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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 청 막10:46~52 07.07.01.설교스크랩
◑1. 경청은 그에게 ‘집중’
▲예수님의 경청
여리고 성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맹인 바디매오가
자기 근처를 지나가는 예수를 향해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소리쳤다.
사람들은 그의 외침을 단순히 시끄러운 소리로만 생각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너는 조용히 하라”고 나무랐다. 막10:48
그러나 그는 잠잠하지 않고 또 다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친다.
바로 그 때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라고 성경은 기록한다.
이것이 바로 경청의 자세인 것이다.
경청은 이웃의 소리를 듣기 위해, 가던 길을 멈추고... ‘머물러서는 것’이다.
그냥 지나치면서, 자기 일을 다 하면서... 듣는 것이 아니다.
▲경청은 온 몸으로 한다.
경청은 귀로만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진지한 경청은 온 몸, 온 눈, 온 마음, 내 온 존재를 동원하여
상대방에게 나 자신을 내어 주는 행위인 것이다.
한문으로 ‘듣는다’는 말 ‘청’(聽)자를 보면
좌측에 ‘귀’를 나타내는 ‘이’(耳)자가 있지만
우측에는 열 십(十)자와 눈 목(目)자와 그 아래 마음 심(心)자로 되어 있다.
즉 우리의 모든 눈을 동원하여 상대방을 주목하고
마음을 모두 집중해서 귀를 기울이는 것이 바로 ‘듣는 일’인 것이다.
*관련글 : 빌 클린턴의 경청 습관 (맨 아래↓)
▲사랑하면... 경청한다.
한 심리학자는, 오늘날 가정문제의 대부분은
배우자들, 특히 남편들이 ‘경청’만 배워도 해결될 것이라고 말했다.
어느 남편이 집에 퇴근해서 자기 부인에게,
“오늘 내가 직장에서 들었는데, 여자가 남자보다 갑절이나
하루에 더 많은 말을 하고 산다더라.”고 말했다.
(남자는 1만5천, 여자는 약 3만 단어의 말)
그러자 아내가 “왜 그런지 아세요?” 하면서 반문했다.
“남자들은 우리 아내들로 하여금 똑같은 소리를 두 번씩 하게 만들잖아요?”
그러자 TV를 보던 남편이 뭐라고 반응했는지 아시는가?
“당신 지금 뭐라고 했어?”
경청이 어려운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
경청은 진지한 집중과 노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한다면 경청은 가능할 수 있다. 해답은 결국 사랑이다.
▲신자는 예수님의 형상
본문에서 왜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머물러 서셨을까?
그에게 호소하는 맹인에게 관심이 계셨기 때문이다.
그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신학자 폴 틸리히는 “사랑의 첫째 의무는 경청하는 것이다”는 말을 남겼다.
The first duty of love is to listen
사랑은 이웃의 작은 신음소리에도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나는 이 맹인이 큰 소리가 아닌, 작은 신음소리로 외쳤어도
예수님은 여전히 그의 외침에 귀를 기울였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성가를 부르며 은혜를 받는다.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우리 속에는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모습으로 내주해 계신다.
그런 예수님의 형상이 있는 사람은, 이웃의 작은 신음소리에도 귀 기울일 줄 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가던 길을 멈추어 서서,
그를 주목하여 바라보고, 그 이웃의 말에 집중해서 경청할 수 있는 것이다.
◑2. 경청은 ‘마음의 소리’를 듣는 것
▲제3의 귀
피터 드러커는 “의사소통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말하지 않은 소리를 듣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The most important thing in communication is to hear what isn't being said!
일찍이 심리학자들은 이런 작업을 가리켜
‘제3의 귀 the 3rd ear로 듣는다’고 말해왔다.
상대방은 표면적으로는 나를 공격하고 비난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심층적으로는 나에게 도움을 기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마리아의 우물가의 여인이그랬다. 아래)
그래서 이웃을 돕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은,
이웃들의 마음의 소리를, 자기 마음으로 듣는 연습을 해야 한다.
이런 마음이 바로 ‘제3의 귀’인 것이다.
▲공감적 경청
상대방이 아직도 스스로의 마음을 열기를 두려워 할 수 있다.
그렇거든 상대방이 마음을 열도록 그 마음의 이야기에 공감해 보시라.
아니면 상대의 이야기를 내가 경청하고 있다는 신호로
그의 이야기를 다른 언어로 반복해 보시라.
심리학자들은 그것을 ‘공감적 경청’ 혹은 ‘반영적 경청’이라고 한다.
▲여인의 마음을 읽으시는 예수님의 경청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대화하는 장면을 주목해 주시라.
“당신은 유대인인데 어찌해서 사마리아 여자인 내게 물을 달라 하느냐?”
라며 여인은 시비를 걸면서 나온다.
“당신이 여기서 물을 준다니, 당신은 내 조상 야곱보다 더 위대하냐?”며,
이제는 조상까지 들먹이며 거부감을 드러낸다.
이때 예수님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반응은
“싫으면 관두라!”일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끈질기게 그녀의 말을 경청하신다.
그러자 마침내 여인은, “이런, 목마르지 않는 물을 내게 주사
다시는 여기에 물 길러 오지 않게 하소서!”라며 도움을 호소하지 않는가?
▲‘제가 무엇을 해 드릴까요?’의 자세
상대의 마음이 어느 정도 준비가 되어 있거든
본문의 예수님의 케이스처럼
단순한 질문을 해도 좋을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막10:51
그러자 맹인의 진심이 토로되지 않았는가!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그렇다. 이 말 한마디, “제가 무엇을 해 드리면 좋겠습니까?”
- 이 단순한 질문만 잘 연습해도,
자기 마음을 열 준비가 된 수많은 상처 입은 이웃들이
줄지어 우리를 기다리게 될 것이다.
경청은 이웃의 ‘마음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3. 경청은.. 이웃의 믿음의 소원을 북돋운다.
▲상담가는, 희망적 미래를 심어준다.
사람은 누구나 믿음의 소원을 갖고 인생을 살아간다.
누구나 희망적으로 믿고자 하는 바가 있다는 말이다.
어둠 속에 사는 이웃도 밝은 내일을 믿고자 한다.
가난 속에 사는 이웃도 풍요한 내일의 삶을 믿고자 한다.
실패를 거듭하는 이웃도 성공하는 내일을 믿고자 한다.
병약한 이웃도 건강이 회복된 내일을 믿고자 한다.
우리 중에 그런 내일을 말하는 이웃들을 좌절시키며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런 믿음의 소원을 늘 격려하며 일깨우며 사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치료자, 또는 상담가라고 부른다.
경청은 이런 ‘믿음의 소원’(미래가 더 밝을 것이라는 희망적 믿음)을
가장 효율적으로 일깨우는 처방이라고 할 수 있다.
오죽하면 우리는 돈을 주고 내 이야기를 들어 줄 전문가를 찾아가
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는가?
▲바디매오도 얼마나 눈을 떠 보고 싶은
믿음의 소원을 갖고 살아 왔겠는가?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막10:52
“너는 어차피 볼 수 없는 운명이니까 포기하라!”
고 말씀하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절망의 도구가 아닌 희망의 도구이기를 원하셨다.
좌절의 도구가 아닌 재기의 도구이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그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신다. 치료의 메시지를 전하신다.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신다.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신다.
그래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52
경청이 그를 예수의 제자가 되게 한 것이다.
경청이 그의 눈을 연 것이다.
경청이 그의 잠자던 믿음을 일깨워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한 것이다.
◑마치는 말
▲카라 로렌스(Cara Lawrence)의 말을 이 메시지의 결론으로 드리고 싶다.
“사람들은 당신이 준 충고를 기억하지 못할지 모른다.
그러나 당신이 그들의 말을 경청해 준 것을 기억할 것이다.”
우리가 기도하면 할수록 예수님의 사랑이 깊이 경험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그분은 언제나 우리에게 귀를 기울여
우리의 기도를 경청하시는 분이심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경청의 습관을 닮아 가시라. 경청의 습관을 사모하시라.
경청을 날마다 지속적으로 연습하시라. 경청의 습관을 위해 기도하시라.
경청의 기적을 경험하는 인생을 사시기 바란다.
▲지금 누군가가 당신의 아픔의 이야기를 경청해줄 분이 필요하신가?
본문의 앞 못 보던 맹인처럼 다윗의 자손 예수를 불러 보시라.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쳐보시라.
그분의 멈추어 서심이 보이지 않는가?
그분이 들으신다. 그분이 희망이시다.
그분이 구원이시다. 그분의 이름이 구원자 예수이시다. 할렐루야!
< 07.07.01. 인터넷 설교 발췌, 정리
▲독후감「경청」
http://dmqsorhcalska.tistory.com/222
▲경청의 달인 빌 클린턴 (펀 글)
세기의 부자 록펠러는 임원회의에서 늘 상석이 아닌 중간 좌석에서 경청했고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은 고 이병철 선대 회장으로부터
“경청” 이라는 휘호를 창업주의 유지로 물려받았다.
타인의 말을 잘 듣기 위해서 P&G의 AG 래플리 회장은 회의시간 중
3분의 2는 아예 듣는 시간으로 떼어 놓는다.
미국대형 컴퓨터 회사 오토데스크의 캐럴 바츠는 최고의 리더로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을 꼽는다.
“클린턴과 예기하고 있으면 마치 이 세상에는 우리 둘 밖에 없는 듯하다.”고 말한다.
100% 집중해서 상대방의 예기를 들어주는 그의 몰입은
화자로 하여금 무의식적으로 귀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느낌을 주어
듣는 이 역시 그렇게 대하도록 만든다.
경청은 그저 덤덤히 남의 말을 드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열어 상대의 뜻을 듣는 일이다.
경청의 달인인 클린턴은 언제나 화자 쪽으로 몸을 약간 기울인다.
간혹 귀를 그쪽 방향으로 돌리거나 귀에 손을 갖다 대 소리를 모으기도 한다.
TV 토크쇼에서는 아예 자기 마이크를 손으로 덮어
상대방의 말에 집중하고 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렇지만 경청이 주는 가장 큰 혜택은 무엇보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힘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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