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의 세례 막10:3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막10:38
신약 성경에는 세 가지 세례가 나옵니다.
어떤 신자는 한 번만 세례 받습니다.
어떤 신자는 세 번의 세례를 다 받습니다...
▲1. 물세례
처음에 예수를 믿고, 신앙을 고백하는 신자는 물세례를 받습니다.
물을 뿌리든지, 물에 잠그든지 그런 형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의미’입니다.
그 의미는, ‘씻어 깨끗케 한다’, ‘(과거의 자신이)죽었다가 다시 태어난다’
라는 뜻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세례를 받은 많은 사람들의 간증은,
‘뭔가 뜨겁고 확 달라지는 느낌’을 기대했었는데,
이구동성으로 그런 것이 없었다고 하면서
간혹 혼자 속으로 실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거였나?’
그렇지만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났다는 ‘믿음으로’
예수님의 신부로 이제 ‘공개적으로’ 결혼식을 올렸다는 것을 ‘믿음으로써’
그 세례의 의미는 오늘날에도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모든 족속에게 세례를 주라고 직접 명령하셨습니다. 마28:19
그런데 한 가지 눈여겨 볼 것은,
성경에 보면, 물세례는 ‘믿으면 그 자리에서 즉시’ 시행했습니다.
빌립이 광야에서 에티오피아 고위 관리를 만나서 복음을 전하고
‘그 자리에서 즉시’ 그에게 물세례를 주었습니다. 행8:38
사도바울이 빌립보에서 옷감 상인 루디아를 만나서 전도하고,
‘그 날 그 즉시’ 그 가족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행16:15
사도바울은 빌립보 간수의 가정을 전도하고,
‘그 자리에서 즉시’ 그 밤에, 그들에게 물세례를 베풀었습니다. 행16:33
물론 오늘날 시행하는 세례 규례는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행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병상에 누워서 교회를 못 나오는 사람들,
기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세례식’을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신앙고백을 한 후에 ‘그 자리에서 즉시’ 세례를 베풀어도 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미국의 목사님은 ‘휴대용 세례기와 성찬기’를
차에 항상 싣고 다니신다고 합니다.
▲2. 성령세례
세례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면서, 너희는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면서
성령세례 받을 것을 예언했습니다. 마3:11
베드로는 처음에 이 말씀의 뜻을 깨닫지 못하다가,
사도행전에서 실제로 성령세례를 받고 난 다음에,
‘아, 전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기억했습니다. 행11:16
예수님도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3:5
어떤 분은, 물세례나 성령세례나 모두 성령의 역사이므로, 똑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똑같은 세례이나, 단 ‘깊이의 차이’는 있다고 봅니다.
물세례가 발목까지 차는 세례라면,
성령세례는 온 몸까지 잠기는 세례입니다. (에스겔서 47장 강물 체험 참조)
사도바울 같은 이는, 예수님을 믿자마자 성령세례까지 동시에 받았습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성령세례부터 먼저 받고
그 다음에 아나니아에게 물세례를 받았습니다. 행9:18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제자들은
처음에 예수님을 믿고 따라다니다가
몇 년 후에 사도행전에서 ‘성령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물세례’를 받은 신자는, 거기에 만족하지 말고,
‘성령세례’를 사모하며 그것을 받는 자리까지 나아가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래서 물세례식을 거행할 때,
‘장차 곧 성령세례까지 받으시라!’고 축복하는 목회자들이 많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성령세례, 회심, 거듭남 등이
신자가 처음에 신앙고백을 드린 후에
새롭게 다시 체험하는 ‘다시 태어남’의 의미에서,
본질은 같은 것이라고 봅니다.
‘육적인 크리스천’에서 → ‘영적인 크리스천’으로 변화하는 과정입니다.
바울이 육에 속한 자, 영에 속한 자를 구분하지 않았습니까? 고전2:14, 3:1, 3:3 등
▲3. 고난의 세례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막10:38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무슨 큰 집 사고 사업이 잘 되는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고난의 세례’를 받는 자리에... 순종하며 나아갔습니다.
그래서 12사도 대부분과 사도바울은 모두 순교로 하나님께 영광 돌렸습니다.
왜 그러면, ‘고난의 세례’를 받아야 할까요?
왜 그들은 ‘고난의 세례’를 기꺼이 영광스럽게 받았을까요?
아래 시편의 말씀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시126:5~6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주님의 나라를 위해 고난을 당하고 있는 일이라면,
거기엔 “반드시” 열매가 맺어질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고난은 없고 승승장구하기만 하다면,
거기엔 아무 열매가 없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예수님은 ‘고난의 세례’를 자원해서 받으심으로써
많은 인류를 구원하시는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12사도와 바울사도의 순교를 통해,
복음은 당시의 땅 끝까지 전파되었습니다.
오늘도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만, ‘고난의 세례’를 견딜 수 있습니다.
‘성령세례’를 받지 못하면, ‘고난의 세례’의 잔을 마실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느 세례까지 받을 것입니까?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물세례만 받고,
그 다음에 달콤한 ‘축복의 세례’만 받으려고 매달리지는 않습니까?
<인터넷 설교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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