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과잉인간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엄마는 빚에 쪼들려 집나가고,
동생하고 사는 소년가장(중3)은 사람들의 빚 독촉에 시달리다
아파트에서 투신자살하는 세상...
자녀들이 많지만 마음 편히 가 있을 곳이 없어
자살하는 노인들이 급증하는 시대....
이러한 신문의 기사들은 하나같이 철저히 외롭고 소외된 인간의 모습들이다.
시내버스 속에서 서로 마주치는 시선은 밝고 반가운 표정보다는
“야! 나도 먹고살기 힘든데, 너는 또 뭐 한다고 세상에 나왔냐?”
하는 차가운 눈초리들이다.
어디 그 뿐이랴. 수 십(백) : 1을 상회하는 취직시험장에 가보면,
“이 많은 사람들 중에 누구를 밀어내고 내가 들어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지만, 모여 온 모든 사람들이 갑자기
‘내 행복의 방해꾼’이 되어버린다.
경쟁사회인 우리 사회의 구조 자체가
따뜻한 관심으로 서로를 바라볼 수 없게 우리를 내몰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길거리에 쌓인 ‘땡 처리’ 상품처럼
“사람이 너무 많다.”(과잉인간)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이렇게 사람을 귀하게 느끼기가 힘든 상황에 우리는 살고 있다.
경기가 어려워지고, 실업자가 증가하면
이러한 각박함은 한층 심해지게 마련이다.
이런 때일수록 아픔과 기쁨을 서로 나누는 진정한 관심이 아쉽기만 하다.
◑2. 사랑은 관심이다.
우리는 ‘사랑’과 정 반대되는 것이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말을 잘 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은, 그래도 나에게 어떤 관심이 있지만,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은, 미워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파트 벽 하나가 천리(千里)’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벽 하나를 두고 바로 옆집에 살지만 누가 죽는지 사는지, 어떻게 사는지,
전혀 관심이 없다.
심지어 이사 온 이웃에게 친절하게 다가가다 보면 잘못하다가는
“저 사람이 왜 저러나?”하는 의심을 받기도 한다.
출퇴근길에 몸을 움직이기도 어려울 정도로 빽빽하게 실려 가는
시내버스나 전철 안에서도 나를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때로는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이 ‘익명성(匿名性)에서 오는 해방감’을
느끼기도 할 것이다.
이 ‘익명성’은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아무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나뿐 아니라, 나의 집안 내력까지 다 알고 있던 고향에서는
행동하기가 얼마나 조심스럽고 부자유스러웠던가?
그러나 ‘익명성(匿名性)에서 오는 해방감’은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죽도록 괴로워도 누구 하나 찾아 갈만한 사람이 없다.”는 말도 되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는 듯
‘립스틱 짙게 바르고’ 목에 힘을 주고 다니지만,
마음의 뚜껑을 열고 보면 모두가 철저하게 외롭고,
뭔가에 쫓기며, 두려움에 떨고 있음이 사실이다.
모두가 마음 깊은 데서부터 기쁨과 어려움, 걱정과 희망을 나눌
진정한 관심을 목말라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사랑을 먹고사는 존재이다.
그 사랑은 곧 관심임을 알아야 한다.
◑3. 내가 먼저 이웃으로 다가가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눅10:29)하며 묻는
율법교사에게 비유를 통해 참된 이웃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신다.
혹시 그 날이 안식일이었고,
안식일에 부정한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라는 율법의 규정 때문이었을까?
가장 종교적인 사람으로 보이는 사제와 레위 사람은 그냥 지나쳐버린다.
그러나 이단자로 취급되던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맞은 사람에게 갖은 정성을 다 기울이며 관심을 쏟는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셨다.
지상 생애동안 당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거절하신 적이 없으셨다.
나병환자도, 태생소경도, 앉은뱅이도, 중풍병자도, 하혈하던 부인도
치유를 받았고,
율법학자도, 백인대장도, 혁명당원도, 어부도, 강도도, 세리도, 창녀도
배척하지 않으셨다.
당신을 필요로 하는 이에겐 하나같이 큰 사랑으로 다가가셨다.
그리고 끝내는 당신을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한 제물로 내놓으셨다.
그리고 오늘도 성찬식으로 우리의 고통과 기쁨을 함께 나누기 위해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가 관심을 기울이며 나에게 다가오기를 마음 속 깊은데서
갈망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기다리기보다 ‘내가 먼저 이웃으로 다가가는 것,
이웃이 되어주는 것’이다.
성찬식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은
“네가 먼저 이웃이 되어 주라, 밥이 되어 주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이웃으로 다가갈 때, 모든 이는 내게 이웃으로 다가올 것이다.
좋은 친구를 만나려면, 나 자신이 ‘좋은 친구가’ 되어 줘야 한다.
왜냐하면 친구란 내 부름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이다. <인터넷 설교에서 발췌
◑ 찾아갈 벗이 있다면 - 오광수
길이 멀어도 찾아갈 벗이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문득 만나고픔에 기별 없이 찾아가도
가슴을 가득 채우는 정겨움으로 맞이해주고
이런저런 사는 속내를 밤새워 나눌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한 인생이지 않겠는가.
부부간이라도 살다 보면 털어놓을 수 없는 일이 있고
피를 나눈 형제간이라도 말 못할 형편도 있는데
함께하는 자리만으로도 속마음이 이미 통하고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마주함에 내 심정을 벌써 아는 벗이 있었으면 좋겠다.
좋을 때 성할 때 이런저런 친구 많았어도
힘들고 어려우면 등 돌리고 몰라하는 세상인심인데
그래도 가슴 한 짐 툭 털어내 놓고 마주하며
세월이 모습을 변하게 할지라도 보고픈 얼굴이 되어
먼 길이지만 찾아갈 벗이라도 있으면 행복하지 않겠는가...
[주제별 분류] 삶의 통찰력 http://blog.daum.net/bible3/12192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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