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요6:26~40
맨 마지막에, ‘▲한국 교회가 위기를 맞게 된 이유’까지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일반적 종교의 특징 - 인간의 연약성에서 출발
우리가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계속하는 이유는... 자신의 연약함에서 출발한다.
자기의 연약함에 절대자의 도움을 받아 해결하기 위해... 종교를 갖는 것이다.
예수님이 지상에 계실 때, 그 따르는 무리 중에 가장 흔한 사람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이었다.
◑1.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에...
여러분들이 나를 이토록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요6:26
▲‘떡’ 때문에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 (기복주의자)
사실 신앙생활 하는 교인들 중에 가장 흔한 유형이다.
예수를 믿고 배가 부른 까닭으로, 또는 떡을 기대하며, 계속 예수를 쫓는다.
이를테면, 일이 꼬여갈 때, 간절히 기도하며 예수님께 매달렸더니,
일이 순조롭게 풀려지기 시작했다더라.
사업이 기울어지는 순간에, 간절히 주님께 구하였더니
주님께서 들으시고, 뜻하지 않게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셔서
사업이 다시 기적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더라.
질병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는데, 또는 가정 문제로 복잡하게 어려웠는데,
마치 주님이 해결사처럼 그 문제들을 치유하시고, 쉽게 해결해 주셨더라.
그래서 자기는 주님을 믿고 따르게 되었노라고
많은 사람이 간증을 하곤 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들을 이렇게 진단하신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고,
떡을 먹고 배부른 경험 때문이 아닌가?” 요6:26
▲예수님의 처방 : 영생하는 양식을 구하라!
만약 주님이 내게 이렇게 직접 물으신다면(↖윗 질문)
나는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그래요, 맞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안 되는 겁니까?
그러면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이런 나의 대답에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요6:27
예수님은, 우리가 주님께 구하고 찾는 것들이... ‘썩을 양식’이라신다.
▲‘떡’이나 ‘복’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예수님 때문에 병이 나으셨는가?... 병은 또 다시 든다.
예수님 때문에 위기에서 벗어나셨는가?... 위기는 또 찾아올 것이다.
예수님 때문에 사업이 번창했는가?... 사업이 휘청거릴 때도 또 생길 것이다.
이런 일들을 해결하는 일에, 자기 일생을 목매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이 바로 ‘썩어질 양식’에 얽매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 주님은 ‘썩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시는가?
주님이 제시하시는 표적에 한 발자국도 접근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
자기 자신의 문제에 몰두해서
일생의 신앙생활이 거기서 뱅글뱅글 맴돌고, 더 이상 성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표적을 보고 따르라고 하신다.
표적(씨메온)이란 말은, 신약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용어이다.
표적이란, 보이는 사건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영원한 진리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개념을 외우셔야 계속되는 설교 이해 가능함)
▲5병2어 표적의 목적은?
예수께서 5병2어의 기적을 베푸셨지만,
백성들은 그 후에도 여전히 배가 고팠다.
그러나 예수님은 계속적으로 그 기적을 베풀어 주시지 않으셨다.
그러니까 5병2어의 기적은, 백성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는 목적 보다는,
‘그 표적을 통해 보이지 않는 영원한 진리의 세계로 인도하는데’
그 주된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즉, ‘진정한 양식인 생명의 양식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5병2어 사건(표적)의 목적은,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근원이시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고,
그것을 선포하기 위한 사건이었다.
즉, ‘당신들이 이 표적을 보고, 과연 나를 따를 것이냐?’는 물음이었다.
그런데 군중들은, 오늘날의 수많은 한국의 신자들처럼,
다만 먹고 배부른 데에만 관심을 가지고,
그 목적으로 예수님을 계속 따라다녔던 것이다.
▲예수님의 다른 표적들
예수님은 병든 자들을 고치셨지만, 모든 병자들을 고치신 것은 아니었다.
눈먼 자를 뜨게 하셨지만, 모든 시각장애우를 보게 하진 않으셨다.
혹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셨지만, 모든 죽은 자를 살리지 않으셨다.
그 모든 것은 그 사건 자체에 의미가 있다기 보다는,
예수님이 뭔가 ‘표적’(눈에 안 보이는 진리)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셨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군중들은, 오직 ‘눈에 보이는 현상’에만 관심이 많았다.
◑2. ‘썩을 양식’을 위해 믿는 신자들
▲현실적인 복에 너무 치우친 한국 개신교
그 동안 한국교회에서 계속 강조되어온 신앙생활의 내용으로는,
‘예수 믿고 나서 무엇이 되었더라!’는 결과론에 많이 치중했었다.
예를 들면, 예수 믿고 나서.. 사업에 성공했더라!
예수 믿고 나서.. 바닥인생에서 일어났다!
예수 믿고 나서.. 질병에서 나음을 얻었더라!
그 외 이런 저런 문제를 해결했다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물론 그런 점이 신앙에 포함되는 것은 정당하다.
예수님도 분명 5병2어의 표적을 베풀어, 주린 자들을 먹이셨다.
▲모든 표적은 - 결국 예수님 자신
그러나 신앙의 성숙은, 그런 ‘가시적 결과’로부터 점점 초연해져서,
주님 자신의 성품을 본받도록 하는 것에.. 성경은 초점을 맞추고 있다.
주님이 행하시는 일은, 그 무엇이든지 간에
그 가운데 표적(주님이 의도하시는 영적인 진리)이 있다는 것이다.
그 표적이란 구체적으로 다름 아닌 → 주님 자신을 가리킨다.
풀어 설명하면, 주님을 더 알아가고, 주님을 더욱 본 받는 것을 가리킨다.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요6:28~29
주님이 이런 저런 일(표적)을 행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당신 자신을 믿게 하기 위함이라는 뜻이다.
5병2어 표적의 목적도
‘생명의 떡이신 예수’를 발견하고 믿게 하는데, 원래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먹고 사는 문제 해결x)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더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재물도 늘려주시고
병도 고쳐주시고, 문제도 해결해 주시는 등
우리 삶을 수월하게 인도해 주시는... 그런 분을 믿는다는 것인가?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잘못 믿고 있다)
물론 사람들은 그러한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한다. 그런 간증도 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 외적 사건(물질, 건강, 문제해결) 뒤에 숨겨진
표적(하나님이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일=예수님을 더 아는 것)에는
다들 별로 관심이 없다.
자꾸 거듭거듭 그런 기적과 성공, 즉 외적 현상에 신자들은 관심의 초점을 맞춘다.
▲교회도 외적 현상(↔예수님)을 자꾸 드러내서 강조하는 면이 있다.
사람들도 이런 저런 복을 받았다며, (예수보다) 그 외적 현상을 자꾸 강조한다.
그래서 성도들이 거듭해서 그런 현상(=현실)적 복을 갈구하게 만들고,
그런 일에 매료되게 교회의 분위기를 만들어가기도 한다.
더 잘되고, 더 성공하고, 더 형통하게 되기를 기도하고 기대한다.
그래서 무수한 사건과 형통 속에서도
주님께서 보이시고자 하는 ‘표적’(예수님의 속성)의 참 목적은 거의 깨닫지 못한다.
그런 믿음 생활을 가리켜, 예수님은,
‘썩을 양식을 위한 것’이라고 질타하셨다.
▲왜 오늘날 한국 교인들이 높은 수준의 신앙과 윤리 의식을 가지지 못하는가?
바로 이 ‘썩을 양식‘을 쫓고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기복주의)
그리고 그런 자신들의 전통적 신앙 양식을, 결코 쉽게 바꾸려 하지 않는다.
물론 교회도 마찬가지다.
그런 대중의 취향에 맞추어서,
대중들이 좋아하는 주제를 주로 골라서 가르치는 일에 몰두해왔다.
◑3. ‘영생하는 양식’을 위한 일이란?
▲줄기차게 ‘눈에 보이는 표적’이 있어야 믿겠다는 군중들
당시에 군중들도, 이렇게 예수님께 여쭈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영생하는 양식을 위한 일’은
과연 무엇을 뜻합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그러자 군중들은 또 다시 묻는다. (오늘날 우리들의 질문과 똑 같다.)
“그래도, 당신을 믿고 따를만한 무슨 표적이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모세도 광야에서 만나를 주지 않았습니까?”↙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당신이)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요6:30~31
즉, -주님의 도우심으로-
망하던 사업이 다시 일어나든지,
암에 걸렸던 사람들이 다시 일어나든지,
복잡하게 꼬였던 문제가 다시 풀려지는 등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는 것과 같은 무슨 ‘눈에 보이는 표적’이 있어야,
우리들이, 예수, 당신을 믿지 않겠습니까? - 라는 뜻이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신자는 세상적으로도 잘 풀려야 된다!’고 말한다.
자기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면, 하나님께 영광 가린다고 말하며,
자기가 번듯하게 살아야, 세상 사람들에게 전도가 되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일면 맞는 말이긴 한데... 그것이 ‘신앙의 목표’는 아닌 것이다. 부수효과라면 모를까...
▲예수님의 대답 : 광야의 만나도, ‘먹고 배부름’이 아니라,
‘나’를 증거하고 나타냄이 그 원래 목적이었다.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예수님)을 주시나니 눅6:32
당신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어본 기록을 이미 읽어보지 않았느냐!
그것은 마치 모세의 능력으로 되어진 기적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주신다는 표적이었다.
이것이 진정한 ‘표적을 통한 믿음’이다.
즉 기적의 의미(예수님 또는 예수님과 관련 된 것)를 깨닫는 것이지,
그 어떤 기적의 외적 현상(먹고 배부름)에 매이지 말라는 것이... 주님의 말씀이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다.
예수 믿고 나서 재물도 늘어나고, 건강도 되찾고, 문제도 해결될 수 있다.
그러나 그 현상에 머무르지 말고, 그 표적의 의미인 ‘예수님’을 더 깊이 발견해야 한다.
즉, 예수를 더 깊이 깨닫고, 더 헌신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반대인 경우도 마찬가지다.
예수 믿고 사업에 망하기도 하고, 질병이 계속 안 나을 수도 있다.
그 ‘표적’에 실망하지 말고, 그 의미인 ‘예수님’을 발견해야 한다.
즉, 그 일을 통해 예수를 더 깊이 깨닫고, 십자가 고통을 깨닫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4. 적용 : ‘예수를 믿는 것’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요6:29
본문은 ‘예수를 믿어라!’ 는데,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믿어야 한다는 것인가?
▲‘주님’을 이용대상으로 여기는 신자들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시다’
그러나 이 진리에 대해, 한국교인들은 많이 왜곡하고 있다.
<즉, 주님은 하나님이시고, 능력이 많은 분이시다.
따라서 내가 그 분을 주님으로 모시고 있음으로
나는 그 분 때문에 더 높아져야 하고, 더 커져야 하고,
그 분의 혜택으로 더 많이 가져야 하고, 더 무엇이 되어야 한다.> - 이렇게 믿는다.
물론 주님은, 우리에게 그런 것도 채워주실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의 주님(주인)’이라면,
‘주인’은 엄연히 섬김을 받아야 할 대상이다.
종이 주인에게 가서, ‘나 좀 섬겨 달라’고 대놓고 요구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대놓고 주님(주인)께 나를 섬겨달라고 요구한다.
물질 주시고, 건강 주시고, 문제 해결의 심부름을 해 달라고 요구한다.
결코 주인이 주시는 대로 만족 못한다.
▲‘예수를 마음에 품는 것’이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 분은 본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되셨습니다.
철저히 낮은 자리로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종이 되셨습니다.
종이기에, 아무도 보호할 수 없는 자처럼,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철저히 성부 하나님께 복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결과 마침내 예수님은 만인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빌2:5~8
사도바울은 ‘인간이 되신 예수님’께 크게 감명 받았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우리에게 강력히 권하는데...
▲‘인간이 되신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신자들
그러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빌2:5)을 마음에 품지 않고,
철저히 인간이 되셨고, 종이 되셨고, 죽으셨다는 사실을 마음에 품지 않고,
단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만 마음에 품고
신앙 생활하는 것은, 무엇이 잘못 되었는가?
(대부분 그렇게 신앙생활 하고 있는데..)
→그런 신자에게는 겸손히 섬기신 인간 예수는 없어진다.
그저 창조주 되신 능력 많으신 예수님 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런 예수님의 도움으로, 자기도 도움을 받아 더 커져야 하고,
더 많이 가져야 하고, 더 많이, 더 높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을 일컬어서 굳이 우리는 ‘크리스천’이라고 부를 필요 없다.
그냥 ‘종교인’이라고 부르면 적당하다.
왜냐하면 종교인은 온 천지를 지으시고 다스리는 보편적인 하나님을 따른다.
그러나 인간으로 오신 섬기는, 겸손한 예수 그리스도는 따르지 않는다.
▲내가 ‘종교인’은 아닌가?
오늘 성도라고 말하는 많은 사람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믿기는 하나,
그리스도(=구세주)이신 예수를 믿는 것은.. 대단히 인색하다.
자기 연약함을 하나님께 의탁하여 자기 부족함을 채우려는 사람은 많지만,
인간이 되신 겸손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본받으려는 사람은 매우 적다.
원래 크리스천(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not 종교인)이란 말의 뜻은
‘인간으로 오셔서 그리스도가 되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란 말인데,
‘예수님은 나의 주인이 되신다’는 뜻이기도 하다.
▲성경 읽는 것 보면.. 내가 누구인지 즉시 밝혀진다.
여러분, 복음서를 잘 읽어보시기 바란다.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자세히 읽어보시기 바란다.
그 분을 향한 진심어린 존경과 사랑이 일어나는가?
그 분을 진심으로 따르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는가?
그 분을 위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는가?
아니면, 그런 마음은 전혀 없이
그저 예수님은 ‘내 소원이나 이루어주시는 능력 있는 분’으로 생각되는가?
후자인 경우, 종교인이지, 크리스천이 아니다.
복을 빌고 받는 정도는, 타종교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진짜 크리스천이 되면
그 분, 그 인간 예수 되신 그 분 때문에
꼴찌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높고 높으신 예수님이 비천한 인간이 되셨는데, 내 까짓 것이 낮아져봐야 얼마나...
무능하게 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왕 중 왕이신 그 분이 낮아지셨는데, 내 까짓 것이 낮아져봐야 얼마나...
그리스도 그분 때문에 잃어버리는 것을,
낮아지는 것을, 업신여김을 받는 것을, 실패하는 것까지도
모두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니, 두려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꺼이 그 길을 감수하려는 생각도 자발적으로 든다.
그 길을 앞서 가신 예수님께 크게 감동받았기 때문이다.
종교인의 삶은 그저 종교로 통해 ‘자기만족’에 목적이 있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그리스도를 ‘주’로 섬긴다. (=자기는 종이 된다.)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2:11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인정받기를 원하시기 보다는,
구세주로서 인정받기 원하신다.
그것을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인간이 되신 그리스도(=구세주) 예수
그러기에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셨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그런 사실을 마음에 품고, 그 분을
닮아가는 사람을 ‘크리스천’(그리스도의 사람)이라 부른다.
예수님이 우리 구세주(그리스도)가 되신 것은
하나님이신 그 분이 자원해서 ‘인간’이 되셨기 때문이다.
그 분이 만약 인간이 되시지 않으셨더라면
보편적인 신, 창조주로 남아있었을 터이요,
우리의 구세주(그리스도)는 되지 못하셨을 것이다.
그 분이 낮아지고 겸손한 ‘인간 예수’가 되셨기 때문에
그 분은 구세주가 되셨고,
이제는 창조주보다, 구세주로서
우리들로부터 인정받기 원하시고, 영광받기 원하신다.
그 분은 오늘도 여전히 인간이심(인성)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인간이신 그분은 천국에서 오늘도
우리를 인간 예수의(본 받는) 삶으로 초대하신다.
▲교회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 크게 영광 돌린 사람들도,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다.
즉, ‘인간 예수의 삶’에 자기 자신을 투신한 사람들이었다.
인류 역사에 큰 빛을 남긴 신앙의 위인들은
하나님의 힘을 빌어 무슨 제국적인 업적을 이룩한 제왕이나 장군이 아니었다.
인간 예수의 삶을 자기 일상에 실현해 보인 ‘성인’들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지극히 무능하고, 불쌍하고, 꼴찌 인생처럼 보이는
그런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은 크게 영광을 받으셨고,
기독교는 그 생명의 역사를 끈끈이 이어왔다.
▲한국 교회가 위기를 맞게 된 이유 ★★
오늘 한국 교회가 큰 위기를 맞고 있다.
이구동성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다. 교회의 미래에 대해 염려하고 있다.
왜 한국교회가 위기에 봉착했는가?
지금 교회에 힘이 없는가? 가진 자, 배운 자, 능력 있는 자가 사라졌는가?
아니, 유명하고 능력 있는 자는... 과거에 비해 교회 안에 더 많아졌다.
어쩌면 그것이 바로 위기이다!
예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찬송하는 사람들은 더 많아졌으나,
그러나 ‘인간이신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어졌기 때문에... 위기가 온 것이다. (기독교의 본질을 왜곡했다는 뜻)
예수님은, 오늘도 겸손히 섬기시는 인간 예수님의 삶을 따르고자 하고,
그런 비전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하나 되기를 원하신다.
이 시간, 우리 모두다 자기 신앙의 모습을 잠시 생각해 보자.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능력을 ‘빌려서’ 살려고 하는 종교인인가?
아니면 인간 예수의 삶에 크게 감동받고,
자기 스스로 그 인격을 본받아 살려고 하는 크리스천인가?
주님은 오늘도 천국에서, ‘인간 예수의 모습’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그러한 삶으로 초대하신다.
여러분, 이러한 초대에 귀 기울이시기 바란다.
그리고 여러분 모두의 심령에 이 초대의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경험하고, 순종하시기를 기원 드린다.
<07.01.28. 인터넷 설교 발췌, 정리 *원제목 :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요6:26~40.
[주제별 분류] 믿음론 http://blog.daum.net/bible3/8483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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