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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2 치유자이신 예수님을 본 받아

LNCK 2007. 7. 12. 00:14
 

◈치유자이신 예수님을 본 받아              눅10:2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눅10:2


우리는 늘 '내 문제'로 고민합니다.

오늘 하루 만이라도 눈을 돌려,

이웃의 문제를 돌아보며, 같이 고민하고 기도해주기를 결심해 봅니다...

 

 

◑ 치유자 선생님


       선생님 한 분이 학급 모든 학생들에게 소망을 준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삶의 이야기!


가난했던 학창시절을 보낸 한 유명인사가

고마웠던 한 선생님을 회상하는 글을 읽으면서,

저 역시 잠시나마 아스라이 사라져간 과거로 돌아가 볼 수 있었습니다.


다들 찢어지게 못살던 시절이었지만,

그때도 엄연히 부잣집이 있었고, 가난한 집이 있었습니다.

같은 교실 안에 대지주의 아들이 있었는가 하면 소작농의 딸도 끼어있었습니다.

돌아보니 당시에도 엄연히 치맛바람이 있었고, 촌지공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선생님, 그 어떤 유혹 앞에서도 당당하셨습니다. 의연하셨습니다.

젊고 패기 있고, 풋풋하고 아리따우셨던 우리 선생님에게 있어 편애란 없었습니다.

그 누구에게나 똑같이 대해주셨습니다.

코찔찔이든, 부스럼투성이든, 뺀질이든,

그 누구든 그분으로부터 듬뿍 듬뿍 사랑을 한 아름씩 받았습니다.


얼마 되지도 않던 교사봉급은 늘 탈탈 털려 모조리 아이들 간식비로 들어갔습니다.

얼마나 자상하셨던지, 얼마나 따뜻하셨던지, 얼마나 화사하셨던지 모릅니다.

그분의 손길이 제 머리에 잠시라도 닿는 순간은

세상이 온통 장밋빛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우리들은 하교할 때가 제일 슬펐습니다. 선생님 얼굴을 볼 수 없으니까요.

집에 돌아가면 늘 선생님 생각만 했습니다.

밤마다 빨리 날이 새기를 학수고대했습니다.

빨리 학교에 가서 선생님 얼굴 뵐 생각에...


선생님은 정녕 가난한 우리들 마음에 따스한 한 줄기 햇살 같으신 분이었습니다.

삭막하던 우리들 마음 안에 아름다운 수채화 한 폭을 그려주신 분이셨습니다.


그리운 선생님의 아리따운 얼굴을 떠올리며 오늘 복음 말씀에 귀를 기울여봅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눅10:2


참 교사 한분으로 인해 수많은 아이들이 행복했던 것처럼,

측은지심과 연민으로 가득 찬 착한 목자 한 분으로 인해

수많은 양떼가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이 세상, 참으로 아름다운 세상이지만,

가까이 내려가서 자세히 바라보면 얼마나 서글프고 끔찍한 세상인지 모릅니다.

때로 피부로 와 닿는 현실은 너무나 참혹합니다.

상처가 너무나 아려서, 또 혹독해서 말을 잇지 못합니다.


결국 필요한 것은 상처입고 괴로워하는 이웃들을 향한 측은지심입니다.

함께 아파하는 연민의 마음입니다. 함께 울어주는 동반자의 모습입니다.

이런 마음을 지닌 착한 목자입니다.


그 옛날 수많은 사람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듯이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참 사랑의 목자가 없을 때,

많은 사람들이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게 됩니다.

끝도 없는 방황을 거듭하게 됩니다.

심연의 슬픔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험난하고 고통스런 삶의 여정임에도 불구하고

한 젊은이 마음 안에 소명이 활활 불타오르는 것,

이것처럼 뚜렷한 하나님 현존의 징표는 없다고 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불타는 많은 소명 받은 자들이

기쁜 얼굴로 주님의 포도밭으로 달려오길 함께 기도하기 원합니다.

 

양들을 극진히 사랑하는 참 목자,

그래서 결국 양들을 위해 자신을 하루하루 소멸시키는

착한 목자, 예수님같은 치유자들이 많아지길 기도합니다.

                                <원제목 : 내 마음 안에 수채화 한 폭, 양승국 신부님의 글



◑치유자이신 예수님을 본 받은 수도사


저희 수도회 선배회원 가운데, 참으로 특별한 수사님이 한분 계시는데,

최근에 복자품에 오르신 자티(Artemide Zatti) 수사님이십니다.


누가 우스개로 이렇게 소개했지만, 그 말은 사실입니다.

자티 수사님이 누구냐? 밤에 다가도 어나간(튀어나간) 수사님입니다.

긴급한 환자가 발생하면 심야건 새벽녘이건

벌떡 일어나 쏜살같이 달려가신 분입니다.”


아르헨티나의 한 병원의 직원으로, 나중에는 책임자로 재직하면서

한 평생 가장 가난한 환자들을 위해 밤낮없이 뛰어다닌 분이 자티 수사님입니다.


한번은 한 위중한 환자가 병원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병실은 이미 환자들로 가득 차있었습니다.

담당 간호사는 방법이 없는데 어쩌겠냐고 고개를 좌우로 저었습니다.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짓던 자티 수사님은 그 환자를 자신의 침실로 모셨습니다.

자신이 쓰던 침대 위에 환자를 눕혔습니다.


일과가 끝난 늦은 밤, 침실로 돌아온 자티 수사님은

침대 밑 마룻바닥에 깔개 하나를 펴더니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얼굴로 드러누워 잠을 청했습니다.


거기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침대에 누운 환자는 밤새 큰 소리로 코를 골았고,

자티 수사님은 온몸이 솜처럼 피곤했지만 잠시도 눈을 붙일 수가 없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부석부석하고 초췌한 얼굴로 병원에 출근한 자티 수사님을 향해

직원들이 잔소리들을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수사님, 아무리 봉사도 좋고, 희생도 좋지만, 그게 뭡니까?

수사님 몸이 수사님 것입니까? 우리 전부의 것이 아닙니까?

제발 수사님 몸도 좀 돌봐가며 일하세요.”


그러나 자티 수사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환자의 코고는 소리는 제게 큰 기쁨이었습니다.

코를 골고 있다는 것은 아직 그가 살아있다는 표시가 아니겠습니까?

그가 코를 골고 있던 밤 시간 내내

저는 그 사람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에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한 수녀님이 한 환자의 침대보를 갈고 있는 것을 보고

자티 수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녀님, 주님께서 저 침대에 누우실 것입니다.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한 소년이 병원에 입원했는데, 입고 있던 옷이 너무 남루해

더 이상 걸칠 수가 없게 되자

자티 수사님은 병원 자재과 수녀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녀님, 열 살 정도 된 소년 예수님을 위한 적당한 옷이 없을까요?”


자티 수사님의 생애를 묵상할 때 마다 치유자 예수님의 분신을 뵙는 듯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 기간 동안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습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모습 하나가 치유하시는 모습입니다.


오늘 나는 그런 치유자로 살아가고 있나요?  <양승국 신부님의 글



◑ 가난해도 치유자가 될 수 있다


             -정말 가난한 여자가, 이웃의 가난한 여자를 도운 이야기...


어느 날 밤 한 남자가 우리 숙소를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덟 명의 아이가 딸린 가정이 있습니다.

그들은 지난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나는 약간의 먹을 것을 싸가지고 즉시 그 집에 찾아 갔습니다.


그 가정에 들어서자 굶주림으로 볼썽사납게 된 어린아이들의 얼굴이 보였습니다.

그들의 얼굴에는 슬픔도 비애도 없었습니다.

배고픔의 짙은 고통만이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나는 그 아이들의 어머니에게 쌀을 주었습니다.

그녀는 즉시 쌀을 받자마자 이등분하고는, 절반을 가지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녀가 돌아오자마자 나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어디를 다녀왔습니까?”


그녀는 내게 짤막하게 대답했습니다.

“이웃집엘 다녀왔습니다. 그들도 굶주리고 있거든요!”

(크리스천인) 그녀의 이웃은,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가정이었습니다.


나는 그녀가 쌀의 절반을 나눠준 것에 그다지 놀라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실로 정이 많으니까요.

하지만 나는 그녀가 이웃의 굶주림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일반적으로, 고통이 찾아오면 우리는 자신만을 생각할 뿐,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둘 시간이 없기 마련입니다. ★


이 여인은 그리스도의 넉넉한 사랑,

고통당하는 이웃의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자기 문제에만 빠져 허우적거리지 말고,

이웃의 상처에 관심 가지는 치유자가 됩시다! <마더 데레사 「행복한 미소」중에서

 

 

◑ 소명 - 고통스럽지만 필요한 정화과정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  요15:16


              -소명은 정화과정을 거친 후에 차츰 견고해 진다는 주제의 글.


제 소명(이하 성소, 聖召, 거룩한 소명) 받은 지난 여정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돌아보니 제게 수도사로서의 성소 역시 갑작스런 부르심이었고,

미처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작정 따라나선 전형적인 케이스였습니다.


깊이 있는 심사숙고와 고뇌 끝에 내려진 결정이기보다

분위기에 이끌려, 공연한 객기에 시작하게 된,

동기가 너무나도 어색하고 결핍이 많았던 성소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성소의 동기가 정화되기 까지 죽을 고생을 해왔고,

지금도 고생이 만만치 않은 듯합니다.


이 문제는 저뿐만 아니라,

봉헌된 삶을 살아가는 많은 분들이 공감하는 어려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아주 훌륭한 삶을 살아가시는 고위성직자께서도

자신의 성소가 순전히 어머니의 의도에 따라 시작된 길이었음을 밝히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훌륭한 수도자는, 성소의 동기가

다분히 ‘세상으로부터의 도피’였다고 고백하셨습니다.


다행히 살아가면서 그분들은 자기중심적인 성소의 동기, 결핍된 선택의 동기들이

나름대로의 ‘정화과정’을 겪으면서,

고통스러운 자기 극복의 기나긴 과정을 체험하면서,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새로운 선택의 기회를 자신에게 부여하면서

참된 주님의 제자로 다시 태어나는 체험을 하셨겠지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또는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늘 절실하게 체험하는 바는 철저한 부족함입니다. 지독한 결핍입니다.


물론 어느 순간, 그러한 부족함과 결핍을 성령께서 채워주시겠지만,

우리 각자의 노력 역시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오늘도 우리의 결핍을 보충하기 위해

지난 과거를 주님 자비에 맡기고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자신을 비우고 또 비우며 더 높은 가치관(예수),

보다 높은 목표(그리스도)를 향해

새 출발하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신부님의 글      ▣ 크리스천 리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