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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아짐으로 사역하기 / 정원

LNCK 2007. 10. 17. 21:59

https://www.youtube.com/watch?v=pbAxscAXf_w 

◈낮아짐으로 사역하기                       시123:2                 출처

 

모세, 다윗, 예수님, 바울 등 변화된 분들은 모두 ‘낮아짐’으로 사역했다.

그런데 ‘자기 높아짐’으로 사역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재앙이다.

그들은 신앙의 이름으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사람들을 괴롭히는데...

    

 

◑1. ‘높은 마음’을 버리고, ‘낮은 마음’을 가진다.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죄에도 높은 마음에서 오는 죄가 있고

낮은 마음에서 오는 죄가 있다.

 

높은 마음에서 오는 죄는 교만, 판단, 강퍅함, 시기, 분노, 질투 등이다.

낮은 마음에서 오는 것은 죄라기보다는 눌린 것이다.

슬픔, 낙심, 두려움, 좌절, 염려, 근심과 같은 것이다.

 

 

▲낮은 마음에서 오는 죄

이것은 눌린 것이다. 그것은 주님의 능력을 통하여 물리치고 이길 수 있다.

그것도 주님을 신뢰하지 않은 것이므로 넓은 차원에서는 죄지만

그러나 그러한 것을 주님은 용서하신다.

 

▲높은 마음에서 오는 죄

그러나 높은 마음의 상태에서 짓는 죄는 쉽게 용서받기 어렵다.

그것은 대가를 지불하고 얻어터져야 한다.

그러므로 마음이 높은 이들에게는 고난이 많다.

인생의 풍파를 좀 더 많이 겪게 된다.

강퍅한 것이 깨어지고 낮아지도록... 많은 고난이 다가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상태의 차이점을 알아야 한다. 당신이 ‘낮은 마음’ 상태라면

주님의 위로와 은총을 경험할 수 있지만,

‘높은 마음’상태라면 당신은 주님의 임재를 가까이 누리기 어렵다.

 

그러므로 ‘약한 것’에는 위로와 치유가 있지만

‘강하고 높은 것’에는 징계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에게는 많은 시련과 재난이 기다리고 있다.

사람이나 물질, 질병이나 환경을 통해서 많은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강성, 약성

100% 잘라서 어느 쪽이라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사람은 대체로 강성과 약성으로 나뉘어 진다. 어느 한쪽에 기운다.

 

강성에 속한 사람은 대체로 분노가 많고

약성에 속한 사람은 낙심이 많다.

 

당신이 주로 분노가 많고 분노 쪽의 문제로 넘어지는 편이라면

당신은 ‘강성’에 속한 것이다.

반대로 당신이 주로 낙심 쪽으로 넘어진다면, 당신은 ‘약성’에 가깝다.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주님은 ‘약한 자’는 위로하고 힘을 주시고 일으키시지만

‘강한 자’는 그의 혈기와 고집과 분노가 주님의 손에 다스려지기 까지

그에게 깊은 은총을 부어주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약한 자’는 주님의 힘주심과 주의 능력으로 살 수 있지만

‘강한 자’는 주님 앞에서 낮아져야 한다.

그것이 주님의 훈련이며, 사람을 다루시는 방식이다.

강한 자가 약한 자가 되어서 주님의 손 안에 엎드러질 때까지

주님은 그를 기다리신다.  

 

▲오늘날 이 시대는 높은 마음, 강퍅한 마음이 아주 많다.

그들은 부드럽고 온유하지 않으며 공격적이고 날카롭다.

사람들은 강한 사람이 되도록 훈련받으며,

주님을 의뢰하고, 주님 앞에서 낮아지며, 주님의 능력으로 살 것을 배우지 않는다.

 

그러한 가르침은 사람을 점점 더 강퍅하게 한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점점 더 공격적이며 거스르며 강퍅해진다.

그러한 이들에게 주님은 임하시지 않는다.

주님은 오직 상하고 낮은 자에게만 오신다.

 

▲강한 교사가 되지 말아야

오늘날 자기 신앙에 대해서 확신하는 이들이 많다.

자기가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믿으며,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대단한 진리이며,

남들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확신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조심해야 한다. 그러한 확신은 주님을 아프게 할 수도 있다.

그러한 확신은 엎드림을 가져오지 않는다.

 

 

▲주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

다윗이 잘 나가고 복을 받게 되자 마음이 높아져서 범죄했다.

그가 지적을 받고 터지고 울면서 그는 고백했다.

‘오.. 주님.. 주님을 얻는 것은 낮고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인데..

제가 그것을 잃어버렸군요..’

 

누구나 마찬가지다. 낮고 상한 마음, 갈망을 잃어버리면

주님은 그에게서 떠나신다.

그러나 낮음과 절망과 상함과 엎드림 가운데 머물러 있으면

주님은 그에게로 찾아오신다.

주님은 약하고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기 때문이다.

 

 

▲모세의 능력의 원천

모세가 그의 능력으로 사역을 했는가. 그의 위대함으로 역사를 했는가.

‘나는 할 수 있다.. 위대한 비전..’ 그러고 있을 때 그는 정말 무능했다.

광야에서 갈 데까지 가고 절망할 데로 절망하고

주님 앞에 엎드러져 있을 때.. 주님이 그에게 임하셨다.

 

모세가 쓴 시편에 ‘사람의 수명이 70이고 강건하면 80’이라는 고백이 있다.

그런데 80이 되었을 때 주님이 오셨다.

모세가 묏자리 알아보고 있는 데 주님이 임하셨다.

 

그래서 모세가 말했다.

‘주님.. 저 이제 다 끝났는데요. 오시려면 진작 오시지..

저 이빨도 다 빠졌어요. 틀니도 해야 해요..’  

 

주님이 말씀하셨다.

‘그래서 내가 왔다. 네가 끝났으니 이제 내가 너를 사용해야겠다.’

 

모세가 이를 악물고 방방거리고 있을 때 주님은 임하시지 않았고

그가 지치고 피곤하고 빌빌거리고 있을 때 주님은 임하셨다.

이 원리는 성경 어디에나 동등하다.

 

▲사울 왕 같은 신자가 교회에 많다.

사울이 초대 이스라엘 왕으로 선택된 것도

‘자기를 스스로 작게 여길 때’였다. ---

그 자리를 떠나서 그가 스스로 높였을 때, 하나님은 그를 떠나셨다.  ___

높은 마음을 가진 자는 버림을 받으며 낮은 곳에 있을 때 주님은 임하신다.

그런데 사울 왕 같은 신자들이 의외로 많다.

 

지금 여러분들이 자신을 괜찮은 사람으로 여긴다면

주님은 여러분들에게 임하지 않으실 것이다.

오늘 자신이 주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자만한다면

당신은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기 어려울 것이다.

당신의 말과 글에서는 악한 냄새가 나게 될 것이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사람들의 판단과 생각은 주님을 아프시게 한다.

그러한 마음과 생각과 글이 주님을 아프게 찌른다.

 

주님은 불신자로 인하여 아프신 것이 아니다.

주님을 믿는 이들, 그 중에서도 자신이 잘 믿으며

자기가 옳고 신앙이 좋다고 믿는 이들로 인하여 깊은 고통을 당하신다.

 

주의 이름으로 함부로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며

자신을 의롭다고 믿는 이들이 주님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 

 

 

▲낮아짐을 고백하자

당신이 주님이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면,

그리고 그것을 고백한다면.. 주님은 임하실 것이다.

당신의 마음이 상하고 괴롭다면, 주님은 당신에게 가까이 다가오실 것이다...

 

 

 

◑2. 울면서 사역한다.

 

▲눈물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한없이 낮아져 오직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듯이 시130:6

하인이 주인의 손을 기다리듯이 엎드러져 있을 때 주님은 오신다. 시123:2 

 

제발 나를 떠나지 말라고..

나는 주님 없이는 한 순간도 살 수 없다고 눈물로 고백하면 주님이 임하신다.

 

주님은 상한 마음에 가까이 오신다. 주님은 눈물이 많으신 분이다.

주님은 눈물 앞에서 결코 외면하시는 분이 아니다.

 

 

▲나의 무기

나는 주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많이 받았다.

그것은 내가 쓰레기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나는 성질도 더러웠고 인내심도 없었다. 친구도 없고, 재능도 없고,

환경도 나빴고, 건강도 나빴고, 학벌도 없고, 돈도 없고,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갈 데도 없었고 오라는 데도 없었다.

좋아해 주는 사람도 불쌍하게 여겨주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어디에서나 왕따였다.

 

 

할 줄 아는 게 있다면 주님께 엎드리는 것이었다.

나는 주님 앞에 엎드려서 울었다. 많은 밤들을 울고 또 울었다.

‘주님.. 저에게 임해주세요!’ 하고 울었다.

그러자 주님이 내게 은총을 베푸셨다.

 

그것은 간단한 원리다. 주님은 우는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

그리고 쓰레기 가운데 임하신다. 나는 쓰레기인데 게다가 울고 있으니

불쌍하게 보시고 주님이 임하셔서 긍휼을 베풀어주셨다.

엎드려서 아파하고 주님 앞에서 우는 것은

지금도 내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무기다.

 

 

▲사역은 피눈물을 흘릴 때... 된다.

나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순간들을 많이 겪었다.

수 천 갈래 조각 조각 찢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많이 있었다.

몸이나 마음이 아플 때는 기도하고 우는 것 외에는 아무 대책이 없다.

 

사람들이 속을 썩일 때 나는 고통의 마음을 부여잡고 아파하고 씨름할 때가 많다.

그런데 눈물의 시간을 보낸 후에

나는 그들이 대부분 회복되고 좋아지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사역이란 곧 피눈물을 흘리는 것이며

고통을 통해서 이루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통의 분량만큼 역사는 일어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도들은 사역자의 피눈물을 먹고 자란다.

사역자가 그것이 싫다면 사역을 하지 말아야 한다.

죽는 것이 싫고 고통당하는 것이 싫다면 사역을 해서는 안 된다.

고통과 찢김(십자가)을 즐거워해야만.. 사람들이 자라는 것을 볼 수 있다.

 

고통과 피눈물은 사역의 원리이다. 주님의 사역이 그러했고

모세나 바울도 그러했다.

모세나 바울이 위대한 능력으로 손쉽게 사역했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들은 심히 아파하며 눈물로 살았다.

 

모세는 내가 저들을 낳았느냐고 항변하기도 했고

바울도 인내와 눈물로 사역했다고 고백했다.

주님의 고독과 버림받음, 찢기심 - 그것 자체가 사역이었다.

 

피흘림과 고통은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사역의 원리이다.

그것이 없으면 열매가 없다.

고통과 찢김에 대한 준비가 없이 사역자나 사모가 되려한다면

그는 큰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이 범죄했을 때 이 원리가 형성되었다.

주님은 아담에게 이제부터는 <땀을 흘려야 열매를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하와에게 <고통을 겪지 않고는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피와 땀과 고통을 통해서만 - 영혼이 자라고 깨어난다는 의미이다.

 

▲나는 사람들의 찬사에 크게 치심하지 않는다.

나에게 대하여 감사와 존경.. 그러한 글이 있는 것을 보면

나는 속으로 ‘웃긴다. 저들은 나를 모른다. 나는 쓰레기다. 나는 썩은 인간이다.’

하고 되뇐다.

그런데 그렇게 고백할 때 주님이 기뻐하시며 속에서 기쁨이 일어나는 것을 느낀다.

내가 사람들의 찬사를 즐거운 마음으로 받고 있으면

나는 곧 바로 영혼의 어두운 구덩이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오직 낮은 마음은 천국과 통한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주님의 임재와 은총이 임하게 되어 있다.

 

▲이렇게 고백해 보시라.

주님.. 저는 악하고 더럽고 못됐습니다.

저는 강퍅하고 교만하고 이기적입니다.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하지만 주님.. 저는 당신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제발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그렇게 할 때 주님은 내게 임하신다.

 

바리새인이 ‘주님.. 저는 저 세리 같은 놈과는 종자가 다릅니다.

저는 기도도 많이 합니다. 금식도 하고 예배도 드리고...’

그러나 주님은 그의 기도를 받지 않으셨다.

 

세리가 감히 하늘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주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는 죄인입니다..’ 하고 고백할 때

그는 의롭게 여기심을 받았다.

 

▲가장 무서운 죄는 자기 의다.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살인보다 간음보다 도둑질보다 온갖 종류의 악보다 더 나쁘다.

그에게는 주님이 임하실 수 없다.

자기 의가 있는 곳에는 주님의 의도, 은혜도, 아무 것도 임하지 않는다.

 

자기 의가 있는 사람이 함부로 가르치려 한다. 남을 평가하고 판단한다.

정죄한다. 자기를 대접해 주지 않으면 분노한다.

 

부디 잘난 척 하지 마시라. 남을 가르치려 하지 마시라.

남이 알아주기를 기대하지 마시라. 그것은 정말 위험한 것이다.

 

사람이 우리를 대적하면 갈 데가 있지만

주님이 우리를 대적하시면 우리는 이 우주 안에서 갈 데가 없다.

 

▲사람들의 평가에 신경 쓰지 마시라

글을 쓰고 조회 수는 얼마나 되는지, 덧글을 누가 어떻게 달아주었는지..

그런 것을 신경 쓰지 마시라. 그러한 것은 세상적인 것이고 자기중심적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글이나 표현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지,

사람들이 주님께 나아가는 데에 도움이 되는지? 하는 것이다.

 

▲외로울 때도

외로워도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과 위로를 구하지 말고

주님 앞에서 우는 것이 좋다.

‘주님. 외로워요..’ 그렇게 말하면서 우시라.

 

그러면 주님이 그 공간에 임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내다. 내가 여기 있다.’ 그렇게 주님은 오신다.

 

아직 외로움과 고통의 분량이 부족하면, 더 있어야 주님이 오실 것이다.

그러나 분량이 차면 주님은 반드시 오신다.

 

▲힘들 때도

힘들 때 엎드리시라. 주님은 반드시 도우신다.

나중에 도우시는 것이 아니라, 엎드린 그 자리에 오셔서 등을 쓰다듬어 주신다.

엎드리는 것처럼 좋은 것이 없다. 주님은 약자에게 한없이 약하시다.

 

적극적인 사고방식.. 그런 식으로는 천국에 이를 수 없다.

세상 철학을 따라가다 보면 잠시는 기분이 좋은 것 같지만

어느 사이에 영혼은 완악해지고 갈망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것은 속는 것이다. 

 

▲남이 꼴보기 싫어질 때도

자꾸 미워지는 것, 자꾸 남이 꼴 보기 싫어지는 것..

자꾸 남의 단점이 보이는 것.. 걱정 근심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

자꾸 짜증이 생기는 것.. 그러한 증상들은

그의 영혼이 지금 지옥 근처에서 어정거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러한 상태에 있는 이들이 어서 속히 주님 앞에 엎드리기를 바란다.

그리고 마음이 높아진 것을 주님께 고백하고 회개하기를 바란다.

 

충분히 엎드리고 회개할 때 주님은 임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는 마음이 바뀌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세상은 아름답고, 사람들은 아주 사랑스럽게 보이며

살아있는 이 순간순간이 너무나 즐겁고 기쁘고 감사하고

영혼 속에서 감격과 희열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그러한 감동이 무럭무럭 일어나는 것을 그는 경험하게 될 것이다.

 

당신이 지금 그러한 상태에 있다면..

축하드린다. 당신은 지금 천국의 문턱에 가까이 있는 것이다.

 

▲낮은 마음, 상한 마음, 주님을 갈망하는 마음을 늘 유지한다면

당신은 날마다, 언제 어디서나

그러한 천국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환경이 괴롭히고, 사람들이 괴롭혀도

당신은 그 천국의 기쁨을 잃지 않을 것이다.

 

부디 낮은 마음으로 갈망하고 또 사모하며

우리 영혼을 언제나 주님의 임재로 채우자.

그 천국을 유지하자.

 

주님은 너무나 아름다우시며

사랑으로 가득하신 분이시다.

주님의 영광을 찬양드리자. 할렐루야.

 

 

◑3. 남을 쉽게 정죄하지 않는다.

 

▲범죄보다 정죄가 더 심각하다.

 

음란죄가 있다. 그것은 악한 것이다. 그러나 음란죄를 짓는 사람들보다

그것을 심판하고 정죄하는 이들이 더 심판을 받는다.

 

살인죄가 있다. 그것은 악한 죄이다. 그러나 그 죄를 짓는 사람보다

그것을 심판하고 정죄하는 이들이 더 심판을 받는다.

 

죄는 악한 것이지만 죄인은 미워해서는 안 된다.

우리도 동일한 죄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며

죄지은 이들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 그래야 우리도 불쌍히 여기심을 받는다.

 

▲동일한 죄성罪性이 다른 죄인을 정죄한다.

다른 사람이 어떤 죄를 지었을 때 분노하고 정죄하는 사람은

자기의 안에도 같은 죄의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더욱 분노한다.

 

온유한 자는 혈기 있는 자를 정죄하지 않으며

순결한 자는 음란한 자를 정죄하지 않는다.

 

마음이 넉넉한 자는 인색한 이를 미워하지 않는다.

인색한 자가 인색한 자를 비판한다.

같은 속성만이 서로 미워할 수 있다.

 

강아지가 다른 강아지들의 짖는 소리를 들으면 같이 짖듯이

남을 정죄하는 것은 자기 속의 동일한 죄성이 있기 때문이다.

 

▲가장 무서운 죄는 교만하게 남을 정죄하는 죄

그러므로 남의 잘못에 대하여 자신의 모습은 돌아보지도 않고

함부로 심판해서는 안 된다.

남의 잘못을 통하여 자기반성의 기회로 삼는 것이 더 좋다.

심판은 주님의 권리이며 주님께 속한 것이므로, 심판하는 것은 무서운 죄다.

 

음란죄보다, 살인죄보다, 강도짓보다, 도둑질보다 더 무서운 죄는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남을 비판하고 심판하고 정죄하는 것이다.

 

높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만이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하며 가르치려고 한다.

잘 알지 못하면서 가르치려고 한다.

그러한 이들은 용서받기 어렵다.

높은 마음, 교만한 자세는 용서받지 못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기 때문이다.

 

성령을 거스르고 훼방하는 것도 교만한 마음에서 오는 것이다.

마귀의 타락도 교만에서 온 것이다. 우주 최초의 죄는 바로 교만이다.

그것은 천국 문을 닫으며 지옥 문을 연다.

 

계속적으로 교만한 상태에 있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낮아지면 그는 다시 회복될 수 있다.

낮은 마음을 품기만 하면 주님은 곧 다시 그를 용서해주시며

그에게 임하여 주신다. 그것은 영적 원리이다.

주님은 교만한 이들을 미워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오고 싶어도 오실 수 없으시다.

 

그러나 낮아지고 엎드리고 나면 죄인들이 불쌍해 보이며 정죄하지 않게 된다.

모든 이들을 사랑하고 싶으며, 아름답게 보이고,

남을 위해서 죽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게 된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주님이 오셨기 때문에 그 결과로 그러한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다.

 

<정 원 목사님의 글 발췌, 축약, 편집

 

[주제별 분류] 크리스천 인격 http://blog.daum.net/bible3/12951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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