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파로스 증후군 대하10:8~11
자기 안에 갇히는 게
세상의 그 어떤 감옥보다 더 무서울 수 있다...
◑조총 한 자루
2004 년 KBS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의 한 장면입니다.
때는 임진왜란 3년 전인 1589년.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정명가도(征明假道, 명을 정벌하는데 길을 빌려달다며 가장)를 외치며
쓰시마섬 도독을 조선으로 보내 조선 조정의 속내를 염탐하려 합니다.
조선 개국이후 200여 년간 무사태평을 구가한 왕조는
이미 사림(士林)들의 천하로 변해있습니다.
주자학 이데올로기를 입신양명의 뼈대로 삼는 사림들은
동인과 서인으로 나눠 사색당파 혈투 중입니다.
지식분자들은 동서남북 파당 짓기를 좋아하고
종자와 성분 따지기를 밥 먹듯이 합니다.
▲왜나라를 한낱 미개한 섬으로만 여기는 조선 조정은
일본의 사신들을 여전히 하대합니다.
그들이 '선물'로 내놓은 조총은 사실 선물이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거대 침략전쟁을 암시하는 선전포고적 물건이었습니다.
하지만 선조왕은 조총을 무시합니다.
왜가 조공을 바치는 것이니 선물처럼 그냥 보관해두라 합니다.
윤두수를 비롯한 고관대작들은 왕의 판단을 치켜세우며
조선이 이미 보유하고 있는 무겁디 무거운 대형 총통을 과시합니다.
왜의 鳥銃(조총)을 '한낱 참새나 잡을 총'이라며 장남감으로 조롱합니다.
한마디로 조선 조정은 콧방귀를 날립니다. 3년 뒤 온 국토가 유린당하고
만 백성이 철저하게 도륙당할 것을 모른 채...
이때 이미 일본은 조총이란 신무기로 무장한 20만 군대를 단련시키고 있었습니다.
일본 열도 최초의 통일을 이룩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끓어 넘치는 무(武)의 기운을 대륙으로 향하게 선동하며
통일 일본의 깃발을 펄럭이고 있었습니다.
드라마에서 일본 사신들은 왕세자(광해군)와 류성룡을 은밀히 모셔
조총의 위력을 보여줍니다.
광해군이 직접 겨눈 조총은 화살이 꽂히는 과녁자리를 "뻥" 관통해버립니다.
일 사신들은 일본은 잘 단련된 조총 군대 20만 명을 보유하고 있음을
넌지시 흘립니다. 기겁을 하는 왕세자와 류성룡.
▲이때 조선에게는 세계의 지도가 없었습니다.
온 세상을 파악하는 지리적 개념이 없었던 것.
오직 조선개국 시절 중화본토를 중앙에 배치하고
그 다음 크기로 조선반도를 그려놓은 상상의 지도밖에 없었습니다.
그 지도에 일본은 나오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이순신의 후견인' 류성룡 또한 일본의 조총 20만 대군론을
믿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왕세자는 어서 빨리 일본에 사신을 보내 적정을 탐지해야 한다고 재촉하지만
'왕의 심기'를 거스를 지가 먼저 염려됩니다.
신하된 류성룡도 마찬가지.
바깥세상은 변화무쌍한 파고가 천하를 넘실거리고 있었건만...
명나라 다음으로 조선 땅만이 천하의 전부라고 여기는 고루한 진리.
이 꽉 막힌 주상전하 심기와 수구대신들의 안목에 어떻게 대들 것인가...
도도한 지구적 문명은 '劍의 시대'에서 '銃의 시대'로 대 변혁을 하고 있는데도.
◑옴파로스 증후군
일상은 잔잔한 행복감을 주는 무대도 되지만,
단조로운 권태도 스멀거리게 합니다.
일상의 반복은 타성을 낳고 감흥 없는 무미건조한 나날로 이어집니다.
生이 유지되는 하루는 '시작 - 진행 - 완료 - 마감' 이라는
진부한 공식으로 되풀이 됩니다.
익숙함은 길들여짐이고 스스로의 안일에 훈육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변화가 반갑지 않습니다.
▲이때부터 타자(他者)에 대한 배타성이 본격화됩니다.
도전은 두렵고 타 문화 속으로 쉽게 가지 못합니다.
외지로 길 떠나는 것은 용기가 됩니다.
배타의식이 높아질수록 자기순환 회로에 갇히게 됩니다.
자기류(自己流)가 쌓이는 폐쇄적 반복이 관습으로 축적됩니다.
익숙한 관습에 파묻히고 여간해서는 왜래 문화를 수용하지 않습니다.
이런 흐름이 흔들리면 극도로 피해의식을 갖습니다.
타인을 배척하고 타 문화가 이식되는 것을 어색해 하고
외지인과 잘 어울리지 못합니다.
동일 집단속에서만 안온하고 타자의 집단에서는 안절부절 못합니다.
점차 우물 안 개구리가 됩니다. 바로 정주민들의 '옴파로스 증후군'입니다.
유목민들에게 옴파로스 증후군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이 사는 곳을 세계의 중심이라고 믿었습니다.
그 중심을 아테네 동북쪽 델포이에 있는 돌로 정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그 지점을 옴파로스(omphalos, 대지의 배꼽)로 명명하고
자기중심적인 세계관을 펼쳤습니다.
세계지도를 제작할 무렵 선진 제국은 모두 자기나라를 중심에 놓고
딴 나라를 외곽에 배치했습니다. 후일 학자들은 이런 일방적 자기중심주의를
'옴파로스 증후군'이라 불렀습니다.
옴파로스 중후군이 농후하면 내부 권력투쟁이 치열해집니다.
타자문화에 대해 문을 잠궈 놓고
성문 안에서 자기네들끼리 죽기 살기로 이론투쟁을 벌입니다.
미화된 대의명분의 깃발만 나부끼고
투쟁에 실패한 숱한 주검들이 무의미하게 나뒹굴고 맙니다.
소모적 승리일 뿐입니다.
동일 족속 '토종'끼리의 결합은 위태롭거나 쓸쓸합니다.
바로 '순수혈통' 명분주의의 취약성입니다.
외부로 확장되지 않고 안팎이 섞이지 않으면 도태되고 맙니다.
흐르지 않고 정체된 것은 결국 부패하기 때문입니다.
(중략)
백두산을 위쪽에 둔 한반도 지도만이 우리의 존재위치가 아닙니다.
태평양(온 세상)을 위쪽(또는 중심)에 둔 새 지도도 있어야 합니다.
늘 타자를 향해 열린 자세로 내 자신을 상대적 공존 위치에다 배치하는 것,
열려 있지 않으면 위험에 처하게 되는 시대가 만만찮게 다가옵니다.
*출처: "타인이 두려운 옴파로스 증후군"
http://www.donga.com/e-county/sssboard/board.php?s_work=list&tcode=0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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