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주님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것 시73:25~28 2008.03.02.출처
김명혁 목사
오늘 광명 행복한 교회에 와서 행복에 대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만화 중에 촬리 브라운이 등장하는 만화가 있는데
만화의 주제는 언제나 “행복은 … 것” 입니다. 입니다.
“Happiness is … ”입니다.
몇 가지 예를 여러분들에게 소개합니다.
“행복은 나무 그늘 아래서 낮잠을 자는 것”
“행복은 둘이서 손을 잡고 걸어가는 것”
“행복은 새 옷을 처음 입어보는 것”
“행복은 두 종류의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
“행복은 나무에 오르는 것”
“행복은 비밀을 알게 되는 것”
“행복은 집에 돌아오는 것”
“행복은 누나와 함께 노는 것”
“행복은 샌드위치를 나누어 먹는 것”
“행복은 둘이서 함께 노래하는 것”
“행복은 때로 혼자 있는 것” 등인데,
작고 소박한 것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아주 중요한 진리를 말해주고 있는 만화입니다.
사실 행복은 작고 소박한 데서 옵니다.
감옥에 갇혀 계시던 주기철 목사님은 따끈한 숭늉 한 사발을 마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지 모른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행복은 춥고 외로운 감방에서 따끈한 숭늉 한 사발을 마시는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행복은 작고 소박한 것에 만족을 느끼는 데서 옵니다.
▲저는 오늘 아침 촬리 브라운의 만화의 형식을 따라서
또 하나의 “행복은 … 것” 이란 말을 하려고 합니다.
저는 “행복은 주님을 사모하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Happiness is yearning and loving the Lord”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시73편의 저자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25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고백인지 모릅니다. :28
시편16편의 저자인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편65편과 84편의 저자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주의 집에 거하게 하신 자가 복이 있나이다.”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고백들인지 모릅니다.
“행복은 주님을 사모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행복은 주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행복은 백악관이나 청와대에 사는 것이 아닙니다.
참 행복은 주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고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고
주님의 집에 사는 것이고
주님을 사모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죄인인 한 여인은 최고로 행복한 여자였습니다.
주님을 뜨겁게 사모하고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죄인인 한 여인이 어떻게 주님을 사모하고 사랑했는지를 누가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눅7:37,38).
진정한 사모와 사랑은 체면이나 물질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진정한 사모와 사랑은 체면도 물질도 시간도 정성도 눈물도 모두 쏟아 바칩니다.
마음과 심장을 살피시는 예수님께서 그 여인의 사랑을 귀하게 여기시고 칭찬하시면서
그 여인을 비웃고 있던 바리새인에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눅7:44-47).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죄인인 한 여인은 최고로 행복한 여자였습니다.
주님을 뜨겁게 사모하고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베다니 촌의 마리아도 최고로 행복한 여자였습니다.
주님을 뜨겁게 사모하고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베다니 마리아가 어떻게 주님을 사모하고 사랑했는지를 누가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눅10:39-42).
베다니 마리아는 주님의 발 아래 앉아서 주님의 말씀을 듣는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죄인인 한 여인처럼 그녀도 지극히 비싼 향유를 가져다가
예수님의 머리와 발에 붓고 자기 머리 털로 주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그 기사가 요12장과 마26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주님께서는 베다니 마리아의 사랑의 행위를 기쁘게 받으시면서 그녀를 최고로 칭찬했습니다.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마26:12,13).
주님을 뜨겁게 사모하고 사랑한 베다니 마리아는
주님으로부터 최고의 칭찬을 받은 최고로 행복한 여자였습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사 복음서에 모두 등장하는 막달라 마리아도
최고로 행복한 여자였습니다. 주님을 뜨겁게 사모하고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죄 사함과 병 고침을 받은 후
주님을 떠나지 않고 항상 주님을 사모하고 사랑했고 주님을 따르면서 주님을 섬겼습니다.
“이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 쌔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눅8:1-3).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요19:26).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요20:11).
진정한 사모와 사랑은 함께 있는 것인데 막달라 마리아는 항상 주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진정한 사모와 사랑은 박해나 조롱이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인데
막달라 마리아는 십자가 곁에 서서 주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진정한 사모와 사랑은 울면서 보고 싶어하는 것인데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면서 주님을 보고 싶어했습니다.
결국 부활의 주님께서 제일 먼저 나타나서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분부하신 사람은
사도들이 아닌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사랑은 사랑으로 통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요20:16-18).
주님을 뜨겁게 사모하고 사랑한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의 주님을
제일 먼저 만나서 부활의 메시지를 전한 최고로 행복한 여자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주님을 뜨겁게 사모하고 사랑한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에 미칠 정도로 예수님을 사모하고 사랑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전에 아주 좋아하던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똥으로 여깁니다.
지금 나에게 있어서 제일 귀하고 제일 보배로운 것은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과 사귀고
예수님을 얻고 예수님 안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3:7,8).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1:20,21).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와의 뜨거운 사랑의 줄에 매어있었기 때문에
환난이나 핍박이나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의 힘은 죽음의 세력이 이기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줄에 단단하게 매여있던 사도 바율은 이렇게 소리치며 외쳤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5-39).
사도 바울은 교회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주님을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하라고 권면하면서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저주를 받으라고까지 강하게 권면했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고전16:22).
사도 바울은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 주님을 뜨겁게 사모하고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패니 크로스비는 태어난 후 6주부터 앞을 못 보는 맹인으로 한 평생을 살다가
95세에 세상을 떠난 불행한 사람이었지만
패니 크로스비는 이 세상에 살던 어떤 사람보다도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을 너무나 뜨겁게 사모하고 사랑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부르는 찬송가들 중에서 제가 가장 깊은 감동과 은혜를 받는 찬송가들은
패니 크로스비 여사가 작사한 찬송가들입니다.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
“예수께로 가면 나는 기뻐요”
“자비한 주께서 부르시네 부르시네 부르시네 ”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오 놀라운 구세주 예수 내주 참 능력의 주시로다”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 보다 귀하다”
“후일에 생명 그칠 때 여전히 찬송 못하나”
패니 크로스비가 작사한 찬송가가 우리 찬송가에 23개나 수록되어 있습니다.
패니 크로스비는 부흥 집회에 참석해서 간증을 많이 하곤 했는데
어느 부흥 집회에서 어느 목사님이 패니 크로스비를 동정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그렇게도 많은 선물들을 주셨는데
세상을 볼 수 있는 시각을 선물로 주시지 않은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패니는 즉시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제가 태어날 때 하나님께 기도를 할 수 있었다면
저를 맹인으로 태어나게 해 달라는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목사님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면서 “왜 그렇습니까?” 라고
패니에게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천국에 이르렀을 때 내 눈이 제일 먼저 보고 좋아할 수 있는 얼굴이
나의 주님의 얼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분명히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패니 크로비는 주님을 너무너무 사모하고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찬송시도 지었는데 그가 가장 사랑하던 찬송시였다고 합니다.
패니는 그 찬송을 자기 ‘영혼의 찬송시’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후일에 생명 그칠 때 여전히 찬송 못하나
성부의 집에 깰 때에 내 기쁨 한량 없겠네
내 주 예수 뵈올 때에 그 은혜 찬송하겠네
내 주 예수 뵈올 때에 그 은혜 찬송하겠네
후일에 장막 같은 몸 무너질 때는 모르나
정녕히 내가 알기는 주 예비하신 집 있네
후일에 석양 가까워 서산에 해가 질 때에
주께서 쉬라 하실 때 영원한 안식 얻겠네
그 날을 늘 기다리고 내 등불 밝게 켰다나
주께서 문을 여실 때 이 영혼 들어가겠네
내 주 예수 뵈올 때에 그 은혜 찬송하겠네
내 주 예수 뵈올 때에 그 은혜 찬송하겠네”
사실 패니 크로비는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와 어머니의 사랑과 신앙의 감동 감화를 받으면서
주님을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너무너무 행복했습니다.
패니가 9살 났을 때 이런 시를 썼습니다.
“오!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내가 비록 세상을 볼 수는 없지만 나는 세상에서 만족하면서 살기로 다짐했다오.
다른 사람들이 누리지 못하는 행복을 나는 얼마나 많이 누리고 있는가?
다른 사람들은 울기도 하고 한숨도 짓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하지도 않을 것이라오.”
패니 크로스비가 92회 생일을 맞았을 때
그의 생일을 축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 나보다 더 행복한 사람이 있으면 내게 데려오세요. 그 사람과 악수하고 싶어요.”
주님을 가장 뜨겁게 사모하고 사랑하면서 산 사람 그녀는
분명히 가장 행복하게 느끼면서 세상을 산 사람이었고
그녀는 분명히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60 또는 70이 지나면 지치고 피곤해져서
행복을 상실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패니 크로스비는 90세가 되었을 때 영적인 삶에 있어서 최고의 해였다고 합니다.
기쁨과 즐거움의 포도주가 넘치는 풍부한 시간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녀의 설교를 듣기 위해 수 많은 청중들이 교회당을 꽉 메웠습니다.
그녀는 장미꽃이 가득한 작은 탁자에 서서 그 꽃들을 만지면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삶의 마지막 때에 당신들을 만나게 되어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지금도 나는 황혼이 아닌 영원한 일출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소망의 별들이 지난 50년 보다 더 선명하게 지금 내가 가는 밤길을 환하게 비추고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시든 꽃이 아니며 오히려 부유함과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소망은 항상 내 노래와 함께 있어왔는데
그 소망의 빛은 오늘 밤에도 여전히 밝게 비추고 있습니다.
그 빛은 나의 삶의 아침을 밝혔고 낮의 왕성한 활동을 뿜어내게 했으며
어두운 저녁 시간을 비추고 있습니다.
그동안 나는 어렵고 힘든 인생을 위해서 변함 없이 소망의 시를 써 왔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지만 하늘 도성에 들어갈 때까지 소망의 사역을 수행할 것입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패니 크로스비의 간증 설교를 들으며
깊은 영감에 사로잡히고 있었습니다.
패니 크로스비의 간증 설교는 물 흐르듯 흘러갔습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은 나이와 함께 발전해갔습니다.
큰 호수의 일몰이나 큰 파도의 출렁임은 나에게 놀라움을 주었습니다.
오늘 밤 여기 달처럼 빛나는 아름다운 장미꽃 향기는 깊은 감동을 줍니다.
가볍게 부는 바다 바람은 내 마음에 삶의 의욕을 불러일으킵니다.
또한 도시나 농촌에서 예술가들과 만나는 일은 항상 즐거웠습니다.
성탄절이 되면 나의 방은 성탄절용 나무와 가지가 있었음에 틀림없었습니다.
그리고 부활절에는 백합과, 장미와 함께 지냈을 것입니다.
사실 나는 두려움보다 사랑하고 감사할 것이 많았습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던 많은 슬픔들이 내 인생의 여정을 가로질러왔습니다.
그러나 겟세마네 동산 너머에서 들리는 천사의 목소리가
영원한 빛의 땅인 감람산에 도착하도록 했습니다.
나는 50년 전보다 지금 더 어린이들을 사랑합니다. 이 녀석들이 아주 편해요.
그래서 오늘 이곳의 많은 어린이들을 알게 되어 행복합니다.
나는 항상 말합니다. ‘어린이들을 데리고 오세요.
패니 아주머니는 어린이들을 위한 무언가가 있습니다’ 라고요.”
“나는 단지 하나님의 도구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내 시에 대한 대가로 첫 번째 수표를 받았을 때
나는 도울 것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손을 넓게 열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90년 동안 나는 사례를 위해 봉사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재정적인 결과에 구애 받지 않고 하루 종일 일하기를 원했을 뿐입니다.
그저 사례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결국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돈은 합당한 자리에 있어야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돈이 우리의 주인이 되었을 때 그것은 땅에 강하게 쳐 박히는 가시 면류관으로 변합니다.
주님은 나의 진실한 목자셨습니다. 주님이 보내주신 두 천사, 자비와 진실은
오랜 삶 가운데서도 결코 부족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나는 주님의 집에 영원히 거할 것입니다.
참새가 떨어지는 것조차 아시는 하나님의 보살핌으로 나는 항상 주님과 동행할 수 있었습니다.”
패니 크로스비는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돈이나 명예나 부귀나 건강을 사랑하는 대신 오직 주님만을 가장 뜨겁고
가장 순수하게 사모하고 사랑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사랑하는 송명희 시인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하겠습니다.
행복한 교회의 이방주 목사님도 송명희 시인을 너무 좋아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송명희 시인은 주님을 너무너무 뜨겁게 그리고 순수하게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저는 송명희 시인과 수 많은 편지를 주고 받았는데
지난 2월 16일 날 주고 받은 편지 중 제가 송명희 시인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를
여러분들에게 읽어 드리므로 오늘 아침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사랑하는 송명희시인에게. 많은 생각의 글을 보내주어서 고맙게 읽었습니다.
‘제 사적인 생각을 나눈다는 의미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고요’ 라고 했는데
사적인 생각을 진솔하게 표현하고 나누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족하고 부끄러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도 아주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인간치고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괜찮다고 들어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극심한 고통을 당하면서 그것을 기쁘고 즐겁게 감내할 사람도 거의 없을 것입니다.
사실 욥도 한 동안 회의와 원망과 갈등을 마음 속에 품고 있었으니까요.
나는 송명희 시인이 좋습니다.
패니 크로스비는 너무너무 존경하고 조니 에릭슨은 너무 귀하고 아름답고
레나 마리아도 너무 귀하고 아름다운데
송명희 시인은 너무너무 귀하고 아름답고 아주 많이 존경합니다.
그리고 애인처럼 사랑합니다. 송명희 시인의 영혼이 순수하고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너무 귀하고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영감에 가득한 시를 지어서 수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 때문입니다.
나는 송명희 시인의 사랑하고 싶어라 라는 제목의 시를 좋아하다가
나도 같은 제목의 시를 썼습니다.
여기 우리 두 사람이 쓴 시를 그대로 싣습니다.
송명희 시인의 시를 먼저 적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싶어라
내 마음 다하여 모든 것 다하여
그 무엇보다 더 그 누구보다 더
내마음 뜨겁도록 타오르는 불길보다 더 뜨겁게
그리하여 그리하여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녹기까지
사랑하고 싶어라
변함없이 영원히’
그 다음 제가 쓴 시를 적습니다.
‘사랑하고 싶어라.
나는 요사이 주님을 생각하면 가슴에 눈물이 흐른다.
한 평생 나를 향하신 주님의 생각과 사랑이
어찌 그리 크고 어찌 그리 많은지!
실로 모래알보다 더 많은 주님의 긍휼과 용서와 사랑이
나의 가슴에 눈물을 자아낸다.
사랑하고 싶어라. 주님을 사랑하고 싶어라.
나의 맘 나의 몸 나의 정성 다 쏟아
주님을 사랑하고 싶어라.
나는 요사이 사람들을 생각하면
가슴에 눈물이 흐른다.
어린이들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너무너무 귀엽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너무너무 예쁘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이 세상 곳곳에 흩어져 사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만날 때도
비슷한 느낌을 가진다.
저들의 얼굴과 마음과 영혼 속에
창조주 하나님께서 심어놓으신
고귀한 인성과 신성의 흔적을 보기 때문이다.
저들을 모두 사랑하고 싶어라.
모슬렘도 공산주의자도 상관이 없다.
저들은 모슬렘이나 공산주의 라는 불행한 유산에 쌓여있는
가련한 영혼들일 따름이다.
사랑하고 싶어라.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어라.
나의 맘 나의 몸 나의 정성 다 쏟아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어라.’(2007.1.3).
우리는 이름 석자 중에 한 자도 같고, 같은 제목과 내용의 시도 섰으니
애인임에 틀림 없습니다.
지난 수요일 저녁 송명희 시인의 집에 가서 부모님 그리고 동생과 함께
그리고 저희 집 사람과 차순희 집사와 함께 수요 저녁예배를 드릴 수 있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은혜로운 예배를 함께 드릴 수 있어서 참으로 좋았습니다.
‘꽃 바구니도 예쁘지만 옹달샘 같은 목사님 말씀이 더 좋고요.’
라고 했는데 나도 아주 좋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위로와 도우시는 은혜가
송명희 시인과 몸이 불편하신 어머님 아버님에게 항상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토요일 김명혁 목사”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무엇이 행복입니까?
주님을 뜨겁고 순수하게 사모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영원토록 아름답게 빛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보다 더 귀하고 아름다운 것은 없는데
모든 사랑 중에서 주님을 사모하고 사랑하는 것보다
더 귀하고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물론 그 사랑은 사람들 사랑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주님을 사모하고 사랑하는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008-03-01 김명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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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풍부한 환경은 치명적이다 (이하 모두 펀 글)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 시73:19
쥐를 100마리씩 두 그룹으로 분류하여 실험해 보았습니다.
쥐들은 사람과는 달리 포만감을 느끼면 더 이상 먹지 않습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쥐가 포만감을 느끼는 양을 조사해 보았더니,
쥐 한 마리당 하루에 평균 100 Kcal정도임을 알았습니다.
첫 번째 그룹의 쥐 100마리에게는 좋은 환경과
넉넉한 음식을 주었습니다.
두 번째 그룹은 포만감을 느낄 정도보다 약간 적은 85 Kcal만큼의
양을 공급하였습니다.
이렇게 사육한 후에, 이 두 그룹에 암을 유발시키는
화학물질을 주사했습니다.
그 결과 첫 번째 그룹의 발암 정도는 65%,
두 번째 그룹은 4%로 나타났습니다.
그 이유를 조사해 보았더니,
첫 번째 그룹의 쥐가 암에 많이 걸린 것은
병원균과 싸워서 이기게 하는 요소인 T임파구가
과식으로 인해 무력하게 되었기 때문임이 밝혀졌습니다.
첫 번째 그룹의 쥐들이 느낀 포만감이
결국은 쥐의 생명에 위협을 주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사는 환경이 포만감을 느낄 정도로 너무 풍부하게 되면>
우리의 영혼에 침투하는 병원균에 대한 저항력이 약화되어
결국 우리의 영혼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
그렇다면 나는, ‘풍부한 가운데 치명적인 병’을 안고 살아야 할까요?
아니면 ‘가난함 가운데 영육간의 건강함’을 안고 살아야 할까요?
예수님은 ‘부유하신 자로서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풍부함 가운데 사명을 위해 가난하게 사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그런데 사실 부와 가난을 자기 힘으로 결정하기 힘든 요인도 반드시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난하든지, 부유하든지’에 관계없이
사명을 위해 열심히 사는 것이 좋겠습니다.
한국인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실 삶이 불편할 정도로 가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이 견디기 힘든 것은, ‘가난에서 오는 삶의 불편함’ 보다는,
오히려 ‘남들이 혹시 던지는 시선’에서 오는 불편함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 것에서 ‘자유’하려면, 더 많은 믿음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펀 글 편집)
◑열매도 고난 가운데 맺힌다.
윗 글에서, 가난은 ‘소극적으로’ 자기 자신의 부패를 방지해 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가난을 포함한 여러 고난을 통해
사실상 주님의 나라에 열매가 맺힙니다.
우리는 세상 사조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아서,
‘부자가 되어서 풍부해야 주님의 일을 한다’
‘모든 게 평안하고, 잘 풀려야 주의 일을 많이 한다’는 (잘못된) 생각이
이제는 거의 의식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만약에 돈과 권력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다면,
주님은 빌게이츠 같은 돈 많은 CEO로 이 세상에 오시든지,
아니면 세계제국을 통합해서 다스리는 절대권력자로 오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가난하고, 아무 권력도 없이... 오셨습니다.
그렇지만 얼마나 사명을 멋지게 감당하셨습니까?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돈과 권력을 우선순위로 해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 시도는... 하드웨어는 건설할지 몰라도, 소프트웨어는 절대 안 됩니다.
하드웨어가 ‘건물과 시설과 조직’이라면,
소프트웨어는 ‘사랑, 섬김, 희생, 봉사, 성결, 믿음, 소망’ 등입니다.
주님 일을 하기 위해 무조건 가난하고, 고난당해야 한다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 일을 하고 섬기다 보면,
그런 원치 않는 형편에 처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돈이 없어서 못 한다’는 사람이 있고,
‘없으면 없는 대로 한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날 퇴직금 등 많은 돈으로, 사업에 크게 실패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나라 복음전파 사업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이 많으면 성공할 가능성도 크지만,
실패할 가능성도 훨씬 더 높습니다.
어떤 선교사, 사역자는, 항상 자금이 부족하다는 타령을 합니다.
그러나 갑자기 자금이 많아지면, 갑자기 실패할 가능성이 더 커집니다.
하나님은 항상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 공급해 주십니다.
내 그릇이 준비되면, 필요한 것은 다 담아 주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내 형편이 현재 어려우니, 나는 아무 것도 못한다는 생각은
‘세상 사조’가 주는 생각입니다.
어려우면 영육간에 건강해집니다.
어려우면 무엇보다 다른 어려운 사람의 처지를 더 잘 이해합니다.
어려우면 기도가 더 간절해지고, 매사에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려우면 쓸데없는 시간낭비를 안(못) 합니다. (쇼핑, 외식, 여행 등)
어려울수록 소프트웨어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관리해야할 하드웨어가 없으니까요...
일일이 예를 안 들어도,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90%가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자기 사명을 충실히 감당했던 사람들입니다.
사실 그들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던 비결은,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주신 기회’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전방 3백 미터만 보여주신다!
네비게이션을 장착한 뒤로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전에는 예사로 다니던 길들도 이젠 네비의 인도를 받아야 안심이 된다.
전에는 차만 있으면 운행했는데
이젠 네비가 없으면 운행을 못할 것같은 생각이 든다.
며칠 전 먼 길을 다녀왔다.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 잘 알지 못하는 길을
왕복 1,000 킬로 이상 운행하는 일이었다.
네비의 도움을 톡톡히 받았다.
한번에 먼 길을 안내하진 않는다.
바로 눈앞의, 코앞의 길만 인도한다.
전방 300 미터 앞에서 우회전하라면 해야 한다.
거기서부터는 또 어떻게 전개되고 인도될지 모르지만,
일단 코앞의 지시에 순종해야 한다.
거기에 가면 또다른 인도를 받는다.
거기서부턴 또 다른 인도가 기다리고 있음을 믿기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불안해하지 않고 지시에 그대로 응한다.
네비를 장착하고부터는 코앞의 인도에만 바짝 신경을 쓴다.
그 다음은 아예 생각도 않는다.
그건 네비가 알아서 할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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