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내지 말라 1 출20:17 17.01.22.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출20:17
십계명 스물아홉 번째로 오늘 말씀 나누겠습니다. 마지막 열 번째 계명.
탐내지 말라. 첫 번째가 되겠습니다.
◑서론 / 탐심 때문에 힘듭니다
▶우리의 삶이 참 힘들죠. 많이 힘듭니다. 사는 게 쉽지 않죠.
그 이유 중에 많은 이유들이 있겠지만 삶이 힘든 이유는
사실 우리 안에 있는 탐심 때문입니다. 탐심. 탐심이 우리를 힘들게 해요.
사실은. 탐심, 탐욕, 정욕, 욕심, 비슷한 말들입니다.
탐심이 우리 안에 있는 한 우리는 쉴 수 없습니다.
계속 힘들게 몰아가게 하는 것은 누가 아니고, 환경이 아니고
어떤 이 시대도 아니고, 우리 안에 있는 이 욕망, 정욕. 때문인 것이죠.
열 번째 개명은 탐내지 말라. 이 주제는 아주 흥미로운 주제면서
사실 우리의 인생에 큰 영향을 주는 대단히 큰 주제 중 하나입니다.
▶이 탐욕은 탐심은 우리 안에 숨어 있어요.
일계명부터 구계명까지는 거짓말, 살인, 간음, 안식을 지키는 것 다
외적으로 드러난 것이지만,
마지막 열 번째 개명은 숨어있는 거예요.
탐심. 사실 우리 안에 엄밀히 숨어 있기 때문에 겉으로는 잘 알 수가 없어요.
얼굴(외적 모습)로는 있는지 없는지. 잘 몰라요. 숨어있는 것입니다.
행위로 드러나는 게 아니에요. 마음 안에 있는 것인데 엄밀하게 숨어있는 탐심이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의 삶을 통제하고 움직여나가는 컨트롤하는 이게
사실 내면에 있는 탐심이죠. 욕망. 디자이어라고 하는 것이죠.
▶모든 종교는 이 욕망의 문제를 다룹니다.
인간의 이 문제만큼 크게 우리 인생에 영향을 주는 것이 없기에
모든 종교가 욕망의 문제를 다룹니다.
특별히 불교는 이 끝없는 욕망, 탐심을 제거하기 위해서
끝없는 수행의 정진을 하는 거죠.
우리 삶에 일어나는 모든 사고, 모든 불행, 모든 분쟁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딱 이게 있는 겁니다. 탐심. 열 번째,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계명은, 앞에 있는 모든 계명과 연결됩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것. 탐심이 있어서 그런 거죠.
우상을 만드는 것, 탐심 때문입니다.
안식일을 왜 쉬지 못합니까. 탐심 때문입니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 살인하는 것, 왜 살인하죠? 탐심 때문입니다.
간음하는 것? 당연히 탐심 때문이죠.
거짓말하는 것. 모두 인간의 내면에 있는 탐심의 문제로부터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탐심은 모든 계명을 깨뜨리는 요인이 됩니다.
이 마지막 열 번째 탐심은 매우 의미 있는 것이고
우리에게 하나님이 계명을 주실 때 마지막 결론이면서
앞의 모든 계명과 연결시키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탐심은 우상숭배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든 이 죄라고 하는 뿌리 속에 바로 이 탐심이 놓여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 5절을 보면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여러분 오늘 여기에 탐심은 우상 숭배다.
그동안 우리는 우상 숭배가 겉으로 드러났던 형상화된 것이 아니고
우상 숭배는 어떤 면에서 우리 안에 있는 탐심 그 자체라는 거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우상 숭배는 일종의 종교적 행위입니다.
탐심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종교적 힘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이
가장 강력하게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빼앗긴 상태를 말합니다.
우상은 지배하는 힘이 있습니다. 우상을 섬기면 그 우상에게 지배 당하죠.
그 우상이 모든 것을 컨트롤합니다. 그 앞에 무릎 꿇습니다.
우상이 시키는대로 다 행하는 거죠. 바로 이 탐심이 그렇다는 겁니다.
이 탐심이 있는 한 우리는 우리 스스로 자유가 없어요.
그게 완전히 예속되어 있는 겁니다.
빌립보서 3장 1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지라.
자기의 배는 곧 신이다, 자기의 배를 채우는 그 탐심. 탐욕.
그게 곧 신이라는 거예요.
내 배를 채울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 가능한 삶. 하나는 뭐예요,
다른 어떤 것으로 자신의 배를 채우고자 하는 그 행위 자체가
우상 숭배인 것이고 신이 된다는 겁니다. 내 배가 신이다.
▶자, 오늘 어떤 것을 탐내지 말라고 하고 있습니까?
네 이웃의 소유, 네 이웃의 모든 것을 포함한 네 이웃의 집, 네 이웃의 아내,
그의 남종, 여종, 모든 가축까지 탐내지 말라.
탐낸다는 것은 자신의 가진 것에 만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혼을 했다면 자기 배우자로 만족해야죠.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남자를 탐내지 말라,
이건 아직 없어요. 그렇다고 여자 분들이 그러면 이게 탐내라는 얘긴가
그건 아니고 다 포함된 겁니다.
주로 여기서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
특히 남자들은 결혼 전에 남성의 구조적인 면인데요, 심리적인 면에서.
결혼하기 전에는 맘에 드는 여자가 딱 나타나면 꽂혀버려요. 남자들은.
온 세상의 여자가 그 한 사람밖에 없는 것처럼 꽂혀버려요.
여자분들은 달라요. 결혼 직전까지 오는 남자를 다 점검해봐요.
이 남자인가, 저 남자인가. 그런데 남자는 심리적 구조가 그렇지 않아요.
맘에 드는 사람에게 확 꽂혀버려요. 올인. 미치는 거예요.
그런데 남자들의 심리에 재밌는 것은 결혼하면 딱 이상하게 눈이 확 열리면서
내 아내보다 훨씬 더 나은 여자가 있다는데 놀라는 거예요.
이게 심리적 구조에요. 그래서 길을 가다가도 매번 결혼하고 나서도
둘레, 둘레.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다. 더 나은 여자가 이리 많은데
내가 왜 저 여자에게 꽂혔나.
그러나 여러분 결혼한 남자라면 한 사람에게 일단 만족해야 합니다.
탐내지 말라는 것. 오늘 여기 보니까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다양한 영역에서 탐심이 일어납니다. 야곱은 형의 장자권을 탐내죠.
그래서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아버지로부터 축복 기도를 받습니다.
남의 권리를 탐낸 것입니다. 장자의 권리를 탐낸 것이죠.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바나바라고 하는 그 시대 공동체의 탁월한 리더였던
바나바의 존경심, 명예가 탐이 났던 거예요. 성경 본문을 보면 그렇습니다.
다른 이의 명예가 탐나니까 헌금을 하기는 하는데
이 거짓된 헌신으로, 그렇게 해서라도 성령을 속이고 명예를 탐했던 겁니다.
그것이 초대 교회의 아주 유명한 사건이 되고 맙니다.
아이 성에서의 아간의 탐욕이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의 패전을 가져옵니다.
한 사람의 탐욕으로 전리품을 숨긴 것 때문에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가 패전해요.
가롯 유다 역시 돈에 대한 탐욕 때문에 스승인 예수를 은 삼십 냥에 팔아버립니다.
이 탐심이 이렇게 눈을 가려버립니다. 탐심에 빠지면 죽는지 사는지 몰라요.
자유를 잃어버립니다. 노예적 삶을 삽니다.
◑이 탐심의 특징들이 몇 가지 있는데
▶1. 첫째는, 탐심은 작은 것에서부터 출발하면서 점점 커져가는 것입니다.
이 탐심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작은 탐심으로부터 출발해요, 누구든지.
처음부터 막 큰 욕망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아주 작은 탐심을 가지는데
그게 점점 커지면서 나중에는 파국으로 몰고 갑니다. 죽음으로까지.
야고보 1장 15절의 말씀이죠.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이게 출발입니다.
욕심이 잉태합니다. 작은 게 잉태됐는데 죄를 낳는데 어디까지 죄가 가요?
장성해서 사망까지 갑니다. 무서운 거잖아요.
작은 욕심으로 출발했는데 나중에는 치명적 파멸에 이른다..
탐심이 무서운 게 이런 거죠. 욕심은 마치 유정란과 같습니다.
무정란이 아니라, 유정란. 점점 커져갑니다.
그래서 초기에 다루지 않으면 비극적으로 몰고 갈 수 있는 것이기에
우리 모두는 탐심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아무리 많이 소유해도 탐욕은 줄어들지 않아요.
더 많이 소유하려고 하려고 하고 그럴수록 소유에 빠져드는 특성이 있습니다.
결국 소유하고 다스려야 하는 인간이 그 소유물의 일부가 되고 맙니다.
이것이 바로 노예적 삶이죠.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탐심은 갈수록 우리의 삶을 속박하고 마는 것입니다.
큰 금덩어리를 발견한 형제가 이 금덩어리를 들고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갑자기 형이 이 금덩어리를 강에 집어던집니다.
그러니 동생이 막 화를 내면서 미쳤냐고 왜 그러느냐고.
형이 이실직고하는 거예요. 내가 이 강을 건너는데 자꾸 이상한 욕심이 들어서
이 황금덩어리를 혼자 갖고 싶은 마음이 자꾸 생기더라.
그래서 너를 물에 밀어뜨리고 싶은 강한 그 마음의 유혹이 찾아와서
순간 아찔했다. 그래서 내가 집어던져버렸다.
이 금덩어리를 포기하고 너를 살리는 게 낫지 않겠느냐. 그랬더니
동생은 나도 비슷한 생각했다. 형 밀어버리고 이 금덩어리를 내가 가질 마음이 있었다는 거예요.
여러분 탐심이 찾아들면 피를 나눈 형제도 서로 죽일 수 있어요. 무서운 겁니다.
아주 무서운 것. 피를 나눈 형제가 아니라 부부도 누구도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없게 만드는 게 이 탐심이에요.
탐심은 삶을 망가뜨리는 원흉입니다.
▶그래서 초기에 잡는 게 중요합니다. 커지면 아무도 막을 수 없어요. 아무도.
커지도록 놓아두면 아무도 감당 못합니다.
탐심 때문에 건강도 잃고요 탐심 때문에 형제도 잃고
관계도 깨어지고 탐심 때문에 다 불행해집니다.
탐심이 들면 신앙 생활이 불가합니다. 탐심이 들면 영혼을 잃습니다.
결국 자신이 불행해지는 게 아닙니다. 자기를 파멸로 몰고갈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파멸로 몰고 가는 힘이 있습니다.
▶2. 두 번째, 이 탐심은 만족을 모릅니다.
인류 최초의 에덴 동산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하나님이 퍼펙트, 완전하게 만들었습니다.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 다섯째 날까지 모든 것을 다 만드시고 난 다음에
가장 마지막에 인간을 만들었거든요.
그러니 완벽한 환경을 만들고 인간을 만드셔서 하나님이 만들어놓으신
파라다이스를 누리게 하신 거예요.
그 완벽한 환경을 누릴 권한이 있고 자유가 있는 겁니다.
자 그런데 사탄은 아담과 하와에게 딱 한 가지 하나님이 지양해놓으신
그것에 눈을 떼지 못하게 합니다.
누리고 있는 수많은 것에 대한 만족이 아니고
한 가지 가지지 못한 것에 주목하게 합니다. 이것이 사탄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가진 무수한 것에 대한 감사가 없고 가지지 않은
그것에 돋보기를 갖다 대고 불만을 갖게 하는 것 그것이 사탄입니다.
탐욕입니다. 탐욕의 특징은 만족할 줄 모른다는 거예요.
터진 웅덩이입니다. 아무리 물을 쏟아부어도 다 빠져버립니다.
그러니 여러분, 좋은 환경이면 죄를 안 지을 것 같은데
인류 최초의 아담과 하와의 예를 들면 그게 아닌 최상의 환경에서
탐욕을 가지고 선악과를 넘보고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니 환경의 문제가 아니고 우리 마음의 문제입니다.
오늘도 우리 삶의 모든 것이 환경에서 어려움이 오는 게 아니라 마음이 문제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누려보았던 솔로몬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전도서 5장 10절에 보니까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요즘 이 얘기는 그냥 돈이죠. 돈을 사랑하는 자는 돈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여러분,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연봉이 얼마든지 만족 못한다는 겁니다.
솔로몬의 얘기입니다. 경험해본 이야기입니다.
채우면 만족하는 게 아니고 반대입니다. 채우려고 할수록 갈증은 더 깊어집니다.
여러분 인간이 당하는 고통의 실체는 식을 줄 모르는 탐욕이다, 이겁니다.
현대인들의 극도의 스트레스에 휘말리는 요인은 탐심 때문에!
그래서 안식이 없는 것입니다.
쇼핑 중독에 빠진 사람들을 보면 요즘 중독 환자들이 많은데,
쇼핑 중독은 눈에 들어온 것을 소유하고야 마는 거예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소유하려고 하는 겁니다. 빚을 내든 뭐든.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쥐어야 잠이 오는 것. 가지지 못하면 손이 떨리는 거예요.
잠이 안 오는 겁니다.
여러분 소비주의 세상에서 늘 듣는 메시지는 소유하라, 소유하라, 소유하라,
가져라, 가져라, 가져라. 찬송가 1장도 가져라, 2장도 가져라, 3장도 소유하라.
후렴은 소유하라, 소유하라, 더, 더, 더.
요즘 마케팅 업계의 유행어가 뭡니까. Trading Up.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만 있다면 넘치는 지출을 마다하지 않는 경향에 관련된 것입니다.
멈출 줄 모르는 욕구. 여러분 오늘 이 시대는 어느 시대보다도 풍요로운 때를 맞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시대보다도 불평과 불만족은 많죠.
기업들은 오늘 끝도 없이 더 많은 상품을 만들어 시장에 쏟아냅니다.
더 좋은 것, 더 좋은 것, 더 좋은 것. 아이들도 불평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이들만 그럴까요? 어른들도 똑같습니다. 성도들도 똑같아요.
성도들도 가장 많이 하는 기도는 단연코 주시옵소서.
가진 것은 많은데 불행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그런대로 괜찮은데 행복 지수가 형편 없는 거예요.
▶탐욕이 문제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무엇이 부족해서 선악과를 탐낸 게 아닙니다.
마귀가 우리의 눈에 없는 것에 돋보기를 갖다대는 거예요.
희한한 것에 갖다 댑니다. 그래서 보는 순간 속이 뒤집어지는 겁니다.
오늘의 세상은 너무도 경쟁적입니다. 비교 문화가 대단하죠.
아무리 많이 가져도 만족이 안돼요. 남의 떡이 더 커보이고
갑자기 불행해지는 거예요. 결국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애씁니다.
부족해서가 아니라 탐심의 문제고 이 탐심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식은 요원한 것입니다.
▶3. 세 번째는 탐심은 주로 바라보는 것에서 옵니다.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마귀가 한 것은요 복잡하지 않습니다. 보라는 거예요.
그래서 창세기를 보면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하다고 되어 있는데 가장 첫 번째 작업이 뭐냐면 보라는 거예요.
아마 처음부터 보고 따먹지는 않았을 거에요. 계속 보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보암직하다. 여러분 무엇이든지, 자꾸 보면 이길 장사가 없습니다.
지금 계속 보고 있는 것, 조심하셔야 합니다.
마귀는 예수님에게 똑같이 에덴 동산에서 유혹했던 그 마귀는
예수님에게 동일하게 시험을 해요.
천하만국을 보여주며 자기에게 절하라고 하는 거에요.
여러분, 천하만국의 그 화려한 것을 보여줍니다. 보는 것 조심해야 합니다.
결혼한 남자가 자기 아내보다 더 멋있는 여자를 보면 됩니까, 안됩니까.
보이는데 봐야죠. 아름다운 것을 바라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겁니다.
자, 아름다운 꽃이 있는데 안 볼려고 할 필요는 없어요. 보는 거죠.
건강한 남자라면 아름다운 여자를 볼 수 있습니다. 아름답다, 안 아름답다,
이게 구분이 안되면 병원에 가보셔야 하고.
문제는 부러움을 넘어서서 탐을 내는 단계로 가면 안 되는 겁니다.
아름다운 여인을 잠시 바라보는 정도를 가지고 시비를 걸 필요는 없어요.
어떤 아내는 그렇다고 해요 길을 가다가 남편이 다른 여자를 쳐다보고 있으면
기다려준대요. 계속. 한참 있다가 다 봤어? 가자고, 이제. 그런다고.
문제는 뭐예요. 그 정도를 넘어서서 탐내는 단계로 가는 겁니다.
바라보는 정도를 넘어서서 그녀를 따라가고 사진을 찍고 묵상을 하고
그러면 탐심이 일어납니다. 탐심이 일어나는 거예요.
계속 보는 것은 탐심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윗은 왕궁 옥상에서 목욕하는 밧세바를 바라보는 사건이
결국은 역사의 치명적인 실수를 만든 거예요.
여러분 바라보는 것. 탐심을 일으키는 출발지입니다. 출발지는 위험해요.
문화적으로 화려하고 매력적인 것들이 너무 많은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요즘 젊은 청년들이나 학생들 보면 너무 안타까운 거죠.
이 시대, 예전에는 밋밋하고 잿빛이고 아름답고 화려한 게 매력적인 게
전혀 없었던 밋밋한 문화가 아니라
오늘은 너무도 관능적인 문화, 화려한, 미디어. 이 매력적인 것이 흘러넘치는
이 세상 속에서 우리 젊은이들이 보이는 것들의 문화.
인터넷만 켜면 엄청난 것들이 파도를 치는 이 시대. 바라보게 만든단 말이죠.
바라보게 만든다는 거예요.
미디어를 통한 광고라는 엄청난 메카닉이 쏟아져서
그 안에 온 영혼을 사로잡는 것들이 있어서 보는 순간 시름시름 앓게 됩니다.
아이들도 신발 하나 사려고 해도 엄청나게 비싸잖아요. 나이키. Just do it.
이래가지고 신발값이 뛰어버려요. 그냥 수없는 단계가 있는 거예요.
십만 원 정도 짜리를 사러 갔다가 그것만 사면 되는데
옆에 다른 걸 보는 순간 문제가 생깁니다. 이십 만원 짜리를 보는 순간
십만 원 짜리는 신발이 아니에요.
여러분 광고를 보기 전에 깊이 기도하셔야 합니다.
백화점 옆을 지나갈 때도 깊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해요.
이 백화점이 가까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영성이 깊어야 해요.
주기도문 항상 외우셔야 해요.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바라보는 것 조심해야 합니다. 바라보면 생각하게 되고
생각이 생각에 꼬리를 물으면서 나를 사로잡아버려요.
그러면 여러분, 특히 우리 안에 교묘히 침투한 이 형통의 신학,
법령의 신학에 더 오염이 많이 되어 있습니다.
조엘 오스틴의 <잘 되는 나>, 이런 류죠.
여러분. 형통의 신학은 뭘까요. 현실을 열심히 바라보게 하는 거예요.
거긴 내세가 없어요. 영혼의 세계가 없어요.
기독교는 여러분 오늘 이 현실의 세계에 모든 걸 끝내는 종교가 아니에요.
현실이 망하고 고난을 받아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소망을 두는 게
우리 신앙의 핵심입니다.
날 기쁘게 해주는 현실적 만족을 추구하고 살아가는 동안에는
탐욕을 잠재울 수가 없어요.
신자로서 우리 시대를 살아갈 때 무방비로 노출되서 당하고 있는 겁니다.
◑탐심을 해결하려면
현대사회 소비주의사회 안에서 우리 자신을 내버려두면
우리 영혼은 이 탐심의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고
세속의 사회 속에서 휘말려 들어갑니다. 적극적으로 우리는 방어해야 합니다.
무엇을 바라볼 것인가, 지금 무엇을 바라보는가 선택해야 합니다.
그냥 보이는대로 보고 따라가고 하면 우리는 당하고 맙니다.
‘무엇을 바라보는가, 지금 바라보는 그것을 바라보고 있어도 괜찮은 것인가.’
물어야 합니다. 자 이 탐심을 이기는 길은 무엇일까, 자유로울 수 있을까?
기독교는 욕망을 소멸시키기 위해 욕망과 싸움을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욕망 자체와 씨름하기보다는 궁극적으로 영원한 것에 관심을 돌리는 것입니다.
탐욕의 실체가 왜 왔느냐, 하나님을 떠난 것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그 빈 공간에 이 탐욕이 자리를 잡고
끊임없이 세상의 것을 주워담아 하나님이 떠난 빈 자리를 채우려고 하는
그 안에 탐심이 숨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탐심의 주 원인이 하나님을 떠남으로 일어났던
그 빈 공허함에서 왔던 것이라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 밖에 길이 없어요.
하나님을 떠남으로부터 찾아온 그 공허함과 불안감은
하나님에게로 돌아갈 때 해결됩니다.
여러분 탕자의 방황과 고통과 굶주림들은 아버지께로 돌아갔을 때
근원적 해결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생긴 병은 눈에 보이는 물질을 사랑하고 애착을 갖게 한 거예요.
그것을 치유하는 길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빌립보서 4장 12절과 13절에 바울은 기가 막히게 우리에게 답을 해줘요.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길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여러분 이 바울은 자전적 고백입니다. 무슨 이론을, 실현 불가능한 이론을
내놓는 게 아니고 자신의 삶의 경험을 통하여 자전적 고백하는 겁니다...
타자 J.H.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