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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7

789 거짓선지자에 관한 교훈

LNCK 2007. 7. 16. 20:17
◈거짓선지자에 관한 교훈               렘28~29장              편집자 글 



저를 포함한 모든 신자들은, 까딱 잘못해서 교만에 빠지면, 거짓 선지자가 될 수 있으므로

오늘 예레미야서를 읽는 중에, 반면교사로써 한 번 정리 해 볼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거짓 선지자 하나냐 (국내파, 렘28장)


▲멍에 퍼포먼스를 한 예레미야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줄과 막대기로 멍에를 만들어 메라고 하셨다.        27:2

이것은 유다를 포함한 주변 열국이

바벨론에게 -멍에를 메고- 포로로 잡혀간다는 예언이었다.


마침 시드기야를 만나려고 주변국가의 사신들이 예루살렘에 올라왔을 때,   27:3

그는 멍에를 메는 퍼포먼스를 통해... 그 예언을 전달하게 된다.     (주전 594년경)


멍에를 멘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예레미야는 말했다.

“거짓 예언자들은 너희가 절대로 바벨론 왕의 노예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 말에 귀 기울이지 마라!”                                                              27:14


▲그 멍에를 꺾어버린 하나냐

그 때로부터 오래지 않아,                                                  (시드기야 4년, 주전594)

하나냐는 예루살렘 성전 앞에서,

백성, 제사장, 예레미야 앞에서 (거짓)예언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셨다.

바벨론 왕이 유다 왕에게 메게 한 멍에를 내가 꺾어버리겠다!

2년 안에 바벨론 왕이 가져간 성전 기구들을 여기로 다시 되돌리겠다.”   28:2~3


그리고 하나냐는 예레미야가 목에 메고 있던 멍에를

빼앗아서 즉석에서 부셔버렸다.                                                        28:10


▲훨씬 설득적인 희망의 메시지

아마, 하나냐의 ‘희망의 메시지’는, 예레미야의 ‘절망의 메시지’보다

그 당시 백성들에게 훨씬 더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여호와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예배하는 선민을,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잘 되게 하신다는 하나냐의 메시지는...

마침 멍에 퍼포먼스 중이던 예레미야를 궁지로 모는 한편,

절망과 혼란에 처한 백성들에게 ‘청량제’같은 시원함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벌써 유대왕국은

주전 605년에 1차포로, 주전597년경(이 장면 3년 전에)에 2차포로로 잡혀간 상태였다.

하나냐의 예언에, 성전제사기구가 되돌려질 것을 바란 것을 보면,

성전기구 상당수도 전리품으로 다 빼앗긴 상태였던 것이다.  주전594년경

(그러다가 7년 후에 주전587~6년에 남 유다는 완전히 망한다.)


▲하나냐의 오해 - 나의 반면교사

한 마디로 말하면, 예레미야와 하나냐의 차이는,

‘멍에를 통과한 회복’과, ‘멍에가 없는 회복’이었다.


예레미야는 멍에를 통해,

말하자면 뼈를 깎는 회개, 고난을 통한 연단, 정결의 시간을 거친 후에

하나님의 백성이 새롭게 될 것을 전파한 반면,


하나냐는 멍에가 없는,

‘하나님의 백성이니까 무조건 잘 되겠지...’의 메시지를 전한 것이다.


오늘날에도 ‘소망의 메시지’는 대중들에게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

물론 우리는 ‘소망의 메시지’를 마땅히 전해야 한다.


그런데 작은 잘못이나 범죄는,

멍에 없는 ‘소망의 메시지’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예레미야도 처음에는 ‘멍에 없는 돌이킴과 회복’을 전했다고 본다.

그러나 어느 시점부터 예레미야는,     

‘바벨론 멍에를 통한 회복’으로 예언의 태도를 변경했다.  

백성들이 너무 오래 회개를 안 하고 계속 패역하니까, 그 수위가 자꾸 높아진 것은 아닐까?

참고로, 예레미야는 약 40년간 예언했다. 요시야13년~예루살렘 멸망까지.


그러나 고질적 잘못이나 오래된 문제점은 -멍에를 통한-

정화와 회개의 과정을 거칠 때,

하나님의 백성은 새롭게 다시 태어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에게 ‘고난’을 주시고

그 고난은, 당하기엔 힘든 멍에지만,

거치고 나면 좋은 양약이 된다.

(감당할 만한 것을 주실 것이다. 감당치 못할 것을 주시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고난, 정화의 기간, 멍에’

이런 것들을 당할 때가 오면.., 묵묵히 메고 나가야 할 것이다.


▲거짓선지자의 말로

‘네(하나냐)가 나무멍에를 꺾었으니, 쇠멍에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28:13

- 하나님이 주시는 나무 멍에를 거절하면,

더 고생스런 쇠 멍에를 주신다.


이렇게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말씀’을 제멋대로 전한 거짓선지자 하나냐는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제 명대로 못 살고 일찍 죽었다.                      28:16~17



◑거짓선지자 스마야     렘29장, 해외파


▲예레미야의 편지

그래서 예레미야는, (2차) 포로로 잡혀간 바벨론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이런 요지의 편지를 써서 보냈다.

‘기꺼이 멍에를 메고, 포로로 열심히 살아라’는 것이었다.        (편지내용은 29:4~14)


편지 내용 중에는,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29:11


우리가 애송하는 이 요절도,

포로 70년이 차면, 너희를 다시 데려오겠다고 약속하시면서 주신 말씀이다.   29:10

거짓선지자의 예언처럼, -포로생활 없이- 회복되었으면 얼마냐 좋았으랴마는...


▲스마야의 반격 편지

예레미야의 편지를 받고, 바벨론에서 발끈한 사람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스마야는 고국 유대에, 반격하는 요지의 편지를 써서 보냈다.


‘스스로 예언자 행세를 하는 미친 자를 혼내 주라’는 요지였다.                 29:26

그리고 대제사장의 권세, 그런 것을 (바보 아니면) 좀 사용해라고

은근히 대제사장의 자존심도 툭툭 건드렸다.


▲스마야가 받은 징계

예레미야를 공격한(정확하게는, 공격을 사주한) 스마야는

자기뿐만 아니라, 자기 자녀까지도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                   29:32


안타깝게도, 자기가 ‘미친 자’로 확신했던 예레미야가

하나님이 보내신 참 선지자였기 때문이다.


오늘도 예레미야처럼, 참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대언하는 주의 종들이 반드시 계신다.

우리는 분별을 잘 해야 한다. 자칫 잘못하면 나만 큰 낭패를 당한다.


▲고난의 참된 의미

상식적인 생각으론, ‘고난’은 좋지 않은 것이다.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죄의 결과’일 가능성도 매우 크다.


그러나 그 선을 넘어서, 더 멀리 볼 줄 알아야 한다.

예레미야는 그 너머를 보았고, 거짓선지자들은 그 너머를 보지 못했다.


‘고난을 통해 연단을 받는 사람들’이 ‘좋은 무화과’였다.                      렘24장 참조.

무조건 고난 없는 평탄한 삶이...  좋은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 정화된 삶’이... 좋은 것이다.


‘고난 없이도 정화된 삶’이... 최고로 좋은 것이긴 하나, 그런 사람은 세상에 없다.

예수님도 고난을 통해 순종하기를 배우셨다고 하지 않았는가!


▲거짓선지자들의 오해

그들은 ‘고난을 통한 정화’의 과정을 너무 무시했다.

‘고난 없는 회복’을 스스로 믿었고, 그것을 서슴없이 주장했다.

그래서 예레미야와 대립이 되었고, 그를 공격하기까지 했다.

한 마디로, '고난의 신학'에 대한 이해 부족이었다. 


오늘 우리는 ‘고난의 깊은 의미’를 너무 간과하지 않는지...

풍요, 축복, 성공 등을 늘 강조하다보니, 그 반대 개념이 무시되지는 않았는지...

 

심지어는 신자는 작금에 ‘고난을 숨겨야 되는’ 처지에까지 이르고 있다.

고난을 드러내었다간... 돌팔매를 맞기 때문이다.

‘저 친구, 죄가 많아서 그렇다!’고   


물론 죄가 많아서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너머를 볼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고난이 없는 사람은

죄가 없어서(적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썩은 무화과’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쓰실 그릇’이 아니기 때문에

그 삶이 평탄한 것이다.

 

반대로 하나님이 쓰실 '좋은 무화과'는

강 트레이닝을 시키신다. 

사울왕과 다윗왕의 예 등, 그런 예는 성경에 너무 많다.

 

한국도 일제 38년과 한국전쟁(625) 등을 통한 <고난>이

오늘날의 남다른 신앙부흥, 경제성장을 이룬 원동력이었다. 

 


‘거듭남’은 참 귀한 주제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견해에 의한 '거듭남')

그런데 누가 거듭나느냐? - 극심한 고난과 멍에를 통과한 사람입니다.

누가 거듭나지 못하느냐? - 대충 편하게, 일생을 평균 이상 안락하게 보내는 사람입니다.

제가 관찰하기에는 그렇습니다.

 

 

*남 유다가 망한 것은, 하루 아침에 완전히 망한 것이 아니라

크게 3번에 걸쳐 점차적으로 망했다.

첫 번째는 주전 605년 경, 느부갓네살이 애굽과 갈그미스 전쟁에서 승리하고 (여호야김 4년경)

                                     돌아오는 길에 친애굽 유대를 정벌하고, 다니엘 등을 포로로 잡아갔고,

두 번째는 주전 597년 경, 느부갓네살 제위 8년에, 여호야긴 등을 포로로 잡혀간 것이고,

세 번째는 주전 586년 경, 성전이 완전히 불에 탔고, 시드기야가 포로로 잡혀갔다.

 

그러니까 약 10년 간격으로 매를 맞았다. 그러다가 도저히 안 되니까

하나님은 '바벨론 포로 70년'이라는 [특단의 처방]을 내리신 것이다.      ▣ 선지자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