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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7

646 형제를 돌아봄이 중요한 이유

LNCK 2007. 4. 20. 11:57
 

◈형제를 돌아봄이 중요한 이유        마25:31~40 



“내(예수님)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주여 우리(의인들)가 언제 그렇게 하였나이까?”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도대체 ‘내 형제’는 누구이며

또한 ‘지극히 작은 자’란 누구인가?


그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이기에

그 사람을 대접하고 영접한 사람은 천국에 가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영벌(지옥)에 처해지는 것일까?

참으로 무서운 말씀이 아닐 수 없다.


▲1. ‘인도적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이라고 보는 해석

그래서 ‘불구자, 걸인...’ 이런 분들을 예수님과 동일시해서 본다.

중세시대에 일부 교회가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이런 식의 구제를 강조했던 적이 있다.


오늘도 인도주의humanitarianism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이 구절을 그렇게 해석하고, 또한 강조한다. 

이 해석은, 그(지극히 작은 자)가 예수를 믿든지 안 믿든지

불행에 빠진 사람을 돕지 않으면,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보는 견해인데

본문을 문자적으로 보면 그렇게 볼 수도 있다.

(이 견해가 틀렸다 라기 보다는, 너무 광범위하게 본 것이다.)


▲2. 사도(목회자)들, 선교사들

‘네 형제’를 ‘복음을 전하는 자’로 보는 견해

그 이유는 아래 구절에 근거한다.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요,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 제자라고 해서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받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마10:42


위 구절의 ‘작은 자’를 마25장의 ‘작은 자’와 동일시해서 해석한다.

(마10:42의 ‘작은 자’는 ‘복음 전하는 자, 사도’를 뜻한다.)


염소 편에 속한 자들은, 복음을 전하는 자뿐만 아니라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영접’하지 않았으니, 이들은 영벌에 처해질 것이라고 보는 해석이다.

(이 견해가 틀렸다 라기 보다는, 너무 협소하게 본 것이다.)


▲3. 그리스도의 제자들(성도들, 모든 크리스천) 으로 보는 견해. (가장 맞는 해석) 


즉, 내 주위에 있는 내 형제 자매 성도들을 돕거나, 돕지 않는 것이

그것이 최후의 심판 때, 나의 운명을 결정할 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크리스천이란, 그 생명이 그리스도와 연결(연합)되어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내 주위 크리스천에게 대하는 나의 태도는

곧, 그리스도께 하는 것이 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마25:40


특히 당시에는 그리스도 때문에 가난해진 사람도 많았을 것이고,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당하고, 갇히고, 방황하는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그런 사람을 돕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들을 염소로 분류하신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최후의 심판’에 관한 말씀이다.

우리가 이 말씀을 간과해서 안 되는 이유는,

이 말씀의 해석/적용 방향에 따라 내 영생의 운명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최후 심판의 기준


▲1. 신행(믿음과 행위)일치의 신앙

마태복음에 ‘형제’란 말이 많이 나오는데,

이것은 제자들을 말하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도들을 뜻한다.


양과 염소로 구분되는 최후심판의 기준은

우리가 ‘형제’(성도)들을 사랑하고 있는가, 아닌가? - 의 구분이다.

 

양의 반열에 서서 구원을 받는 사람은 - 형제를 사랑하고 돌아본 사람이다.

이것은 신앙과 생활(행위)의 연결성, 즉 ‘신행일치’의 삶이었다.


우리는 행위구원을 믿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음을 확실히 믿는다.

크리스천들이 행한 행실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정말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의 계명에 순종하고, 그 형제를 사랑하는

믿음의 증거(행위)가 분명히 나타난다는 것이다.


▲요한일서에, 당신이 정말 크리스천인가 하는 테스트 3가지가 나온다.

①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심을 당신은 ‘믿는가’?  4:2, 15

②그리스도의 명령(계명)에 당신은 ‘순종’하고 있는가?  2:4

③다른 크리스천을 ‘사랑’하고 있는가?  2:9 등


위 3개를 모두 합해서 한 마디로 표현하면 ‘믿음’이다.

즉, 참된 믿음이 있는 자는

그리스도께 순종하고,

다른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증거가 나타나게 되어있다.

그래서 양들은, 다른 형제자매를 먹이고, 입히고, 마시우고, 돌아본다....


▲2.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가?

세상에서는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지 않는다고 해서 악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대부분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지 않는다.

다만 적극적으로 악만 행하지 않으면, 착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세상적 기준에서는’ 그렇다.

 

그런데 마25장의 ‘최후의 심판 때’ 그 기준을 보면

한 달란트 받은 자,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자, 염소 편에 속한 자

이들의 공통점은 ‘매우 당황, 당혹해 한다는’ 것이다.

‘어째서 주님은 나를 이렇게 취급하실까?’ 한다.


평소에 자기가 그렇게 ‘왼편’에 분류될 줄은 전혀 몰랐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에서는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이 - 악이 아니다.

그저 보통 사람, 선량한 시민쯤으로 인정받았으므로,

자기 스스로 ‘이만하면 괜찮은 사람, 착한 사람’으로 인정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최후 심판 때의 기준은

‘네가 소극적으로 무슨 죄를 짓지 않고 살았느냐?’ 가 아니라

‘네가 적극적으로 선을 행했느냐, 아니냐?’를 (오늘 본문이) 보여준다. 


‘남들에게 해코지 안 하고, 사기 강도, 피해 안 입히고 나는 선하게 살았습니다!’

가 심판 기준이 아니다. 출제 경향을 잘못 읽었다. 그래서 당황해 한다.


아무리 무슨 큰 죄 안 짓고 착하게 살아도

적극적으로 형제에게 선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주님의 심판 기준으로는... ‘탈락’이다. ‘믿음’이 없는 사람이다.

형제를 사랑하고 돌아봄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3. 소외자를 돌아보는 신앙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지금까지 우리는 ‘내 형제’라는 말씀이 적용되는 범위를

‘예수 믿는 형제자매’로 해석했다.


그런데 본문은, 그 예수 믿는 형제자매 중에서

특히 ‘지극히 작은 자’를 가리키고 있다.


우리는 다들 유명한 분을 대접하기를 좋아하는데...

성경은 ‘천대 받는 사람, 무시당하는 사람’에게 관심가지라고 한다.


부모는 못난 자식이라도 똑같이 사랑한다.

제 자식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장애인, 그 외 소외자들을 따돌릴지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듯이, 극진히 사랑하신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들을 통로로, 나타나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부모가 극진히 사랑하는 자녀들’(소외자들)을, 무시해서는 결코 안 된다.

예수님이 보시는 눈으로, 그들을 섬기고 사랑해야 하며,

무엇보다 그것이 내 영생의 운명을 갈라놓는다는 것이다.


일례로 오늘은 장애인 주일이다.

만약 오늘 유명한 분이 우리 교회에 방문하신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 분을 극진히 영접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장애인이 만약 우리 교회를 방문한다면

사람들이 아무런 관심을 안 가질 수도 있다.


어떤 장애인 복지 시설이 자기 지역에 들어온다고 하니,

많은 사람들이 혐오시설이라고 반대 데모를 했다고 하는데

거기에 혹시 교회 다니는 사람이 끼여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소외자들을 돌아보면서, 우리 주변에 두 번 다시는

총기난사 사건의 주인공 같은 인물이 생기지 않아야 되겠습니다.)


▲염소들의 항변

염소들로 분류된 사람들은, ‘주여, 우리가 언제 돌보지 않았습니까?’

라고 항변한다.


그들도 가난하고, 갇히고, 목마르고, 헐벗은 사람을 돌본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돌아본 사람은 ‘자기 가족, 친구들’이었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불신자들은, 자기 가족사랑은 애틋할 정도로 열심히 쏟아 붓는다.

자기에게 혜택이 돌아올 만한 친분 관계라면, 정말 열심히 돌아본다.

감옥에도 찾아가고, 밥도 사 먹이고, 생활비도 보태주고 하겠지만

그들은 그리스도와 연결된 자들이 아니었고,

예수님의 형제, 자매들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염소가 되었으니까...


▲그런데 본문에서 이상한 것은,

양 편에 속한 사람들은

자기가 사랑하고 헌신한 모든 것들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주여, 언제 우리가 그런 일들을 했습니까?’


구원 받은 성도들은 자기가 한 일(공적)을 기억조차 못 한다.

자기 공로로 구원받지 못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요,

또한 평소에 늘 하기에, 너무 많아서 일일이 세밀하게 기억 못 할 수도 있다.


반면에 염소 편에 속한 자들도

갇힌 자도 돌아보고, 가난한 자도 돕고, 부조금도 많이 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유명한 자, 자기 가족들’들에게 그렇게 하기 쉬웠을 것이다.

또한 ‘자기 이름을 위해서’그렇게 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리스도와는 관련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진짜 ‘소외자’들을 대면할 때는 어쩌면 냉수 한 컵 주기조차 어렵다.

대개는 도리어 피해 버린다.


나중에 그들은 ‘우리가 언제 주님을 돌아보지 않았습니까?’ 하고 항변하지만,

주님은 ‘내가 너희를 모른다’고 하신다.


▲우리 교회의 세 기둥은

선교, 교육, 구제이다.


구제는 ‘해도 좋고, 안 해도 그만인 것’이 아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에 흐르는 사상이요,

참 교회와 거짓 교회(양교회와 염소교회)를 갈라놓는 시금석이 되기도 한다.


<인터넷 설교 발췌 요약, 07.04.15. *원제목: 양과 염소, 마25:3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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