 있습니다.

이상한 것들에 빠져들어가면 좋지 않은 환상에 빠지게 되고

마침내 죄의 길로 뚜벅뚜벅 걸어들어가는 것입니다.

 

오늘의 문화적 환경으로 볼 때 영적으로 훈련이 되어 있지 않다면

이겨낼 장사가 별로 없습니다. 영혼을 방치하고 살다 보면

죄를 지을 준비를 늘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디에서나 안전지대가 없습니다. 교회 안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식구들끼리도 조심해야 합니다. 유혹의 틈을 사전에 차단해야 합니다.

남녀 관계는 묘합니다. 사탄이 순간적으로 개입하여 장난치면 꼼짝없이 당하게 됩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형제님 자매님 하다가 문제가 터질 수도 있습니다.

실제적으로도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에요. 우리 교육자들도 마찬가지.

한 사람만 이성이 있는 곳에 심방을 가면 그날로 사표에요. 정해놨어요.

부르지도 마세요. 홀로 있을 때는.

 

마귀는 시도 때도 없이 틈을 노립니다. 방심은 금물이요,

한순간에 밀고 들어옵니다. 지뢰를 곳곳에 깔아놨어요. 밟으면 터집니다.

요즘 사람들은 육은 강하고 영의 훈련은 택도 없는 거죠. 마음이 중요합니다.

마음으로 먼저 죄를 짓습니다. 몸이 더럽혀지기 전에 영혼이 먼저 더럽혀져요.

 

그게 뭘 통하여? 눈을 통하여!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은 유혹의 환경 속에서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이면 안됩니다.

 

유혹의 요소가 약간이라도 있는 듯하면 철저한 태도를 보여야 합니다.

우리의 관계들, 직장에서든 교회에서든 어디든 마찬가지입니다.

약간 느낌이 오면 단호한 태도를 보여야 합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매정할 정도로 행동하셔야 합니다. 약간이라도 머뭇거리고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이미 죄를 지으려고 하는 마음이 그 안에 있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의지입니다. 우리의 태도입니다. 적극적 선택.

유혹이 있는 상황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아주 전형적인 방법이면서 효과가 있는 게 하나 있어요.

고린도전서 618절인데요. 음행을 피하라.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의 죄를 짓나니, 여기서 중요한 것은 피하라는 겁니다.

 

피한다는 것의 뜻은 반대쪽으로 가능한 빨리 달아나라는 겁니다.

피하라. 피하는 게 상책입니다. 적극적으로 피해야 합니다.

 

소극적 방어는 막아낼 길이 없습니다. 이성적 유혹은 위험합니다.

그래서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주님의 신임을 받고 가정 총무가 되잖아요.

 

젊은 청년입니다. 홀로 외롭게 있습니다. 그런데 주인의 아내,

보디발의 아내가 계획적이고 의도적이고 치밀한 계획을 세워서 요셉을 유혹하죠.

창세기 39장에. 요셉은 그 집요한 보디발 아내의 유혹 앞에 계획적이고

그 아무도 없는 집안에서 절호의 기회를 찾아 유혹하는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물리치고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떻게 큰 악을 행할 것인가 하고 도망가죠.

잡는 데 옷이 벗겨지는 데 옷을 빼앗긴 채로 도망갑니다.

 

요셉이 사용한 전법은 삼십육계입니다. 너무 좋은 전법이에요.

이보다 더 탁월한 전법이 없어요. 기억할 것은 성적 유혹은 유혹 중에서도

가장 위험하고 강렬한 것입니다. 빠져들고 난 다음엔 소용이 없어요.

 

아마 경험한 사람들은 알 겁니다.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거예요.

그리고 순간적으로 일어난 죄에 비해서 겪어야 할 고통은 생각보다 크고

후유증은 길고 혹독합니다. 혹독합니다.

 

짧은 유혹의 한 순간에 그 실패가 길고 긴 고통을 가져다줍니다.

뒤늦은 후회는 소용 없어요. 사전 방지가 최선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유혹의 상황 안으로 들어가지 않아야 하고

죄를 지을만한 환경을 만들지 않아야 되고.

그런 상황이 왔을 때는 경상도 말로 토끼는 것이 최고입니다.

 

결혼한 남녀가 이성 간이, 단 둘이 있다. 그 상황은 위험합니다.

피하지 않는 사람은 죄를 지으려고 작정하고 앉아 있는 거예요.

 

우리가 알아야 할 것 중 하나는 절대 이런 부분에 있어서

자기를 과신해서 안 된다는 겁니다.

나는 괜찮아, 나는 그 정도는 유혹을 받지 않아. 그럴 리가 없어.

나는 그런 사람 아니야.’ 그건 자기를 모르는 겁니다.

 

나는 이 나이에 그럴 사람 아니야.’ 그 나이 없어요.

내가 목사인데’, 그런 거 없어요. 믿지 마세요. 누구도 믿어서는 안되고

나를 믿어서도 안됩니다.

성적인 유혹 앞에서는. 그건 스스로 속는 것입니다. 무조건 피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영적인 삶에 매진하는 것입니다.

피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음욕을 품지 않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영적 집중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야 합니다.

 

우리의 관심과 시선을 옮겨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유혹을 이기는 것에만

에너지를 낭비한다면 이미 진 것일수도 있습니다.

 

죄의 유혹에 대해 이기려고만 애쓴다면 이미 빨려들어가는 거예요.

우리의 관심을 하나님께로 옮겨야 합니다. 은혜의 세계로 빠져들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더 거룩한 곳으로의 삶에 들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어떤 교회는 일주일에 딱 한 번만 예배드리고, 이 세상에서 열심히 사세요.

 

아주 고상하게 들리긴 하지만 요즘 세상을 잘 몰라서 그래요.

왜 믿음의 선조들이 수요기도회를 만들었을까요. 은혜가 떨어질만 할 때

오라는 거예요. 세상에서 사는 게 녹록치 않거든요. 은혜를 채워야 합니다.

 

그래서 삼일기도회를 만든겁니다. 새벽기도회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어떤 분들은 그래요, 새벽기도에 받은 은혜가 점심 먹고 나면 다 풀려가지고

점심 이후엔 약간 헬렐레한다는 거예요. 일리가 있는 겁니다.

 

핸드폰 배터리 충전하는 것처럼. 오늘 시대는 방전이 빨라요.

바깥에 나가면 방전이 빠릅니다. 영적 소진이 너무 빠릅니다.

어떤 사람은 주차장에 가면서 다 잊어버리잖아요. 은혜는 주차장에 다 모여 있고.

 

오늘 시대가 유혹이 너무 많고 강렬한 문화이기 때문에

주일날 예배를 마치고 문 앞에 나가는 순간부터 머리 한 번 흔들면 사라진다는 겁니다.

 

오늘 제목이 뭐였지? 요즘은 제목이 확실하고 분명해서 잊어버리긴 힘들지만.

여러분 가능한 은혜의 자리를 많이 나와야 해요.

 

새벽기도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저는 새벽기도의 은혜가 너무 커요.

오랫동안 제 몸에 배어있기 때문에 새벽기도가 없다는 건 제 인생에서

생각할 수 없고 새벽기도가 없었다면 오늘의 나는 존재 불가능입니다.

 

힘들고 어렵고 수없는 사건과 문제와 부담이 있어도 새벽에서 다 해결되니까.

승리하는 거죠. 매일매일.

 

우리교회 같은 경우는 새벽기도도 오시도록 편리를 봐드리고.

시간 골라오세요, 이렇게 있잖아요. 3. 네시에 오셔도 되고 다섯시에 오셔도 되고

여섯시에 오셔도 되고. 새벽에 너무 잠이 많아서 못오시는 분들은 아홉시에

오셔도 되고.

 

많은 사람을 긁어모으기 위해서

이런 프로그램을 만든 게 아니고요. 우리의 삶이 오늘 넉넉치 않아요.

은혜 받지 않으면 세상에서 버텨낼 재간이 없습니다. 한 번에 날아갑니다.

 

은혜의 축적을 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세상에서 끌어당기는 죄의 힘이

강한 시대 속에 영적 관심을 하나님께로 적극적으로 옮기는 행위 없이는

세상에 우리의 눈을 뺏기고 나면 마치 삼손처럼 마침내 세상의

블레셋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고 그들의 유희거리가 되어서

비참하게 자신의 생을 마쳐야 합니다.

 

터지기 전에 미리 방책을 세우는 게 최고예요.

우리의 몸과 마음을 뺏아갈 것들로부터 이겨낼 수 있는 영적 충만함을 확보하는 겁니다.

 

우리의 마음의 상태들을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가져가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우리의 맨몸으로 이겨내고 버텨내고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가능성이 없어요.

 

특별히 우리 한국사회는. 우리의 행동만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무엇으로 채우느냐 하는 작업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중립이 없어요. 복음서에도 나오잖아요, 귀신을 쫓아냈어요.

그리고 그 안에 깨끗이 그 집을 청소했는데 나중에 쫓겨났던 귀신이 와보니까

그 집에 아무도 없는 거예요. 깨끗해서 그냥 군대를 데리고 들어온 거예요.

 

중립적인 위치는 위험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이상한 것에 뺏겨서

이상한 것으로 가득 채우면 전쟁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영적인 것으로 채우고 말씀으로 채우고 은혜로 채우고.

 

우리는 매일 전쟁을 치릅니다. 무기가 있어야 합니다.

무기는 말씀과 기도에요. 말씀을 늘 듣고 묵상하고 외우고.

시편에서도 말씀하죠. 내가 범재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말씀을 많이 암송하십시오.

 

요즘 앱이 얼마나 잘 되어 있습니까, 핸드폰만 있으면 말씀과 찬송을

언제나 들을 기회가 있습니다. 입에서 날마다 찬송을 부르고

하나님의 말씀이 나온다면 누가 우리를 유혹할 수 있겠습니까.

 

유혹이 많은 시대, 누구도 사탄이 깔아놓은 덫의 제물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수시로 하나님께 무릎 꿇는 훈련해야 합니다.

다니엘과 같은 사람이 그 시대 속에 수없는 유혹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았던 힘은 무엇일까요.

 

하루에 세 번씩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 당시의 관례대로라면 아침, 오늘 우리 시간으로는 아홉시, 열두시, 세시.

그는 총리에요. 엄청난 국사를 감당하면서도 하루에 근무 시간 세시간,

아홉시, 열두시, 세시에 그 바쁜 시간에 그는 엎드려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했던 사람입니다.

 

기도가 그를 지켰습니다. 성도 여러분, 선한 것에 자신의 몸과 영혼을 들이시고

거룩한 산 제물로 자신의 몸을 적극적으로 들이시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 봉사하시고 많은 일들에 헌신하시는 분들,

그게 교회에 희생인 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게 자신의 삶에 보험드는 거예요.

 

더 열심히 주를 위해서 살아가니까

하나님이 나도 모르게 내 인생을 지켜주신 거죠.

 

간음의 죄는 우리의 삶과 가정과 심지어 공동체까지 깨뜨리는 위험한 곤경입니다.

우리는 전쟁터에서 삽니다. 안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한 번 물리면 그 대가는 혹독합니다. 쾌락은 짧고 고통은 길고.

한 사람의 불행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많은 사람의 불행으로

오늘 이 성적 죄악이 강물처럼 봇물 터지듯 범람하는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마음 놓고 여기에 대해서 소극적으로 대하다가는 큰 코 다칩니다.

오늘 우리가 말씀을 다시 한 번 붙잡고, 칠계명,

가정 안에서 남자와 여자라는 합법적 부부 관계 안에서만 성은 허락된 것임을

 

기억하시고. 그것이 하나님의 엄격한 경계선임을.

그것만이 내 삶과 가정과 내 주변을 복되게 하는 만고변의 확고한

하나님의 원칙임을 기억하시고. 생명처럼 거룩과 순결을 지키기 위해서

힘 쓰시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을 잘 붙잡고 순종함으로

복된 인생 살게 하여 주옵소서. 혹여라도 실패하여 실수하고 넘어진 경험이 있다면

주여 자비를 베푸시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덮으사,

회복시켜주시고 새롭게 하여 주시옵시고.

우리 가정이 주 안에서 성결하도록 각자의 삶을 지켜 주시옵시고.

우리의 눈과 마음을 날마다 지키도록 힘쓰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타자 J.H.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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