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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적 타락 전에 영적 타락

LNCK 2017. 4. 10. 17:34

육적 타락 전에 영적 타락                 20:14, 잠6:27~29, 막7:15~16,                    16.10.23.

 

십계명 강해 중 7계명 간음하지 말라, 두 번째 말씀입니다. 2 of 3

 


 

도덕적 타락은 하루 아침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서 도덕적 타락이 일어나고 그 전에 영적 타락이 있습니다.

그리고 영적 타락이 깊어져가면서 결국은 도덕적 타락이 오고 그것이 심화되고

그 끝지점에서 한 시대가 한 국가가 침몰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영적 타락이 굉장히 무서운 것입니다.

그것은 겉잡을 수 없는 시대의 마지막 징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영적인 세계에서 타락이 오면 마지막 징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없는 사회, 우리가 살아가는 삶 속에 하나님을 제외시키면,

하나님을 소홀히 하고 하나님을 무시하는 문화, 세속주의, 이런 얘기 하는데요.

하나님을 빼버리면, 하나님이 안 계신다고 생각하면 갈 때까지 가는 거죠.

막을 길이 없습니다. 죄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사기를 보면 영적 어두움의 시대죠. 아주 어두운 이스라엘의 암흑기였습니다.

사사기 뒷부분에 가보면 점점 더 어둠이 깊어져 가요.

어느 정도 깊어지느냐, 그 시대의 사사들까지 타락하는 것입니다.

지도자들까지. 그건 완전히 끝지점입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던 레위인의 첩을 두고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윤간. 끔찍한 일이 일어납니다.

 

영적 암흑기 속에 음란한 사건들이 벌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거죠. 죄라는 기준 자체가 없기에 죄를 모릅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서 흔히들 발견하는 모습입니다.

 

요한계시록 17절을 살펴보면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라는 표현이 나와요.

이게 무슨 표현인가하면 많은 이라는 것은 세상을 의미합니다.

 

그 세상 위에 큰 음녀가 앉아있다는 겁니다.

성적인 타락과 범죄가 일부분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고

세상 전체를 뒤덮고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성적 타락이 범람을 해서 오늘 이 시대에 피할 길이 없을 지경입니다.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터질 대로 터져서 범람한 겁니다.

 

많은 물 위에, 큰 음녀가 그 세상을 방석처럼 끌어 앉고 있다는 겁니다.

음풍이 분다는 것입니다.

 

이 성적 탈을 쓴 타락은 생각보다 후유증이 큽니다.

사무엘하 112절에서 3절입니다.

 

[2] 저녁 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3]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그가 아뢰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하니

 

엘리암의 딸,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 신상명세예요.

그 여인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보니 그 정보에서 이미 답이 나왔어요.

결코 범해서는 안 되는 여인이라는 것을 그 속에서 이미 답이 나왔습니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무슨 얘기죠? 남편이 있다는 겁니다.

임자가 있는 몸이라는 거죠.

 

그녀의 남편은 자신의 충신이기도 한 우리아라는 인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엄격하게 금지선이 그어져 있습니다. ‘엘리암의 딸이라고 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도 살아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중장치죠.

넘보지 말아야 할 대상임! 그러나 다윗은 물러서지 않습니다.

 

유명한 화가 렘브란트가 상상력을 동원해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그림의 제목은 목욕하는 밧세바.

그림의 배경은 전체적으로 어두운 컬러입니다.

그 그림 속에서 눈에 띄는 것은 밧세바가 종이 쪽지를 하나 들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녀의 얼굴은 무엇인가 고민에 빠져있는 듯한 모습으로

바닥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들고 있는 쪽지에는 무엇이 쓰여 있었을까요?

상상하건대 왕의 호출. 입궁하시오.’ 아니면 차나 잠깐 한잔.’

그 족지 하나가 다윗이나 밧세바의 인생에 거대한 폭풍이 불어닥칠지 몰랐던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다윗과 밧세바의 사건은 일사천리로 진행됩니다.

 

죄는 신속하게 벌어지지만 그 죄가 가져올 폭풍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불장난은 대부분 비극으로 발전되고

당사자는 물론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안깁니다.

성적 유혹은 불나비가 불을 향해 달려드는 것과 같습니다.

 

죄에 관성이 붙으면 가속도가 붙어 나중에는 불을 스스로 끌 수 없는 것입니다.

마침내 사건은 벌어지고 밧세바가 임신을 하고 맙니다.

성경을 보면 밧세바가 자신의 임신 사실을 다윗에게 알립니다.

책임지라는 거죠.

 

다윗은 자신의 아이가 아닌 그의 남편인 우리아의 것으로 만들고자 조작합니다.

전쟁터에 있던 사람을 불러들여 사건을 조작하려 하지만 실패하죠.

 

성경은 이 비열함을 드러내는 다윗과 그에 비해 충직한 우리아를 대조합니다.

왕이 불러들여 아내와 잠자리를 하도록 배려했지만

전쟁 중인 상태라 결코 아내와 잠자리를 하지 않고 다시 전쟁터로 돌아가는 거죠.

 

계획이 틀어지자 다윗은 초강수를 둡니다. 죄에 빠지면 특징이 있어요.

판단력이 흐려집니다. 무슨 짓을 하는지 자기가 모르는 거예요.

무리수를 결국 두는 것입니다.

 

간음죄는 간음으로 끝나지 않고 살인죄로 비화되죠.

숨어있던 죄의 본성이 노골화되면서 인간의 잔인성이 드러납니다.

 

여러분, 한 번 잘못된 길로 가면 그것을 관리 유지하기 위한 막대한 에너지가 들어요.

죄의 강도가 점점 높아지죠. 처음에 행동은 충동적이었다면

두번째 우리아를 죽이는 사건은 매우 계획적이고 의도적이고 고의적인 살인을 합니다.

죄가 발전하는 거죠.

 

다윗의 이런 행동은 이전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는 영적으로 민감했고 뛰어난 영성의 소유자였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작은 오점조차 남기지 않기 위해 애썼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사악하고 비루한 죄를 짓고 있습니다.

여러분 왕으로 성공의 자리에 올랐지만 어쩌면 다윗의 세계는 공허했던 거죠.

 

사람들은 성공을 추구하지만 성공은 인간의 공허함을 채우지 못합니다.

성공의 자리는 의외로 외로운 자리죠.

 

내면의 공허함은 유혹에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상태입니다.

다윗의 스토리를 보면 그는 원만하고 행복한 결혼 생활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부부관계의 사랑이 식는다는 것 역시 매우 위험한 전조죠.

그는 왕의 임무를 치루는 가운데 자신의 내면을 소홀히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남성들은 비즈니스로 이곳 저곳 출장다니다 보면

어느덧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유혹은 예기치 않는 곳에서 갑자기 찾아옵니다.

방심한 사이에 어이없는 실수를 하게 되는 거죠.

 

불륜, 간음 혹은 외도는 개인의 선택입니다.

그러나 그 후유증은 사소한 개인사로 끝나는 법이 없습니다.

 

결국 다윗에게 몰아닥친 폭풍은 불륜으로 태어난 아이가 죽고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었죠. 하나님이 예언하십니다.

그의 집에 칼이 멈추지 않을 것이다.’

 

예언은 이루어집니다. 놀라운 일은

음란한 일들이 다윗과 아내에게 되물림되어지고 있다는 거죠.

그의 아들 압살롬은 아버지의 아내들을 겁탈합니다.

그의 자녀들 안에 근친상간이 벌어져요.

 

형제의 살육극으로 피비린내 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장남 암논이 살해당하고 압살롬도 결국 비극적으로 죽습니다.

 

다윗 역시 아들의 반역으로 왕실을 떠나 도망치며 말년을 보냅니다.

후폭풍은 거세게 몰아쳤습니다.

 

이렇게 크고 깊은 고통이 밀어닥칠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입니다.

아마도 그가 미리 이런 것을 생각했더라면, 상상이라도 했더라면

고개를 돌렸을지 모릅니다.

 

여러분, 성적 실수는 다른 어떤 것보다 상처가 깊고 후유증을 오래 남깁니다.

잘못된 사랑은 불행을 받아들이는 거죠.

 

세상의 문학 작품의 단골 소재이기도 합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이루려고 할 때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거죠.

 

외도는 빗나간 사랑입니다. 그것은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는 욕정이라고 부릅니다. 에로스는 강렬하고 위험합니다.

아주 작은 불이 삽시간에 모든 것을 다 태워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성적인 죄는 멀리서 보면 장밋빛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잿빛으로 비극으로 끝납니다.

 

잠언 6:27~2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27] 사람이 불을 품고서야 어찌 그의 옷이 타지 아니하겠으며

[28] 사람이 숯불을 밟고서야 어찌 그의 발이 데지 아니하겠느냐

[29] 남의 아내와 통간하는 자도 이와 같을 것이라

그를 만지는 자마다 벌을 면하지 못하리라

 

여러분 불을 안고 기름에 뛰어들면 결과는 뻔합니다.

간음은 영적 영역에 치명적일 뿐만 아니라

성적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다양하게 일어납니다.

 

삶에 파탄이 일어나고 가정이 깨어지고 행복한 결혼 생활이 멀어집니다.

각종 질병으로도 연결됩니다.

 

정상적이지 않은 동성애도 마찬가지지만 많은 것들이 질병을 일으키고

에이즈 등과 같이 삶을 파괴로 몰고 갑니다.

 

닥쳐온 결과를 한 번만 생각해보아도 그 죄를 쉽게 지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그리스도인은 외적인 행위, 간음 자체보다

마음에 숨은 동기를 늘 살펴야 합니다.

 

구약의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십대의 민감한 나이에 이겨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 밧세바 사건이 일어난 시점은 쉰 정도의 나이로 봅니다.

적지 않은 나이죠.

 

인생의 경륜을 쌓고 모든 것을 성취한 지점에서 다윗은 무릎을 꿇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나이와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음의 문제라는 것이죠.

 

전쟁은 어디서 벌어집니까. 우리의 마음 안에서 벌어지죠.

마가복음 7:15~16절입니다.

 

[15]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16]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

 

우리가 점검할 문제는 마음입니다.

마음의 상태. 마음으로 무언가 안 좋은 것이 흘러들어가면

그 마음으로부터 모든 더러운 것이 흘러나옵니다.

 

또한 720절에서 23절입니다.

[20]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21]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23]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죄의 문제를 외적인 것으로 취급한다면 아직 실체를 파악하지 못한 것입니다.

마음에 있는 것들을 민감하게 다루지 않으면 어느 날 터지게 되어 있습니다.

 

처음 내가 품은 생각, 내 마음 속에 무엇이 들어있느냐,

그것이 내 모습이고 현 주소입니다. 내 삶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상태입니다.

 

이 마음의 문제는 결국 무엇으로 연결됩니까. 욕망의 문제로 연결됩니다.

욕망의 뿌리가 무엇이냐는 겁니다.

 

에덴동산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범죄하고 하나님을 떠난 순간부터

이 문제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 근원적인 욕구불만, 인간의 욕망은

결코 간단히 채워지지 않습니다.

욕망은 목표한 그것을 채우기 전까지 절대 포기하지 않는 속성이 있죠.

 

문제는 채워질 수 없다는 것에 있습니다. 성적인 욕망은 강력한 것이죠.

그런데 그것을 채우려고 해도 채워지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어느 사회에서나 간음을 가장 무섭게 다뤄왔지만

그럼에도 줄어들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강력한 욕망의 파괴력.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가정을 잃어버리고 사회적 지위와 명성과 돈을 잃어버리고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잃어버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욕망 앞에 한없이 무력해지는 인간의 모습으로.

 

뻔히 그 상황의 끝에서도 거기에 무릎을 꿇는 것을 보면서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가를..

 

에덴 동산에서도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너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날에는 결단코 죽으리라, 반드시 죽으리라.

추상과 같은 말씀을 아담과 하와가 묵살해버립니다.

 

우리 안에도 우리의 조상인 아담의 피가 흐릅니다.

욕망은 그처럼 강하고 집요하게 인간의 삶을 흔들어 놓습니다.

 

여러분 다윗은 골리앗 앞에서 그 어린 시절에 그토록 용맹스러운 용사였습니다.

그러나 밧세바라는 한 여인 앞에서는 어이없이 맥을 추지 못합니다.

 

삼손도 마찬가지입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그는 진정한 용사처럼

어마어마한 괴력을 발휘합니다.

그러나 들릴라 라고 하는 여인 앞에서는 이빨 빠진 사자에요.

 

이 욕망의 안쪽에는 하나님을 떠난 존재론적 불안이 있습니다.

인간의 내면에는 그 무엇으로도 메꿀 수 없는 큰 구멍이 있어요.

이 공허함은 너무 깊은 것이에요.

만족할 수 없는 것을 구하고 살아가는 것이죠. 끊임없이.

사실 그 자체가 징벌일지도 모릅니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말의 여인이 그런 여인이었습니다.

남편을 다섯 바꾸었습니다. 현지의 남편도 자신의 남편이 아니에요.

남자를 여러 번 바꾸었다는 것은 행복한 삶을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남자로서 만족할 수 없다는 겁니다.

 

이 욕망을 어찌해야 할 것인가, 모른척 그냥 덮어두면 되는가.

여러분 다루어지지 않는 욕망은 어느 순간 성난 파도처럼 화산처럼

솟아오를 수가 있습니다.

 

요즘은 여자 분들도 만만치가 않아요.

아이들을 키우는 동안에는 아이를 키워내는 일에 욕망을 쏟습니다.

남편은 돈을 버느라 바쁘고 아내의 역할보다는 아이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걸 다 바쳐요.

 

그러다 아이들이 자라서 떠나고 나면 빈 둥지 증후군을 느낍니다.

공허함과 외로움이 밀려와요.

 

남편은 남편대로 외롭고 아내는 아내대로 외롭고

그러다가 공허함이 밀려서 바깥으로 내다니다가 사고가 터지는 거예요.

 

 

이 욕망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요.

 

여러분 근원적인 문제를 어떻게 다뤄야 하죠.

 

1. 첫째는 절제의 문제입니다. 욕망은 채워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절제함으로 다루는 것입니다.

 

모든 것에서 터지는 것들은 절제력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욕망 자체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욕망을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절제에요.

 

먹는 것은 즐겁잖아요. 식욕이 없는 사람은 건강에 문제가 있습니다.

먹는 것은 중요하죠. 먹는 거 즐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탐식이 문제입니다.

 

끊임없이 먹는 것. 주체하지 못하는 것. 먹고 싶다고 다 먹으면 어떻게 돼요?

로마시대 타락했을 때도 그랬잖아요. 맛있는 게 많으니까 토해내고 다시 먹고..

 

요즘 먹고 싶은 게 얼마나 많아요.

TV만 켜도 맛있는 것이 얼마나 많아요. 육즙이 주르륵. 당장 구워먹고 싶고.

먹고 싶은대로 다 먹으면 병드는 거예요.

 

다룰 수 없는 야생마 같은 욕망이 문제입니다.

욕망이 원하는대로 채울수록 배가 더 고파집니다.

 

우리는 지금 절제보다 방종을 부추기는 문화 속에 살고 있습니다.

절제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참치 말고 해! 세월도 짧은데. 먹은 귀신이 때깔도 좋아. 하고 싶은 대로 해.

먹고 싶은 대로 먹어. 너의 욕망이 원하는 대로 행동해.’

 

그러나 여러분 욕망은 절제되어야 하고 절제되어진 욕망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는 무서운 흉기죠.

 

부부간에도 욕망은 적당히 절제될 때 아름다운 것입니다.

습관은 또 다른 습관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욕망을 채우려는 습관에서 욕망을 적절하게 거절하는 습관으로.

그게 절제에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채워야 만족이 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절제할 때 만족이 오는 거예요.

 

어떤 일에 절제가 안 된다면 종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노에가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내가 절제하고 싶을 때 절제가 안되는 거예요.

절제의 능력이 떨어지면 그때부터 인생은 초라해지기 시작하고

현대판 노예가 됩니다.

 

중독이 뭡니까. 절제가 안되는 거예요. 현대판 노예.

사슬이 하나 매어져 있는 것입니다. 몸매도 아름답게 만들고 싶고

먹고 싶은 것도 마음껏 먹는 그런 건 없습니다. 적당하게 해야 하죠.

 

절제력 훈련이 멋진 인생으로 만들지만, 절제력이 없으면 고장난 인생입니다.

절제력 훈련은 일상에서 일어나요.

경계선을 지키는 훈련이죠. 세상은 좀 더, 좀 더, 얘기할 때 좀 덜, 좀 덜 하는 훈련.

이게 절제 훈련입니다.

 

우리는 성적 자극을 받는 것으로부터 의지적 거부를 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마음 관리는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잠언 423절입니다.

 

모든 것을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너무 귀중한 구절입니다. 오늘 시대에.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얼마나 강조가 된 것입니까. 어떤 것. 네 마음을 지키라는 거예요.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난다. 살고 죽는 게 여기서 결정되는 겁니다.

 

성적 유혹은 마음으로 밀고 들어옵니다.

한 번 허용하기 시작하면 나중엔 마음을 빼앗아 가버립니다.

초기의 선택이 중요합니다.

 

유선 방송 설치를 시작하지 않는 것이 낫지, 설치해놓고 리모콘 들고

틀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지 말라는 거예요.

순간순간의 작은 선택이 중요합니다.

 

에베소서 53절입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어떤 사람은 은근히 성적 농담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위험한 사람입니다.

사랑방 마치고도 그런 얘기하는 사람이 있어요. 미국에서 주로.

 

<여호수아서>에서 가나안의 7족속을 멸하라고 명령하신 이유가 뭘까요.

음란한 문화가 주는 유혹의 환경을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문화적 영향력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가요.

 

2. 조금씩 무너집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틈을 주면 안 됩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한순간에 소돔과 고모라의 땅으로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를 자세히 보면, 아주 공식대로 간 거예요. 조금씩.

 

삼촌 아브라함하고 목초지 문제가 일어날 때부터 전조에요.

목초지 문제로 싸움이 일어나니까. 아브라함은 감을 잡은 거죠.

 

믿음의 길을 선택하기로. 양떼들이나 가축이 당장 죽을 위기가 오지만.

그래, 나는 이 목초지 생존의 문제로 내 인생을 걸지 않고

믿음의 길을 걸어가기로 선택하잖아요. 그래서 조카 롯은 낌새가 달라요.

목초지. 기름진 땅. 물질적 풍요. 화려한 세상의 문화.

거기에 눈독이 들은 거예요.

 

그러니 삼촌 내팽개치고 양보하지도 않고 그냥 가버리는 거예요.

그 기름진 땅을 선택하고 간 출발점에서 그는 서서히

세상의 문화에 녹아들어가면서

 

마침내 선택한 땅의 소돔과 고모라라는

이미 하나님의 진노를 받기에 충분한 타락한 땅으로 들어가

그의 자녀들까지 깊이 오염되고

마침내 그의 아내까지 빼앗기는 안타까운 삶을 살게 되죠.

 

조금씩 무너집니다. 우리도 모르게 우리의 마음이 조금씩 느슨해지면서.

세상의 문화를 따라가면 무너지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511절입니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여러분, 교제권도 선택하라는 거예요.

아무하고나 밥 먹거나 마시지 말라는 거예요.

 

성적 타락을 부추기고 죄에 빠지게 만드는 문화와 관계를

원천적으로 제거하지 않으면 우리의 마음이 무너져 날아간다는 것입니다.

 

작은 것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일상 속의 아주 작은 것.

밥 먹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 덜 먹는 훈련을 해보세요. 덜 먹는 훈련.

그것 작은 것 아닙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그 훈련을 했습니다.

저는 밥 먹을 때 아무리 적게 줘도 남기기도 했습니다.

 

저는 입맛이 좋아요. 너무 맛있게 먹는데 더 먹고 싶은 거죠.

그런데 조금 덜 먹는 훈련. 거기서 작은 승리를 맛 보는 것.

일시적인 만족을 순간적인 만족을 조금 보류하는 훈련.

거기에서 오는 기쁨이 있어요.

 

순간적 쾌락에 탐닉하지 않는 훈련을 일상 속에서 하는 거예요.

그런데 조금 안 하는 거예요. 그리고 덜 해보는 거예요.

갈 수 있지만 안하는 거예요. 절제력을 닦지 않으면

결국 방종과 방탕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를 훈련하는 거죠.

 

3. 주님으로 빈공간을 채워야 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절제력으로만 끝나는 게 아니에요.

우리의 마음 안에 무엇으로 채워져야 하는데 그 채움의 문제가 전쟁입니다.

 

욕망은 채우고자 하는 것이죠.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세상의 것으로 채워지지 않아요.

 

사마리아 여인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해줍니다.

요한복음 4장에 나타난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 다섯으로부터 만족이 안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만족이 안되는 그 불만족, 그 갈등, 그 끝없는 갈구가 언제 해결됩니까.

주님을 만나고. 목마름이 해결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41314절 유명한 말씀이죠.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이 물이 뭐예요.

세상의 물. 끊임없이 만족을 누리려 했던. 세상의 쾌락을 통하여 만족을 얻고자 했던 이 물.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 마르거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그 물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지난 주에도 살펴봤지만

예수께서는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것조차도 간음이라고 할 정도로

간음에 대해서 매우 엄격하게 다루셨던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정작 간음하다 붙잡혀 온 한 여인에 대해서는

전혀 예상 밖의 태도를 취하세요. 요한복음 8장이죠.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예수께로 데리고 왔습니다.

당시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붙잡힌 사람, 증인인 남자가 한 네명 정도 있어야 하겠지만

사실 쉽지 않은 사건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잡기 위한 음모를 가지고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데려온 거예요.

율법을 따라 간음한 자에 대해서 돌로 쳐라는 말씀에 따라

모두 돌을 들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돌을 들어 여인을 죽이려는 순간에

주님의 기가 막힌 말씀. 간음하지 말라.

음욕을 품는 것마저도 간음이라고 하셨던 주님이 그 여인의 죄를 묻지 않아요.

돌로 치라 하지 않고 죄 없는 자는 돌로 치라.’ 이건 용서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돌을 하나 둘 내려놓고 떠나버리고 여자만 남습니다.

그녀를 향해 돌을 던질 사람이 사실 아무도 없었던 거예요.

 

예수님이 이 장면 속에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님이 딱 한 번 글을 쓰신 일이 있는데 그때 땅에 글을 쓰셨다는 거죠.

 

예수님이 글을 직접 쓰신 것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아요.

그런데 이 땅에 글을 무엇이라 썼는지 알 길이 없어요. 성경은 말하지 않아요.

 

추측컨대 예수님이 간음한 사람들의 이름을 적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다 걸리는 거예요.

 

중요한 것은 우리는 남의 죄를 보는 것에 시간이 걸리지 않지만

자신의 모습은 일평생 보지 못해요.

 

우리 자신을 진정으로 볼 수 있는, 그런 일이 없어요. 죄인의 한계.

다른 사람을 향해 화를 내는 것은 잘하지만 자신의 문제로 화를 내지 않아요.

죄인의 딜레마에요.

 

흔히 우리가 그런 말을 많이 하죠. 자기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 그러죠. 막 열을 내요. 저 인간 죽이라고.

 

복음으로 십계명을!

여러분 칠계명을 다루는 동안에 우리 자신들이 누군가를 향해 돌을 들려고 하면 안돼요.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별 것 아닌 것으로 자신의 의를 삼고 상대를 향하여

돌을 든 자들에 대해서 주님은 한 방 날리신 거예요.

 

사실 주님이 여기서 말씀하시려는 본래 의도는 돌을 든 자들,

자기 의에 사무쳐서 자신도 죄인이지만 다른 사람에게 돌을 들고 있는

이 자들을 향하여 주님이 맹렬히 공격하죠.

 

자기 의에 빠져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며

돌을 던지려는 자들이 나중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고 죽이려고 했던 그들이에요.

 

이미 주님은 실패하고 넘어진 자에 대한 긍휼의 마음을 가지시고

그 여인을 대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주님이 그녀에 대한 긍휼을 가지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그 긍휼을 베푸시기를 원하십니다.

 

요한복음 811절입니다.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주님이 용서를 베푸십니다. 이게 복음이에요. 연약하여 실패한 인간에 대한 용서.

물론 용서하셨다고 죄에 대해서 관용하신 것은 아니에요.

죄를 미워하되 죄인을 품으시는 주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의 죄를 들추어내는 게 아니고 회복과 구원에 목적이 있습니다.

주님은 죄의 고발과 심판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시는 이를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주님에게로 나가면 다시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로부터 자유케 하십니다.

 

주님은 죄의 종노릇을 하는 우리의 삶속에서 참된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십계명을 다루는 우리의 목적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죄를 고발하거나 이 죄를 지적하기 위하여 십계명을 다루지 않아요.

 

우리는 연약하며 넘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잡고 나아가기만 하면

우리를 살려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주님은 용서로 끝내지 않죠.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여러분 과연 이게 가능할까요. 굴곡의 삶을 살아왔던 여인이

다시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이 음성이

오늘 우리에게 들려질 때 우리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과연 이게 가능한 얘기일까요.

 

죄의 밤이 깊어진 우리 시대 속에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그러나 여러분 주님은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이 말씀을

 

여인에게 모든 걸 내버려두고 내팽개치면서 너가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내보내신 게 결코 아닐 거예요.

 

나도 너를 도와주겠다.’ 주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면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는 그 사랑 안에서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주님을 만남으로 해결된 것과 똑같습니다.

사실 그녀는 남자를 찾아다닌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아다닌 것입니다.

 

그래서 창녀촌을 찾는 사람도 사실은 창녀를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을 찾고 찾았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삶의 모든 문제가 해결됐습니다.

 

그녀는 이제 진정한 남편 대신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영원한 우리의 진정한 우리의 완전한 남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내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불만족 속에 살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을 남편으로 모시면 우리를 완전한 만족으로 이끌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남편되시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해갈을 충분히 채워주시고도 남는

영원한 생수가 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 주님에게로 나아가면

주님이 우리를 이 세상의 모든 유혹으로부터 넉넉히 이기게 하고

욕망의 세상에 욕망으로 찌들려가던 우리의 심령을 빈 공간을 충분히 채워주고도

남는 역사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 주님에게로 나아가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 주님은 우리를 자유케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만 만족이 있습니다. 어거스틴의 얘기처럼

하나님 안에서만 진정한 안식이 있고 만족이 있습니다.

 

오늘 주님 안에 거하시고 주님의 사랑으로 충만하심으로

이 혼탁하고 어두운 시대 속에서도 승리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칠계명에 온전한 순종을 통하여 아름다운 가정을 생명처럼 지키게 되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타자 J. H. 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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