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가 원망, 비난하기 쉬운 이유 눅15:11~32
▲오늘 아침 우리는 충격적인 뉴스를 접했습니다.
미국에서 한 한국인 대학생이 동료 학생 32명을 사살하고 자살했으며
총상을 입은 부상자도 30여명에 달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비보를 접할 때,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몇 가지로 나타납니다.
*자기(가족)와 관련 없으면, 무관심하다는 태도.
*범인을 맹비난하는 태도, (비난할 수 있겠지만, 자기가 의롭다고 보여서는 안 될 것임)
*사건에 경악하면서도, 조용히 중보 기도하는 태도
▲비난 잘 하는 성도?
“정의로운 사람들”과 “올바른 사람들” 가운데 더 많은 원망이 있으며
“성도들” 가운데 훨씬 더 많은 비판과 정죄가 있고
“죄를 피하는데 관심을 둔 사람들” 가운데 냉혹한 분노가 더 많은 것을
우리는 종종 보게 됩니다.
원망, 비난하는 “성도”의 문제점은
그것이 선하고 덕스러운 정의감과 밀접하게 맞물려 있기 때문에
정확하게 그것이 잘못이라고 규정하기가 어렵습니다.
도리어 죄의 함정과 유혹에 빠지지 않으려고 자기를 지키며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세는 매우 정의롭고 훌륭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런 자기를 지키려는 정의감과 도덕성이 지나쳐서,
다른 죄인을 비난하는데 지나치게 앞장선다면
성경에 나오는 ‘탕자의 형’을 떠올리게 됩니다.
▲‘잃어버린 아들들의 비유'
종교개혁 이후 많은 주석가들은
“탕자의 비유, 눅15장”가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 눅18:13”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그들의 주석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 이 본문을 잘 살펴보면 주님이 하신 이 비유에서,
큰아들(탕자의 형)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대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작은 아들만이 아니라 큰아들 또한
치료와 용서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비유의 제목은 “탕자의 비유”가 아니라
“잃어버린 아들들의 비유”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어울릴 것입니다.
▲도덕적 엘리트주의를 경계해야...
작은 아들은 사람들이 쉽게 규정할 수 있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의 죄는 당연한 것이며 아주 명백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돈과 시간과 친구들과 자기 몸을 잘못 사용하였습니다.
그가 한 일들은 잘못된 것이었고
그의 가족과 친구들이 그것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잘못된 행동의 결과는 불을 보듯이 뻔한 것입니다.
하지만 큰아들의 죄와 문제점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는 겉으로 보기에 올바르게 살았습니다.
그는 순종적이고 책임감이 있고 합법적이며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칭찬과 칭송과 심지어 그를 모범적인 아들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그리듯이, 또한 렘브란트의 그림에서 그리듯이,
그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또 다른 ‘잃어버린 아들’이었습니다.
큰아들 같은 이들은
교회 안에 있지만, 아직 진실로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비판을 잘 한다’는 것입니다.
▲비판이 남달리 강한 이유는,
정의감이 남달리 높은 점도 있고,
모태에서부터 성격적으로 ‘비판적’(=도덕적)으로 강하게 타고난 사람도 있습니다.
그 외 신앙적인 이유로는,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임을 아직 깨닫지 못한 것’에 기인할 수도 있겠습니다.
(신앙적인 다른 이유도 있겠지요)
‘적게 사함 받은 자, 자기 의를 내세우는 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직 자기 일생에 예수님을 깊이 만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깊이 예수님을 만나면, 자기가 죄인 됨을 철저히 깨닫고,
다른 죄인을 볼 때, 비판보다는, 긍휼의 마음을 먼저 갖게 됩니다.
이번 ‘버지니아 공대 총격사건’과 비슷한 일을 당하면,
그러나 마치 자기가 죄인인양, 그 죄인의 곁에 나란히 서서 with
묵묵히 속죄의 기도를 드리고,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자기가 대신 사과(회개)하는 사람이,
크리스천입니다.
뉴스를 접하고는 너무 안타까운 마음이 지나쳐서,
혹시 비판하는 것처럼 남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했습니다. 벧전4:8, 약5:20
여러분을 인도하는 지도자들에게 순종하고 그들의 권위를 존중하십시오.
그들은 여러분의 영혼을 책임진 자들이기에 여러분을 주의해서 살피고 있습니다
(히13:17, 쉬운성경, 자기가 회계할 자인것 처럼 하느니라: 개역성경)
<인터넷 설교 토대로 편집,
◑ For(위하여)를 넘어서는 With(함께)
▲죄인들과 함께 세례 받으시다
이 요단강에서 일어난 일은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죄인들(다른 세례 받는 사람들)과 함께 물 속에 들어갔다는 것,
말하자면 버림 받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유대 관계를 가졌다는 것인데
그 때 막혔던 하늘이 열리면서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그 위에 임하여 내려와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이 들려왔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 하늘과 땅은 막혀 있었는데,
그 시대가 끝나고 비로소 하늘과 땅이 열리고
하나님과 죄인이 상호의 깊은 관계를 맺는 것으로서
새 왕국의 시작이 거기에서부터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죄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들과 함께, 죄인처럼!
예수님은 여느 보통 사람처럼 광야에서 시험을 당하시고,
공생애에는 모든 고난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
특별히 굶주리고 박해받는 사람들,
그 사람들처럼, 그들과 함께 자기 자신이 극도의 가난에 허덕이며 살다가
마치 극악한 죄인처럼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면서
이 천지 만물을 새롭게 했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에 의해 시작된 새 역사이며,
우리가 반성해 볼 필요가 있는 부분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변화된 사람은, 그 사랑에 크게 감동된 사람입니다.
그 사랑이 말만이 아니고 몸으로 화하는 성육신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과거에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이웃돕기 헌금을 하고 했던
그런 것을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했던 대로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for’가
‘함께 with’로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고난의 현장을 피하지 말고
그들과 함께 고난을 당한다고 하는 쪽으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교회의 힘
폴 틸리히는 ‘교회가 나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다, 가장 힘없는 단체이다
하는 그것을 깨닫는 때에 역설적으로 가장 강한 때’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다고 사실화할 때
거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들어와서 움직입니다.
그 힘에 의해서 비로소 교회는 가장 큰 힘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 힘은 바로 사랑의 힘, 용서의 힘, 죄인들과 함께 하는with 힘 입니다.
<인터넷 설교에서 발췌
[주제별 분류] 크리스천 인격, 언어 http://blog.daum.net/bible3/11522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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