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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6 성도의 임종 준비

LNCK 2007. 8. 5. 12:13
 

◈성도의 임종 준비                                             고후5:1


인터넷에 게시된 故 배형규 목사님의 2006년 11월 동영상 설교를 녹취했습니다.

설교에서 보듯이, 젊은 나이지만 늘 임종을 준비하는 신앙으로 사셨습니다.

이렇게 잘 준비된 분을, 하나님은 그 분의 계획을 이루는 도구로 먼저 부르셨습니다...

 

*동영상 제목 : '고 배형규 목사 작년 11월 오늘을 준비하듯 설교 영상'   출처   

 


◑임종을 준비하며 사는 성도


▲‘가고 싶은 나라’끼리 서로 모이기

어떤 수련회에서 참석자들이, ‘자기가 가고 싶은 나라 이름’을 종이쪽지에 쓰고는,

그 나라 이름이 똑같은 사람들끼리 헤쳐 모이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그룹에는 딱 2사람만 같이 모이게 되었습니다.

아프간 칸다하르에서 사역하는 한ㅅㅎ 선교사님과

일본에서 사역하시는 천 선교사님, 딱 두 분 뿐이었습니다.

그들 두 분이 가고 싶은 나라는 - 다름 아닌 천국- 이었습니다.


남들은 미국, 이스라엘... 이렇게 썼는데,

그분들이 가고 싶은 나라는 ‘천국’이었습니다.

그분들은, 이 땅에 살지만, 영원을 사모하며 사는 삶을 잘 보여주셨습니다.


▲오래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 ‘뜻에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빌1:20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죽음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어떠합니까?

우리의 죽음의 때는... 물론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때에 달린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죽고 사는 문제에 관심을 두기 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에, 더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가시더라도

-기쁘게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며,

죽음에 대한 열의가 뜨겁게 타 올라야 하며-

늘 그것을 명상해야 합니다. (이렇게 잘 준비되신 분을 먼저 불러 가셨습니다.)


▲영결입니까, 소천입니까?

우리의 장례 문화를 잠시 생각해 봅시다.

개선되어야 할 장례문화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나는, 내 장례가 어떻게 치러지기 원하는지 (옆 사람과 잠시) 나눠보세요.


기독교인의 장례는, ‘영결식’이란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영결’永訣이란 말뜻은, 영영 헤어짐, 영영 이별이란 뜻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소천’召天이란 말을 쓰는데, 하나님(하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의 장례식은 다른 말로,

‘천국 입성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축구 같은 운동 경기를 예로 들면) 운동장에서 열심히 뛰던 선수가

감독이 교체해 주면 운동장을 빠져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이 부르시면, 성도는 세상을 빠져나와 천국에 입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장례식은 ‘천국 입성 예배’로 기쁘게 치러져야 합니다.


▲당신의 비문은 무엇입니까?

‘비문’碑文중에서,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참 말 많던 내 아내, 드디어 입을 다물다.

-사랑하는 내 아내 여기에 잠들다. 제발 내 아내를 깨우지 말아다오!


여러분은, 여러분의 비문에 어떤 글귀가 적혔으면 좋겠습니까?

그것은 아마 우리 각자의 ‘사명’이 적히게 될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내가 평생을 살다가, 내가 이 그라운드(운동장)를 떠날 때,
내 삶을 마감할 때, 내 비문에는,

‘사람들이 나를 이런 사람으로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하는 것이

우리 각자의 비문의 내용이 되겠죠.


저(배형규 목사)는 제 비문에, 이런 글이 적혔으면 좋겠습니다.

‘청년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우는데 인생을 걸었던 사람’

- 이것이 제 꿈이고, 제 비전입니다.


‘청년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워내는 것’

저는 이것 때문에 제가 사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모든 인생을 걸고,

‘이것은 내 사명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것 때문에 오늘 우리에게 생명이 연장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유는 - 사명 때문입니다.

보초 근무자가 자기 보초서는 사명을 잊어버리고 만약 딴 짓을 하고 있다면,

빨리 교대자가 와서 교대해서 내무반(천국처럼 들어가서 쉰다는 뜻)에

들어가는 것이 훨씬 더 낫겠죠.


그러나 보초 근무자는 보초를 서는 것이 그의 사명인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

그것 때문에 우리는 살아있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초소에 나가있는 (보)초병입니다.

우리가 내부반에 들어가는 것은, 나의 결정이 아니라, 상부의 결정입니다.

나는 초병의 역할을 최선을 다해 감당해야 하며,

우리의 마음은, 돌아갈 안식처가 있음을 인해

힘을 얻어야 합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심을 배격하십시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고후5:1



▲크리스천은 죽음 앞에 벌벌 떨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는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원하기는 고사하고, 죽음에 대한 공포심에 사로잡혀

죽음이란 말만 듣고서도,

그것이 지극히 비참하고 불길한 그 무엇인 듯,

벌벌 떠는 것은 이상한 현상입니다.


우리가 죽어 없어진다는 말을 들을 때에

우리의 자연적인 감각기관이 공포로 흥분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이 더 큰 위안으로

그런 공포심을 위안하고 억제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런 신앙심이 마음속에 없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것을 갈망하는 것도 물론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짐승이나 나무나 돌까지... 모든 피조물들까지도

자기의 허무함을 절실히 느끼고, 하나님의 날(구속될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롬8:23


그런데 (동물보다 월등한 인간인) 우리는 이성의 빛을 받았고,

거기에 보태서 하나님의 성령의 조명을 받고 있으면서도,

우리의 생각이 땅에서 썩어가는 것을 초월하지 못할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학교(제자 훈련)에 들어가 있으면서도

자기의 죽는 날과 종말의 부활을 기쁘게 기다리지 않는다면,

그는 믿음의 진보가 없는 사람이라고 결론을 내려도 좋을 것입니다.


진지하게 생각해 봅시다.

정말 주님이 우리를 영원히 밝고 아름다운 곳으로 인도하신다고 할 때,

우리가 슬퍼하고 당황하고만 있다면, 이것은 이치에 맞는 일입니까?


죽음에는 두 가지 양면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죽음 자체만을 놓고 생각할 때, 두려움이 있습니다.

아무리 믿음 좋은 사람도, 죽음 앞에 섰을 때 두려움이 있습니다.

또한 본인이나 주변에 가까운 사람이 죽음을 맞이할 때

슬퍼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들은 믿음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모든 사람이 겪는 본능적인 감정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쪽 측면도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이뤄왔던 구원이 완성되는 것,

즉, 영생에 대한 소망이 또한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양면성이 있지만,

크리스천은 어느 쪽이 어느 쪽을 이깁니까?

-영생의 소망이 이 땅의 슬픔과 두려움을 이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크리스천이라고 하면서도

죽음의 두려움과 이별의 슬픔이, 구원의 완성과 영생의 소망을 도리어 압도한다면,

과연 크리스천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남의 죽음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에게 언젠가 죽음이 찾아옵니다.

어떤 사람은 조금 일찍, 어떤 사람은 조금 늦게 찾아오기도 하지만

결국은 모든 사람이 경험해야 할 것이, 바로 이 죽음의 문제입니다.        왕상2:2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죽음의 문제를 평가할 때, 지극히 신중해야 합니다.

‘천국 들어가는데, 뭐 그리 슬퍼하느냐?’는 식으로 쉽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적어도 내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내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죽음에 대한 준비가 항상 되어 있어야 합니다.

갑자기 임종의 순간이 찾아올 때, 당황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너무 무조건 생명을 연장하려고 하지는 마십시오.

물론 살아있는 동안에 자기 생명을 연장하는 노력을 당연히 다 해야 하지만

그러나 어느 시점에 이르면 어떻게 손 쓸 수 없는 때가 이릅니다.

의사도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시점이 있으며,

자기 스스로도 ‘하나님이 이제 나를 불러 가시는구나!’ 라고 느껴지는 시점이 있습니다.


그 때는 정말 내가 이 땅에서 인위적인 방법으로

조금이라도 생명을 더 연장시키기 위해 자기 모든 재산을 다 쏟아 붓기 보다는,

(거의 식물인간으로 의식불명인데, 병원에서 생명만 연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과거 인생을 돌아보고, 자기 인생을 정리하며,

나의 삶을 마무리하고,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작별의 인사를 건네며,

자기는 천국에 대한 소망과 확신을 가지고 조용히 천국(죽음)을 기다리며,

천국 입성할 마음자세를 가지는 것이 - 크리스천의 올바른 임종 태도입니다.


▲성도는, 때가 되면, 영광스럽게 임종을 맞이해야 합니다.

정말 우리 인생이 6개월 더 살고, 1년을 더 산다 한들,

영원한 나라에 비교할 때, 그것이 무슨 큰 의미가 있겠습니까?


물론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우리는 그런 입장을 취해서는 안 되지만

(‘빨리 천국에 가시오!’라는 말)

적어도 내가 살아가는 동안 갑자기 내가 사고를 당한 다든지,

 

아니면 노환으로 의사가 ‘이제 거의 다 되었다’라고 말할 때,

내 생명을 조금이라도 연장하려고 아등바등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을 것이 아니라,

‘내가 정말 인생의 마무리를 멋있게 지으리라!’라는 각오로


천국 입성하는 성도의 자세로 마음이 편안하며,

남은 자손들이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영광스런 임종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후략)


<故 배형규 목사님의 2006년 11월 어느 날의 설교 중 부분 녹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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