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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적 기독교와 현상적 기독교

LNCK 2007. 6. 30. 13:58

 

◈본질적 기독교와 현상적 기독교             시106:24~25

 

 

▲기독교는 본질을 추구한다.

철학에서는, 보이는 세계를 ‘현상’이라 일컫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본질’이라 일컫는다.

그리고 ‘본질’‘현상’보다 중요하고, 더 앞선다고 말한다.

 

그런데 참으로 이 시대의 기독교가 안타까운 것은,

진리를 믿는 기독교가 자꾸 ‘본질’에서 벗어나

‘현상’으로 치우쳐 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현상’을 중시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거대한 시대사조의 물결에

일부 기독교마저도 거기에 절반 휩쓸려 표류해 떠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철학자중에도 조금 수준 있는 사람은 ‘본질’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진리를 믿는 사람이 ‘본질’의 중요성을 망각하고,

왜 눈에 보이는 ‘현상’만을 추구하며 그것이 최고인양 강조하며 살아가는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거의 다 ‘본질’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것이 그렇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분별도 못한 채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다 현상화 해서 증거 되어지고 있는 것이

심히 안타까운 오늘날의 현실이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5:3절부터 팔복이 나온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한 자, 온유한 자...

 

아무리 읽어봐도 모두 ‘복’을 이야기 하지만,

돈 되는 현상적인 얘기는 하나도 없다.

거기서 가르치는 복은 모두 본질적인 복이다.

 

팔복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은, 성경을 다 뒤져보아도,

사실 돈 되는 얘기는 없다.

세상은 현상을 말하지만, 성경은 ‘본질’을 말하기 때문이다.

 

다윗이 시편1편에서 말하는 복도, ‘본질’적인 복이다.

여기서 아무리 읽어봐도

‘복 있는 사람은.. 신랑이 돈 잘 벌어오고, 자식이 공부 잘 하고,

이빨이 튼튼하고 몸이 건강하며, 손대는 사업마다 돈이 착착 달라붙고...’ 등

이런 현상적인 얘기가 하나도 안 나온다.

 

바울도 고후6:9절에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위의 성경에서 보듯이, 예수님이나 다윗이나 바울이나 모두

‘본질’에 충실하고, ‘본질’적인 복을 추구했다.

 

 

▲그러면, 기독교는 ‘본질’적 복만 받으면 그만인가?

현상적 복은 없어도 괜찮다는 것인가? - 물론 그렇지 않다.

그러나 ‘본질’적 복을 받으면, 현상적 복은 저절로 따라 온다는 것이다.

 

다만 ‘본질’적 복은 잃어버린 채, 현상적 복만 받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모래위에 건축한 집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본질과 현상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다.

이것은 현상이다. 그러나 아직 그 속에 ‘본질’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속에 생기(본질)를 불어 넣으시므로,

그가 진정 사람이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숨, 곧 성령’이 없는 사람은 ‘본질’이 빠진 사람이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고 하시며 성령을 채워 주셨다.  요20:22

 

그래서 본질적인 사람, 성도는 성령의 인도아래 살아간다.

그런 본질이 약화되면,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눈에 보이는 현상에만 급급하게 되어있다.

그래서 불안, 초조 가운데 더 획득하고, 더 쌓으려고 발버둥친다. 

 

 

▲부부사이의 본질과 현상

부부사이에도 ‘본질’이 중요하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고 신뢰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젊은 부부들이, ‘본질’을 잃어버리고

현상만을 추구하며 살고 있다. 세상이 점점 그렇게 변해가고 있다.

 

남편이 아내에게 반지를 사 줄 때, ‘본질’은 사랑이고, 현상은 반지이다.

그런데 주는 남편이나, 받는 아내나, 구경하는 이웃집 사람이나,

‘본질’적 가치는 따지지 않고, 얼마짜린가 하는 현상적 가치에만 궁금해 한다. 

 

철없는 아내는, 반지를 선물 받고는, 신랑은 안 쳐다보고 종일 반지만 쳐다본다.

더 심한 경우는, 남편이 애인에게 사 주려다 어떻게 못 전달하고,

할 수 없이 부인에게 던져 준 반지를 받고도,

비싼 반지만 받으면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한다. 사랑(본질)은 관심 밖이다.

 

 

본질을 싫어하는 사람의 본성

 

광야에서 출애굽 중인 백성들은

그 아름다운 땅(가나안)을 싫어하고

주의 약속을 믿지 않았습니다.

장막에 들어앉아 불평만 하고,

여호와께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시106:24~25

 

그러자 ‘주께서 그들에게 진노하셨습니다’ 라는 내용이 뒤이어진다.

 

부모가 자녀에게 좋은 생일상을 차려줬는데,

자녀가 발로 걷어차듯이,

하나님은 애써 10재앙, 홍해기적을 통해서 저들을 광야 훈련과정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복된 땅, 가나안을 장차 예비해 놓으셨는데,

백성들이 눈에 안 보인다고 삐져서

장막 안에 들어가 수군거리며 불평만 했다는 것이다.

대신에 눈에 보이는 금송아지를 만들고 춤추며 뛰놀았다.

시106:19

 

오늘날 나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이다.

그런데 그것은 본질이고, 눈에 보이는 현상이 아니다. 

 

그 때 ‘도대체 하나님을 믿고 따른 결과가 이런 것인가!’ 하며

집에 틀어박혀 하나님께, 광야 백성들과 똑같이, 불평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워낙 현상적인 결과를 강조하는 설교들을 사방에서 듣다보면,

그런 딜레마에 더 깊이 빠져든다.

 

명심할 것은, 하나님 나라의 복은 본질적인 것이다. 눈에 안 보인다.

그런데 현상적 복이 내게 나타나지 않는다고 불평하면

그러면 하나님이 진노하신다는 것이다.

불순종한 광야 백성들에게 진노하신 것처럼!

 

진정 거듭나고 속사람이 변화한 사람은, 유혹은 받겠지만,

본질적으로 '위의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옛사람은 '땅의 것'만 좋아한다. <인터넷 설교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